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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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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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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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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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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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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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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아침묵상] 마무리를 잘 합시다
    성경의 신앙은 언약 신앙입니다. 옛 언약이 구약이고 새 언약이 신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언약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 창세기 9장의 노아 언약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후,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노아 언약을 무지개 언약이라 부릅니다. 바람직한 기도를 드리는 법을 무지개 언약에 비추어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 언약 기도법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무지개는 일곱 색깔로 이루어집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입니다. 이들 각 색깔이 기도 드리는 순서와 내용을 일러 줍니다. 그리고 각 색이 상징하는 의미가 뚜렷합니다. 빨강은 사랑입니다. 주황은 인내입니다. 노랑은 겸손과 기다림입니다. 초록은 풍성함과 성숙입니다. 파랑은 소망을 나타냅니다. 남색은 열매를 나타냅니다. 보라색은 용기입니다. 용기 중에서도 변화에의 용기입니다. 이들이 지닌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빨강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열정을 지니고 뜨겁게 부르는 데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간절히 뜨겁게 부르짖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 잡히기 전 마지막 밤에 기도하실 때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뜨겁게 기도하셨습니다. 인내를 나타내는 주황은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인내로 바라보며 감사드리고 찬양을 올립니다. 기도 능력의 70%가 감사와 찬양에 있습니다. 세 번째인 노랑은 겸손히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풍성함과 성숙을 뜻하는 초록은 우리들의 삶을 풍성히 누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소소한 사항일지라도 사랑의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것을 믿으며 낱낱이 구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르기를 우리들이 기도 드리는 바가 이루어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였습니다. 파랑색은 소망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순서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이르시기를 “나는 섬기러 왔다” 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열심히 중보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에 더하여 이웃을 섬기는 실천으로써의 현장이 필요합니다. 남색은 열매를 상징합니다. 열매 중에 성령의 열매가 가장 소중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우리 속사람이 성숙하여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성찰하며 내면세계의 성숙을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드려야 합니다. 보라색은 용기를 상징합니다. 용기 중에 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우리들의 내면에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힘입니다. 김진홍 목사(두레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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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조희완 목사] 봉사의 자세
    옛날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1825년-1855년)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 그 나라에 한 충성된 군인 장교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막사(幕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종이에 적어보다가 액수가 너무 많아서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음을 알고 크게 낙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의 액수를 적은 끝에다가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歎息)하는 글귀를 적어 놓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니콜라이> 황제가 종종 군대를 시찰하고 다녔는데, 마침 황제가 그 부대를 시찰하다가 사병들의 막사를 둘러보던 중에 그 장교가 책상 위에 적어 놓은 탄식하는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는 글귀를 읽고 감동이 되어서 그 밑에다가 “니콜라이 황제”라고 적어 놓고 나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장교가 일어나서 종이 위에 적혀있는 황제의 이름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니콜라이> 황제가 다시 그 부대를 찾아와서 그 장교가 걱정하고 탄식하던 빚을 다 갚을 만 한 돈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 장교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황제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 충성을 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보다 더 충성된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엄청난 관심과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마음과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되 어떻게 봉사해야 할까요? 첫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벧전4:10-11) 둘째는, 받은바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롬12:4-8) 셋째는,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눅10:40-42) 우리 모두 봉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조희완 목사(산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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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박봉석 목사] 시기심을 축복의 마음으로
    영국에 설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설교로 인해 나타나는 역사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가 한참 뜨거운 부흥을 맛보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아주 뛰어나고 유명한 세 분의 목사님이 동시에 런던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우리가 잘 아는 설교의 황태자로 불림 받았던 ‘찰스 스펄전’이고, 또 한 분은 ‘캠벨 몰간’이라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FB마이어’목사님이셨습니다. 이 세분이 당대의 3대 설교가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찰스 스펄전과 캠벨 몰간 목사님의 교회는 나날이 부흥을 하는데 FB마이어 목사님의 교회는 부흥이 되지 않았습니다. 수적으로도 불어나지도 않았고 교인들의 삶도 변화가 거의 없음을 목사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은 그 원인이 뭔가,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두 목사님을 향한 영적 시기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깊이 회개하며 그 시기심을 사라지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이란 것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좀처럼 자신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두 목사님들의 교회의 부흥의 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그 시기심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을 얻어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두 분 목사님에게 더욱 큰 영력을 주소서. 더욱 더 말씀을 잘 증거하고 그래서 그 교회가 더 크게 부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입니까? 시기심을 오히려 축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제야 비로소 FB마이어 목사님은 심령에 강물같이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며 시기심이 사라지는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러한 신앙의 위인들의 삶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미워지고 시기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미움과 시기심은 사실 결심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각오를 다진다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서 오히려 진심으로 그 사람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내 심령에 평화를 주시고 자연히 그 미움과 시기심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모두는 각자의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나 혼자의 힘으로 온전히 세워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또한 나 혼자 그것을 해내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의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그것들이 함께 합하여지고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교회를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잘 한다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잘 할 수 있어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성경이 금하는 시기심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16절에서는 그 시기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교회 안에서도 때로 세상에서처럼 혼란과 갈등이 있는 것은 대부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기심,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다툼으로 인한 것임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시기심과 다툼의 마음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궤계에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가 잘 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축복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주님 닮은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 모두에게 시기심은 사라지고 축복의 마음과 언어가 샘솟듯 넘쳐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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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이정희 목사] 현재 기독교인들로서의 언어적 현실
    1. 서언(序言) 우리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문화는 타 종교 문화권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종교를 역사적으로 본다면, 샤머니즘은 그 유래를 측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단군신화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4,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불교의 전래도 A.D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으로 본다면, 1,600년이 넘었다. 도교는 A.D 624년(고구려 영류왕 7년)에 전래되었고, 유교의 역사도 종교적 색체 보다는 윤리 적이며 학문적인 면이 강하지만 우리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것은 모두 천년의 역사를 이미 넘었다. 이에 비해서 기독교의 역사는 비교할 수 없을 많 큼 짧다. 폭을 넓혀 천주교의 전래까지 합친다 할지라도 230여년, 개신교의 역사는 13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의 종교 문화권은 우리 기독교로 볼 때는 엄청난 타 종교 문화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언어적 현실을 논하고자 한다.2. 기독교인들로서의 언어적 현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세와 그 영향력으로 본다면, 이미 타 종교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종교인구 비율로 본다면, 우리 개신교가 19.7%로 1위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화, 특히 전통적인 풍속이나 언어문화에 있어서는 그 타종교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무엇이 타 종교권 문화와 언어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이런 현실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논고에서는 지난호 서론에서 밝힌 대로 타 종교권의 용어를 알고 구분하여 우리의 것을 지키는 동시에 우리 용어를 개발하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총괄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논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불교식 용어들을 살펴보자. 예를 든다면, ‘야단법석’(惹端法席)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야외에서 법문 강좌를 시도하는 불교의식에서 나온 용어이다. 또 흔히 말하는 ‘아수라장’(阿修羅場)이란 말은 불교의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인 ‘아수라’(Asura)가 다투는 장소를 말한다.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흔히 상가에서 사용하는 ‘명복(冥福)을 빕니다.’ 란 말도 죽은 사람이 받을 복을 위하여 행하는 불교의식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영결식(永訣式), 발인식(發靷式) 등의 말도 엄격히 보면 성도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말들이다. 이런 예들은 불교적 용어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끼진 샤머니즘이나 도교와 유교적 용어들도 아주 허다하다. 특히 주역의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10간(干) 12지(支)에서 계산되는 도교의 주술적인 용어들은 그 출처와 의미를 거의 알지 못한 체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3. 결어(結語)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우리 성도로서는 주의해서 사용해야 할 용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너무 이런 면으로 구별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용어적인 율법에 갇혀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 문화권 속에서 생성 된 용어들까지 배격한다는 옹졸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황희 정승의 말대로 ‘너의 말도 옳고, 그의 말도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에서 일반화 된 용어라 할지라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타 종교의 교리적인 용어들까지 구분 없이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다음호부터 본격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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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김문훈 목사] 신행일치
    사람이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말이 통해야 행복하고 피가 통해야 건강하고 뜻이 통해야 한편이 된다. 소통이 안되면 고통이 오고 불통하면 불행하다. 기독교는 말씀이 중요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역사를 일으킨다. 말은 마음의 알갱이를 줄인 말이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온다.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품이 되고 성품이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짓게 된다. 옛적에 인재를 뽑을 때는 그의 신언서판을 보았다. 몸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며 문필 즉, 필력을 갖추고 판단력을 겸비한 사람을 말한다. 지도자는 그 말에 신뢰가 있어야 된다. 언행일치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신행일치가 되어서 믿음과 행위가 하나로 나타나야 된다.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자들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깊은 공감을 했다. 우는 자들과 울고 웃는 자들과 웃었다. 어떤 의료선교사는 단순히 육체적 질병을 낫게 한 것뿐만 아니라 환자와의 깊은 공감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전인적으로 회복하도록 도왔다. 사회가 양극화에 빠져있다. 한 가지를 가지고도 서로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갈등하고 다툴 때 그 사회가 얼마나 혼란할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남들은 맹렬하게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모를 수가 있다. 바벨탑의 비극은 온 땅의 언어가 혼잡하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창씨개명 즉,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 개명하게 한 일, 신사참배는 우리나라의 언어를, 문화를, 종교를 빼앗아 간 것이다. 언행일치는 누구나 어렵다. 신행일치는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근신하고 절제하고 금식하고 침묵하고... “눈물이 강이 되고 피 땀이 옥토되어”라는 어느 목회자의 간증집 책이 있다. 오랜 기도와 눈물로 여과된 말을 할 때 그 말의 영향력은 지대할 것이다. 겉과 속이 같고, 이론과 실천이 같고, 믿음과 행위가 같아야 된다.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영적 씨름을 하는 것이다. 추수 때 시원한 냉수처럼 명쾌한 말 한마디가 십 년 묵은 체증을 내려가게 한다. 공감 능력과 전달 능력을 갖추어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언행심사를 구사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고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하리라.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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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오성한 목사] 저절로
    능력은 더 받는 것이 아니다. 능력은 발견하는 것이다. 십자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이 있다. 더 받으려고 하면 오히려 있는 능력을 잠재우게 된다. 이미 주신 것을 발견만 하면 능력의 삶이 시작된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시고 이미 주신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 능력 있는 삶의 출발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발견하고 깨워라.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몸에 밴 어린 시절로 인에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 급한 성격과 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급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셨는데 북한에 계신 할아버지도 급한 성품이었단다. 그것이 싫어 급하지 않기로 어릴 때 무수히 결심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결혼한 후 내가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하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 가는 자신을 보며 놀랐다. 고쳐보려고 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화를 내는 날은 스스로 고통스러워 반은 죽었다. 후회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반복되는 행실을 회개했지만 얼마 가지 않았고 소용없는 것 같았다. 변화되고 싶은데 변하지 않는 모습에 스스로 자책하며, 고통스러워하며, 얼마나 많은 죄책감으로 살았는지 모른다. 자책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급한 성격뿐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짓눌렀기 때문에 나는 위선자로 여겨졌고, 자괴감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잘 알지 못해 속았고, 선포하고 훈련되지 못해 속았었다. 위선자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고, 자괴감을 느꼈고, 아무리 조심한다고 고쳐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복음의 조명이 더 비취어 오면서 주님께서 해 놓으신 복음의 소식이 고쳐지기 시작했고, 정말 나는 달라졌다.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99% 바꾸었다고 말할 정도로 변화되었다. “전에 깨닫지 못할 때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났다”(로마서 7:9 참고)는 말씀이 있다. 또 “죄가 계명을 너는 지킬 수 있다고 속여서 나를 죽인다.”는 말씀도 있다(로마서 7:11 참고). 그렇다. 계명을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지켜보려고 애쓰며 속았었다. 내가 죽지 못하고, 변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속았었다. 그러니 죄가 나를 속이고, 죄책감과 자괴감을 들게 하여 나를 죽이려 했다. 노력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을 텐데, 노력이 부족하여 못 지킨다는 생각은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곤 했다. 나의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나를 고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니 능력의 삶을 산다는 것은 멀어져 보였다. 지금처럼 기쁨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지 못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감격 되는 때도 있었지만, 자주 위선자라는 자책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귀는 죽이고 도적질하고 속이는 놈이 아닌가! 주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한 삶을 주시는 분이 아닌가! 기도도, 성경도 읽으면서도 잘 알지 못해 마귀가 죽이고 도적질하고 속이는 속임수에 자신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날이었다. 화를 잔뜩 내고 돌아서는데 주님은 “성한아, 네가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네가 의인이라고 믿니?”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로마서를 많이 읽고, 은혜를 받은 터라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 꼭 이럴 때 질문하셔야겠습니까?” “그래, 성한아 대답해 보아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예!”라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다음에 들려 온 주님의 음성은 나를 울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 고맙구나! 성한아, 네가 그런 상황에도 너를 믿지 않고 내가 이룬 일을 믿어주니 너무 고맙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화를 내고 있던 나의 눈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계속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은 “성한아, 고맙다.” “성한아, 고맙다. 나를 인정해 주고, 믿어주니 고맙다.”라는 소리가 감격으로 다가왔다. “성한아, 너는 죽었단다. 너는 너 자신을 죽일 필요가 없단다. 너는 나와 함께 죽었단다. 네가 의인임을 믿는다면 너는 나의 삶을 믿음으로 살 수 있단다. 너의 상태와 아무 상관 없이, 나는 네 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란다. 나는 너 안에 영원히 흐르는 생수의 강이란다. 네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안에는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단다. 너는 그것을 믿을 수 있겠니? 이제 너의 삶은 내가 살고 있단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단다. 나는 지금 네 안에서 화낸 일을 지금 사과하고 싶은데 너는 어떠니? 지금 사과할 수 있겠니?”라고 하셨다. 이 마음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지는 날, 죄송하면서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 어떤 깨달음보다 강렬했다. 엄청난 복을 알게 된 날이었다. 주님을 아는 것 같았지만, 주님이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사과하려고 상대의 얼굴을 보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도 사과를 했다. 이런 일이 여러 사건과 여러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선 저지르고, 후 조치하는 일도 많았지만, 나의 모습은 고쳐지기 시작했다. 내가 의인이기에, 믿음으로 의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똑같은 복음이지만 다르게 깨달아졌다. 복음의 조명이 더 밝아진 것이다. 복음의 조명이 더 밝아진 후, 나의 고백은 항상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엄청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에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깨끗함과 행동이 있어야 하고 하늘의 불이 떨어져야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믿는 나에겐 나와 상관없이 넘쳐흐르는 생수의 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엔 기쁨의 샘이 솟았다. 이 일 후 3개월 이상을 극한 흥분 속에 기뻐하며, 성경을 읽고, 기도한 것 같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좋다. 성경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복음으로 꿰졌다. 설교가 쉬워졌다. 단순해졌다. 그전에도 예수만 전하고 싶어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예수만 전하고 예수만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오직 예수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났다. 이 놀라운 복음만 만난다면 교회는 힘을 얻고, 개인이 힘을 얻고,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목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왔다 가셨는지를 분명히 알려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깨워야겠다는 열정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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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기독교인의 생활용어[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
    1. 서언(序言) 언젠가 어떤 교계 신문에서 “예수님 존함으로 기도합니다.”란 제목의 글이 게재되어 있는 내용을 흥미롭게 읽어본 적이 있었다.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신학교에서 국어학과 예배학, 비교종교학을 등의 언어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쳤던 필자로서는 아주 호기심이 가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존칭어로 호칭한다면 그 뒷말도 ‘예수님 이름으로’가 아닌 ‘예수님 존함으로’라고 해야 경어 원리상 옳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대해서 이 말의 진위여부를 논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전자이든 후자이든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이 옳은지의 정답을 논하기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2. 기고(起稿)의 동기 또한 이 용어 하나를 어떻게 사용 하느냐?를 읽고 보면서 필자 나름대로의 느낀 점이 아주 많았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교회의 신앙적인 바른 용어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허다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타 종교나 신앙적이지 않는 용어들, 심지어 타 종교의 교리적인 언어들까지 아무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떤 언어든지 그 생성의 근원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우리는 고조선 이래로 단일 민족의 역사로 이어져 왔고, 비교적 다 문화가 아닌 단일 문화권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사용언어의 고착화는 옛날부터 되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언어문화는 우리나라의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의 종교적인 전통 속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그러한 용어들을 쓴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도 없다. 왜냐하면 타 종교권의 말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경남기독신문에서 이러한 필자의 작은 사명을 정리하여 발표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래서 7-8년 전에 근 3년여 동안 ‘기독교인의 생활용어 바로잡기’라는 코너의 지면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소견을 발표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 형식으로 연재하게 될 것이지만, 용기를 주시는 몇분들의 요청과 다시 한 번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감히 졸고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기고를 함과 동시에 책으로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면으로 나름대로의 전문성과 논리성을 갖춘 다수의 선행연구들과 서적들이 있었고, 또 이를 참고하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전1:9)는 말씀대로 앞의 선행연구들과 내용이 비슷하거나 반복되는 내용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고를 내는 것은 용어란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성하고 발전하는 생물체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그 부침(浮沈)을 계속하며 변화하기 마련이다. 특히 본 기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주로 기독교 용어를 중심으로 하고, 기타 타 종교권 용어들을 비교 분석하려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과 사용해도 무방한 용어들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각 종교의 역사성과 전문성에 따른 용어들의 새로운 발견과 차이성을 계속 발견하게 되었다.올바른 기독 언어문화 창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대장정의 글을 시작하고자한다. 3. 결어(結語)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란 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타 종교권의 용어를 알고 구분함으로서 바른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용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면으로 나름대로의 작은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선행연구들을 참고하면서 나름대로 발견한 작은 부분들을 첨가하여 현시대에 알맞은 용어연구를 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연구의 기고가 오늘날의 올바른 기독 언어문화 창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대장정의 글을 시작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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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권오희 목사] 함께 노력하는 다음세대 사역
    얼마전 통합 제주노회 서남시찰 장로회에서 다음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역량강화 사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저는 청소년 이해와 소통에 대해서 강의를 했고, 중문교회 오공익목사님께서 2030세대에 대해서 열정적인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강의 핵심주제는 이러했습니다. 1. 청소년 이해는 불가합니다. 그냥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다른 별에서 온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지혜로운 시작입니다. 2. 아이들을 존중해 주십시오. 루소는 어린이를 '축소된 성인'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보았는데, 사실 그것은 성경에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고 하셨고,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성세대가 아이들을 존중하며 안아줄 때에, 아이들은 그 품이 곧 교회며,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3. 아이들에게 실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아이들은 가상현실속에 심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상현실은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액션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리액션을 잘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부모들과 기성세대에 의해서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늘 실패할것만 두려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럼으로 교회에서 장로님께서 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세대들을 신뢰하며 마음껏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이고, (실수가 많고 어설퍼도)정말 잘했다고 “리액션”을 하시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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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김진홍 목사] 어느 크리스천 기업인의 3가지 성공 비결
    성공한 크리스천 기업인이 두레마을을 방문하였기에 여러 시간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목사보다 더 신앙이 좋은 기업인이 있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기업인이 말하기를 자기가 기업을 경영하여 돈을 버는 것은 선교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 선교지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지로 찾아다니며 선교사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 자신이 기업 경영에 성공한 이유로 3가지를 들면서, 모두가 성경이 가르쳐 주는 내용이라 하였습니다. 자유, 토론, 질문 3지입니다. 1. 자유가 없이는 좋은 경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자유에 대하여 다음 같이 일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 어떤 권력도, 어떤 권위로도 자유를 억누를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자유를 땅의 권력으로 누를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권력이나 권력자가 있다면 저항하여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저항권’이 있습니다. 만약 정부가 부당한 방법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때에 저항하는 권리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순종만 가르치는 신앙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권력에 대하여 순종만 가르치는 종교를 ‘아편 종교’라 합니다. 신앙은 자유함이 있을 때에 진정한 신앙입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에 활력이 있고 번영이 있음은 성경적 신앙이 가르쳐 주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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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박무열 목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라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삶의 자리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결과도 확연한 차이를 두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며 형통의 삶을 살 수가 있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도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잊지 말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하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미물 하나에도 목적과 뜻을 두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자기 계획으로만 넘쳐서 하나님의 계획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확신의 딜레마에 허우적거리며 아우성을 치며 능력자들을 찾아 시간을 허비하고 영적인 혼란만 가중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현명한 척 자고 하지 말라.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찾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 ( “찬송가(623장) 주님의 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 ) 그리하면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의 시간과 경륜에 따라 아름다운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리 참담한 상황에 직면해도 하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가지라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꿈을 가지고 준비만 잘 되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젠가 반드시 사용하실 것이다. 계획하고 꿈꾸는 일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희망이 없다”. “이젠 다 틀렸다”고 낙망치 말라. 그 꿈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꿈이며 행복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희망을 잃지 말고 “나는 너무 늦었다.”고 하지 말라. 나는 늦었어도 하나님은 늦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으라. 짙은 구름이 드리워 세상이 캄캄해서 당장 비가 내려 창수가나 모든 것이 무너져 떠내려 갈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구름 뒤에는 해가 있고 비가 그치면 다시 해가 비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더욱더 신뢰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삶을 구체화하라. 믿음과 소망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헌신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이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하며 소박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다.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때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그 후에 더욱 성숙한 믿음을 얻는다. 문제를 극복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라.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을 때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하지만 기적이 순탄한 인생대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주어진다.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실천적인 삶을 더 원하신다. 믿음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뜻대로 살기를 힘쓰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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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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