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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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진정한 목회자
    요즘 신학교 입학은 재수는 필수이고 보통 삼수를 하는 것이 상례라고 알려져 있는데 양질의 우수한 목사를 양육하여 배출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시작할 때와 다 마치고 목사가 된 후의 모습의 차이로 많은 성도들의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여 분쟁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때만 하더라도 목회자의 사례가 형편없었다. 가정을 가진 목회자는 자녀교육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환경이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하며 수많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충분히 되고 남았다. 그 당시의 목회자들은 오늘날처럼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은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잘 가르쳤고 경건생활을 제대로 하도록 잘 양육한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성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존경을 받는 분이지만 작금에는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목회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 설문 조사에서 청년들이 꼽는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였다. 청년 사역자들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여’ ‘교회의 비상식적인 모습’ 이었다. 최근에 어느 교회의 목사가 개척한 교회를 눈물로 부흥시켰지만 결국 자만하여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주역이 되어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분노케 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목회보다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회를 진행했기 때문에 교회는 빛을 잃고 성도는 실망과 혼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또한 진정한 목회자가 되지 못한 목사를 소수의 추종자들이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성도를 험담하고 욕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따라서 그런 목사가 진정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을 수 없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여 희망이 없다할지라도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는 진정한 목회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분열이 있을 수 없고 비로소 모든 것이 바로 선다고 확실히 믿는다. 의지할 곳이 없는 혼돈한 지금은 수백만 성도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전 국민의 귀감이 될 존경 받을 만한 진정한 목회자 한 사람이 절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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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03-08
  • 경남기총 제1차 미스바성회 6회·7회 기도회 후 성료
    경남기총, 6회 미스바성회 개회 사단법인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경은 목사, 이하 경남기총)가 지난 2월 24일(목) 오전 10시, 창원시 진해구 진해침례교회(강대열 목사)에서 1차 미스바성회의 여섯 번째 기도회를 가졌다. 경남기총 수석부회장 강대열 목사(진해침례교회)의 기도와 인도로 시작한 미스바성회는 명예회장 최준연 목사(창원제일성결교회)가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대하7:11-16)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최준연 목사는 “호세아 선지자의 애끓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다.”라며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재앙으로부터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시다. 죄악의 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 없고 영생을 누릴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최 목사는 “하나님 나라에는 오직 하나님의 승리만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성공을 위해 달려왔다. 그 결과 우리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라고 전했다. 또 최 목사는 “고난의 때에 믿음의 눈으로 이 재앙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으신가?”라고 반문하며 “하나님의 전능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원하신다. 결코 절망, 근심, 두려움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과 두려움에 갇혀 살고 있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대표회장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교회)의 인도로 현장에 참석한 성도들과 영상으로 함께하는 성도 합심하여 기도하고 이경은 목사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경남기총, 1차 미스바성회 성료 사단법인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경은 목사, 이하 경남기총)가 주최하는 ‘1차 미스바성회’가 지난 3월 3일(목), 제7회 기도회로 성료했다. 대표회장 이경은 목사가 시무하는 순복음진주초대교회에서 개회한 1차 미스바성회의 마지막 기도회는 사무총장 김성권 목사(새진해교회)의 기도와 인도로 시작해 직전 대표회장 박종희 목사(창원반석교회)가 ‘기도가 답입니다’(마15:24-28)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박종희 목사는 “성경에는 수 많은 믿음의 용사들이 기록 돼 있다.”라며 “하나님은 그 믿음의 용사를 자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본문 속 여인의 믿음과 그 믿음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했다. 또 박 목사는 모친께서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를 간증하고 “우연히 된 것은 없다. 모두 기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라며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사소한 역사속에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 마다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한다.”라고 권면했다. 설교 후 이경은 목사의 인도로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며 기도회를 마쳤다. 한편, 경남기총은 오는 3월 17일(목) 오전10시 창원제일성결교회를 시작으로 4월 28일(목)까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제2회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미스바성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번 2차 미스바성회는 창원제일성결교회, 창원성결교회, 마산성산교회, 진해중부교회, 서머나교회, 마산동부교회, 순복음진주초대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다.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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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단 및 연합회
    2022-03-08
  • [신재철 목사] 500원으로 시작된 삶
    오늘도 츄리닝 차림에 칫솔 들고 동생과 목욕을 다녀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오던 삶의 패턴이다. 늘 가벼운 걸음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고등학교 첫 수능모의고사 결과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까지 버티던 성적이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중학교 때는 전교 10등에서 20등을 오갔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 받아든 첫 성적표는 반에서 10등이라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늘 벼락치기로 성적을 유지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무 큰 폭으로 떨어져서 믿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며 큰 꿈을 품고 부모님을 떠나 대전으로 왔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경찰대학을 가서 간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나도 부모님의 소원대로 이제는 화이트칼라로 양복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동자이신 아버지의 삶을 보았기에 부모님도 나도 더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두 날개를 가지고 성공할 것이라 믿고 달려왔다. 첫째는 공부 잘해서 꼭 성공하겠다는 것. 둘째는 도덕성으로 꼭 성공하겠다는 것. 착실하게 공부해서 내 삶을 멋지게 만들어내고 싶었다. 양복입고 출근하며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의 배웅을 받는 것? 아, 집은 밝은 톤의 아파트이면 좋겠다. 하지만 내 나이 열일곱에 벌써 한쪽 날개가 꺾여버렸다. 추락하는 것 같다. “다 끝났어.” 시험 한 번에 이런 바닥을 경험 할 수 있구나. 고1, 4월의 어느 일요일은 그렇게 우울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 날이 내 인생을 뒤집는 또 다른 하루가 될 것 역시 예상 못했다. 평소보다 말없이 목욕탕에서 돌아오던 길, 동생은 이유도 모른 채 형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 거의 도착할 즈음 집 앞의 작은 교회에 눈이 머문다. 늘 걷던 길인데...... “이곳에 교회가 있었던가?” 갑자기 어린 시절 잠시 다녔던 교회가 떠올랐다. 교회 가자며 빵으로 나를 유혹했던 농협 아저씨. 종이 괘도에 그려진 악보를 따라 즐겁게 부르던 노래. 늘 좋은 향기를 내셨던 선생님. 내게 교회는 좋은 곳이었다. 성탄 연극 연습하며 마구간 동물 역할이 주어져 섭섭함에 교회를 끊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교회를 다니고 있었을까? 갑자기 눈에 들어온 교회로 생각이 많아졌다. “교회 다녀볼까?” 결정은 아니지만 끌림이 있었다. 동생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지금 생각해보면 왜 동생을 돌려보냈을까 싶다.) 나는 나무 냄새 짙은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30여명 모여 예배하는 중이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마치 나 어릴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으로 관객이 되었다. 그리고 헌금시간, 봉사를 맡은 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친구 사이를 오가며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이 가장 뒤에 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나에게까지 왔다. 바구니를 내 앞에 들이민다.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예배 동참했으니 헌금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전해온다. 나는 초코렛을 많이 좋아했다. 큰 사각형 초콜렛이 당시 500원이어서 늘 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하나 정도는 넣고 다녔다. 마침 내 추리닝 주머니에 500원이 있었다. 고민했다. 짧은 시간, 고민은 길었다. 그리고 아이의 착한 눈을 피하지 못하고 500원을 헌금바구니에 넣고야 만다. 그제야 평안한 얼굴로 아이는 강단으로 돌아갔다. “그래, 교회 다녀보자!” 그렇게 신앙을 가슴 한 귀퉁이에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신앙이 나를 이끌어주며 꺾이지 않는 날개가 되었음은 부인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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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오성한 목사] 중언부언
    신약에서의 기도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라고 하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길쌈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기르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이 꽃 보다 못했다”고 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희의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채운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도하란다. 주기도문을 말씀하실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8-9)라고 가르치심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이방인의 기도와 완전히 다른 것이 우리의 기도다. 기도를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알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알고 하는 기도다. 비인격적인 것을 간구하는 기도는 이루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인격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는 한두 번에 족하다. 그리고 믿고 기다리면 된다. 인격적인 기도는 반복해도 좋다. 단순한 표현이고 반복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지만 반복할 때 더 친밀해진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으로 가득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능력이 저에게 넘쳐 남을 감사합니다.” 등의 약속을 묵상하며 고백하는 것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하셨다. 받은 줄로 믿고 하는 기도는 구약에 기도의 가르침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속을 품고 있는 것이 기도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을 약속하셨다. 영원토록 함께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 저는 임마누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감사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고 하나님께 올려 드려라. 그리고 자신에게도 말해 줘라. “성한아, 너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아들이야. 너는 어디를 가든지 두려울 것 없어. 오늘도 승리의 날이야.”라고 말하고 기도하며 감격과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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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박봉석 목사] 방법보다 방향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마차를 만났습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태워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대답했습니다. “한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나그네는 잠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마부에게 묻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그 말에 나그네는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 그 말을 듣고 마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이 탈무드의 이야기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방향이 맞으면 설령 늦어도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속도를 높인다 하더라도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모자를 측은히 여겨서 아들을 고치기 위한 성금을 모았습니다. 마을의 의사도 이 소문을 듣고 감동을 받아 아들을 무료로 고쳐주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수술 날이 잡혔고 수술은 다행히 대성공이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의사에게 정성껏 감사하는 인사를 하고 그때부터 아이에게 걷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들은 마침내 다른 아이들처럼 걷기도 하고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마을을 떠나 도시의 병원으로 전근을 갔던 의사는 우연히 그 아이 엄마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의사는 자신이 고쳐준 그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부인 그 때 그 아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요?” 엄마는 머뭇머뭇하면서 얼른 대답을 못하다가 마지못해 말했습니다. “지금 내 아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로 형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놀라고 실망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의사를 향하여 이 엄마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저는 그 아들에게 걷는 법만 가르치려고 애를 썼지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는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걷는 방법을 익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곳은 걷는 방향입니다. 그것은 인생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길을 화려하고 세련되게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떵떵거리며 산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비록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바르다면 그 인생은 성공작입니다. 왜냐하면 심판 주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느냐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얼마나 그 목적을 따라 살아왔느냐를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바른 사람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거룩한 사람은 삶 또한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닌 방향입니다. 신발을 신을 때마다 일부러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어디고 가고 있는가?”를 늘 물으십시오. “아 나는 지금 믿음의 길 가고 있고 생명의 길을 가고 있고 천국의 길 가고 있지. 그러니 후회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네.” 늘 그 확신으로 살 수 있다면 최고의 인생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인생은 화려한 인생이 아닌 목적이 바른 거룩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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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과 삶
    2022-03-08
  • [김성수 총장]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
    미국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주 미시간(Michigan)에 소재하고 있는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의 이념적 기초를 놓은 학자로 존중받고 있는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 박사는 1970년대에 경향성 학습(Tendency Learning)을 강하게 주창한바 있습니다. ‘경향성’이란 나타나 있는 어떤 모습이라기 보다는 숨어 있는 속성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표면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타나는 특성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이 녹고, 유리에 압력이나 충격을 가하면 유리가 깨어지며, 자석에 쇠붙이를 가까이 하면 자석은 그 쇠붙이를 끌어 당깁니다. 이때 ‘녹는 성질’, ‘깨어지는 성질’, ‘끌어당기는 성질’ 등이 바로 경향성이라는 속성입니다. 경향성 학습이란 ‘학습이나 훈련 과정의 결과로 학습자편의 이와 같은 어떤 경향성을 증진시키거나 감소시키는 학습’을 의미합니다. 월터스톨프가 경향성 학습을 주창한 이유는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관점이나 사고를 형성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형성해 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적 표식을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 당시 부산지역 교계 지도자 초청만찬회에 강사로 초청된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분들 중에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여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바쁜 일정 속에 시장실에 찾아 온 교계 인사 가운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길게 기도할 때는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흘러듣기에는 무엇인가 뼈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스럽게 표시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 어떤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리스도인 됨의 숨은 속성을 어김없이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마리아인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행동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행동 경향성을 어떻게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월터스톨프에 의하면 여기에는 훈육, 모델링, 그리고 이유 제공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전략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인 행동에는 보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에는 불유쾌한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은 학습자의 경향성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방법 역시 경향성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교회 수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는데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고 깊은 바닷물을 짜게 하는 것은 0.3%의 소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나 행사가 없어도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는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신앙을 삶 속에서 어김없이 구현할 수 있는 행동 경향성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부패해가는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차세대를 향해서 이와 같은 행동 경향성을 형성시켜줄 수 있는 효율적인 학습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훈육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해 버렸으며,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했고, 또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거나 행동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언약의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모와 교사된 우리들이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현대교회는 특별히 세상을 향해서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지자적 용기와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현장 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모델링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절연되거나 세상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악마와도 같은 한 사람 독재자로 인해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금 받은 고귀한 생명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델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나게 떠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신앙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어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용사들로 양육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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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4
    I. 서언(序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에는 오늘 논하고자 하는 큰 대(大)자도 그 중의 하나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대(大)자를 쓰는 단어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산, 대가족, 대궐, 대감, 대청, 대교, 대 심방, 사대문 등등 대자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규모가 크지 않는 것도 크게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큰 大를 사용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 이유가 있다면,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 같은 대국에 비해 소국의 서러움을 안고 살아왔다. 현대에 와서도 중국 뿐 아니라 미국 같은 대국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뼈에 사무치도록 아주 큰 민족이다. 이러한 사대주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언어문화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그 많은 용어들 중에서 특히 큰 대자를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해 온 것도 그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II. 교회용어에서의 큰 대(大)자의 남용 1.대예배(大禮拜): 보통 주일 오전 예배를 두고 말할 때 대예배라고 칭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예배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고,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인식과 용어 사용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와 소 예배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학적인 면으로 볼 때 예배는 항상 무한한 크신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행위이기 때문에, 차별적 뜻을 가진 대소(大小)나 다소(多少)의 뜻을 가진 말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2.주일 낮 예배 : 필자의 어릴 때만 해도 주일에는 낮과 저녁으로 나누어 예배를 드렸다. 이로 인하여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 예배라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오후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많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관계로 인하여 대예배나 주일 낮 예배라는 말 보다는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 주일 저녁예배 등으로 명칭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또 어떤 신학자는 모두 함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공동예배”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어법상으로 맞는 명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3.대예배실과 소 예배실 : 예배실이 여럿 있는 교회당에서는 예배실을 구분하기 위해서 대, 중, 소로 나뉘어서 명칭을 붙인다. 이는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의 대, 중, 소는‘예배’란 말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場所)인 ‘실(室)’을 수식하기 때문에 장소의 대 소에 따라 대 예배실, 중예배실, 소 예배실로 나누는 것도 무방하다. 하지만, 예배실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는 대 예배실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잘못 된 경우이다. 4.대 심방: 흔히 전 교인 가정을 심방할 때“대 심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어법상으로 다소의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심방이란 명사 앞에 접두어 大자는, 대상의 다수적 범위와 사물의 수량적 전체규모를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이런 논리로 보면 작은 규모의 심방은“소 심방”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심방은 대소로 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볼 때 대심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전체심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고, 만약 이것이 매년 정기적으로 하는 심방이라면 “정기심방”이라는 말도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 볼 때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흔히 쓰는 교회의 각종 예배적인 용어인데도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되는 용어들이 아주 허다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은 일부 예배학자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소견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합한 바른 용어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도 다 같이 연구하는 자세로 올바른 교회 언어문화를 창출 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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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조희완 목사] 낙심은 금물 (눅18:1-8)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되면서부터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술 소비량에 전 세계에서 1위, 자동차 사고율이 전 세계에서 1위, 암 사망률이 전 세계에서 1위, 여성 흡연율 세계 1위, 임신 낙태율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살률이 전 세계에서 1위입니다. 인구 10만 명 당 약 25명이 자살을 하고, 하루 평균 46명씩 자살을 하는 것으로 집계가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살을 부추기거나 자살할 사람을 찾는 인터넷사이트가 단속에도 불구하고 172개나 버젓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보니까 “자살 신드롬”이라는 말이 등장을 하고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TV에서 웬만한 자살 뉴스가 나와도 무관심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방예의지국으로 생명을 존중하던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어버렸는지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막다른 길에 다달았다고 생각을 하면 낙심을 하고 비관을 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목숨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그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끊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살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은 동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낙심”(落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기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낙심하고 절망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이게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눅18:1) 둘째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면 안 됩니다.(갈6:9) 셋째는, 신앙생활로 인하여 환난 당할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엡3:15) 어려운 시대에 믿음을 잘 지키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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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목사와 성도의 관계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목사와 성도는 서로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좋은 관계 맺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방황하게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때 양은 안전합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올바른 믿음의 길로 성도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보호할 때 성도와 관계가 좋아집니다. 성도는 목사의 말씀에 순종하면 행복해지며, 목사와 관계가 좋아집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좋아지면 삶이 행복하고 교회 생활이 즐겁습니다. 관계가 좋으면 말씀을 잘 듣게 됨으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관계가 깨어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넘어지게 되며, 믿음이 식어지게 됩니다. 목사와의 관계가 깨지면 교회를 떠나게 되고 교회생활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들게 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좋으면 신앙생활, 가정 교회생활이 행복합니다. 사탄 마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목사와 성도 사이를 이간시켜 관계를 깨트립니다. 지혜자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관계가 깨어졌다면 기도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양인 성도는 양으로 족해야 하며 목자인 목사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행복한 관계가 됩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말씀을 잘 준비 하여 영의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성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기도해주고, 포용해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목사를 귀히 여기고, 섬기고, 순종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목사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고, 목사의 허물을 덮어주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선교사와 파송교회와의 관계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파송하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 할 때 기도하고 신중하게 파송해야 합니다. 선교의 소명이 분명하고 신뢰가 되는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파송했으면 재정적 후원을 잘 해 주고 기도도 많이 해 주어야 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해준 교회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최선을 다해 선교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도 해야 합니다. 선교사는 진실해야 합니다. 선교사는 파송해준 교회와 담임목사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가 깨지면 도움 받기 힘들고 심지어 선교사 중단, 후원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선교사는 파송교회, 담임목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파송해준 교회와 담임목사, 선교부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재정 관리를 투명하게 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파송교회가 선교사들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선교사역을 잘 하도록 기도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파송해 준 교회와 담임목사, 선교부 몰래 파송교회 성도들과 은밀히 개인 접촉을 하여 금품을 요구하거나 재정 관계에 엮이지 않아야 합니다. 파송 교회 성도에게 무엇인가 무리하게 요구하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중에 파송교회가 알게 되면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심을 믿고 믿음으로 지혜 있게 선교해야 합니다. 파송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성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선교사는 인간관계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와 파송 교회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언제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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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황권철 목사]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받은 은혜 감사하며 삽시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이러하다. 영국 국왕의 박해로 청교도들은 7년을 준비해서 180톤 되는 범선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65일간 추위와 영양실조와 질병과 싸워 이겨 미국 동부지역까지 도착했고, 이에 살아남은 자는 78명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가을 첫 소산을 얻고 플리머스(Plymouth)에서 3일간 감사제를 드렸다. 이렇게 시작하여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1월 26일을 감사절로 공포했으며,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했고, 그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감사절로 개정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추수감사절이 한국에서 시작되기는 1904년 조선 장로교 공의회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시작되었다가 1945년 광복절 이후로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다. 성경에서 모세는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고 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최선을 다해 감사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지막 16장 강론이다. 마가복음의 총 주제는 섬김이다. 핵심성구는 10:45절로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 오셔서 섬기는 삶을 살다가 섬기는 자로 생을 마감하셨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주님의 최후부탁은 우리의 최초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밀알교회가 감당할 최대의 사명인줄로 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1-8)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은 자는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전에 일곱 군대 귀신들렸던 여인이었고(눅8:2),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도 주님을 특별히 사랑했으며, 살로매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이모였다(요19:25).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현장까지 따라간 자들은 힘 있고 당당한 남자들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마27:55), 우리말에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강한 어머니가 있었음을 안다. 옛날도 그러했거니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여성들의 역할은 참으로 대단하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 안에 크고 작은 일에 여성들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실로 장한 여성들이다.  여인들은 해가 돋기가 무섭게 무덤으로 달려갔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2). 이번 안식일은 그 어느 때와는 다른 하루였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최악의 순간이요 가장 불안한 하루를 보내는 날이었다. 사실 이날은 온 인류가 긴장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검증 받는 최후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면 구약의 예언대로 그는 메시야임을 증거 하는 날이지만 만약 그의 부활이 공수표로 돌아가면 예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고전15:14-15). 이제 그토록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그 날이 다가왔다.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날이 새기가 무섭게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2)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여인들에게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문제는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 여인들의 생각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은 하셨으나 너무도 큰 돌이 막고 있으니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우리 역시 가기는 가지만 그 돌을 옮길 힘이 없다. 이 돌을 옮길만한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파수꾼이 지키고 있으며, 돌 위에는 빌라도가 인(印)을 쳐서 봉해 두었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도착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무덤에 도착한 순간 이런 근심은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4). 참된 부활신앙은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의심의 큰 돌들을 굴러 버린다. 불신앙과 염려와 근심 걱정의 돌을 굴러버려야 부활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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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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