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오성한 목사] 나를 죽이셨다
    이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말을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잘 표현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했다. 이 고백을 하기 전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계속 설명을 한 후에 한 말임을 기억하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고 했기 때문이다.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의미가 율법에 대해 죽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율법에 대해 죽은 자신이 이제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고 말한 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고백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19-20)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은 19절에서 말씀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표현을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죽여야 한다는 표현이 아니다. 로마서 6장의 십자가에 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도저히 아닌 것 같다. 나는 살아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성한아, 그래도 나는 너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단다. 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이었다. 그것을 믿는 일이 이론은 되는데 실재는 아닌 것 같았다. 믿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선 죽었다. 율법과는 관계없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려고 사는 자들이 아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나는 이전에 나를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 알았다. 이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산다. 새로워진 나를 보며, 적용하며 산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로 이 땅에서 적용하며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피조물로 주님 안에 들어와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실제로는 초자연적 삶을 살고 있다. 창조주가 우리 몸에 들어와 그분이 사시니 초자연적인 삶이다. 믿음으로 확증을 하고, 믿음의 의식이 바뀔 때 엄청난 영적 성장이 있다. 곧 날 올 책인 “복음으로 춤추는 삶을 살라”에서 우리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믿으면 그대로 된다. 믿음대로 된다. 옛 사람이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여도 믿음으로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음을 인정하라. 믿음은 산을 들어 옮긴다. 맞다. 성경은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슈퍼맨이다. 슈퍼맨은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은 슈퍼맨이 되는 것보다 더 초자연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4-02-01
  • [이정희 목사] 그동안의 올바른 경어 사용 기고의 마침과 또 다른 생활용어 시작에 즈음하여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보기에 따라서는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 용어 탐색 중에서 교회 내의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기고를 해왔다. 그런 중 교회 내의 용어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올바른 경어 사용에 대한 내용을 16회를 연재해 왔다. 이제는 2024년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본 기고의 기본 주제인 기독교인의 여러 가지 생활용어 중에서 교회 내의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런 즈음에 있어서 다시 한번 그동안에 이런 연재를 하게 된 동기와 지금까지의 소회와 앞으로의 기고에 대한 내용을 먼저 피력하고자 한다. II. 그동안 기고를 하게 된 동기 지금까지의 기고를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맨 처음 이 주제의 글을 시작할 때 밝힌 바가 있지만, 다시 한번 논한다면, 언젠가 어떤 교계 신문에서 “예수님 존함으로 기도합니다.”란 제목의 글을 흥미롭게 읽어본 적이 있었다.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신학교에서 국어학과 예배학, 비교종교학을 등의 언어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필자로서는 아주 호기심이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논리는 이러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존칭어로 호칭한다면, 그 뒷말도 ‘예수님 이름으로’가 아닌 ‘예수님 존함으로’라고 해야 경어 원리상 옳다는 논리였다. 그때 필자는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름대로 느낀 점이 많았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신앙적인 바른 용어들을 의외로 잘 모를 뿐 아니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타 종교나 교리적인 언어들, 신앙적이지 않는 용어들을 아무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들이 아주 허다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떤 언어든지 그 생성의 근원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현상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우리는 고조선 이래로 단일 민족의 역사속에서 다 문화가 아닌 단일 문화권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사용 언어의 고착화는 옛날부터 되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언어문화는 우리나라의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의 종교적인 전통 속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필자는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고 분석해서 작은 소리나마 경종을 울려 보자는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필자의 작은 바램을 기독신문에서 정리하여 발표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여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III. 그동안 소회와 앞으로의 기고의 내용과 결론 ‘해아래 새것이 없다.’(전1:9)는 말씀 그대로 그동안의 졸고(拙稿)가 앞서 연구한 많은 선행연구들과 내용이 비슷하거나 반복되는 내용들도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졸고를 계속 연재했던 것은, 용어란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성하고 발전하는 생물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언어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그 부침(浮沈)을 계속하며 변화하기 마련이다. 특히 그동안의 기고에서 논하고자 했던 것은 주로 기독교 용어를 중심으로 하고, 기타 타 종교권 용어들을 비교 분석하려는 일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과 사용해도 무방한 용어들을 구별하고자 했다. 그 결과 각 종교의 역사성과 전문성에 따른 용어들의 새로운 발견과 차이점을 계속 발견하게 되는 성과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완전한 전문성이 없는 필자로서는 한계와 함께 내용의 오류도 있었을 것이라는 솔직한 소회가 들기도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 불태(百戰不殆)’란 말 그대로 타 종교권의 용어를 알고 구분함으로서 우리의 바른 믿음의 수호와 바른 용어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이에 필자는 이런 면으로 앞으로도 계속 나름대로의 사명감으로 연구하면서 기고를 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새 단장을 하는 자세로 그동안 중단했던 교회 내의 용어 분석과 올바른 사용에 대한 내용을 계속 기고하고자 한다. 아울러 변함없이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란 코너를 마련해 준 기독신문사와 계속 애독해 주신 모든 독자 제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4-02-01
  • [신재철 목사] 신 목사, 신 과장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나는 커피를 몰랐다. 심지어 어릴 적 부모님은 시골에서 작은 다방을 운영하고 계셨다. ‘커피, 프림, 설탕’ 익숙했지만 전혀 마실 줄 몰랐다.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진다.” 부모님께서 어릴 적부터 암시를 걸어서 그랬을까? 커피라는 음료에 전혀 흥미를 갖지 못했다. 주변 목회자들이 고급스럽게 주전자를 들고 드립을 하든, 믹스커피 한 봉을 찢어 달달함을 즐기든. 내게는 어떤 욕구나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맛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은 물론 오히려 믹스커피의 텁텁함과 냄새가 싫어 멀리할 정도다. 하지만 내 나이 스물여덟, 군에서 경험한 믹스커피는 시편 23편의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이었다. 동전 몇 개만 넣어주면 쉼과 평안을 선물했다. 전임 사역은 군대만큼 고단했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제법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못난 성격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자꾸만 일이 내 눈앞에 나타났고 나는 끝장을 봐야만 했다. 군대에서 버릇이 또 나온다. 짧은 밤이 아쉬울 정도로 늘 할 일은 충만했고 야근은 일상이 되어간다. 어느 늦은 저녁, 퇴근하려 일어나 보니 책상에 쌓인 종이컵이 보인다. 믹스 커피의 흔적이다. 매일 4~5개 이상 쌓여야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난다. 어디서 이 장면 본 듯하다. 익숙하다. 오래전 부목사로 살아가던 선배들의 책상이 이랬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일에 찌든 중간 관리자들이 이런 모습이다. 과장의 책상은 늘 믹스커피 마시던 종이컵이 쌓여있다. 얼굴 한번 펴지 못하는 중소기업 간부도 그랬던 것 같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난 직급이 어느 정도일까? ‘부장?’ 제법 괜찮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어보다가 도리질을 한다. ‘과장.’ 그게 맞다. 부장은 너무 과하다. 하지만 ‘대리’까지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 개척하고도 여전히 내 책상 한구석에는 종이컵이 잔뜩 쌓여있다. 교회를 개척해서 담임이 되었으니 지금의 나는 사장일까? 과장과 부장을 오가던 그때 생각에 그냥 혼자 웃어본다. 그래, 어쩌면 생계를 두고 염려하며 고군분투하는 구멍가게 사장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창업하는 내 또래 사장님들보다 열정도, 기획력도 떨어지는 못난이일지도.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고는 급히 가방을 둘러메고 목양실을 빠져나온다. 여전히 내 손에는 따뜻한 믹스 한 잔이 나를 위로하고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4-02-01
  • [박봉석 목사] 스톱(STOP)
    남성들은 청소년 시절에 그런 경험을 대부분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담배를 한 번 해보라고 권유를 받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담배가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함께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담배를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어떤 친구들은 소신껏 담배를 거부합니다. 얼마든지 친구들을 따라서 담배를 피울 수 있지만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다니는 친구들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그것을 거부합니다. 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것과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것은 능력 부족이지만,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은 용기이며 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란 죄 된 것을 하지 못해서 안 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에 스톱할 줄 아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TV에서 동물농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입니다. 그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동물이 소개되는 데 특별히 개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어떤 개는 먹을 것을 코앞에 들이밀어도 주인이 ‘먹어’라고 말을 하기 전에는 절대 먹지 않습니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 먹을 것을 코앞에 두고도 먹지 않는 것은 보통의 훈련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개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그런 훈련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훈련해도 되지 않는 개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좋은 품종의 개냐 아니냐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동물은 그렇게 훈련을 통해서 스톱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스톱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넘어져서 죄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일컬어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윗에게는 무엇 무엇을 잘한 신앙적이고 정치적인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런 업적과 비견되는 업적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스톱의 업적이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여겼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는 성전을 건축하려는 간절한 열망도 있었고 또 그것을 건축할 능력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아들 솔로몬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두말하지 않고 스톱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자신은 아들이 그 일을 잘 하도록 준비해 주기만 했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귀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막으시는 것이야?”라고 항의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스톱했습니다. 아무리 내 뜻이 좋고 열망이 충천하고 능력이 있다 해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스톱할 줄 아는 다윗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과 신앙심이 별로 없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차이는 고우(Go)할 때보다 오히려 스톱(Stop)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얼마나 스톱을 잘 할 수 있느냐에 그 신앙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 힘든 것은 열심히 일을 하는 것보다 주일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눈앞에 돈이 보이기 때문에 중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내 노력이 결실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일주일 중 하루를 성경의 계명을 따라서 기꺼이 안식하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스톱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스톱하라고 할 때 스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신앙으로서 나의 노력과 능력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펄펄 뛰기만 하지 말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그만 스톱하십시오.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2024-02-01
  • [박동철 장로] 개식용 금지법과 인본주의속 애견문화
    문헌이 많은 중국 역사 속에 개에 대한 고사(古史)가 많다. 한자에 개를 나타내는 두 글자가 있다. 狗(개 구)와 犬(개 견)이다. 狗와 犬의 개 표기에는 차이를 두고 쓰여졌다고 여러 문헌에 기록 돼 있다. 犬으로 표현되는 개는 사람과 친숙하고 사람에 충성하는 개로 표기 되고 있다. 충견(忠犬)이 있고 견마지로(犬馬之勞)라는 숙어가 있다. 狗로 표현되는 데는 주로 고기로 표현되는 양두구육(羊頭狗肉) 토사구팽(兎死狗烹)등의 숙어가 있다. 이를 두고 볼 때 狗의 개는 식용으로, 犬의 개는 평생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개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 또한 이 같은 설명을 하는 예 또한 있다. 어쨌든. 국민적 많은 논란가운데 있던 개 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 법제화됐다. 2027년부터 아마 우리나라에도 개고기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개고기에 대한 많은 논란과 담론이 있다. 찬반과 논쟁을 떠나 개와 개고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考察)을 해보면 개라는 동물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 식용금지에 대해 동물 애호가들은 대찬성이고 개고기를 즐기는 자들은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어느 때 이든지 문화적 차원에서도 대세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서양처럼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은 미개인이라는 딱지가 붙을만 하다. 그러나 개고기가 깊은 병환 후 또는 몸이 허약할 때 먹어본 사람은 그 약효가 대단하다고 하는 실례가 많다는 점도 있다. 필자가 칼럼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가 있다. 그동안 경제 발전과 함께 생활 문화 속에 애견(愛犬)문화가 너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한 집 건너 개를 키우는 애견 인구가 크게 늘었다. 개를 키워보면 사람과의 흐르는 정리가 너무 따뜻하고 아무 이해 없이 주인만 사랑하는 그 맛을 본 사람은 개가 그냥 좋다는 것이다. 실제 우울증 환자 또 홀로 사는 분들은 애견과 가족이 되는 것이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 또한 설명한다. 문제는 애견 문화 사회가 너무 지나쳐가고 있지 않나하는 우려 또한 있다. 우선 앞으로 개의 동물적 개체수가 과잉되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할 전망이 분명하다. 필자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교회를 섬기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공동체가 너무 애견문화에 편승 하는 것은 스스로 인본주의 문화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얼마 전 목회를 잘하시는 유명한 목사님과 대화에서 은혜 되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다. 그 목사님 가정에 애견을 키우는데 아침마다 목사님에게 사랑을 주는 눈길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눈을 맞추지 않고 교회로 출근하는데 아주 힘들다는 우스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는 교회공동체 교인들보다 눈앞에 개가 아른거려서 억지로 개를 무시하는 노력을 한다는 고백(?)을 했다. 교회공동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애견문화의 지나침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이웃 사람을 바라봐야하는 교회를 공격하는 인본주의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벌써 애견가정과 교인들을 위해 교회 내에 애견 센터를 시설하여 예배시간 애견들을 모시고와서 보호해주는 교인 마케팅 하는 교회 또한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애견 문화가 우상시되는 지나침이라고 본다. 교회는 경우가 합당한 정신과 믿음으로 세상 문화 트랜드를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펴고 싶다. 사람을 무한대 편하고 즐겁게 하기위해 홍수처럼 쏟아지는 다양한 문화들은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무작정 흘러들어오는 인본주의 문화들을 거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교회공동체, 잘 살펴봄이 필요한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1-11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1-03
  • [박봉석 목사] 어떤 눈입니까?
    어느 집의 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주말여행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달려서 수려한 경관이 일품인 계곡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텐트를 칠 만한 자리를 찾아보라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첫째가 근처에 있는 큰 바위를 보고는 그곳으로 냅다 달려가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좋아요.” 그러자 둘째가 대꾸했습니다. “아니에요. 거기는 평평하고 넓기는 하지만 약간 경사가 져서 안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소나무 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그늘이 있고 참 좋아요.” 그러자 이번에는 첫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나무에는 송충이가 있을지 몰라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들은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한참을 텐트 칠 장소를 물색하던 두 아들은 한 물가에 다다랐습니다. 바로 그곳에 첫째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어떨까요?” 그러나 그 말에 둘째가 받아서 말했습니다. “아까 형이 말했던 그 바위보다 훨씬 못한 걸.” 그래서 세 사람은 그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맨 처음에 봐두었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봐두었던 바위 위도 그리고 둘째가 봐두었던 소나무 밑도 벌써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불편한 곳에서 텐트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텐트를 다 치고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들들아 똑똑히 들어 두어라. 더 나은 것은 더 나은 마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아버지의 말에 아들들이 물었습니다. “더 나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요?” 그 물음에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장점을 크게 보고 단점을 작게 볼 줄 아는 마음이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부러 세관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들을 로마의 권세를 등에 업고 민족의 피를 빨아 먹는 매국노로 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일부러 그 세관을 찾아가셨습니다. 왜요? 바로 그곳에 제자로 불러야 할 마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다른 유대인들의 세리를 보는 눈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예수님의 눈은 그들의 눈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리도 기꺼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세리 또한 사랑의 눈, 긍휼의 눈으로 보아주셨습니다. 간혹 성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인간 다시는 안 볼 거야.” 마음이 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그것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봐 주셨습니다.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예수님의 눈을 닮은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된 서로를 향해서 단점이 아닌 장점을 크게 볼 줄 아는 사랑의 눈, 긍휼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눈이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여러분으로 인해서 더 많은 성도들과 다음 세대들이 격려를 받고 힘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장점도 주고 단점도 주었습니다.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고 반대로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구성원이 다 그렇습니다. 장점만 있는 성도도 없고 단점만 있는 성도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자꾸 다른 성도의 단점만 크게 보기 시작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리고 교회에는 불신이 가득하게 됩니다. 반대로 장점을 크게 보고 단점은 감싸 안는 분위기가 되면 교회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넘치고 소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다른 성도의 무엇을 주로 보고 있습니까? 장점을 더 크게 보는 당신의 눈이 다른 성도를 살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눈으로 당신의 배우자와 자녀를 볼 때에 당신은 배우자와 자녀를 살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2023-12-20
  • [오성한 목사] 먼저 보라(2)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똑같이 행한다”라고 하셨다(요 5:1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셨다. 무엇으로 보셨을까? 믿음의 눈으로 보셨다. 영의 눈으로 보셨다. 영의 생각으로 보셨다. 행하실 때도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행하셨다. 먼저 보시고 행하셨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땅에서도 행하셨다. 우리도 먼저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쉽게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한다. 영의 세계가 땅과 하나이기에 영의 세계를 보는 것은 이 땅을 사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흥분되지 않는가? 그러니 믿음으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놀라운 일을 끌어 낼 수 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개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충격을 줘야 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충격을 받을 때, 그 믿음의 담대함은 말씀을 풀어 놓게 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의 눈으로 먼저 보여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말씀을 기도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풍랑이 잠잠하게 되는 것을 미리 보셨다. 나사로가 살아 나오는 것을 미리 보시고 말씀하셨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고 말씀 하실 수 있으셨다. 미리 보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우리는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보려고 하면 믿음으로 볼 수 있다. 말씀을 기도로 뿜어내라.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뚜렷이 보일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주 본다. 믿음으로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 주장한다. 동시에 나에게 말해 준다. 말씀이 나의 생각을 장악하도록 반복해서 자신에게 말해 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오성한, 너는 예수님처럼 할 수 있어.” “네가 나의 일을 하겠고 더 큰일을 하리라”고 했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하나님께 고백한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육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 있는 세계다. 게하시는 아람 군대를 보고 떨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보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게하시가 눈이 열렸을 때 그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게하시가 눈이 열리기 전에도 천군천사들이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꼭 육의 눈에 보여야 있는 것인가? 아니다. 육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다. 게하시가 보기 전에도 천국 천사는 그 곳에 있었다. 그래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을 주장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쉽게 보인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기 때문이다(딤전4:5). 예를 들면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함을 붙잡고 반복해서 기도하고, 주장하고, 마음에 그려지게 될 때까지 영의 생각을 하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 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얻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이 실재로 나에게 먼저 보여야 한다. 보이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는 보지 않았으면서 하려한다.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먼저 내 속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일이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기도는 말씀을 붙잡고 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주장하고 인정하고 부르짖어 보라. 마음에 뚜렷이 보여 지는 것 때문에 흥분이 일어나게 하라. 용기가 생기고 말하고, 싶도록 까지 말씀으로 기도하라. 손만 뻗어도 역사가 있겠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나는 악수만 해도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럴 땐 반드시 기적을 본다. 실재로 악수하다가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 믿음으로 먼저 보기만 하면 된다. 먼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그대로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보는 훈련의 개발이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로 계발할 수 있다. 이사야는 계시의 눈이 열려 보좌가 높이 들린 것을 보았다.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으셨고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함을 보았다. 우리도 이 광경을 믿음으로 지금도 볼 수 있다. 성전에서 천사와 함께 화답할 때 문지방이 떨렸고, 영광의 구름은 성전을 가득 덮었다. 우리도 천사와 화답할 수 있다. 이 일은 먼 우주 속에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 우리의 몸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는가? 우리 몸이 성전이다. 우리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사야가 본 광경이다. 놀랍지 않는가?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은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사실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12-18
  • [이정희 목사] 직장에서의 상호간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
    I. 서언(序言) 우리의 일상용어 중에 가장 많은 대화의 대상은 가족 일가친척보다 늘 같은 공간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하는 같은 직장인들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상호간의 의사소통이나 호칭과 지칭어의 바른 사용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 되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당연시되는 현실에서 직장 관계나 일반 사회생활 속의 바른 생활 용어의 정립은 더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2011년 12월에 국어심의회를 통하여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직장의 상사, 직급이 같은 동료, 아래 직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호칭과 지칭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직장에서의 호칭과 지칭 1. 직함이 있는 상사에 대한 경우 :주로 상사의 직함에다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부장님’, ‘과장님’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과장이나 부장이 여러 명 한자리에 같이 앉아 있어서 구분해야 할 경우는 직함의 부서나 이름을 붙여서 ‘총무 부장님’, ‘김정희 부장님’ 등으로 호칭 것이 좋다. 2. 자신과 직급이 같은 동료의 경우 : 그런 경우는 보통 ‘김OO 씨’, ‘OO 씨’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자신이 과장이면, 같은 동료 과장에게는 ‘김 과장’으로 부르거나, 자신과 직급은 같지만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김 과장님’, ‘김OO 과장님’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3. 직함이 없는 동료의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김OO 씨’로 부르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OO 씨’로 부를 수도 있다. 서로 친한 경우에는 ‘OO야’라고 이름만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그런 호칭도 무방하지만, 공적인 직장 안에서는 적절하지는 않다. 4. 직함이 없는 선배 또는 나이가 많은 동료 직원의 경우 :‘님’자를 붙여서 ‘선배님’, ‘김OO 선배님’ 등으로 호칭하는 것이 좋다. 간혹 직장에서 ‘형’, ‘언니’ 등으로 호칭하는 경우도 있어나 직장 안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5. 상사가 직함이 없는 아랫사람을 호칭할 경우 :‘OO 씨’, ‘김OO 씨’로 부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직급이 아랫사람이라도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김OO 선생님’으로 불러서 존중하는 용어들이 일반적이다. 6. 외국어와 우리말 혼용어의 경우 :직장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호칭어 중에는 영어와 우리말을 같이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미스 김’, ‘미스터 김’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거의 보편화 되어 있어서 상용어가 되어 있지만, 이런 경우는 혼용이기 때문에 원론적인 면에서는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III . 결 어 ‘목회자 세계에는 선후배가 없다.’, ‘교인들에게는 남녀노소 위아래가 없다.’는 말을 가끔씩 듣는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너무 근거 없는 혹평을 당하는 것 같아서 언짢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말이 옳은 말로 들려지기도 해서 필자 자신도 일반 직장관계는 아니지지만, 교계나 섬겨왔던 교회 안의 각종 인간관계에서의 호칭과 지칭했던 많은 언행(言行)을 돌아보기도 하고, “벌써 나도 나이가 들어서 과거 어른들처럼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예의가 없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어떤 말로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든 우리의 직장 아닌 교계와 교회 안에서의 언어생활이 반듯하고,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남녀노소가 같이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12-18
  • [조희완 목사] 용서의 이유 (마18:21-35)
    1999년 7월 4일 이었습니다. 그날은 미국 독립기념일이면서 주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디애나 주립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윤원준>이란 한국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불루밍턴>에 있는 한 교회로 들어가던 중에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맞아서 영문도 모른 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벤자민 스미스>라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무차별로 난사한 총에 맞아서 사망한 것입니다. 며칠 뒤에 그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는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해서 약 1,500여명의 조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참석을 했습니다. 장례식 순서 가운데 그의 형이 조문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하며, 미국을 용서하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동생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와 미국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그 장례식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인사말을 들으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후 미국 사람들이 “그의 인사말을 들으면서 마치 온 몸이 감전된 것처럼 전율을 느꼈습니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이고, 용서는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의 뿌리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용서가 없는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할까요? 첫째는, 용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18:21-35) 둘째는, 용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막11:25-26) 셋째는, 용서는 승자 인생이 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창45:1-15)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이때에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그에 따르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2-1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