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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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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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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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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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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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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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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조희완 목사] 확신하며 삽시다.(요5:19-29)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던 토비 도슨 선수가 한국에 있는 친 아버지를 찾아서 만났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살 때 길을 잃어버렸는데 부산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을 하다가 미국 콜로라도에서 스키 강사로 일하는 사람의 집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선수로 참가했다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친 부모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보도가 나가자 우리나라 전국에서 약 25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친 아버지라고 주장을 했지만 막상 DNA(유전자)검사를 실시하자고 했을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재수 씨 만큼은 달랐습니다. DNA검사를 하나마나 토비 도슨은 분명히 자기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가 확신한 바대로 토비 도슨은 그의 아들임이 입증이 되었고,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재수 씨가 토비 도슨을 보고 “저 아이는 틀림없는 내 아들이다”라고 확신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실 때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확신하실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네가 과연 내 아들인지 아닌지 아주 많이 헷갈린다.”라고 하신다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사랑하는 자녀들로 확신하시려면, 먼저 우리에게 몇 가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확신이 있으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5:19-29) 둘째는, 천국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14:1-3) 셋째는, 응답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일5:14-15)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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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그루터기 칼럼[김영리 목사]이단 대책 : 한 교회가 한 가정의 회심을 돕자!
    이단은 역사 속에 함께 해온 교회의 아픔니다. 그런데 교회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본래 우리와 동일하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밖에 있지만 이들도 다시 주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할 양들이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 한 마리 양을 위해 찾고 찾으러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필자는 이들을 위해 교회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 나아가려는 목적으로 이단상담소를 겸한 카페형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정통교회는 멸망할 것이고, 이단상담소는 영이 죽는 곳이라고 세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정통교회나 교회 분위기를 풍기는 이단상담소에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편하게 찾아와 접촉하며 교제하고 하나님에 대해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카페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카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며, 그곳에서의 대화, 상담, 만남 등을 통해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신천지가 카페를 복음방으로 사용해왔었는데, 이제 그 방식을 역이용하는 것이어서 그들에게는 부담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장소만 준비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역을 펼쳐갈 수 있도록 후속적인 재정적 지원도 필요합니다. 특별히 필자의 교회 개척을 지원해준 모(母)교회는 이를 위해 성도 한 가정(또는 여러 가정)이 이단에 미혹된 한 가정의 회심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이단상담 사역의 현장에서 느끼는 한 가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상담이 아니고서는 회심이 거의 불가능한데 경제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는 상담을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단상담은 일정한 교육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회심이 이뤄질 때까지 기약 없이 진행됩니다. 더군다나 상담 기간 중 자해하거나 이탈을 할 수도 있어 온 가족이 24시간 함께 기거하며 교대로 상황을 살피면서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족 중 한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일정 기간 동안 생업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재정적인 이유로 상담의 첫 단계부터 아예 포기하거나 주저하려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단상담과 관련된 사람들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습니다.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영혼, 한 가정이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며 올바른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특별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단에 미혹되었다가 회심하는 한 영혼은 단순히 한 명이 아닙니다. 그 한 명에게는 여러 가족이 엮여 있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각 교회마다 많은 재정을 들여서 보여주기 식의 전도행사를 진행하기보다는 이단에 미혹된 영혼이 속해있는 한 가정의 재정적인 부분을 회심이 이뤄지기까지 일정기간 책임져주는 것은 귀한 헌신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그 가정과 교회에 불어오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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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1
  • [박무열 목사]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
    코로나19로 인하여 무심코 보내었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의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기며 내 안에 주어진 복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게 없는 것들을 추구하며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후회해 보며 소소한 일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우리는 큰 은혜들을 추구하며, 작은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함이 곧 큰 것의 감사함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 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들어서면서 더욱 필자의 삶에는 사소한 은혜들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적으로는 함께 섬겨갈 성도들을 보내 주시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필요들을 채워 주셔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주 농사가 봄에 딸기와 가을에는 감이다. 요즘은 딸기 철이라 딸기가 집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포장하고 남는 자투리들을 담아서 가져오신다. 요즘 가격이 비싼데 팔지 않고 주십니까? 라고 반문하면 목사님 비쌀 데 잡수셔야 맛이 좋은 법입니다. 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 점심을 배달하시는 다른 교회 성도님은 매일 배달하고 가시면서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남은 음식을 사택에 들러 주시고 가신다. 내게는 없지만 사람들을 통해 매일 풍족하게 주셔서, 이웃 어르신들과 나눌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매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할 때마다 부스러기의 은혜를 갈망했던 성경 마태복음15:27-28절에 기록된 여인의 신앙고백을 생각해 본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고 그것을 자랑하며 자긍심을 갖고 살아왔던 나 자신의 민낯을 들춰내게 하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농촌에 목회를 하면서 점점 나를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며 일상의 주어진 사소한 삶에도 감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부족한 종을 이끌어 가심에 날마다 감사할 뿐이다. 사자성어 “지족지부(知足知富)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 라는 말처럼 현재 주어진 삶에 감사며 만족할 수 있는 나는 참 부자이다. 일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부스러기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붙들려고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아등바등 그렇게 살았을까? 후회스러움, 만감이 교차한다.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라 영혼의 허전함을 사치와 허영으로 채우려는 것은 물질로 영혼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사치와 허영에 감정을 이입해 대리만족에 빠지는 삶은 불신앙적인 태도다. 목양의 길에서 사치와 허영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에 얽매이지 말고 또한 스쳐 가버린 과거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의 삶을 연상하라. 절망 중에도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현재의 삶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고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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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최호숙 목사] 뇌피셜 지피셜에 만족하는 사람
    누구나 보편적으로 대화가 소통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시대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세대들은 사전에도 없는 국적불명의 외래어(外來語)이거나, 은어(隱語)를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 사람들이 어휘력에 아무리 유식해도 소통이 안 된다. 요즘 방송 토크 쇼나 유튜브 방송을 보면 많이 듣는 용어가 있는데 오피셜, 뇌피셜, 지피셜,네피셜등이다. 오피셜은 영어 ‘official’인데 사전적 의미는 “공식적인, 공인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신뢰할 수 있도록 공인 인증된 사안이라는 뜻이다. 뇌피셜은 한자어 ‘뇌(腦)’와 영어 ‘official’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 마치 사실이나 검증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뜻한다. 지피셜은 ‘지인’과 ‘official’이 결합한 용어다. 지인에게서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얘기가 사실임을 주장하는 행위다. 네피셜은 ‘네이버’와 ‘official’의 합성어다.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하여 네이버 검색창을 이용하는데 네이버를 통해 알게 된 입증되지도 않은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이 상상한 것이든 지인에게 들었든 그것이 사실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사실과 다르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대에 유튜브 방송을 통해 고추나무 대를 삶아서 차로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방송을 보았다. 그 방송에는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홍보를 하였기 때문에 100% 신뢰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예방·치료 된다고 광고한 한의사 1명과 업체 14곳을 적발해 <식품위생법>과 <식품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 혐의로 행정처분 및 수사 의뢰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요즘 젊은 시대의 표현대로 ‘헐~’ 검증되지 아니한 한의사 개인적인 뇌피셜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요즘 방송가에 요리, 식당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있는 요리사 백00 씨의 진행 레시피(recipe)를 보면 맛을 내기 위해 백설탕을 듬뿍 듬뿍 넣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볼 때 저 요리법이 과연 건강에 좋은 것인지 과학적 근거가 있으며, 영양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개인적인 뇌피셜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를 혐오집단으로 몰아가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전도가 더 어려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적 사건들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뇌피셜 정도, 또는 단순 경험을 통해 들은 것을 기록한 지피셜 정도로 생각한다. 역으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그들도 개인적 생각인 뇌피셜일 뿐이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교수가 “가짜 약을 파는 약장수들도 힘있게 외치는데 진짜 약(신·구약)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외침에 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강의가 생각이 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변함없이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은 오피셜 성경(official scripture)이다. 진리인 성경을 통해만 만족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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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조희완 목사] 감동하며 삽시다.
    충청북도 단양군에 90세가 넘어 한글 깨치기에 도전한 하신 <장영옥>할머니가 계십니다. 이 할머니는 옛날에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글씨를 모르고 평생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써보는 것이 소원이셨습니다. 그런데 수 해 전, 자기 손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고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둘을 잊어버리는 할머니가 매일 경로당에 나가서 670시간 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드디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고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다음 목표는 ‘남편의 이름과 자식들의 이름을 배워보는 것’이라고 인터뷰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할머니의 경우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 석 자를 쓰고 그렇게 감격하셨다면, 오늘 우리는 더 감격하고 감동할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이름을 쓸 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죄인 되었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감사의 차원을 넘어서 감격할 일입니다. 만왕의 왕 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섬기게 된 것은 매일매일 감격하고 감동할 일입니다. 마11:16-1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메말라서 도무지 감동이 없고 감격할 줄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감사가 없고 감격이 없고 감동이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감사하고, 감격하고, 감동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알면 알수록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인데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몰라서 소홀히 여긴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가 교회를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스1:1-6) 둘째는, 우리가 말씀을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느8:5-9) 셋째는, 우리가 지옥을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막9:45-49) 우리 모두 날마다 감동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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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기독교 세계관[김성수 총장] 복음의 총체성
    우리 모두가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니고데모의 안경 즉,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 말씀을 사랑하며, 읽고 묵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되고 지도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세속적인 세상은 과학과 종교, 사실과 가치,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감정의 분리를 주장하며 교육해 왔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잘못된 이분법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곧 신념 체계는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일 뿐, 객관적인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하면서 복음의 포괄적이고 광대한 범위와 능력을 특정 영역으로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헌신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협의적인 이분법적 견해에 아주 취약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은 복음주의 운동의 가장 큰 힘이 되었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의관계로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적 여정의 어딘가에 톱날 같은 상처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으며,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의 확신을 얻지 않았다면 나는 내자신의 범죄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이미 질식해 버렸을 것이고, 내 영혼은 결코 안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소위 세상적으로는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런지는 몰라도 내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는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을 지닌 채 살았을 것이며,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하는 어두움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복음주의의 장점인 동시에 또한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관점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위해 준비하신 놀랍고 원대한 계획을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과 신앙은 개인의 영혼 구원, 개인 경건, 교회 출석, 성경 연구, 자선 활동 등으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혼 구원과 개인적인 경건,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교리의 체계를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worldview)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개인적인 신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개인의 구원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어주어야 합니다. 현대생활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분명한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단지 영적인 것, 성경공부, 복음전도 등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인류가 오랫동안 가져온 질문들, 즉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이런 잘못에 대한 치유책은 무엇인가, 인생에는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는 총체적인 삶의 체계임을 보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유일하고도, 이성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확실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물리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삶과 사상의 모든 영역, 곧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우리가 현실세계에 맞추어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진리의 원천이며 현실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틀’(comprehensive framework)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은 총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향한 총체적인 틀이며 능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네덜란드의 수상을 지낸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기독교 진리의 지배적인 원칙은 구원론이 아니라, 우주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전체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칼빈주의(Calvinism)를 어떤 기독교의 교리나 명제의 체계가 아니라 ‘삶의 체계’(life system)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삶의 체계, 혹은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복음의 총체성이라는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절름발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과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에 이런 문제들이 이미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문화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나 틀(frame)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이미 부모들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겪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들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우리가 왜 믿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 신앙을 변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주변세계의 영향을 받아 어떤 일들을 결정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바르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심오한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연의 미묘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기쁨이나, 위대한 교향악의 연주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능력, 질서가 잘 잡힌 공동체의 조화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우리의 삶과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진리의 틀로 이해하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문화까지도 복음으로 채색하고 변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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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4
  • [최호숙 목사] 뇌피셜 지피셜에 만족하는 사람
    누구나 보편적으로 대화가 소통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시대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세대들은 사전에도 없는 국적불명의 외래어(外來語)이거나, 은어(隱語)를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 사람들이 어휘력에 아무리 유식해도 소통이 안 된다. 요즘 방송 토크 쇼나 유튜브 방송을 보면 많이 듣는 용어가 있는데 오피셜, 뇌피셜, 지피셜,네피셜등이다. 오피셜은 영어 ‘official’인데 사전적 의미는 “공식적인, 공인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신뢰할 수 있도록 공인 인증된 사안이라는 뜻이다. 뇌피셜은 한자어 ‘뇌(腦)’와 영어 ‘official’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 마치 사실이나 검증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뜻한다. 지피셜은 ‘지인’과 ‘official’이 결합한 용어다. 지인에게서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얘기가 사실임을 주장하는 행위다. 네피셜은 ‘네이버’와 ‘official’의 합성어다.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하여 네이버 검색창을 이용하는데 네이버를 통해 알게 된 입증되지도 않은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이 상상한 것이든 지인에게 들었든 그것이 사실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사실과 다르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대에 유튜브 방송을 통해 고추나무 대를 삶아서 차로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방송을 보았다. 그 방송에는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홍보를 하였기 때문에 100% 신뢰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예방‧치료 된다고 광고한 한의사 1명과 업체 14곳을 적발해 「식품위생법」과 「식품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 혐의로 행정처분 및 수사 의뢰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요즘 젊은 시대의 표현대로 ~헐~~ 검증되지 아니한 한의사 개인적인 뇌피셜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요즘 방송가에 요리, 식당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있는 요리사 백00 씨의 진행 레시피(recipe)를 보면 맛을 내기 위해 백설탕을 듬뿍 듬뿍 넣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볼 때 저 요리법이 과연 건강에 좋은 것인지 과학적 근거가 있으며, 영양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개인적인 뇌피셜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를 혐오집단으로 몰아가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전도가 더 어려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적 사건들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뇌피셜 정도, 또는 단순 경험을 통해 들은 것을 기록한 지피셜 정도로 생각한다. 역으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그들도 개인적 생각인 뇌피셜일 뿐이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교수가 “가짜약을 파는 약장수들도 힘있게 외치는데 진짜약(신구약)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외침에 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강의가 생각이 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변함없이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은 오피셜 성경(official scripture)이다. 진리인 성경을 통해만 만족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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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박무열 목사]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농촌목회 스토리)
    코로나 19로 인하여 무심코 보내었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의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기며 내 안에 주어진 복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게 없는 것들을 추구하며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후회해 보며 소소한 일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우리는 큰 은혜들을 추구하며, 작은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함이 곧 큰 것의 감사함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 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들어서면서 더욱 필자의 삶에는 사소한 은혜들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적으로는 함께 섬겨갈 성도들을 보내 주시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필요들을 채워 주셔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주 농사가 봄에 딸기와 가을에는 감이다. 요즘은 딸기 철이라 딸기가 집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포장하고 남는 자투리들을 담아서 가져오신다. 요즘 가격이 비싼데 팔지 않고 주십니까? 라고 반문하면 목사님 비쌀 데 잡수셔야 맛이 좋은 법입니다. 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 점심을 배달하시는 다른 교회 성도님은 매일 배달하고 가시면서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남은 음식을 사택에 들러 주시고 가신다. 내게는 없지만 사람들을 통해 매일 풍족하게 주셔서, 이웃 어르신들과 나눌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매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할 때마다 부스러기의 은혜를 갈망했던 성경 마태복음15:27-28절에 기록된 여인의 신앙고백을 생각해 본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고 그것을 자랑하며 자긍심을 갖고 살아왔던 나 자신의 민낯을 들춰내게 하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농촌에 목회를 하면서 점점 나를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며 일상의 주어진 사소한 삶에도 감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부족한 종을 이끌어 가심에 날마다 감사할 뿐이다. 사자성어 “지족지부(知足知富)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 라는 말처럼 현재 주어진 삶에 감사며 만족할 수 있는 나는 참 부자이다. 일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부스러기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붙들려고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아등바등 그렇게 살았을까? 후회스러움, 만감이 교차한다.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라 영혼의 허전함을 사치와 허영으로 채우려는 것은 물질로 영혼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사치와 허영에 감정을 이입해 대리만족에 빠지는 삶은 불신앙적인 태도다. 목양의 길에서 사치와 허영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에 얽매이지 말고 또한 스쳐 가버린 과거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의 삶을 연상하라. 절망 중에도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현재의 삶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고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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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김금주 상담실장] 보이는 천국
    이단은 사람을 신격화하여 섬기게 하고 이혼과 가출로 가정을 파괴 시키며, 심지어 직장과 학업까지 포기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이유를 질문하게 되고 궁금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단이 가르치는 교리의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단 교리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들의 단체에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주장 합니다. 2. 자신들의 단체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 합니다. 3. 자신들의 단체만이 이시대의 참 교회라고 주장하며, 시온-예루살렘-남은자 등의 표현을 합니다. 4. 자신들이 속한 단체 외에 모든 교회가 바벨론이라고 주장 합니다. 위와 같은 이단 교리의 특징으로 인해,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단체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도래했다고 확신합니다. 또, 신천지는 기성교회에서 신천지로 넘어온 것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유월(탈출)한 것과 같이, 영적 바벨론(사망)에서 구원의 처소인 신천지(생명)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며 ‘영적인 유월’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자신들의 단체만이 천국이라고 가르치며, 신천지 밖은 지옥이며 그렇기에 신천지를 나가면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주어 신도들이 이탈하지 못하도록 통제합니다. 신천지 신도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는, 복음방과 센터 교육을 통해 오랫동안 신천지 교리를 배움으로 신천지가 계시록의 실상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세뇌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세뇌는 신도들이 성경의 권위보다 신천지의 가르침과 교주의 말을 더욱더 따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천지는 성경의 말씀을 자신들의 유리한 대로 왜곡시키며 변질 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비성경적인 육체 영생을 믿고 교주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죽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이러한 비성경적이며 비이성적인 가르침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부족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이 아닌 우리와 같이 신상생활을 함께 해왔던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열심을 다해 사역했던 목회자와 직분자들 그리고 그분들의 자녀들이, 신천지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 생각하며 그 곳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 목자에 속아 이단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기성교회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단에 빠지게 된 것은 그들의 잘못인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교회는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없는 것일까? 우리는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경계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약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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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2
  • [김성수 총장] 니고데모의 안경으로 세상 읽기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안녕하십니까? 고신대학교에서 38년을 봉사한 후 지금은 미국 LA 앤하임에 소재하고 있는 에반겔리아 대학교(Evangelia University)에서 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김성수 목사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정말 화살과도 같음을 실감합니다. 2020년도를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1년도를 맞았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먼저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가정과 일터에도 하나님의 복 주심이 풍성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소중한 언약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살고,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지혜롭고 건강하게 하나님의 소중한 보물들로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호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 현상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세계관(worldview)의 문제입니다. 세계관이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안경’(spectacles)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대로의 ‘관점’(perspective)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관점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며 행동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이 의식을 하던지 하지 못하던지 간에 나름대로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평가하며 거기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있으면 그 안경의 색깔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채색되어 보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지도(map)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일한 사물과 현상을 대하면서도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하게 되고서로 다르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공동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곧 세계관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위하는 신앙의 삶은 단순히 예배, 찬양, 기도, 성경공부, 교제, 그리고 약간의 봉사와 전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와 같은 협의적인 의미의 신앙생활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생활을 등한시하면서 세계관의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좁은 의미의 경건생활만 신앙의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일에만 전념하고 만족하면서 그것이 마치 신앙적인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며 사적인 것(private)이 되고,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게 되면 기독교는 우리 사회와 문화로부터 점점 더 변두리로 밀려나 주변화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안경을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생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인생과 세상이 확연하게 달라지게 되고, 지역 사회 속에서 감당하는 교회의 사명과 역할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가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지옥을 만드는 데 조력하고 있거나, 아니면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더 많은 상처를 받는데 일조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사역에 참여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현되도록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지배를 강화시킬 수도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끼고 바라보는 안경 곧 우리의 세계관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안경을 껴야 합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을 끼거나 깨어진 안경을 끼고는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확무호한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안경을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주일 하루 예배 시간에만 필요한 책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이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해야 합니다. 지난 세기 동안, 세속적인 세상은 과학과 종교, 사실과 가치,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감정의 분리를 주장해 왔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잘못된 이분법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일 뿐, 우리의총체적인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2021년도 새해를 맞으면서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니고데모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의미 있게 기여하는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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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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