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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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시기연, 제49회 정기총회 개회
    밀양시기독교연합회(회장 박시영 목사, 이하 밀양기연)가 11월 10일 오전 11시, 밀양교회(민귀식 목사)에서 제49회 정기총회를 가졌다. 부회장 민귀식 목사(밀양교회)의 인도로 시작한 1부 개회예배는 부회장 박형목 장로(밀양사포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민귀식 목사가 성경봉독(막6:50)한 후 회장 박시영 목사(무지개전원교회)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박시영 목사는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가 너무 약하게 무너지는 것을 모여 우리의 약함을 실감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그 믿음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라며 “예수님 붙들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증경회장 임형태 목사(강림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2부 회무에서는 서기 김재현 목사(늘푸른교회)가 인원 점명 후 박시영 목사가 개회선언하고 회순채택과 신입 회원 인사 및 사업보고, 기관보고 등 각 보고 후 임원개선에 들어갔다. 임원 개선은 증경회장단의 공천 후 인준하는 회칙에 따라 신임 회장에 민귀식 목사를 추대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명단이다. ▲회장 : 민귀식 목사(밀양) ▲부회장 : 김성규 목사(느티나무), 최수민 목사(밀양새롬), 안병우 목사(은혜), 이혜영 장로(밀양삼문) ▲총무 : 김명진 목사(삼랑진) ▲부총무 : 김재현 목사(늘푸른) ▲서기 : 임융식 목사(춘화) ▲부서기 : 이태훈 목사(대평) ▲회계 : 구창호 장로(무안) ▲부회계 : 손희철 장로(숭진) ▲감사 : 박시영 목사(무지개전원), 박형목 장로(사포)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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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6
  • 경남진주노회, 원로(은퇴)장로회 정기총회 개회
    고신 경남진주노회 원로(은퇴)장로회(회장 한길수 장로)가 지난 11월 10일(수) 오전 11시, 진주시 진주삼일교회(문장환 목사)에서 ‘제25회 경남진주노회 원로(은퇴)장로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부회장 강대운 장로(진주중부교회)의 인도로 시작한 1부 예배는 직전회장 최재식 장로가 대표로 기도하고 총무 정동호 장로(삼일교회)가 성경봉독(마21:28-30)한 후 문장환 목사(진주삼일교회)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하고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총회에서는 전임회장 이경은 장로의 기도 후 회장 한길수 장로가 인사를 전하고 경남진주노회 노회장 공은성 목사(삼천포교회), 전국원로(은퇴)장로회 회장 박정수 장로, 직전회장 강수경 장로, 경남진주노회장로회 회장 성동기 장로, 경남진주노회 남전도회장 장돈식 장로가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이어, 사업 및 경과 보고를 비롯한 각 보고 후 전형위원회에 의해 신임 임원 선출에 들어가 신임 회장에 황성진 장로(진주삼일교회)를 선출하고 이임하는 한길수 장로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황성진 장로가 기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김현주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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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5
  • [김상규의 경제이야기] 음식점 총량제의 문제점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이재명 전 경기지사가 “선량한 정부의 선량한 규제는 필요하다”며 음식점 총량제를 제안했다. 선량한 목표를 내걸지 않는 정부가 어디 있으며, 어떠한 규제도 그 목적은 선량하지 않을까? 과도해지면 악마의 수단으로 변할 뿐이다. 직업선택과 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거나 대장동을 회피하려는 꼼수란 비판이 쏟아지자 논의를 위한 것이라며 꼬리를 내렸다. 정치인은 말로 승부를 하는 존재다. 대통령이 되려하는 여당 대선후보의 발언으로는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또 이재명후보는 자살할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며 총량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음식점 경영주들이 자살한 것은 총량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동안 코로나19 방역규제로 2인을 초과한 저녁모임을 금지하고 저녁 9시까지만 영업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빚은 늘어나고 절망 속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자영업자 협의회에 의하면 코로나19 발생 이후 자영업 점포 45만개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음식점 허가를 너무 쉽게 내준다고 한다. 그동안 규제완화와 프렌차이즈 방식의 확대로 창업이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자영업 비중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줄여야 한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음식점 수는 그 나라의 문화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서양은 근무시간이 9 to 5다. 딱히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없다. 말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듯이 샌드위치나 커피로 때운다. 반면 우리는 국물문화의 영향으로 점심시간에 음식점을 찾게 된다. 장시간 근로와 잦은 회식도 음식점에 대한 수요를 늘린다. 우리나라의 외식시장은 2020년 기준으로 138조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농산식품유통공사 추계). 시장을 받쳐줄 수요가 71만개라는 음식점을 낳은 것이다. 음식점이 많다 적다는 판단은 시장이 하는 것이다. 2020년 통계를 보면 음식점의 폐업도 많았지만(54,437개), 창업은 더 많았다(65,806개). 어쩌면 음식점이 많은 것은 우리 음식문화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송나라시대에는 사람들이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부유했기에 모두들 외식을 했고 중국음식을 다채롭게 발달시켰다. 음식점이 많은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포장마차 등 음식점은 어려운 사람들의 마지막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6.25로 고향을 잃은 이북사람들이 생계수단으로 팔기 시작한 평양과 함흥냉면이 국민음식으로 정착되었고 고향을 떠난 호남사람들이 조리한 홍어음식을 모든 국민들이 즐기게 되었다. 이 후보의 음식점 총량제는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격이다. 자영업자 간담회에서 방역규제의 합리적 개선을 제안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방역규제로 자살한 사람들이 늘었는데 총량제를 그 해법으로 제시했으니 답답할 뿐이다. 글. 김상규 -. 제32대 조달청장(차관급) -. 감사원 감사위원(차관급) 전_ -.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1급) 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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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5
  • [김현철 목사] 메타버스를 활용한 다음세대 사역
    메타버스 영역별 사역 실제 <메타버스> 라는 용어를 들으면, 일반적으로 특정한 장비를 장착하고 가상공간에서의 활동하는 것을 떠올린다. 이를 오해하여, 메타버스란 가상공간에서의 모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메티버스 교회사역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메타버스의 전부가 아니다. 메타버스는 아래와 같은 4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메타버스 교회학교 사역이란, 메타버스의 각 영역의 특성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교회교육을 활발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 메타버스에서 <가상현실>(VR)의 영역이란, 디바이스를 통하여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여 서로가 교통하는 것이다. 2018년에 개봉된 <레디 플레이어 원>이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서로가 직접 만나지 않고 비대면으로 각기 접속한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 가상현실의 영역이다. 이는, 제페토나 포트나이트 같은 가상공간뿐 아니라, zoom 과 같은 연결 어플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가상현실>을 활용한 메타버스 영역에 해당된다. <가상현실>(VR)을 활용하여 행복나눔교회에서는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있다. 1) 정기모임 (줌일학교) “zoom으로 만나는 주일학교”라는 뜻을 담아 <줌일학교>라고 명명하였다. 모임시간은, 모두의 의견을 모아, 매주일 밤 8시로 확정했다. 모든 참가자가 zoom을 통하여 접속하면, 서로 축복하고, 가벼운 게임으로 마음의 문들을 연다. 한 주간 큐티내용을 요약한다. 그리고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축복하는 시간으로 마무리를 한다. 언택트 상황에서 zoom을 통해 학생들과 교사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점이 좋다. 불신가정에서 출석하는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은 홀로 그 가정에서 스마트폰으로 접속을 한다. 이 학생이 너무 즐겁게 반응하고, 교회에서 다양한 선물을 챙겨주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부모도 적극적으로 이 모임에 참여하도록 협조를 하기까지 한다. 이전에는 자녀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유투브나 게임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zoom일학교를 통하여 교사들과, 친구들과 소통을 하면서, 아이가 밝아졌다며 감사인사를 전해오기까지 했다. zoom일학교를 진행하기 이전에 주일 밤은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요란한 TV의 예능 프로그램을 온 식구가 보던지, 각자 게임이나 스마트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일밤 8시에 각 가정에 교회가 작동되게 되었다. 가정이 교회가 되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나며, 교회와 주일학교가 학생들을 책임진다는 강력한 의지를 경험하면서,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더욱 커졌다. 이로 인하여, 코로나 상황이 개선되었을 때에, 성도들이 다시 모일 때에, 서먹함이 아닌, 반가움으로 만날 수 있었다.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서로가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2) 온라인 여름성경학교 <향기나무>에서 구매한 3주간의 성경학교 교육자료를 사용하여 각 가정별로 준비를 했다. 또한 각 가정이 여름성경학교가 되도록, 여름성경학교 장식용 자료를 준비하여 배달했다. 교육국장으로 섬겨주시는 장로님과 유초등부 부장님과 함께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배부하였다. 학생들은 부모님과 함께 장식을 하면서, 각 가정을 “여름성경학교”교실로 바꾸었다. 각 가정이 단지 주거공간의 영역을 넘어, 거룩한 하나님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 찬양, 말씀,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이전에는 교회버스를 타고서야 교회를 갔지만, 이제는 메타버스를 타고, 가정속에서 교회학교가 진행되었다. 온라인으로 인하여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말끔히 사라지는 특별한 성경학교가 되었다. 가정의 온 식구가 함께하는 게임을 통해서, 주일밤이 놀라운 회복의 시간으로 변했다. 놀이공원을 가야만 가족간의 유대감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여름 성경학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렇다, 메타버스를 타고 가정이 천국을 누리게 되었다 3) 온라인 글로벌 캠프 코로나가 진정되지 않고 더욱 확산되면서 선교 프로그램도 전면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너무 안타까워 하던 전주의 선교단체 다세모(대표: 윤석호 목사)와 함께 의논하던중, 글러벌 캠프를 기획하게 되었다. 해마다 필리핀 선교를 가는 지역의 교회들도 캠프에 대한 필요성을 갈급하고 있던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랜선 글로벌 캠프를 준비하게 되었다. 강사들을 선정하고, 통역으로는 다세모에서 활동중인 필리핀 현지인 크리스틴이 섬기는 컨셉으로 진행하였다. 전주초청교회당을 메인 스테이지로 설정하고 온라인 사역을 전문적으로 함께 섬겨 섬겨온 크루들(정도환 목사,제주경목사)이 그동안의 경험을 발판으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필리핀에서 1,200명의 현지인들과 한국학생들이 참여하고, 국내에서는 12개교회 350명이 함께 참여하는 글로벌 캠프가 진행되었다. 한국어로 집회가 진행되고, 영어와 따갈로그로 통역하며 진행된 올라인 글로범 캠프는 기대 이상의 엄청난 열매들이 나타났다. 조그만 폰 하나에 온가족이 집중하고, 모니터 하나에 교회에 모인 현지인들이 집회에 초집중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뜨거운 감동 그자체였다. 오프라인으로 선교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의 경비들은 현지의 학생들이 식사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지원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교여행은, 많은 경비와 시간을 헌신하고 진행되었다. 하지만 메타버스를 통하여서는 시간과 경비의 지출을 최소화하고, 이를 더욱 효과적인 선교에 지원하면서 새로운 페러다임의 선교사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증강현실> : 증강현실은 현실속에서 디바이스를 통하여 정보를 확인하는 영역이다. ‘포켓몬고’ 같은 게임은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현실에서 가상의 이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카메라 어플을 활용하여 다양한 모습들로 교제하는 것도 충분히 효과적인 증강현실 활용법이다. 가상공간을 현실에서 경험하는 메타버스의 기능을 활용하여 프로그램들을 준비하였다 1) 랜선 성지순례 2021년의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이 다가오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좀 특별한 의미의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싶었다. 펜데믹으로 인하여 해외여행이 차단된 상황에서, 해외 현지의 가이드분들이 카메라로 촬영한 내용들을 나누는 <랜선투어>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떠오른다는 상황에 착안하여 <랜선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특히 고난주간에 맞추어 “십자가의 길”을 주제로 삼았다. 예루살렘 현지에 계시는 분들께, 영상자료 도움을 청하였다. 십자가의 길 14개 처소들을 소개하면서, 건물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성경 자체의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였다.서울, 용인, 인천, 대구, 진주, 부산, 심지어 남아공에서까지 문의가 왔다. 특히 시골교회에서도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연로하신 성도님들이 평생의 꿈인 성지순례를 모니터를 통해서이지만 참여하게 되었다. 그로인한 감격을 담은 후기는 메타버스를 통하여 어떤 일들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알게 한다 2) QR 방탈출 게임 메타버스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나름대로 기획하여 집행하지만, 어느새 하나의 일과로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온라인으로만 계속해서 모이는 것에 만족한다면, 교회당에 관한 관심이 옅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의 핵심은 균형적인 교육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균형적으로 진행되어야 효과적이다. 그러한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방탈출 게임>이었다. 몇 가지 단서로 방에서 탈출하는 게임은 최근의 트렌드중의 하나이다. 이를 응용하여 학생들이 교회에 와서 단서들을 찾아서 미션들을 풀어나가는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학생들이 자기들의 가진 폰으로 QR코드를 인식하면 정답을 찾을 수 있다. QR코드를 찍으면 문제의 답이 있는 웹페이지로 연결된다. 웹 페이지 안에서 정답을 확인 후 정답을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것이 첫 미션이다. 학생은 마지 자신의 게임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하고 정답을 보낸다. 정답을 보낸 친구에게는, 다음 퀘스트의 단서를 스마트폰으로 발송해준다. 이러한 과정들을 모드 마친 친구들은 간식과 함께 포장한 장소의 약도를 보게 된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이 약도를 따라서 찾아가면, 박스안에 준비된 간식과 큐티 교재를 만나게 된다. 학생들은 미션을 무사히 마쳤다는 성취감에 크게 환호를 했다. <라이프로깅> : <라이프로깅>은 SNS에 기록을 남기고,이를 통하여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학생들은 실제로 대면하여 소통을 하는 것보다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이러한 상황을 응용하여 다양항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 수 있다 1) 큐티 단톡방운영 2020년 2월 말부터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할 즈음에, 8개월동안의 큐티훈련 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에 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큐티를 통하여 성경을 지속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주일에는 유튜브로 설교를 송출하는데, 일주일간 큐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하였기에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큐티를 단체 카톡방에 인증하는 ‘큐티톡톡’을 시작했다. 카톡의 단톡방을 큐티나눔방으로 운용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부모, 교사를 단체대화방에 초대하고, 매일 큐티한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업로드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어린이는 부모님이 대신 올리게 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잘 정착되도록 ‘강화’가 필요하여, 첫 주에는 매일 인증하는 친구들에게 치킨쿠폰을 상품으로 걸었다. 그 효과로 평소 참여가 저조하던 어린이들도 열심히 큐티를 하고 인증샷을 올렸다. 매일 큐티를 인증하는 학생들이 특별한 상을 받았다. 그 상은 교장선생님이 주는 ‘큐티잘했상’이다. 큐티를 꾸준히 하는 학생들에게 감동한 담임목사님이 상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단체 채팅방에 공유해주셨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가 가득한 큐티 단톡방은 메타버스 교회학교의 엔진으로 강력하게 진행중이다 2) 일상속 십자가 찾기 2021년도 고난주간에 <행복나눔교회 교회학교>에서는. 메타버스 교회학교를 통해서 진행될 수 있는 특별한 순서들을 준비했다. 유초등부에서는 <생활속의 십자가> 찾기 프로그램을 했다. 고난주간동안 주변에서 십자가의 무늬를 찾아서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는 것이었다. “ 과연, 유초등부 학생들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고가 나간 종려주일 오후부터 단톡방에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에 1장씩 올린다는 규칙을 듣지 못한 가정에서 십자가 사진들을 폭탄투하를 한 것이었다.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다른 학생들도 열심히 십자가의 무늬를 찾도록 찾아서 단톡방에 탑재하였다. 이러한 십자가 무늬 찾기는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부모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생들이 한 주간동안 온통 십자가를 찾는 것에 집중하여서 찾아내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사하면서도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먹을 것과 놀 것에만 집중하더니, 일상속에서 십자가를 찾으려고 집중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생활속에서 십자가 무늬를 발견하면, 마치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환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촬영하는 뒷모습이 정말 대견해 보였다고 했다. 십자가 무늬를 정성스럽게 촬영하고, 단톡방에 탑재하는 것을 보면서, 그 자녀의 인생속에 언제나 십자가를 품고 살기를 기도하였다는 고백에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3) 고난주간 브이로그 만들기 <행복나눔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조금 수준을 높여 학생들에게 <각자의 고난주간의 동영상>을 제작하여 제출하도록 진행하였다. 자기의 관심사 외에는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는 요즈음 청소년들이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고난주간이 지나면서 정말 놀라운 결과물을 보면서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묻는 말에도 대답을 잘 하지 않던 학생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고난주간>을 보낸 동영상을 탑재했다. 고2 남학생은 한 주간 고난주간 특새에 참석하는 상황을, 잠에서 깨어 일어나 교회당에 착석하는 상황을 브이로그로 만들어 올렸다. 고2 여학생은 한 주간 온라인으로 특새에 참가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고3 여학생은 고난주간의 기도문을 낭송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학생들이 제출한 동영상을 중고등부 담당간사님이 교회밴드에 올리자, 학부모님들과 성도들님이 신선한 충격을 받으면서, 정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메타버스는 위기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이전에는 교회버스를 타고 교회에 갔지만, 이제는 메타버스를 타고 교회에 간다”. 코로나 이전에는 다양항 방식으로 교회학교가 부흥되었지만, 펜데믹 이후에는 메타버스를 적절하게 활용한 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한 활력으로 부흥하게 되는 결과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7월 8일에 발간한 책 <메타버스 교회학교>에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설명하였으며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과 급속히 변화된 메타버스 플랫폼들에 대하여는 <교회, 메타버스를 탑승하다> 세미나를통해 좀 더 심층적인 내용을 강의로 전달하고 있다. 1부에서는 메타버스의 개념과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회교육 프로구램들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메타버스 시대의 세대들에 대한 이해를, 3부에서는 메타버스 시대에 필요한 능력들은 무엇이며, 이를 교회가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나눈다.이러한 세미나를 통하여 더욱 입체적인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회교육의 전략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메타버스 시대에 움츠리지 말고 더욱 활발한 사역들이 일어나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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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오성한 목사] 지키려 하지 말라.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예수님께서 지키셨음을 믿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지킬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주셨다. 깨닫고 예수님께 와서 구원받으라고 주셨다. 예수님 만이 길임을 알라고 주셨다. 예수님께도 오라고 주셨다. 율법을 지키려 하지 말고, 예수께로 가면 된다. 지키려고 하면 약해진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청년처럼 지킨다고 생각하면 속이는 것이다(마가복음 10:23 참고). 우리가 지킨다고 말하며,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요한일서 1:8 참고). 예수께로만 가지 않는 사람이기에 교만한 사람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수께서 죽으셔야 만 한다는 이야기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고, 망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심은 돌아올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신 말씀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순종할 수 있는데 불순종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만 보면 진노의 하나님으로만 보게 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으로 보면 성경을 정확히 볼 수 없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절대 하나님을 잘 섬길 수도 없고, 섬기고 싶은 마음조차 가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다. 인간은 도저히 가망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노력이나 사건도 순종하게 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이다. 인간의 완전한 멸망을 말하고 있다. 성경 이야기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 줘도 순종할 수 없고, 기적이 일어나도 순종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순종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멸망하셔야만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신 역사다. 구원의 유일한 길을 말씀하고 계신다. 율법을 지켜서 가 아닌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 부활하셔서 인간에게 의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회복하셨다. 예레미야는 25장과 29장에서 70년 만의 회복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7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수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이 차면, 완전한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선포다. 바벨론 포로지에 있던 다니엘은 이 말씀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의 언약을 잡은 다니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감사해서, 금식하며 기도한다(다니엘 9:2 참고). 다니엘이 기록된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 앞에 감사하고, 감격할 때 계시를 크게 열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금식이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겠다. 금식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금식은 하나님께 공들이는 시간이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음식은 생명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금식은 하나님을 생명보다 사랑하고, 더 믿는다는 고백이다. 다니엘의 금식은 발견한 말씀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었고 감사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니엘이 금식했기 때문에 이루어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식해야 더 잘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말씀을 믿고 감격하고, 감사할 때 기뻐하시고 더 큰 계시의 문을 열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멸망 당하셨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그린 역사이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 망해야 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겼으면 안 망했을 텐데”라는 주제로만 성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젖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만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인 율법은 저절로 지킬 힘이 생기게 된다. 바울은 계명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는 것이고, 죄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했다(로마서 7:11 참고). 지킬 수 있었는데 못 지켰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잘못을 고백하고, 그곳에 자신이 묶이지 말고 빨리 주님의 용서하심에 감사와 감격을 받아들여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킬 수 없다.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묶이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 쏟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죄책감을 이길 수 없다. 강력한 복음증거를 위해 복음을 붙잡아야 한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을 감격으로 인정하고 우리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다시 말한다. 당신을 고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고쳐 놓으신 주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능력 있는 복음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신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복음으로 깨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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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박봉석 목사] 거룩의 길
    <종교개혁주일을 지나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톨릭의 한 대주교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준비를 하다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좀 더 거룩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미사에서는 다른 날과 달리 하나님을 부르면서 좀 더 장엄한 목소리로 “오 거룩하신 아버지여!”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그렇게 세 번 반복해서 하나님을 부르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오냐, 내가 여기 듣고 있느니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 대주교는 그만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거룩이란 말도 아니고 모양도 아닙니다. 즉 내가 거룩한 말을 하고 거룩한 모습을 한다고 내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보혈로서 죄를 씻음 받고 거룩하게 된 사람이라야 비로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기 위해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하게 된 자로서 나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헛되지 않도록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원래 가톨릭 사제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부르는 28계단이 있었습니다. 이 계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라테란 성당으로 옮겨져서 성당의 입구에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면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하게 된다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허무맹랑한 미신을 신앙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무릎을 까서 피가 나도록하면서 그 계단을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더 감동하시고 자신은 더 거룩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가톨릭 사제인 루터도 반복해서 그것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가는 그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었습니다. 이때에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고, 놀라고 의아해 하는 다른 고행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계단에서 뛰어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민하던 중에 스승인 슈타우피츠를 찾았습니다. 슈타우피츠는 그에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회초리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쳐다보라고 말입니다. 그는 그 말에 어떤 빛을 발견하고 부지런히 성경 로마서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그의 결론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깨달음이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고 결국에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사람이 죄를 용서 받아 거룩하게 되어 구원 받는 것은 어떤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십자가의 피가 나의 죄를 씻어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그 거룩하게 된 자가 구원을 받고 비로소 이 세상에서도 구원 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는 말을 늘 사용합니다.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하기오스’라는 말로서, 가톨릭에서 성(saint) 바울, 성(saint) 어거스틴이라고 말할 때의 그 ‘성(saint)’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과 똑같은 원어의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성(saint)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구약에서 ‘성물(saint)’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구별하여 쓰기 위해서 기름을 발라 구별한 물건에 대하여 그렇게 불렀습니다. 흔한 나무 조각이라도 기름을 발라서 구별하여 쓰면 성물(saint)이 됩니다. 즉 나무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이기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인 것은 세상 다른 사람들과 똑같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어 구별하여 주셨기에 거룩한 백성 즉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른 삶,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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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양대식 목사]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
    인간은 누구나 원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원망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원망보다 감사해야 합니다. 원망도 습관입니다.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16:8-9,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지금 힘들다,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망은 전염됩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원망하면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원망하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자가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망은 불신앙입니다. 믿음이 적어질 때,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 대신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감사의 말,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원망을 버리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시험에 들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은 부정적인 삶이고, 감사는 긍정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원망이 없는 삶 전체이셨습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6: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원망 제목을 찾지 말고 감사 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이 병들고 식어질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합니다. 빌립보서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베드로전서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고린도전서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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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하수룡 장로] 눈물
    인생으로 사는 날 동안 괴로운 일이나 너무 기쁜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만 이런 눈물이 감정에 의해 나지 않는 것은 괴롭고 불행한 일이다. 그 보다도 더욱 괴로운 것은 흘리고 싶어도 도저히 흐르지 않는 눈물 때문에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보통 남자가 온갖 말을 다하여도 여자가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는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성별을 떠나 눈물은 진심이 담겨있어서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상황을 넘겨준다 할지라도 금방 실망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보편적으로 눈물이 있는 사람은 인정이 많은 특성을 갖고 있고 마른 눈을 가진 사람은 내면이 건조하고 부드럽지 못한 딱딱한 마음을 가진 무정한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다. 사람에 있어서 눈물만큼 사람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대 서양 전설에서 나일 강에 사는 악어는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악어의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다분히 사람의 눈물과는 비교해서는 안 되는 거짓의 위선적인 눈물이다. 사람의 눈물 중에서 치명적인 병이 든 히스기야의 통곡의 눈물은 최고의 눈물 중의 눈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네 눈물의 기도도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생명까지도 연장시켜 주셨다. 이와 같이 눈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보물 같은 것으로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는 충실한 일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절하게 흘리는 눈물은 영적 기능을 제대로 하도록 이끌어 주는 안내자임이 분명하다. 스위스의 어느 시골에 양치는 목동이 양들을 이끌고 작은 개울을 건너가려고 하였다. 개울에는 징검다리와 같은 불편한 다리로는 물을 싫어하는 양들이 건너가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목동이 아무리 양들을 다그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목동은 하는 수 없이 어미양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젖먹이 새끼 어린 양을 안고 물을 건너 버렸다. ‘안돼!’하는 순간 어미양은 어린 자식을 잃었다는 위기감으로 세상을 다 뺏겼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오직 새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사력을 다해 개울을 뛰어 건넜던 것이다. 미물인 양도 절박한 위기가 닥쳤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눈물을 뿌리며 온 힘을 다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한낱 짐승도 그런 위기 땐 목숨을 걸고 새끼를 구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어찌 인간이 극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평안히 안일한 길만 갈 수 있으랴. 지금 이 땅은 기쁨이나 웃음보다 어린새끼를 빼앗긴 어미처럼 통곡의 눈물이 절대 필요한 절박한 위기의 때다. 히스기야처럼 먼저 죄를 범한 나 자신을 위해 울고 자녀의 앞날을 위해 울자.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해 울고 북한 땅에서 인간 이하의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형제를 위해 통곡하자. 그리하면 위기의 때에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살려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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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인생의 마무리를 잘하라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삶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비록 문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흔적과 자국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를 가지지 않는 민족은 없다. 역사는 해석자의 시각과 사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속역사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헬라의 순환사관이다. 헬라인들은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순환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역사의 궁극적인 책임을 인간에게 묻지 않는다. 다만 인간은 장엄한 자연적 순환주기에 파묻혀 사라질 뿐이다. 이 같은 시간의 굴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했다. 둘째,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이다. 역사는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서 발전한다. 하나의 통치형태가 나타나면 그것에 반하는 세력이 나타나 대립하다가 연합하므로 발전해 가는 역사관이다. 그러나 역사는 끝없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후퇴하기도 한다. 셋째,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관이다. 이들은 역사 자체에 의미를 부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역사란 어떤 방향성도 없고 목표를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 의미 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본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관은 세속사관과 다른 구속사적 사관이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는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말이다. 그 의도는 인간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언약으로 약속하고 선포하셨다. 그 언약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자이다. 당신은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마지막 때 승리하기를 바란다. 본문은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본문과 함께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을 소 계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과 스룹바벨에 이어 헤롯 대왕에 의해 지어진 제3의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BC 19년에 착공하여 AD 63년에 완공된 82년에 걸쳐 지어진 성전이다. 그 당시도 건축 중이었으니 그 위엄은 대단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성전은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하여 AD 70년경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당시 헤롯이 성전을 지을 때 돌과 돌 사이에 보석을 박아 너무도 화려하게 지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보석을 파내기 위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허물었기 때문이다.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주님은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마주보고 앉았다. 그때 주님은 말세에 일어날 징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사단은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미혹한다. 미혹이란 속임수를 말하는 것으로 말세에 주님의 이름으로 간판을 단 이단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병 고친다고 하면서 신유행위를 하는 잘못된 기도원들이 많이 일어나고, 주님의 이름을 팔아 선지자를 배출한다는 엉터리 신학교들과 선지자 행세를 하는 목사들이 많이 나올 것이란 말이다. 이런 자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거짓된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들릴 것이다. 거짓된 소문들이 사람을 미혹할 뿐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을 준다는 것이다. 국가도 어지러울 때에 공의의 법보다는 유언비어가 성행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는 주님의 교회가 진리를 좇아 공의를 행치 아니하면 이단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셋째, 전쟁과 재난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요즘은 집단 이기주의가 너무도 팽배해 있다.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허다하다. 도처에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넷째, 신앙의 박해가 일어난다. 그러나 절대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보혜사가 되어 순간순간 모든 것을 가르치고 주님이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다. 다섯째,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 아비와 자식이 서로 대적하고, 형제와 이웃에게 미움을 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런 징조가 말세현상이다. 이 같은 징조가 마지막이 아니라 마지막이 다가오는 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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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신재철 목사] 아버지의 현장(1) : 새참과 낮잠
    아빠의 일터에 따라 왔다. 사람들은 아빠를 ‘뺑기쟁이’라고 불렀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서울에서 영화 간판을 그렸다는데, 지금은 고향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있으시다. 아빠의 일터는 위험하고,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하다. 바닥에는 온갖 공구와 신문지가 뒹굴고 있다. 축축한 시멘트와 기름(시너) 냄새, 그리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아버지 일터는 그랬다. 국민학생 어린 아들이 아빠 따라 이곳에 왜 왔을까? 이곳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이 많다. 벽의 위, 아래 다른 색을 칠하기 위해서는 경계선이 필요하다. 긴 먹줄을 양 끝에서 서로 잡아당긴 후 살짝 튕기면 반듯한 선이 그어진다. 처음 보면 조금 신기하다. 먼지가 쌓인 수건을 뒤집어 쓴 엄마의 명령에 따라 문틀 하나를 붙잡고 곱게 사포질을 한다. 사포질하던 나무에 작은 구멍이 보이면 진흙 같은 것을 살짝 넣어서 다듬으면 감쪽같다. 아빠는 그것을 ‘빠대질’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현장에서 쓰는 일본말이겠지. 대강 눈치껏 거친 면을 다듬는 작업 정도로 이해한다. 이런저런 소소한 손질로 아빠, 엄마를 돕고 있으면 드디어 그 시간이 온다. 내가 이곳을 따라온 것은 효심이 아니다. 함께 작업하는 삼촌, 아저씨들은 기특하다며 칭찬을 하시지만 내 목적은 다른 것에 있다. “새참 먹고 해요.” 점심식사 전에 건물 주인이 비닐 봉투를 들고 온다. 그 안에는 쿨피스, 우유, 빵이 가득하다. 아저씨의 호탕한 웃음만큼 간식은 기분 좋다. 어른들은 간식을 새참이라고 불렀다. 그 안에는 크림빵도 있고, 팥빵도 있다. 우선권은 막내인 내게 주어진다. 오늘은 팥빵, 내일은 크림빵. 최고의 즐거움이다. 새참을 먹고 두어 시간이 못 되어 점심시간이 된다. 주변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식사가 이어진다. 점심식사 후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 번째 행복이 있다. “좀 쉬었다 합시다.” 현장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아빠, 엄마는 물론이고 모든 삼촌들이 현장 바닥에 적당한 것을 깔고 30분에서 1시간을 주무신다. 바로 일하면 힘이 나서 일이 잘될 줄 알았는데 배가 불러 일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제 이시간이 되면 나도 능숙하다. 주변에 널브러진, 가능한 깨끗한 박스를 펴서 자리를 만든다. 시멘트 바닥 위에 깔려진 박스 매트는 제법 푸근하다. 그렇게 나는 달달한 낮잠을 청한다. 아빠가 낮잠의 종료를 알릴 때까지. 일하는 것에 비해 누리는 것이 많은 듯하여 죄송함도 있지만, 종종 따라오는 아버지의 현장이 나는 참 좋다. 아빠, 엄마와 종일 같이 있고, 맛있는 새참을 먹고, 달콤한 낮잠이 있다. 박스 냄새 맡으며 기분 좋게 잠들었던 그 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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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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