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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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시기연, 제49회 정기총회 개회 (수정)
    거제시기독교연합회(회장 박태부 목사, 이하 거제기연)가 지난 12월 7일(수) 오전 11시, 거제시 장승포동 새장승포교회(박태부 목사)에서 ‘제49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새장승포교회의 새 성전에서 개회하는 거제기연 정기총회 회무에 앞서 1부 개회예배는 총무 김명식 목사(염광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회계 성철근 장로(신현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회장 박태부 목사(새장승포교회)가 ‘연합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시133:1)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박태부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합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바라신다”라며 성경 속에 연합에 대한 말씀 구절들을 소개하고 “연합하는 곳에 복을 주신다. 서로 존중하며 자신을 고집하지 말고 연합을 이루어가시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직전회장 강광만 목사(연초중앙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치고 김명식 목사가 광고를 전했다. 이어진 2부 회무는 박태부 목사가 기도한 후 서기 김훈 목사(남부교회)가 회원점명하고 박태부 목사가 개회선언 함으로 시작했다. 회무는 절차보고 및 전회의록 낭독과 각 보고 후 회칙심의를 하고 임원개선에 들어갔다. 임원개선은 회칙에 따라 전형위원이 회의를 통해 신임 임원을 추천해 신임 회장에 고현교회 박정곤 목사를 선출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대표회장 : 박정곤 목사(고현) ▲수석부회장 : 서용진 목사(신현) ▲공동회장 : 이태석 목사(신명), 김해동 목사(거제순복음), 이종삼 목사(갈릴리), 이태우 목사(충현), 김희종 목사(유호), 김형곤 목사(거제제일), 김태준 목사(거제온누리), 강광만 목사(연초중앙), 장인용 목사(외간), 김명식 목사(염광), 김팔전 장로(옥포제일), 김훈 목사(거제남부) ▲총무 : 이상래 목사(큰숲) ▲부총무 : 김윤수 목사(사랑샘). 김정운 목사(거제울림), 이지형 목사(통합 맑은샘교회) ▲서기 : 배남대 목사(한내교회) ▲부서기 : 김진석 목사(섬김의) ▲회계 : 성철근 장로(신현) ▲부회계 : 김해진 장로(연초중앙) ▲감사 : 박태부 목사(새장승포), 유진욱 장로(고현) ※ 2022년 12월 15일(목), 명단 수정
    • 뉴스
    • 교단 및 연합회
    2022-12-10
  • 진주기연, 제41회 정기총회 개회
    진주시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김선엽 목사, 이하 진주기연)가 지난 12월 6일(화), 오전 10시 30분, 진주시 신안동 진주성남교회(양대식 목사)에서 ‘제41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부회장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의 인도로 드려진 1부 개회예배는 부회장 김재현 장로진주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김정화 목사(송곡교회)가 성경봉독(갈5:22-23, 약1:4)한 후 회장 김선엽 목사(진주중부교회)가 ‘인내하는 복된 성품’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김선엽 목사는 말씀을 통해 “교회가 서로 연합하고 연합이 잘 돼야 지역이 부흥되고 교회가 잘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설교 후 직전회장 엄태호 목사(진주갈릴리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무는 서기 김정화 목사가 회원점명 후 회장 김선엽 목사가 개회선언하고 신입회원 가입 결의와 인사를 했다. 이날 예장(합동) 진리와사랑의교회, 예장(통합) 생명나무교회, 예장(백석) 호수교회가 새롭게 진주기연에 가입하고 인사를 전했다. 회순채택과 전회의록 낭독 및 각 보고 등으로 이어진 회무는 임원개선에 들어가 각 교단 대표의 추천으로 신임 회장에 양대식 목사를 선출하고 수석부회장에 진주중앙교회 한성수 목사를 선출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고문 : 김동권 목사, 이금조 목사, 정상문 목사, 변무영 목사, 류기서 목사, 김순만 목사, 우상식 목사, 최원호 목사, 이영기 목사, 팽철수 목사, 허영학 목사, 권영화 목사, 박영수 목사 ▲증경회장 : 박영출 목사(진주신일), 조영래 목사(칠암), 김창윤 목사(강주), 황선조 목사(진주동부) 정태진 목사(진주성광) 김권성 목사(선교), 엄태호 목사(진주갈릴리), 김선엽 목사(진주중부) ▲회장 : 양대식 목사(진주성남/합동) ▲수석부회장 : 한성수 목사(진주중앙/기감) ▲목사부회장 : 박형호 목사(새빛/백석), 윤성수 목사(은평/기하성), 양성목 목사(동산/통합), 문장환 목사(진주삼일/고신) ▲장로부회장 : 신기청 장로(진주성남/합동), 전학수 장로(진주대광/통합), 이수환 장로(진주중부/고신), 서형욱 장로(진주제일/기감), 권순성 장로(군교회/초교파) ▲총무 : 이상의 목사(진주대곡/합동) ▲부총무 : 김필성 목사(강남/기감), 박희석 목사(나들 목/예성), 이상원 목사(주사랑/고신), 정경영 목사(한가족/백석) ▲협동총무 : 장순모 장로(진주성남/합동), 진영권 장로(선교/통합), 박대식 장로(진주남부/고신), 장명석 장로(진주/기감), 오진근 장로(진주갈릴리/예성) ▲서기 : 김정화 목사(송곡/통합) ▲부서기 : 이시봉 목사(열방추수/합개) ▲회계 : 윤상석 장로(진주성남/합동) ▲부회계 : 석대중 장로(진주중부/고신) ▲감사 : 박영출 목사(신일/통합), 강만제 장로(도동/합동), 황성진 장로(진주삼일/고신), 서혁 장로(강남/기감) ▲실행위원 : 구태훈 목사(진주중앙/합동), 민영생 목사(제자/합동), 김창윤 목사(강주/통합) 김권성 목사(선교/통합), 권영광 목사(진주열린/고신), 서신석 목사(열방시민/고신), 박성호 목사(생명샘/백석), 정호석 목사(사랑의/백석), 서경자 목사(대암/기감), 이대웅 목사(도담/기감), 김성주 목사(이현/백석대신), 김지수 목사(해송/초교파), 박정국 목사(진주성서침례/성침), 탁시온 장로(진주초대/기하성), 하양수 목사(횃불/예하성), 황선조 목사(진주동부/예성)
    • 뉴스
    • 교단 및 연합회
    2022-12-09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5)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악하면 악인이고 생각이 선하면 의인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좋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좋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악을 싫어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립니다. 악은 죄요 죄는 관계를 깨트립니다. 악을 생각하는 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의 리더는 선을 추구하고 선한 것을 생각합니다. 선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말하고 행동하게 되니 관계가 잘 됩니다. 악의 소속은 사단이고 선의 소속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진 자는 선한 것만 생각하기에 지혜 자입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악한 생각을 조절 합니다. 미워하는 악의 생각을 버리고 사랑하는 선한 생각을 합니다. 사랑의 사람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좋은 것을 생각할 때 좋은 열매 맺게 됩니다. 사 랑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십니다. 말씀이 진리이고 의로운 말씀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마음이 온유하면서 불의, 죄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대하여는 NO 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죄가 있고 불의합니다. 세상은 정의가 없고 불의함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싫어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는 예수님, 말씀, 진실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진실, 공의, 정의를 추구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멀리하며, 진리를 구하는 리더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이 없고 불의를 행하며, 진실, 진리를 버리는 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리더가 누구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불의, 거짓을 기뻐하는 리더는 타락한 리더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불의와 거짓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의와 진리, 진실은 오래가며 관계를 세우는 지혜입니다. 리더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 가운데서 진실해야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이 최고의 지혜요 리더십입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영향력입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2-12-07
  • [황권철 목사] 선교지에서 순교한 도마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는 바벨론으로 갔다. 아마 바벨론에 최초의 기독교회를 세운 이가 도마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마는 또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가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1 도마가 인도 남부의 케랄라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전했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인도 남부 지역의 7개 초대교회는 도마가 세운 것으로 기독교 사역의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인도에서 고난을 당하고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시신은 현재 마드라스 교회 지역의 마알라토르에 묻혔다고 한다.2 도마는 두려움이 없는 전도자였으며 위대한 교회 개척자로 알려졌다. 도마가 기도하던 지하의 작은 굴 안에는 작은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에는 두 개의 작은 홈이 파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마가 양팔을 대고 기도하다가 생긴 홈이라고 한다.  도마는 인도 오토 릭샤로 첸나이 시가지로 20분쯤 달리면 성 토마스 마운틴(St. Tomas Mountian) 입구에 도착한다. 사도 도마가 원래 순교한 곳은 첸나이 시내와 공항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이다.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모사의 순교지에 세웠다는 “도마순교기념교회”가 있다. 교회 내부는 아치형 천장으로 성당처럼 꾸며져 있는데 생각보다는 초라하다. 교회 양쪽 벽면에는 주님과 열두 제자들의 순교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 했는지 기록도 있다. 교회 내부 앞 쪽에는 도마가 암석에 직접 새겼다는 돌 십자가상이 있다. 성 도마교회 안에 모셔져 있는 도마의 유해, 돌 십자가 옆에는 도마의 뼈 조각이 액자 안에 있었다. 사도 도마는 창에 찔려 순교했다. 산 정상에서 교회를 바라보면 마리나 해변의 해안선이 보이고 첸나이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1.5Km 정도 거리에 첸나이 국제공항이 있다. 무덤 교회는 순교지로부터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도마의 순교지와 무덤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무덤교회는 마리나 해변 근처로 5분 정도 거리에마리나 해변이 있었다. 순교 기념교회에 비하면 웅장한 건물이다. 흰색 고딕으로 건축된 성당 양식이다. 성전 내부에는 오래 되어서 칠한 곳이 벗겨져 있었고 군데군데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다. 성전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 단층 조그마한 건물에 유물을 전시 한 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사도 도마와 함께 했던 자들의 생활도구들의 유물이 있다.  1949년 6월 10일 카이로의 프랑스 판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정부는 이 귀중한 문서를 찾고자 애쓰고 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지금까지 이집트 땅에서 보존되어 오다가 발견된 가장 귀한 것 중 하나며, 그 학문적 중요성은 투탄카멘 왕의 무덤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극적인 발견보다 더한 것이라고 한다. 위 기사가 언급한 귀중한 문서란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3를 가리킨다. 최근 신약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도마복음은 나그함마디 문서가 전한 작품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어원문을 콥트어(Coptic)로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완전한 콥트어 판본이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었다.4 비록 정경과 같이 믿을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삭줍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다(요 2:23). 그래서 그들은 표적 보여주기를 원했고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표적 중에 표적이 사실 십자가의 표적인데 주님이 그것을 보여 주었을 때 그들은 정작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십자가는 당대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스칸달론(헬, 올무, 추문)이었다. 그러나 도마는 정면승부를 걸고 주님 앞으로 다가가서 그 현장을 확인하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가 표적만을 구하는 신앙에 머문다면 그 표적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 신앙 또한 처참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신앙은 지성을 희생하고서 얻은 것이 아니라 지성이 없는 믿음, 회의가 용납되지 않는 믿음이 오히려 위기를 자초하는 법이다.5 도마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 십자가 현장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그는 표적에 머물지 않고 표적을 행하신 주님에게 나아가 완전한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의심을 통해 더욱 확실한 고백의 자리로 나아가는 정직한 고백자였다. 우리에게 도마 같은 정직한 고백 있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성경
    2022-12-07
  • [김성수 총장] 성탄의 계절에 ‘주는 사랑’을!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말들이 많이 있지만 ‘사랑’(Love)이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결코 “눈물의 씨앗”이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를 이해하거나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에 관해서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애국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나라 사랑을 맹세하며 노래한다. 낭만적인 시인들도 사랑이 가득 찬 용어들을 구사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은 결국 따지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랑으로 나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필요에 의한 사랑’(need-love)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사랑’(gift-love)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우리가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안전하게 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사랑한다.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는 낭만적인 사랑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져 있을 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간 느끼는 낭만적인 사랑은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이와는 거의 정반대의 사랑이다. ‘주는 사랑’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하게 해 주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가져다주기를 원할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충족되어도 결국 공허하며, 더 충족되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넘쳐나는 사랑이며, 비어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채워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받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계속해서 주기를 원하며,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강렬하게 갈망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를 꾸며주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능력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건전한 인간관계는 이 각각의 사랑을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다. 사실 두 종류의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또는 가족이나 이성을 그리워할 때, 이러한 그리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원하게 만드신 것은 무엇이나 선한 것이다. ‘주는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본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성탄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계절을 맞고 있다.성육신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선물로 주신 ‘주는 사랑’의 가장 완전하며 대표적인 사건이다. 속죄사역 역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 희생 제물로 아낌 없이 내어 주신 사랑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행하는 모든 ‘주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의 사랑은 단지 인간적인 복사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복사품과도 같은 우리의 ‘주는 사랑’도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십계명은 바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순종과 충성과 헌신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롭게 행하는 것과 주는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이상을 줄 수 있다.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돌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그들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공평하게 대하는 정도를 한 걸음 더 넘어서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6계명은 우리가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공의란 나의 이웃의 삶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받은 나그네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공의롭게 행동했다. 이들은 그 나그네를 헤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그네를 보살펴 주었다. 그는 나그네에게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하였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해 준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공의를 넘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한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않게 지켜준다.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넘어 나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인도해 준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연적으로 온다. 사람들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그냥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법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 ‘주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실천하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훈훈해 질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12-07
  • [최호숙 목사] 도전(挑戰)에 응전(應戰)이 있는 신앙
    라이벌(rival) 또는 강한 자를 이기기 위해 투쟁하다 보면 언젠가는 상대를 정복할 때가 있다. 이 원리를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1d J. Toynbee-1889-1975) 는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법칙”이라고 했다. 정상에 서 있고 아무리 많은 발전을 일궈냈다 할지라도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할 능력이 없을 때에는 무사안일에 빠져 어떤 국가이든지, 어떤 문명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를 불문하고 소멸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사를 보면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패한 기록이 있고,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0:6패, 아랍 연합공화국 전에서 0:10 패배한 전적이 있다. 경제적 열세, 체력적 열세, 기술적 열세 모두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포기하지 않고 도전에 도전을 한 결과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있는 축구 실력의 보유국이 되었다. 2002년 세계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고 4강 신화를 이루었고, 2018년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기엔 제로(Zero)%의 상황이었지만 2:0 승리하였다. 2022년 카타르 올림픽 포르투갈 전에서 세계 언론들은 승률 9%라고 했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도전하였고 2:1로 승리하였고 도전에 성공한 것이다.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던 도도새는 비둘기목의 새이다. 천적이 없이 평화로운 환경과 풍부한 먹이 덕분에 날아서 먹이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도도새는 둥지를 견고하게 만들 필요도 없었고 알을 필사적으로 지킬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섬에는 알을 노리는 뱀도 없었고 맹금류도 없었고 포유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연속이 나태를 가져왔고 결국 날아다니는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경쟁 능력을 상실한 도도새는 후에 인간들이 들여온 개 고양이 돼지들에게 먹이를 다 빼앗기고 느려터진 움직임 때문에 인간들에게 잡히고 결국 도도새는 멸종되었다. 도도새라는 명칭은 15세기에 모리셔스 섬을 발견한 포르투갈인들이 날지 못하는 새를 발견하고 바보라는 뜻의 “도도(Dodo)”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도도새의 비극처럼 틀 안에 갇혀 도전도 없고 변화를 거부하고 퇴화하여 결국에는 위기를 자초하게 되는 현상을 “갈라파고스 증후군(Galapagos Syndrome)”이라고도 한다. 갈라파고스 증후군은 여러 분야에 적용되어 설명되는데 특히 경제에 관련되어 쓰일 때는 국제 표준이나 세계 시장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자국민의 양식이나 기술에만 만족하고 고수하다가 세계 산업기술과 시장에서 고립되어 경쟁력을 잃어 도태되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고난과 연단 도전의 과정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라면 바보같은 도도(Dodo) 또는 갈라파고스(Galapagos)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도전에 믿음으로 응전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교훈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아담은 마귀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고 패하게 되어 이 땅에 고통이 오게 되었다. 우리는 싸워야 하며 이겨야 한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는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고,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다”고 했다. 우리는 사탄의 도전에 응하여 싸워야 하며, 예수 이름으로 이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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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2-12-07
  • [오태열 목사] 환상을 보라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 취업난에 시달리고,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리는 청년은 “88만원 세대”, 이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3포 세대”,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5포 세대” 인간관계와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7포 세대” 최근의 청년들은 모든 것도 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란 뜻에서 스스로를 “N포 세대”(N은 부정의 수를 뜻하는 수학적 용어로써 계속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젊은이들은 한국을 헬 조선이라고 말한다. 세상 청년들이 희망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숨 쉬며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하였다. 예언, 환상, 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아들, 딸, 젊은이, 늙은이, 모두가 내일을 향한 부푼 미래에 대한 소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령 받은 젊은이들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말한다. 성령 받은 늙은이들 또한 다르다. 세상 늙은이들은 은퇴로 말미암아 빈곤, 질고, 고독, 죽음의 두려움 속에 시달릴 때, 이들은 새 출발, 영원한 삶에 대한 꿈을 노래한다. 그래서 성령 받은 젊은이와 늙은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 청년들이 고작 좋은 학벌, 안정된 직장, 출세, 시집가고, 장가 가는 일 등, 온통 땅의 것을 꿈꾸고 있을 때, 성령 받은 젊은이와 늙은이들은 하나님을 찾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 성령 받은 자들의 인생은 더이상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초라한 인생이 아니다. 이들은 벅찬 감격으로 주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비전을 고백한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성령 충만하여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젊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이여! 환상을 보라, 그리하여 미래를 노래하라, 그리고 기도에 힘쓰며 성령 충만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초인이 되라. 여러분들의 삶이 성령이 주시는 벅찬 꿈과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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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조희완 목사] 생각의 차원 (잠23:7)
    옛날에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에 어느 한 곳에서 점쟁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이 타고 가는 나귀가 만일 세 번 방귀를 뀌면 당신은 죽을 것이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행자는 “웬 별 미친놈의 소리를 한다.”하고 그 점쟁이의 말을 일축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까 나귀가 방귀를 뀌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점쟁이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계속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서 한 여관에서 묵고 가려고 여관 앞에 도착을 했는데 나귀가 또 방귀를 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더욱 점쟁이가 한 말이 생각나서 영 기분이 언짢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점쟁이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방귀를 뀌지 못하도록 돌멩이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가지고 나귀의 똥구멍을 단단하게 틀어막았습니다. 여행자는 그날 밤에 영 불안한 생각이 들면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귀가 무사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나귀의 꼬리를 들고 똥구멍을 들여다보는데 그때 마침 나귀가 참았던 방귀를 새게 뀌는 바람에 틀어막아 놓았던 돌멩이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머리를 맞아가지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에 그만큼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영양을 받게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러나 생각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좋은 생각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한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잠23:7) 둘째는, 항상 신앙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렘6:19) 셋째는, 항상 소망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전9:4) 합당하고 좋은 생각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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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오성한 목사] 바른 믿음(4)
    육의 사람은 육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육의 생각을 하고 세상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하게 된다. 거품을 물고 세상 이야기를 하며 산다. 세상의 삶이 습관이 되어 있어 세상이야기가 더 편한 것이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영으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영의 삶이 습관이 되어져 영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더 편해진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갔는데 그 곳에서 가진 마음이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생각이 그의 습관이었다. 영의 습관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더 쉬게 만들었다. “우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어.”하고 뜻을 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다니엘에게 더 쉬운 일이었다. 뜻을 정한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가 꿈꾸며 생각하고 상상했던 대로 믿음의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단1:15). 더 나아가 왕 앞에서 그들은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1:20)라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다니엘이 잘 살았기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복을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에 복을 받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바른 믿음인 임마누엘로 출발했던 것이다. 뜻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은 육의 생각이 아니다. 바른 믿음으로 출발해야 뜻을 정할 수 있다. 바른 믿음으로 출발해야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울 수 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했다. 반복해서 말씀을 묵상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면 담대해 진다. 계속 기도하면 담대해 진다. 예레미야는 스스로를 “나는 아이라”(렘1:6)라고 분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한 결과 담대해 졌다. 예레미야 26장에 보면 예레미야를 붙잡아 죽이겠다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담대하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담대히 말한다. 얼마나 담대한지 보라.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렘26:14-15). 그런데 예레미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우리야 선지자는 무서워 에굽으로 도망을 갔다. 여호야김 왕은 몇 명을 보내 우리야를 잡아오게 한다. 그리고 칼로 죽였다. 그리고 그를 평민의 묘지에 장사했다.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렘26:23). 담대했던 예레미야는 도움의 손길을 만나 살았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예레미야 26장 한 장 안에 예레미야와 우리야 선지자를 대조해 놓고 있다. 인간의 생각으로 도망하면 살 줄 알았다. 우리는 영적 습관을 가져야 한다. 자꾸 반복해서 임마누엘을 말해야 한다. 이미 주신 생수의 강을 말해야 한다. 임마누엘을 습관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점점 강해짐을 볼 것이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훈련을 자꾸 하면 강해진다. 앞에 이야기한 조 집사님을 위해 기도할 때 기도하고 구한 것을 그대로 그리는 담대함이 생겼다. 반복해서 주장하고 기도하니 그런 마음이 생겼다. 본인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할 때 담대한 확신이 왔다고 말한다. 믿음의 출발은 이미 주신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력으로 더 받아 내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배에서 샘이 터졌다.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 성령의 능력이 넘쳐난다고 믿고 출발해야한다. 이전의 나는 더 노력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오래 동안 생각하며 예수를 믿었다. 지금은 이미 예수 능력이 내 능력임을 믿고 출발한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이겨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임마누엘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어디를 가도 괜찮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다. 하는 말이 무엇인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고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출발했다. 골리앗의 이름이 골리앗 된 이유는 돌에 맞아 쓰러지면서 “아이구! 골이앗!”이라고 해서 이름이 ‘골리앗’되었다고 어머님께서 어릴 때 재미있게 이야기 해 주신 일이 잊혀 지지 않는다. 당신은 매사에 어떤 출발을 하고 있는가? 출발이 믿음이어야 한다. 출발을 또다시 점검하라. 이루어 주신 믿음에서 출발하며 살아라. 은혜에 설득되어 믿음으로 받아 바른 믿음으로 출발하자. “나는 성령의 사람이다.” “나에게 성령의 역사가 넘쳐난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 넘쳐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자꾸 바른 믿음으로 고백하고 읊조려라. “주님 오늘 잘 잤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 힘을 얻습니다.”라고 늘 고배하라.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루의 삶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산다. 하나님과 믿음의 대화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돼. 죄 안 지어야지. 이겨야지.”하고 긴장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수하게 된다면 빨리 회개하고 또 바른 믿음으로 임마누엘의 길을 가야한다. 계속된 훈련을 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진다. 말씀으로 돌아오고 기도로 돌아오는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라고 했음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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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2: 12달과 달별 명칭의 유래
    I. 서언(序言)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남겨둔 체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한 해를 기획해 보는 이즈음에 달력의 역사적인 유래와 B.C와 A.D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연호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를 지난 호에서 논하여 보았다. 오늘의 본 호에서는 매달의 이름과 한 주간의 요일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12달의 유래 1. 한 해의 첫 달에 대한 고대의 견해 :인류가 고대로부터 첫 달로 여겼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주로 따뜻한 봄이 왔을 때 쯤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본 것 같다. 이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도 봄을 한 해의 기점으로 보았다. 봄이 시작하는 첫 달부터 가을에 해당하는 열 번째 달까지만 이름이 있었고, 겨울의 두 달에는 원래는 이름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머지 두 달에도 이름을 붙이면서 그 두 달을 일 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달로 정했다. 1월을 뜻하는 January와 2월을 뜻하는 February가 바로 그것인데 이것이 나중에 일 년 중 가장 앞자리로 되면서 두 달씩 뒤로 됨으로 인해서 추운 겨울에 새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또한 12월은 영어로 December인데 그 어원인 Decem은 라틴어로 10이란 숫자이고 영어 ~ber는 ~번째 달이란 의미이다. 이는 원래 10월이었는데 1,2월이 앞서 들어오면서 두 달씩 뒤로 밀려 오늘날의 12월이 된 것이다. 11월을 뜻하는 November는 nine(9)이란 뜻이고, 10월을 뜻하는 October 역시 여덟 번째 달이란 뜻이며, 9월의 September도 본래 뜻은 일곱 번째란 뜻이 내포되어있다. 또한 당시 로마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달력의 이름으로 이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양력을 로마에 도입한 카이사르는 자기가 태어난 7월을 자신의 이름인 율리우스의 달의 명칭으로 했는데 바로 영어의 July이다. 또한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황제도 8월을 자신의 달로 부르게 해서 오늘날 영어로 8월이 Augustus가 되었다. III. 12달 명칭의 유래 로마 시대에는 1년을 지구가 태양을 도는 365일로 정하고 달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는 1년을 열 달로 했고, 폼필리우스 왕은 열 달 앞에다 두 달을 추가하여 열두 달로 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12달의 월별 명칭을 영어 표기로 보면 다음과 같다. 1월 January : 누마 폼필리우스가 추가한 달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야누스가 얼굴이 두 개인 것은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을 질서로 이끌어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뜻으로서 이 달을 첫 달로 지정했다고 한다. 2월 February : 누마가 추가한 두 번째 달은 '정화, 청결'을 뜻하는 라틴어 '페브루아(Februa)'에서 유래되었다. 3월 March: 로물루스가 만든 첫 달로 전쟁의 신인 Mars에게 바치는 달이란 라는 뜻이다.. 4월 April: 아프로디테(Aphrodite, Venus)에게 바치는 달이었다. '시작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아페레(Aperire)'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5월 May: 헤르메스의 어머니이자 유모라는 뜻을 지닌 마이아(Maia)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6월 June: 결혼의 신이자 주피터(제우스)의 아내인 '주노(Juno)'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7월 July: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줄리우스 시저)가 자신 의 이름을 붙여 만든 달이다. 8월 August: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율리우스력을 완성한 옥타비아누스가 위대하다는 뜻으로 붙인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9월 September, 10월 October, 11월 November, 12월 December: 라틴어에서 각각 7, 8, 9, 10을 뜻하는 셉템(septem), 옥토(octo), 노웸·노벰(novem), 그리고 10을 뜻하는 데켐(decem)에서 유래했으나 누마가 추가한 1,2월에 밀려 9, 10, 11, 12월이 되었다. IV. 결 어 이상에서 본대로 12달의 월별 이름은 주로 로마제국에서 제정된 태양력을 기준으로 된 것으로서 주로 신들과 왕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를 반 기독교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친 기독교적인 명칭으로도 볼 수는 없다. 이런 경우는 다음에 논한 요일의 명칭도 마찬가지다. 유래를 알고는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논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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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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