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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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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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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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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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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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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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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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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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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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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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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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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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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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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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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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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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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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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언제나 항상 (벧전3:13-16)
-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큰 스님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 바로 성철스님이십니다. 그가 입적하시기 전에 남긴 법어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법어의 내용은 알 듯 모를 듯한 유명한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산을 산이라고 하고 물을 물이라고 하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인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유명한 말로 회자되는 것일까요? 불교의 가장 큰 스님인 그가 유치원생 수준의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변화무상한 세상을 꼬집어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산은 항상 산이어야지 물이 되면 안 됩니다. 물은 항상 물이어야지 산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산을 산으로만 보아야지 물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물을 물로만 보아야지 산이 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산이 산으로 있지 않고 물이 되거나 물이 물로 있지 않고 산이 되면 이 세상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급변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변하면 모든 것이 다 끝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우리가 항상 노력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항상”이란 단어가 따라 붙는 말씀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항상 대답할 소망의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벧전3:15) 둘째는, 항상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2:12) 셋째는, 항상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행24:16)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분명한 믿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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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언제나 항상 (벧전3: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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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에 주의하라
-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기로 했다. 첫째, “내 말에 주의해야”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주의하는 것이 무엇인가? 운전을 오래하다 보면 차에 이상이 생기면 작은 소리도 들린다. 초보운전을 할 때는 안 들린다. 차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운전을 반복해서 한 능숙한 사람은 들린다.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차 소리를 들었던 사람은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시끄러움 속에서도 이상이 있어 나는 소리만 크게 듣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세상 소리가 시끄럽다. 환경이 시끄럽다. 주변이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익은 사람은 들린다. 말씀에 주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린다. 단체사진을 찍은 아이들 중에 내 아이가 있으면 내 아이만 뚜렷하게 보지 않는가! 이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집중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저절로 주의하여 집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 밝고 맑게 보인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툭 튀어 오른다. 이렇게 되게 하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내 말에 ‘주의하다(attend)’라는 것은 우선권을 둔다는 말이다. 치유를 원한다면 치유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아!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구나! 창조주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구나!” 주변의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내 마음에 말씀이 있게 된다.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불 믿고 내 것으로 딱 와 있게 된다. 치유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말하자면 치유를 원하면서도 몸의 치유에 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 않는다. 자신에게 기도를 해 주기만을 원하지만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찬송가를 뒤적이거나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 경우를 본다. 기도 받기를 원하면서도 눈빛이 다른 곳에 있다. 초점이 다른 곳에 있다. 그냥 “기도한번 해줘보세요. 효과가 있으면 다행입니다.”는 태도로 굉장히 성의가 없다. 성의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도를 안 해주면 안 될 상황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 주지만 지도하는 자의 마음에도 확신이 없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죽은 자를 살리시러 들어가실 때도 제자 세 명과 부모만 데리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데려 들어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마가복음 6장). 고향에 가셔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믿음으로 해야 한다. 주의하라고 했다. 기도 받으면서 자신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기도해 주는 사람의 믿음으로만 해라는 식의 태도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그냥 한 번 해 보는 정도로 한다. 의사 앞에 가도 태도가 달라지는데 안 그런가? 의사 앞에서도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대나 태도가 어떠해야겠는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아기가 배가 고프면 어떤가? 손가락만 가까이 가도 입을 갖다 댄다. 그러면 배고픈 줄 알게 된다. 이것이 사모하는 것이다. 갓난아이처럼 사모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으로 성장해서 기도생활과 말씀 생활에 발전하여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다른 사람이 시켜서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가 아니라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믿음의 리더들은 건축할 때 비계와 같습니다. 건축을 마친 후 비계가 필요하지 않다. 성도들을 세운 후 걷어치우는 것이다. 성도들도 다른 사람을 세울 때 비계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을 세운 후 철수해야 한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비계와 같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세워가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성장해서 다른 사람의 비계가 되길 원한다. 스스로 서고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세워 놓고 가시길 원하셨다. 그래서 스스로 서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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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에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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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5)
- 격려와 관계 인간은 누구나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해 주고 격려 받으면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격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생을 격려해 주십니다. 말씀으로 격려해 주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격려의 말씀입니다. 격려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목회자는 격려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격려는 식어 냉한 가슴에 불을 붙여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낙심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병들고 고난이 있고 낙심하는 자이기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친 인생들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말로 격려하고 섬겨주면서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리더’는 격려자입니다. 교회는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이고 서로 격려해 주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성령’은 ‘격려의 영’입니다. 편지로 이메일로 전화나 문자로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격려가 없고, 서로 비난하는 교회는 침체 됩니다. 격려를 연습해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격려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겸손과 관계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인격이고, 최고의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교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배우려 합니다. 모세는 수많은 연단을 받은 후에 겸손하고 온유해졌습니다. 사도바울도 모든 일에 겸손했고 겸손함으로 목회하고 선교했습니다. 겸손은 온유의 성품이고,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윗과 세례 요한은 겸손했습니다. 겸손이 인간관계, 관계 목회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도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벧전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겸손히 목회해야 목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겸손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인내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이깁니다. 겸손한 자는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합니다. 겸손한 자는 비난이나 정죄하는 것, 비판하지 않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해야 합니다. 겸손히 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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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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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만화냐, 봉고차냐. 그것이 문제로다
- ‘덕스럽게 하자!’ 담임목사님 방에서 나오며 혼자 중얼거려 본다. 개척 계획과 사임 시기를 의논하며 조금 미루기로 결정했다. 교회 내부 사정과 담임목사님의 안식년 문제로 그리하기로 했다. 물론 고집부리며 사임하고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는 신호를 주시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덕스럽게 하자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결과적으로는 계획보다 많이 미루어졌지만 괜찮다. 좋아하는 목사님 곁에서 행복한 부목사로 살았으니 이 정도 욕구는 잠시 접을 수 있다. 급히 사임하지 않고 부목사로 사역하며 개척을 준비할 시간을 배려받은 것은 득이 되었다. 쫓기지 않고 기도하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볼 수 있고 다른 교회 사례를 살펴보며 탐방도 하고 차근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유롭게 교회 개척을 주변에 알리며 기도와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개척 시기를 연기시킨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을까? 담임 목사님의 배려였을까? “만화책 좀 채워주세요.” 마음먹었던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를 지인들과 공유하며 후원을 요청했다. 누군가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였겠지만 간절했던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나 보다. 지인들을 통해 크고 작은 후원이 이어졌다. 보던 만화책을 교회로 보내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만화책 구매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후원금을 주시는 분도 생겼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평생 만져보지 못한 재정이 쌓였다. 「만화책? 봉고차?」 2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후원금을 쥐게 된다. 내 마음이 흔들린다. 개척하면 승합차 하나는 필요할 건데, 이 돈이면 깨끗한 중고차 한 대를 살 수 있는데. 만화책 사라고 주신 분도 있지만, 개척을 응원하며 주신 분도 있기에 승합차 한 대 구매한다고 따져 물을 사람도 없다. 욕심이 생긴 걸까?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 결심했어!’ 만화책이 승리했다. 봉고차는 앞으로 필요하면 하나님 주실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책은 지금 못 사면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만화는 우리 교회의 소중한 선교 도구가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만화로 선교하는 게 맞나?’ 확신은 있는데 고개는 왜 갸웃거려질까. 여하튼 그런 확신으로 우리 교회는 책장을 짜고 2천 권이 넘는 만화를 채우게 된다. 그리고 개척교회 목사에게 큰 꿈이 생겼다. “대한민국에서 만화책 가장 많이 가진 교회가 되리라!” 에필로그 개척 1년 후, 우리 교회는 차량을 구매하게 된다. 하얀색 카니발은 지금 우리 교회의 발이 되어 잘 쓰임 받고 있다. 물론 5년 할부라는 족쇄가 너무 무겁기도 하지만 카니발은 할부 갚는 내 마음도 모른 체 잘만 달린다. 만화도 봉고차도 모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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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만화냐, 봉고차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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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아직도 남아 있는 영지주의 잔재들
-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서 사고하고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도 그러했다. 당시에 맹위를 떨쳤던 소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창조세계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했고, 유대교 세계관의 많은 요소들 중에서 성경과 부합하는 관점들을 계속적으로 견지하면서 가르쳤다. 그러나 기독교의 어떤 분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늘날 영지주의로 알려진 분파다. 그 명칭이 헬라어 “그노시스”(gnosis, 지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이 집단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비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이들 집단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연합하여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지 않으신 그분의 비밀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영지주의 복음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기록된 후인 2세기에서 5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영지주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도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적 경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가 영적 세계보다 단순히 열등한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악하다고 믿었다. 가장 분명한 예 중 하나는 유대교 성경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유대교나 구약성경을 결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완전히 이교적인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에서 끌어낸 틀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 랍비였던 예수의 예상치 못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영지주의자들의 저술들을 보면 유대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다. 실제로, 일부 영지주의 텍스트는 구약의 신을 하나님을 발산해 내는 주요 계열에서 악한 분파로 묘사하고 있다. 이 유대교의 유일한 신이라는 하나님은 무지하고 사악하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실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악한 세계로 보는 극단적인 이원론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원론은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영지주의 저작물은 섹스와 결혼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둘 다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은 결코 축복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한 정신(영혼)을 본질적으로 악한 몸(물질)에 가두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한 가지 예로서, <도전자 토마스의 책>(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은 영지주의 학자인 카렌 킹(Karen L. King)이 요약한 바와 같이 “육체에 대한 애착과 성행위에 대해 정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주류 교회보다, 적어도 그들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훨씬 더 금욕적인 경향을 보여 주었다. 영지주의적 세계관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성에 대한 관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영지주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혹 예외적으로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성행위를 금하고 여성성(femininity)을 부인할 때만 가능했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 토마스 복음서>(the Gnostic gospel of Thomas) 114장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되, 여자는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으니 ‘마리아[막달레나]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친히 그 여자를 이끌어 남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너희 남자들을 닮은 산 영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스스로 남자가 되게 하는 모든 여자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지주의는 당시에도 결코 널리 퍼진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이 운동은 주로 지중해 동부, 특히 이집트에 흩어져 있던 고립된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한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이들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을 반박하는 글들을 많이 저술했다. 최근까지도 우리가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이들 변증론자들의 글에서 나온 글들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본 발견으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변증론자들의 글들이 아주 정확하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오늘 성경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에도 아직 영지주의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런 비성경적 잔재들을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개혁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당시에 이교적인 사상에 대항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변호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변증의 방법이 성경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교적인 사상에 대항해서 영지주의자들이 취했던 기독교적 피상적 겉치장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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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아직도 남아 있는 영지주의 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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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성경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면, 미리암과 아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세를 비방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딱 걸렸다는 뜻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에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숨겨진 비밀이 있는데, 어느 누구도 미리암과 아론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생뚱맞게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일까요? 성경이 의도하는 사건의 진행은 무엇일까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사건이 모세가 온유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모세는 누나와 형에 대해서 끝까지 참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먼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시점을 살펴봅시다. 바로 앞장에서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낸 모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지도자, 장로를 세워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일에 모세가 져야 할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상 다음으로 발생한 사건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에 대한 비방을 누구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구스 여자를 취한 모세에 대해서 미리암과 아론은 누구에게 비방하였겠습니까? 만약 동생 모세에게 허점과 잘못과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누나로서 형으로서 모세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비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충고요, 충실한 충신들이 할 수 있는 멋진 행동입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 말을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미리암과 아론을 비롯하여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70명의 지도자,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70명의 장로들도 그 비방에 동참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미리암은 소위 말하는 이스라엘의 여론과 정서를 조장하고 충동한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에게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분위기를 조성해도 뒤숭숭한데, 백성들의 지도자요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으니 이스라엘을 이끌어가고 있는 모세에게는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습니까? 미리암과 아론은 70명의 지도자, 장로들도 무시하지 못할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70명의 장로들이 세워지기 전에는 모세 좌우에 항상 미리암과 아론이 있었을 것입니다. 형 아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통치를 위해 세워주신 인물입니다.(출4:14-16) 형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의 입이었고, 대변자였고, 모세와 같은 인물입니다. 아론이 모세를 대신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은 비록 모세가 동생이지만, 모세를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입니다. 누나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수많은 여성을 돌아보며 여성들을 대변하며, 모세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미리암과 아론이 새롭게 세워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다면 그 여파는 어떨 것 같습니까? 거기에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내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아론과 70명의 장로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비방과 건의는 차원이 다릅니다. 건의와 충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비방하기 전에 하는 것입니다. 비방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을 위하여 한다고 하니 70명의 장로들과 대부분의 백성들은 당연히 그런 줄 착각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에게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하고 여론을 호도하고, 잘못된 정서를 만드는 것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비방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여론이 확산이 되고, 정서가 만들어지면 모세에게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에 대한 대적이요, 반역을 도모하는 최후통첩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비방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미혹하는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다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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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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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세계강국 대한민국, 제사장나라 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요즘 화두는 세계 속 강국으로 우뚝 섰다는 평가다. 세계 무역 10대 국가가 된지는 오래전이다. 제조업이 강한 나라, 4차 산업 시대를 이끄는 반도체 분야 사실상 세계 1위에 서있다. 5천만 이상 인구에 186개국과 교역을 하는 세계화에 성공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세밀한 수치를 언급치 않더라도 사실상 G7에 속한 세계 최강 나라의 반열에 섰다. 소프트파워의 문화강국으로도 자리매김했다. K-컬처의 바람이 거세다. 제조 반도체 조선 자동차 건설에 이어 K-방산이 주목을 받으면서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갖추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감히 누가 넘볼 수 있을까. 자화자찬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너무 뜨고 있을까. 우리의 취약함, 남북 대치의 심각한 현실 문제에도 미래학자들은 희망을 주고 있다. 미국 조지 프리드먼은 최근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한 ‘100년 후 한반도’라는 자료를 냈다. 2030년 한반도는 남한 주도 남북통일이 되고 10년의 혼란기를 거쳐 중국 동북지역 옛 고구려 지역까지 복속하게 된다는 예측이다. 그리고 세계 G2에서 세계를 리드하게 될 것이라는 장밋빛 내일의 그림을 그려 발표했다. 꿈같은 이야기일까. 프리드먼의 예측이 지금까지 미래학자 중 가장 근접하는 예측을 많이 했다는 평가를 볼 때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러한 미래 예측은 지금 대한민국이 위치한 지정학적 취약에도 역전될 수 있다는데 기인한다. 문제는 주변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몰락의 내리막길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푸틴의 불행한 미래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의 공룡화 경제는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핵 하나만으로 동족을 노려보고 있지만 거지경제 나라의 내일은 있을 수가 없다. 뭣보다 삼국 공통점인 사회주의 전체 국가의 말로를 불을 보듯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강국이 되고 미래까지 밝게 보이는데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130여 년 전 서양의 선교사들이 온 땅 이곳저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교회를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모든 분야 세계 최고를 구가하는 자양분은 바로 우리의 교회서 나왔다. 세계의 역사 흐름은 프로테스탄트 부흥의 이동에 따라 세계 강국들을 탄생시켜왔다. 이제 동북아로 개신교의 흐름에 그 중심에 대한민국이 서있다. 전 국민 20%이상이 개신교이다. 한국교회 모두가 세계 10대 교회 안에 들어서있다. 기라성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세계 기독교를 움직이는 프로테스탄트 리더국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하게 세계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될까. 암울한 미래의 흐름에 우려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장차 한국사회를 리드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크게 일고 있다. 좌파 정치이념의 교회 침투가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동성애 등 인본주의 문화 산물의 급속한 확산이 세상을 음란과 우상 문화로 물들게 하고 있다. 평양 대 부흥에서 여의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74엑스포 집회 등으로 한국교회의 양적부흥은 이루었다. 세계 선교사 파송 강국의 제사장 나라와 경건과 정결의 한국교회 전통이 이어질지 의문이 많다. 이를 지켜내고 온 땅에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와 인류 사랑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9절 말씀에서 사명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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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세계강국 대한민국, 제사장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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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양보의 축복 (창13:8-18)
- 하늘을 날고 있던 작은 경비행기 한대가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그 비행기 안에는 조종사와 기업인과 판사와 목사와 학생 모두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에는 낙하산이 네 개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조종사가 자기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기업인이 세계 경제를 걱정하면서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판사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자신이 살아야 한다면서 재빠르게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낙하산은 한개 뿐인지라 목사님이 학생을 보고 어서 빨리 그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목사님, 여기 낙하산이 두개가 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니 세 사람이 가지고 뛰어 내렸는데 어떻게 두 개가 있단 말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이 “조금 전에 판사님이 제 책가방을 낙하산인 줄 알고 제 책가방을 안고 뛰어 내렸기 때문에 두 개가 남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우스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양보할 줄을 모르고 나만 살겠다고 서두르다 보면 도리어 망하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면 손해를 볼 것 같지만 결국 복을 받고 내가 더 잘되는 수가 있습니다. 양보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일 뿐만 아니라 복을 받고 잘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인간 사회 속에서 양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자신의 중요한 권리를 양보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아주 귀한 사람이요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첫째로, 양보하면 나중이 잘됩니다.(창13:8-18) 둘째로, 양보하면 자녀가 잘됩니다.(삼상18:1-5) 셋째로, 양보하면 높임을 받습니다.(눅14:7-11)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서로 양보하는 성숙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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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양보의 축복 (창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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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1)
- I. 서언(序言) 전에 어떤 자리에서 30~40대의 젊은이가 자신의 남동생의 아내를 보고 어떻게 불러야 될지 머뭇거릴 때, 옆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그럴 때는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해야 된다”고 일러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잘 알지만, 순간적으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논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주 참고문헌은 2011년 12월 국어심의회에서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논하는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 1. 한자어 해석을 통한 명칭 이해 : 용어를 쉽게 이해하려면 먼저 한자어와 그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형은 맏형(兄)자로 먼저 태어난 남자 동기(同氣), 제는 아우 제(弟)로 나중에 태어난 동기를 말한다. 자매의 자는 손위 누이 자(姉)로 먼저 태어난 여자 동기, 매는 누이 매(妹)자 이다. 또 형제자매의 배우자의 아내는 아내 부(婦)이며, 남편은 지아비 부(夫)이다. 이처럼 한자어의 뜻을 기초로 호칭어와 지칭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여성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 첫째 오빠와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과 지칭어이다. 오빠를 부르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빠’, ‘오라버니’, ‘오라버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오빠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오빠’, ‘오라버니’로 지칭한다. 그다음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오빠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너희 외삼촌’, ‘외숙부’, ‘외숙부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또한 오빠의 아내에 대해서는 ‘새언니’, ‘언니’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오빠의 아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을지라도 오빠가 손위이기 때문에 그의 아내도 ‘언니’로 호칭해야 한다. 두 번째는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다. 남동생이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동생’으로 불러도 된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동생’으로, 시댁 쪽 사람에게는 ‘친정 동생’이라거나, 아이들이 있으면 ‘OO 외삼촌’으로 지칭한다. 또한 남동생의 아내를 부를 때는 때로는 ‘OO 엄마’라고도 하지만, 주로 ‘올케’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신의 자녀에게는 ‘외숙모’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 번째는 언니와 그 배우자에게 대한 호칭이다. 언니를 부르는 가장 보편적인 말은 역시 ‘언니’이다. 또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에게 손위 여자 동기를 지칭하는 말도 ‘언니’란 말로 다 통할 수 있다. 시댁 쪽 사람과 그 외의 사람에게도 ‘언니’, ‘우리 OO 이모’로 지칭 할 수 있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언니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이모’, ‘이모님’이라고 지칭하게 하면 된다. 네 번째는 언니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형부(兄夫)’이다. 또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에게 지칭하는 말도 역시 ‘형부’라고 해야 한다. 시댁 쪽 사람과 그 밖의 사람에게는 ‘형부’, ‘OO 이모부’로 지칭 하며,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부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이모부’, ‘이모부님’이라고 지칭한다. 다섯 번째는 여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다. 여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동생’으로 불러도 된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이름보다는 ‘동생’으로 부르고, 시댁 쪽 사람에게는 ‘친정 여동생’, ‘OO 이모’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섯 번째 여동생의 남편의 경우다. 여기에 대한 호칭은 주로 ‘O서방(書房)’, ‘제부(弟夫)’로 부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참고로 ‘서방’이란 말은 ‘벼슬이 없는 사람을 그 성(姓)과 아울러 부르는 말’로서 남편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또 ‘O서방’, ‘제부’는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한다. 또한 시댁 쪽과 그 밖의 사람에게는 ‘동생의 남편’, ‘제부’, ‘OO 이모부’로 지칭 하며,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제부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역시 ‘이모부’, ‘이모부님’이라고 지칭한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만 노력하면, 아주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언어생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이런 바람직한 언어문화 창달에 앞장설 수 있기를 주께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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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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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처방약을 잘 챙겨 먹기
-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하셨다. 같은 말을 4번 반복하는 것 같다. “주의해라” “귀를 기울이라”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마음속에 지키라”고 4번이나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서 반복하신다.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떼지 말고,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환자가 약을 먹을 때 의사가 처방한 대로 약을 먹어야한다. 약을 함부로 마음대로 먹어선 안 된다. 의사가 지시한 대로 먹어야 한다. “이 약은 식전에 먹어야지 식후에 먹으면 효과가 없습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먹는가? 밥 먹기 전에 꼭 챙겨 먹는다. 혈압 약은 아침에 먹어야 한다고 하면 아침에 꼭 챙겨 먹는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먹는다. 성경말씀도 그렇다. 시키는 대로 해야 효과가 있다. “내 말은 온 육체에 약(처방약, 치료약)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육체의 처방약이다. 우리가 병들어 아프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는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처방약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프기 전에 미리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데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건강과 치유를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건강의 길이다. 말씀의 앱(application)을 깔아야 한다. 동시에 그전 앱(app)은 삭제해야 한다. 좋은 말씀을 받을 때마다 마귀와 우리에게 깔려 있던 예전의 앱은 그 시대에만 가능한 말씀이라고 속삭인다. “나의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라…”는 말씀은 그 시대에만 속한 말씀이 절대 아니다. 감사하게도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속한 것이다. 나는 요즘 푹 빠져 암송하며 묵상하며 되새기는 말씀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는 말씀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말씀이 입에서 흘러나오곤 한다. 어떻게 약을 먹을 것인가? 의사가 처방한 방법대로 약을 먹는다. 식전, 식후 등을 지켜야 최고 효과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처방약을 복용하는데 지침을 주신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방하신다. “내 말은 그것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며, 내 말은 모든 육체의 건강이 됨이라”(잠4:20-22)라고 말씀하신다. 의사에게 간다고 해도 서랍 속에 넣어 놓고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 의사에게 가서 바른 처방을 받았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고 더 악화 될 수 있다. 약이 약병 속에 있다고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당신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약을 당신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둔다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당신 안에 집어넣어야만 역사한다!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은 그의 말씀이다. 말씀의 약을 먹는 방법이 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여야 한다. 이때 묵상은 마음에서부터 믿음으로 터져 나오는 읊조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반복하여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반복의 기름 부음이 넘쳐난다. 나는 잠시 검도 운동을 한 적이 있다. 검도는 3가지를 주로 연습한다. 머리, 손목, 허리를 반복해서 치는 연습이다. 10급부터 1급까지 올라가면 1단이 된다. 내가 2급이 되었을 때 일이다. 2단이었던 검도 선배와 대련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검도는 머리와 손목과 허리 세 군데만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치면 반칙이다. 반드시 머리를 공격할 때는 “머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떼려야 한다. 검도의 죽도는 둔탁하게 생겼다. 크기도 크기 때문에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덤도 2단인 검도 선배가 “머리!”하며 공격을 하기에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칼이 머리 위에 와 있는 것이었다. 허리 공격은 동작이 크기 때문에 막기가 쉽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도 오산이었다. “허리!”라는 소리와 함께 벌써 칼은 허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반복의 힘이었다. 반복으로 연습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모른다.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주장하는 기름 부음은 엄청나다. 나는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기로 했다. 첫째, “내 말에 주의해야”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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