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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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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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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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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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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복 있는 사람의 사가지
복 있는 사람,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이 다르다. 특징이 있고 조건이 남다르고 DNA가 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 네 가지(사가지)가 있다. 1. 복있는 사람은 신언서판의 끝인 지혜가 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중에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니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빌어먹지 않는다. 사울 왕의 길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라서 지혜로워서 선택과 집중을 잘한다. 실력이 없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용서가 안된다. 몸 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고 필력이 뛰어나 표현력이 좋고 판단력이 남 다르다. 2. 복있는 사람은 위치 선정을 잘 하므로 자기 환경을 아름답게 꾸며서 좋은 생태계를 조성한다. 사람은 환경의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 좋은땅, 옥토운동을 하여 좋은 사람들,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마태효과를 이룬다. 3.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아름다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거리유지, 유유상종, 통친합락, 친구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닮아가고 연합한다. 부정적인 면으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니 말기찬섬을 통하여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뿌리를 박으니 공급처가 마르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해서 기가 빨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4. 복 있는 사람은 결국, 결과가 좋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는다. 농사는 사시사철 모두가 중요하다. 봄철에 요즘처럼 이상기온으로 꽃이 피지 못하면 가을농사는 틀렸다. 여름철 땡볕을 견디고 추수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가 익어야 된다. 농사의 결과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산성이 있고 가성비가 있고 배가 되고 번식하여 증거와 열매가 있어야 된다. 복 있는 사람은 이파리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늘 푸른 상록의 복의 받는다.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진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된다. 나중 축복, 말년의 축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결국 인복, 다복, 행복, 흥복을 누리게 된다. 복 있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도 행복해지고 교회도 부흥 되고 사회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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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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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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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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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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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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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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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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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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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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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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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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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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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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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늦은 밤까지, 교회를 떠날 수 없더라
- 개척의 세팅이 어느 정도 되었다. 테이블, 책장, 조명, 음향 등. 이제 성도만 있으면 된다. 말은 쉬운데, 가장 큰 어려움이 사람 채우는 것 아닐까? 교회 안에 성도가 채워지는 세워지는 것은 내 노력, 능력, 환경으로 장담할 수 없다.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야근한다고 해서 부흥이 된다면 나는 일주일의 칠일을 야근했을 것이다.” 개척교회에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교회 외형이 갖추어졌고 난 개척교회 목사가 되었다. 멋진 선배 목사님들의 간증처럼 밤새 기도하며 이곳을 지키면 된다. 그렇다. 나는 요즘 늦은 밤까지 교회를 지키고 있다. 행정적으로 정리할 것이 많아서? 열정적인 기도로? 전문서적을 뒤적이며, 눈을 비벼가며 만드는 좋은 설교 작성으로? 아니다. 만화에 푹 빠졌다. 이 글을 쓰면서도 조금 민망하고 부끄럽다. 예배당 세팅이 끝나고 공간을 둘러보니 온통 만화책이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던 만화 위주로 채우다 보니 이곳은 어느덧 천국이 되어 있었다. 내가 10대 때 좋아했던 그 책, 최근에 유행하는 웹툰까지. 만화가 가득하다. 게다가 어릴 적에는 비싸서 사지도 못했던 책이 전질로 줄을 지어 서 있다. 밤이 맞도록 만화 속 주인공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즐거움을 누린다.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정주행 할까?” 개척교회 목사인 내게 두려움은 없다. 적어도 지금은. 오늘은 소년 만화, 내일은 소녀 만화, 그리고 드라마 원작인 웹툰까지. 대학부터 치열하게 달려온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개척의 시점에 이렇게 잠시 쉼을 허락하셨다. ‘개척했는데 진짜 만화 보고 있어도 되나?’ 나를 무겁게 누르던 약간의 불편함을 외면하며 일단은 책장을 넘긴다. 늦은 밤까지,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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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늦은 밤까지, 교회를 떠날 수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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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교단정치하는 목사 장로님들 경건하시길 기도합니다.
- 대한민국 기독교 300여 교단이 있지만 70여개 교단 정치의 꽃이 피는 총회기간이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대부분 교단들이 9월과 10월 총회를 열고 총회장과 임원 등 총회 사역자들을 뽑는다. 그리고 1년 동안 집행할 중요 헌의안을 결정한다. 정말 하나님이 통치할 대한민국 6만 여 교회 정책을 위임받아 행하는 엄숙한 정치현장이 벌어진다. 교단마다 다르지만 3-4일 기간 동안 엄청난 의사결정과 일꾼들을 선임하는 복잡하고도 엄숙한 일정이 펼쳐진다. 필자는 몇 년 전 잠시 노회 총회총대를 맡아 참석한 경험이 있다. 세상의 정치판을 객관적 눈으로 살펴본 경험에서 곳곳을 관심 있게 취재를 해봤다. 교단 총회 기간이 한꺼번에 몰려있고 집중화해 있어 제대로의 정치 기능을 살리기 어렵다는 느낌이 많았다. 전문화하고 분산해 합리적 정치 기능을 살려야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평신도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소망은 성총회(聖總會)의 정치현장이 되길 기도한다. 우려 되는 것은 지역의 노회나 총회시즌에 대부분 개교회가 함께 기도 하지 않고 정치판이 열리는 점이다. 교회에서의 믿음과 교단 정치판 믿음이 따로 노는 듯 현장에 가면 듣지 말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성(聖)총회·성(聖)노회를 위한 성찬과 기도와 예배로 시작하지만 회무의 시간에 고성과 야유 세속의 정치 문화가 그대로 재현된다. 무엇보다 교단 정치판에서 나타나는 직분에 대한 과잉 경쟁이 큰 문제이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선거 문화 등 예수 복음의 정치판에 돈이 횡행하고 모함과 지역 감정 등 정말 세상보다 못한 교단 정치 선거 문화가 지도자들의 심령 속에 파고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단 정치사에서 여러 영성 깊은 한국 대표적 목회자들이 교단 정치를 섬기다가 실족하거나 영성을 잃고 낙심해 버린 지도자들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각 교단 총회 시즌이 오면 깨끗한 선거를 올해 이뤄보자는 오피니언의 글들이 실리고 있다. 사람 사는 곳에 몇 사람에 불과할지라도 정치 기능이 없으면 안 된다. 개 교회는 교회대로, 노회는 노회대로, 총회는 총회대로 정치판이 열리지만 세상 정치판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위임한 양떼를 돌보는 예수 복음에 생명 건 지도자들이 펼치는 정치 행태가 오늘날 교계에서 우선으로 혁신해야할 분야이다. 언젠가 목사·장로 몇 분과 연합회 모임자리에서 교단 총회 총회장의 임기 대부분 1년으로 해마다 나눠 먹기 하는데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총회장에 선출되면 교회 담임을 내려놓고 4년 정도는 임기에 최선을 다해서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러한 담론이 담론으로 끝나버리는 우리 기독교 정치혁신이 한 발짝도 못나가는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가장 많이 부르짖는 워딩(wording)이 교회 세속화에 대한 경계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크게 강조한 설교가 바리세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구원 받은 자들이 죄악과 싸우고 마귀를 대적하며 진보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 앞에 성화의 몸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앙의 지도자들이 모본(模本)이 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첫 현장이 교단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할 것은 불을 보듯 하다. 그런데 아직껏 교단 총회가 열릴 때마다 슬픈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간혹 세상의 언론매체에 부끄러운 장면이 보도 될 때도 있다. 올해는 대한민국 모든 교단 총회가 성총회가 되어 온 교회가 박수치는 정말 은혜의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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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교단정치하는 목사 장로님들 경건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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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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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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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 미국은 다종족 국가이다. 그렇다 보니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 간에 비교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여러 민족 중에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월등히 두각을 나타내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사해보니 I.Q(Inteligence Quotient-지능지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민족도 아이큐를 높였다.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들에 비하여 열등했다. 재조사 결과 아이큐 문제가 아니라 E.Q(Emotional Quotient-감성지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하게 E.Q도 높여 보았지만 여전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전문가들의 새로운 연구결과 유대인들은 타민족에 비하여 S.Q(Spiritual Quotient-영성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관을 가지고 영성을 키워 보았다. 그래도 유대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최종 결과 유대인들에게는 타민족에서 찾을 수 없는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경지수가 높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경지수란 무엇인가?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Paul G. Stoltz, 1960~ )가 만든 용어로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 퀴터(quitter-포기하는 자)로 산에 오르다가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그냥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역경지수가 낮은 퀴터라 부른다. 둘째, 캠퍼(camper-안주하는 자)로 장애나 어려움을 만나면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현상 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캠퍼라 부른다. 셋째는, 클라이머(climber-등반하는 자)로 역경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을 말한다. 예전에 웬반 티오 월남 대통령이 한국 청와대를 방문했다가 청와대에 활짝 핀 목련화를 보고 감탄하였다. 우리 정부는 부러워하는 티오 대통령에게 목련화를 선물하였다. 티오 대통령은 기쁨으로 목련화를 받아 자신의 사저(私邸)에 심었다. 1년이 지나도 꽃은 피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티오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선물 받은 목련화가 자라기는 잘 자랐는데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목련화는 반드시 추운 겨울을 통과해야 만 꽃이 핀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후유증 이후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국민이 침체 상태에 있다. 이 고난의 시대를 잘 극복해야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그냥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바울을 말하였다. 삶의 시련과 역경을 체험한 욥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다. 영어의 격언에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에는 “No sweat, No sweet” 땀이 없으면, 달콤한 삶도 없다. “No pain No gain” 고생 없는 수확의 결과는 없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원리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였듯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역경지수를 높여 귀한 열매들을 거두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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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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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언제나 항상 (벧전3:13-16)
-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큰 스님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 바로 성철스님이십니다. 그가 입적하시기 전에 남긴 법어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법어의 내용은 알 듯 모를 듯한 유명한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산을 산이라고 하고 물을 물이라고 하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인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유명한 말로 회자되는 것일까요? 불교의 가장 큰 스님인 그가 유치원생 수준의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변화무상한 세상을 꼬집어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산은 항상 산이어야지 물이 되면 안 됩니다. 물은 항상 물이어야지 산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산을 산으로만 보아야지 물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물을 물로만 보아야지 산이 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산이 산으로 있지 않고 물이 되거나 물이 물로 있지 않고 산이 되면 이 세상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급변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변하면 모든 것이 다 끝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우리가 항상 노력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항상”이란 단어가 따라 붙는 말씀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항상 대답할 소망의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벧전3:15) 둘째는, 항상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2:12) 셋째는, 항상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행24:16)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분명한 믿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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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언제나 항상 (벧전3: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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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에 주의하라
-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기로 했다. 첫째, “내 말에 주의해야”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주의하는 것이 무엇인가? 운전을 오래하다 보면 차에 이상이 생기면 작은 소리도 들린다. 초보운전을 할 때는 안 들린다. 차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운전을 반복해서 한 능숙한 사람은 들린다.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차 소리를 들었던 사람은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시끄러움 속에서도 이상이 있어 나는 소리만 크게 듣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세상 소리가 시끄럽다. 환경이 시끄럽다. 주변이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익은 사람은 들린다. 말씀에 주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린다. 단체사진을 찍은 아이들 중에 내 아이가 있으면 내 아이만 뚜렷하게 보지 않는가! 이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집중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저절로 주의하여 집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 밝고 맑게 보인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툭 튀어 오른다. 이렇게 되게 하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내 말에 ‘주의하다(attend)’라는 것은 우선권을 둔다는 말이다. 치유를 원한다면 치유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아!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구나! 창조주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구나!” 주변의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내 마음에 말씀이 있게 된다.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불 믿고 내 것으로 딱 와 있게 된다. 치유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말하자면 치유를 원하면서도 몸의 치유에 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 않는다. 자신에게 기도를 해 주기만을 원하지만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찬송가를 뒤적이거나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 경우를 본다. 기도 받기를 원하면서도 눈빛이 다른 곳에 있다. 초점이 다른 곳에 있다. 그냥 “기도한번 해줘보세요. 효과가 있으면 다행입니다.”는 태도로 굉장히 성의가 없다. 성의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도를 안 해주면 안 될 상황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 주지만 지도하는 자의 마음에도 확신이 없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죽은 자를 살리시러 들어가실 때도 제자 세 명과 부모만 데리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데려 들어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마가복음 6장). 고향에 가셔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믿음으로 해야 한다. 주의하라고 했다. 기도 받으면서 자신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기도해 주는 사람의 믿음으로만 해라는 식의 태도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그냥 한 번 해 보는 정도로 한다. 의사 앞에 가도 태도가 달라지는데 안 그런가? 의사 앞에서도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대나 태도가 어떠해야겠는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아기가 배가 고프면 어떤가? 손가락만 가까이 가도 입을 갖다 댄다. 그러면 배고픈 줄 알게 된다. 이것이 사모하는 것이다. 갓난아이처럼 사모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으로 성장해서 기도생활과 말씀 생활에 발전하여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다른 사람이 시켜서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가 아니라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믿음의 리더들은 건축할 때 비계와 같습니다. 건축을 마친 후 비계가 필요하지 않다. 성도들을 세운 후 걷어치우는 것이다. 성도들도 다른 사람을 세울 때 비계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을 세운 후 철수해야 한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비계와 같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세워가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성장해서 다른 사람의 비계가 되길 원한다. 스스로 서고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세워 놓고 가시길 원하셨다. 그래서 스스로 서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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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에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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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만화냐, 봉고차냐. 그것이 문제로다
- ‘덕스럽게 하자!’ 담임목사님 방에서 나오며 혼자 중얼거려 본다. 개척 계획과 사임 시기를 의논하며 조금 미루기로 결정했다. 교회 내부 사정과 담임목사님의 안식년 문제로 그리하기로 했다. 물론 고집부리며 사임하고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는 신호를 주시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덕스럽게 하자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결과적으로는 계획보다 많이 미루어졌지만 괜찮다. 좋아하는 목사님 곁에서 행복한 부목사로 살았으니 이 정도 욕구는 잠시 접을 수 있다. 급히 사임하지 않고 부목사로 사역하며 개척을 준비할 시간을 배려받은 것은 득이 되었다. 쫓기지 않고 기도하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볼 수 있고 다른 교회 사례를 살펴보며 탐방도 하고 차근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유롭게 교회 개척을 주변에 알리며 기도와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개척 시기를 연기시킨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을까? 담임 목사님의 배려였을까? “만화책 좀 채워주세요.” 마음먹었던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를 지인들과 공유하며 후원을 요청했다. 누군가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였겠지만 간절했던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나 보다. 지인들을 통해 크고 작은 후원이 이어졌다. 보던 만화책을 교회로 보내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만화책 구매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후원금을 주시는 분도 생겼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평생 만져보지 못한 재정이 쌓였다. 「만화책? 봉고차?」 2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후원금을 쥐게 된다. 내 마음이 흔들린다. 개척하면 승합차 하나는 필요할 건데, 이 돈이면 깨끗한 중고차 한 대를 살 수 있는데. 만화책 사라고 주신 분도 있지만, 개척을 응원하며 주신 분도 있기에 승합차 한 대 구매한다고 따져 물을 사람도 없다. 욕심이 생긴 걸까?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 결심했어!’ 만화책이 승리했다. 봉고차는 앞으로 필요하면 하나님 주실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책은 지금 못 사면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만화는 우리 교회의 소중한 선교 도구가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만화로 선교하는 게 맞나?’ 확신은 있는데 고개는 왜 갸웃거려질까. 여하튼 그런 확신으로 우리 교회는 책장을 짜고 2천 권이 넘는 만화를 채우게 된다. 그리고 개척교회 목사에게 큰 꿈이 생겼다. “대한민국에서 만화책 가장 많이 가진 교회가 되리라!” 에필로그 개척 1년 후, 우리 교회는 차량을 구매하게 된다. 하얀색 카니발은 지금 우리 교회의 발이 되어 잘 쓰임 받고 있다. 물론 5년 할부라는 족쇄가 너무 무겁기도 하지만 카니발은 할부 갚는 내 마음도 모른 체 잘만 달린다. 만화도 봉고차도 모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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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만화냐, 봉고차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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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세계강국 대한민국, 제사장나라 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요즘 화두는 세계 속 강국으로 우뚝 섰다는 평가다. 세계 무역 10대 국가가 된지는 오래전이다. 제조업이 강한 나라, 4차 산업 시대를 이끄는 반도체 분야 사실상 세계 1위에 서있다. 5천만 이상 인구에 186개국과 교역을 하는 세계화에 성공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세밀한 수치를 언급치 않더라도 사실상 G7에 속한 세계 최강 나라의 반열에 섰다. 소프트파워의 문화강국으로도 자리매김했다. K-컬처의 바람이 거세다. 제조 반도체 조선 자동차 건설에 이어 K-방산이 주목을 받으면서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갖추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감히 누가 넘볼 수 있을까. 자화자찬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너무 뜨고 있을까. 우리의 취약함, 남북 대치의 심각한 현실 문제에도 미래학자들은 희망을 주고 있다. 미국 조지 프리드먼은 최근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한 ‘100년 후 한반도’라는 자료를 냈다. 2030년 한반도는 남한 주도 남북통일이 되고 10년의 혼란기를 거쳐 중국 동북지역 옛 고구려 지역까지 복속하게 된다는 예측이다. 그리고 세계 G2에서 세계를 리드하게 될 것이라는 장밋빛 내일의 그림을 그려 발표했다. 꿈같은 이야기일까. 프리드먼의 예측이 지금까지 미래학자 중 가장 근접하는 예측을 많이 했다는 평가를 볼 때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러한 미래 예측은 지금 대한민국이 위치한 지정학적 취약에도 역전될 수 있다는데 기인한다. 문제는 주변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몰락의 내리막길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푸틴의 불행한 미래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의 공룡화 경제는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핵 하나만으로 동족을 노려보고 있지만 거지경제 나라의 내일은 있을 수가 없다. 뭣보다 삼국 공통점인 사회주의 전체 국가의 말로를 불을 보듯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강국이 되고 미래까지 밝게 보이는데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130여 년 전 서양의 선교사들이 온 땅 이곳저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교회를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모든 분야 세계 최고를 구가하는 자양분은 바로 우리의 교회서 나왔다. 세계의 역사 흐름은 프로테스탄트 부흥의 이동에 따라 세계 강국들을 탄생시켜왔다. 이제 동북아로 개신교의 흐름에 그 중심에 대한민국이 서있다. 전 국민 20%이상이 개신교이다. 한국교회 모두가 세계 10대 교회 안에 들어서있다. 기라성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세계 기독교를 움직이는 프로테스탄트 리더국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하게 세계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될까. 암울한 미래의 흐름에 우려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장차 한국사회를 리드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크게 일고 있다. 좌파 정치이념의 교회 침투가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동성애 등 인본주의 문화 산물의 급속한 확산이 세상을 음란과 우상 문화로 물들게 하고 있다. 평양 대 부흥에서 여의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74엑스포 집회 등으로 한국교회의 양적부흥은 이루었다. 세계 선교사 파송 강국의 제사장 나라와 경건과 정결의 한국교회 전통이 이어질지 의문이 많다. 이를 지켜내고 온 땅에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와 인류 사랑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9절 말씀에서 사명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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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세계강국 대한민국, 제사장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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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양보의 축복 (창13:8-18)
- 하늘을 날고 있던 작은 경비행기 한대가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그 비행기 안에는 조종사와 기업인과 판사와 목사와 학생 모두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에는 낙하산이 네 개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조종사가 자기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기업인이 세계 경제를 걱정하면서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판사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자신이 살아야 한다면서 재빠르게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낙하산은 한개 뿐인지라 목사님이 학생을 보고 어서 빨리 그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목사님, 여기 낙하산이 두개가 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니 세 사람이 가지고 뛰어 내렸는데 어떻게 두 개가 있단 말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이 “조금 전에 판사님이 제 책가방을 낙하산인 줄 알고 제 책가방을 안고 뛰어 내렸기 때문에 두 개가 남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우스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양보할 줄을 모르고 나만 살겠다고 서두르다 보면 도리어 망하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면 손해를 볼 것 같지만 결국 복을 받고 내가 더 잘되는 수가 있습니다. 양보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일 뿐만 아니라 복을 받고 잘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인간 사회 속에서 양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자신의 중요한 권리를 양보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아주 귀한 사람이요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첫째로, 양보하면 나중이 잘됩니다.(창13:8-18) 둘째로, 양보하면 자녀가 잘됩니다.(삼상18:1-5) 셋째로, 양보하면 높임을 받습니다.(눅14:7-11)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서로 양보하는 성숙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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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양보의 축복 (창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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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1)
- I. 서언(序言) 전에 어떤 자리에서 30~40대의 젊은이가 자신의 남동생의 아내를 보고 어떻게 불러야 될지 머뭇거릴 때, 옆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그럴 때는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해야 된다”고 일러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잘 알지만, 순간적으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논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주 참고문헌은 2011년 12월 국어심의회에서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논하는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 1. 한자어 해석을 통한 명칭 이해 : 용어를 쉽게 이해하려면 먼저 한자어와 그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형은 맏형(兄)자로 먼저 태어난 남자 동기(同氣), 제는 아우 제(弟)로 나중에 태어난 동기를 말한다. 자매의 자는 손위 누이 자(姉)로 먼저 태어난 여자 동기, 매는 누이 매(妹)자 이다. 또 형제자매의 배우자의 아내는 아내 부(婦)이며, 남편은 지아비 부(夫)이다. 이처럼 한자어의 뜻을 기초로 호칭어와 지칭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여성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 첫째 오빠와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과 지칭어이다. 오빠를 부르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빠’, ‘오라버니’, ‘오라버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오빠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오빠’, ‘오라버니’로 지칭한다. 그다음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오빠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너희 외삼촌’, ‘외숙부’, ‘외숙부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또한 오빠의 아내에 대해서는 ‘새언니’, ‘언니’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오빠의 아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을지라도 오빠가 손위이기 때문에 그의 아내도 ‘언니’로 호칭해야 한다. 두 번째는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다. 남동생이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동생’으로 불러도 된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동생’으로, 시댁 쪽 사람에게는 ‘친정 동생’이라거나, 아이들이 있으면 ‘OO 외삼촌’으로 지칭한다. 또한 남동생의 아내를 부를 때는 때로는 ‘OO 엄마’라고도 하지만, 주로 ‘올케’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신의 자녀에게는 ‘외숙모’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 번째는 언니와 그 배우자에게 대한 호칭이다. 언니를 부르는 가장 보편적인 말은 역시 ‘언니’이다. 또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에게 손위 여자 동기를 지칭하는 말도 ‘언니’란 말로 다 통할 수 있다. 시댁 쪽 사람과 그 외의 사람에게도 ‘언니’, ‘우리 OO 이모’로 지칭 할 수 있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언니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이모’, ‘이모님’이라고 지칭하게 하면 된다. 네 번째는 언니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형부(兄夫)’이다. 또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에게 지칭하는 말도 역시 ‘형부’라고 해야 한다. 시댁 쪽 사람과 그 밖의 사람에게는 ‘형부’, ‘OO 이모부’로 지칭 하며,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부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이모부’, ‘이모부님’이라고 지칭한다. 다섯 번째는 여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다. 여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동생’으로 불러도 된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이름보다는 ‘동생’으로 부르고, 시댁 쪽 사람에게는 ‘친정 여동생’, ‘OO 이모’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섯 번째 여동생의 남편의 경우다. 여기에 대한 호칭은 주로 ‘O서방(書房)’, ‘제부(弟夫)’로 부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참고로 ‘서방’이란 말은 ‘벼슬이 없는 사람을 그 성(姓)과 아울러 부르는 말’로서 남편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또 ‘O서방’, ‘제부’는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한다. 또한 시댁 쪽과 그 밖의 사람에게는 ‘동생의 남편’, ‘제부’, ‘OO 이모부’로 지칭 하며,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제부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역시 ‘이모부’, ‘이모부님’이라고 지칭한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만 노력하면, 아주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언어생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이런 바람직한 언어문화 창달에 앞장설 수 있기를 주께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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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