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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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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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황권철 목사] 교회순방: 창원온천교회(07)
    창원온천교회(강명호 목사)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북면 천주로 1128번길 2-15에 있다. 이 교회는 신촌교회(경남 창원시 북면 신촌리 573-1번지 소재)라는 이름으로 1926년 3월에 본포교회에서 분립하여 태동되었다. 해방 후 신앙노선 문제로 내분이 일자 1925년 6월에 서완선(徐完善- 제32회 고신총회장) 전도사가 방문하여 바른 신앙노선을 가르쳐 지도함으로 교회가 진정되어 총회로부터 받는 물질적인 지원을 끊고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했다. 그리하여 이 교회 속한 한석윤(韓錫潤) 청년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는 다시금 내분으로 총회측은 오전에, 고신측은 저녁에 예배를 드리다가 1968년 4월 18일에 신촌교회에서 나와 창원온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현재 당회장으로 섬기는 강명호 목사는 창원시찰 명곡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청빙을 받아 2023년 1월 29일(주) 위임을 받았다. 강 목사는 교회의 목표를 기독교의 핵심가치이며 주님의 최대 계명인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여 세상을 섬기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삼고 복음전파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강명호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 63회로 졸업하고 김해 활천제일교회(김세중 목사)에서 강도사와 목사로, 창원 명곡교회(이상영 목사)에서 부목사로 섬기다가 청빙을 받았다. 당시 필자가 당회장과 겸하여 위임국장을 맡아 섬겼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청빙할 때 많은 분들이 지원하였으나 온 교회가 강 목사를 강청하여 위임목사로 청빙했다. 강 목사는 남다른 은사를 많이 가진 특별한 목회자이다. 그는 전형적인 목양사역자이다. 명곡교회 이상영 목사로부터 13년간 목회훈련을 잘 받아 주님이 가르쳐 준 선한 목자상이 각인된 목양(牧羊)의 사역 원리를 잘 아는 목회자다. 목회자의 최우선 사역이 소떼와 양떼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관계를 잘 하는 사역자이다. 목양이란 상호의존적이면서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강 목사는 연소하지만 당회와 제직회를 잘 이끌어 가는 능력이 탁월한 영적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잘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그는 거룩한 열정과 영성을 소유한 자이다. 인간적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에서는 강력하고도 파워풀(Powerful)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당찬 목회자임을 볼 수 있었다. 금일 설교 제목은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 25절 말씀으로 “부흥하는 사역”이다. 강 목사는 주님의 공생애 3대 사역을 전하면서 서론 격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폭발적으로 지배하는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 전념성 질환을 소개하면서 우리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이 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라고 소원했다. 이를 위해 주님이 가르쳐 준 세 가지 사역을 강력히 선포했다. 먼저는 가르치는(Teaching) 사역이다. 가르치는 교육은 주님의 지상 사역 중에 최우선 된 사역이었다. 주님은 이른 아침이면 항상 회당으로 가서 율법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메시야이심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언약 백성들에게 교회가 교리공부와 신조로서 가르쳐야 할 기독교 교육이다. 이 같은 것을 위해서 주일 오후예배는 교리문답을 교육하여 성도들이 열심히 배워서 가르치는 사역에 동참해야 할 것을 강력히 선포했다. 다음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Preaching) 사역이다.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복음의 능력 밖에 없으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최우선 지상명령이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나타나는 증상은 몸에 열이 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에 감염된 성도는 뜨거운 열정으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성도의 최우선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치유하는(Healing) 사역이다. 주님은 온 갈릴리뿐만 아니라 수리아 온 지역까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주님의 치유사역은 육체의 치유에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을 치유하는 사역이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천국백성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다. 이 같은 삶의 변화를 통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 교회 부흥 사역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강력히 선포했다. 끝으로 오늘 순방은 일곱 번째로 창원온천교회를 찾았다. 필자가 교회 예배실에 도착하여 들어서는 순간 강단에서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목사님과 장로님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예배 전에 부르는 찬양의 열기에서 사무엘 선지자 고향 라마나욧의 영성이 주의 전에 가득함을 느끼게 했다. 예배를 집례 하는 강 목사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충만했고, 선포되는 말씀에 온 교회가 아멘으로 화답했다. 교회는 봄맞이 상반기 전도사역을 위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구역인사회’로 모임을 가지는 분주함 속에 생기의 영이 가득했다. 예배를 마친 후 식당으로 가서 은퇴하신 선배 김치호 목사님과 하영상 장로님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눈 후 집으로 귀가 했다. 이제 또 하나의 새벽 중보기도에 창원온천교회를 올려놓을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2024년 3월 3일 11시 예배 순방 고려파교회연구소장 교육학박사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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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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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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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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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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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김문훈 목사] 복 있는 사람의 사가지
    복 있는 사람,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이 다르다. 특징이 있고 조건이 남다르고 DNA가 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 네 가지(사가지)가 있다. 1. 복있는 사람은 신언서판의 끝인 지혜가 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중에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니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빌어먹지 않는다. 사울 왕의 길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라서 지혜로워서 선택과 집중을 잘한다. 실력이 없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용서가 안된다. 몸 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고 필력이 뛰어나 표현력이 좋고 판단력이 남 다르다. 2. 복있는 사람은 위치 선정을 잘 하므로 자기 환경을 아름답게 꾸며서 좋은 생태계를 조성한다. 사람은 환경의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 좋은땅, 옥토운동을 하여 좋은 사람들,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마태효과를 이룬다. 3.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아름다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거리유지, 유유상종, 통친합락, 친구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닮아가고 연합한다. 부정적인 면으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니 말기찬섬을 통하여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뿌리를 박으니 공급처가 마르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해서 기가 빨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4. 복 있는 사람은 결국, 결과가 좋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는다. 농사는 사시사철 모두가 중요하다. 봄철에 요즘처럼 이상기온으로 꽃이 피지 못하면 가을농사는 틀렸다. 여름철 땡볕을 견디고 추수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가 익어야 된다. 농사의 결과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산성이 있고 가성비가 있고 배가 되고 번식하여 증거와 열매가 있어야 된다. 복 있는 사람은 이파리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늘 푸른 상록의 복의 받는다.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진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된다. 나중 축복, 말년의 축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결국 인복, 다복, 행복, 흥복을 누리게 된다. 복 있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도 행복해지고 교회도 부흥 되고 사회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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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쉴만한 물가
    2024-05-02
  • [김성수 총장] 인간 삶에 대한 통합된 성경적 관점
    만약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전담 봉사’(full-time service)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 왔다. 그래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선교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 순위였다. 어떤 이유로 이러한 선택이 우리에게 열려 있지 않다고 느끼면, 우리는 ‘차선’의 선택에 만족하고 간호사, 의사 또는 사회복지사가 되거나 다른 돌봄 직업 중 하나의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이미 소위 ‘세속적인’ 직업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전담 기독교 사역’에 대한 관심이 커질 때도 많이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겪는 격변이 너무 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현재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게 되고, 우리의 직장은 우리의 선교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교 활동은 두 가지 주요 목표로 구성된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적 행동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기준을 유지하는 것(또는 적어도 우리의 도덕적 결점을 숨기는 것!)과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주로 천국에 가기 위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선교적 활동의 결과가 실망스러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때로 직장 동료들을 우리 자신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직장에서의 근무 시간 외에 소위 ‘주님의 일’(Lord’s work)을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성경 공부 그룹을 인도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 그런데 지난몇 세기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편협하게 도덕적이고,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져 있는 기독교처럼 보이는 신앙 방식을 거부했다. 이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특정 직업과 활동을 보다 더 영적인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향유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이 더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확신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과 복음 전도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오로지 내세에만 맞추어져서는 안되며, 직업은 영성의 위계 질서에 속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 있을지라도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이 되어야 한다. 소위 경건주의자들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 너무 속하고 굴복하여 독특한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를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적인 삶이냐 아니면 세상에 속하는 삶이냐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부적절한 선택지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소위 ‘거룩한’것과 ‘세속적’인 삶이라는 두 가지 양립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누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세상에서 신성한 영역으로 물러나 문화적으로 무관하게 되거나, 아니면 현대 세속주의자들의 관점과 함께 세상에 굴복하고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되는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삶을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지 않는 통합된 성경적 관점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적인 주권 아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은 문화적으로 적절하고 독특한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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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5-01
  • [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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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4-26
  • 학교법인 고려학원, 고신대 11대 복음병원장에 최종순 교수 선출
    학교법인 고려학원(이사장 유연수 목사)이 지난 4월 25일, 이사회를 열고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11대 병원장에 최종순 교수(가정의학과)를 선출했다. 이날 이사회는 고신대학교 이정기 총장이 제청한 최종순 교수와 질의응답과 투표를 갖고 과반수 찬성으로 신임 병원장 인선을 최종 통과 시켰다.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11대 병원장으로 선출된 최종순 교수는 5월 7일 부터 3년의 임기를 가질 예정이다. 최종순 교수는 고신대 의과대학(8기 입학)을 졸업하고 고신대복음병원에서 대외협력실장, QPS실장, 기획조정실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했다. 또 대한노인병학회 영남지회 이사장, 대한 가정의학회 부울경 회장, 대한통합암학회 부회장 등 대외 활동을 해왔다. 최 교수는 국내외 의료사각지대에서 꾸준하게 의료봉사를 펼쳐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21년 보건복지부 장관상과 부산광역시의사회 의학대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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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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