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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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환 장로(가음정교회)

들어가며

 

헨리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호주의 첫 선교사이자 순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선교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에 왔으나 선교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꿈은 꺾였지만 대신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강하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이 뒤를 이어 많은 선교사가 부산과 경남지역을 맡아 선교의 열매를 얻었다. 특히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역 중 알려진 것은 서울부터 부산에 이르기까지의 20일간의 선교 정탐 여행인데 그 마지막 주간을 경남지역에서 보냈다는 점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데이비스의 마지막 일주일의 경남지역의 여정과 특히 창원의 웅천에서 있었던 놀라운 일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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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선교의 동기와 준비

 

데이비스가 설교 열정에 한창 불타 있을 때 중국에서 사역하던 성공회 선교부 총무 월프목사가 1884년 11월 부산을 방문하였는데, 이 방문을 통해 그는 선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보고 호주에 선교사를 요청하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내 부산지역 선교를 간청하였다. 이 편지가 컬필드교회의 메카트니목사가 발행하는 월간 선교지 《국내와 해외 선교사》에 게재되었는데 데이비스는 이 편지를 읽은 후 감동을 받아 부산 선교를 자원하게 된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속한 성공회의 선교부는 안수받은 목사만이 선교사로 파송될 수 있다고 답변하여 데이비스가 당당 한국으로 가기 어렵게 되었다.

마침 데이비스는 미국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회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선교회를 통해 한국에 선교사로 갈 수 있는지 알아보게 되었다. 그는 친구인 유잉목사와 상의하여 장로교회의 목사안수를 받아 빅토리아장로교회에 선교사 파송 청원을 하도록 하였으며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가 데이비스의 후원을 보증하였으며 이를 조건으로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1888년 8월에 데이비스는 영국 에딘버러에 가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89년 5월에 돌아와 목사고시에 합격하였고 노회는 그해 8월 5일 그를 안수하였다. 그리고 8월 17일 멜번의 스코츠교회(Scots‘ Church)에서 성도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나인 마리아를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데이비스는 그의 누나 마리아와 함께 8월 21일에 멜번을 떠나 28일 시드니에서 배편으로 우리나라를 향했으며 1889년 10월 4일에 제물포(지금 인천) 항구에 도착하였다.

 

선교탐방과 순교

 

그로부터 다섯 달 동안 데이비스는 가정교사를 두고 매일 오전에 한국말을 공부하였으며, 오후와 주말에는 서 전도사(서상륜 또는 서경조일 것으로 보인다)의 안내로 원두우(Underwood) 목사, 의사 헤론(Heron), 감리교 선교사 올린거(Ohlinger) 목사와 함께 말을 이용하거나 혹은 도보로 서울 인근 지역 및 수원까지 내려가 만나는 조선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한국말은 놀라운 정도로 빨리 늘어갔다.

그러자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새로운 선교지를 물색하기 위해 부산까지 탐방하기로 하였다. 그는 1890년 3월 14일 그의 한국어 선생인 ㅇ 생원(生員)과 함께 자기의 짐과 팔려는 책자 및 전도지를 말에 싣고 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 여정에 거점 도시에 들러 복음을 전할 계획도 세웠는데 이는 그가 호주에 있을 때부터 꿈꾸던 일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도 각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는 것을 꿈꾸었는데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무리한 여정으로 그의 건강은 점점 약해졌고 마침내 4월 4일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다음날인 4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데이비스 고난주간에 경남을 걷다


위에서 설명한 데이비스의 선교탐방 여정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지만 데이비스의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데이비스의 마지막 1주간은 1890년 3월 30일부터 순교한 4월 5일까지의 기간인데 4월 6일이 부활절이었으므로 이 주간은 고난주간이었다. 즉, 데이비스는 이 고난주간을 경남지역에서 선교탐방을 하였고 마지막 부산에서 순교한 것이다. 데이비스의 일정을 살펴보면 데이비스가 부산을 목적지로 정하고 선교탐방을 떠난 것이 1890년 3월 14일, 수원은 3월 15일, 공주는 3월 20일, 그리고 남원은 3월 26일, 구례는 3월 28일 각 통과하였다. 그리고 경남 하동으로 들어온 것은 3월 30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31일에 사천 완사에 도착하였는데 힘든 여정을 거친 데이비스는 그 지방관리들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데이비스는 정탐 여행을 하면서 마가복음서 등의 책자를 판매하였으며 서툰 한국어로 복음 전하기를 쉬지 않았다. 도보여행을 시작한 첫 두 주일 동안에 그는 잘 지냈지만 2주가 넘어서자 체력의 한계를 넘었다. 이미 경남 하동으로 들어왔을 때 몸은 쇠약해 졌을 것이나 그래도 그는 굽히지 않고 탐방 여행을 계속하여 4월 1일 진주의 문산을 통과하였지만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매일 쓰던 일기를 문산에서 멈추었다. 아마도 이때쯤 폐렴이 중증에 들어갔을 것이다. 4월 2일경 지친 몸을 이끌고 마산포에 도착하여 1박을 한 후 4월 3일 마산포에서 배편을 이용하여 웅천 사도포에 하선하여 웅천성에서 가까운 소사마을에 들어갔다. 안타까운 것은 하동에서 시작하여 마산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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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집의 대문기둥에 소사주막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으나 데이비스가 묵었던 본래의 소사주막은 건물이 없어지고 이 건물에 소사주막의 간판을 붙여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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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천에서 데이비스를 통하여 일어난 이적


소사마을에 들어간 데이비스 선교사는 소사주막에 여장을 푼 뒤 일시 기력을 회복하여 마을로 들어가 전도를 하던 중 천연두에 걸린 소년 문석윤을 만나게 된다. 문석윤을 본 데이비스는 그날이 부활절을 앞둔 금요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임을 기억하고 천연두에 걸린 소년 문석윤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쇠약할 대로 쇠약한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데이비스는 문석윤을 위하여 자신의 남은 모든 기력을 쏟아 기도하였고 마침내 주님께서는 데이비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서 문석윤은 천연두에서 놓임을 받게 되는 이적이 나타났다. 아마 이를 알게 된 소사마을은 놀라움과 큰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데이비스는 그날 소사주막에서 1박을 한 후 4월 4일 소사마을에서 머슴을 하던 17세 소년 장영도를 짐꾼으로 대동하고 다시 웅천 사도포에서 배편으로 부산 하단으로 향했다.

 

 데이비스 최후의 모습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쓰러진 그는 앞서 경상도 순회 전도 여행을 떠나 부산에 머물고 있던 게일(J. S. Gale)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이날 엄청난 비를 맞으며 게일의 숙소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가지고 온 편지의 내용은 간단한 한 줄이었다. “게일 목사님, 빨리 와주시오. J. H. 데이비스 올림.” 게일은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다다른 곳은 민가에서 1.6km 떨어져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집이었다. 아마 하단 포구에서 떨어진 지금의 괴정 인근으로 보인다. 방문을 여니 데이비스가 누더기를 덮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고 짐꾼 장영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움에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 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위해 수고했던 장영도의 품삯을 걱정하므로 게일이 이를 해결해 주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뚫고 데이비스는 게일에게 매달려 가까스로 초량에 있던 게일의 숙소에 도착하여 게일이 그를 간이침대에 눕히고 빗물로 범벅이 된 젖은 옷을 벗기고 빗물을 닦았다. 데이비스의 얼굴은 봄볕에 그을려 있었고 몹시 지쳐 보였으나 일시 생기가 돌고 얼굴에 안도의 빛을 띠었다. 게일이 먹을 것을 만들어 오자 그는 먹어 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제대로 먹지 못하였고 곧 상태가 어려워져다. 게일은 데이비스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일본인 의사를 불러왔다.

일본인 의사는 데이비스를 천연두와 폐렴으로 판정을 하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고 게일과 그의 어학 선생 이창직이 밤을 새우며 그를 간호했다. 데이비스의 천연두는 소사에서 문석윤을 기도로 치료하는 과정에서 옮아 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마산포에서 당시 대중교통인 배편으로 사도항으로 왔기 때문에 그때 천연두 증세가 있었으면 배편을 이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웅천 사도항에서 하단으로 배편으로 이동할 때에도 천연두 증세가 아주 초기라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부산에 도착해서 긴장이 풀리고 기력이 급격히 쇠하여 발병했을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스는 곧 회복될 것이라고 도리어 게일을 위로하였으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게일과 데이비스 두 사람은 “건강하든지 병 들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하며 함께 기도했으나 천연두와 함께 급성 폐렴이 악화되어 부활절 전날인 1890년 4월 5일 데이비스는 게일의 손을 잡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꼭 183일째였다. 인간적인 시작으로 볼 때는 너무도 짧은 생애였으나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가장 적절한 때였을 것이다. 멜본을 떠나기 전 청년연합회가 주관한 환송회에서 복음을 위해 생명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답사하였던 데이비스의 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 보이는 부산진 뒤 복병산에 안장하였는데 그의 장지는 후일 호주장로교의 한국선교를 위한 약속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아무도 돌보지 않아 복병산 일대가 개발되면서 지금은 데이비스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가족의 무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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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데이비스의 순교 후


그의 순교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가 한국선교에 나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빅토리아 장로교회 청년연합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가 되도록 기틀을 세워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주로 돌아간 누나 마리아를 통하여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P.W.M.U.)의 조직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 결과 1891년에는 존 맥케이(Rev. J.H. Mackay) 목사 부부를, 1894년에는 앤드류 아담슨 목사(Rev. A. Adamson) 부부를, 1902년에는 커렐 의사(Dr. H. Currell) 등을 파송하면서 이어서 수많은 호주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였고 데이비스의 조카들도 한국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동생 존 데이비스 목사의 첫째 딸 마렛은 1910년 진주의 여학교 교장을 3년간 하다가 부산으로 옮겨 일신여학교와 하퍼 기념학교를 개교한 후 일제가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폐교한 1939년까지 교장직을 맡다 호주로 귀국했다. 또 둘째 딸 진 데이비스는 의사로 1918년 진주 배돈병원으로 배치되어 의료장교로 참전한 매크라렌 원장의 공백을 메우다가 1938년 병원장을 맡아 유능한 의사로서 또 여성 인권을 위해 헌신하였다. 두 자매는 삼촌 대신 유업을 잇겠다는 뜻으로 한국식 이름에 대(代)자를 넣어 대마가례(代馬嘉禮)와 대지안(代至安)으로 지었다. 헨리 데이비스의 이름은 덕배시(德倍時)이다.

당시 데이비스의 짐꾼으로 부산에까지 따라갔던 소년 장영도는 소사에서 데이비스가 보인 이적과 그의 모습을 통하여 깊은 감동을 받아 이후 복음을 접하여 장로가 되었으며, 장영도의 딸은 데이비스 선교사의 여동생이 일신여학교에서 데리고 가서 공부시켜 나중에 그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또 그들의 후손 중에는 주기철 목사가 공부하였던 개통학교의 교사였던 김도용, 문창교회의 박경조 장로, 부산진 교회의 김종수 장로 등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는 많은 후손이 탄생했으니 모두 데이비스가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거두어진 열매가 되었다.

 

※ 지금 창원특례시 진해구 웅천면 소사마을의 곳곳에는 부산진교회의 도움으로 데이비스 선교사의 이와 같은 선교활동에 관한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자료 

 

이상규, ‘서른세 해의 삶이 찍은 굵은 점 하나’, 《크리스찬리뷰》, 2009. 10. 7.

강신욱, ‘김씨박물관’, naver.com [2023 낮은울타리]

한기총신문, ‘데이비스 선교사’(J. Henry Davis, 1857-1903), 2010. 7. 22.

박성민, ‘첫 호주인 선교사 헨리데이비스와 그의 조카들 출간’, 《경남일보》 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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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고난주간을 경남에서 보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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