• 최종편집 2024-05-10(금)
 
이정희목사.jpg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I. 서언(序言)

 


세계 어디를 가든지 특별한 기물이나 어떤 일들을 불길한 일의 징크스(jynx)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숫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는 4(四)를 가장 금기시하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금기와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반면 7은 행운의 숫자로 여기고 즐겨 사용한다. 이런 숫자에 대한 호불호와 여기에 따른 생각과 행위는 미신적이기도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배격해야 할 비 신앙적인 행태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기피하는 4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다음 호에서는 주로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일의 금요일과 행운의 숫자 7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4(四)를 금기시하는 이유

 

 4의 금기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도 너무 황당한 일이다. 그 이유는 4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고 해서 생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한국 뿐 만이 아니라 한자문화권 지역인 중국과 홍콩, 일본, 베트남 등도 마찬가지다. 사회와 문화적이 차이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를 나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경우: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주 옛날부터 4를 무조건 기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로부터 사신(四神)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 등을 중요시 한 것을 볼 때 무조건 4를 기피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볼 때 4의 금기 유래는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잘못된 기피현상은 근대에 와서 생과 사를 가름하는 병원들이 고층 건물이 되면서 환자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을 사(死)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발음이 같은 4를 회피하게 되었고, 이에 4층과 엘리베이터도 F층으로 표시하거나 아예 4층을 두지 않고 5층으로 표기하는 웃지 못 할 현상이 만연되게 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병원 외에도 많은 경우들에서 볼 수 있다. 사례를 들면, 1990년대 이전에 지어진 공동주택과 아파트 등에도 4동, 4층, 4호, 4단지가 없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군대의 편제에서도 4군, 4군단, 4사단, 4여단, 4군수지원 사령부, 4비행단, 4전대는 거의 없다. 해병대에서도 4를 쓰지 않는데, 이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결기의 뜻에서 4를 건너뛰고 바로 5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군 간호사관학교에도 환자와 관계되기 때문에 제4기가 없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등에서 버스를 반별로 나눌 때도 4호차는 F호차로 표시하며, 장례식장도 4호를 쓰면 고인을 두 번 죽이는 느낌이라 해서 4호실을 두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시내버스나 기차 등의 교통수단에도 4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고, 인천국제공항에는 4번과 44번, 244번 게이트가 없다. 기업 중에는 삼성그룹 계열회사들이 4자 금기가 많은 편이다. 회사의 여러 사업장에는 4층이 없는 곳이 많으며, 신라호텔 등에도 4층이 없다. 이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이런 면에 민감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2. 한자 문화권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 먼저 일본의 경우는 우리 한국 많 큼은 아니지만, 아파트나 차량번호 등에서 4를 기피하는 경향들이 있다. 이 외에 일본에서는 7이 행운의 숫자가 아니라 금기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7의 발음이 죽음의 땅을 의미하는 시치(死地)와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도 조선인민군에는 제4여단이 없는 것을 볼 때 우리 남한의 경우처럼 4를 기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4에 대한 금기가 아주 심한 편이다. 중국의 건물에는 4층, 13층, 14층, 24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중국의 소유로 되어있는 홍콩의 경우도 지상 14층, 24층, 44층이 없는데, 이는 14, 24의 홍콩지역의 광동어 발음이 자살 등과 비슷하기 때문이며, 영국 등의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13층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III. 결 어

 

서언에서 언급한 대로 어떤 사물과 일들을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징크스(jynx)나 지금까지 논한 대로의 4(四)와 13일의 금요일을 금기어로, 7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현대 문명에서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밝을수록 그림자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듯이 고도로 발달된 이 사회 문화 속에서도 사람의 심리는 아직도 이러한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양지속의 음지를 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다음 호에서는 13일의 금요일과 행운의 숫자 7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태그

전체댓글 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6: 숫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1/ 기피하는 4(四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