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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중단과 지속 (행4:23-35)
옛말에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꼭 필요하고, 또한 명예가 귀한 것이지만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면 돈도 명예도 다 소용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잃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사람이 참 부럽게 여겨집니다. 병원에 가서 보면 수많은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환자들 중에는 참 안타까운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치료와 회복이 가능한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치료와 회복이 불가능한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는 분들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소중한 지체이긴 하지만 잘라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잠간이라도 멈추면 죽음에 이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손가락을 하나 절단한다든지 아니면 다리를 한쪽 절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멈춘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멈춘다든지, 혈액 순환이 멈추게 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신앙생활에도 절대로 중단되거나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 멈추어 있거나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중단되어 있으면 죽은 신앙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절대로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중단하면 죽은 신앙이 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을 힘쓰면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첫째로, 어떤 압력이 있어도 예배와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23,24) 둘째로, 전도와 선교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29,31) 셋째로, 교제와 친교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32,34) 소중한 것을 중단하지 말고 지속함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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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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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랑의 내용 (갈6:11-15)
“팔불출”(八不出)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본래 뜻은 제 달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여덟 달만에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팔삭동”(八朔童)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온전하게 다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팔불용”(八不用), 혹은 “팔불취”(八不取)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팔불출”(八不出)이라고 하면 “좀 모자라는 사람”, “좀 어리석은 사람”, 혹은 “좀 덜된 사람”, “좀 덜 떨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팔불출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 둘째, 자기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 셋째, 자기 자식 자랑하는 사람, 넷째, 자기 집안이나 가문을 자랑하는 사람, 다섯째, 자기 형제를 자랑하는 사람, 여섯째, 어느 학교 누구누구 후배라고 자랑하는 사람, 일곱 번째,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 어디라고 우쭐대면서 자랑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여덟 가지가 아니고 왜 일곱 가지 뿐이냐는 데 대해서는 한 가지를 모자라게 해놓음으로써 역시 팔불출이게 했습니다. 팔불출의 내용을 보자면 오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다 팔불출들입니다. 왜냐하면 구지 마누라 자랑이나 자식 자랑이 아니더라도 일곱 가지 중에 한두 가지는 자기도 모르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누구나 다 팔불출들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소위 “자기 PR시대”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팔불출에 해당되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팔불출에 해당하는 그런 내용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 앞에 꼭 자랑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정말 자부심을 가지고 힘써서 자랑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주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갈6:13-14) 둘째는, 받은바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롬15:15-17) 셋째는, 주님의 교회를 자랑해야 합니다.(살전1:7-8) 이런 자랑이 많을수록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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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의지할 이유 (사26:1-7)
한자 중에 사람 인(人)자를 보면 똑 같은 두 획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 의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의지하고 살 때 삶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히얀 한 것은, 그렇게 관계를 맺고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하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나를 의지할 때 부담스러워 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씨가 넓은 사람이라도 누가 나를 지나치게 의지할 때 싫어합니다.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의지를 하면 틀림없이 눈 밖에 드러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남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의지하면 할수록 부담스러워 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사람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의지하면 할수록 사랑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사람은 의지하면 할수록 부작용을 낳고 상처를 받지만 하나님은 의지하면 할수록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 중에 한 가지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다 받아주시고, 언제든지 환영해 주시고, 아무리 의지를 해도 싫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까요? 첫째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1) 둘째는 우리의 평강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3) 셋째는, 우리의 인생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4) 불안정한 세상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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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1-26)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땅에 사는 인생을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보면 일생 동안 받기만 하는 거지 인생으로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생 동안 베푸는 삶으로 사는 부유한 인생이 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부자가 아니다. 부자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비록 가난하지만 베풀 수 있는 인생이 부유한 자이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많이 소유해서도 그 마음이 거지로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비록 가진 소유가 적어도 베풀면서 사는 넉넉한 자가 있다. 이 같은 것이 제도와 관행을 따라 이루어진 거지가 비리요, 지능적 수법을 이용한 것이 사기요, 무력적 폭력을 사용한 것이 강도이다. 그러나 거지를 주려는 신사로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은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고 했다. 예수 이름으로 주는 자가 복되고, 예수 이름으로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고받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 도성에서 예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어떤 유형의 성도인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 말씀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좋은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앉은뱅이 신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남의 도움으로 살아왔거니와 앞으로도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니 불행한 삶이다. 매사에 피동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변에 영적인 앉은뱅이가 참으로 많다. 찾아가서 모시고 나오지 않으면 이곳에 나올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 신자이다. 자기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거룩한 반열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다. 둘째, 그 친구들이다. 그를 언제나 성전 미문에 매어 놓은 자들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보다 귀한 분들이 없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사업가이다. 그들은 왜 성전 미문을 택했을까? 아마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이 많은 종교인들의 마음에 동정과 관심을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왜 그를 메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까? 정작 앉은뱅이가 만나야 할 분은 하나님인데 이것이 우리의 약점이다. 오늘날도 사회사업가형의 신자가 많다. 이웃과 인간관계를 잘한다. 구제하고 자선하는 일에도 힘쓴다. 어려운 자들의 아픔에도 동참하고 동정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을 심어주지 못한다. 셋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다. 대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들이다. 그리고 거룩하게 구별되게 사는 바리새인들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두개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생명이 없는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이 땅 위에 생명 없이 죽은 종교인들이 많다. 넷째, 예수 이름을 증거 하는 사도들이다. 이들은 예수를 만난 자들이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한 예수를 믿는 생명의 무리들이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 생명을 증거 하여 죽은 영혼을 살리는 자들이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자들이며, 불필요한 수고를 거치게 하며, 외식적인 종교인들을 책망하고, 예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종들이다. 그러면 이들의 믿음은 어떠했는가? 본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사도들에게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체험했다. 이 같은 성령의 실례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Ⅰ. 제 구 시 기도 시간 “제 구 시 기도 시간1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제 구 시는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3시쯤 된다.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어중간은 시간이다. 일을 다시 시작하기는 조금 늦고, 일을 마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성전을 찾는 자들이 별로 없다. 그러니 자연히 자신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기도하게 되고, 이것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형식적인 기도가 되고, 종교인들에게는 외식하는 기도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때 성전으로 올라갔다. 남이 할 수 없는 시간에 하는 이것이 놀라운 기적이다. 정시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엡6:18)하라고 했다. 그러나 범사에 무시로 기도할 수 있는 자는 정시 기도의 훈련이 된 자라야 가능하다. 여러분 중에 특수 선교 단체나 기관에서 훈련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일정한 기간 동안에 나의 사적인 모든 것을 단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나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어려운 때에 엎드려 기도하라. 오후 3시가 가장 어중간은 시간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사역을 위해서는 가장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다. 이런 때에 성전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참으로 귀한 믿음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바치기 어려운 제 구 시 기도 시간이 언제인가? 아마 새벽 시간일 것이다. 조금 더 당길 수도 없고, 조금 더 늦출 수도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하나님을 만나기 좋은 시간이고, 자신을 돌아보기 좋은 시간이다. 모든 일에 적절한 기회가 있다. 언제가 가장 적기인가? 깨닫는 그 순간이다. 깨닫는 그 순간에 결단하면 된다. 마귀는 항상 “다음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한다. 마귀는 지금까지 수많은 수법으로 우리를 속여 왔다. 마귀는 이렇게 가르친다. 어린 자녀를 가지신 분에게는 “자녀를 양육하신 후에”라고 하며, 부모님이 계시는 분은 “부모님이 죽고 난 후에”라고 말한다. 이런 자들 뒤통수에 마귀가 앉아서 조종을 하고 있는데 그 말에 다 넘어가 버린다. 그러나 바울은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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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
Ⅱ. 베드로의 설교(14-36)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베드로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비급한 겁쟁이였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잡아 대제사장 가야바 궁전으로 끌고 갔을 때 그도 뒤따라 거서 하속들과 같이 있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마 26:69-75). 그러나 오순절을 통과하면서 성령을 받고난 이후의 베드로는 완전히 달랐다. 소리를 높여 부활의 주를 증거 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때가 제삼 시였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오전 9시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삼시, 육시, 구시 기도한다. 이것은 포로 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진다(단 6:10). 그러므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전 9시에는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기도한다. 고기와 포도주는 주로 저녁 만찬에 먹는다(출 16:8, (전 10:16-17). 그러므로 “때가 제삼시라”는 말은 지금은 취할 시간이 아니고 기도할 시간이라는 말이다. 지금 당신이 건강하고, 물질이 있고, 배운 기술이 있으면 주를 위해 헌신할 제삼시임을 알아야 한다(전 12:1).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성경을 인용4한 말세의 현상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화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장사를 할 때 마지막 파물에는 팔던 물건을 막 퍼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셨다. 이는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아 왕 때 사역한 요엘 선지가 예언한 것처럼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꿈을 꾸게 된다고 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8-30). Ⅲ. 무리들의 회개운동(37-4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37.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 성령은 말씀의 레일 위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말씀을 선포하면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기고 자란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정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세상을 이기는 무기는 믿음이다(요일 5:4). 마음에 찔림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인간이 복음과 접할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죄의식이다. 복음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복음을 믿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지만 다른 하나는 복음을 거부함으로 저주를 받는다. 노아 시대에 방주로 들어오기를 거부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유월절 피가 없었던 애굽의 집에는 다 재앙이 내려졌다. 여기 마음에 찔림의 상태는 몽둥이에 많이 맞아서 부어 오른 상태를 말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우리의 심령은 말씀의 방망이에 맞아서 우리의 교만이 터져야 한다. 그러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스데반 집사를 통해 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회개하기보다는 이를 갈았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말씀을 통해 마음에 찔림을 받을 때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 이를 갈게 되지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면 회개함으로 주께로 돌아온다.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세례를 통해서 죄 씻음을 받아야 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성령 주시는 목적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한 상태로 넘치게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의 내적인 증거는 믿음의 담력이다. 그리고 외적인 증거로는 언어와 생활의 변화이다. 무디는 유리병에 든 공기를 뽑기 위해서 병에 물을 채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 속에 죄악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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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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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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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성경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으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째, 예수의 동생 유다이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그는 초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과 한 형제이지만, 같은 배에서 나왔으나 씨가 다른 형제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많은 박해를 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후에 형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명분상 사도적 반열에 참여하여 예수가 메시야라는 언약의 복음 유다서를 기록했다. 둘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의 이름 앞에 꼭 붙이는 한 단어가 있는데 예수를 판 자 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4),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요한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고 하였다(요14:22).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 불행한 자였다. 마지막 셋째, 본문에 나오는 다대오 유다이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 요한은 왜 유다를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렀을까?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 예수를 판 가룟 유다 때문에 유다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전 구약에서 유다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로 유다란 이름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무도 유다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그 이름을 가진 자들도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불렀다. 다대오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심당원이었다. 주님의 고민에 동참한 다대오 주님의 구원사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괴로운 심정의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이제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 지실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심령의 괴로움이었다. 물론 십자가 지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과 괴로움은 이 사실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외부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조직 내에서 반역자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떠벌려 말하기도 곤란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조직 내에 반란자가 있음을 애기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삼년 동안 훈련하여 준비해 왔는데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닌 조직 내에서 반동분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직의 붕괴마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제자들이 서로 분쟁하여 붕괴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제자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공동체의 마비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 당장에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요13:24). 그는 분노하여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느냐 하고 분개했다. 그때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떡 한 조작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는 그때가 회개 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오히려 괴심한 생각을 품어 주님을 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단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나간 그날이 영원한 밤이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다대오 유다는 이 같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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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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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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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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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 또 산에 오르사 주님은 구원역사를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주님은 지상교회를 세우시고 가장 본질적인 목양 사역으로서 제자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막3:13-16)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훈련은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학습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변화를 주는 인격적 사역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24시간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보고 생활 속에서 삶을 배우는 인격훈련이었다. 세인들처럼 삶을 베일에 가려 놓고 교안만 가져와서 세미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활하면서 앞장서서 본을 보이는 모범적인 삶이었다. 둘째, 세상을 향한 파송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르는 초청에는 관심이 많으나 세상을 향해 내어 보내는 파송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처 땅 끝까지 가야 한다. 목숨을 요구하는 사역의 현장에라도 가야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곳까지 오셨다. 셋째, 귀신들을 내어 좇는 권세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실 때에 거저 보내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능력을 주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자로 나아가면 사단의 권세가 우리 앞에 굴복하게 된다. 집에 들어가시니 마지막으로 이제 주님은 하산하여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다.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무리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주님의 친족들이다. 이들은 주님을 알기로 가정을 버리고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미친 자로 알았다. 사실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픈 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사명자의 길은 이처럼 외로운 것이다. 주님이 전도현장에서 받은 몇 가지 아픔들은 어떠했는가? 첫째, 무리들에 의한 쉼 없는 사역이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 틈이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사역이니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로서 목양 사역에 수종을 들다보면 때로는 밤과 낮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둘째, 친족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이 주님을 데리려 왔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때 집안의 장남인 주님이 공생애 사역으로 전도하려 나오니 이를 이해하지 못한 동생들과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한 구원사역을 혈육의 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셋째, 성령을 훼방하는 사역이다. 주님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가? 지금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보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하고 떠나간다. 그런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아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단의 사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거룩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서기관들의 잘못이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름답고 큰 역사라도 나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가 행한 것이면 비판하고 정죄하여 사단의 역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와 동역자들의 거룩한 사역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형제와 자매 본 문단은 앞 문단과 연결되어 있다. 20-21절에서 예수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들 듣고 예수를 잡으러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예수를 오해한 혈통적인 가족들이 서기관과 바알세불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무리들 중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가족들을 향해 참 가족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어떤 분이 가족이란 영어 단어 이니셜을 따서 이렇게 풀이 했다. “아빠 엄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을 사랑이란 새 계명 하나로 다 이루셨다. 십자가는 사랑의 결정체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고통의 쓴 잔을 앞에 높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했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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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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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라
- 미국 하버드대학교 폴 케네디교수는 “한국이 21세기의 세계 중심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한의 문화이다. 한 민족은 5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으로 고통을 당해왔다. 그래서 민족의 저변에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한이 1919년 3월 1일 태극기로 독립만세운동을 하게 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배후에 촛불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둘째, 가족 문화이다. 가족 중심의 정문화가 감수성에 예민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머니 품에서 모유를 먹고 자란 세대는 감성이 풍부하다. 21세기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런 때 한민족의 효 문화가 세계 열방을 선도할 강점이 되었다. 셋째, 엘리트 의식이다. 한 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이런 자부심이 하나의 긍정적인 목적으로 작용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넷째, 모험정신이다. 적극적인 모험정신은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마지막 다섯째, 단일민족의 정체성이다. 단일민족 단일 언어로 뭉쳐진 공동체의 저력은 다이나믹한 폭발력을 발휘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폐쇄적일 수도 있으나 이를 긍정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므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고장 난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문제에서 해결을 받는다. 인간은 사고뭉치이다.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남으로 참 자유를 얻었다. 마태는 세관에서 돈으로 얻을 수 없었던 참 평안을 예수를 만남으로 누렸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억지 금식을 했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금식을 통한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음을 보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에게 참 안식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본문 1절에서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서북 지역의 해변가에 있는 마을이다. “수 일 후에”라고 하심은 성구막 1:21막 1:21절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치시고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 후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던 때가 다음 안식일이 이르기 전이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 온 이후로 온 동네에 대 소동이 일어났다. 열병으로 앓아 누었던 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온전해지고, 각색 병든 자가 와서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 주님이 다시 오시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 이런 상황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주님에게로 나온 그들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첫째,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일차 가버나움을 다녀간 이후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오셨고 그들은 병자를 침상에 메고 주님을 만나러 왔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불가능한 환경 앞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매고 가는 사이에 벌써 사람들이 먼저 와서 꽉 들어 차 있어 문 앞까지 들어 설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불가능한 환경 앞에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적극적으로 길을 찾는 것이다. 동서사방으로 다 막혀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어 환자를 달아 내리기로 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린다. 넷째, 지붕에 구멍을 뚫는 일이다. 사실 이 일은 아주 심각한 사건이다. 우선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범죄행위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면 구속도 될 수 있는 엄청난 위험부담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환자를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하는 온전히 헌신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이런 헌신과 희생을 한다면 어떤 중풍병자라도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혼연일체 된 마음이다.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갈 때도 그러했지만 최후의 순간 환자를 주님 앞으로 달아 내릴 때는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는 초긴장 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풍환자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주님은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런 믿음의 행위를 보셨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중풍병자가 많이 있다. 제 발로 걸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은 다 영적 중풍병자이다.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 땀 흘리는 수고와 함께 물질적인 헌신도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중풍병자를 말씀 앞으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예수를 그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세리 마태 집에서 주님은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다. 가버나움에서 세관을 지나가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가정과 직장을 한 순간에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런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본문 14절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란 말씀에 주목해 보라 알패오란 분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다. 레위는 자라서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세관에 앉아 사역하면서 그 마음에 수많은 영적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레위란 “하나님과 연합”이란 뜻이다. 알패오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레위라 지었을 때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원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레위는 세관에 앉은 세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세리는 로마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는 매국 행위를 행하므로 창기보다 더 추한 직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알패오와 그 아들 레위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레위는 언제든지 때가 되면 이 직업에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레위는 미련 없이 세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와 그 아버지 알패오는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을 청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증오하여 주님이 죄인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때 주님은 복음의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나는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왔다고 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세관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소원하는 자를 부르기 위해서 오셨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의 구주로 오셨다. 둘째, 기쁨과 감격을 주기 위한 혼인집 신랑으로 오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는 금식이 필요 없다. 주님은 율법적 제약에 얽매여 있는 부자유한 신부들에게 참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복음의 신랑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득세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는 금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금식의 능력으로 흉악한 결박을 풀어서 승리해야 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주중에 2일 이상 규칙적으로 금식했다. 그러나 신랑과 함께 하는 혼인집에 가면 이런 금식의 법에서 자유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축제의 자유를 준 영적 신랑이다. 셋째, 새 가죽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로 오셨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당시 바리새인들이 붙들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이나 랍비적인 전통은 생명력이 없으므로 변화에 신축성이 없는 묵은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복음은 생명력을 가진 운동하는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였다. 주님은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병든 인생은 영적 대 의사 되신 주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난 감격의 기쁨으로 축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생베 조각의 복음적인 가치를 낡은 구습과 전통에 붙여서는 안 된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생명의 복음은 어떤 언어와 문화적인 삶도 극복해 갈 수 있다. 안식일에 밀밭 가에서 안식일에 주님과 제자들이 길을 갔다. 분주하게 서두르다 보니 식사 할 때를 놓친 것 같다. 시장한 그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었다. 이것이 용케도 바리새인의 렌즈에 잡혔다. 요즘 같으면 그들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해서 보도 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안식을 범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약해서 말씀하고 있다. 밀 이삭을 손으로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행위이며, 그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은 정미소에서 방아 찢는 것이며, 껍질을 날리기 위해서 입으로 분 것은 타작마당에서 가라지를 날리는 키질행위라고 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안식일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주님은 다윗이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집에서 행했던 것을 말씀하셨다. 아비아달은 사울 왕에게 쫓겨 온 다윗에게 베풀 항용 떡이 없음을 보고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 떡을 주어 먹게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은 안식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을 하셨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금지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회당과 동네를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둘째, 안식의 근본정신은 사람을 위함이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창조질서에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쉼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철저히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없다고 하면 안식일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셋째, 그런데 그 안식일에 주인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이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날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가?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주님은 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러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전도를 위해 행하신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농부가 추수할 때 밭이랑에 이삭 얼마를 남겨 두어 길가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양식이 되게 하셨다. 주님은 친히 금식하여 주려 죽는 아픔을 체휼해 보았으므로 배고픈 자들의 아픔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 지명유대인 전통을 계승하는 소극적인 금지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주인 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복음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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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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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신약성경 처음 4권은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복음이다. 마태복음은 세리 마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구약에 대한 인용도 99회 정도 된다. 또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므로 신약의 가장 서두에 편집했다. 특히 왕, 왕국이라는 말이 75회 이상 나온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마가복음은 요한의 성을 가진 마가가 바울을 수종들다가 로마에서 로마인들을 위하여 종의 관점에서 기록하였기에 섬김의 관점에서 기록된 복음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써 믿음과 덕을 갖춘 신실한 여성도로서 그 집과 다락방을 사도들의 휴식처로 제공하여 지상교회를 탄생시킨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마가의 외숙부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 받아 초대 선교사로 명성을 떨친 바나바이다. 누가복음은 아수리아 안디옥 사람인 의사 누가가 당시 지성을 자랑하는 헬라문화를 지배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도성인신 한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인자의 복음이다. 마지막 요한복음은 세베대와 살로매의 아들인 야고보의 동생 요한이 쓴 책으로써 요한은 주님의 제일 어린 제자로 밧모섬에 귀향까지 간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이다. 요한은 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위해 공관복음에 없는 부분을 보충해서 기록한 우주적인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주후 65년 전후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참했다가 중도에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나중에는 옥중에 갇힌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에 끝까지 수종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는 마가복음을 “로마인의 복음”이라고 했다. 마태복음은 혈통을 중시하는 족보로부터 시작하지만 마가복음은 로마인에게 준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시작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된 복음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착념하지 않게 했다. 복음이란 ‘좋은’이란 말과 ‘철자’란 단어의 합성어로 “좋은 소식”이란 말이다. 마가복음은 총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이다. 책의 총 제목은 종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핵심 성구는 마가복음 10장 45절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다. 광야의 사람 세례 요한 그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신 분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사40:3절)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가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해방되어 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보다 더 큰 의미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죄악의 사슬에 묶여 있는 백성을 풀어서 참된 자유를 주기 위해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바로 그 사역의 수종자가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삶은 당대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당신에게 오늘날 주어진 삶은 또 다른 한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너무도 거시적인 동시에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건이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그는 이 땅에 인자의 몸으로 섬기려 오신 분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왕이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함부로 맞이할 수 없다.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하늘의 어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오셨다. 당시 유대 사회는 왕이신 주님이 사역하기가 너무도 불편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파 놓은 함정이 많았고, 사두개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박아 놓은 돌부리들이 많아 그 첩경을 평탄하게 하지 않고는 주님이 걸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원해서 광야의 사람이 되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라고 했다. 그는 당시 덕망이 있는 제사장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가문에 태어나서 세속적으로 출세를 할 수 있는 신분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 자리를 포기하고 빈들에서 민초들과 함께 생활하는 광야의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서 약대털옷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소리란 모양도, 빛도, 냄새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듣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삶을 변화시키는 소리는 복음의 소리이다. 그는 가장 천한 자리에서 가장 귀하게 살았으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권세 있게 살았으며,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가장 밝게 살았다. 그는 젊은 삼십대에 부름을 받아 짧은 세월을 살았으나 가장 값지고 굵게 살았다. 그 입은 헤롯 대왕도 막지 못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 때가 차매 주님이 오셨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신 후에 소리와 같이 사라졌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인생철학을 너무도 멋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렇다면 주님은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 오셔서 공생애 구원사역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란 죄사함의 표로써 공교회 앞에서 베풀어지는 예식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베푸는 것을 사양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나 주님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했다. 주님은 죄가 없지만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의 제물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주님이 세례 받고 죄가 청산됨으로 하늘 문이 열리면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다음으로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았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주님은 공생애에 불어 닥칠 시험을 이기기 위해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했다. 사단권세가 주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했으나 주님은 그때마다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쳤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주님은 구원사역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소그룹 제자훈련을 시작하셨다. 제자훈련은 주님이 가르쳐 준 성경적인 전도방법이었다. 그러면 주님은 제자선택을 어떻게 하셨는가? 먼저 현장으로 가서 직접 확인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주님은 책상에 앉아서 이력서만 보고 채용한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사역하는 것을 보시고 부지런 하고 충성된 자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그물과 배 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와 종들까지 버려두고 쫓았다. 이것이 제자의 도이다. 주님의 하루 일과 주님의 하루 일과는 너무도 분주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래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했다.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을 보낸 하루를 통해 주님의 하루 일과가 어떠한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오전에는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쳤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을 가르쳐서 천국복음을 증거 하셨다. 그의 말씀은 서기관들과 달리 권세가 있어 뭇 사람들이 놀라고 귀신들이 항복하며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다. 오후에는 심방을 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 인명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주님은 회당에서 교육과 설교사역을 마치시고, 권찰들을 데리고 주의 종들의 집을 심방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확인했다. 주님의 말씀이 증거 된 복음이 가는 곳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다가 주님이 손잡고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님께 수종 들었다. 저녁에 대성회가 열렸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밤에 다 몰려 왔다. 주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각색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이튿날 새벽에는 기도하러 갔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주님의 하루 사역은 한 순간도 쉴 틈이 없는 분주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미명에 기도할 곳을 찾으셨다. 새벽 기도를 놓치지 않았다. 낮 동안에 이런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난 큐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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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중단과 지속 (행4:23-35)
- 옛말에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꼭 필요하고, 또한 명예가 귀한 것이지만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면 돈도 명예도 다 소용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잃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사람이 참 부럽게 여겨집니다. 병원에 가서 보면 수많은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환자들 중에는 참 안타까운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치료와 회복이 가능한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치료와 회복이 불가능한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는 분들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소중한 지체이긴 하지만 잘라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잠간이라도 멈추면 죽음에 이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손가락을 하나 절단한다든지 아니면 다리를 한쪽 절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멈춘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멈춘다든지, 혈액 순환이 멈추게 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신앙생활에도 절대로 중단되거나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 멈추어 있거나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중단되어 있으면 죽은 신앙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절대로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중단하면 죽은 신앙이 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을 힘쓰면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첫째로, 어떤 압력이 있어도 예배와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23,24) 둘째로, 전도와 선교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29,31) 셋째로, 교제와 친교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32,34) 소중한 것을 중단하지 말고 지속함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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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중단과 지속 (행4: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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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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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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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랑의 내용 (갈6:11-15)
- “팔불출”(八不出)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본래 뜻은 제 달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여덟 달만에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팔삭동”(八朔童)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온전하게 다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팔불용”(八不用), 혹은 “팔불취”(八不取)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팔불출”(八不出)이라고 하면 “좀 모자라는 사람”, “좀 어리석은 사람”, 혹은 “좀 덜된 사람”, “좀 덜 떨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팔불출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 둘째, 자기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 셋째, 자기 자식 자랑하는 사람, 넷째, 자기 집안이나 가문을 자랑하는 사람, 다섯째, 자기 형제를 자랑하는 사람, 여섯째, 어느 학교 누구누구 후배라고 자랑하는 사람, 일곱 번째,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 어디라고 우쭐대면서 자랑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여덟 가지가 아니고 왜 일곱 가지 뿐이냐는 데 대해서는 한 가지를 모자라게 해놓음으로써 역시 팔불출이게 했습니다. 팔불출의 내용을 보자면 오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다 팔불출들입니다. 왜냐하면 구지 마누라 자랑이나 자식 자랑이 아니더라도 일곱 가지 중에 한두 가지는 자기도 모르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누구나 다 팔불출들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소위 “자기 PR시대”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팔불출에 해당되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팔불출에 해당하는 그런 내용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 앞에 꼭 자랑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정말 자부심을 가지고 힘써서 자랑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주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갈6:13-14) 둘째는, 받은바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롬15:15-17) 셋째는, 주님의 교회를 자랑해야 합니다.(살전1:7-8) 이런 자랑이 많을수록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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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랑의 내용 (갈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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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인내의 결과 (약5:7-11)
- 서양 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마리의 개구리가 창고 안을 뛰어 다니다가 그만 우유 통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유 통에 빠진 두 마리의 개구리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마리는 미끄러운 우유 통을 몇 번 기어오르다가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고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한 나머지 그 안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반드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밤새도록 있는 힘을 다해서 우유 통을 휘저었습니다. 그 결과 액체였던 우유가 점점 버터로 변했고 개구리는 그 단단해진 버터를 밟고 우유 통 밖으로 뛰어나올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포기와 절망은 우리를 실패와 죽음으로 인도하지만 인내와 희망은 우리를 성공과 생명으로 인도해 줍니다. 옛말에 “무인 불승”(無忍不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승리도 없다”는 말입니다. 남다른 결과를 성취한 사람이나, 남다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남다른 인내와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인내하지 않았는데도 승리하고 성공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 “무인 불승”(無忍不勝)이라는 말을 꼭 기억하고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은 장거리 마라톤 경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내가 요구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내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내하면 반드시 기억해 주십니다.(살전1:3,4) 둘째로, 인내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히6:13-15) 셋째로, 인내하면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약5:10-11절) 힘든 일이 있더라도 우리 모두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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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인내의 결과 (약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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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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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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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의지할 이유 (사26:1-7)
- 한자 중에 사람 인(人)자를 보면 똑 같은 두 획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 의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의지하고 살 때 삶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히얀 한 것은, 그렇게 관계를 맺고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하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나를 의지할 때 부담스러워 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씨가 넓은 사람이라도 누가 나를 지나치게 의지할 때 싫어합니다.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의지를 하면 틀림없이 눈 밖에 드러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남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의지하면 할수록 부담스러워 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사람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의지하면 할수록 사랑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사람은 의지하면 할수록 부작용을 낳고 상처를 받지만 하나님은 의지하면 할수록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 중에 한 가지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다 받아주시고, 언제든지 환영해 주시고, 아무리 의지를 해도 싫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까요? 첫째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1) 둘째는 우리의 평강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3) 셋째는, 우리의 인생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4) 불안정한 세상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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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의지할 이유 (사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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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1-26)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땅에 사는 인생을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보면 일생 동안 받기만 하는 거지 인생으로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생 동안 베푸는 삶으로 사는 부유한 인생이 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부자가 아니다. 부자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비록 가난하지만 베풀 수 있는 인생이 부유한 자이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많이 소유해서도 그 마음이 거지로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비록 가진 소유가 적어도 베풀면서 사는 넉넉한 자가 있다. 이 같은 것이 제도와 관행을 따라 이루어진 거지가 비리요, 지능적 수법을 이용한 것이 사기요, 무력적 폭력을 사용한 것이 강도이다. 그러나 거지를 주려는 신사로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은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고 했다. 예수 이름으로 주는 자가 복되고, 예수 이름으로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고받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 도성에서 예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어떤 유형의 성도인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 말씀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좋은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앉은뱅이 신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남의 도움으로 살아왔거니와 앞으로도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니 불행한 삶이다. 매사에 피동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변에 영적인 앉은뱅이가 참으로 많다. 찾아가서 모시고 나오지 않으면 이곳에 나올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 신자이다. 자기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거룩한 반열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다. 둘째, 그 친구들이다. 그를 언제나 성전 미문에 매어 놓은 자들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보다 귀한 분들이 없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사업가이다. 그들은 왜 성전 미문을 택했을까? 아마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이 많은 종교인들의 마음에 동정과 관심을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왜 그를 메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까? 정작 앉은뱅이가 만나야 할 분은 하나님인데 이것이 우리의 약점이다. 오늘날도 사회사업가형의 신자가 많다. 이웃과 인간관계를 잘한다. 구제하고 자선하는 일에도 힘쓴다. 어려운 자들의 아픔에도 동참하고 동정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을 심어주지 못한다. 셋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다. 대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들이다. 그리고 거룩하게 구별되게 사는 바리새인들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두개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생명이 없는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이 땅 위에 생명 없이 죽은 종교인들이 많다. 넷째, 예수 이름을 증거 하는 사도들이다. 이들은 예수를 만난 자들이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한 예수를 믿는 생명의 무리들이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 생명을 증거 하여 죽은 영혼을 살리는 자들이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자들이며, 불필요한 수고를 거치게 하며, 외식적인 종교인들을 책망하고, 예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종들이다. 그러면 이들의 믿음은 어떠했는가? 본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사도들에게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체험했다. 이 같은 성령의 실례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Ⅰ. 제 구 시 기도 시간 “제 구 시 기도 시간1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제 구 시는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3시쯤 된다.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어중간은 시간이다. 일을 다시 시작하기는 조금 늦고, 일을 마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성전을 찾는 자들이 별로 없다. 그러니 자연히 자신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기도하게 되고, 이것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형식적인 기도가 되고, 종교인들에게는 외식하는 기도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때 성전으로 올라갔다. 남이 할 수 없는 시간에 하는 이것이 놀라운 기적이다. 정시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엡6:18)하라고 했다. 그러나 범사에 무시로 기도할 수 있는 자는 정시 기도의 훈련이 된 자라야 가능하다. 여러분 중에 특수 선교 단체나 기관에서 훈련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일정한 기간 동안에 나의 사적인 모든 것을 단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나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어려운 때에 엎드려 기도하라. 오후 3시가 가장 어중간은 시간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사역을 위해서는 가장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다. 이런 때에 성전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참으로 귀한 믿음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바치기 어려운 제 구 시 기도 시간이 언제인가? 아마 새벽 시간일 것이다. 조금 더 당길 수도 없고, 조금 더 늦출 수도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하나님을 만나기 좋은 시간이고, 자신을 돌아보기 좋은 시간이다. 모든 일에 적절한 기회가 있다. 언제가 가장 적기인가? 깨닫는 그 순간이다. 깨닫는 그 순간에 결단하면 된다. 마귀는 항상 “다음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한다. 마귀는 지금까지 수많은 수법으로 우리를 속여 왔다. 마귀는 이렇게 가르친다. 어린 자녀를 가지신 분에게는 “자녀를 양육하신 후에”라고 하며, 부모님이 계시는 분은 “부모님이 죽고 난 후에”라고 말한다. 이런 자들 뒤통수에 마귀가 앉아서 조종을 하고 있는데 그 말에 다 넘어가 버린다. 그러나 바울은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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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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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
- Ⅱ. 베드로의 설교(14-36)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베드로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비급한 겁쟁이였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잡아 대제사장 가야바 궁전으로 끌고 갔을 때 그도 뒤따라 거서 하속들과 같이 있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마 26:69-75). 그러나 오순절을 통과하면서 성령을 받고난 이후의 베드로는 완전히 달랐다. 소리를 높여 부활의 주를 증거 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때가 제삼 시였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오전 9시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삼시, 육시, 구시 기도한다. 이것은 포로 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진다(단 6:10). 그러므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전 9시에는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기도한다. 고기와 포도주는 주로 저녁 만찬에 먹는다(출 16:8, (전 10:16-17). 그러므로 “때가 제삼시라”는 말은 지금은 취할 시간이 아니고 기도할 시간이라는 말이다. 지금 당신이 건강하고, 물질이 있고, 배운 기술이 있으면 주를 위해 헌신할 제삼시임을 알아야 한다(전 12:1).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성경을 인용4한 말세의 현상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화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장사를 할 때 마지막 파물에는 팔던 물건을 막 퍼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셨다. 이는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아 왕 때 사역한 요엘 선지가 예언한 것처럼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꿈을 꾸게 된다고 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8-30). Ⅲ. 무리들의 회개운동(37-4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37.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 성령은 말씀의 레일 위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말씀을 선포하면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기고 자란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정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세상을 이기는 무기는 믿음이다(요일 5:4). 마음에 찔림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인간이 복음과 접할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죄의식이다. 복음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복음을 믿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지만 다른 하나는 복음을 거부함으로 저주를 받는다. 노아 시대에 방주로 들어오기를 거부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유월절 피가 없었던 애굽의 집에는 다 재앙이 내려졌다. 여기 마음에 찔림의 상태는 몽둥이에 많이 맞아서 부어 오른 상태를 말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우리의 심령은 말씀의 방망이에 맞아서 우리의 교만이 터져야 한다. 그러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스데반 집사를 통해 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회개하기보다는 이를 갈았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말씀을 통해 마음에 찔림을 받을 때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 이를 갈게 되지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면 회개함으로 주께로 돌아온다.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세례를 통해서 죄 씻음을 받아야 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성령 주시는 목적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한 상태로 넘치게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의 내적인 증거는 믿음의 담력이다. 그리고 외적인 증거로는 언어와 생활의 변화이다. 무디는 유리병에 든 공기를 뽑기 위해서 병에 물을 채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 속에 죄악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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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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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 (1)
- 초기 한국교회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렀다. 당시 평양지역 외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믿음이 좋은 한 여성도가 남편 직장을 따라 평양에서 서해안 황해도 지역 진남포로 이사 갔다. 여인은 예배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이 되면 평양으로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에 집으로 내려왔다. 하루는 달구지에 짐을 싣고 두 아들을 태워 교회로 가는데 두 아들이 장난을 치다가 막대기로 지나가는 말을 쳐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타고 가던 갓을 쓴 부잣집 양반이 땅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두 아들이 경찰에 붙들려 검찰청으로 가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검사가 누구의 소행인지를 물으니 두 형제가 서로 자기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불러 물으니 동생의 소행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여인은 재가를 했는데 큰 아들은 전처의 소생이고 동생은 여인이 낳은 아들이었다. 깜짝 놀란 검사가 여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어찌하다가 이렇게 되었소’ ‘교회 가다가 그랬습니다’ 여인에게 감동을 받은 검사가 여인이 사는 동네에 교회를 세워 주었는데 그 교회가 진남포교회였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 사변적인 신학이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여인처럼 살아가는 삶을 요구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같은 초기교회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 46) 오늘날 한국교회가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음으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마음에 태신자를 품어 그들을 주일에 교회로 인도하여 참된 예배자로 세워 충성된 사명자로 세워가길 바란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태동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1-13절은 구속사의 대사건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말하고 있으며, 14-36절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설교가 나오는데 이는 세계 선교 개시의 선언문과도 같다. 37-41절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가슴을 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하면서 회개하므로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대역사가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42-47절은 갓 태어난 초대교회가 뜨거운 신앙의 기쁨을 서로 나누는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Ⅰ. 오순절 통과(1-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1-4) 오순절에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주님을 잃은 그 순간에 오순절까지 기다림이란 놀라운 결단이다. 그들은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마가 다락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으니 식음을 전폐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가정과 직장에도 엄청난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기도는 생사를 건 결사적인 기도였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삼상7:5-6) 하나님의 역사는 모일 때 일어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성령의 역사는 홀연한 순간에 일어난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하나님의 역사는 홀연한 순간에 일어남으로 우리의 지각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9:3). 그가 빌립보 옥중에 갇혔을 때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고 했다. 오순절 사건도 홀연한 순간에 일어났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을 귀로 들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각국 방언을 입으로 말하는 입체적인 사건이었다. 오순절에 열두 사도와 120문도가 만국 방언을 말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교회의 복음전파가 세상 끝 날까지 세계 도처에 끊임없이 진행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비록 단회적인 사건이기는 하나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성령 운동은 동일한 한 성령임을 말씀하고 있다.(고전12:13) 당시 일어난 오순절 방언은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방언과는 다른 구별된 단회적 사건이다. 비록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단회적이지만 그 같은 성령운동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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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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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사도행전 QT 설교
- 존 맥스웰John Maxwell**목사는 보통 사람이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실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는 실수는 항상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공은 항상 똑똑하고 재능 있는 자에게만 온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를 실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수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수는 배움의 기회이다. 만약 당신이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런 방법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은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할 때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대가를 치르는 부담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화의 속도가 빠른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인생은 살아남기 어려운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므로 능동적으로 앞서서 변화의 물결을 타고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성공은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열정을 가진 소유자에게 온다는 사실이다. 본서는 본래 누가복음 상 하권 식으로 연결된 한권의 책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전후로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에 각각 사복음서의 하나와 예수 부활 이후 사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AD 2세기 이후에 분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 하나는 성경의 내적 증거이다. 누가가 먼저 쓴 누가복음과 본서인 사도행전의 문체나 어휘나 구조가 너무도 일치하는 점이 많다. 누가는 의사로서 본서에 헬라의 의학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 것을 보아 누가가 기록한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행의 동반자로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교부들과 역사가들의 외적증거이다.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이나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 오리겐, 역사가 유세비우스 등이 다 누가의 저작으로 인정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목적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케리그마적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서 증거 됨을 알리기 위함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친히 증거 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세워 교회가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차적 목적은 복음 전하는데 있다. 교회가 복음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든가 하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둘째, 변증법적 목적이다. 기독교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임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변증이 필요하다. 하나는 유대인에게 기독교 복음은 반 율법적이 아니라 율법의 계승자임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씨로 온 것임을 알린다. 다른 하나는 이방종교에 대해 기독교만이 참 종교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셋째, 화해의 목적이다. 사도행전은 두 부분으로 나눈다. 전반부 1-12장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베드로의 복음전파이고, 후반부 13-28장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바울 사도의 복음전파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Ⅰ. 성령세례를 받으라(1-5절) 누가는 ‘먼저 쓴 글’을 간단히 요약함으로 누가복음과 본서의 관련성을 상기시킨다. 또한 부활하신 주께서 실제로 나타나신 모습과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 그리고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들을 통해 본서의 전체적인 진행을 예상케 한다. 특히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사역이 성령 받은 사도들의 증인 역할을 통해 계속될 것임을 명시한다. 이처럼 본문에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약속이 명시 되어 있는 바 이 약속은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으니,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문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뿔뿔이 흩어지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복된 소식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약속함으로 요한의 물세례와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를 씨는 외적인 의식인 반면, 예수의 성령 세례는 내적으로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런 사실은 다음 장에 나타날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증명되었다.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요 3:5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통해 완전히 변화되어 완악한 심령들을 회개시키는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먼저 데오빌로를 찾으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는 바울의 사랑 받는 제자이자 동역자이다. 사도행전의 수신자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였다. 그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로마의 고급관리로 보는 견해가 많다. 오늘날 누가와 같이 먼저 복음을 받은 우리는 이 땅에 숨겨진 데오빌로를 찾는 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많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 전도는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을 말한다. 거기서는 “데오빌로 각하에게”라고 하셨는데 지금 쓰고 있는 사도행전에서는 “데오빌로여”라고 했다. 앞에서는 공적인 직함을 사용했으나 뒤에서는 사적인 호칭을 사용하심을 보아 그 동안 많은 교류와 지속적인 관심과 사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의사로써 자신이 받은 달란트로 봉사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가진 것으로 섬기기를 원하신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용한 지팡이로, 다윗은 물맷돌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었던 한 여인은 옥합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다. 고난 받은 후에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그가 고난 받은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 6-9시까지 어두움이 임했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그리고 예루살렘 변방에 있는 성도들의 무덤이 열렸다. 옛 한글개역성경에는 “해 받으신 후”로 번역했으나 이는 고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를 선지자들의 입을 의탁하사 이루셨다. “고난 받으실 것”을 이미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서 약속하셨다. 해 받으신 이후에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친히 보여 주셨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이 부활신앙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분기점이 해 받으심을 전후한 사건이다. 해 받으시기 전은 복음서 적이며, 해 받으신 이후는 사도행전 적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데는 해 받으심이란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있다. 그래서 누가의 스승 바울은 해 받으심인 십자가가 복음 전파의 핵심임을 가르쳤다. 사도와 같이 모이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면 지금 사도가 있는가? 주님을 따라 다니던 12사도는 2천 년 전에 부름 받아 천국으로 갔다. 그러나 지금도 그 사도들과 같이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도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우리들 중에 있다. 그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이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해 온 믿음의 종들이 오늘날도 있다. 이렇게 세움을 받은 사명 있는 종들과 같이 모여야 한다. 우리는 이들과 뜻을 같이해야 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왜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 되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곳에서 성령을 받기까지 머물러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을 허리에 메고는 길쌈을 할 수가 없음 같이 성령 받지 않고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이 곧 기도이다.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 정도 되었다. 이 무리는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건 갈릴리에서 감람산까지 온 자들이다.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다. 그 후에 약속한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지 않고 감람산에서 마가 다락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무엇 때문에 약속한 성령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10일 가까이 기도했다. 그 동안 가정의 남편이나 자녀들 걱정 혹은 직장이나 생업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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