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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3초 미학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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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하수룡 장로] 일견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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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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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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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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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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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0-02-19

실시간 초장칼럼 기사

  • [하수룡 장로] 지팡이
    스틱은 뾰족해서 산이나 땅에서나 쓸 수 있고 지팡이는 끝이 넓고 접착력이 우수하여 의지가 될 수 있어 노인이나 장애인이 주로 사용한다. 특히 부부가 늙으면 지력이나 체력이 떨어져 지팡이와 같은 존재로 서로 의지하며 산다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왕이 장수한 노인에게 ‘청려장’이란 지팡이를 하사해 몸을 의지하여 오래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고 지금은 그것이 노인의 날에 대통령의 명의로 100세 노인에게 주어진다.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정장 외에 그에 어울리는 모자와 지팡이가 없으면 다 차려입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소화되어 필수 목록에서 빠졌지만 셜룩 홈즈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 해당 시대를 묘사한 작품을 보면 호신을 위해 사용한 것으로 지팡이는 꼭 필요했다. 유럽에서는 귀족 여성이 즐겨 사용한 시기도 있었는데 지팡이 안에 향수와 악세서리 등을 넣어 몸을 치장하며 실용적인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흰색 지팡이 역시 시각 장애인에게 가장 적합한 도구라 한다면 진정 지팡이는 그의 인생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는 신앙인에게는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모세의 손에 잡혀있는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지팡이를 잡으라고 했을 때 그것으로 이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의 지팡이는 정말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었다. 지팡이를 뻗어 땅을 치거나 던져도, 어떤 것을 가리켜도 지팡이가 각종 동물이 되기도 하고 번갯불을 불러오기도 했다. 또한 바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는 샘물이 되기도 했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바로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푯대를 향하기만 하면 분명 능력의 지팡이를 손에 잡을 수 있다. 현대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고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쉽게 일을 포기하려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안타깝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주께로 나아간다면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가 향하는 확고한 목표 지점이 하나님이면 그분께서 우리의 원하는 바를 100% 다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삶의 모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서 그 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진정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비록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전능자께서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다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많은 시간을 무심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진정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영혼이 없이 산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실체를 내 마음에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면 안 된다. 나의 인생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그리하면 엄청난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모세같이 사용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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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하수룡 장로] 비 나 리
    비나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노래나 옛날부터 비나리패가 놀이의 마지막 과정에서 덕담으로 기원할 때 사용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행복을 빈다는 뜻으로 좋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을 빌고 미래를 소망한다. 아름다운 인생을 염원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특히 기독교인들에겐 참 좋은 말이라 생각된다. 몇 년 전 아내의 칠순 때 우리 부부가 중국 태항산을 여행한 적이 있다. 산은 험했지만 규모나 아름다운 대협곡은 과히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절경이었다. 우리가 만선산과 왕망령을 오가는 터널 길을 지날 때 놀라운 사실을 알고 감탄했다. 오랜 옛날 오지 중에 오지인 이곳을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13명의 청년들이 무려 21년 동안을 삽과 괭이로만 절벽을 뚫어 만든 길이 1250m 동굴 도로이다. 소위 ‘괘백공로’인데 그 당시에 작업에 참여한 분은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연로한 한 분만 생존하여 그때 상황을 증언하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존경스러운 것은 자기 자녀들이 바깥 큰 세상으로 나아가 새로운 것을 배워 제대로 된 사람이 되길 바랐기 때문에 긴 시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험난한 길을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선배는 부족하나 후손이 훌륭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이었기에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만든 길이 바로 비나리길인데 큰 의미뿐만 아니라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도 마을 사람들이 지게 짐을 지고 다니던 옛길을 군민과 도시민의 건강을 위해 증평군과 청원군 미원면을 잇는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길이 바로 소망을 올리는 증평 비나리 길이다. 도로가 생기기 전엔 솟점말, 밤티, 삼기 등 세 마을 모두 율리 마을이라고 했는데 옛날 여기 사람들 모두 고개 너머에 방앗간에 방아 찧으러 넘어 다닌 길이다. 소달구지가 오르기는 어림도 없어서 지게 짐을 지고 다녀야 하는 고단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림공원과 세 곳의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1008개의 계단을 만들어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면서 소원을 비는 아름다운 비나리길이 된 것이다. 신선한 숲의 공기를 마시며 근심을 내려놓고 길의 끝에서 소망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풍광이 된 것은 절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인생의 힘든 언덕을 오르며 기도하며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과 평안을 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항상 인생의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서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길 소원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중국의 태항산 대협곡과 가까운 이웃인 증평에 자녀의 앞날을 위해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만들었고 소달구지도 못 다니는 길을 내가 사는 이웃들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 아름다운 희망의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오죽하면 소원을 비는 마음으로 길의 이름도 비나리길로 명명하였으랴.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을 빌고 오늘도 숨을 헐떡거리며 고달픔을 꾹 참고 비나리길을 오르는 것은 미래에 자녀들과 이웃의 작은 행복을 위해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2024.02.19.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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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하수룡 장로] 3초 미학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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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하수룡 장로] 끄트머리
    대한민국 사람이면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족이 나들이하면 꼭 준비하는 것이 김밥인데 보통 김밥을 썰 때 누구나 먼저 김밥의 끄트머리를 집어 들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끝부분이 맛이 좋기 때문이다. 한가운데보다 끄트머리 부분이 속 재료가 풍부하여 우리에게는 맛이 좋을 거란 기대 속에 결국 기쁨을 맛보게 된다. 김밥의 끄트머리든 일의 마지막은 항상 긴장의 연속으로 기대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한다. 하루가 저물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밤은 그 마지막이 분명히 다가오기 마련이다. 눈 덮인 땅에서 추위로 벌벌 떠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추위를 녹여 줄 햇빛이 빛나는 아침을 고대하고, 병마로 슬픔에 빠진 이들의 끝에서는 나음받을 특효약이나 기적을 가져다줄 광선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전능자께서 우리에게 어둠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을 안고 살아가도록 먼동이 트는 새벽을 허락해 주신 것이라 믿는다. 전과 16범인 김용수라는 분은 자기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청송 보호감호소에 수감 되어 있을 때 한 수녀를 만나 주님의 사랑에 눈을 뜨고 자기의 간을 떼주어 간암의 끄트머리에 선 분을 구하고 또 신장의 한 부분을 떼주어 두 생명을 살리는 큰일을 했었지만 그 분은 항상 마음 한구석의 무거운 짐을 더는 듯해 감사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처럼 모든 일엔 끄트머리가 있고 한 해와 인생도 끄트머리가 있음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좋다. 우리 조상들은 끝을 단순히 어떤 일의 마무리로만 여기지 않고 새로운 시작의 전환점으로 생각하여 늘 새벽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늘을 있게 만든 것이라 믿는다. 끄트머리는 끝이 아니고 곧 다른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끝은 피리어드(period)가 아니고 컴마(comma)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끄트머리인 것 같으나 컴마의 상황에서 다시 다음 단계로 연결해 가는 것이다. 컴마의 상태는 분명히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된다. 라틴어로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한 말로 자기에게 주어진 한 날 한 날에 충실하게 살라는 뜻이다. 사람은 언제인지는 몰라도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죽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죽음을 기억하고 살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신나게 사랑하며 살라는 아모르 파티가 되는 것이 인생의 순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인생을 기쁨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어느새 2023년이 한 해의 끄트머리에 와있다. 영어에 commencement라는 단어의 의미가 우리말 끄트머리와 상통한다. commencement는 졸업과 시작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있는데 그 뜻이 절묘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금의 어려운 끄트머리의 상태를 잘 극복해야 다음 단계인 좋은 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새롭게 시작하는 새벽의 먼동을 바라며 새로운 시작을 노래하자. 우리들의 마음속에 피어있는 365개의 꽃송이가 밤의 끄트머리에서 시들기 전에 희망의 새벽을 맞아 생기가 돋고 싱싱하게 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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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 [하수룡 장로] 울이
    오랜 시간 인도에서 선교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에게 카스트 제도와 사회적 편견에 매여 말씀으로 변화를 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의 생수에 목말랐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성령 하나님은 장소나 사람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거침없이 그들에게 임하여 큰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언어적 한계와 피부색깔이나 문화적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예수를 영접한 이가 늘어난 후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인해 고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왕복거리가 꽤 먼데도 선교사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구해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는 정성을 보였다. 선교사가 전하는 짧은 메시지에 감동받아 인도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진심으로 울어주는 눈물의 감격이 선교사도 엉엉 울게 만든 것이다. 울어주는 이의 마음과 우는 이의 마음이 이어지고 언어보다 시선을 통해 의미가 전해지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최고의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비가 엄청 쏟아지는 어느 날 마포대교 위의 난간에서 우산을 쓰고 혼자서 고개를 숙인 여고생이 있었다. 잠시 뒤 저 멀리서 한 여순경이 허겁지겁 뛰어와 여고생 앞으로 달려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처음엔 경찰을 보고 놀랐지만 진심어린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고 따돌림과 떨어진 성적으로 죽기로 결심했던 여고생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 여고생의 유일한 친구가 이런 고민을 알고 혹시나 큰일이 날까 봐 울면서 다급하게 신고한 것이다. “너를 위해 울어 줄 친구 한 명이 있다면 넌 정말 괜찮게 살아온 행복한 사람이야. 일단 언니랑 좀 걸으면서 얘기하자.“ 이처럼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이가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위의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고 진정 울어줄 사람이 되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참된 위로자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다. 장례식장에서 임종 예배 등을 드릴 때 목회자가 장례 예문에 따라 틀에 박힌 말씀보다는 마음을 다해 정말 그 가정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울어 줄 수 있을 정도의 은혜의 말씀이 전해진다면 가장이나 자녀들의 미미한 믿음도 새롭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인도사람들의 울어주는 눈물이 선교사와의 행복한 관계를 만들었고 한강에서 자살의 순간까지 갔던 그 여고생을 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모두 울어 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울어줄 이가 있다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큰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나치 정권의 폭력이 닥쳤을 때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마지막엔 교회로 끝을 내는 것을 보아도 자기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 줄 이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인생의 끝과 엄청난 환난이 엄습했을 때 진정 나를 위해 과연 울어줄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우리 주님은 날 위로해 주시고 울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남을 위해 주님처럼 내가 먼저 울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하면 최고의 관계가 회복되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분명히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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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하수룡 장로] 일견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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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하수룡 장로] 행 복
    핀란드는 수년 동안 여러 문화권에 걸쳐 행복과 관련한 조사에서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 이야기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비교가 심하지 않고 정신적 자유도가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우리의 삶은 하루에 몇 번이고 우울해지고 고민에 빠지기도 하여 괴로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살고 있어 실제 잘 사는 것보다 남들에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허황된 마음이 문제가 된다. 그러면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인데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쉽게 단정지울 수 없다.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수많은 조건 가운데 물론 돈도 포함된다고 보지만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개인의 행복은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유력한 한 방송에서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결과가 나온 것은 유의미하다. 7개국에 1인당 1만 달러를 준 무리와 주지 않은 무리에게 3개월 동안 사용하도록 한 결과 실험군이 대조군보다 행복도가 높은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 것을 보아도 돈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신명기에 ‘네 행복을 위해’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린 언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원 성취했을 때일까? 아니면 부가 쌓일 때일까? 보통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실현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의 좋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려고 하는 까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말씀은 세상을 보시고 행복해하셨다고 바꿔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신음을 멈추게 하고 그 자리에 행복이 자리 잡게 하려 하셨다. 이스라엘이 행복에 이르게 된 것은 자연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세상이 상호 작용한 결과물임이 틀림없다. 이스라엘 민족이 최고의 나라로 행복하게 된 것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오로지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잘 실천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임을 알고 온전히 지킬 때 그 결과가 행복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고 삶의 한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배우로서 세상의 행복을 다 누렸던 김수미라는 분은 세상적인 영화는 덧없음을 깨닫고 75세의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행복에 초대를 받았다. 믿는 우리 앞에는 이미 행복의 초대장이 도착해 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그 말씀을 따라가는 성도가 될 때 행복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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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하수룡 장로] 실업자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자리가 있어도 적성에 맞지 않거나 천한 일이면 일자리를 갖지 않거나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상태를 실업이라 하고 이에 해당되는 사람을 실업자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청년들이 3D업종을 기피하여 많은 다른 나라의 청년들이 조용히 들어와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각종 직업에 종사하여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어 자녀들 교육과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교회 직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러 직종에 일하는 분들이 모여 교회를 섬기는 것은 정말 아름답다. 자기의 재능을 교회를 위해 섬기거나 몸으로 헌신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만 능력이 있는데도 교회 땅만 밟고 다니는 교인들이 있다면 그분들이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섬겨야 할 분이 섬기지 않기 때문에 그 빈자리에 이단이 가만히 들어오는 것을 염려하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 물론 뜻있는 성도들이 직분에 따라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지만 직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개인주의가 발달하여 이기적인 성향이 강해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은 용역을 맡기거나 자기가 하지 않고 남에게 미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근래에 와서 직분자들이 옛날처럼 자기희생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바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현실적으로 교회에도 사회처럼 3D 사역이 있다. 교회당 청소, 화장실 청소, 주차관리, 교회차 운행, 주방봉사 등이 그것이다. 이 일은 쉬운 것같이 보이지만 꾸준히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사역인데 정말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쁨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도 많지만 의무사항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명으로 받드는 것이 교회 실상이다. 내가 사회에서 맡은 직분이 중하고 힘들기 때문에 그런 일에 투자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도 할 것이고 한 나이라도 젊은 사람에게 일을 미룬다거나 직분자들이 있으니까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우월의식이나 헌신할 마음이 없어 꾸중물에 손을 넣어 식기를 씻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까? 보이지 않는 차별의식 때문에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청소할 수 없고, 몸에 해로운 가스가 무서워 가스 불에 성도들이 먹을 음식 만들기를 꺼려한다면 이것 역시 자기가 스스로 섬기지 않는 실업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천막 교회가 이젠 현대식 교회로 변모하면서 성도가 봉사할 일자리가 엄청 많아졌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실제로 일하는 사람이 없어 교회 안에는 섬기지 않는 실업자로 가득 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른자리에만 살 것이 아니라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로 살아야만 노동의 가치를 알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섬기려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낮아져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기쁘게 잘 감당해야만 실업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 헌신하게 되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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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3-08-24
  • [하수룡 장로] 역할
    우리가 살아가는 소속집단에서 개인이 행하는 역할은 엄청 중요하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듯이 교회에서는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로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일 때문에 역할이 요구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업무에 제대로 역할만 해도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그렇지 못해 그 파열음으로 교회는 물론 사회까지도 물의를 일으켜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기원전에 있었던 충직한 장로들의 헌신적인 역할을 들여다보면서 교훈으로 삼으면 좋겠다. 우리가 잘 아는 다리우스 왕 때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예사로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파사의 초대 왕 고래스가 내린 포고령(BC538)으로 귀국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고문관들을 매수하여 성전 계획을 꺾으므로 다리우스가 왕이 될 때(BC522)까지 공사를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바벨론의 원수들과 이교도들은 아하수에르왕(BC486~465)이 등극하자마자 유대민족과 예루살렘의 성민들을 고발하였다. 왕이 죽은 뒤 아닥사스다 왕(BC465~423) 때에도 여전히 고발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했다. 그러나 뜻있는 분들과 장로들은 이에 맞서 오직 성전 재건만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라 믿고 목숨을 걸고 자기의 역할을 다하여 투쟁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닥사스다에게 올린 상소인 장계를 보면 기가 찬다.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무엄하게도 옛날에 반역했던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운다고 했다. 그 성을 다 쌓는 일이 다 끝나면 그들은 조공도 세금도 바치지 않을 것이라고 규탄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전부터 반역질을 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했다. 성 쌓는 일이 다 끝나고 그 성전이 재건되면 다시 반역할 것이라고 왕에게 강하게 아뢴 것이다. 왕은 자기가 지시를 내릴 때까지 성을 쌓는 일을 중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재건이 하나님의 뜻이고 유다 백성이 살길임을 일깨워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전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총독 다뜨내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 집을 짓느냐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유다 장로들을 굽어보시는데 절대 중단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했다. 공사를 책임진 두목이 누구인지 하문했을 때도 우린 하나님을 섬기는 장로들로서 이 전을 다시 세워야 하니까 선대왕의 약속대로 방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주장했다. 바빌론의 다리우스 왕이 명령하여 선대왕의 실록을 살펴보았더니 신전을 다시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구들을 다 돌려주라고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다리우스왕은 유다 장로들이 성전 짓는 일을 힘써 도우라고 명령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완성한 것이다. 지배당한 나라로서 불가능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장로들이 예언자의 격려를 받아가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자기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유다 장로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오직 성전 재건을 위한 사생 결단의 추진력 때문이라 생각되어 오늘날 교회 장로들의 헌신적인 역할이 절대 요구되는 시대임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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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하수룡 장로] 길
    여행하거나 산행을 해보면 걷는 길 위에서 어쩐지 행복함을 더 크게 느낄 때가 많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현재의 흥미로운 상황이 우릴 기쁨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중국 여행지의 마을을 돌아보며 체험했을 때 넘 재미있고 신기해서 그만 길을 잃어버려 혼이 난 적이 있다. 물론 골목길의 미로 때문에 힘이 든 것이 사실이지만 만일 변화가 심한 사막 가운데서 길을 잃으면 엄청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인생길은 평범한 길이라 할지라도 나그네를 인도할 안내자가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히말라야의 산행 길은 엄청 힘든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산 정상의 산장에 물건을 날라주고 수고비로 살아가는 두 모자의 삶에서 인생길은 정말 험난함을 보여 준다. 엄마의 쇠약으로 13살 어린 아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엄마와 같이 짐꾼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은 정말 짠하다. 엄마의 아픈 다리의 통증으로 짐을 지고 잘 걸어 올라가지 못하니까 아들은 어린 마음에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과 분노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불평하는 것을 보고 인생이 힘들고 고르지 못한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산행 길에서 모자는 어려운 상황으로 속상함과 분노로 관계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인생의 행복과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오직 살기 위해 안내자도 없이 괴로움을 참고 무조건 산 정상만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야만 하는 모자의 인생길이 정말 험난하고 측은하다. 요즘 우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피로에 쌓인 일과를 떠나 여행 길에 올라 생활 충전을 위해 노력하지만 기대한 만큼 위로를 받지 못한다. 낙안읍성같이 성곽 길을 걸으며 옛날과 현대를 느껴보기도 하고 섬진강의 물줄기를 따라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지점까지 옛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강을 따라 마음을 내려놓고 몸이 가는 대로 천천히 걷는다. 가로등 길을 지나 호젓한 박물관을 만나면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이나 풍류를 맛보기도 한다. 편백이 있는 나무 톱밥 길은 늘 걷는 딱딱한 인위적인 길보다 훨씬 느낌이 좋아 걷는 것 그 자체가 기분을 좋게 하여 즐거움에 빠진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길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해도 걸을 때는 좋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힘들고 괴로워지면서 전진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길이라고 하셨다. 원어를 보면 예수님 자신이 ‘I am the way.’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분명히 'The way'라고 하셨지 the road, the street라고 하지 않으셨다. wa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길’ 이외 ‘방법’이란 말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해주시고 평안한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아버지의 집에 가려면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어떤 좋은 길도 우리 인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그네의 힘든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능하신 우리의 안내자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그 길만이 인생을 만족시킬 우리가 안내받아야 할 최고의 길임을 기억하고 그분 의지하여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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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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