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2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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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칼을 허리에 차고" 홀로 서 계십니다.

 

교회를 통해 각 세대마다 당신의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시대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언약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을 각인시켜 주시며

 

이 땅의 수많은 무명의 바울들과 무명의 다윗들과 그 용사들이 지금도 묵묵히 교회를 파수하며 믿음의 계승을 이어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부터 수 많은 이단들과 새로운 신학 사상들이 성경의 무오성에 잣대를 들이대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비판을 위한 비판을 쏟아내며, 상투적인 글귀만 무의미하게 반복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와 더불어 천재지변과 팬데믹 환경을 탓하며 교회마다 예수 믿는 자들이 줄어들고, 이전의 신실하던 자들조차 신앙의 침체기를 겪으며 회복이 어렵고, 전도가 안 되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이때지만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다 예견되어져 있던 것들임을 말씀을 통해 조명받습니다.

 

참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할 때,

4:1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점차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알곡을 거두시고 계시는 주님,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무엇보다 비극 중의 비극은 영적으로 타락한 말씀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에 든 지식은 많지만, 영적 생활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고 있다는 것도 가슴 아픕니다.

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에 '전문가'가 아닐까? 생각해 볼 때, 초대교회나 박해시대 때의 신앙 운동에서 많이 읽었던 하나님을 향한 압도적인 경외감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금송아지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와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변호하는 일에 너무 치중하고 있고,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며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 바빠 결국 진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닐까 감히 아니,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성 이그나티우스(St. Ignatius)

"그리스도가 아닌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라고 당부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서 계십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구원한다고 세상의 비위를 맞추거나

세상의 정서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런 어설픈 시도는 그 분의 방법이 아닙니다.

세대가 바뀌더라도 세대의 주인은 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열의가 식었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마음이 굽은 자들이나 설교가 이전과 다르게 들린다는 자들이나 찬송이 부르기 싫다는 자들이나 혹은 내 감정을 노크하는 찬양은 좋은 데 말씀은 듣기 싫다는 자들이나 등등 이러한 신앙의 퇴보는 결국 그 마음에서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식을 때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 사실을 아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과를 낳습니다.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최선의 것이 아닌 가장 안전한 것을 추구합니다. 늘 합리화를 궁리하거나 내게 유리하고 가능한 결과를 저울질하기에 바쁩니다.

 

우리는 범사 즉, 모든 일에서 그에게까지 자랄 것을 명령받고 있지만(4:15)

믿음 안에서 안정되지 못한 것은 성장하지 못함을 봅니다.

끊임없이 옮겨 심는 식물은 절대로 무성해지지 않습니다. 그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은 결코 요동할 수 없는 시온산과 같아야 할 것을 되새깁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분명히 하고, 선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분을 순전하게 섬겨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119:30-31)"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라는 배()는 성전이든 개인이든 요동할 수는 있어도 전복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46: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이라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그 구원을 촉진 시키는 에벤에셀이 될 것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아서 그의 섭리의 눈꺼풀이 날마다 이를 덮고 보호하십니다.

 

주의 율례들의 도를 저희들에게 가르치시사 저희가 끝까지 지키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119:33)

홍수 뒤에 싹이 난 노아의 감람나무가 부활에 대한 생생한 표상이듯이 티끌에 거하는 자들이 다시 깨어 노래하는 시간을 기다립니다.(26:19)

에스겔서에서 교회는 마른 뼈에 비유되지만 하나님께서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사 뼈들이 소생하였음을 기억합니다. 큰 군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10)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의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하시려고 의롭게 하심을 깨닫습니다.

 

성부 하나님! 저희를 세우시고(고후1:21)

성자 하나님! 저희를 확증하시고(고전1:8)

성령 하나님! 저희를 보증하심(1:13)을 감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화롯불 옆에서 곁불을 쬐는 이 때에 저희를 참으로 믿게 하시려고, 참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 감사,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큰 군대로 부르시는 하나님,

말씀의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 앞에 부복하게 하소서.

 

 

글. 이정은 사모(부산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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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위엄을 입으소서!(시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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