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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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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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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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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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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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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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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문훈 목사] 부으소서,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포도원교회가 창립 44주년이 되었다. 부산 변두리 구포에서 100여평의 작은 교회에서 40년만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1만 가정, 3만 성도, 10만 선교, 100만 전파를 코로나 때 이루었고 덕천성전, 화명성전, 드림센터, 양산 선교센터 4개의 성전을 갖추었다. 교단과 부산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 찬양, 영광, 존귀를 주님께 돌려드린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고 주께서 하셨다. 시23편을 통하여 다윗의 노래, 다윗의 축복을 볼 수 있다. 부으소서 큰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고, 작은 복은 사람이 오두방정 떨어서 챙길 따름이다(약1:17). 말세에 고통의 때가 오지만 주께서 남종과 여종들에게 물 쏟듯이 성령을 부어주신다(욜2:28~29).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없다.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된다(행1:8). 한계를 뛰어 넘고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면 주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산과 골짜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신11:8~14).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 승승장구 했고 범죄시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울면서 회개했다. 채우소서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듯이(갈4:4) 성도는 서러울 때, 가난한 때, 고통의 때를 채워야 된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지나야 농사가 된다. 눈물 병을 채울 때에(시56:8) 응답이 이루어진다.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아랫물이 윗물이 된다.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다. 은혜의 잔을 채우소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의 물을 아귀까지 채울 때 기적이 일어났다(요2:7).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고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럽다. 회개하며 더러운 것을 토설하고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으로 채워야 된다. 넘쳐흐르게 하소서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마침내 가득 채운 후 넘쳐서 흘러간다. 무엇이든지 서두르면 사고 나고 조급하면 실수하고 성급하면 후회한다. 억지로 안 된다. 눈물이 고이고 기도가 쌓여서 마침내 내 잔이 넘쳐야 된다. 임계점을 넘어 서야 물이 끓는다. 샘물은 막힘없이 중단 없이 멈춤 없이 퐁퐁 솟아나서 넘쳐흐른다. 역사는 민심이라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출렁이는지를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주께 받은 은혜를 사해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같이 흘려보내라. 축복의 통로가 되라. 법(法)은 물 흐르듯이 가는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어 주시고 흔들어 넘치게 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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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4-03-20
  • [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세계관과 신앙교육
    오늘날 우리 모두는 학교 교육은 물론, 심지어는 교회의 신앙교육에 있어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교실의 위기와 학교교육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이제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도 않을 정도다. 이러한 시점에서 언약의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더 개혁주의 관점에서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더 음미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여러 가지 말들로 개혁주의 교육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개혁주의 세계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도교회의 영역에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섭리해 나가시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롬11:36). 개혁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를 고백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 실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구속 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full-time)의 왕국 봉사를 하도록 요청하신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표현과 같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This is mine)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일 평방 인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혁주의 원리는 교회의 신앙 교육뿐 만 아니라, 가정 교육, 학교 교육, 그리고 사회 교육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권 하에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의 신앙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로 하여금 상업, 정치, 과학, 예술, 의학, 연극 영화, 음악, 저널리즘, 그리고 기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의 왕국 봉사자들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신앙적 기초를 제공해 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포괄적이며 보편적,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창조의 성경적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타락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 세계의 한 구석도 빠짐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앨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표현대로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강조하는 신앙 교육의 한 기본 원리는 한편으로는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우주의 구조 속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 신비로움, 곧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로 하여금 창조적 질서에 순응하고 사회와 문화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규범을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 속에서 문화 변혁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갈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되 단순히 분리된 조각들로 가르치거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해답들을 성경에서 찾도록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개혁주의 교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개혁주의의 위대한 원칙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창조 세계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주는 성경의 역할, 비유컨대 ‘광부의 전등’과 같은 성경의 역할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교육은 인간 타락의 영향이 철저하며 창조 세계의 전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교육한다. 그러나 동시에 죄는 창조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도 아니며, 창조와 일치하는 것도 아님을 가르친다. 요컨대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의 의미를 분명히 숙지하도록 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이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주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육의 한 중요한 특징이다. 개혁주의 교육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창조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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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신원하 원장] ‘조력존엄사 법률안’ 폐기를 앞두고 안락사와 조력존엄사를 돌아보기
    I. 21대 국회와 ‘조력 존엄사’ 법률안 21대 국회 회기 중인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이 일명 '조력 존엄사 법안' 을 대표 발의했다. 국회의원 12명이 함께 서명한 이 법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차 례 토론이 되었지만 그 이후 진전이 없이 법사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다. 이 법안은 21 대 국회가 폐회하는 5월 말에 자동으로 폐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20세기 후반기에 지구촌에서는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불치의 병으로 시달리는 자들이 원할 경우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과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2000년에 마침내 네덜란드가 이것을 허용하는 소위 안락사 법을 제정했고 2002년 4월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북미의 캐나다와 미국의 여러 주들이 시차를 두고 법 제정과 시행에 동참했다. 이 법은 지난 20여 년 간 지구촌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지만 지금도 안락사는 여전히 국제적 뉴스로 등장하곤 한다. 한 달 전인 2월 11일에도 네덜란드의 전직 총리 판 아흐트(Dries von Agt)가 동갑내기 부인과 함께 동반 존엄사를 택해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한국에서도 제법 큰 뉴스거리가 되었는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는 존엄사에 관련된 이런 저런 사건, 존엄사 관련 시사 프로그램 방영, 존엄사 문제를 짚어보는 영화가 개봉되면서 다시금 사회적 조명을 받은 바 있다. 현재 고령사회이고 내년이면 초고령사회가 되는 대한민국은 앞으로 안락사에 관련된 논의와 법제화 요구는 더욱 증가할 것임은 능히 예측되는 상황이다. 통계청은 2023년 12월 2022년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79.9세, 여자가 85.6세라고 발표했다. 불의의 사고나 불치의 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한국인은 평균 83세 정도는 사는 셈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80에 가까우면 대개 쇠약하고 병들고 고생하기 일쑤고 그러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점에서는 이젠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30년 통계를 보면, 한국인들은 4명 가운데 3명이 병원에서 죽는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본인이 원한다면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강해질 것이 능히 예측된다. 그리 고 이런 여론을 힘입어 22대 국회에서도 적극적인 안락사나 조력존엄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교회는 안락사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를 확립하여 성도들에게도 가르치고 또 사회적 대응을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II. 안락사/존엄사 그리고 조력존엄사 A. 안락사/존엄사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는 좋은(eu) + 죽음(thanatos), 즉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사회가 허용한다는 것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의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법으로 보장한다는 것은 회복이 불가역적 상태에서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연장 하지 않고 편안히 일찍 죽음을 맞게 해 줄 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안락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환자 본인 의지 여부에 따라 자원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둘째는 의사의 의료 행위 내용과 정도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눈다. 현재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에서도 대부분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소수의 국가만 적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한다. 서구의 국가들이 먼저 이 법을 시행했고 아시아에서는 호주가 처음으로 이 법을 만들어 시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작년 2023년 1월에 호주는 ‘자원적 안락사’도 허용하는 법을 발효시켰다. 그 동안 남호주 주가 이 법을 거부하다가 뒤 늦게 허용 했는데, 남호주 주가 자원적 안락사 법을 발효시킨지 2개월 만에 30여 명의 주민이 이것을 신청했고 이것이 일제히 지구촌에 큰 화제로 보도되기도 했다. B. 조력존엄사/조력자살 우리 언론에서는 “자원적 안락사”라고 보도했지만 호주에서 사용한 정확한 명칭은 ‘voluntary assisted dying’이다. 직역하면 ‘자원적 조력 사망’이다. 도움을 받아 사망하는 것으로 유럽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는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의사 조력 자살”(phlysician-assisted suicide) 제도이다. 호주는 이것을 ‘자원적 조력 사망’이라는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만 내용은 서구의 ‘의사조력 자살법’과 동일하다. 그런데 2022년 한국에서도 국회의원 안규백 의원은 이와 유사한 내용을 지닌 법안을 발의했다. 발의된 법률안의 명칭은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인데, 안 의원은 이것을 줄여서 ‘조력 존엄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서구의 ‘의사 조력 자살’이나 호주의 ‘자원적 조력 사망’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C. 존엄사와 조력존엄사의 차이 그럼 안락사/존엄사와 의사조력자살 혹은 자원적 조력 사망 혹은 조력 존엄사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전자는 의사나 의료인이 환자의 생명을 끊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하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 여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의사나 의료인은 약물을 몸에 주입시키는 수단과 장치를 제공하지만 밸브를 내림으로 약물이 본인의 몸에 주입되게 하는 행동은 환자 본인이 하고 이어 곧 사망하는 것이다. III. 한국의 연명의료 결정법(2016) 그리고 일부 개정안(2022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안락사 법과 유사한 소위 ‘연명의료 결정법’이 제정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2022년에는 이 법이 허용하는 것을 조금 더 넘어 의사의 도움을 받지만 본인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게 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조력 존업사법이 연명의료결정법의 개정안의 형식으로 발의되었다. A.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연령의료결정법 연명의료 결정법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2009년에 의료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 된 할머니의 가족들이 세브란스 병원에게 할머니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 가족의 요청을 거부하자 가족들은 세브란스 병원을 대상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마침내 법원은 병원이 환자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소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으로 불려지는 이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는 정부가 주도하여 사회의 각계의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4-5년 동안 지속적으로 소 위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마침내 합의를 도출하여 안을 만들었고 그것이 2016년에 마침내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긴 이름의 법은 흔히 줄인 말 인 ‘연명의료결정법’이라 불리우는데 2018년부터 효력이 발생하여 현재까지 시행되어 오고 있다. 이 연명의료결정법 내용의 핵심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자기 뜻을 밝힌 경우, 혹은 대리인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여 밝힌 경우, 그에 따라 연명의료행위 즉 심폐소생술, 항암제 투약 등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적극적 의료행위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 '조력존엄사법' 그런데 언급한 바 있듯이 현재 이 법의 일부를 개정하려는 법안인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에 의해 일명 ‘조력존엄사법’으로 발의되어 있는데, 이 법 이 이전 법과 다른 점은 첫째 대상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서부터 ‘말기환자’에 게로 확대되어 소위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하고, 둘째 의사의 도움으로 환자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법안은 “말기 환자(末期患者)”를 이렇게 정의했다: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 그런데 이 법안의 특징과 핵심은 바로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의사가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기를 환자의 몸에 꽂아 두면 환자 본인이 밸브를 돌리거나 버튼을 눌러 약물이 자신의 몸에 주입되게 하여 자신이 죽는 것이다. 언급한대로 서구의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의 일부 국가들은 이를 허용 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스위스는 외국인들에게도 이것을 허용한다. 안규백 의원은 이 법안을 발의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사회적 여론이다. 그는 한국 성인의 약 80%가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을 찬성한다는 통계를 근거로 하여 국민의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국민의 기본권인 자기 결정권을 생명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까지도 확대하여 증진시켜야 한다고 것이다. 그는 참기 힘든 고통가운데 있는 말기환자가 고통을 피하고 일찍 죽기를 원하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히면 사회는 그 뜻을 존중하고 자기절정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 다는 것이다. IV. 신학적 검토 자신의 생명과 삶의 종결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증진시키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법률안에 대해 신학적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 성경은 하나님 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즉 사람의 생명의 주인은 본인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고 생명의 위임자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의 욥기 서에 나오는 욥은 졸지에 자녀들이 죽고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1:21)라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자녀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또 욥은 12장 10절에서는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14장 4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사람의 수명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고백했다. “(주께서) 그 (사람)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욥14:5).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날 수가 차면 즉 그의 수명이 다하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고 욥은 말한 것 이다. 전도서 3장 1-2절에서도 솔로몬 왕은 이와 유사한 진술을 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3:1-2). 솔로몬 왕이 이 말은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내용은 욥의 고백과 동일하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모두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정하신 바에 따르는 것이지 사람 개인이 자의적으로 결정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이 말한다. 이런 성경적 인식을 갖는다면 사람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기에 마땅히 생명 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에 따라 원하지 않는 고통스런 생명을 연 장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조력존업사 법안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국성인의 80% 이상이 이 법안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시각에 벗어나는 이 법안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고통 가운데 있는 말기과정에 있는 환자가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하여 빨리 죽게 해 주어야 한다는 이 조력존엄사 법이 통과되면 앞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약화되는 결과를 넣게 된다. 물론 이 법안은 비록 “육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환자들에 한해서”라는 적용한다는, 단서를 달아 놓았지만, 일단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가면서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 고통으로 범위가 확대되어 가게 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서는 2002년 이 법이 시행되고 난 뒤 2017년도 한 해 동안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로 6,585명이 사망 했는데, 그 중에서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83명이나 포함되었다. 본래 안락사 제도는 존엄한 죽음을 위해 만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 제도는 좀 더 쉽 게 죽게 만드는 법이 되어 도리어 인명경시의 풍조를 낳게 되는 악효과를 낳게 될 것 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V.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대응 A. 고통의 최소화와 아닌 돌봄의 최대화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말기 상태에 있는 부모나 가족의 보면, 자녀들과 가족들은 저렇게 고통 받으며 연명하는 것보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라 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은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 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아울러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있고 또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부모님을 보고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환자를 일찍 죽게 함으로 그 고통을 종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소관 영역에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오로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 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최대한으로 돌보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통의 최소화가 아니라 돌봄의 최대화’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인생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임을 아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인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또는 부모님이 병상에서 고통을 겪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더 의지하고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부모님이 그 기간을 주와 함께 보내게 되기를 더 간절히 기도하고 돌보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이 고통의 문제는 비록 나의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이가 병상에서 힘들더라도 주의 손을 붙잡고 고통 없는 영원한 곳을 소망하면서 그 기간을 끝까지 소망으로 인내하며 나가도록 보살피고 기도해야 한다. B. 호스피스를 통한 고통완화와 편안한 임종 맞기 그러면 이런 돌봄과 기도 외에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그것은 환자를 완화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호스피스 병원에 이전하여 그곳에서 전인적인 돌봄을 받으면서 남은 기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호스피스 병원은 통증완화를 위한 최적화된 의료 시설과 전문 지식을 의술을 갖춘 훈련된 의사와 간호사들이 말기 환자들에게 전문적인 의료와 아울러 전인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병원이다. 성도들은 우리 사회가 조력존엄사를 제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설립하는 것을 통해 고통을 줄여주고 말기를 보낼 수 있도록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도 지난 정부 때인 2019년에 호스피스 서비스를 확대하는 내용의 1차 호스피스·연명 의료 종합계획(2019~2023년)을 만들어 발표한 바 있다. 2019년에는 호스피스를 원하는 환자 10명 가운데 2명 정도만이 호스피스에 입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적잖은 병원과 의료기관들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호스피스 시설을 짓고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호스피스 병원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다가 사망하는 환자가 많다. 노인복지 차원에서도 나라는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세워 운영하도록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호스피스 팀이 환자의 집을 방문하는 가 정형 호스피스 제도가 202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이 제도도 점점 확대해 가도록 그리스도인 법조인들과 위정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VI. 나가면서: 이제 곧 폐기될 소위 조력존엄사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사 조력 자살’ 법으로 이 법이 폐기되는 것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22대 23대 국회에서 이런 법은 계속 발의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우리 사회가 반기독교적 가치와 반생명적 제도가 인권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준비하고 필요하면 함께 힘을 모아 효과적으로 대응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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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4) (민12:1-3)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눈앞에서 펼쳐지는데도 오히려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직분과 사명 때문에 원망 거리를 찾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할 때부터 직분과 사명을 망각한 미리암의 원망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어도 깜짝 놀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역사가 확연하게 드러나면 멈추는 것이 상식입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오리무중이고,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될 때야 혹 의심도 생기고, 불신도 생기고, 원망이나 불평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인정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눈앞에서 나타난다면 성도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무서워서라도 하던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리암은 한평생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학수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미리암은 어릴 때부터 동생 모세가 그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미리암은 목숨을 걸고 동생 모세를 살렸습니다. 모세가 후일을 도모하고 애굽을 떠난 40년의 세월 동안 미리암은 선지자가 되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돌보았습니다. 미리암은 모세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10가지 기적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미리암이 몰라서, 애매해서, 헷갈려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단순한 비방 같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비방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혹 모세는 넘어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넘어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목회자가 하는 일이나 교회 일에 불구경하는 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미리암의 결말과 같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교회가 함께 나아가는 것보다 자신의 기준이나 주장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통해 교회가 집중하는 일보다 자신의 강조점을 우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미리암의 결말과 같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껏 하던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이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 분명한 명분도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복음과 교회를 위한 사명도 매우 중요한 사역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할 때는 자신이 하던 그 어떤 일도 멈추고 그 일을 우선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소천하셨습니다. 당연히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릅니다. 가야 합니다. 인륜지대사로 부모님의 장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삿짐을 사야 합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토를 달고, 그것에 맞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유를 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여호와의 구름이 이 상황에 떠오르느냐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원망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역사의 진행에 원망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반역을 고개를 쳐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분명한 일에는 그 어떤 원망도, 원망은 흉내도 내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 중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처럼 귀하지 않은 성도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시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도 자신의 기호에 따라 무관심하다거나 반대의 길을 걸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길과 목회자의 교회를 위한 방침에 무관심한 자는 혹시 그것이 나름 자신의 신앙적인 결단과 믿음을 향한 일이라 할지라도 미리암이 될 위험성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성경은 미리암과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복음의 물줄기에 함께 하는 자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복음의 물줄기에 역행하니 당연히 원망이 생깁니다. 세상의 물줄기는 역행을 해야 시궁창으로 빠지지 않고 하늘로 비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하는 복음과 교회를 역행하면 땅으로, 지옥으로 빠지게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가 다 함께 찬송하는데 자신은 기도한다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교회가 다 함께 기도하는데 자신은 찬송한다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이런 것들도 위험한데 감사해야 할 상황에 원망 거리를 찾는다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원망들은 결국에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정당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심을 잊어선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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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박동철 장로] 주기철목사 순교 80주년, ‘깨진 향유병’ 조형미술전
    창원 진해 출신 영적 거장 소양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한지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1897년 진해 웅천에서 태어나 1944년 소천 하셨다. 주 목사님은 일생을 일정시대 주의 종으로서 2천만 조선 백성들을 깨우고 복음을 전파하시었다. 일제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저항하다 5년 동안 옥살이중 해방을 1년 앞두고 4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며 순교하신다. 오산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마산문창교회 부산초량교회 산정현교회에 시무하면서 올곧은 신앙의 모본을 보였던 우리들에게 영원한 영적 스승이다. 올해 순교80주년을 맞아 주기철 목사 기념 사업회(이사장 이상택목사)는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진해 웅천에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주기철 목사 신앙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도 4월에 진행된다. 여러 행사 중 눈길을 끄는 특별한 기획미술전이 지난 16일 웅천 주기철 목 사기념관 특별 전시실에서 막이 올랐다. 한국 미술계에서 조형미술의 독특한 장르를 이끌고 있는 최선혜 작가의 '깨진 향유병'이란 주제의 조형미술전이다. 하나의 질그릇이 완성되기까지 는 작업의 여정이 예사롭지않다. 작가의 손끝에서 땀방울의 열매로 하나의 그릇이란 작품이 완성된다. 우주만상의 작가 창조주 손끝에서 한생명이 창조되듯이 그릇은 1천도의 화열 속에서 달구어지며 창조된다. 그 뜨거운 열정의 과정에서 조심스레 완성된 그릇이 깨어져서는 안 되는게 일반적 관념이다. 그래서 최고조의 긴장이 따른다. 그런데 최선혜 작가는 고귀하게 완성된 그릇을 과감히 깨어버린다. 역설적인 예술의 작업이다. 그리고 깨어진 조각을 한편 한편 맞추어 새로운 그릇의 완성체로 재창조한다. 이 대역설의 예술작업의 사유(思惟)가 우리들에서 강한 작동을 통해 은혜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한다. 마리아는 향유옥합을 들고 십자가를 준비하는 예수님을 찾았다. 그리고 향유옥합을 깨뜨렸다. 값비싼 향유가 쏟아졌다. 비싼 향유를 쏟은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한 제자의 언어가 쏟아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했다. 값비싼 향유옥합이 깨어져 예수님 십자가 생명을 축복했다. 깨어져 향유를 쏟은 그때 그 깨어진 향유병은 인류에게 거대하고 영원한 복음으로 지금도 들리게 한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크게 칭찬한 진정한 뜻이다. 최 작가의 이날 특별 기획 전시회는 깨어진 향유병이 품고 있는 거대한 함의를 풀어냈다. 최 작가는 직접 예수의 육적 고향 이스라엘에서 구해온 향유병을 깨뜨리는 퍼포먼스를 실행했다. 십자가를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마리아의 깨어진 향유병의 메시지는 값비싼 향유를 버림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에 축복의 메시지가 모든 제자들의 깨어짐에 있다. 이 땅에 남긴 예수의 말씀, 위대한 복음의 흐름 앞에 우리는 깨어지지 않으려는 관성에서 살아간다. 한마디로 죄인들의 삶이다. 우리의 스승 주기철 목사님은 철저히 깨어져버렸다. 말씀에 다하고, 순종에 다하고 끝까지 우상과 싸워 이겨낸 당신의 삶의 여정이 깨어짐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기 전 마리아로부터 향유병의 깨어짐을 보여주고 본을 보여주셨다. 복음의 생명 자신의 깨어짐을 실천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80년에 한 작가의 심혈을 쏟아 기획하고 실행한 '깨어진 향유병'의 조형예술이 새로운 생명의 물길질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유의 길을 안내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방법론이다. '내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시 노래 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나를 너무 채우고 살아간다. 나를 비우게 하는 그릇의 깨어짐은 아름다운 주의 종, 주기철 목사님 순교80주년에 어울리는 예술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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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기고] 본립도생(本立道生)
    몇 해 전에 신대원을 부산으로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가 수도권 목사님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신대원을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주장은 수도권 정서를 봤을 때 계파와 진영을 초월하여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회 임원으로 출마하려는 필자를 위하여 그런 주장을 하면 수도권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조언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필자의 이 주장 역시 교회 중심이 그 이유입니다. 신대원의 제일 목적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목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대원은 당연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신학생을 교육해야만 합니다. 교회를 위하지 않는 신학생, 교회와 상관없는 목사가 왜 필요할까요? 천안이라는 지역에 신대원이 있으면 수도권의 교회들과 목회자에게 왜 좋을까요? 무엇 때문에 신대원을 부산으로 옮기면 안 된다는 정서가 있을까요? 필자가 신대원을 부산으로 이전하자고 한 것은 신대원 학생들을 교회 품속에서 교육하자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수해야 할 학업이 방대하지만 그 학업들 역시 교회와 접목시키고, 과목 하나 하나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공부하면서 가능한 교회와 함께 움직이고,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면서 공부를 하자는 이유였습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교회에 급한 일이 발생하면 교회로 달려가고, 교회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잠시라도 책을 덮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산 교육을 병행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신대원생들이 공부하는 목적과 관심이 교회로 집중되어 교육이 될 때, 신대원을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옷을 입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수도권의 정서가 그렇다면 아예 총회회관이나 수도권의 중심에 있는 교회에서 신학교육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고신의 교회 분포도가 아무래도 부산을 중심으로 영남에 집중되어 있고, 호남의 교회들에 소속된 신학생들이 부산으로 오는 것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은 몇 년 전의 주장입니다. 이제는 이 주장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목회자를 희망하는 학생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신대원은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이 우선이지, Th M이나 박사과정, 여 신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는 한 해에 목사 후보생을 100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대도시라도 대형교회를 제외하고는 부교역자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형편입니다. 목사들이 만나면 부 교역자 좀 구해달라는 말이 인사를 대신하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어쩌면 이전처럼 수도권에, 충청권에, 호남권에, 경남권에, 경북권에, 부산권에 신대원 강의실을 개설하여 교수들이 학생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교회들이 교역자를 수급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변화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볼 때, 중년에 접어들어 인생 후반기를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어느 정도 생활력이 뒷받침되고 어려워져 가는 교회 형편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 이들을 위해 야간반이라도 신설하는 극단의 대책들을 세워야 합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도 임시방편의 처방으로 “내 때만 안 망하면 된다!”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입학정원의 문제는 이제 노력의 차원과 상관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부산에 학생이 없습니다. 46만이던 영도인구가 약 11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앞으로 부산의 26개 대학이 7개 대학으로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어떤 해결방안도 모색하지 못합니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성도들의 주머니를 여는 방법으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 또한 해결의 출발점은 교회 중심입니다. 학교와 병원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학교와 병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학교와 병원을 위해 기도하고 필요에 따라 돕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총회 임원으로 출마를 고려하면서 내 걸었던 명분은 “바르게 해 보자, 법대로 해 보자” 였습니다. 그런데 표를 얻어야 임원이 될 수 있고, 임원이 되어야 일을 진행할 수 있기에 정서에 눈치를 보고, 분위기에 따라 표를 의식하며 할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총회장이 되었지만 정작 기독교보의 발행인이라고 기재할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지 못했고, 경남의 모 노회가 총대 투표 개표에 부정이 있었음을 알고도 표를 의식하여 입을 다물었고, 인천의 모 회원이 총회 앞에 나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신이 이래서 안 된다고 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사건을, 그것도 이미 부산서부노회가 무혐의처분을 내리고 원상 복귀로 결정 난 일을 부총회장이 되겠다는 욕심 하나로 자신이 속한 노회 임원회까지 움직여 들추어내고, 포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에나와 같아 달려들어 각본을 쓰고, 전국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내 이미 소천하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했음도 불구하고 대승적인 차원, 포용하는 넓은 가슴이라는 알량한 이유를 달아 표를 의식했던 불효자식이었습니다. 작년 총회를 마치고 부총회장에서 떨어진 것보다 “바르게 해 보겠다고, 법대로 해 보겠다고” 주장하면서도 받지도 못할 표를 의식하며 침묵해야 했던 일이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아도 “너도 똑같은 놈이다!!! 아니 너는 더한 놈이다!!! 너는 바르게 하겠다고 해 놓고 바르게 하지 않았으니 더 나쁜 놈이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회개의 시간을 가지고 내린 결론입니다. 단 한 표를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바르게 하겠습니다!” “법대로 하겠습니다!” “오늘까지 들은 욕의 100배 1000배를 듣는다고 해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오해와 음해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눈곱만큼의 사욕도 버리고 고신을 위해 소리 지르겠습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지 신학을 위한 교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 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법대로 해야 합니다. 문제만 제기되면 문제는 보지 않고 계파와 진영과 사욕에 눈이 멀어 법제위에 문구 해석을 의뢰하여 시간을 끌고, 물타기를 하며 지연 작전을 펼쳐 본질을 벗어나는 작태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구동성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고신은 본립도생(本立道生)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부활하시고 재림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죽어 나흘이 되어 썩고 냄새가 나는 실정이라고 해도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3-15
  • [독자기고] 선거관리위원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지 않기를!
    우리 총회는 여러 종류의 상비부와 특별부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특별위원회는 왜 그리도 많은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위원회와 상비부는 하나의 위원회로 통폐합해야 할 필요가 있고 유명무실한 기관은 과감히 정리해야합니다. 물론 각종 위원회 역시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전체를 다루고 싶지만 선거관리위원회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총회 선거관리위원회는 총회 내의 선거관리를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수고하신 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한편으로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고자 합니다. 고신총회의 선거는 헌법을 기본으로 하고, 고신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조례와 시행세칙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총회 산하 기관은 그 나름대로의 선거기준과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집니다. 총회 산하 모든 선거에 있어서 선거조례나 시행세칙대로 시행되면 좋겠습니다. 균형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작년의 일이 떠오릅니다. 2023년 3월 제가 섬기고 있는 고신포럼에서 교단을 위한 기도회를 했습니다. 혹 불필요한 오해나 말들이 생길까 기도회를 준비한 실행위원들이 총회 출마자들은 그곳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지난해 목사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를 했기에 그 기도회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기도회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조례나 시행세칙에 명시된 공식선거 기간도 아니었고, 출마자들도 참여를 하지 않았기에 선거관리위원회가 이 일에 대해 기독교보에 경고를 할 정도의 위법한 일도 아니었으며, 선거관리위원회가 그렇게 간섭해야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들리는 말에 선거관리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그런 경고(?)를 하려고 할 때 찬반 의견이 팽팽하여 결정하지 못하게 되니까 듣도 보도 못한 임원회의 이름으로 꼼수 경고를 하는 기가 찬 일이 발생했습니다. 기도회를 주관한 고신 포럼에서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바르게 하려고 하는 정신 하나만 믿고 크게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선관위는 그런 정신을 끝까지 이어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지난해 8월 전국장로 수양회가 마치는 날 경주에서 40명이 골프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출마자도 다수가 있었고 선거관리위원도 있었다는데 누군가 형평성을 이야기하니 정식으로 고발하면 문제 삼겠다고 고발하라고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었던 후보들이나 선거관리위원의 그런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소식을 전한 사람의 실명이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외부에 유출되어 소문이 나게 한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되지 않는 부분 입니다. 고신포럼의 기도회는 공식 선거기간도 아니었고 출마자도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공개적으로 경고 했는지요? 그렇다면 전국장로회 수양회를 마치고 운동을 한 것은 왜 침묵하시는지요? 침묵 정도가 아니라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의 실명을 외부로 유출해서 그 제보자를 힘들게 했는지요? 그럼에도 공정한 선거관리위원회라 말할 수 있을까요? 전국장로회 수양회를 폄하 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전에 다른 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장로회 수양회 기간에 출마자들이 그곳을 방문 조차 못하게 했는데 작년에는 공명 선거 선서식이나 기호 추첨을 아예 그 수련회 장소에서 실시했습니다. 이것은 이 전의 선관위의 결정과는 180도 다른 결정으로서, 이런 일을 할 때는 충분한 공감대와 공정성을 지키며 진행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선관위의 구성원에 따라 너무 다른 결정을 하는 것은 신중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방법이 좋아보여도 기본적인 기준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전국장로회는 우리 고신총회의 임의단체입니다. 물론 그 기관의 위치나 그 구성원의 중요성 등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국장로회 수양회가 총회를 앞두고 소위 ‘정치나 선거운동’의 근거지라는 말도 많은데 그런 오해를 불사하면서까지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장로들에게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며 공정한지요? 그러면 장로가 아닌 고신의 성도들에겐 어떤 알 기회를 제공했는지요? 선거관리위원회가 작년에 지역공청회라는 좋은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공청회에 참가 자격을 총대라고 했고 처음에는 총대에게만 여비를 지급하기로 할 정도로 총대 중심이었습니다. 전국장로회 수양회는 부부로 모이기 때문에 총대 숫자보다 비 총대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왜 이분들에게만 “특혜”에 가까운 기회를 제공해야 할까요? 분명히 말합니다. 목사 장로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국 목사 부부들에겐 왜 이런 기회가 없었을까요? 부부 수양회니 당연히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은 여성들입니다. 총대가 아닌 장로나 가족들에게 선거 후보들이 인사하는 것은 어느 선거 규칙에 따른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형평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리했다고 해도 그 의도를 순수하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각종 방문 선거 규칙에는, ‘선거와 관련하여 입후보자나 지지자들의 지역 방문(지역별 체육대회, 전국장로회 수양회, 총동창회 각종 세미나 등)을 금하며, 각종 모임에 화환이나 선물을 제공할 수 없으며 인터넷 영상물의 이용을 금한다. 단 꼭 필요한 경우는 서면으로 선거관리위원장에게 신청한 후 선거관리위원회 고소 고발소위원회의 서면 답변을 얻어야한다.(65회 총회 수정)’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공명선거 선서식을 하고 기호추첨을 한 어느 후보는 아예 그곳에 머무르며 버젓이 선거운동(?)을 했다는데, 특정인에게 그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요? 그 이전 해에는 동일직에 출마한 두 후보 모두에게 설교나 강의 등 동일 한 조건으로 순서를 맡기는 것도 혹시라도 부정 선거운동이나, 빌미를 제공할까 못하게 막았는데, 작년에는 선관위의 규정이 발전한 것인지요? 아니면 변질된 것인지요? 불법적인 기부행위 지난해 총회 선거에 지역공청회를 도입하므로 입후보자는 출마소견을 유권자들에겐 후보자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아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옥의 티 같은 일이 있음에도 선관위는 침묵했습니다. 어느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본인이 당선되면 엄청난 후원금을 내겠다는 공약 아닌 공약을 발표해도 선관위는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올해 초에는 고신대학을 위한 기도회를 하고 모금 활동도 했는데, 이때 교회, 혹은 개인이 기부행위를 했습니다. 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5장 선거운동 제8조 2항에 보면 “기부행위: 당 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라고 명시함으로서 출마자나 기관이 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부산의 어떤 분은 노회의 어떤 행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출마를 선언하면서 ‘교회가 선거를 위해 예산을 배정 해 두었다’고 말했으며,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선관위는 선거조례를 지킬 의사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십시다. 몇 해 전엔 선거관리위원회가 제출서류가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기한을 맞추지 못한 것이 있으면 자격박탈을 했는데, 작년에는 몇 차례 공청회 장소에서 버젓이 거짓 자료를 올려놓아도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거조례 6장 15조 2항에 “입후보자의 등록서류 중 허위 사실 또는 전항을 위배한 사실이 확인될 때에는 총회 재판국에 고발한다”고 되어 있는데, 모 후보의 허위사실이 우리의 눈에만 보이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도 고발자가 나와야 선관위는 조치할 수 있는 것입니까? 몇 해 동안 출마자들의 생년월일이 늘 소개되었는데 유독 작년 2023년 총회출마자들에 대해서는 생년월일이 삭제된 홍보물이 제공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론사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실수입니까? 작년의 고신포럼에서 실시한 기도회(30명 미만 참석, 참석자 여비 미 제공)가 신문지상에 경고를 할 만큼 심각한 일로 판단했었다면, 올해 어느 교회에서 기도회(100명 이상 회집, 참석자 여비제공)로 모여 출정식(?)을 한 것은 왜 지적하지 않고, 선거조례나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사항대로 시행하지 않는지요? 올해도 선관위 뜻대로, 선관위의 좋은 의도대로 시행할 것인지요? 아니면 총회가 만들어놓은 선거조례나 시행세칙을 지켜가며 시행할 것인지요? 선거관리위원회는 비상 계엄군이 아니라 총회를 섬기는 조직으로 특히 선거 과정을 공정하게 하여 불미한 일을 미 연에 방지하는 일을 하는 기관입니다. 바라기는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조례와 시행세칙대로 기준과 중심을 공정하게 잡고 바르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지난날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 야합니다. 모 총회장이 공식적으로 ‘법은 못 하게 해도 모두가 찬성하면 할 수 있다.’는 발언 이후 총회는 총체적으로 기준과 공정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법적 용과 해석도 본래 정신을 실현하기보다는 계파나 진영에 따라 말꼬리를 무는 억지 행각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헌법은 세상 헌법과 그 기본과 정신이 다릅니다. 교회 헌법은 성경의 원리를 따르며 성경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법이요!”하면 모두가 순복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상실되니 걸핏하면 법제부에 법 해석을 요구하고 시간 끌기를 하며 본질을 희석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이 말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선관위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총대원 들과 고신의 목사 장로들이 성경의 정신을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선관위가 비상계엄군처럼 협박하는 위치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를 관리하며, 선거의 부정적 요소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서, 고신을 바르게 세우는데 앞장서고 책임지는 섬김이 가 되시길 바랍니다. “총회는 헌법대로, 선거는 선거조례대로”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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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3-09
  • [기고] 선거, 또 다른 분열의 시작인가?
    역사관 역사는 어제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로 또 내일로 이어지므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어제를 생각하고 평가하여 교훈을 얻으려 한다. 인간과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는 부족함에 따르는 내재적인 한계로 인하여 개인으로부터 국가사회까지 어제의 평가에 따른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상황에서는 통상 같은 반응을 보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훈을 받기 위함일 것이다. 본래 어제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먼저 개인과 각 개별사회가 자신들의 몫을 평가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체적인 역사의 평가에 편입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리고 어제의 역사에서 받은 교훈을 오늘과 내일에 적용하여 긍정적인 부분은 더 확장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개혁하여 바꾸도록 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자가 가지는 사명이다. 문제는 역사에 대한 평가에 특정한 의도와 목적이 스며들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에 있다.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함에 목적과 의도가 개입하면 그 틀을 통하여 역사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 목적의 틀과 달리하는 부분은 삭제하거나 변형하고 목적의 틀에 맞는 부분만으로 역사를 살피고 판단하게 되므로 그 결과 역사는 전체적으로 왜곡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어제의 역사를 ‘점령’하기 위해 애를 쓰고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권력과 정치가 역사를 ‘점령’하여 틀을 만든 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이러한 틀을 사실상 강요하게 될 때 역사관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내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러한 틀에 의하여 제한되므로 내일 역시 왜곡된 역사관으로 맞추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분열의 두 주제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로부터 사회 곳곳에 ‘분열’이라는 분명한 잘못에 빠져들고 있다. 분열은 공동체 모두에 불이익을 준다. 작게는 공동체의 발전을 막지만 크게는 공동체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 ‘분열’이 국가적인 비극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건을 예로 들자면, 임진왜란을 앞두고 이이(율곡)가 주장한 십만 양병은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무산되고 그 대가로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국가의 극심한 쇠약으로 병자호란까지 겪어야 했다. 또 해방 후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장악된 북한과 달리 남한은 위로는 정치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폭력배까지 온 나라의 각 분야뿐만 아니라 좁은 지역까지 좌우로 나누어진 적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남로당의 수괴 박헌영은 북한의 김일성이 오판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도모하던 스탈린, 이에 동조하던 모택동, 한반도의 적화를 획책하던 김일성의 야욕은 함께 어우러져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신생 독립국인 이 나라에 엄청난 참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분열은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 다시 ‘분열’의 망령이 온 나라를 덮고 있으며 이 분열에 대하여 ‘진영논리’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진영논리는 ‘자신이 속한 쪽의 이념과 행위는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의 이념과 행위는 무조건 배척하는 논리’를 말하며 분열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 분열의 주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일’(또는 항일)이냐 ‘반공’이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문제가 무슨 까닭인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얽혀 있다. 즉, ‘반일’을 주장하는 측 대부분은 ‘분배’를 우선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스스로 ‘진보’라고 이름하고 있고, ‘반공’을 외치는 대부분은 ‘성장’을 우선으로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보수’라고 하고 있다. 이 네 개의 주제가 짝을 지어 나누어져 양극으로 분열이 공고히 되면서 진영논리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분열 우리나라가 전 근대적인 왕조의 국가로부터 현대 시민사회로 변화하는데 걸린 기간은 채 50년 정도이다. 그 50년은 우리나라보다 일찍 현대 시민사회로 발전한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해서는 굉장히 빠른 기간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우리는 국가적으로 두 번의 큰 비극이 있었다. 하나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국권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채 5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북한 공산주의자의 침략에 의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있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6.25 전쟁이 있은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제’ 있었던 두 비극의 역사를 두 개의 틀로 나누어 보고 있다. 이 나눔의 하나는 ‘반일’, 다른 하나는 ‘반공’이라는 두 개의 역사관이 기초하고 있다. 이 두 역사의 유산은 분명히 우리가 함께 물려받아 서로 다듬어 가야 할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나누어지고 말았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 분열의 큰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반일’의 틀에서는 ‘반공’의 가치를 낮추고 ‘반공’의 틀에서는 ‘반일’의 가치를 유보하려는데 있다. 이를 상징하며 극단적으로 대조하며 상징할 수 있는 두 인물이 있는데 ‘김원봉’과 ‘노덕술’이다. 김원봉은 광복군에 참여한 항일투쟁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지만 해방 후 북한 공산정권에 참여하여 반공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노덕술은 일제하 경찰 간부를 지낸 친일파였으나 해방 후 경찰과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반공주의자로 살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김원봉’을 지지하는 세력과 ‘노덕술’을 옳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고 있는데 이 나눔에 앞장선 것이 정치인과 정치세력이고 이에 휘둘린 것이 국민이다. 우리는 김원봉의 항일은 인정하되 그가 걸었던 공산주의자의 길은 거부해야 하고 노덕술의 친일은 거부하고 반공에 대하여는 인정하면서 함께 갔어야 했다. 그런데 ‘냉전’이라는 세계질서의 재편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6.25 전쟁의 직접적인 참화로 인하여, 초기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정치세력 역시 반일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현실적 위협 앞에 반공을 더 앞세웠다. 우리는 반공이 ‘국시’(國是)가 되었고 ‘노덕술’의 길에 더 기울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반공’을 국시로 하던 정치세력들이 장기집권과 독재의 길을 걸어 반공의 가치를 훼손시켰고, 이에 저항하던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무슨 까닭인지 반공보다 반일을 내세우면서 역사관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국민도 함께 나누어졌다. 이렇게 나누어진 역사관을 가진 두 정치세력으로 인하여 어느 정치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반공과 반일이 시소게임처럼 오르내리게 되었다. 해방에 공헌한 두 세력과 6.25 전쟁 우리나라의 해방에는 두 세력의 공헌이 있다. 즉, 일제 강점하에서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하던 무장 항일투쟁 세력과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세력이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지역적인 원인에 의하여 공산주의 국가가 된 소련과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직전의 중국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당시 그들은 소련 및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독립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없었으며 사실상 공산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살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후 좌우가 나누어진 공간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를 택하였으며 그들은 발걸음을 북으로 향하였거나 발걸음을 미처 옮기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눈과 마음은 평양으로 향하였다. 반면 서재필, 이승만을 위시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항일을 한 독립운동 세력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3.1 독립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미국에 사실상의 임시정부를 세우고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각종 폐해와 조국의 힘든 모습을 언론과 외교적 접촉을 통해 서방세계에 전하면서 꾸준히 독립을 외쳐왔다. 이윽고 8.15해방이 되고 군사적 목적으로 남북이 분할되었을 때 북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지향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사실상 지배하는 구도가 되었고, 남에는 미군의 지원으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이 사실상 지배하는 구도가 되었다. 그런데 점령군을 위한 사실상의 분단 5년 동안 북은 김일성에 의하여 공산주의에 반하는 세력이 철저히 괴멸되었으나 남에는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공존하게 되었다. 이 두 정치세력은 각기 남한과 북한을 기반으로 정통성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각기 정통성에 대하여 서로의 결함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활동 범위가 사실상 남만주와 소련의 연해주로 거의 소련과 중국에서 싸웠다. 그들이 독립의 의기를 높이 들고 일본군과 피 흘리며 싸운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이며 희생이 틀림없으나 그 희생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은 중국과 소련이다. 중국과 소련은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데 자신들의 군대 외에 우리의 독립군이 조력한 것이다. 반대로 외교투쟁 세력은 일본군을 상대로 생명을 건 직접적인 희생이 따르는 투쟁은 없었다. 아깝게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으로 흘러간 국제정세의 흐름, 즉 공산주의의 팽창과 이를 저지하려는 서방 제국 사이에서 우리의 두 독립운동 세력은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 6.25 전쟁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노리던 소련과 적화통일을 꾀하던 북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자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을 향한 비극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의 도움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자들의 꿈은 깨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은 ‘반일’ 외에 ‘반미’도 자신들의 역사관에 새로이 삽입하여 저항 세력이 없도록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으며, 남한은 6.25 전쟁을 통하여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남로당 세력이 거의 뿌리를 뽑히게 되는 결과가 이루어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보도연맹사건’이란 비극이 개입하였다. 이 보도연맹사건과 4.19 민주혁명의 희생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절대적 공헌을 하였던 외교투쟁 세력의 건국에 대한 공헌을 부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반공’의 쇠퇴와 ‘반일’의 오류 앞서 지적하였듯이 ‘반공’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정치세력은 부패와 함께 불법적인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정치적 독재 세력이 되어 ‘반공’의 가치를 훼손하였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하여 국민은 저항하게 되었는데 민주화 시위에 앞장서 ‘민주’를 부르짖던 대학생 등의 구호에 공교롭게도 ‘반미’가 함께 등장하였다. 이 ‘반미’ 구호의 등장은 미국이 독재 정부를 옹호한 것에 대한 반발인지 또 다른 뿌리 깊은 연유가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반미’를 외치던 일부 ‘운동권’의 이탈된 모습은 ‘반공’을 우리나라를 지키는 제일의 가치로 여기던 많은 국민에게 ‘운동권’, 즉 민주화 세력에 대한 사상적 불신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 사건으로 민주화를 주장하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약칭)에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학생대표를 파견하였고 그 자격으로 북의 계획에 따라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이란 것을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다. 세월이 지나고 이를 주도하던 ‘운동권’ 중 상당수는 선거를 이용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정치세력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의 속한 정당은 세 차례 집권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주변에 자신들의 우호 세력을 양성하고 지지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반일’의 역사관을 국민과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만큼 ‘반공’의 가치가 훼손되었다. 우리나라는 평양의 김일성과 그 후손들의 최우선 과제인 ‘적화통일’ 앞에 놓여 있음에도 왜곡된 역사의 틀로 ‘반공’을 훼손시킨 것이다. 당연히 국민은 ‘반일’의 역사관과 ‘반공’의 역사관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이에 편승한 정치인의 ‘정치’에 의하여 더욱 깊어져 가고 있으므로 이에 편승한 정치인들이 도태되고 국민 스스로가 자각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최근 두 사건은 국민의 잠재적인 반일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수년 전 있었던 태평양 전쟁의 전범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은 법의 해석을 빌어 지난 역사로 인하여 우리 국민에게 잠재되어 있던 반일의 역사관을 교묘하게 깨웠다. 그 결과 국민의 반일 감정은 절정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던 일본의 소비재 기업 중 하나는 매장을 상당수 철수하기도 하였다. 물론 일제의 강압 통치로 인하여 희생된 분들과 후손들, 그중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이 국민의 항일감정은 충족시켰을지는 몰라도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실정법으로 일제의 강압 통치와 그로 인한 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법적 타당성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불에 기름을 더한 듯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일본은 정화수라고 부른다)의 방류이다. ‘반일’을 외치던 그들은 그 오염수로 인하여 당장 우리 국민이 수산물을 먹기만 하면 모두 방사능으로 인하여 큰 문제가 생길 것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의견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의 동쪽, 즉 후쿠시마 앞을 지나는 쿠로시오해류는 주 방향이 베링해를 향하고 있고 베링해를 지나 태평양을 한 바퀴 돌아오면서 5-7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동안 태평양의 바닷물과 섞여 희석되게 된다. 이 쿠로시오해류에 의해 방사능 오염수(일본은 정화수라고 이름한다)가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베링해와 캐나다, 미국의 서해안인데 사실상 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가 우리에게 전혀 영향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으나 이는 과학에 맡겨야 할 문제이지 우리의 감정에 맡겨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작 그들은 중국의 동해안에 산재한 원자력발전소와 발해만과 황하강, 양자강에서 나오는 각종 오염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비를 말하지 않고 있다. 유독 먼 바다를 향하는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신들의 ‘반일’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책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유명관광지에는 우리나라 관광객이 넘쳐나고 유명 골프장에는 골프를 즐기는 우리나라 골퍼들이 원정 골프를 즐기고 있다. 심지어 오염수를 들먹이며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세력에 속한 정치인 중 이미 일본에서 아** 맥주를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건배하는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에 올렸었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그들이 외치는 ‘항일’은 누구를 위한 항일이고 무엇을 위한 ‘항일’이었던가? 참으로 모순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이에 대하여 언론에 보도되었음에도 당사자는 이에 대하여 유감의 표시를 한 적이 없다) 교회는 분열에서 자유로운가? 이제 얼마 후에는 또 선거를 치르게 된다. 이 선거기간 ‘정책’이 아니라 국민을 혼돈에 빠뜨리는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 선출직 공무원의 대표 격인 국회의원은 국민(지역구)으로부터 존중과 존경을 받아 선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거의 양당 정치로 이루어진 정치구조에서 우리는 동의할 수 없거나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노선에 따라 투표하게 되고 그에 따른 지지로 선출되는 것이다. 즉, 정치인은 존경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지, 즉 투표로 선출된다. 따라서 정치인은 가치 있는 정책을 입안하고 소신을 세우기보다 ‘정치’를 통한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당선을 위해) 지지를 더 얻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때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를 외면하기도 한다. 선거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 선출되고 국회의원, 도의원 중 교회 중직자의 비율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정당에서 ‘성적지향’을 교묘하게 감춘 차별금지법과 그 유사한 법률, 교사의 권위를 침해하여 결국 사회 전반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학생인권조례 등과 관련한 입법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가? 지난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교파별로 집권 정부를 지지하느냐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느냐로 나누어졌던 한국교회이다. 지금의 분열 상황에서도 교회는 자유스럽지 못하다. 신사참배에 따른 신앙 문제로 ‘반일’을 외칠 수 있고 유물사관을 반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직접적 피해로 ‘반공’도 외칠 수 있는 교회지만 역시 같은 구도로 분열되어 있다. 일부라고 하지만 목회자와 장로는 은연중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어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고 교인들도 교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할 교회 역시 진영논리와 정치 성향에 따라 나누어지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4월에 있을 총선에서 양측은 건곤일척의 대결을 할 것이다. 대통령을 탄생시켰으나 국회의 소수당인 집권당은 당연히 그 구도를 바꾸려 할 것이고 외형상 야당이지만 국회의 압도적 다수로 사실상 집권당처럼 행세하는 야당은 이 구도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거대 양당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으면 소수의 야당은 이 틈새에서 자신들이 과반수를 만드는데 수를 보태는 대신 과도한 정치적 이익을 가지려 할 것이다. 이 선거기간 동안 정치세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교회를 이용하려 할 것이고 이는 개교회 내부의 분열, 교회 간 분열, 교파끼리의 잠재적 분열까지 가져올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깨어야 한다. 분열 앞에서 교회는 하나님 말씀 앞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진영이 나누어진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제한된 안타까움이 있어도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가 말씀의 가르침과 한계를 벗어나 정치와 가까이하게 되면 교회가 또 하나의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굳건히 세우지 못하고 교회답지 못할 때 주변 사회는 끊임없이 교회에 도전해 오고 교회의 자리를 좁히려 할 것이다. 이제 교회의 지도자와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이 나라의 분열을 해소할 수 있도록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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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최호숙 목사] 인간 지략(智略)을 넘어 은총(恩寵)의 복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지혜와 지식에 한계가 있고, 능력에 한계가 있고, 건강과 생명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원한 존재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절대자가 필요한 것인데 그 절대자가 종교마다 다르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전지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그 전능자로부터 주시는 은총의 복을 받으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 삼국지의 한 대목에 “지자막여복자(智者莫如福者)”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복 받은 사람만큼은 못하다는 뜻이다. 장비의 군사들이 조조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살기 위하여 수풀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뒤쫓아 가던 조조는 지략을 써서 화공(火攻)으로 수풀을 불살라 버리면 장비의 군사를 일시에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불을 질렀다. 그때 하늘에서 한 점의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더니 난데없이 장대 같은 소나기를 마구 퍼붓는 것이었다. 승리를 위한 지략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조의 인간적 지략은 하늘의 복을 받은 장비를 이길 수 없었다. 조조는 이를 보고 “지자막여복자(智者莫如福者)”라고 탄식했다. 십 년이 넘도록 정진 수도하고 이제 하산하려는 제자가 스승에게 하직 인사를 하면서 간청을 올렸다. “스승님, 떠나는 저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부탁하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그만하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복을 받은 사람에게는 절대 함부로 덤비지 말라.” ‘복’은 그만큼 위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지만 바벨론 제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하나님의 큰 은총의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우상 앞에 드려진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명령이 있었지만 왕의 명령일지라도 거절했다. 죽음의 상황이 되어야 하는데 형통의 길이 열렸다. 또한 법령을 정하여 왕 외에 어떤 신에게든지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처형을 받게 되었다. 다니엘은 이 법령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왕의 명령을 어겼기에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사자들의 입을 막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되었다. 다니엘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총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고 건강하다고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말세에 처한 성도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 5:6)”고 하였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주어진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감사하며 겸비(謙卑)함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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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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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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