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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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현교회, 70주년 기념 및 임직 감사예배 드려…
    예장(통합) 신현교회(서용진 목사)가 지난 3월 10일(주일) 오후 3시, 신현교회 은혜홀에서 창립 70주년 기념 및 임직 감사 예배를 드렸다. 창립 70주년 기념 영상으로 시작한 예배는 당회장 서용진 목사(신현교회)의 집례로 거제시기독교연합회 수석공동회장 이태우 목사(고현충현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경남노회 거제서시찰장 홍승직 목사(옥산교회)가 성경봉독(엡1:17-19)한 후 경남노회 노회장 이상근 목사(호계문창교회)가 ‘사도바울의 기도’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이상근 목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성도는 자신을 과대평가 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게 된다고 전하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얻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고 전했다. 설교 후 이어진 임직식은 서용진 목사가 예식사를 전하고 당회 서기 유상훈 장로가 임직자 소개를 전했다. 이어, 임직하는 장로·안수집사·권사와 교우들에게 각각 서약을 받고 안수 한 후 신현교회 임직자 된 것을 선포했다. 이날 전 거제기연 회장 박태부 목사(새장승포교회)가 임직자와 교우들에게 권면의 말을 전하고 장로로 임직한 정세열 장로가 답사를 전했다. 또 전 경남노회 노회장 이종삼 목사(갈릴리교회)가 축사로 임직자 및 창립 70주년을 맞은 신현교회 성도들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유종하 원로 목사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다음은 임직자 명단이다. ▲장로 임직 : 정세열, 가동현, 오우석, 정병철 ▲집사 임직 : 강호윤, 최춘기, 손덕일, 유병욱, 김정만, 하창용, 윤정일, 정동호, 정희관 ▲권사 임직 : 김잔디, 이활란, 문성화, 김혜영, 이선민, 김현미, 임현숙, 김귀옥, 김순정B, 이영숙, 양다은, 김순정A, 김숙영, 배남순, 백정례, 윤주영, 윤선옥, 김미숙, 허선자, 윤경원, 안수미, 안점순, 나경미, 이금옥, 유명신, 권수정, 김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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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3
  • 기윤실, 4월 10일 총선 앞두고 ‘공직선거법준수캠페인’ 전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제22대 초선을 맞아 공명 선거 운동을 위한 ‘공직선거법준수캠페인’을 전개한다. 기윤실은 창립 초기부터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 문화를 만들기 위해 캠페인과 세미나, 모니터링 활동을 전개해왔다. 기윤실은 한국교회가 공명선거운동을 통해 공직선거법을 준수하며 올바른 정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솔선수범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기윤실은 예배, 헌금, 기부, 말, 통신, 명함, 사진 총 7개 분야에서 교회가 지켜야 할 선거법을 소개하고 있다. 기윤실은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정치관계법 사례예시집』과 선거관리위원회에 확인을 받은 내용을 토대로 공직선거준수캠페인 자료와 포스터를 작성해 배부에 나섰다. ‘예배’에서는 △교인인 후보자의 출마를 통상적으로 간단히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나 학력‧경력 등을 소개하거나 인사 기회를 주는 것은 금지한다. △교인이 정해진 일정에 따라 기도나 간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선거기간에 급조해 순서를 맡는 것은 안 된다. 또 △교회를 방문한 후보자의 참석을 알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출마 사실을 알리거나 지지를 유도하는 것은 금지된다. ‘헌금’은 △후보자가 평소 다니던 교회에 통상의 헌금이나 헌물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후보자가 다른 교회에 헌금을 하거나, 통상 이상의 헌금을 하는 것은 금지된다. △교회에서 정치인의 후원금을 모금하는 행위도 금지된다. △교인이 좋은 사람들이 뽑히길 바란다는 취지의 문구를 적어 헌금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특정 후보나 정당의 당선을 기원하는 취지의 문구를 적어 헌금하는 것은 금지된다. ‘기부’는 후보자가 자선사업을 주관하는 교회나 단체에 구호물품이나 금품을 제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개별물품이나 포장지에 이름이나 정당을 표시해서는 안 된다. 가장 실수 하기 쉬워 주의해야 하는 ‘말’은 △누구든 선거운동 기간 전, 교회 안에서 말로 하는 선거운동은 금지된다. 단 교회가 다른 용도로 대관됐을 때는 가능하며, 선거운동 기간인 3월 28일부터 4월 9일에는 교회 안에서도 말로 하는 선거운동은 가능하다. 그러나 △교회에서 직무상 행위를 통해 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거운동’은 언제나 금지된다. 설교나 광고 등에서 특정 당이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언급이나 비유는 삼가야 한다. ‘통신’ 부분은 각종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유튜브, SNS 등을 통해 후보자와 관계된 공약을 알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정보통신망을 활용해 후보자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비방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명함’은 △교회 울타리 내에서 후보자의 명함을 배부하는 것은 금지 된다. 단, 교회가 다른 용도로 대관 됐을 때는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말’처럼 선거운동기간인 3월 28일부터 4월 9일에는 교회 내 배부도 가능하다 ‘사진’ 경우에는 선거일 90일 전(1/11)부터 교회 내 후보자 관련 행사 홍보물에 후보자 사진 사용은 금지 된다. 기윤실 관계자는 “한국교회는 정파나 이념, 종교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직선거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올바른 정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야 할 것”이라며 ‘공직선거법준수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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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3
  • 고신대 이정기 총장, 영남기독기자협회 간담회 가져
    학교법인 고려학원 산하 고신대학교 이정기 총장이 지난 2월 21일(수) 오전 11시, 고신대학교 섬김관 5층에서 영남기독기자협회와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는 지난해 이병수 총장이 중도 사퇴하며 공석이었던 총장직을 우여곡절 끝에 인준 받고 취임한 이정기 총장을 만나 고신대학교에 쌓인 현안들과 해결 등에 대해 기자들이 간단히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 됐다. 기자들의 첫 번째 질문으로 신임 총장의 비전과 목표에 대해 물었다. 이정기 총장은 고신대학교의 비전을 비전을 3R, “Rebuild(혁신), Restart(새로운 도전), Reconcile(지속적 협력)”으로 소개했다. 3R은 다음세대를 위한 기독교대학 정체성 강화하고, 미래를 여는 과감한 학과 구조를 개편하고. 고신다운 신학·의료·보건·복지 분야를 특성화하고, 성과기반으로 효율적인 행정 조직을 통폐합해야 하는 혁신과 지속 성장을 위한 재정인프라를 구축하고, 입학자원 다변화 및 신입생 유치 모델을 특화하고, 고신인재양성을 위한 혁신적 교육체계를 구축하는 도전. 또 교회 섬김과 세계선교중심의 협력을 확대하고, 지역사회와 건강한 상생체계를 강화하고, 고신공동체 산하 기독학자 연구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협력이다. 출산율 감소와 맞물려 학령 인구의 감소가 가져오는 신입생 유치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전국대학의 고민임을 강조하며, 수시모집을 통한 신입생 유치에 좀 더 힘을 쓰고 성인 학습자와 다문화 가정의 여성, 유학생 유치를 통한 신입생 확보에 힘쓰고 있는 점을 전했다. 그 외 외국인 유학생 관리와 관련해 1년간 학위 과정의 비자 발급 제한은 선교사 추천의 학생 유치를 늘려 유학생 관리에 만전을 다하고 올 해 평가 후에는 이런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 중에 있음을 전했다. 또 고신대학교가 현재 지역 사회 사업과 연관해 많은 참여를 하고 있으며 더 늘려 갈 계획을 전하며 학생들이 많은 경험과 참여 등으로 역량을 늘려 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점과 최근 간호학과가 5년간 자격 시험 전원 합격으로 그 능력을 증명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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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1
  • 해운대성령대집회를 위한 3월 전체 준비기도회 열어
    지난 3월 7일(목) 오전 7시 30분, 2024해운대성령대집회 준비위원회가 주최한 해운대성령대집회 준비기도회가 부산시 해운대구 수영로교회(이규현 목사)에서 열렸다. 오는 9월 8일 열릴 2024 해운대 성령 대집회를 위한 전체 준비기도회는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산의 목회자들이 참여해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갔다. 운영위원장 김대환 목사(덕천제일교회)의 사회로 시작한 기도회의 1부는 글로리파이드의 찬양에 이어 김해중앙교회 담임 강동명 목사가 말씀을 전했다. 강 목사는 개인 적인 성령 체험과 경험, 간증 등을 함께 전하며 “성령 충만 속에 조직이 되고, 성령 충만 속에 운영이 되고, 성령 충만 속에 진행이 되고, 성령 충만 속에 우리가 뜻하는 계획하는 하나님의 일이 꼭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고 전했다. 설교 후 운영기획팀 이종호 목사(날마다교회)와 이종훈 목사(구덕교회)의 기도 인도로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며 부산의 1800여 교회와 부산·울산·경남의 교회가 다같이 모여 새롭게 살아나 부흥의 불쏘시개 역할을 감당하는 해운대집회와 모든 모임이 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또 해운대백사장에서 제주에서 서울, 다문화 가정들과 외국 유학생들도 참여하는 집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어진 순서에서는 운영위원장 김대환 목사와 실행위원장 김도명 목사, 동원위원장 김성은 목사, 홍보팀장 현수환 목사, 부산성시화 사무총장 성창민 목사 등 각 부서의 진행 사항 및 준비 사항과 홍보 내용 등을 전달하고 이후 일정과 진행 등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 2024해운대성령대집회 준비위원회는 오는 부활절, 만 6년 만에 부산의 각 기독교연합이 함께하는 연합예배를 준비 중에 있으며, 6월 파파클럽 기도회 등 9월 8일 성령대집회 전·후로 많은 집회들을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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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0
  • [독자기고] 선거관리위원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지 않기를!
    우리 총회는 여러 종류의 상비부와 특별부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특별위원회는 왜 그리도 많은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위원회와 상비부는 하나의 위원회로 통폐합해야 할 필요가 있고 유명무실한 기관은 과감히 정리해야합니다. 물론 각종 위원회 역시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전체를 다루고 싶지만 선거관리위원회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총회 선거관리위원회는 총회 내의 선거관리를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수고하신 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한편으로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고자 합니다. 고신총회의 선거는 헌법을 기본으로 하고, 고신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조례와 시행세칙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총회 산하 기관은 그 나름대로의 선거기준과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집니다. 총회 산하 모든 선거에 있어서 선거조례나 시행세칙대로 시행되면 좋겠습니다. 균형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작년의 일이 떠오릅니다. 2023년 3월 제가 섬기고 있는 고신포럼에서 교단을 위한 기도회를 했습니다. 혹 불필요한 오해나 말들이 생길까 기도회를 준비한 실행위원들이 총회 출마자들은 그곳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지난해 목사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를 했기에 그 기도회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기도회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조례나 시행세칙에 명시된 공식선거 기간도 아니었고, 출마자들도 참여를 하지 않았기에 선거관리위원회가 이 일에 대해 기독교보에 경고를 할 정도의 위법한 일도 아니었으며, 선거관리위원회가 그렇게 간섭해야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들리는 말에 선거관리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그런 경고(?)를 하려고 할 때 찬반 의견이 팽팽하여 결정하지 못하게 되니까 듣도 보도 못한 임원회의 이름으로 꼼수 경고를 하는 기가 찬 일이 발생했습니다. 기도회를 주관한 고신 포럼에서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바르게 하려고 하는 정신 하나만 믿고 크게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선관위는 그런 정신을 끝까지 이어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지난해 8월 전국장로 수양회가 마치는 날 경주에서 40명이 골프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출마자도 다수가 있었고 선거관리위원도 있었다는데 누군가 형평성을 이야기하니 정식으로 고발하면 문제 삼겠다고 고발하라고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었던 후보들이나 선거관리위원의 그런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소식을 전한 사람의 실명이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외부에 유출되어 소문이 나게 한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되지 않는 부분 입니다. 고신포럼의 기도회는 공식 선거기간도 아니었고 출마자도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공개적으로 경고 했는지요? 그렇다면 전국장로회 수양회를 마치고 운동을 한 것은 왜 침묵하시는지요? 침묵 정도가 아니라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의 실명을 외부로 유출해서 그 제보자를 힘들게 했는지요? 그럼에도 공정한 선거관리위원회라 말할 수 있을까요? 전국장로회 수양회를 폄하 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전에 다른 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장로회 수양회 기간에 출마자들이 그곳을 방문 조차 못하게 했는데 작년에는 공명 선거 선서식이나 기호 추첨을 아예 그 수련회 장소에서 실시했습니다. 이것은 이 전의 선관위의 결정과는 180도 다른 결정으로서, 이런 일을 할 때는 충분한 공감대와 공정성을 지키며 진행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선관위의 구성원에 따라 너무 다른 결정을 하는 것은 신중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방법이 좋아보여도 기본적인 기준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전국장로회는 우리 고신총회의 임의단체입니다. 물론 그 기관의 위치나 그 구성원의 중요성 등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국장로회 수양회가 총회를 앞두고 소위 ‘정치나 선거운동’의 근거지라는 말도 많은데 그런 오해를 불사하면서까지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장로들에게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며 공정한지요? 그러면 장로가 아닌 고신의 성도들에겐 어떤 알 기회를 제공했는지요? 선거관리위원회가 작년에 지역공청회라는 좋은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공청회에 참가 자격을 총대라고 했고 처음에는 총대에게만 여비를 지급하기로 할 정도로 총대 중심이었습니다. 전국장로회 수양회는 부부로 모이기 때문에 총대 숫자보다 비 총대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왜 이분들에게만 “특혜”에 가까운 기회를 제공해야 할까요? 분명히 말합니다. 목사 장로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국 목사 부부들에겐 왜 이런 기회가 없었을까요? 부부 수양회니 당연히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은 여성들입니다. 총대가 아닌 장로나 가족들에게 선거 후보들이 인사하는 것은 어느 선거 규칙에 따른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형평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리했다고 해도 그 의도를 순수하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각종 방문 선거 규칙에는, ‘선거와 관련하여 입후보자나 지지자들의 지역 방문(지역별 체육대회, 전국장로회 수양회, 총동창회 각종 세미나 등)을 금하며, 각종 모임에 화환이나 선물을 제공할 수 없으며 인터넷 영상물의 이용을 금한다. 단 꼭 필요한 경우는 서면으로 선거관리위원장에게 신청한 후 선거관리위원회 고소 고발소위원회의 서면 답변을 얻어야한다.(65회 총회 수정)’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공명선거 선서식을 하고 기호추첨을 한 어느 후보는 아예 그곳에 머무르며 버젓이 선거운동(?)을 했다는데, 특정인에게 그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요? 그 이전 해에는 동일직에 출마한 두 후보 모두에게 설교나 강의 등 동일 한 조건으로 순서를 맡기는 것도 혹시라도 부정 선거운동이나, 빌미를 제공할까 못하게 막았는데, 작년에는 선관위의 규정이 발전한 것인지요? 아니면 변질된 것인지요? 불법적인 기부행위 지난해 총회 선거에 지역공청회를 도입하므로 입후보자는 출마소견을 유권자들에겐 후보자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아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옥의 티 같은 일이 있음에도 선관위는 침묵했습니다. 어느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본인이 당선되면 엄청난 후원금을 내겠다는 공약 아닌 공약을 발표해도 선관위는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올해 초에는 고신대학을 위한 기도회를 하고 모금 활동도 했는데, 이때 교회, 혹은 개인이 기부행위를 했습니다. 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5장 선거운동 제8조 2항에 보면 “기부행위: 당 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라고 명시함으로서 출마자나 기관이 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부산의 어떤 분은 노회의 어떤 행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출마를 선언하면서 ‘교회가 선거를 위해 예산을 배정 해 두었다’고 말했으며,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선관위는 선거조례를 지킬 의사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십시다. 몇 해 전엔 선거관리위원회가 제출서류가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기한을 맞추지 못한 것이 있으면 자격박탈을 했는데, 작년에는 몇 차례 공청회 장소에서 버젓이 거짓 자료를 올려놓아도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거조례 6장 15조 2항에 “입후보자의 등록서류 중 허위 사실 또는 전항을 위배한 사실이 확인될 때에는 총회 재판국에 고발한다”고 되어 있는데, 모 후보의 허위사실이 우리의 눈에만 보이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도 고발자가 나와야 선관위는 조치할 수 있는 것입니까? 몇 해 동안 출마자들의 생년월일이 늘 소개되었는데 유독 작년 2023년 총회출마자들에 대해서는 생년월일이 삭제된 홍보물이 제공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론사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실수입니까? 작년의 고신포럼에서 실시한 기도회(30명 미만 참석, 참석자 여비 미 제공)가 신문지상에 경고를 할 만큼 심각한 일로 판단했었다면, 올해 어느 교회에서 기도회(100명 이상 회집, 참석자 여비제공)로 모여 출정식(?)을 한 것은 왜 지적하지 않고, 선거조례나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사항대로 시행하지 않는지요? 올해도 선관위 뜻대로, 선관위의 좋은 의도대로 시행할 것인지요? 아니면 총회가 만들어놓은 선거조례나 시행세칙을 지켜가며 시행할 것인지요? 선거관리위원회는 비상 계엄군이 아니라 총회를 섬기는 조직으로 특히 선거 과정을 공정하게 하여 불미한 일을 미 연에 방지하는 일을 하는 기관입니다. 바라기는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조례와 시행세칙대로 기준과 중심을 공정하게 잡고 바르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지난날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 야합니다. 모 총회장이 공식적으로 ‘법은 못 하게 해도 모두가 찬성하면 할 수 있다.’는 발언 이후 총회는 총체적으로 기준과 공정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법적 용과 해석도 본래 정신을 실현하기보다는 계파나 진영에 따라 말꼬리를 무는 억지 행각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헌법은 세상 헌법과 그 기본과 정신이 다릅니다. 교회 헌법은 성경의 원리를 따르며 성경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법이요!”하면 모두가 순복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상실되니 걸핏하면 법제부에 법 해석을 요구하고 시간 끌기를 하며 본질을 희석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이 말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선관위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총대원 들과 고신의 목사 장로들이 성경의 정신을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선관위가 비상계엄군처럼 협박하는 위치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를 관리하며, 선거의 부정적 요소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서, 고신을 바르게 세우는데 앞장서고 책임지는 섬김이 가 되시길 바랍니다. “총회는 헌법대로, 선거는 선거조례대로”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3-09
  • [기고] 선거, 또 다른 분열의 시작인가?
    역사관 역사는 어제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로 또 내일로 이어지므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어제를 생각하고 평가하여 교훈을 얻으려 한다. 인간과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는 부족함에 따르는 내재적인 한계로 인하여 개인으로부터 국가사회까지 어제의 평가에 따른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상황에서는 통상 같은 반응을 보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훈을 받기 위함일 것이다. 본래 어제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먼저 개인과 각 개별사회가 자신들의 몫을 평가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체적인 역사의 평가에 편입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리고 어제의 역사에서 받은 교훈을 오늘과 내일에 적용하여 긍정적인 부분은 더 확장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개혁하여 바꾸도록 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자가 가지는 사명이다. 문제는 역사에 대한 평가에 특정한 의도와 목적이 스며들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에 있다.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함에 목적과 의도가 개입하면 그 틀을 통하여 역사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 목적의 틀과 달리하는 부분은 삭제하거나 변형하고 목적의 틀에 맞는 부분만으로 역사를 살피고 판단하게 되므로 그 결과 역사는 전체적으로 왜곡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어제의 역사를 ‘점령’하기 위해 애를 쓰고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권력과 정치가 역사를 ‘점령’하여 틀을 만든 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이러한 틀을 사실상 강요하게 될 때 역사관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내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러한 틀에 의하여 제한되므로 내일 역시 왜곡된 역사관으로 맞추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분열의 두 주제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로부터 사회 곳곳에 ‘분열’이라는 분명한 잘못에 빠져들고 있다. 분열은 공동체 모두에 불이익을 준다. 작게는 공동체의 발전을 막지만 크게는 공동체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 ‘분열’이 국가적인 비극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건을 예로 들자면, 임진왜란을 앞두고 이이(율곡)가 주장한 십만 양병은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무산되고 그 대가로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국가의 극심한 쇠약으로 병자호란까지 겪어야 했다. 또 해방 후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장악된 북한과 달리 남한은 위로는 정치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폭력배까지 온 나라의 각 분야뿐만 아니라 좁은 지역까지 좌우로 나누어진 적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남로당의 수괴 박헌영은 북한의 김일성이 오판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도모하던 스탈린, 이에 동조하던 모택동, 한반도의 적화를 획책하던 김일성의 야욕은 함께 어우러져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신생 독립국인 이 나라에 엄청난 참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분열은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 다시 ‘분열’의 망령이 온 나라를 덮고 있으며 이 분열에 대하여 ‘진영논리’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진영논리는 ‘자신이 속한 쪽의 이념과 행위는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의 이념과 행위는 무조건 배척하는 논리’를 말하며 분열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 분열의 주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일’(또는 항일)이냐 ‘반공’이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문제가 무슨 까닭인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얽혀 있다. 즉, ‘반일’을 주장하는 측 대부분은 ‘분배’를 우선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스스로 ‘진보’라고 이름하고 있고, ‘반공’을 외치는 대부분은 ‘성장’을 우선으로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보수’라고 하고 있다. 이 네 개의 주제가 짝을 지어 나누어져 양극으로 분열이 공고히 되면서 진영논리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분열 우리나라가 전 근대적인 왕조의 국가로부터 현대 시민사회로 변화하는데 걸린 기간은 채 50년 정도이다. 그 50년은 우리나라보다 일찍 현대 시민사회로 발전한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해서는 굉장히 빠른 기간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우리는 국가적으로 두 번의 큰 비극이 있었다. 하나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국권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채 5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북한 공산주의자의 침략에 의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있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6.25 전쟁이 있은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제’ 있었던 두 비극의 역사를 두 개의 틀로 나누어 보고 있다. 이 나눔의 하나는 ‘반일’, 다른 하나는 ‘반공’이라는 두 개의 역사관이 기초하고 있다. 이 두 역사의 유산은 분명히 우리가 함께 물려받아 서로 다듬어 가야 할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나누어지고 말았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 분열의 큰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반일’의 틀에서는 ‘반공’의 가치를 낮추고 ‘반공’의 틀에서는 ‘반일’의 가치를 유보하려는데 있다. 이를 상징하며 극단적으로 대조하며 상징할 수 있는 두 인물이 있는데 ‘김원봉’과 ‘노덕술’이다. 김원봉은 광복군에 참여한 항일투쟁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지만 해방 후 북한 공산정권에 참여하여 반공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노덕술은 일제하 경찰 간부를 지낸 친일파였으나 해방 후 경찰과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반공주의자로 살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김원봉’을 지지하는 세력과 ‘노덕술’을 옳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고 있는데 이 나눔에 앞장선 것이 정치인과 정치세력이고 이에 휘둘린 것이 국민이다. 우리는 김원봉의 항일은 인정하되 그가 걸었던 공산주의자의 길은 거부해야 하고 노덕술의 친일은 거부하고 반공에 대하여는 인정하면서 함께 갔어야 했다. 그런데 ‘냉전’이라는 세계질서의 재편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6.25 전쟁의 직접적인 참화로 인하여, 초기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정치세력 역시 반일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현실적 위협 앞에 반공을 더 앞세웠다. 우리는 반공이 ‘국시’(國是)가 되었고 ‘노덕술’의 길에 더 기울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반공’을 국시로 하던 정치세력들이 장기집권과 독재의 길을 걸어 반공의 가치를 훼손시켰고, 이에 저항하던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무슨 까닭인지 반공보다 반일을 내세우면서 역사관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국민도 함께 나누어졌다. 이렇게 나누어진 역사관을 가진 두 정치세력으로 인하여 어느 정치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반공과 반일이 시소게임처럼 오르내리게 되었다. 해방에 공헌한 두 세력과 6.25 전쟁 우리나라의 해방에는 두 세력의 공헌이 있다. 즉, 일제 강점하에서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하던 무장 항일투쟁 세력과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세력이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지역적인 원인에 의하여 공산주의 국가가 된 소련과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직전의 중국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당시 그들은 소련 및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독립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없었으며 사실상 공산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살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후 좌우가 나누어진 공간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를 택하였으며 그들은 발걸음을 북으로 향하였거나 발걸음을 미처 옮기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눈과 마음은 평양으로 향하였다. 반면 서재필, 이승만을 위시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항일을 한 독립운동 세력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3.1 독립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미국에 사실상의 임시정부를 세우고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각종 폐해와 조국의 힘든 모습을 언론과 외교적 접촉을 통해 서방세계에 전하면서 꾸준히 독립을 외쳐왔다. 이윽고 8.15해방이 되고 군사적 목적으로 남북이 분할되었을 때 북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지향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사실상 지배하는 구도가 되었고, 남에는 미군의 지원으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이 사실상 지배하는 구도가 되었다. 그런데 점령군을 위한 사실상의 분단 5년 동안 북은 김일성에 의하여 공산주의에 반하는 세력이 철저히 괴멸되었으나 남에는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공존하게 되었다. 이 두 정치세력은 각기 남한과 북한을 기반으로 정통성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각기 정통성에 대하여 서로의 결함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활동 범위가 사실상 남만주와 소련의 연해주로 거의 소련과 중국에서 싸웠다. 그들이 독립의 의기를 높이 들고 일본군과 피 흘리며 싸운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이며 희생이 틀림없으나 그 희생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은 중국과 소련이다. 중국과 소련은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데 자신들의 군대 외에 우리의 독립군이 조력한 것이다. 반대로 외교투쟁 세력은 일본군을 상대로 생명을 건 직접적인 희생이 따르는 투쟁은 없었다. 아깝게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으로 흘러간 국제정세의 흐름, 즉 공산주의의 팽창과 이를 저지하려는 서방 제국 사이에서 우리의 두 독립운동 세력은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 6.25 전쟁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노리던 소련과 적화통일을 꾀하던 북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자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을 향한 비극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의 도움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자들의 꿈은 깨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은 ‘반일’ 외에 ‘반미’도 자신들의 역사관에 새로이 삽입하여 저항 세력이 없도록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으며, 남한은 6.25 전쟁을 통하여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남로당 세력이 거의 뿌리를 뽑히게 되는 결과가 이루어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보도연맹사건’이란 비극이 개입하였다. 이 보도연맹사건과 4.19 민주혁명의 희생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절대적 공헌을 하였던 외교투쟁 세력의 건국에 대한 공헌을 부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반공’의 쇠퇴와 ‘반일’의 오류 앞서 지적하였듯이 ‘반공’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정치세력은 부패와 함께 불법적인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정치적 독재 세력이 되어 ‘반공’의 가치를 훼손하였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하여 국민은 저항하게 되었는데 민주화 시위에 앞장서 ‘민주’를 부르짖던 대학생 등의 구호에 공교롭게도 ‘반미’가 함께 등장하였다. 이 ‘반미’ 구호의 등장은 미국이 독재 정부를 옹호한 것에 대한 반발인지 또 다른 뿌리 깊은 연유가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반미’를 외치던 일부 ‘운동권’의 이탈된 모습은 ‘반공’을 우리나라를 지키는 제일의 가치로 여기던 많은 국민에게 ‘운동권’, 즉 민주화 세력에 대한 사상적 불신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 사건으로 민주화를 주장하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약칭)에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학생대표를 파견하였고 그 자격으로 북의 계획에 따라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이란 것을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다. 세월이 지나고 이를 주도하던 ‘운동권’ 중 상당수는 선거를 이용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정치세력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의 속한 정당은 세 차례 집권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주변에 자신들의 우호 세력을 양성하고 지지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반일’의 역사관을 국민과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만큼 ‘반공’의 가치가 훼손되었다. 우리나라는 평양의 김일성과 그 후손들의 최우선 과제인 ‘적화통일’ 앞에 놓여 있음에도 왜곡된 역사의 틀로 ‘반공’을 훼손시킨 것이다. 당연히 국민은 ‘반일’의 역사관과 ‘반공’의 역사관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이에 편승한 정치인의 ‘정치’에 의하여 더욱 깊어져 가고 있으므로 이에 편승한 정치인들이 도태되고 국민 스스로가 자각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최근 두 사건은 국민의 잠재적인 반일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수년 전 있었던 태평양 전쟁의 전범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은 법의 해석을 빌어 지난 역사로 인하여 우리 국민에게 잠재되어 있던 반일의 역사관을 교묘하게 깨웠다. 그 결과 국민의 반일 감정은 절정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던 일본의 소비재 기업 중 하나는 매장을 상당수 철수하기도 하였다. 물론 일제의 강압 통치로 인하여 희생된 분들과 후손들, 그중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이 국민의 항일감정은 충족시켰을지는 몰라도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실정법으로 일제의 강압 통치와 그로 인한 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법적 타당성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불에 기름을 더한 듯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일본은 정화수라고 부른다)의 방류이다. ‘반일’을 외치던 그들은 그 오염수로 인하여 당장 우리 국민이 수산물을 먹기만 하면 모두 방사능으로 인하여 큰 문제가 생길 것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의견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의 동쪽, 즉 후쿠시마 앞을 지나는 쿠로시오해류는 주 방향이 베링해를 향하고 있고 베링해를 지나 태평양을 한 바퀴 돌아오면서 5-7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동안 태평양의 바닷물과 섞여 희석되게 된다. 이 쿠로시오해류에 의해 방사능 오염수(일본은 정화수라고 이름한다)가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베링해와 캐나다, 미국의 서해안인데 사실상 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가 우리에게 전혀 영향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으나 이는 과학에 맡겨야 할 문제이지 우리의 감정에 맡겨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작 그들은 중국의 동해안에 산재한 원자력발전소와 발해만과 황하강, 양자강에서 나오는 각종 오염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비를 말하지 않고 있다. 유독 먼 바다를 향하는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신들의 ‘반일’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책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유명관광지에는 우리나라 관광객이 넘쳐나고 유명 골프장에는 골프를 즐기는 우리나라 골퍼들이 원정 골프를 즐기고 있다. 심지어 오염수를 들먹이며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세력에 속한 정치인 중 이미 일본에서 아** 맥주를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건배하는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에 올렸었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그들이 외치는 ‘항일’은 누구를 위한 항일이고 무엇을 위한 ‘항일’이었던가? 참으로 모순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이에 대하여 언론에 보도되었음에도 당사자는 이에 대하여 유감의 표시를 한 적이 없다) 교회는 분열에서 자유로운가? 이제 얼마 후에는 또 선거를 치르게 된다. 이 선거기간 ‘정책’이 아니라 국민을 혼돈에 빠뜨리는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 선출직 공무원의 대표 격인 국회의원은 국민(지역구)으로부터 존중과 존경을 받아 선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거의 양당 정치로 이루어진 정치구조에서 우리는 동의할 수 없거나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노선에 따라 투표하게 되고 그에 따른 지지로 선출되는 것이다. 즉, 정치인은 존경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지, 즉 투표로 선출된다. 따라서 정치인은 가치 있는 정책을 입안하고 소신을 세우기보다 ‘정치’를 통한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당선을 위해) 지지를 더 얻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때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를 외면하기도 한다. 선거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 선출되고 국회의원, 도의원 중 교회 중직자의 비율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정당에서 ‘성적지향’을 교묘하게 감춘 차별금지법과 그 유사한 법률, 교사의 권위를 침해하여 결국 사회 전반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학생인권조례 등과 관련한 입법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가? 지난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교파별로 집권 정부를 지지하느냐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느냐로 나누어졌던 한국교회이다. 지금의 분열 상황에서도 교회는 자유스럽지 못하다. 신사참배에 따른 신앙 문제로 ‘반일’을 외칠 수 있고 유물사관을 반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직접적 피해로 ‘반공’도 외칠 수 있는 교회지만 역시 같은 구도로 분열되어 있다. 일부라고 하지만 목회자와 장로는 은연중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어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고 교인들도 교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할 교회 역시 진영논리와 정치 성향에 따라 나누어지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4월에 있을 총선에서 양측은 건곤일척의 대결을 할 것이다. 대통령을 탄생시켰으나 국회의 소수당인 집권당은 당연히 그 구도를 바꾸려 할 것이고 외형상 야당이지만 국회의 압도적 다수로 사실상 집권당처럼 행세하는 야당은 이 구도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거대 양당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으면 소수의 야당은 이 틈새에서 자신들이 과반수를 만드는데 수를 보태는 대신 과도한 정치적 이익을 가지려 할 것이다. 이 선거기간 동안 정치세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교회를 이용하려 할 것이고 이는 개교회 내부의 분열, 교회 간 분열, 교파끼리의 잠재적 분열까지 가져올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깨어야 한다. 분열 앞에서 교회는 하나님 말씀 앞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진영이 나누어진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제한된 안타까움이 있어도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가 말씀의 가르침과 한계를 벗어나 정치와 가까이하게 되면 교회가 또 하나의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굳건히 세우지 못하고 교회답지 못할 때 주변 사회는 끊임없이 교회에 도전해 오고 교회의 자리를 좁히려 할 것이다. 이제 교회의 지도자와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이 나라의 분열을 해소할 수 있도록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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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3-06
  • [최호숙 목사] 인간 지략(智略)을 넘어 은총(恩寵)의 복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지혜와 지식에 한계가 있고, 능력에 한계가 있고, 건강과 생명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원한 존재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절대자가 필요한 것인데 그 절대자가 종교마다 다르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전지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그 전능자로부터 주시는 은총의 복을 받으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 삼국지의 한 대목에 “지자막여복자(智者莫如福者)”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복 받은 사람만큼은 못하다는 뜻이다. 장비의 군사들이 조조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살기 위하여 수풀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뒤쫓아 가던 조조는 지략을 써서 화공(火攻)으로 수풀을 불살라 버리면 장비의 군사를 일시에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불을 질렀다. 그때 하늘에서 한 점의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더니 난데없이 장대 같은 소나기를 마구 퍼붓는 것이었다. 승리를 위한 지략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조의 인간적 지략은 하늘의 복을 받은 장비를 이길 수 없었다. 조조는 이를 보고 “지자막여복자(智者莫如福者)”라고 탄식했다. 십 년이 넘도록 정진 수도하고 이제 하산하려는 제자가 스승에게 하직 인사를 하면서 간청을 올렸다. “스승님, 떠나는 저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부탁하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그만하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복을 받은 사람에게는 절대 함부로 덤비지 말라.” ‘복’은 그만큼 위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지만 바벨론 제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하나님의 큰 은총의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우상 앞에 드려진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명령이 있었지만 왕의 명령일지라도 거절했다. 죽음의 상황이 되어야 하는데 형통의 길이 열렸다. 또한 법령을 정하여 왕 외에 어떤 신에게든지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처형을 받게 되었다. 다니엘은 이 법령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왕의 명령을 어겼기에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사자들의 입을 막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다. 다니엘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총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고 건강하다고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말세에 처한 성도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 5:6)”고 하였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주어진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감사하며 겸비(謙卑)함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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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4-03-06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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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3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코너로 그동안 타 종교권이나 일반적인 용어들에서 그 말에 대한 바른 인식과 잘못 사용하고 있는 내용들을 발췌하여 논하였다. 특히 그동안은 우리 한국어만의 특징인 경어 사용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제는 다시 종전에 연재해왔던 교회용어들 중에서 그 의미 분석이나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말들을 발췌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용어 중의 하나이면서도 혼란을 일으키는 교회당(성전, 예배당)에 대한 바른 용어를 논하고자 한다. II. ‘성전’, ‘교회당’,‘예배당’의 용어 분석 교회 용어 중에 가장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용어 중의 하나는 곳곳에 세워진 교회당을 교회, 교회당, 성전, 예배당 등 각기 생각대로 사용함으로서 통일된 용어가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건물을 보고 교회라고 칭하는 것은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잘못된 표현임을 거의 대부분 알기 때문에 여기에는 생략하고 나머지 용어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1. 성전(聖殿)의 용어 분석 : 많은 사람들이 성전, 성전 건축이란 말을 한다. 성전이 무엇인가? 히브리어로 ‘헤칼’로 궁전, 큰집, 성전이란 뜻이며, 헬라어로는 ‘히에론’, ‘나오스’로서 거룩한 곳, 성소, 제단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성전이란 용어는 거의 모든 종교의 신전을 말할 때도 같은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19장 27절의 아데미 여신의 신전도 ‘히에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성경의 자자들은 여호와의 성전, 주의 성전 등으로 우상숭배의 신전과 구분하고 있다. 한자어로는 거룩할 성(聖), 궁궐 전(殿)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근본적인 용어의 뜻은 뒤로 두고라도 성전은 구약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의 개념이 주를 이루고 있다. 2. 교회당(敎會堂)의 용어 분석 : 보편적으로 잘 알고 있는 대로 교회는 신약에서만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에클레시아’로 교회, 회중을 뜻한다. 회중의 뜻을 가진 ‘쉬나고게’와도 거의 같은 뜻이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다 교회란 의미도 있다. 한자어로는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모든 뜻을 합쳐서 교회들이 모이는 집이란 뜻에서 집 堂자를 쓰서 교회당이라고 말하고 있다. 3. 예배당(禮拜堂)의 용어 분석: 구약에서의 예배 용어는 찾는다의 뜻인 ‘다라쉬’. 일하다, 섬긴다의 뜻인 ‘아바드’. 엎드리다의 뜻인 ‘사가드’ 등의 여러 용어들이 있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개념을 그대로 이어 받은 ‘레이투르기아’, ‘세보마이’‘라트레이아’등의 많은 용어들이 있다. 한자어로 예배는 예절 예(禮), 절할 배(拜)를 사용하여 위의 원어적 뜻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런 행위를 하는 곳을 집 당(堂)자로 표기하고 있다. III. ‘성전’, ‘교회당’,‘예배당’의 적합성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거의 예배당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교회당으로 사용하거나 교인들만의 대화에서는 성전으로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용어가 적합한가이다. 먼저 성전이란 용어는 앞에서 논한 대로 구약의 제사장이 행하는 성전의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로 여신 만인제사장 시대인 신약시대 이후인 현대에서는 다양한 개념의 교회당을 성전이라는 용어로 국한시켜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교회당과 예배당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연신대 등에서 강의한 최성수 교수는 ‘교회당’으로, 천안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김석한 교수는 예배당으로 하되 ‘OO 교회 예배당’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아직까지 우리는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용어조차도 성전과 교회, 교회당, 예배당 등으로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는 구약의 성전 개념대로 거룩한 장소인 성전으로 말하고 있고, 또한 건물 안에서 가르치는 일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당도 적합한 말이고, 예배도 드리기 때문에 예배당도 옳은 말이다. 그만큼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의 견해로는 꼭 어떤 용어가 적합하다고 볼 수는 없는 일로 여겨진다. 단지 제언하는 바는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현재로는 교회당이기 때문에 이를 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떠할까 라는 것이며, 너무 용어의 율법주의에 빠져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오류는 범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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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조희완 목사] 인내의 결과 (약5:7-11)
    서양 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마리의 개구리가 창고 안을 뛰어 다니다가 그만 우유 통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유 통에 빠진 두 마리의 개구리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마리는 미끄러운 우유 통을 몇 번 기어오르다가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고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한 나머지 그 안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반드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밤새도록 있는 힘을 다해서 우유 통을 휘저었습니다. 그 결과 액체였던 우유가 점점 버터로 변했고 개구리는 그 단단해진 버터를 밟고 우유 통 밖으로 뛰어나올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포기와 절망은 우리를 실패와 죽음으로 인도하지만 인내와 희망은 우리를 성공과 생명으로 인도해 줍니다. 옛말에 “무인 불승”(無忍不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승리도 없다”는 말입니다. 남다른 결과를 성취한 사람이나, 남다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남다른 인내와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인내하지 않았는데도 승리하고 성공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 “무인 불승”(無忍不勝)이라는 말을 꼭 기억하고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은 장거리 마라톤 경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내가 요구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내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내하면 반드시 기억해 주십니다.(살전1:3,4) 둘째로, 인내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히6:13-15) 셋째로, 인내하면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약5:10-11절) 힘든 일이 있더라도 우리 모두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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