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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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평강의왕,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국내외 정세를 보면 우리 모두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갈등과 긴장, 미움과 질투, 싸움과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권력, 물질, 지식, 명예가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다듬고 감싸주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요하게 해 주는 하늘의 평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는 오직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시는 평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단순히 긴장이 없고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인가?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평화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문제다.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긴장과 갈등, 막힌 것이 없고 오직 ‘누림’(enjoy)이 넘쳐나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 또는 평강은 단순히 긴장과 적대감,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는 관계 속에서의 ‘즐김’(enjoyment)이다. 한 국가는 주변 다른 국가와 평화로울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가난으로 비참할 수 있다. 평화 속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물리적 환경 속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인간 동료와 함께 거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자신과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예배, 기도, 말씀, 선한 행위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을 때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평화 안에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평화는 또한 자연과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와 물리적 환경 속에 거하는 기쁨을 포함한다. 평화는 우리가 노동으로 세계를 형성하고 그렇게 하는데서 성취감을 발견하고 그 결과에 기쁨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그래서 선지자는 평화의 날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백성들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을” 그 날(사32:18)에는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5:6)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조화와 풍성한 이미지를 담은 평화-짐승들 사이의 조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조화(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그 구절은 다음 구절에 의해 도입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에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사 11:1-2). 이새의 줄기란 천사가 탄생을 축하하여 노래한 “그분”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는 스가랴가 말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눅1:79) 분이시다. 또 시므온이“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2:29)고 말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화평의 복음”(행10:36)을 이스라엘에게 전파하신 분이라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게 말하면서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분”(엡 2:17)이라고 말했다. 또 이사야가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부른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평화는 이 세상 속에 일하는 하나님의 이유이며 우리 인간의 소명이다. 평화가 역사 속에 완전히 도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 선물이지 인간이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따금씩 찾아드는 평화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의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역하고,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평화의 성취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주위에 둘러서서 평화가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유를 위한 사역자, 즉 평화를 위한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사역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정의를 위한 헌신적 삶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계속적인 노력의 추구라는 두 가지 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평화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한다면 삶의 두 차원 모두가 함께 필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인류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라는 문화적 명령과 함께 죄의 사슬에 결박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함과 누리게 해 주는 사역을 함께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의 줄을 꺽는 것….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사 58:6-7)사역이다.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하는 사역은 모든 그리스도의 궁극적 비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분열보다는 화합이, 긴장보다는 편안함이, 억압보다는 풀어줌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구주 성탄을 맞아 축하하며 기뻐하는 계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평강의 사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12-27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6)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천국을 준비하시고, 재림하십니다. 우리의 편이 되시어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하여 모든 것 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성, 이기심은 나를 위하여 사는 이기주의적인 삶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다시 사신 예수님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기가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무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사랑으로 이깁니다. 사랑은 승리의 열쇠입니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서 부르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여 범죄 했을 때 사단 마귀가 하나님께 참소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사랑의 관계를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2-12-27
  • [황권철 목사] 마태(Matthew's Behind Stories)-언약의 사도
    마태는 사복음서에 의하면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막3:18; 마10:3; 눅6:15; 행1:13). 그는 예수를 따르기 전에 세리였다(마9:9, 10:3). 마태는 레위와 마태가 동일인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를 동일인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유대인들은 흔히 2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태란 이름은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태가 레위였다면 그는 가버나움이나 그 근처에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를 섬겼을 것이다. 다메섹(Damascus)과 아크레(Acre)를 잇는 도로를 통하여 수송되던 상품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것이 그의 임무였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어업이나 공산품에 대한 세금 부과도 그의 임무였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설교를 하셨으므로 그가 부름받기 전에 이미 많은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막2:14).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많은 동료들이 그의 집에 많았음을 누가는 말한다(눅5:29; 막 2:15). 이는 자신이 이제 변화 받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가버나움 출신 세리 마태 본명은 레위이다. 레위 지파가 갈릴리 지방에 거주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갈릴리 땅은 본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지역이었다. 그런데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갈릴리로 대거 옮겨간 것은 BC 169년 안티오쿠스 4세의 대 박해 때였다. 마카비상 1:57 “율법서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왕명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성전을 지키던 레위 지파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도 몰랐고 고기를 잡는 방법도 몰랐다. 그들은 관청에 들어가 일자리를 얻기도 하고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걷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신약시대 로마 제국을 도와서 세금을 걷어 들이는 재무기관에 속한 관리들을 세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제도가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세리들은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유대인 중에 세리로 로마 정부를 섬긴 사람들을 매국노, 혹은 동족에 대한 착취자로 낙인 찍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이들에게 부정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도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창기와 같이 죄인 취급했다(마21:32). 주님은 마태와 동일한 세리를 만나 주셨다. 그가 바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Zacchaeus)이다(눅19:1-10). 삭개오란 이름의 뜻은 “순전하다, 정의롭다”는 말이다. 그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유대인에게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가장 추한 창기와 같이 여겼다. 그는 평사원도 아닌 세리들을 거느린 세리장이었으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는가? 그러나 그 직위로 물질적으로는 부요함을 누리는 부자였다. 이런 추악한 죄인이 거하는 여리고 도성에 가장 거룩한 메시야 되신 주님이 오셨다. 주님은 당시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찾지 않고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삭개오를 찾았다는 것이 그 당시 여리고 사람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초청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했다.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토설해 내고 주님을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했다. 세리 마태는 세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제자로 부름 받은 세리 마태 마태는 결단력과 진취성을 겸비한 자이다. 그래서 알패오는 아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레위의 부친도 레위지파 자손이라는 것을 감추고 살았다. 알패오라는 그는 헬라식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레위란 이름을 붙여 무거운 짐을 지어 주었다. 아들의 때에는 레위 지파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복음서에서도 열두 제자 중 언제나 최하위에 기록되었다. 그 자신이 예수의 이름에 누가 될까 한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언제나 제자들의 뒷전에 있었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마가복음에 이어 마태복음을 쓴 사람이다.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레위였다(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태는 본래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이 레위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마태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그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이다. 당시 유대민족이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때라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지 도시락 하나가 귀한 시대였다(마14:13-21). 그렇지만 세리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가 세관에서 앉아서 일하는 좋은 자리에서 사직서를 내고 방랑자와 같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따른 것은 그가 인간이 배를 불리는 빵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앉았어도 복음과 상관없는 시간과 물질과 권력은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엡 5:16)고 했다. 세속 풍속과 유행을 따라 고귀한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영혼을 구하고 생명을 건지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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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12-27
  • [오태열 목사] 초인이 되라
    神(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F. Nietzsche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神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함께 神과 대립되는 초인을 꿈꾸었다. 그는 초인이 되지 못한 채 정신병에 걸려 초라하게 죽었지만, 오늘날 이 꿈은 수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 되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 자, 힘 있는 자가 되고자 한다. 이 욕구를 이용하여 현대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자들이 뉴 에이지들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개발, 초능력, 깨달음, 영적 각성, 자아 통제력, 자기 스스로 창조자가 되라는 창조적 인생 등이 초인을 향해 다가서게 하는 사상들이다. 현대인들은 힘을 생명처럼 여긴다. 본능이기에 이 자체를 탓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왜 현대인들이 이런데 매력을 느끼며 빠져들고 있는가이다. 그 이유는 첫째, 현대인들은 심리적, 정신적,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를 통하여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자 이 공허함을 기성 종교가 채워주지 못함에 따른 반작용이다. 둘째, 절대가치의 부정 때문이다. 탈근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통합이다. 한쪽에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절대란 절대로 없다고 한다. 절대적인 것이 없기에 모든 종교도 하나라 한다. 절대적 가치의 부정은 현대인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어 마음 둘곳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찾아 헤매게 한 결과이다. 셋째, 윤리적 해방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을 부정함으로써 죄책감에 시달려온 기성 종교인들을 해방시켜주며, 세속적 오락과 쾌락을 즐기며 살라고 부추긴다. 넷째, 자기 자신이 인생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건강, 성공, 감정의 조절, 능력개발 등은 삶의 우선으로 취급하는 분야로 이 욕구의 충족을 잠재적 능력개발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선전한다. 다섯째, 카타르시즘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심리학, 두뇌 과학, 최면술, 영매술 등을 통하여 일시적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마약 같은 환각 현상을 가져다준다. 여섯째,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착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등 인생의 근본 문제를 던지면서 해답을 주는 것처럼 유혹하고 나름대로 설명해 줌으로써 그동안 찾지 못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찾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며,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믿고 추종하게 한다. 이러한 뉴 에이지 운동은 반기독교적 운동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상충하는 우주관, 신관, 구원관을 가지고 현대인들에게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다. 우리의 고민은 이러한 현대인들을 어떻게 신앙적, 성경적으로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완성시켜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답이 성경은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요셉 모세 사사 다윗 등은 모두 초인들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받은 자들로 특별한 소수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이런 와중에 요엘이 나타나 일대 전환을 예고한다. 요엘 2:28- 32절에 ‘말세에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니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리라’ 하였다. 이 예언은 장차 누구나 성령을 받게 될 것이고, 성령 받으면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 성취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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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12-27
  • [하수룡 장로] 기 쁨
    노년이 되면 크게 웃을 일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도 부부가 같이 살아가면 그런대로 웃을 일을 만들고 웃게 되는 경우가 있으나 노후에 혼자되면 그렇게 기뻐할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즐거움은 쾌의 감정으로 낙이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지만 기쁨은 즐거움이 동반된 쾌감으로 다분히 영적인 요소가 짙다. 즐거움은 쉽게 사라지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된다. 오래전에 필자는 영남사람으로 여수에 사는 호남인을 전도하여 현재 집사에 이르게 된 분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기쁨 속에서 친밀하게 잘 지내고 있다. 서로의 삶이 일그러진 오이지의 모습이 아니라 확 펴진 보름달처럼 늘 즐겁고 웃는 모습을 유지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오랜 교분 동안 통화가 되면 상대방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고 몸이 아프다가도 저절로 회복될 정도로 서로가 쾌유의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찐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기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날이거나 보고 싶으면 직접 상대방의 가정을 방문하여 며칠 쉬기도 하고 중간 위치의 만나기 쉬운 곳을 정하여 음식을 나누거나 차를 마시면서 기쁨을 나눈다. 만나기만 하면 누가 보든 상관 않고 부부가 교차로 안고 춤을 추며 뛰고 난리다. 처음 계획에는 2박 3일간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가 4박 5일로 연장하여 여행하기도 했다. 서해안과 남해안 여행도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 즐거움을 가득 안고 돌아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로 행복하게 산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이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다. 게다가 마음을 담아 택배로 유기농 열매를 호남에서 보내기도 하고 철에 맞는 열매를 영남에서 사랑을 담아 보낼 때가 있다. 여수 땅을 방문할 계획이면 벌써 며칠 전에 낚시하여 맛있는 고기를 냉동고에 준비해 놓기도 한다. 그곳에 당도하면 낚시할 도구가 준비되어 오랜 시간 동안 낚시터에서 세월을 낚기도 한다.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좋은 사람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그 기쁨은 그 누구도 맛보지 않고는 모른다. 오직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정 때문에 즐거움이 꽉 찬 쾌감이 서로에게 최고의 기쁨을 생산하게 만든다. 주님으로 인하여 만남이 성사되었고 그 사귐이 일회성이 아닌 10여 년간 지속 되어 상대방을 서로 신뢰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챙겨주고 싶은 관계가 된 것은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서로가 항상 좋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것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베푼다. 사진만 보여줘도 행복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데레사 효과(Theresa Effect)처럼 가정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생활에서 생기는 아름다운 일들을 서로 소개하고 보여주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기쁨에 찬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믿음은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주님 중심은 주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다. 주님 섬김은 결국 형제를 정성으로 잘 섬기는 것이다. 그 열매는 전도한 사람과 전도된 사람을 한 형제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해 주신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훈기가 가득한 남향집에서 해마다 보내주는 맛있는 여수 갓김치의 냄새를 마음껏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기쁨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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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12-27
  • [오성한 목사] 정체성(1)
    우리의 영은 점점 더 새로워져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만큼 완전하다. 믿는 자의 영은 살았다. 완전한 영으로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창조 되었다. 우리의 영은 점점 성장하여 온전한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온전한 영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의 영은 죄가 없이 온전하다. 능력의 삶은 출발이 중요하다. 바른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은 언제나 담대하게 해 준다. 거듭난 사람이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일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영이다. 영이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산다. 팔 다리가 없어도 온전한 사람인 것은 육이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다. 사람이 가진 혼은 훈련되는 대로 형성된다. 어릴 때 늑대 소년 이야기가 있었다. 늑대에게 양육 받은 두 아이는 늑대의 모습으로 산다. 기록에 보니 1년 반 정도 살다가 죽었단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었단다. 침대를 갖다 놓으면 침대 밑에 구석에 들어간다. 음식을 먹는 교육이 안 된다. 그래도 사람이다. 그런데 혼이 어떻게 훈련 되었나? 사람일지라도 무슨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혼이 형성된다.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한국말을 어릴 때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미국 아이가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혼은 훈련되는 대로형성 된다. 혼이 영적 훈련을 받으면 영적인 사람이 된다. 혼이 형성되면 형성 된 대로 행하며 산다. 그런데 진짜 나는 영이다. 영이 혼을 가지고 있고 영과 혼이 육을 입고 있다. 훈련되어 나타나는 혼이 내가 아니다. 진짜 나는 영이다. 진짜 나를 하나님은 온전하게 하셨다. 온전한 나의 영에 하나님이 계신다. 영은 육을 입고 있다. 그래서 육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혼에게 진짜 나를 인식 시켜야 한다. 혼이 영적인 생각으로 살게 되면 육은 따라 가게 되어 있다. "나는 영이다." 우리의 영은 온전하다. 거듭난 영은 흠이 없다. 할렐루야! 흠도 없고 점도 없다. 당신의 영은 성령님과 하나가 되었다. 능력이 넘쳐난다. 혼이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온전한 능력을 모를 뿐이다. 영적인 생각을 하라는 말은 혼을 훈련하라는 말이다. 마음을 훈련하라는 말이다. 혼적인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거듭난 나를 바르게 아는 것이 정체성이다. 나는 영이다.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할 때 영으로 대한다. 사실은 안 보이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세계다. 영혼육도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이다. 같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면서도 분리된다. 이것이 영적의 신비다. 영육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혼은 육에 속하는 부분이다. 영이 진짜 우리이기 때문에 육에 진짜인 나를 인지시키고 말씀과 기도로 훈련 시켜야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육을 보시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보신다. 영이 진짜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5:21). 육을 고치는 것은 영인 나를 인지시키는 것이다. 나의 진짜는 영이 나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내가 성령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신앙생활의 첫 단추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이 성령의 사람이라는 100%의 믿음이 없다면 믿음으로 행할 수 없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육은 무익하다"는 말은 우리의 육체, 고깃덩어리가 무익하다는 말이 아니다. 육적인 생각이 무익하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다. 주님의 말이 생명이다. 주님의 말이 영이고 생명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을 생각하는 것이 영적인 생각이다. 영인 주님의 말이 나를 살린다. 생명의 삶을 살게 한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성령의 사람임을 확신하게 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주님의 말이 아닌 다른 생각은 육의 생각이다. 육은 무익하다. 이 말을 잘 못 이해하면 육신을 자학하게 된다. 중세시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강했다. 잘 믿으려면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인 줄 착각했다. 먹는 것 참고, 잠도 참고, 스스로의 정욕을 죽이기 위해 육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수도사들은 자신의 육체를 학대했다. 육신의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롬8:7). 육신적인 사람과 자기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은 복음을 받을 때 거부반응이 온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할 수 있게 된 것은 은혜다. 한없이 주신 은혜다. 감사 할 일이다.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고집 센 사람일지라도 주님 말씀하시면 "주님, 그렇습니까? 아멘입니다."라고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의 문이 열릴 때마다 감격하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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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신재철 목사] 엄마 앞에서는 전도사 하지 마
    “미안해요. 우리 교회는 더 사역자 두기가 어려워서요.” 낮, 밤 가리지 않고 일하며 버틴 휴학 생활. 학업 중에도 간간이 이어오던 아르바이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청소년부 교사로, 청년부 찬양인도자로, 모든 예배 참석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과한 노동으로 때때로 병이 나 예배 참석을 못하면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신학생이 믿음이 없어서 일하다가 예배도 빠지네.”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는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왜 이리 속상하게 들리는지. 하지만 지금 있는 공동체가 너무 좋아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아갔다. 조금 일렀지만, 일을 그만하고 사역자로 훈련받고 싶은 마음에 모든 아르바이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역지가 필요했고 그곳이 지금 있는 교회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과 교회 형편이 일치하지 못했고 나는 사역지를 찾아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타 교단의 작은 교회. 경기도 외각에 위치한 사역자 두기가 어려운 교회를 섬기는 교육전도사가 된 것이다. 스물두 살의 전도사는 괴롭다. 매주 3시간 버스를 갈아타며 기타 들고, 가방 메고 교회 가는 길이 쉽지 않다. 들고 다닐 손이 없어 대충 구겨 넣은 셔츠도 참 볼품없다. 평일에는 학교, 주말에는 교회. 체력이 충전될 시간이 없다. 고생과 수고는 더 커졌지만, 주머니는 더 가벼워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전도사로 부르는 것이다. ‘척’ 삶이 고단하고 무거운데 괜찮은 ‘척’ 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척’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 주어진 과업을 잘 진행하는 ‘척’ 능력자 코스프레가 어렵다. 여유로운 공강 시간, 캠퍼스를 걷는다. 마음도 그런데 비까지 온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공중전화 부스에 몸을 밀어 넣는다. 엄마는 내게 여전히 밝으셨고 일상을 궁금해하셨다. 내 안부, 내 건강이 최고인 분이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통화하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타령’을 하고 싶었을까? “엄마, 나 사실 너무 힘들어. 몸도 아프고 돈도 없고 교회에서 괜찮은 ‘척’ 어른스러운 ‘척’ 하기도 너무 싫어. 근데 엄마가 신학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거 말하면 속상해할까 봐, 교회 안 다닐까 봐 말도 못 했어.”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가 되었다. 폭풍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정리되지도, 뒤를 생각하지도 않는 말들이 쏟아지는데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시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나에게 실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은 어머니 배려할 여력이 없다. 얼마간 내 감정은 필터링 없이 분출되었다. 시간이 지나 말은 없어지고 흐느낌만 남는다. “아들, 엄마 앞에서도 전도사 할 거야? 그냥 아들이잖아. 이렇게 말하고 울어. 그래도 괜찮아.” 울보 전도사는 그 뒤에도 얼마간 수화기를 붙잡고 눈물을 훔친다. 엄마가 있어서 참 좋다. 성도가 아닌 엄마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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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조희완 목사] 선교의 사명 (마28:18-20)
    여러분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기억하십니까?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경, 서울 강남의 고급 백화점으로 꼽히던 삼풍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붕괴사고로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1,000여명의 중상자들이 발생하는 대참사였습니다. 그 사고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에 단일 참사로는 최대 사망자수를 기록한 끔직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고의 책임을 물어서 그 백화점 회장(이준)과 사장(이현상)을 구속하였습니다. 회장과 사장은 아버지와 아들사이입니다. 그 사고가 있은 뒤 아버지와 아들은 감옥에서 복역 기간을 다 채우고 출소(出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가 그 아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출소한 후 무엇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할까 기도하다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50세에 선교사 훈련을 받고 지금은 가난한 나라 몽골에서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복음의 일꾼(worker)으로 부르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참 다양하고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순탄하게 부르셔서 별 어려움 없이 선교의 일꾼으로 쓰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온갖 역경과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친 후에 부르셔서 선교의 일꾼으로 쓰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복음 전할 일꾼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직접 가는 선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있는 곳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선교는 예수님의 절대명령입니다.(마28:18-20) 둘째로, 선교는 신앙생활의 필수과목입니다.(고전9:16-18) 셋째로, 선교는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것입니다.(롬1:14-15)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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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3: 한 주간 요일 명칭의 유래
    I. 서언(序言) 연말연시의 때를 맞이하여 일 년 12달의 태양력과 월별 명칭에 대한 유래를 지난 호까지 논하여 보았다. 오늘의 본 호에서는 한 주간의 요일의 명칭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뜻은 무엇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7요일의 유래 1. 유래: 한 주간의 7요일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유대인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이는 창세기 1장의 내용에서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모세에 의해 유대 민족의 월력이 확립될 때 7요일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요일별 명칭은 없었고, 성경에 있는 대로 첫째 날, 둘째 날 등으로 구분해왔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통해서 전해져 왔다. 현대와 같이 각 요일의 이름이 태양계 안에 있는 별들의 이름으로 된 것은 A.D 321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였고, 정식 채택은 로마제국이 전 유럽을 통치하던 서기325년 니케아종교회의에서이다. 2. 7요일의 명칭의 유래: 7요일의 영어식 표기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 북유럽의 게르만 민족의 신화와 신앙에서 유래되었다. 주로 천체(天體)의 이름과 민족 신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 의미는 항성인 태양과 행성인 달과 여러 별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정해졌다. 1)일요일(Sunday): 태양의 날로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태양을 신으로 여겼고, 이를 Sol이라 했다. 또한 이를 섬기는 날을 라틴어로 dies solis라고 했고, 이를 영어로 day of son으로 했다가 지금은 로마인이 섬기는 태양의 신의 날인 Sunday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월요일(Monday): 달의 날로서 처음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달의 여신인 셀레나를 뜻하는 Luna로 했다가 게르만 족의 용어인 Mane로 변경됐다. 그 후에 현재의 Monday로 사용 되었다. 3)화요일(Tuesday): 화성의 날로서 그리스 신화의 Tiw’s day에서 온 말로서, 사람들이 화성의 붉은 색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전쟁의 신인 마르스(Mars)라고 했다. 이후에 게르만 민족들이 자신들의 전쟁의 신인 Tyr로 불렀다가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Tuesday가 되었다. 4)수요일(Wednesday): 수성의 날로서 폭풍의 신인 Wodin(북유럽 신화의 Odin)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리스 로마에서는 수성의 신인 Mercury로 바뀌었다가 게르만 족들이 자신들의 폭풍의 신인 Wodin로 불렀다. 이후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Wednesday가 되었다. 5)목요일(Thursday): 목성의 날로서 그리스 로마의 벼락의 신인 Jupiter라 했으나 게르만 족들이 자신들의 폭풍의 신인 Thor로 불렀다. 이후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Thursday가 되었다. 인기 영화의 주인공인 어벤져서, 토르 등의 내용에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기도 하다. 6)금요일(Friday): 금성의 날로서 금성은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낸다고 해서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사랑과 미의 여신인 Venus라 했고, 게르만 족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신인 Freya 로 불렀다가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Friday가 되었다. 7)토요일(Saturday): 토성의 날로서 그리스 로마신화나 게르만 족들의 농업의 신이 동일하게 Saturn이었던 관계로 변형 없이 Saturn으로 불렀다가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Saturday가 되었다. III. 우리나라의 7요일의 유래와 결어 7요일제의 달력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7세기경에 전래된 가톨릭의 영향으로 생각되며,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갑오경장 이후인 1895년부터였다. 원래 우리나라 전래의 한주는 목화토금수의 오행만을 채택한 5일이었는데, 전통시장이 5일장인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또한 요일의 한문표기는 음양오행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즉, 해는 양이고 달은 음이며, 수.화,목.금,토는 오행에서 온 것이다. 이는 다음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본 대로 한 주간의 요일의 유래와 명칭도 그리스 로마제국과 게르만 민족의 전통적인 신화와 그들의 신앙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여기에 동양의 음양오행설이 포함되어 있다. 워낙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유래와 명칭의 뜻은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계속해서 논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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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경남성시화운동본부, 2022년 정기총회 개회
    경남성시화운동본부(대표본부장 김종준 목사, 이하 경남성시화)가 12월 23일, 정기총회를 개회하고 한 해 동안 공석이었던 대표회장에 박종희 목사(창원 반석교회)를 선출했다. 이날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감리교회(최정규 목사)에서 오전 7시 조찬기도회 후 오전 9시에 열린 경남성시화의 총회는 수석상임부회장에 최근 경남기독교총연합회에서 대표회장을 이임한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교회)를 선출하고 그간 대표본부장으로 수고한 김종준 목사(홍대교회) 자리에는 박경림 목사(마산임마누엘교회)가 그 수고를 이어간다. 다음은 경남성시화운동본부 임원 명단이다. ▲명예회장 : 구동태 감독(합성, 원로), 윤희구 목사(한빛, 원로) ▲이사장 : 이종승 목사(임마누엘)▲대표회장 : 박종희 목사(창원반석)▲수석상임회장 :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대표본부장 : 박경림 목사(마산임마누엘) ▲수석본부장 : 김우태 목사(동창원영은)▲사무총장 : 서민석 목사(새소망) ▲총무 : 김동수 목사(새누리)▲수석부총무 : 최정규 목사(합성) ▲ 서기 :권영광 목사(진주열린) ▲부서기 : 박재송 목사(성민) ▲회계 :정 천 장로(진해침례) ▲부회계 : 진수진 장로(선장) ▲감사 :정성익 목사(한마음병원), 안승준 장로(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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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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