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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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에반겔리아대학)

 한 국가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기독교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는 문제다.특히 국가 정책의 결정이나 교회 공동체의 존립과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지도자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하다.그가 설령 기독교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명목상의 신자인지,아니면 기독교 신앙과 가치관을 정책의 입안과 실천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실질적인 그리스도인 지도자인지 하는 문제는 공의와 평화의 사회를 꿈꾸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모두의 자연스러운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이러한 문제 의식을 배경으로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그 진정성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볼 만한 문제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 로마에는 성육신 하신 인간 예수는 천사장이라고 하는아리우스(Arius)의 주장과그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 간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누스는 오늘날 튀르키에(터키)의 니케아(Nicea)에서 로마제국 전역의 주교 모임을 소집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정통” 입장이 되었다.여기서 문제는 콘스탄티누스가 도나투스파와 니케아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황제로서 자신의 뜻을 교회에 어느 정도 강요하려고 했는지 하는 것이다. 그가 황제로서 어떤 교리는 받아들이고 어떤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통합되는 조건을 지시하려고 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논란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교국가인 로마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황제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단순히 이 전통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황제에 대한 교회의 유일한 모델은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이었는데, 그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도록 돌볼 책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도나투스파들이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접근했지 황제가 이들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법정의 결정이 도나투스파들에게 불리하자 이들은 폭동을 시작했고, 어떤 정부도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전임자들에게 고문을 당했던 주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상처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정치적인 연극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또한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했던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말하도록 유순하게 허용할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콘스탄티누스는 아마도 참된 교리를 결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교회를 통합하려고 노력했을 뿐 자신이 소집한 교회 협의회의 결정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또 다른 요소는 그가 어머니 헬레나를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으로 보내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증거와 유물을 정밀하게 조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의 완전한 개종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어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임종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주 지적하며, 이 때문에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고 믿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고,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서 나중에 망칠 기회가 없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신학은 이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지점까지 발전했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임종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신앙 안에서 자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신앙에로의 개종을 어떻게 평가하든 황제로서 그의 행동은 기독교와 제국 모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눈에 띄는 효과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박해받는 소수 종교에서 황제가 선호하는 신앙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으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유대를 강하게 형성했다. 정부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교회와 기꺼이 협력하고 상호작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당시에는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신에 대한 이교도들의 기본 개념 역시 신들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권위자라고 보았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하다. 따라서 도덕이나 정의에 대한 교회의 이해관계가 국가의 이익과 충돌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의 제도적 구조, 권한, 책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우리는 교회가 정부와 우호적으로 강하게 밀착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지 그 역사적 교훈까지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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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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