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이정희 목사] 스님과 목사님이란 호칭의 분석
    1. 서언(序言) 절의 승려(僧侶)를 일컫는 중(衆)이란 말은 무엇이며, 승려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 또 평소 언론이나 일반인들의 언어생활에서 승려에게는 깍듯이 존칭 접미사를 붙여 스님이라고 부기도 한다. 종교편향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면서 이런 호칭과 존칭어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스님과 목사님이란 호칭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2. 존칭접미사 “님”자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 세계의 언어 중에서 존칭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이다. 이러다보니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용어도 존칭어이다. 이런 차원에서 존칭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종합하여 먼저 논하고자 한다. 일반 사전적인 어법으로 볼 때, 스님이란 표현은 존칭어를 사용해야 하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면, 존칭접미사 “님”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예수님, 성령님”도 공식적인 문자 표기나 방송에서는 ‘님’자를 붙이지 않고 예수, 성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일부 교단(예장 통합)에서는 공식적인 표현에도 예수님, 성령님이라는 존칭 접미사를 붙이자고 총회에서 결의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의도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공식적인 문자 표기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존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독 절의 승려의 경우만은 스님이라고 일관되게 호칭하고 있다. 3. 스님과 목사님에 대한 호칭 불교에서는 흔히 도를 닦는 수행자들을 스님, 승(僧), 승려(僧侶), 사미(소년), 사미니(소녀) 또는 중(衆), 또는 화상(和尙), 법사(法師)라고 호칭 한다. 이로 보면 ‘스님’이란 존칭은 공적인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 왜 스님이란 존칭어만이 일반화 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있으나 모두 확실치는 않고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인도의 고대 말인 산스크리트어(梵語)의 “스와미” 또는 “샹카(sanp ha)"라는 말이 중국으로 건너와 “승” 혹은 “사미”라는 말로 바뀌어져 이를 존칭으로 부를 때 ‘스님’으로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 하나의 견해는 한자에서 스승을 뜻하는 ‘사(師)’자가 중국에서는 ‘스’로 발음되기 때문에 한자 발음의 ‘스’와 우리말의 존칭 접미사인 ‘님’이 합쳐져서 ‘스님’으로 호칭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 승려를 낮추어 중(衆)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수행하는 무리들’이란 뜻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란 말이 어원이고, 나중에 대중(大衆)으로 부르다가 더 축소하여 중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볼 때 중이란 말은 결코 낮추어 부르는 말이 아니었다. 단지 조선시대에 숭유배불(崇儒排佛)정책을 쓴 유학자들이 승려들을 부를 때 ‘중’이라고 했기 때문에 낮춤말로 인식이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유래로 보든지 현재의 ‘스님’이란 호칭은 존칭어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법상으로나 일반적인 표기나 공식적인 호칭어로는 ‘스님’이 아닌, ‘승’, 혹은 ‘승려’로 호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것이다. 이상의 논리로 본다면, 목사를 목사님으로 부르는 것은 어떠한가? 이 경우도 역시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존칭어로 사용하는 자리라면 당연히 스님으로 하듯이 동일하게 목사님으로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식적인 표기로는 ‘목사’라고 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렇지만 교인들조차 일상적인 대화에서 승려는 스님이라 하면서 목사님은 목사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란 존칭어도 마찬가지이다. 4. 결어(結語) 교인들만이라도 공식적인 표기가 아닌 일반적인 자리에서는 존칭접미사 ‘님’을 붙여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따라서 때와 장소에 따라 보통 호칭과 존칭어는 구분해야 되지만, 용어 하나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비하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0-02-12
  • [김문훈 목사] 저주의 쓴물을 멈추고 축복의 단물을 흘려보내라
    강원도 태백에 삼수령이 있다. 하늘에서 방울 세 개가 떨어져서 하나는 금용소로 들어가서 한강 1300리 물길을 이루어 서해로 흘러간다. 또 하나는 황지연못으로 들어가서 1300리 굽이굽이 낙동강을 이루어 남해로 흘러간다. 또 하나는 오십천을 타고 동해로 들어간다. 가정에도 흐름이 있다. 한 사람이 결단하고 나서면 언젠가는 족보를 이룬다. 사무엘상 초반에는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가정과 제사장 엘리 가정이 등장한다. 엘가나 가정에는 기도하는 아내 한나가 있었다. 가장보다도 기도하는 한 여인이 사무엘상에 물줄기를 갈라놓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공과가 있고 명암이 있다. 백 점짜리 의인은 하나도 없다. 하난에게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기도하다가 마지막 사사요 이스라엘의 사울과 다윗 두 왕을 세운 킹메이커인 사무엘을 낳았다. 엘리 집안에는 가정 교육의 문제가 있었는지 두 아들이 불량했고 부모님의 훈육이 없었다.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는 패가망신하는 집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이가봇을 외치며 종지부를 찍었다. 한나의 기도는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들을 낳고 사무엘의 말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그의 두 아들들이 말썽을 일으키니 백성들은 다른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하였다. 그래서 사울 왕과 다윗 왕이 등장한다. 사울 왕은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나중에는 변질이 되어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드리고 선지자가 죄악을 지적할 때도 변명으로 일관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좋은 것을 따로 챙겼다. 하나님께 묻지를 않고 신접한 여자를 찾아서 하나님께 진노를 쌓았다. 그의 집안에 시므이는 다윗에게 저주의 쓴물을 쏟아내었다. 평생을 사람을 원망하고 밖에서 해답을 찾다가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찾아오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지르려고 많이 준비하였다. 하나님을 노래하고 시를 적고 악기를 연주하며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되었다. 다윗의 때에 예배가 회복되었다. 마침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졌다. 흐름을 맑고 힘차게 하자!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 오피니언
    • 칼럼
    • 생각한토막
    2020-02-12
  • [선교] 일본의 새로운 선교방향
    1. 일본의 기독교 선교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된 시기는 고대(원시~1190), 중세(1190~1865), 근현대(1869~)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경교라는 기독교의 한 종파로 전파되었는데, 경교의 흔적은 문서가 남아있지 않기에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에는 어렵지만, 일본의 여러 축제(祭り)의 모습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이 처음부터 신도중심의 국가였던 것이 아니며, 일본을 향한 선교는 오래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회 소속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1549년 8월 15일에 가고시마를 거쳐 나가사키에 도착한 16세기입니다. 당시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질 만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전도에 대항하며, 동양으로 선교사를 보낸 것입니다. 자비에르는 포루투칼 선장을 통해 일본인을 소개받고, 일본에 오게 되는데, 1년 간의 전도로 1백 50명의 신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들의 전도로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일본 전체 인구의 3%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이 시대에 일본에서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오다노부나가가 무로마찌막부의 쇼군(장군)을 몰아내고 전국을 통일하는데, 오다의 집권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크리스천 다이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요토미로 정권이 바뀌면서,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금교령을 내립니다. 당시의 기독교를 포루투칼어로 ‘키리시탄’으로 불렸는데, 키리스탄은 신의 나라인 일본에 방해가 되는 종교라는 명목으로 전국에 금교령을 내리고, ‘후미에’와 ‘5인조 제도’와 같은 작업으로 키리스탄을 색출하면서, 심한 박해와 고문을 행합니다. 이에 30만명 이상의 키리스탄들이 순교하고 이후로도 약 250년 동안이나 박해와 금교령은 지속됩니다. 그러면서 근대에 들어와 미국의 문호개방 강요에 의해 일본선교는 세 번째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고, 1859년에 개신교 선교사가 일본에 입국을 합니다, 1872년에는 첫 개신교 교회가 세워지고, 1873년에 금교령이 해제되면서 신교의 자유가 선포됩니다. 하지만, 1889년에 일본의 일왕이 국가의 수호신이라는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고, 종교단체법이라는 조건이 붙는 데, 신교의 자유에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이 법에 의해 1941년에는 일본 안의 모든 기독 교회가 일본 기독교단으로 모두 통합되고, 패전일인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교회는 일본의 정부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2. 소외된 기독교 한국보다 먼저 복음이 전해졌지만 한국교회에 비해 일본의 교회 수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큰 진전이 없습니다. 선교를 어렵게 하는 여러 요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꼽으면 16세기 이후로 일본국가와 일본사회에서 기독교가 소외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교 소속 선교사를 통해 전해졌을 당시에는 전국에 80만명이 넘는 성도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기독교 금교령 이후에 박해와 탄압으로 인해 일본의 기독교는 점점 일본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 후 250여년이 지나고 다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계속했던 카쿠레키리스단(숨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나자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말씀 없이 형식만 지키고 있었기에 이들의 기독교는 토속신앙으로 변질된 형태로 남았습니다. 근대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모인 청년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입신출세의 희망을 잃고 몰락한 무사 출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선교사들을 통해 학문을 배우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지식층이 되어 일본 학교의 교직자가 되거나 일본 관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가르침과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민들이 접하기에는 문턱이 높은 주로 지식층 중심이 되었고, 일본 정부는 일왕을 천왕이라고 명하여 국가와 국민을 결속하는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군국주의 체제와는 맞지 않다는 이유로 1945년 8월 15일 패전이 되기 전까지 기독교를 사회에서 소외시켜 왔습니다. 3. 새로운 선교 방향 (계속되는 일본 선교) 아직도 기독교 인구가 0.1%도 되지 않는 일본이지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일본 선교는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야오료로즈의 카미’(八百万の神:팔백만의 신)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신들이 존재합니다. 일본에는 일왕이 신이 될 수 있었듯이, 사람과 동물도 자연의 그 어떤 것도 카미(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하나님과 카미(신) 개념의 차이로 현지 선교사들은 많은 고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여러 카미(신)와는 다른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일본 선교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전체의 의견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는 소극적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기독교 금교령 이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국가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년 전, 한 영혼의 유해를 가족에게 전달하면서 시작한 일이 나가사키 순교지 방문으로 이어지고, 계속된 방문 가운데 나가사키의 순교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면서, 나가사키현의 공무원들이 CBS를 찾아와 감사패를 전달하고, 나가사키 지역 공무원들이 CBS의 일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매우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두드러지면 안 되는 일본의 사회 속에서 공무원들이 기독교를 돕는 일은 오랜기간 동안 소외시 되어 왔던 기독교가 일본 사회 속에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BS가 목표로 하는 미디어 선교가 이러한 관계 속에서 향후 나가사키지역에서 방송 선교로서 자리를 굳게 잡게 된다면, 복음이 일본 전역으로 전해지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CBS가 일본 행정당국의 협조를 얻어 길을 내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한국교회와 일본교회가 함께 손을 잡고 복음을 위해 협력할 때가 온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이지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일본선교에 함께 동역할 사람들을 주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김주영 선교사(후쿠오카 비전교회, KPM)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2020-02-12
  • [선교체험기] 필리핀 룩반기독학교를 다녀와서 (2)
    <554호에서 계속> 다음날 6일(월) 아침7시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전8시 호텔로비에 집결하고 첫 일정으로 마닐라시를 투어 하였다.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국립공원으로 필리핀의 역사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필리핀이 약350년 동안 스페인 식민지로 있을 때 독립을 위해 처음으로 싸웠던 필리핀 국민의 영웅인 조스 리잘(Jose Rizal)박사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은 영령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이다. 국립묘지 투어 후에 마닐라의 오래된 옛 시가지를 지나 유명한 해양공원을 방문하여 근처 한국식당에서 먼저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한국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먹고 싶은 한국음식을 주문하라고 했더니 너무 다양한 음식을 주문하는 하는 바람에 한 아이는 식사를 다 마쳤는데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식사를 기다리는 헤프닝이 벌러졌다. 다음에는 음식을 통일하여 한두 가지로 주문해야 하겠다. 아무튼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해양공원을 방문하여 악어와 대형수족관에 돌고래, 상어, 다양한 열대어류 등을 관람하였는데, 그 중에 물속에 발을 담그고 닥터피쉬라고 하는 물고기들이 모여 발마사지를 해주는 코스에서 아이들도 남선회원도 피로를 풀면서 모두 즐거워하였다. 마닐라 투어를 마치고 오후3시경에 출발하여 남동쪽 110km 거리에 있는 퀘손주 룩반시로 향하였다. 룩반시는 해발 1,000m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 2,170m의 바나하우산이 있기 때문에 마닐라 보다 5도 이상 낮은 시원한 휴양도시이다. 마닐라에서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경유한 후 두 방향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왼쪽 방향으로 최근 탈(Taal) 화산이 분출하여 마닐라공항이 폐쇄되기도 했던 바탕가스 온천 지역을 경유하여 오르막 산길을 가는 길과 다른 하나는 오른쪽 방향으로 굴곡과 오르막이 심한 산길이지만 짧은 길이 있다. 이번에는 굴곡이 심하지 않은 바탕가스를 경유하는 길을 택하여 저녁6시경 룩반기독학교에 도착하였다. 먼저 학교 식당에서 정성껏 준비한 저녁식사를 한 후에 채플실(학교 내에 있는 예배당)에 모여 도착 예배를 드리고, 홈스테이할 가족과 우리 이이들을 소개하고 서로 인사한 후에 홈스테이 가족이 우리 학생들(홈스테이 가정에 2명식)을 데리고 갔다. 남선회원들은 시내에 있는 파티오 리잘 호텔에 투숙하였다. 숙박비는 매우 저렴하여 1인당 1박(조식포함)에 약 5만 원 선이다. 셋째 날 7일(화) 오전에 룩반기독학교 4층 대강당에서 공식 환영행사가 있었다. 환영행사는 개회예배 후에 룩반기독학교 학생들의 환영축가, 한국 측 일행 소개와 경남연 회장 김용언 장로의 인사 말씀, 룩반기독학교 교사, 스텝 소개가 있었고, 끝으로 경남노회 남선교회에서 준비한 장학금과 학용품과 교사선물 등을 전달하였다. 오후에는 시내 투어로 오래된 성당과 시가지를 둘러보고,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카마얀 성지로 30여m 크기의 예수님 동상과 노아방주를 관람하였다. 넷째 날 8일(화) 오전에 ‘성경의 날’ 축제 행사에 참석하였다. 먼저 300여명의 학생들이 특별히 준비한 가운을 입고 기수와 각종 악기 연주하면서 룩반기독학교를 출발하여 룩반 시청 홀까지 우리 학생들과 함께 약30분의 거리 퍼레이드를 펼쳤으며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환영과 함께 즐거워하였다. 시청 홀 앞에서 기념촬영 후에 500여명의 학생과 부모님들이 참석한 시청 홀에서 먼저 애국가와 뒤이어 필리핀 국가 제창 후에 노회장이신 싸이로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고, 뒤이어 남선교회 회장 김용언 장로님의 간단한 메시지와 우리 아이들이 준비한 퍼포먼스와 룩반기독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춤과 노래 등의 퍼포먼스로 성대하게 발표되었다. 모든 행사를 마친 후에 오후부터 우리 아이들은 영어회화 반에 들어가 첫 수업을 받고 있는 중에 남선회원은 2016년도에 룩반기독학교 학사증축(본회에서 5천만원 지원)을 기념하여 현판식을 가졌다. 남선회원들은 모든 행사를 마치고 출국 하루 전 마지막 저녁 시간을 시내 카페에서 룩반기독학교 모든 교사, 스텝진과 함께 모두 한 말씀하면서 마지막 친교를 가졌으며, 특히 교사와 스텝에게 룩반기독학교 학생들이 장차 필리핀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잘 지도해줄 것을 당부하였고 이를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남선회원들의 뜻을 전하였다. 남선회원들은 마지막 날 9일(목) 일찍 기상하여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룩반기독학교 채플실에서 톤톤 목사님이 주관하는 환송 예배를 마치고 오전8시에 룩반을 출발하여 낮12시경에 마닐라 공항 근처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한 후에 마닐라공항으로 향하였다. 배웅하는 분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필리핀에어항공편으로 마닐라를 오후3시경 출발하여 밤8시경 김해국제공항에 무사히 귀국하였다. 우리가 돌아온 3일 후인 12일(주일)에 룩반에서 서쪽방향으로 약 80km 떨어진 바탕가스 지역에 탈(Taal)화산이 폭발하여 마닐라공항이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로 인해 13일인 다음날에 바이블캠프를 이곳 타가이타이(Tagaytay)에서 개최 계획이었으나 취소하고 룩반에서 동쪽으로 안전한 루세나 리조트로 변경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또 다시 탈 화산이 언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예보로 인해 귀국일자가 20일(월)인데 부모님들이 많이 걱정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연일 현지에 있는 아이들과 인솔교사들의 기도, 룩반기독학교 교사와 스텝들의 기도, 국내 부모님과 남선회원들의 기도, 이렇게 모두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아이들이 20일(월) 밤8시경에 무사히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하여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이켜 보건데 남선회원은 바탕가스 지역에 탈(Taal)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에 귀국하였고, 탈화산이 폭발하여 마닐라공항이 전면 폐쇄되었으나 7일 만에 공항이 완전히 재개되고, 탈화산이 다시 폭발하지 않아 우리 아이들이 무사히 귀국하게 됨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깊게 체험하는 은혜의 단기선교 여행으로 앞으로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Thanks be to God! All for God’s Glory! <글/사진=진해성광교회 최중락 장로 제공>
    • 오피니언
    • 기고
    2020-02-12
  • [선교체험기] 필리핀 룩반기독학교를 다녀와서 (1)
    예장(통합)경남노회남선교회연합회(회장 김용언 장로/거제 하청교회)에서 주관하는 필리핀 퀘손주 룩반시 룩반기독학교에서 개최되는 5차 단기선교영어캠프(2020.1.5~20(16일)/총24명)에 참가하여 12일 탈(Taal)화산이 폭발하여 마닐라공항이 전면 폐쇄되는 자연재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무사히 다녀왔다. 본 프로그램은 다음세대(초5~고1까지)를 글로벌 크리스찬 리더로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2015년 1월에 1차 해외단기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금년 5차에 이르고 있다. 참가비용은 학생 전원에게 왕복 항공여비(1인당 약50만원)를 본회에서 지원하고, 체재비(1인당 약1백만원)는 본인이 부담한다. 인솔교사는 항공여비와 체제비 전액을 본회에서 지원하고, 남선회원은 전액 자비로 참가하고 5일간의 짧은 여정(9일(목)귀국)으로 다녀왔다. 해외단기선교 프로그램은 경남노회 산하 여러 교회에서 입소문으로 알려졌으나 아직도 모르는 분들이 많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참가자격은 본 노회 속한 교회의 남선교회 자녀 또는 목회자 자녀로 교회학교 학생이면 된다. 이번 5차 단기선교는 구정설이 1월 24일 하순에 시작되는 관계로 1월 5일 일찍 출발하여 20일 귀국하는 16일간의 프로그램으로 계획하였다. 김해국제공항에서 필리핀 마닐라로 가는 비행편은 필리핀에어항공으로 매일 1회 밤9시경 출발하여 마닐라공항에 밤12시경에 도착하고, 마닐라공항에서 김해국제공항으로 오는 항공편은 매일 1회 낮 오후3시경에 출발하여 밤8시경에 도착한다. 한국은 필리핀과 1시간 시차가 있으며 빠르다. 참가하는 학생들은 2~3회 사전 모임을 갖고 출국준비를 한다.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15세미만 학생들은 인솔교사가 법적으로 책임지고 동반하는 것에 부모가 동의하는 동반동의서를 작성하고 변호사 공증을 받아야 한다. 그다음으로 필리핀 룩반 현지에서 개최되는 ‘성경의 날 축제’(Bible Month Celebration)에 참가하여 찬양과 댄스, 태권도나 한국전통을 소개할 수 있는 두세 가지의 퍼포먼스를 준비하면 된다. 이렇게 모여 출국 준비하는 동안 참가하는 아이들은 인솔교사와 함께 친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15일 여정으로 한 가정에 2명식 홈스테이를 하게 되는데 각자 적당한 선물도 준비해야 한다. 출국 당일 학생들은 부모님들의 배웅으로 오후5시까지 김해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인솔교사 인솔로 공항에서 저녁식사를 간단히 하고, 오후6시부터 출국 수속에 들어간다. 이번 5차 단기선교 참가자는 학생 12명, 인솔교사 2명, 남선회원 10명으로 총24명이다. 예정대로 김해공항을 출발하여 약4시간 비행하여 마닐라 국제공항에 밤12시경 도착하였다. 한국은 영하의 추운 날씨이지만 이곳은 약30도로 무더운 날씨이다. 도착 즉시 현지 공항에 마중 나온 룩반기독학교 교장인 톤톤 목사님에게 먼저 페이스북 메신저(필리핀은 대부분 페북 사용)로 알린다. 그리고 약1시간 동안 지루하게 15세 미만의 아이들이 입국 심사를 마치는 동안 남선회원들은 미리 짐을 다 찾아 챙겨놓고 대기한다. 새벽1시경 출국장에 마중 나온 톤톤 목사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대기한 차량에 짐을 싣고 마닐라 공항 근처 101호텔에 도착하였다. 먼저 호텔로비에서 무사도착과 앞으로 일정을 위하여 감사기도 한 후에 다음날 아침식사 시간과 집결시간을 알려주고 곧장 배정된 숙소로 들어가 취침하였다. 최중락 장로(진해성광교회)
    • 오피니언
    • 기고
    2020-02-06
  • [아침묵상] 엘리야의 집중기도
    예언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이세벨 시대에 활약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바알을 섬기는 왕가의 딸로 이스라엘에 시집을 올 때에 바알 신앙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리석은 왕 아합은 왕후의 감언이설에 말려들어,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떠나 바알 신앙을 퍼뜨리는데 이용당하였습니다. 이세벨 왕후는 바알 제사장들의 배후가 되어 그들을 지원하면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제사장들을 죽이고 가두고 핍박하며 씨를 말리려 하였습니다. 여호와 신앙의 투사 엘리야가 그녀에게는 공공의 적 1호였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일이면 네가 죽을 차례라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살 길을 찾아 사막으로 들어가 로뎀나무 그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죽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들었습니다. 그가 잠을 깨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로 상을 마련해 주시고는 일렀습니다. “엘리야야 일어나 먹고 마셔라, 아직 너가 하여야 할 일이 많으니라”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떡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물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엘리야가 낙심하고 기진맥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숯불에 구운 떡과 같은 말씀의 떡과 한 병 물과 같은 성령의 위로로 그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용기를 얻은 엘리야는 40일 밤낮을 걷고 걸어 호렙산 굴을 찾았습니다. 굴에 엎드려 그는 목숨을 걸고 기도 드렸습니다. 목숨을 걸고 집중하여 기도 드렸습니다. 엘리야의 목숨을 걸고 드리는 집중기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물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장 1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라를 일으키는 길을 일러 주었습니다. 목숨을 건 집중기도는 예나 지금에나 막힌 담을 헐고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목숨 걸고 기도 드릴 때입니다. 그래서 두레수도원은 4월 13일에서 17일까지 목숨 걸고 기도 드리는 집중기도훈련을 열고자 합니다. 김진홍 목사(아침묵상)
    • 오피니언
    • 칼럼
    • 아침묵상
    2020-02-06
  • [박성규 목사] 우리가 선교해야 하는 이유
    지난 한 주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신경을 많이 쓰셨지요? 감염된 분들의 조속한 치유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우들 모두 이 기간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2월 2일 주일은 부전교회의 ‘2020 선교헌신주일’입니다. 부전교회는 지난해에 2천 명이 넘는 성도님들의 헌신으로 100여 곳의 선교지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고귀한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요즘 우리나라 경기도 좋지 않은데 선교 헌신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왜 선교사님들을 도와야 할까요? 첫째 선교는 예수님의 유언이자 최고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유언이자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부릅니다. 지극히 높은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군인으로서 그분의 명령을받들어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 지상태만(The Great Ommission)이 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명령에 불복종한 태만의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둘째 선교는 내가 받은 빚을 갚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130여 년 전 이 땅에 왔던 해외에서 온 선교사님들 덕분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나라보다 불편한 이 땅에 왔습니다. 서울 양화진과 광주 양림동 언덕과 창원 공원 묘원 등에 있는 선교사들의 묘비를 보십시오. 가슴에 진한 감동이 몰려오지 않습니까? 묘비에는 풍토병으로 숨진 어린 자녀를 이 땅에 묻어가면서, 아내와 남편을 묻어가면서도 그들이 우리 민족을 향한 선교를 포기하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들과 딸을 거기에 묻으면서도,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거기에 묻으면서도 지상명령이 지상태만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선교했습니다. 그 땀과 눈물과 피 위에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신앙이 서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 선교는 우리에게 선교사의 상을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1절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교하는 성도와 교회를 복 주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역사의 무대에 쓰임 받게 하십니다. 교회의 진정한 크기는 본당의 좌석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는 선교후원자가 많은 가로 결정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차원에서 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박성규 목사(부전교회)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0-02-06
  • [최호숙 목사] 경적필패(輕敵必敗) 그러나 선주필승(先主必勝)
    1년은 일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있다. 마지막 날은 하루의 출발부터 시작되어 이르게 되는 것이다. 출발이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도착하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 출발을 하였다. 출발한 장정 60만(어린이, 노약자, 여인, 포함하면 약 250만 명 추정)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가칭 “광야교회”라 부르고 있는데 이 광야교회 교인들이 출발은 잘하였으나 가나안 도착까지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많았다. 바울은 광야교회 실패의 요소들을 네 가지로 지적하면서 고린도교회에 교훈의 편지를 썼는데 그 네 가지 원인이 무엇인가? 첫째로 우상의 문제(고전 10:7) 둘째로 음행의 문제(고전 10:8) 셋째로 주를 시험하는 문제(고전 10:9) 넷째로 원망의 문제(고전 10:10) 이 실패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본보기(거울)로 삼아 성공적인 성도들이 되라는 교훈을 주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하였다. 사탄은 지금도 천성문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광야교회를 파멸시킨 네 가지의 강력한 무기로 우리를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대처법이 필요하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네 종류의 인간유형을 보게 된다. 첫째 유형, 아무생각 없이 사는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인간 둘째 유형, 모든 사물을 우상(偶像)삼아 위로받고 사는 범신론(汎神論)적 인간 셋째 유형, 오직 인간의 지혜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사는 인본주의(人本主義)적 인간 넷째 유형,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적 인간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양에 비유하고 세상을 이리(마 10:16)로 표현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사자로 표현하였다(벧전 5:8). 이 표현의 핵심은 적군은 강하고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전능자이며 삶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을 앞세워 나가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임을 알 수 있다. 손자병법에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말이 있다. 적군을 우습고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패하게 된다는 뜻이다. 유사어로는 교병필패(驕兵必敗)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군사력을 믿고 교만하면 반드시 패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대처방법은 무엇인가? 우리의 승리 비결은 선주필승(先主必勝)이다. 즉 주님을 먼저 앞세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원리를 알았던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 이름을 앞세워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삶의 체험을 통해 고백한 말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2020년 한해 선주필승(先主必勝)하기를 바란다. 최호숙 목사(인평교회)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0-02-06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봄 비
    봄비 내리면 아직 추운 둔덕에도쑥 잎은 창문 내다보고아지랑이 맑은 해 기다린다 개나리 진달래는 서로 불러 깨우고 산골짝 개울가엔버들강아지 눈 비비고 바위 틈 가재들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作 신광열 목사(대민교회)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0-02-06
  • [어깨동무 칼럼] 시험지옥
    地(땅 지) 獄(가둘 옥) 하나님의 질서가 죄로 인해 파괴된 공간인 땅에 가두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지옥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는 존재가 바로 크리스천인 것이다. 수능이 끝나고 고3 학생들은 면접과 합격발표를 기다리며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 날로부터 큰 부담과 스트레스의 직격탄을 맞아 새벽같이 일어나 새벽별을 보고 집에 오는 학생이 바로 고2학생들이다. 시험지옥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존재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인데 우리아이들은 지옥속에 살아간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곳으로 밀어넣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찬송가의 가사처럼 같은 공간 같은 제도속에 살지만 결코 그곳이 시험지옥이 아닌 하나님이 덮어주시고 하나님 안에서 기쁜 생활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와 관계하며 지냈던 많은 다음세대에게 말해주었던 나의 생각은 ‘공부의 주인공이 되라.’ 이다. 공부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내가 원해서 하며 나의 목표와 계획속의 한가지 도구일 뿐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공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억지로 먹이는 음식이 있다고 해보자 내 입맛이나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닐때는 아무리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이라도 그것은 고문이고 고통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옥일지도 모른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맛있고 배 부른 것이다. 교회에 새신자가 오면 새신자 훈련총서로 9년간 교육해왔다. 첫 교육하는 날 강의계획서와 함께 마지막 시간에 시험이 있다고 말하면 다들 부담스러워 하고 교회다니기가 이렇게 힘든것이냐? 이런이야기를 한다. 그때 제가 생각하는 시험의 목적을 알려주면 다들 안심을 하곤 했다. 그 목적을 나눔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여러분 제가 생각하는 시험의 목적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찾아봄으로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치고 제가 확인후 빈곳을 집에 가셔서 채워서 만점을 만들어 오시면 시험이 끝납니다.” 이런 시험을 치르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시험지옥이라 부르지 않을 것 같다. 줄세우기식 교육제도와 등급을 나누어 우리 아이들을 판단하는 그런 제도안에서 우린 과연 시험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쩔수 없이 새벽별보고 시험지옥에 사는 아이들이 아니라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온 동방박사들처럼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경배하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험지옥에서 아이들을 건지기 위해 교회와 가정과 학교가 어깨동무하여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진연욱 목사(진해 어깨동무학교 교목)
    • 오피니언
    • 칼럼
    2020-02-0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