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 『주기철의 일사각오 순교신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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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밀알교회)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일대기 창작 오페라」를‘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이하 창기장총) 주최로 하게하심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관계자 모두에게 격려와 힘찬 박수를 보낸다. 본 오페라 공연을 보고 느낀 소감을 다음 몇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먼저, 기독교 문화콘텐츠(contents)로 복음을 세상과 함께 할 수 있음이 대단히 고무적(鼓舞的)인 현상이다. 코로나 팬데믹(pandemic)으로 인해 기독교가 마치 팬데믹의 주범인 것처럼 오해를 받아온 점이 너무도 가슴 아팠으나 코로나의 늪에서 벗어나는 시점에서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과 함께 할 수 있음이 너무도 감동적이다. 또한 이 같은 일에 사회일각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회와 복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다가온 점이다. 정기국회 기간 중인데도 지역을 사랑하는 국회위원과, 도지사, 시장, 그리고 각 시도위원장과 경남기독교총연합회장과 각계 각층의 많은 대표들과 창원은 물론 진주, 통영, 거제 경남의 중심도시의 교회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1-2회 공연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메운 교회와 시민들의 열기에 감동했다. 이제 앞으로 얼마든지 기독교가 성경의 복음을 문화와 예술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주기철은 경남이 낳은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교회사적 인물로서 경남과 창원 시민의 자랑이다. 앞으로 우리 고장의 손양원과 장기려, 전영창과 조수옥 같은인물을 많이 발굴하여 기독교 문화 예술의 폭을 다양한 계층으로 넓혀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 창기장총의 헌신적인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주기철의 오페라 공연은 지난 창기장총 창립총회의 기념사업으로 시작하였다가 기대 이상의 반응과 호응으로 창원시의 전폭적인 지원과 창원을 비롯한 경남일대 여러 교회들의 아낌없는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경남의 여러 시와 도가 많은 연합회와 기구가 있으나 그간 모든 기관들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연합사업 정도에서 그쳤지만 이번 창기장총의 오페라 공연은 기독교 문화 콘텐츠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교회가 가감하게 울타리를 허물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는 이를 주체한 창기장총 회원들이 사회 곳곳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빛과 소금으로써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기에 보다 쉽게 사회 속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특별히 창작오페라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조직위원회 모든 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프로 배우의 연기력을 갖춘 주요 배우들은 장문의 대본을 아무런 주저 없이 숙지하여 연출하는 연기력은 창원시민과 경남도민의 저력이요 자부심과 긍지였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기는 하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조금 아쉬운 점 두 가지 정도로 첨언(添言)해 드리고자 한다. 우리에게 사실(fact)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는 관점(觀點, point of view)일 수 있다. 그래서 필자의 지적을 또 다른 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그루터기인물사’로 『주기철의 일사각오순교신앙』을 저술한 입장에서 보는 아쉬움이었다. 하나는 오산학교의 등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 웅천이기에웅천이 조명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주기철의 애국운동의 동기부여는 오산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주기철의 민족적 애국심이 오산학교의 유영모 선생과 고당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평양 산정현교회가 폐쇄되는 장면이 언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1막과 2막에서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는 비교적 소상하게 언급이 되어 우리 지역을 대변해 주는 자부심과 긍지는 가졌으나 그에 비하여 평양 산정현교회가 많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시로서는 평양과 서북지역이 한국기독교를 대변하고 평양의 산정현교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한 교회로서 길선주(吉善宙)에 이어 주기철을 담임목사로 청빙한 점을 일제가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는 지나친 신학적인 면의 부각이나 아니면 목회자의 품격과 교회 순결성을 고려하여 선교적인 측면에서 간과(看過)한 것으로 생각되나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신앙의 핵심이기에 기독교인과 교회사적으로는 꼭 숙지하고 있어야 다음세대에 역사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경남노회 신사참배 반대결의안”에 대하여는 아직도 학계에서 이를 검정하고 있는 중이며, 문헌상으로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필자 역시도 그때를 전후해서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당회록이나 경남(법통)노회 노회록에서 그 기록과 그와 유사한 흔적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과 1939년 12월 19일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 있을 때 평양노회가 그의 목사직을 파면한 것, 1940년 4월 20일에 산정현교회가 폐쇄 당한 것은 일사각오로 나아가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앞에 다 무너갈 때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와당회와 제직회, 그리고 온 교회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6년 간 폐쇄를 당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지하교회를 연연하면서 경건생활을 유지해 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기철은 한국교회의 거룩한 씨, 그루터기였다. 한국교회를 대표한 장로교회 총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였고, 평양노회에서 목사직을 파면하기까지도 예언자의 권위를 지켰고, 산정현교회 당회는 끝까지 교회의 거룩성을 지켰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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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 창작 오페라」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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