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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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고신교회)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1)(창23: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최고로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은 궁극적으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여백 속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어느 날 남편이 이사를 가자고 합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모험을 할 만한 나이도 아닙니다. 자신의 나이가 65세, 남편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해야 하는 것 하나는 “어떻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하면 오늘날도 그렇게 부름을 받아야 성경적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충돌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질문에 대한 힌트와 숙제를 동시에 드려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신앙을 가르친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브라함 때에 노아가 살고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아들)에 대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족장들의 사명은 생존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아들에 아들을 낳으면서 생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로 중요한 사람이 아내입니다. 아들에 대한 사명이 과연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졌을까요? 아브라함이 대표이기에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이지 이 사명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언약입니다. 우리는 “씨 언약”이라고 하니 아브라함(남편)이 사라(아내)보다 더 중요할 것처럼 보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께서는 씨(남편)로 오셨습니까? 자궁(아내)으로 오셨습니까?

 

(마1: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아브라함의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3:15의 복음을 갱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약속의 땅에 큰 기근이 있어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믿음의 약속을 합니다. “혹시 생명에 위협이 생기면 나는 당신을 오라버니라고 하고, 당신은 나를 누이라고 합시다.”

 

이런 결단과 약속은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죽는 것보다 힘든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씨 언약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희생과 아픔과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소원하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관점이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을 낳는 것, 아들의 아들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남편 아브라함의 여정에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종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아내의 자리도 포기했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살았던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성경입니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라에게 유일한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주셔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들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사라에게 최고의 소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성취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았던 사라에게 손자의 손자는커녕 손자 정도는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자가 아니라면 며느리라도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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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1)(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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