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
[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
[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
[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다. 여기 온유란 말은 ① 환자의 열이 내려진 상태를 말한다. 환자가 열이 나서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환자에게 해열제를 써서 정상 체온을 유지하게 할 때가 파라우스한 상태이다. 마치 세속의 감정으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자가 말씀으로 세속적인 열기가 잡혀졌을 때 온유한 사람이다. ② 이마에 흐르는 땀이 식혀 졌을 때이다. 농부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구름이 태양을 가려 흐르는 땀이 식고 바람으로 열기가 잡혀졌을 때가 온유한 상태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 아래서 안식을 찾음과 같다. ③ 교육과 훈련으로 길들여진 상태이다. 조련사에 의해 야생 짐승이 훈련을 받아 길이 들어져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집에 기르는 가축은 주인의 뜻을 잘 아나 야생 짐승은 주인의 뜻을 알리가 없다. 사단의 권세 아래서 야수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이 잘 들어져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온유한 상태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하다. ① 주님의 탄생을 보라. 하늘보좌에서 가장 작은 나라 유대에, 가장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가장 추한 마구간에 오셨다. ② 주님의 사역을 보라. 주님은 선생 된 그가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기는 본을 보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천하가 다 주님의 것이나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 없이 일하셨다. ③ 주님의 죽음을 보라. 최후에 죽으실 때는 좌우편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자신이 누울 굴도 없어서 남의 무덤에 누우셨다. 순종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온유와 겸손을 하나로 묶은 단어가 순종이다. 바울은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쉼과 참 안식을 누리라 벗어야 할 짐과 져야할 멍에가 있다. 율법의 짐을 벗어야 한다. 예수를 알기 이전에 졌던 율법의 짐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우리에게 참 자유가 없다. 율법이 우리에게 안겨 준 것은 들으면 들을수록 부담이 되고, 알면 알수록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행하면 행할수록 힘든 고통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시 지혜자들인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복음의 멍에를 매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안겨준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다. 이것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것에 동참하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 직분을 맡기시고 뜻을 이루셨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순종할 따름이다. 이것이 사명자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도이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변한다. 십자가의 원리란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살고, 잃으면 얻고, 나누어 주면은 풍성히 누리게 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① 수가성 여인을 보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라고 했다. 예수를 만나면 세속적인 가치관이 완전히 변한다. ② 세리장 삭개오를 보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탐욕의 종이 되어 가난한 부자였던 그가 심령의 부요함으로 누리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③ 사울의 변화를 보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 오피니언
- 성경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
-
[최호숙 목사]
- 밥 중에 가장 영양가 없고 배고픈 밥은 무엇일까? 정답은 눈칫밥이다. 사전적 의미로 “눈치를 보아 가면서 얻어먹는 밥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철이 없던 시절 부모님이 섬에 계신 관계로 무작정 육지로 나와 삼촌 댁에서 숙식을 하고 지내던 때가 있었다. 삼촌이기 때문에 당연히 먹고 자고 지내는데 별 불편이 없을 거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삼촌댁도 대 가족 식구라 당연히 잠자리도 부족하고 식사 한 번 차리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 스스로도 한끼 두끼 얻어먹는다는 사실이 고통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가장 가깝다는 이모님 댁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기로 하였다. 그곳도 역시 이종사촌들이 많아서 눈칫밥 먹는 것은 삼촌 댁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우리 가정이 넉넉한 가정이었다면 집 문제를 비롯하여 생활 환경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인데 그렇치 못한 상황에서 비빌 언덕을 찾다 보니 삼촌 댁이었고, 이모님 댁이었다. 나이가 들어 전임 전도사 사역을 위해서는 결혼이 필수여서 결혼부터 하였다. 교회서 사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어서 넉넉지 못한 살림에 전셋집을 살면서 다녔다. 전셋집 살다 보니 주인 눈치를 봐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늦게 들어와 대문 열어 달라고 하는 것도 눈치 보이고 못하나 박는 것도 눈치 보이고, 아이가 울면 주인집에 누를 끼칠까 눈치 보이고, 전기세 물세 많이 나오는 것도 눈치 보이고 모든 삶이 눈치 보는 삶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것은 몰라도 눈치 하나는 구단(九段)이다. 세월이 흘러 담임 목회를 하면서 크지 않지만 교회 건축을 하여 안정된 목회를 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눈칫밥을 먹기 사작 했다. 다름 아닌 코로나 19로 인하여 국가 정책이 교회 소모임을 해서는 안 되는 모임 금지령을 내려 교회 여러 프로그램을 못하게 되었을 때에 요령껏 몰래 몰래 눈치를 보며 모임을 가졌었다. 그러나 주일 예배도 대면 예배를 드리면 안된다는 금지명령 때문에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믿음인지 고집인지는 몰라도 몇 번 강행했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내 성도들 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주일 예배로 50명씩 여러 번 나누어 부목사님과 교차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예배 중간에 시청 공무원들이 와서 인원수 50명이 넘는지를 체크 한다. 신경이 많이 쓰여서 예배가 마음 편한 예배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자유를 얻은 아들로써의 예배가 아니라, 눈치를 보며 섬기는 종처럼 종의 예배가 된 것이다. 이런 긴장된 상황에서 눈칫밥 먹듯이 드려지는 예배에 무슨 배부름이 있겠는가? 오늘도 교회 내 어떤 결격 사항이 있어서 공무원 단속에 걸릴까 눈치 보이고, 교회내 불만 세력이 무슨 불평을 할까 눈치 보이고, 모든 삶이 눈칫밥 먹는 삶이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므비보셋이 할아버지 사울, 아버지 요나단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마길이란 사람의 집에 얹혀살면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 역전이 오듯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다. 요나단과의 인연을 생각하여 아들이 아니지만 아들처럼 한 상에서 같이 먹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현재는 눈칫밥 먹는 삶의 연속이지만 주님께서 분명 우리를 맞아 주시고 품에 안아 주실 것이다. 주의 은총을 사모하며 주의 길 걸어가는 종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
[최호숙 목사]
-
-
[박무열 목사] 독선(獨善)과 편견(偏見)을 버리자!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갈등과 대립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부분 내가 옳다 하는 생각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다른 유형에서 생각해보면 나에게 친밀한 것이나 익숙한 것이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면 판단오류라는 것을 아마도 누구나 경험하며 살아 온 것 같습니다. 만... 우리가 살아온 삶의 자리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 열심이 특심 이어서 나만 옳다는 독선과 편견에 빠지는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과 내가 믿는 방법이 옳다고 믿고, 다른 신앙과 다른 방법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내가 믿는 신앙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방식과 교회의 비전, 목회철학이 최고라고 하면서 다른 교회를 비하하거나 비판하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 하게 생겨나는 것이 우리 교계 안에서도 얼마든지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단언하건데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절대적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진리 안에 여러 가지 옳은 것들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서로를 옳게 여겨주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규모가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들의 수고와 애씀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또 하나의 사랑이 아닐까요? 진리 안에서 나 만이라는, 우리라는 이기적 독선과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교회의 규모가 크든, 작든 각 지 교회는 교회의 형편과 지역사회의 상황에 따라 그 나름대로 목회 철학과 방식들이 있고, 그에 따라 좋은 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나도 주님을 위해서 예배하고 목회하는 것이며, 다른 교회나 다른 목사님도 동일하게 주님을 위해 예배하고 목회하는 것입니다. 방식은 다 다르지만 주를 위하여 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그도 옳고, 내 교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도 좋은 것입니다. 내 교회, 내 목회 철학만을 고수하다보니 지역사회에서 교회간의 연합과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교계 안에서의 배타적 모순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서로를 세워가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들을 말하고 있음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풍성한 가운데 거하면서, 왜? 인색함과 사랑이 메말라 가는 걸가요. 화해와 연합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왜 단절과 고립의 골이 깊어만 갑니까.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열어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하는 걱정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는 이유로서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자기들 밖에 모른다고 합니다. 어쩌다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고 걱정하는 시대로 전략해버렸을까요? 단어의 의미를 본다면 화해가 분리보다 더 좋은 말이고, 타협이 독선보다 더 좋은 말이며, 이기적인 말보다는 이타적 말이 더 좋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목회현장 속에서 단의 의미나 어휘로만 따져서는 안 될 상황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위한 것, 불의와 타협하는 것, 즉 타협의결과가 치명적인 파괴와 멸망이라면 그 때의 타협은 범죄행위와 같습니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어디에 이기적이고 독선적입니까?
-
- 오피니언
- 칼럼
-
[박무열 목사] 독선(獨善)과 편견(偏見)을 버리자!
-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다대고병
- 많아야 하고 크고 높아야한다 솔로몬처럼 처첩도 황금도 많아야한다 매머드처럼 누구보다 웅장하고 커야한다 바벨탑처럼 하늘에 닿도록 높아야한다 그래야 화려하게 망하고 위대하게 쓰러질 수 있지
-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다대고병
-
-
[그루터기]Need(필요)를 통해 미혹하는 이단
- 간혹, 이단 교주의 영상을 보면 말의 논점이 없고 어휘구사력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단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이단 교주들의 영상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이단에 빠지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이단들은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며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단의 전도 방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입니다. 따라서 이번 칼럼에서는 “Need(필요)를 통해 미혹하는 이단”이라는 주제로 이단이 사람들을 어떻게 미혹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시대적 Need를 이용하여 미혹합니다. 현 시대는 깨어진 공동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챙기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 한편에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챙겨주는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현재 이단들은 이러한 시대적 Need를 이용하여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도 대상자의 고민과 어려움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 등을 세밀하게 조사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것 같아 보이는 이단 단체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단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이용하여 미혹합니다. 뉴스에서 아무리 사기꾼과 다단계를 조심하라고 해도 사기꾼의 말을 직접 듣게 되면 그 말에 너무나도 쉽게 빠져듭니다. 이처럼 많은 시간 훈련되어진 이단 단체의 강사들의 말과 그들의 확신된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찾았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간혹, 우리는 이단은 논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교리는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닌 논리의 근거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셋째로, 기적과 체험을 이용하여 미혹합니다.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며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실적 기적과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과 경험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뛰어 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누군가 놀라운 기적을 보이고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 기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슨 관계인가?” 따라서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시대적 Need(필요)를 채우려고 하거나 누군가 채워줄 것을 기대하며 막연한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의 발걸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준과 방향성이 나 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을 때 Need를 이용하여 미혹하는 이단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14:13-14)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그루터기]Need(필요)를 통해 미혹하는 이단
-
-
[오성한 목사] 기도
- 능력발견의 길은 기도에 있다. 동시에 기도를 이해하는 것이 능력발견의 길이다. 기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신나는 일이다. 기도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고백하며, 선포하는 재미나는 일이다. 기도는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아도 항상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 믿음의 고백 그 자체다. 기도만 할 수 있다면 항상 봄바람은 분다. 기도의 불은 기도만으로 불을 붙일 수 있는 불이다. 기도하면 기도의 불이 붙는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라고 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복음을 붙잡고 신바람 나게 선포하며 기도하다가 보면 믿음의 기도가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패가 없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신앙생활의 완성을 아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능력발견의 눈이 열린 사람이다.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포로로 잡혀간 지 5년 후부터 22년간 바벨론에서 선지자로 일했다.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예언하는 동시에 귀환을 통한 회복을 예언했다. 그의 환상은 성전을 보았고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 풍성함으로 마무리되어 진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실 것을 예표 하며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멸망한 유다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것을 예언했다. 그들이 열심히 잘 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단다. 유다는 능력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겠단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인도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케 하겠단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시겠단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란다. 또 하나님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행하도록 하시겠단다. 내가 준 땅에 거주하게 하겠고, 계명을 지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에스겔 36장의 이야기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멸망 당했다. 도저히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능력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새 영을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그들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법도를 지키도록 해 주겠다고 하신다. 이것이 구속의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단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첨삭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믿고, 주장하고 선포하고, 말하는 것이 기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계획이나, 이미 성취된 것, 하나님의 마음을 나의 입술로 고백하며 선포하며 인정하는 것이 놀라운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계획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능력발견의 통로인 것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을 보여 주셨다. 47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을 볼 때 어린양의 신부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예루살렘은 유다를 가리킨다. 신부인 유다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올 것을 예언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하신 이런 엄청난 것들이 너희에게 일어났으나 그래도 기도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주께서 다 이루신 후 주의 일에 동역하도록 그냥 자리를 내어주시는 것이 기도다. 이미 이루신 일을 숟가락만 올리라는 것이 기도다. 이미 성취하신 주님의 일을 주장하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 약속하신 것을 선포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마음에 힘이 생길 것이다. 소망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실 때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준비될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이루신 일을 주장하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고, 도적에게 속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말하고 기도하면 기쁨이 생기고 감사가 생긴다. 문이 열릴 때 뛰어들어갈 수 있다.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가 상상하며 감사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기도다. 기도시간은 신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실 일을 그림으로 분명하게 그리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뜻을 기도를 통해 이루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루실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셔서 이루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이다. 이미 약속하신 것을 묵상하다 터져 오르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면 능력발견이 된다. 기도는 약속하신 것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감격의 시간이다. 이루어 주신 것을 상상하며 감사하는 시간이다. 뜨겁게 주신 것을 주장하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온전한 나를 받아들이며, 감사하며, 감격할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내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이 깨어난다. 기도를 뜨겁게 하는 것을 좋아하자. 종종 손만 내밀어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생기기까지 기도하고 주장하자. 기도하면 능력발견이 될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악수만 해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기도
-
-
[특별기고][안동철 목사] 이슈 선점보다 중요한 것은 이슈 전환이다
- 요즘 페이스북을 조금씩 다시 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글을 올리고, 펫친들이 올리는 글들도 보고 있다. 어떤 펫친의 글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린다. 정말 멋진 글에 동감의 댓글이 달리기도 하지만, 민감한 이슈에 대해 피 튀기듯 논쟁하는 댓글이 많은 것 같다. 한국사회, 특히 기독교계에서 이념의 문제는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다. ‘좌’와 ‘우’의 문제는 신앙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같은 하나님,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형제자매가 이 문제 앞에 서기만 하면 거의 원수가 된다. 처음에는 예의를 갖춘 말로 시작하는데, 곧 다시는 보지 않을 것과 같은 말을 주고받고는 파국을 맞는다. 이슈는 이처럼 복잡하다. 특별히 이념의 문제에서는 더욱 심한 것 같다. 물론 리더의 조건 중 이런 이슈를 선점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이슈를 발굴하고, 그것을 선점해 가는 능력은 오늘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슈의 선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슈의 전환 능력이다. 이슈는 항상 그 이슈에 동의하지 않는 반대자들이 있기에 발생하는 갈등을 푸는 능력은 이슈의 선점 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도 이런 저런 단체 대화방에 회원으로 속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올라오는 글 중에는 참 동의하기 힘든 주장들이 많다. 출처 불분명의 글과 영상들, 많은 경우에는 과장 내지 가짜 뉴스를 자신이 믿는 이념에 매여 끊임없이 올려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공동체의 화평을 위해 그냥 참는다. 어떤 분은 말 없이 탈퇴를 해 버린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이슈의 전환 능력이다. 논쟁으로 결코 설득될 수 없는 문제에서 한 발 떼서 공통의 교집합으로 이슈를 전환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문제에 대한 회피로 보일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지도자는 이슈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풀어야 할 문제는 반드시 책임을 지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풀어야 한다. 그러나, 결코 풀리지 않는 이슈, 특히 좌와 우의 이념의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풀 수 없다. 어제 또 한 분이 내게 일방적인 한쪽 편에 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하나는 무시전략이 있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그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투쟁전략이 있다. 그 사람의 잘못된 메시지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사람도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말을 하게 되고, 논쟁으로 진화하여,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답을 하기보다 “요즘 몸은 어떠세요? 이렇게 어려운 때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접근했다. 결코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다. 결국 기분 좋게 대화를 마칠 수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분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았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상반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한다. 바울은 수많은 문제 앞에서 자신이 보잘 것 없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고린도교회와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자신의 연약했던 모습들, 그리고 바울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은 그 자신을 향해 질그릇과 같은 존재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이슈의 전환을 한다. 질그릇과 같은 자신 안에 있는 보배에 집중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성령님을 주목함으로 위대한 고백을 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하). 이것이 이슈의 전환 능력이다. 특별히 성도는 이슈를 ‘좌’와 ‘우’ 관점에서 ‘상’과 ‘하’의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좌와 우의 접근은 갈등과 싸움 밖에 안 된다.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으로 볼 때 우리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땅의 인간으로 볼 때 우리는 진보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접점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연결을 통해 좌와 우를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
[특별기고][안동철 목사] 이슈 선점보다 중요한 것은 이슈 전환이다
-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진 단
- 또닥비 소리에 외로우십니까 봄바람 소리에 가슴 나부끼십니까 여행을 준비하면 삶이 설레십니까 음악을 들으면 맘이 행복하십니까 하나도 안 맞으면 병원으로 소풍갑시다
-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진 단
-
-
[오성한 목사]하나님의 일
-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일이라고 하셨다(요한복음 6:29 참고). 그러기에 누구라도 하나님의 큰일을 할 수 있다. 병든 자도 할 수 있다. 가난해도 할 수 있다.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노인도 할 수 있다. 주를 위해 일하고 싶다. 죽도록 일하고 싶다. 주를 위해 노동하고 싶다. 주를 위해 땀 흘리고 싶다. 나의 사랑을 위해 미친 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울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 몸살이 날 정도다. 주님의 보좌를 보는 나에게 주를 향한 갈망이 끝없이 올라온다. 주의 일이 무엇인지 물었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일은 당신을 믿어 드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수용하여 믿는 것이란다. 나는 주님의 일을 많이 하고 싶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이루신 모든 일을 믿어 드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한복음 6:29)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다. 믿어 드리는 일을 하면 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중증 환자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임에 감사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께 하신 일을 믿는다는 말이다. 주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가장 핵심 되는 일은 십자가를 지신 일이다.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임마누엘 하셨다. 주님이 함께함을 어떤 경우에도 인정하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마가복음 8:34-38 참고). 나의 모습 보니 의인이라 감히 말하기 부끄럽지만,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 주님이 산다고 믿어 드린다. 그것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싶다. 죽도록 내 평생에 주님의 일을 하고 싶다. 주님의 일은 주님을 믿는 것이니 어렵지 않고 오히려 쉽고, 신나는 일이다. 영원한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이 온다 해도 목숨 걸고 주님 사랑하고 싶다.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 있다. 주를 향한 갈망이 있다. 자면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싶다. 주님을 부르다 목이 아파보고 싶다. 주님을 부르다 잠들고 싶다. 주님도 나의 갈망을 아신다. 나의 갈망을 기뻐하신다. 나의 마음엔 주님의 음성이 있다. 오늘도 들린다! 성전에서 들려오는 우렁차고 엄청난 주님의 음성이! 바울 사도는 복음의 갈망이 깊은 신부였다. 나는 로마서 8장을 너무 좋아한다. 사랑하는 주님의 최고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고백을 한 번 더 고백해 보자.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깨달은 고백이고, 영의 사람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고백이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지만, 끊임없이 올라오는 죄의 법을 묵상하지 않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영의 생각, 하나님의 의가 된 생각을 강력하게 하는 사람에게서 터져 나오는 고백을 힘있게 하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9) 오늘도 이 감격 속에 주님을 갈망하며 함께 영광을 돌리며, 육으로는 들리지 않지만, 영원히 들려오는 성전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 우렁찬 찬송 소리에 깊이 파묻혀 보자. 하나님의 일을 하자. 오늘도 그분이 이루신 십자가의 결과를 믿자. 나의 몸을 성전 삼고 좌정하신 놀라운 보좌 앞에서 천군 천사와 함께, 24 장로와 함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믿음의 삶, 하나님의 일을 하자. 이것이 잠재운 성령이 능력을 깨우는 길이며 기름부음이 나타나는 지름길임을 발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믿음은 능력발견의 유일한 길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하나님의 일
-
-
[그루터기]이단에서 돌아올 자들을 위한 교회의 준비
- 필자는 대학시절 한 선교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군 생활 중 이단으로 지목된 다른 단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복학 후 그 이단 단체의 말씀 테이프와 소식지 등을 주변인들에게 나눴는데 그 일이 선교단체의 책임간사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책임간사는 저와의 만남에서 활동여부에 대해 확인을 한 다음 자신의 선교단체에서 나가줄 것과 선교단체의 회원들을 만나지 말 것에 대해 주의를 주었습니다. 책임간사로서 당연한 조치를 취한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당시 저로서는 두 단체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것보다는 제가 처한 상황과 이단 단체에 들어가게 된 계기 및 저의 심정을 물어봐주기를 바랐습니다. 2년 동안 열정을 바쳤던 선교단체에서의 퇴출은 제게 큰 충격이었으며, 함께 활동했던 회원들과의 교류 단절과 차가운 시선은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목회자로서 사역하는 지금은 어느 누구도 쉽게 정죄하지 않으려고 하며, 경청과 공감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10만 신도 수료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37년의 역사 가운데 급성장을 한 신천지가 코로나 19 확산의 중심에 서면서 명단을 조작하고, 방역을 방해하는 부도덕적인 면이 온 국민에게 알려졌습니다. 마침내는 신천지의 총회장인 이만희 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며 그동안 신천지에 미혹되었던 많은 신도들의 이탈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8월 26일 신천지 12지파 대학부장으로 금년 4월까지 활동했던 한 자매의 기자회견을 통해 신천지의 사악성이 더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천지 신도들의 탈퇴가 더욱 가속화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이 정통교회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이 현실적인 면에서 교회로 돌아오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신천지 안에 있을 때 정통교회는 타락하였고 구원이 없다는 잘못된 교리들로 세뇌되어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에 대한 자책과 하나님과 가족들에 대한 죄의식, 또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안에서 활동하며 경험한 공동체성이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그리움 등이 마음을 사로잡기도 합니다. 반면에 일반 교회에서는 이들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수용을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회심에 대한 검증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경계심을 넘어 처음부터 배척하는 태도까지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심적으로 심각한 공황상태를 경험하게 되며, 우울증을 겪기도 합니다. 영적인 돌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각지대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방황을 하다가 다시 비슷한 성격의 다른 이단으로 들어가거나 아예 신앙생활을 중단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신천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각종 이단 단체를 탈퇴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각 중 하나는 그들을 알코올이나 도박, 게임, 성 중독과 같이 교리 중독으로 이해하며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독자들은 단시간에 해결되지 않으며 오랜 상담과 교육 및 훈련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지원 소그룹 공동체들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단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그 단체를 경험하고 탈퇴한 사례가 있는 상담사 및 지원 소그룹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들만이 깊은 이해를 통한 공감과 소통 및 위로를 해줄 수 있으며, 포기하지 않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단에 미혹되었던 과거의 경험이 아픔으로만 남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감을 경험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단 예방교육 강사나 상담사로서의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그루터기]이단에서 돌아올 자들을 위한 교회의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