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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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확신

  

 주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주님은 자신의 부활소식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알리게 하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이름을 호명하셨을까? 아마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21:3).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디베랴로 갔으나 주님은 그들 먼저 가셔서 그들을 격려해 주셨다. 심한 좌절과 실의에 빠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강한 확신을 심어 주셨다(요21:15-17). 부활신앙은 좌절에 빠진 우리를 강한 확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주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들은 근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 곁에 가서 물으셨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7). 주님은 이들의 근심된 마음에 부활신앙을 불어넣어 줌으로 냉랭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셨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부활신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풀어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냉랭한 우리의 가슴에 말씀과 성령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다.

 주님은 마음이 강퍅한 제자들을 꾸짖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 말을 들으면 제자들의 신앙이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왜 믿지를 못했을까? 사실 제자들은 지금 영적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전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보는 신앙에 길이 들어져 있었던 자들이 한순간 보이던 예수가 사라져 버리니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허해지고 방황하게 되어 각기 제 길로 가게 되었다. 이제 보이는 메시야 시대가 끝나고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성령 보혜사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보혜사의 능력을 구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을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굳어지고 닫힌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실 때 깊은 호흡을 내어 쉬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복음에 신실한 증인이 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젠 복음이 유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유대지역에만 제한 받았으나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성령 받은 우리로 하여금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래서 딕 힐리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은 곧 선교지이며, 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마음은 곧 선교사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는 전도해야 하며, 예수 믿는 모든 자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중생 하여 세례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부활신앙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표적을 주셨다. 여기 표적이란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테라스(Teras)란 의미이다. 이는 호흡이 멈추어질 정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둘째, 두나미스(Dunamis)란 말이다. 우리가 바위와 같은 암반을 깨뜨릴 때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물을 사용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암반과 같은 강퍅한 심령은 성령의 다이나믹한 힘으로만이 파괴할 수 있다. 셋째, 세메이온(Semeion)란 뜻이다. 이는 삶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신호기능을 가진 사인(Sign)을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나가면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므로 우리의 사역 현장에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믿는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이 나타나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난다.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했다. 악한 령들은 예수 이름이 아니고는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렸던 자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여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고 했다. 예수만이 사망권세와 사단의 권세를 정복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들이 물러간다.

 새 방언을 말한다.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 새 방언이란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죄와 사망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세력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할 수 있는 부활신앙을 소유한 전도의 역사를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했다. 이는 말씀의 능력이다.

 뱀을 잡는다. “뱀을 집어올리며”, 여기 뱀은 지금 우리가 보는 땅에 기어 다니는 그런 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뱀은 미혹의 영으로 나타나는 사단을 상징하는 말이다. 에덴동산에 하와에게 나타난 뱀이 단순한 뱀 이전에 사단의 영이 역사한 것처럼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사망권세를 짓밟은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옛날에 교회를 박해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사약을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복음을 전파한 사실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독약을 먹으면 죽는다. 영적으로 마귀는 우리의 심령 속에 죽이는 독약 같은 미움과 시기와 증오를 심으려고 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의 소유자는 그러한 것으로 인해 해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 승리한다.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신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4-16)고 했다. 사도는 갔으나 사도와 함께 했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중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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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부활신앙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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