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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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군기연, 제41회 정기총회 개회
    고성군기독교연합회(회장 김인수 목사, 이하 고성기연)가 지난 12월 9일(목) 오후 7시, 고성군 고성읍 고성교회(백승철 목사)에서 ‘제41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부회장 장요섭 목사(수양성결교회)의 인도로 시작한 1부 예배는 부회장 김종오 장로(삼산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이권대 목사(동산성결교회)가 성경봉독(합3:17-19)한 후 회장 김인수 목사(고성침례교회)가 ‘감사의 신앙’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김인수 목사는 “아무런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은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가 마치 지금의 시대와 같다.”라며 “그런 시대 속에서도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축복 없는 감사란 없다. 축복이 있기 때문에 감사가 있었다.”라며 “우리 사역과 모든 걸음에 감사 할 수 있음이 축복임을 깨닫는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총무 김성하 목사(고성순복음교회)가 광고를 전하고 감사 박태덕 목사(샘물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2부 회무에서는 서기 이권대 목사가 회원점명 후 김인수 목사가 개회를 선언하고 회순채택과 각 보고 후 임원개선에 들어갔다. 임원 개선에서는 신임 회장에 배동수 목사(구만교회)를 추대하고 수석부회장에 조경락 목사(청광교회)를 선출했다. 한편, 고성기연은 오는 2022년 1월 24일부터 26일까지 김의식 목사(치유하는 교회)를 강사로 모시고 ‘신년연합부흥성회’를 계획 중에 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회장 : 배동수 목사(구만) ▲수석부회장 : 조경락 목사(청광) ▲총무 : 정호일 목사(덕선) ▲부총무 : 이권대 목사(동산성결) ▲서기 : 김윤수 목사(고성감리) ▲부서기 : 김성진 목사(삼산) ▲회계 : 김규환 장로(고성) ▲부회계 : 김종오 장로(삼산) ▲감사 : 김종철 목사(고성제일), 최상림 장로(청광)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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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5
  • 고신대학교 총장 선출 불발
    총장 초빙 재공고 내년 1월 이사회에 투표 예정 학교법인 고려학원(이사장 김종철 목사) 이사회가 지난 12월 14일(화) 이사회를 열고 고신대학교 총장 선출을 위한 투표를 진행 했지만 불발 됐다. 고신대학교 총장 후보로 박재익 교수, 안민 총장, 이병수 교수, 전광식 교수 4명 등록하고 안민 총장이 사퇴함에 따라 이사회에 후보자 3인이 참석해 소견발표를 하고 투표에 들어갔다. 총장 선출 규정에 의해 1차 투표시 이병수 교수 4표, 전광식 교수 4표, 박재익 교수 2표 기권 1표로 당선자가 없어 2차 투표에 들어갔다. 2차 투표에서는 이병수 교수 4표, 전광식 교수 6표, 기권 1표가 나왔다. 이사회는 선출 규정인 2/3(8표) 득표자가 없음으로 다득표자 1인의 찬반을 묻기 위해 3차 투표에 임했다. 3차 투표에서는 2차 다득표자 전광식 교수를 두고 찬반 투표를 진행해 찬성 5표, 반대 5표, 기권 1표가 나와 총장 선출은 불발 됐다. 법인 이사회는 총장 초빙에 대한 재공고를 올리고 내년 1월 이사회에서 다시 총장 선출에 나선다.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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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5
  • 경남기총, 제23회 정기총회 개회
    순복음진주초대교회 이경은 목사 대표회장 추대 수석부회장 진해침례교회 강대열 목사 선출 사단법인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박종희 목사, 이하 경남기총)가 12월 13일(월) 오전 11시, 경남 진주시 망경동 순복음진주초대교회(이경은 목사)에서 ‘제23회 정기총회’를 개회 했다. 이번 정기총회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확산에 따른 방역조치강화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만 입장 가능하도록 하여 순복음진주초대교회 입구에서부터 스마트폰 앱으로 제공되는 전자예방접종증명서(백신패스)를 확인한 후 교회 입장 할 수 있도록 했다. 수석부회장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교회)의 인도로 시작한 1부 예배는 부회장 신기성 장로(진해중앙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김희종 목사(유호교회)가 성경봉독(수22:33)한 후 순복음진주초대교회의 남·녀 4중창단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거룩한 성’을 연주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이어, 경남기총 대표회장 박종희 목사(창원반석교회)가 ‘이해가 되면’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박종희 목사는 말씀에 앞서 “지난 2021년 경남기총의 사역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었고, 여러분의 섬김과 기도 덕분이었음을 확신한다”라고 전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설교 후 경남기독신문과 크리스찬경남이 준비한 장학금을 전달하고 김해시기연과 산청군기연에 모범시·군연합회 표창장을 전달하고 명예회장 이종승 목사와 창원한마음병원 하충식 이사장에게 공로패를 전달하고 명예회장 윤희구 목사(한빛교회 원로)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무처리에서는 서기 김희종 목사가 인원 점명 후 박종희 목사가 개회선언하고 전회의록 낭독 등 각 보고와 회칙 심의를 거친 후 임원 개선에 들어갔다. 전형위원에 의한 임원개선에서는 수석부회장 이경은 목사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추대하고 강대열 목사(진해침례교회)를 신임 수석부회장에 선출했다. 전국 최초로 여성 대표회장으로 추대 받은 이경은 목사는 “우리는 긴 천국의 여정 앞에 서 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이 여정이 두렵고 얼마나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라며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겠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많은 도움과 기도 부탁드리며 경남의 자부심이 되고 누가 되지 않도록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인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 경남 18개 지역 시·군 기독교연합회이 인사하는 시간을 가지고 명예회장 최타권 감독(늘푸른교회)의 마침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대표회장 :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 ▲수석부회장 : 강대열 목사(진해침례) ▲사무총장 : 김성권 목사(새진해) ▲총무 : 최정규 목사(합성감리) ▲서기 : 김희종 목사(유호) ▲부서기 : 하동우 목사(참좋은) ▲회계 : 유진욱 장로(고현) ▲부회계 : 윤종은 장로(신광), 황의승 장로(창원성결) ▲감사 : 박종희 목사(창원반석), 정천 장로(진해침례)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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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조희완 목사] 권면할 일들 (행14:19-28)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오천 원 권 지폐에 <율곡 이이>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율곡 이이>선생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13세 때 처음 과거시험에 합격을 한 후 아홉 번이나 연속으로 합격을 해서 “신동”(神童)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9세 때는 장원급제를 해서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고, 대제학이라는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가 중요한 관직에 올랐을 때 우리 나라의 정치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첫째는,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몰두해 있는 정치판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10만 대군을 양성해서 국방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목숨을 건 충고와 권면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7년 동안 왜군들에게 온 나라가 유린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른 양심을 가진 한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권면을 듣지 않고 외면한 댓가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의 권면이나,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의 권면은 귀담아서 듣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 까닭은 바로 선지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권면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3:10)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차에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서로 권면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적극적으로 신앙을 권면해야 합니다.(행14:21-22) 둘째는, 적극적으로 예배를 권면해야 합니다.(히10:24-25) 셋째는, 적극적으로 회해를 권면해야 합니다.(고후5:18-19)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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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오성한 목사] 차별 없음
    성경 전체는 로마서를 풀어 놓은 것과 같다. 그것도 로마서 1, 2, 3,장을 펼쳐 놓은 듯하다. 로마서 1장은 <이방인> 이야기다. 이방인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로마서 2장은 <유대인>이 주제다. 유대인이 아무리 율법을 중시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로마서 3장은 <우리>라는 주제다. ‘우리’도 나은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믿는 너희는 나으냐? 너희도 죄인이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모두 명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로마서 3:23 참고). 이방인의 멸망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 즉 모든 인류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인데 이것을 예언한 곳이 구약의 예언서이다. 여기서 반전이 없다면, 인류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도 소망이 없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있다. 성경 전체를 자세히 보라. 바로 이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반전 때문에 로마서를 즐겨 읽었다. 읽을 때마다 “하나님, 이 방법이 아니고는 제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무릎을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무릎이 패일 정도로 많이 친 것 같다. 로마서는 나에게 감격이었다. 정말 감격이었다. 로마서를 읽다가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언성이 높아지고, 자연스레 입체낭독으로 바뀌곤 했다. “이제는”을 읽을 때는 힘이 들어갔다. “이”자에 악센트가 강하게 들어간다. 나는 “이제는”을 좋아한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에베소서는 “전에는”과 “이제는”을 대조하여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은 나의 것이다. 정말 신나는 말씀들이다. 또 강조해서 읽는 부분이 있다. “차별이 없느니라”이다. “이제는…. 차별이 없느니라”이다. “모든 사람에게 미친 하나님의 의”가 이제는 차별이 없단다. “와-우! 나 같은 놈에게 하나님의 의가 차별 없이 임했다”라고 하신다. 놀라운 일이다. 기절할 일이다. “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니”, 엄청난 일이 십자가를 통해 일어난 것이다. 입체낭독으로 “이제는”과 “차별이 없느니라”에 악센트를 넣어 크게 읽고, 고백해 보라. 무릎이 쳐질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일 어둡게 살 때, 놀라운 약속을 선포하셨다. 아하스 왕이 앗수르 신을 가져와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의 복을 선포하셨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잘 살기 때문에 주신 약속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선포하신 것이 복음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라고 예언하신 배경을 볼 때 복음은 우리가 잘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일방적으로, 차별 없이 주신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멸망 당하신 소식이다. 창조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마귀에게서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고, 하나님의 의가 된 우리 안에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주께서 좌정하셨다는 소식이다. 이 복음의 약속이 유다가 하나님 앞에 잘 살 때 주신 약속이 아니다. 아하스 왕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타락의 길을 신나게 가고 있을 때,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예언의 절묘함을 볼 수 있다. 타락 중인 유다에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쳐들어 왔다. 온 백성과 아하스 왕은 숲이 흔들리듯이 떨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우셔서 유다를 공격해 오는 두 나라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을 요청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전했다. 이사야는 “왕이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고, 징표를 구하십시오.”라고 했다. 아하스 왕은 “나는 하나님을 시험할 마음 없어요.”라고 대답해 버렸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돌아설 줄 모르고, 하나님께로 도저히 돌아설 수 없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와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임마누엘의 징표를 선포하셨다. 아하스가 잘해서 주신 약속이 아니다.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오실 것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셨다(이사야 7:14). 예수께서 유다를 대신해서 멸망 당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했기 때문 ‘임마누엘’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나나 당신이 잘했기 때문에 ‘임마누엘’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이다. 이것이 말씀의 핵심이다. 유다가 망하지만, 영원히 망하지 않고, 포로에서 돌아오겠다는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신 복음이었다. 그들이 회개하고 잘 했기 완벽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해방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임한 것이 복음이다. 우리의 모습과 전혀 상관없이 임한 놀라운 복이다. 차별 없이 주신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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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김성수 총장] 교육에 있어서 성경의 침투적 기능
    교육에 있어서 성경의 침투적 기능 기독교 교육에서 성경의 중요성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은 모든 교육활동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토대로서 성경의 기능은 학교의 모든 활동에서 성경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성경을 근거로 학습된 개념과 원리들을 교육의 모든 측면에 스며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은 세상에 관해 공부할 때 성경의 관점과 전제로부터 학습이 시작되고 진행됨을 배워야 합니다. 세속적인 학교에서의 수업은 아동중심이거나 내용중심의 관점을 취하는 방식이 대부분입니다. 아동중심 교육관의 경우, 본질적으로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육 자체가 개개인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동중심교육관의 인본주의적인 접근은 비기독교적이며 따라서 왜곡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관점은 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절망의 철학으로 내닫게 만든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견해는 바로 세상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내용중심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범신론적이기도 한 이러한 견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학,과학 등과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마치 궁극적인 진리가 되는 양 숭배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부분적으로 18세기 계몽주의의 산물입니다. 내용중심적인 견해는 사람들을 단지 기계적인 존재로 여김으로써 역사적으로 수많은 왜곡과 오류를 범했습니다. 산업혁명에서 야기된 많은 참사들은 바로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단지 유익하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세속의 지식, 전통, 문화에 대한 숭배를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기독교 학교는 이 두 가지 견해 모두를 거부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연도 또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행해지는 모든 교육은 우주만물이 창조주의 주권 아래 있으며 창조주 안에서 모든 생명이 움직이며 존재가 유지된다는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주가 바로 지혜와 지식의 보물을 감추고 계신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의 기초적 기능 측면에서 점검되어야 할 것이며 학생들은 이러한 원리를 교육과정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켜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수학시간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학생들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고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든가, 아니면 항상 똑 같은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매 순간 지속됨으로써 간단한 공식이 진리가 되도록 끊임없이 작용하는 진리 안에서 학생들은 이러한 진리를 탐구하고 인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창조 세계의 모든 질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진행시키시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의 결과입니다. 하나님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학 과목에서 학생들은 환경 오염과 환경 파괴를 일으키는 기술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금지 차원을 넘어 우리에게 세상을 잘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침투적 기능이 각 교과목에서 성경을 교과서(textbook)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안내자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과목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합니다. 이는 단순히 교사가 자신의 과목을 성경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불변의 인본주의라는 케이크를 덮는 장식물 따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교육과정 전체에 기반을 이루어 전체 학교 프로그램에 파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경은 교육이라는 빵 안에서 부풀게 만드는 효소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실에서 성경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교사가 교과과정에 포함된 모든 내용에 관하여 하나하나 성경말씀과 관련지어 이를 기독교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태도가 성경이 침투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믿지만 이는 해당하는 교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매우 우연한 사건일 수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격하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성경이나 성경의 언급이 무리하게 사건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르침의 핵심이 설정되면 교사는 가르치는 내용을 억지로 성경말씀과 관련시켜 버립니다. 이러 방법은 기독교 교육에서 성경을 올바로 활용하는 방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성경 말씀이 누룩처럼, 또는 광부의 등불처럼 교육의 모든 과정에 침투적으로 스며들어가는 교육입니다.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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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무화과나무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왜 무화과나무로 비유했을까?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감람산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산의 높이가 20-30척 되는 것이 많다.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유월절 직전이므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돋아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 비유를 사용하셨다.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올리브나 오동나무가 상록수인데 비해 무화과나무는 낙엽수로 겨울에 잎이 떨어졌다가 봄에 잎이 돋아나 여름이면 무성해진다. 곧 결실의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종말의 때가 다가왔음을 기억하라는 사실이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사실을 알림이다. 사실 주님의 말씀은 구원사역이 당도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재림의 주로 오실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이 당신의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둘째,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 중 영원한 비밀은 개인의 종말인 죽음과 우주적인 종말인 말세이다. 만약 이것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했다. 우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주의 일에 힘쓰면 된다. 셋째,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했다. 주인에게 신실한 청지기는 준비하여 깨어 있는 자이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준비성이다. 열 처녀 비유에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처녀 모두가 졸고 잤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생각하지 않고 잤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고 졸았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쉬고 다 같이 즐긴다. 그러나 기름이 없이 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름을 준비하고 사는 자들이 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기름을 준비한 성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말세기 말을 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2천 년이 지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내세에 대한 소망이 너무도 희미해 졌다. 우리는 이전에 바울이 버린 배설물에 사로잡혀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고백한 사도 요한의 고백이 신약교회의 유일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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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이정희 목사] 연말연시 용어들의 고찰 :‘위하여’등의 건배(乾杯)문화
    I. 서언 (序言) 마지막 남은 캘린더 한 장과 함께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바쁜 시기이다. 이에 연말연시 문화와 각종 행사들, 이런 시기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는 각종 단체와 모임에서 망년회와 신년회를 하게 된다. 코로나시기에 모임이 많지는 않지만, 이런 때에는 거의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잔을 들고 건배(乾杯)를 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에 본 호에서는 건배문화와 용어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II. 건배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 1. 건배는 무엇인가? : 사전적인 뜻은 서로의 건강이나 행복을 빌면서 함께 술잔을 들어 마시는 행위를 말한다. 주로 주도자의 신호와 구호에 의해 다수의 사람들이 잔을 들거나 부딪혀가면서 건강과 행복을 서로 빌면서 덕담으로 외친다. 이런 건배 용어들은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위하여’, ‘건배’, ‘지화자’, 또 일본 말인 ‘간빼이’, 영어로 하는 ‘원샷(One Shot)’ 등 아주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로 기도로 모임을 시작하기 때문에 건배 문화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공사석 모임에서의 건배는 종종 경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건배문화의 역사 : 건배문화나 용어들이 우리 한국문화에서는 어떤 역사성이 있을까? 한국의 역사 속에는 실제적인 건배 문화는 없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며 덕담을 하는 문화로 본다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혼자 마시는 자작문화(自酌文化)이다. 그다음은 다수가 모여서 앞에서 말한 건배를 하며 마시는 대작문화(對酌文化)로서 러시아와 동구권, 중국인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시는 수작문화(酬酌文化)로서 우리나라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든다면 신라시대에 경주 포석정에서 군신이 모여 술잔을 물에 띄우고 돌려 마시면서 동심일체(同心一體)를 다짐했든 일 등이다. 이로 볼 때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서는 건배가 없었고, 대작문화에서 온 건배는 아무래도 중국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건배용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서는 그동안 적절한 용어 표현은 없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와는 관계없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건배문화가 거의 일반화 되어 있다. 특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최근 세계보건기구(WTO)가 151개국 대상으로 술 소비량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2위였다. 이런 세계 최상위의 음주 문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나름대로의 전통적인 건배 용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배 용어는‘위하여’란 말을 가장 많이 선호하고 있다. 이 용어는 고 박정희 대통령 때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라는 말을 건배 용어로 많이 사용함으로서 관료, 군대 사회를 중심으로 유행되어 온 근대에 조성된 말이라고 한다. 이 때 부터 이 말의 앞에다 사회자가 어떤 일에 대한 선창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위하여’란 구호로 화답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건배 용어로 정하자는 국립국어 연구원들의 의견들이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런 면에서 중국은 마를 건(乾)자와 잔 배(杯)자를 사용해서‘건강과 행복을 위해 잔이 마르도록 마시자’는 말을 한다. 우리나라의 건배는 바로 이 용어이다. 일본도 한자어의 건배를 자신들의 말로‘간빼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환호, 갈채, 격려의 뜻인 ‘치어스’(Cheers)라고 외친다. 그리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나라에선 모두 다‘당신의 건강을 위하여’라는 말을 자신들의 건배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다음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건배문화라는 말 그대로인 ‘건배’이다. 이 말은 앞서 논한 대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실하고, 또 일본 강점기 시절에 건배의 일본식 발음인 ‘간뻬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 외의 용어들을 보면, 흥을 돋우는 전통적인 우리 민요에서 온‘지화자’나 ‘상사디아’를 사용하기도 하고, ‘곤드레, 만드레’, ‘뭉치자’, ‘듭시다’, ‘마시자’ 등의 순수한 우리말들을 하기도 한다. 외래어에서 온 ‘브라보’, ‘원 샷’ 등의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확정된 우리말은 없다. 하지만 곤드레, 만드레 같은 저속한 말이나 외래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밝힌 대로 교회 모임에서는 거의 대부분 기도로 시작하기 때문에 교인들의 모임에선 굳이 건배를 하거나 건배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건배용어자체는 단합이나 덕담을 나누는 좋은 말이기 때문에 분위기에 따라서 기도이후에 음료수 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회의 건배용어보다는‘주의 영광을 위하여’라든지‘신년에는 좀 더 나은 주의 일을 위하여’등의 신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건전한 기독교인의 생활용어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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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신재철 목사] 행복한 밥상 :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콩나물무침, 계란프라이
    교회든, 학교든, 동아리든 어떤 모임에 처음 가게 되면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다. 주로 MT, 수련회 때 둥글게 모여 공통의 질문에 응답하는 형식이다. 질문 내용은 대동소이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사람의 최고점과 최저점 그리고 변곡 지점을 알면 상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켰던 지점은?” 원활한 진행을 위해 시간제한을 두지만 대부분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 평소에 말도 없던 녀석이 인생을 펼쳐놓기 시작하면 안타깝게도 감동 보다는 몸이 뒤틀리는 고문이 된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세워진 타임키퍼가 아무리 수신호를 줘도 ‘직진’이다. 심플하게 아웃풋을 뽑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거기서 거기. 여기서 풀어낸 이야기가 다른 곳에서도 나오기 마련이다. 앞에 앉아 듣는 사람만 바뀔 뿐 이미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스스로 이야기하면서도 지루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다. 내 순서가 되었다.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했을까? 나는 다시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그 시간으로 빠져든다. 앞에서 듣는 사람의 몸부림은 이미 내 안중에 없다. 미안하지만 내 할 말을 다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나는 너무 행복했으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아주 키 작던 어느 날로 돌아간다.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날의 행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아빠의 옆자리로 파고든다. 엄마는 이미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시기에 엄마가 누웠던 빈자리는 나의 2차 수면의 아지트가 된다. 이부자리에서 엄마와 아빠를 모두 느낄 수 있는 명당이다. 그렇게 다시 잠이 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칙, 칙, 칙” 압력 밥솥의 김새는 소리에 다시 눈이 떠진다. 눈이 떠지며 후각도 살아난다. 복잡한 음식 냄새를 본능적으로 구분하며 아침상을 상상해본다. 칼칼한 된장찌개,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고소한 고등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삭한 콩나물, 터지지 않은 노른자까지 잘 익은 계란, 새콤하게 익은 김치. 이부자리 옆, 동그란 스뎅 밥상에는 수저 젓갈만 올려 있지만 내 머릿속에는 행복한 상차림이 이미 끝났다. 고된 하루가 시작 될 아빠, 형과 종일 땅 파며 구슬치기 할 동생, 그리고 분주한 우리 엄마. 하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본다. 조금만 더 눈 감고 기다리면 상상하던 밥상이 현실이 되어 있겠지? 즐거운 상상과 더불어 아빠 옆에서 조금은 억지스럽게 잠을 청해 본다. 밥솥의 말 수는 점점 많아진다. 삽화 작가 : 김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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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박봉석 목사] 우산은 우산이 없다!
    비 맞지 않도록 사람을 씌워주는 우산은 정작 우산이 없습니다. 우산은 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맞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암으로 투병 중인 여 성도를 심방했습니다. 병실에는 아직 신앙이 없는 남편이 병수발을 하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그분을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분의 등을 어루만지며 “수고 많으시지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분은 울컥하며 “목사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수년간의 아내의 투병을 곁에서 도우며 그분 또한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수년간을 병든 아내의 우산으로 살았지만 정작 자신을 씌워주는 우산은 변변히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별 것 아닌 위로가 그렇게 울컥할 정도로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서 우산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는 당연히 우산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묵묵히 봉사하면서 다른 성도의 우산, 교회의 우산이 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도 사실은 우산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더 큰 우산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서로서로에게 우산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위로받기만 바라며 우산이 필요한 사람의 자리에만 머물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산 같은 성도가 되어 보십시오. 가정을 책임진 아버지는 가정의 우산이 되기 위해서 평생을 살지만 정작 자신을 씌워줄 우산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 여러분, 문득 남편을 돌아보십시오. 자녀 여러분, 문득 아버지를 돌아보십시오. 가정의 우산이 된다고 지금 온통 비를 맞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남편 그리고 아버지를 씌워주는 우산이 되십시오. 또 온 가족을 섬기는 어머니는 가족의 우산이 되는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분입니다. 지금도 그 우산 밑에 남편이 그리고 가족들이 안식하지만 정작 그 우산을 씌워줄 우산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가족의 우산이 되기 위해서 강해져야 하는 우산, 사실은 가장 약한 우산입니다. 이제 온 가족이 바로 그 어머니 우산을 씌워주는 우산의 우산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 나를 씌워줄 우산만 찾지를 말고 오히려 내가 우산 같은 사람이 되는 결단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족에게 또 교우에게 이렇게 한 번 말해 보세요. “힘들면 힘내지 마세요!” 무슨 의도일까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을 하지만, 낼 힘조차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힘내라는 말을 섣불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힘들지요. 제가 작은 힘이라도 되어 볼게요. 우리 함께 기도해요.”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나를 씌워줄 우산만 찾지를 말고 오히려 내가 우산이 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우산을 씌워주는 우산의 우산 같은 사람이 되는 결단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이 주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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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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