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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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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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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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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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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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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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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신재철 목사] 500원으로 시작된 삶
    오늘도 츄리닝 차림에 칫솔 들고 동생과 목욕을 다녀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오던 삶의 패턴이다. 늘 가벼운 걸음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고등학교 첫 수능모의고사 결과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까지 버티던 성적이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중학교 때는 전교 10등에서 20등을 오갔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 받아든 첫 성적표는 반에서 10등이라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늘 벼락치기로 성적을 유지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무 큰 폭으로 떨어져서 믿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며 큰 꿈을 품고 부모님을 떠나 대전으로 왔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경찰대학을 가서 간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나도 부모님의 소원대로 이제는 화이트칼라로 양복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동자이신 아버지의 삶을 보았기에 부모님도 나도 더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두 날개를 가지고 성공할 것이라 믿고 달려왔다. 첫째는 공부 잘해서 꼭 성공하겠다는 것. 둘째는 도덕성으로 꼭 성공하겠다는 것. 착실하게 공부해서 내 삶을 멋지게 만들어내고 싶었다. 양복입고 출근하며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의 배웅을 받는 것? 아, 집은 밝은 톤의 아파트이면 좋겠다. 하지만 내 나이 열일곱에 벌써 한쪽 날개가 꺾여버렸다. 추락하는 것 같다. “다 끝났어.” 시험 한 번에 이런 바닥을 경험 할 수 있구나. 고1, 4월의 어느 일요일은 그렇게 우울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 날이 내 인생을 뒤집는 또 다른 하루가 될 것 역시 예상 못했다. 평소보다 말없이 목욕탕에서 돌아오던 길, 동생은 이유도 모른 채 형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 거의 도착할 즈음 집 앞의 작은 교회에 눈이 머문다. 늘 걷던 길인데...... “이곳에 교회가 있었던가?” 갑자기 어린 시절 잠시 다녔던 교회가 떠올랐다. 교회 가자며 빵으로 나를 유혹했던 농협 아저씨. 종이 괘도에 그려진 악보를 따라 즐겁게 부르던 노래. 늘 좋은 향기를 내셨던 선생님. 내게 교회는 좋은 곳이었다. 성탄 연극 연습하며 마구간 동물 역할이 주어져 섭섭함에 교회를 끊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교회를 다니고 있었을까? 갑자기 눈에 들어온 교회로 생각이 많아졌다. “교회 다녀볼까?” 결정은 아니지만 끌림이 있었다. 동생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지금 생각해보면 왜 동생을 돌려보냈을까 싶다.) 나는 나무 냄새 짙은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30여명 모여 예배하는 중이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마치 나 어릴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으로 관객이 되었다. 그리고 헌금시간, 봉사를 맡은 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친구 사이를 오가며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이 가장 뒤에 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나에게까지 왔다. 바구니를 내 앞에 들이민다.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예배 동참했으니 헌금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전해온다. 나는 초코렛을 많이 좋아했다. 큰 사각형 초콜렛이 당시 500원이어서 늘 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하나 정도는 넣고 다녔다. 마침 내 추리닝 주머니에 500원이 있었다. 고민했다. 짧은 시간, 고민은 길었다. 그리고 아이의 착한 눈을 피하지 못하고 500원을 헌금바구니에 넣고야 만다. 그제야 평안한 얼굴로 아이는 강단으로 돌아갔다. “그래, 교회 다녀보자!” 그렇게 신앙을 가슴 한 귀퉁이에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신앙이 나를 이끌어주며 꺾이지 않는 날개가 되었음은 부인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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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오성한 목사] 중언부언
    신약에서의 기도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라고 하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길쌈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기르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이 꽃 보다 못했다”고 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희의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채운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도하란다. 주기도문을 말씀하실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8-9)라고 가르치심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이방인의 기도와 완전히 다른 것이 우리의 기도다. 기도를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알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알고 하는 기도다. 비인격적인 것을 간구하는 기도는 이루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인격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는 한두 번에 족하다. 그리고 믿고 기다리면 된다. 인격적인 기도는 반복해도 좋다. 단순한 표현이고 반복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지만 반복할 때 더 친밀해진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으로 가득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능력이 저에게 넘쳐 남을 감사합니다.” 등의 약속을 묵상하며 고백하는 것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하셨다. 받은 줄로 믿고 하는 기도는 구약에 기도의 가르침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속을 품고 있는 것이 기도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을 약속하셨다. 영원토록 함께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 저는 임마누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감사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고 하나님께 올려 드려라. 그리고 자신에게도 말해 줘라. “성한아, 너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아들이야. 너는 어디를 가든지 두려울 것 없어. 오늘도 승리의 날이야.”라고 말하고 기도하며 감격과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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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박봉석 목사] 방법보다 방향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마차를 만났습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태워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대답했습니다. “한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나그네는 잠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마부에게 묻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그 말에 나그네는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 그 말을 듣고 마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이 탈무드의 이야기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방향이 맞으면 설령 늦어도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속도를 높인다 하더라도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모자를 측은히 여겨서 아들을 고치기 위한 성금을 모았습니다. 마을의 의사도 이 소문을 듣고 감동을 받아 아들을 무료로 고쳐주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수술 날이 잡혔고 수술은 다행히 대성공이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의사에게 정성껏 감사하는 인사를 하고 그때부터 아이에게 걷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들은 마침내 다른 아이들처럼 걷기도 하고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마을을 떠나 도시의 병원으로 전근을 갔던 의사는 우연히 그 아이 엄마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의사는 자신이 고쳐준 그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부인 그 때 그 아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요?” 엄마는 머뭇머뭇하면서 얼른 대답을 못하다가 마지못해 말했습니다. “지금 내 아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로 형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놀라고 실망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의사를 향하여 이 엄마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저는 그 아들에게 걷는 법만 가르치려고 애를 썼지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는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걷는 방법을 익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곳은 걷는 방향입니다. 그것은 인생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길을 화려하고 세련되게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떵떵거리며 산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비록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바르다면 그 인생은 성공작입니다. 왜냐하면 심판 주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느냐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얼마나 그 목적을 따라 살아왔느냐를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바른 사람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거룩한 사람은 삶 또한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닌 방향입니다. 신발을 신을 때마다 일부러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어디고 가고 있는가?”를 늘 물으십시오. “아 나는 지금 믿음의 길 가고 있고 생명의 길을 가고 있고 천국의 길 가고 있지. 그러니 후회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네.” 늘 그 확신으로 살 수 있다면 최고의 인생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인생은 화려한 인생이 아닌 목적이 바른 거룩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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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김성수 총장]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
    미국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주 미시간(Michigan)에 소재하고 있는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의 이념적 기초를 놓은 학자로 존중받고 있는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 박사는 1970년대에 경향성 학습(Tendency Learning)을 강하게 주창한바 있습니다. ‘경향성’이란 나타나 있는 어떤 모습이라기 보다는 숨어 있는 속성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표면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타나는 특성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이 녹고, 유리에 압력이나 충격을 가하면 유리가 깨어지며, 자석에 쇠붙이를 가까이 하면 자석은 그 쇠붙이를 끌어 당깁니다. 이때 ‘녹는 성질’, ‘깨어지는 성질’, ‘끌어당기는 성질’ 등이 바로 경향성이라는 속성입니다. 경향성 학습이란 ‘학습이나 훈련 과정의 결과로 학습자편의 이와 같은 어떤 경향성을 증진시키거나 감소시키는 학습’을 의미합니다. 월터스톨프가 경향성 학습을 주창한 이유는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관점이나 사고를 형성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형성해 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적 표식을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 당시 부산지역 교계 지도자 초청만찬회에 강사로 초청된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분들 중에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여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바쁜 일정 속에 시장실에 찾아 온 교계 인사 가운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길게 기도할 때는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흘러듣기에는 무엇인가 뼈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스럽게 표시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 어떤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리스도인 됨의 숨은 속성을 어김없이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마리아인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행동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행동 경향성을 어떻게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월터스톨프에 의하면 여기에는 훈육, 모델링, 그리고 이유 제공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전략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인 행동에는 보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에는 불유쾌한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은 학습자의 경향성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방법 역시 경향성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교회 수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는데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고 깊은 바닷물을 짜게 하는 것은 0.3%의 소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나 행사가 없어도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는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신앙을 삶 속에서 어김없이 구현할 수 있는 행동 경향성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부패해가는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차세대를 향해서 이와 같은 행동 경향성을 형성시켜줄 수 있는 효율적인 학습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훈육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해 버렸으며,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했고, 또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거나 행동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언약의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모와 교사된 우리들이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현대교회는 특별히 세상을 향해서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지자적 용기와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현장 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모델링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절연되거나 세상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악마와도 같은 한 사람 독재자로 인해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금 받은 고귀한 생명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델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나게 떠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신앙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어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용사들로 양육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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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4
    I. 서언(序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에는 오늘 논하고자 하는 큰 대(大)자도 그 중의 하나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대(大)자를 쓰는 단어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산, 대가족, 대궐, 대감, 대청, 대교, 대 심방, 사대문 등등 대자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규모가 크지 않는 것도 크게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큰 大를 사용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 이유가 있다면,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 같은 대국에 비해 소국의 서러움을 안고 살아왔다. 현대에 와서도 중국 뿐 아니라 미국 같은 대국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뼈에 사무치도록 아주 큰 민족이다. 이러한 사대주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언어문화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그 많은 용어들 중에서 특히 큰 대자를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해 온 것도 그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II. 교회용어에서의 큰 대(大)자의 남용 1.대예배(大禮拜): 보통 주일 오전 예배를 두고 말할 때 대예배라고 칭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예배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고,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인식과 용어 사용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와 소 예배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학적인 면으로 볼 때 예배는 항상 무한한 크신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행위이기 때문에, 차별적 뜻을 가진 대소(大小)나 다소(多少)의 뜻을 가진 말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2.주일 낮 예배 : 필자의 어릴 때만 해도 주일에는 낮과 저녁으로 나누어 예배를 드렸다. 이로 인하여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 예배라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오후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많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관계로 인하여 대예배나 주일 낮 예배라는 말 보다는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 주일 저녁예배 등으로 명칭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또 어떤 신학자는 모두 함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공동예배”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어법상으로 맞는 명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3.대예배실과 소 예배실 : 예배실이 여럿 있는 교회당에서는 예배실을 구분하기 위해서 대, 중, 소로 나뉘어서 명칭을 붙인다. 이는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의 대, 중, 소는‘예배’란 말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場所)인 ‘실(室)’을 수식하기 때문에 장소의 대 소에 따라 대 예배실, 중예배실, 소 예배실로 나누는 것도 무방하다. 하지만, 예배실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는 대 예배실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잘못 된 경우이다. 4.대 심방: 흔히 전 교인 가정을 심방할 때“대 심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어법상으로 다소의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심방이란 명사 앞에 접두어 大자는, 대상의 다수적 범위와 사물의 수량적 전체규모를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이런 논리로 보면 작은 규모의 심방은“소 심방”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심방은 대소로 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볼 때 대심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전체심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고, 만약 이것이 매년 정기적으로 하는 심방이라면 “정기심방”이라는 말도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 볼 때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흔히 쓰는 교회의 각종 예배적인 용어인데도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되는 용어들이 아주 허다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은 일부 예배학자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소견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합한 바른 용어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도 다 같이 연구하는 자세로 올바른 교회 언어문화를 창출 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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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조희완 목사] 낙심은 금물 (눅18:1-8)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되면서부터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술 소비량에 전 세계에서 1위, 자동차 사고율이 전 세계에서 1위, 암 사망률이 전 세계에서 1위, 여성 흡연율 세계 1위, 임신 낙태율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살률이 전 세계에서 1위입니다. 인구 10만 명 당 약 25명이 자살을 하고, 하루 평균 46명씩 자살을 하는 것으로 집계가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살을 부추기거나 자살할 사람을 찾는 인터넷사이트가 단속에도 불구하고 172개나 버젓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보니까 “자살 신드롬”이라는 말이 등장을 하고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TV에서 웬만한 자살 뉴스가 나와도 무관심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방예의지국으로 생명을 존중하던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어버렸는지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막다른 길에 다달았다고 생각을 하면 낙심을 하고 비관을 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목숨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그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끊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살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은 동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낙심”(落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기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낙심하고 절망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이게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눅18:1) 둘째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면 안 됩니다.(갈6:9) 셋째는, 신앙생활로 인하여 환난 당할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엡3:15) 어려운 시대에 믿음을 잘 지키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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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박동철 장로] ‘성도 이어령’ 소천 그 후
    시대의 지성, 우리 모두의 스승 이어령 박사께서 지난 2월 26일 89세의 일기로 소천하셨다. 故(고) 이 박사님은 15년 전 딸이었던 故 이민아 목사로부터 전도 받아 회심하고, 세례를 받고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간증과 강연으로 우리들에게 복음의 변증적 희망의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가셨다. 우리나라 학계 예술 문화계에 대표 지성인으로 수많은 저서와 명강연등으로 온 국민 정서에 이어령의 어록은 수없이 남겨졌다. 우리 기독교계는 늦게 73세 때 주님을 만나 특유한 말씀의 깊고 넓은 사유에서 건져낸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대표작에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등 그동안 늦은 자가 먼저 되듯 짧은 기간에 많은 복음 저서까지 남겼다. 필자는 마지막 유작으로 엮어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 듣고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이어령의 영성은 어디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냈을까. 박사님은 평소 깊은 지성의 사고에서 나라의 비전, 사회의 품격 그리고 개개인의 삶 속에 파고드는 희망의 두레박질이 여느 석학들보다 남다른 데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일제와 6.25 전쟁을 겪는 동안 암울했던 국민 정서에 던지는 메시지마다 희망이었다. 일본에 항상 열등감에 젖어 있던 우리들은 ‘축소지향의 일본’이란 베스트셀러의 박사님의 저서를 읽고 오늘날 일본을 넘는데 우리 모두의 키워드가 된 것 부인 못할 일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의 국민적 긍정의 희망을 한껏 불어넣었다. 지난 88년 올림픽 때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었고 올림픽경기 개회식 오픈 행사에 박사님이 한국 소년의 굴렁쇠 굴리기를 기획함으로써 영상이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세계 속의 한국 정서를 세계화하는데 소리 없는 큰 울림이 되었다. 어느 누군가 이어령을 평가한 적이 있다. 단군 이후 최고의 천재라고. 천재라고 다할 수 있겠는가. 박사님이 '마지막 수업'에서 강조한 메시지를 기억해 본다.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성의 열매는 선악과를 먹은 우리들이 찾을 수 있는 한계의 열매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과 함께 끝없이 찾는 지성과 그리고 과학기술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것은 결국 하늘 아래 머물 수밖에 없는 바벨탑의 그곳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는 믿음의 영성에서 세상의 온갖 죄악을 넘을 수 있는 구원과 축복을 만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지성도 과학도 영성을 만나야 진정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지성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있을지언정 결코 그것이 복음을 해결할 수 없다. 오직 복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뿐임을 변증했다. 4차 산업시대 AI의 공간에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복음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대의 질문과 흐름을 단연코 설명해냈다. 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이 주창했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이치에 따라 믿음의 공동체만이 살 수 있는 시대 즉 교회가 AI를 넘을 수 있음을 설명했다. 성경과 과학기술과의 거대한 담론에서 서로에게 깊이 들어가지 않고 존중할 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생명이라는 위대한 복음이 온누리를 덮어 나갈 것임을 설파했다. 이 높고 깊은 말씀의 사유, 이제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박사님의 소천에 밀려오는 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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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박동철 장로] 3.1운동 103주년 교회의 항일독립운동을 다시 생각하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3주년이 되는 해다. 사는 날 동안 잊을 수 없는 온 백성의 비탄과 절망 속에서 일어섰던 민족의 거대한 함성. 그 함성이 온 땅에 가득 찼던 3.1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조선독립만세 운동은 한민족의 역사적 거대한 거사였다. 당시 한반도에 사는 백성은 겨우 2천만 명. 이중 20만 명에 불과하던 예수 믿는 기독교인이 3.1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역사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이맘때 당시를 회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교회마다 3.1절 주일을 지켜가고 있다. 거대한 거사를 주도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음을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다. 당시 3.1운동의 불길을 지펴나가는데 전국의 교회들이 불쏘시개가 되었다는 사실도 다시 들추지 않아도 된다. 전국 도시와 농촌 곳곳에 자그마한 예배당이 독립운동에 쓸 태극기 만드는 장소가 되고 거사의 연락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고마움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130여 년 전 캄캄했던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벽안의 선교사들의 순교의 열매가 아닌가. 필자는 지난 1919년 사단법인 경남기독문화원과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와 함께 편찬위원장을 맡아 '다시보는 경남의 3.1운동' 역사서를 발간했다. 목회를 하시면서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밀양 무지개전원교회 박시영 목사님의 책임 집필에 힘입어 무게 있는 역사서를 발간했다. 기쁜 일은 이후 책자의 대부분이 교회와 경남 전역 중·고등학교에 보급되어 편찬에 땀 흘린 힘든 시간만큼 보람 또한 있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이 온 백성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당시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가 앞장서 민족의 저항운동으로 승화시켰다는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뿐이다. 3.1독립운동이 나라의 완전 독립을 찾지 못했지만 2개월 동안 이어진 백성의 외침이 있었고 수많은 백성이 순국 순교하는 슬픔을 남겼다. 1년여 동안 독립운동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작으나마 이어져 침묵 속에 독립정신이 백성의 뇌리에 심어졌다. 독립을 위한 정치적 행보도 이어졌다.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은밀히 국외에서 준비되던 우리의 주권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후 곡절과 고난 속에서 긴 세월 순국 순교의 희생에서 대한 조선은 36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떠했는가. 1945년 광복도 잠시 6.25의 참상을 겪고 전쟁 복구의 과정에서 처참한 한민족의 생활상은 표현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예수 복음의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한 기도 소리가 났고 새벽기도운동이 교회는 물론 온 나라를 흔들어 깨웠다. 나라사랑의 교회 독립운동이 나라 발전의 산 제물이 된것이다. 초근목피를 면치 못하던 세계서 가장 못살던 대한민국이 반세기 만에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된 것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던 때 느헤미야 다니엘 에스더 같은 선지자들이 나라를 살리는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힘써 기도했던 애국의 기도가 우리에게도 일어났고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사무엘상 2장 9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 잠잠케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으리로다. 3.1절 103주년에 더욱 숙연해지는 나라사랑의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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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김성수 총장] 혼란한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오늘날 국내외 여러 혼란스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요? 북한 김정은 독재정권의 인권유린, 탄도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 및 유럽 연합과 러시아의 대치, 중국 시진핑과 러시아 푸틴의 전략적 동맹과 미국의 긴장, 전염병과 지진, 테러 특히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잊혀 지지 않고 있는 끔찍한 사건으로 시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이 사용한 화학가스로 인해서 수많은 어린 애들까지 고통당하는 참혹한 모습, 그리고 국내의 혼탁한 정치상황 등을 뉴스로 접하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참으로 복잡하고, 안타깝고, 가슴 아프고,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불안하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오늘날 격동치는 이런 세상 역사를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바라보면 아마도 그 옛날 다니엘이 본 환상이 보여질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서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와 큰 짐승들이 나와 있는 열방의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는 열방들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으며, 서로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이고, 신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밤낮으로 라디오와 TV에서 뉴스로 보도 하고 있는 내용은 바로 이들 네 큰 짐승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라디오나 TV에서 뉴스로 보도하고 있지 않는 어떤 것에 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눈은 겉으로 보이는 사건 배후에 있는 더 중요한 어떤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환상을 통해 큰 바다와 네 짐승들만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단7:9).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은 이 보좌로부터 큰 짐승들 넷이 모두 통제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내용인지 모릅니다. 큰 짐승 넷이 소용돌이치는 흉흉한 바다 위에는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보좌가 있습니다. 이 보좌는 불로 만들어져 있고, 또 불타는 바퀴위에 있습니다. 이 보좌는 수 천, 수 만의 천사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하나님 자신이 이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 하늘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 분은 하늘과 땅을 심판하는 심판자이십니다. 이분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어떤 이들은 낮추시고 어떤 이들은 높이시는 심판자이십니다. 열국들이 나타나서 서로를 잡아먹는 흉흉한 바다위에 있는 이 하늘의 보좌를 다니엘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어떤 질서나 패턴이 없이 그냥 단순하고 우연히 일어나는 혼돈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세계 역사의 모든 실오라기들이 함께 짜여서 모이는 곳은 바로 이 하늘의 보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반도를 포함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각각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이유는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었기 때문입니다. 짐승들과 그 권세가 정한 시기가 될 때까지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들의 생명의 기한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란한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독재자들의 포악과 세계 역사의 격랑은 도무지 바르게 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지만, 우리가 이러한 혼란한 역사의 배후를 보게 되면, 거기에는 실제로 하나의 단일적인 계획이 펼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일도 궁극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보다 더 필연적인 것은 없습니다.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지, 어떤 다른 명령자의 명령이 아닙니다. 이 지상의 역사를 주관하는 명령은 다니엘이 본 대로 열방의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에 있는 하늘의 보좌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밧모 섬의 요한도 다니엘과 비슷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의 예언과 요한의 예언 사이에는 놀랍게도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 진노의 그릇, 고통의 부르짖음, 전쟁, 혼란과 혼돈등 귀를 멀게 할 정도의 대 난리를 보고 듣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4:2).그것은 마치 주님이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손을 놀라고 무서워하는 자녀의 머리위에 얹어주는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광풍이 몰아치는 사나운 바다와 무서운 짐승들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 떨고 있는 자녀의 머리위에 아버지의 능력 있는 손을 얹어 보호해 주고 있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이 자녀의 관심은 하늘로 향하고 있고, 그는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저기 저 하늘에 한 보좌가 있지 않느냐? 저 보좌는 텅 비어 있는 보좌가 아니란다. 저 보좌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고 계시단다.” 바로 이 하늘 보좌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 역사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에 가득 찬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좌의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고삐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열방의 모든 왕들도 이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보좌의 심판에서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독재자들도 나와서 심판을 받아야 하고, 대통령과 수상들도 그들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소망가운데서 정의와 평화가 포옹하며 입 맞추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라나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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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조희완 목사] 깨끗할 이유 (사1:10-17)
    <부자의 운명으로 갈아타라>는 책(매일경제신문사)이 있습니다. 이 책은 티벳 불교의 풍수지리학을 근거로 집필된 책인데 전 세계에 번역 출시가 되어서 대단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풍수지리학자의 조언을 받아서 백악관 사무실을 개조하고,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부인 <셰니 블레어> 여사는 다우닝가에 있는 총리 관저를 꾸밀 때 풍수 지리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조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티벳 불교의 풍수지리학에는 다섯 가지의 원리가 있는데, 그 중에 제 1원리는 “사무실이나 집안의 출입구를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출입구인 현관은 좋은 기(氣)가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입구에 폐품이나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으면 기의 흐름이 굴절되거나 차단이 되어서 좋은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면 출입구에 거미줄이나 먼지를 제거하고 깨끗이 하라고 강조합니다. 풍수지리학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생각을 해도 출입구가 깨끗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깨끗함에 관해서는 다른 어떤 경전들이나 교리들보다 성경이 훨씬 더 많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출입구가 깨끗할 때 좋은 기(氣)가 들어온다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할 때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예수그리스를 믿으면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양 털과 같이 깨끗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죄 사함 받고 깨끗한 사람이 되면 복 있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마음이 깨끗해야하고, 손이 깨끗해야하고, 행실이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영 육간에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는, 깨끗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1:15,16) 둘째는, 깨끗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15:1,2,8) 셋째는, 깨끗해야 쓰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딤후2:20,21) 거짓과 불법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 깨끗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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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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