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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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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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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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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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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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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이현령비현령(4) - 가스라이팅 (gaslighting)
고신!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고신!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습니까! 고신!순교자의 정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노래하지만 지나가던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고신에 속한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당당하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고신!그래도 고신이 고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신!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고신! 고난도 슬픔도 그 이름 아래 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고신에는 각계각층에 많은 인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인재들이 많습니다. 우리 선배들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훈련받은 인물들이 아직도 곳곳에 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배들의 신앙과는 너무 멀어져 있어 다음 세대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인재들이 양산될지는 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위기의 고신이라지만 마지막 희망 하나가 있다면 그렇게 훈련받아 각계각층에서 묵묵하게 고신의 신앙을 지켜가는 인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상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문제는 그 인재들이 교단 내에서는 대부분 소위 정치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위기의 고신을 위하여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희생과 수고를 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성과 같은 절벽을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내 교회나 잘 섬기다가 가리라!”라는 푸념을 내놓게 됩니다. 교단 외부에 있는 인재들은 고신을 사랑하는 신앙과 정신이 소외되었다는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절박함으로 오히려 원한이 되고, 원성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고신이요, 고신 신앙이기에 고신이 문을 열고 불러만 준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신의 품으로 달려올 자들이 분명합니다.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를 위기라고 말들 하지만 어쩌면 이 위기가 진짜 위기인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이러한 위기가 있어 왔기에 오늘과 같은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는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신 내부에 있는 인재들과 고신 외부에 있는 인재들이 왜 이렇게 산화하여 떠돌고 있을까요? 세월이 가면 나이를 먹듯이 자연스러운 질서나 예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바른 기준과 질서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총회 산하 기관에 몸을 담고, 고신의 식구로서 고신의 교회와 기관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노라고 하는 청운의 꿈을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줄을 서야 되는지를 눈치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신의 기관에 몸을 담은 식구들은 이 눈치, 저 눈치, 이 계파, 저 계파, 이 진영, 저 진영, 이 집안, 저 집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낼 때 자연스럽게 진급을 하고 책임 있는 사명과 자리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위기를 직시하고 위기를 부르짖으면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고, 다 같이 헌신해서 위기를 돌파하자고 외치면 손해 보기 싫어하는 동료들도 외면할 뿐 아니라 집행부에서는 다루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러니 제일 잘하는 방법, 제일의 능력은 비위를 맞추고 손을 비비면 됩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보직과 사명을 맡기면서 “어느 계파에 속해 있느냐? 누구와 가깝느냐? 어느 진영 사람이냐?”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이해하기 좋게 최근의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을 고신대를 위해서 온갖 어려운 일 마다하지 않고 봉사한 이명호 장로의 일입니다. 이 장로는 고신대 기독교교육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1989년 고신대에 몸을 담아 35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2022년 6월 처장으로 보직을 받아 올해 2024년 12월에 퇴직(은퇴)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앞에 두고서 6개월 휴가(공로)를 주는데 이렇게 볼 때, 올해 2024년 6월 30일까지 3달만 더 근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장로는 3달도 채 남지 않은 4월 3일에 처장에서 해임되어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밀려(인사발령)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는 정작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이 장로는 한평생 고신대에 몸을 담았고, 고신의 장로로서 “기독교 대학으로 바르게 성장해 가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사람이 없어진다. 안타깝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장로는 현재 총장의 직계 후배입니다. 작년에 현 총장이 총장으로 선임된 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도와달라 끝까지 함께 가자”고 부탁을 했고 이 장로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총장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사람입니다. 고신의 장로 아들로 누구보다도 고신을 잘 알고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총장이 되고 나서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까? 겨우 몇 달 사이에 말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 총장으로서는 얼마나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후배가 아닙니까? 한평생의 일을 마무리하는 이 장로 역시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2달도 남지 않은 이 장로를 보직해임 시키고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과연 총장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총장의 평소 인품을 잘 아는 필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학교 구성원들은 총장은 허수아비요, 다른 사람이 실제 총장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학원 이사는 물론이요, 법인 사무실의 직원이 학교와 병원을 좌지우지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학교와 병원의 보직 인선에 총장이나 병원장의 의중보다는 외부의 입김이 더 크다고 교직원들은 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지만 고신과 고신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오늘까지의 악습이요,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관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떤 자세를 취할 것 같습니까? 학원 이사들은 위기라고 소리치며 교회의 호주머니를 노릴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산하 기관의 식구들이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행정을 집행하기 바랍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기관을 누가 이렇게 똥 칠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람으로 불렀으면 적어도 1-2년은 전권을 주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왜 사람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듣게 하고, 이런 식으로 손발을 자르고, 얼굴마담 노릇을 하게 합니까? 기준이 허물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법을 집행하는데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다 찬성하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총장을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법으로 초빙했어야 합니다. 억지로 총장을 불러오기 위하여 학원이사회와 총회를 운영하는 자들은 총회와 총대들을 속이고 기만한 결과가 이런 폐단을 만들었습니다. 불법적인 정관개정 고려학원 이사회는 지난 73회 총회에 고려학원 정관개정을 의뢰했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정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개인이라면 당회와 노회를 거치고, 법인이라면 법인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한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총회는 바로 그 안건을 접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73회 총회는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 정관개정 안건을 접수했고,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관개정 논의를 위한 임시이사회는 정작 총회를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2023년 연말에 열렸고, ‘사후 인준’이라는 명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총회 법을 따른 정당한 절차입니까? 총회는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안건을 접수, 논의, 개정했고, 고려학원 이사회는 총회와 교단을 기만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개정안으로 총장 공모는 이전에 하고, 총장 선출은 개정된 법으로 집행했습니다. 총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으로 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욕의 의도를 가진 불의한 자들이 총장의 발목을 잡은 결과입니다. 총장의 발목을 잡은 총회의 몇몇 실권자들이 고신의 미래요,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한 고신대와 복음병원을 세상보다 더 저질 기관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인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총회와 총대를 기만하고 속인 학원 이사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아니 총회는 이것이 사실일 경우 모든 이사들을 반드시 소환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결정하게 된 총회 임원회도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나는 몰랐다, 모른다”고 하는 총대들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든지 자신이 없으면 이번 총회 총대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고신을 위해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은 고신의 총대들이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살전5: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상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지속하여 대상이 자신의 판단력이 매우 낮다고 스스로 믿게 만들어, 그가 행위자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세뇌의 일종입니다. 가해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교묘한 궤변, 날조, 선동, 정치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회 곳곳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실세들은 총회와 산하기관들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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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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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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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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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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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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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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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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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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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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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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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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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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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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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3) - 녹비왈자(鹿皮曰字)
- “법은 아니라 해도” 총회 본회 석상에서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 총대원들이 다 동의하면 할 수 있다!”고 했던 총회장의 발언이 그다음 총회장의 입에서도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 총대원들이 다 동의하면 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하면 된다!”는 식으로 공회에서 공포가 된 이후로 총회 내 많은 결정들이 기준을 잃어버리고 좌충우돌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경북의 모 노회에서는 이단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어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교리적이고 본질적인 이단 문제를 계파 갈등으로 호도하여 전권위원회 보고를 받지 않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한 표 차이로 전권위원회의 보고가 받아졌습니다. 당시 모 노회원은 이 상황을 놓고 “한 표는 하나님께서 던지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작 더 한심한 것은 전권위원회 보고를 받아놓고서도 재판국 구성에 대해서 법제위에 질의 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법에 대한 기준을 무시하는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교회 헌법은 그 기초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원 중 어느 누구라도 법에 근거하여 “법이요!”하면 모두가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성경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이래서 공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무둥치가 조금만 흔들려도 높이 뻗어 있는 나뭇가지는 미친 듯이 흔들립니다. 제발 총회가 매관매직의 행태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거나 사욕이나 진영논리에 빠져 땜빵 식으로 결정을 하면 산하 노회를 물론이요, 개 교회나 성도들에게서는 미친 듯이 흔들림이 작용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과 몇 년 전 총회를 사회하는 총회장이 생각 없이 한 말이 오늘날 고신총회의 전반적인 불법과 혼란을 야기하는 단초가 되고 있음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기를 바랍니다. 작금의 이런 불법적이요 비상식적인 난국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첫 단추는 총회 선거관리위원회가 올바르게 선거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현재 고신총회의 선거법이 법대로 집행되지 않음으로써 선출되는 사람들을 불법자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 추천일로부터 총회 선거 완료 시까지 선거와 관련된 다음의 행위는 할 수 없다.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 3) 다른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하여 회유, 매수하거나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회 선거 일정에 따라 노회가 추천하기 전까지는 위의 행위를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제기되니 규제보완을 내놓았습니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선거조례 제15조의 불법선거운동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한다. 1. 접대 :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선거당사자나 관계자로부터 식사비나 교통비를 수수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2. 기부행위 : 당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당해 연도에는 출마자가 위와 같은 행위를 했을 때는 불법선거운동이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럼 현재 부총회장으로 출마의 뜻을 비치고 움직이고 있는 분들은 불법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선관위는 해 노회나 당회에 통보하여 시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항에 “집단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8번 집단 적으로 특정 후보자 지지를 결의할 경우에는 관계자를 해당 노회에 통보하여 시벌토록 하며 ...... 그렇다면 당연히 선관위는 해 노회에 통보하여 시벌하도록 해야 합니다. 최소한 세상 선거법에서 규정하는 것보다는 엄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2월 23일 오전 11시 하늘샘교회당에서 있었던 “고신교단을 사랑하는 목사 장로 기도회”는 부총회장 출마를 위한 J 목사의 출정식이었습니다. 3월 25일 “한국기독신문”에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일 ... ?”이라는 기사와 함께 J 후보를 부총회장 후보로 지지하는 “48명의 집단결의 성명서”가 보도되었습니다. 어제 4월 4일 오후 4시 천안 신대원 내 고신영성원에서 있었던 “고신총회 미래를 위한 기도회” 역시 부총회장 출마로 이미 행보를 보인 C 목사의 출정식입니다. 이 출정식 역시 집단결의입니다. “집단 결의”가 신문 지상에 광고로 올라왔으니 선관위가 법대로 한다면, 어쩔 수 없어서라도 부정선거요, 불법이라고 명시할 것 같은데 과연 이번에는 제대로 할지 의문입니다. 선관위가 “집단 결의”를 “불법으로 규정”을 한다고 해도 그다음 예상 시나리오가 눈에 훤하게 보입니다. 먼저는 그 사실에 대해 고발자가 있으면 조치할 것이라 할 것이고, 고발자가 있으면 정식으로 고발 서류를 제출하라고 할 것입니다. 고발자가 나오기도 어렵지만 고발자가 나와 고발장을 제출한다고 해도, 전례를 볼 때 총회 임원회에 올리고 총회 임원회는 진의를 알아본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서류가 선관위로, 총회 임원회로, 재판국으로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법제위로 문구 해석을 요청하는 수순으로 끝을 낼 것 같습니다. 본인은 끝까지 법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만약에 선관위에서 집단결의를 하는 기도회에 대한 조치가 없고,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도 두 번이나 낙마한 사람으로서 대대적인 출정식을 위한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회”를 하고자 합니다. “법은 아니라 해도” 전례를 볼 때, 선관위도 그 길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예상은 항상 잘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만은 꼭 아니길 바랍니다. 녹비왈자(鹿皮曰字)란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사슴 가죽에 쓴 “가로 왈(曰)” 자를 위아래로 잡아당기면 “날 일(日)”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번만은 선관위가 녹비왈자(鹿皮曰字)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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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3) - 녹비왈자(鹿皮曰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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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2) - 양두구육(羊頭狗肉)
-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 추천일로부터 총회 선거 완료 시까지 선거와 관련된 다음의 행위는 할 수 없다.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회 선거 일정에 따라 노회가 추천하기 전까지는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 3) 다른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하여 회유, 매수하거나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뜻인지요? 만약에 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2023년에 고신포럼 주최로 기도회 한 것을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떤 법적 근거에 따라 기독교보에 글을 올려 부총회장으로 출마한 저와 함께 한 분들을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로 오해받게 해서 선거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결정이 되지 못하니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이름으로 올리는 묘수(?)까지 부려야 했던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또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결정과 선거관리위원회 <전체> 결정과의 차이는 무엇이며 법적인 권한의 차이는 무엇인지요? 임원회 독단적으로 사안을 결정할 <권한과 범위>는 선거관리위원회 규칙 어느 조항에 있는지요? 지난해 선거관리위원회의 기준에 따라 고신포럼에서 주최한 기도회가 기독교보에 경고가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면 이번 2월 23일 부산서부노회 모교회에서 있었던 “고신교단을 사랑하는 목사 장로 기도회(사실은 부총회장 출정식)”에 대해서는 왜 묵인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난번에 보완한 규정을 살펴봅시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선거조례 제15조의 불법선거운동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한다. 1. 접대 :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선거당사자나 관계자로부터 식사비나 교통비를 수수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2. 기부행위 : 당 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1번 접대는 노회 추천일 전까지는 해도 불법이 아니며, 2번 기부행위는 노회 추천일과 상관없이 당해 연도에 다 적용되는 것인지요? 지난해 선관위의 관례로 볼 때 제8조 규제보완은 당해 연도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부총회장으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분들의 행보는 이미 모두 불법입니다. 지난 경험으로 볼 때, 이것에 대한 질의를 공식적으로 해 본들 서류가 총회 임원회와 선관위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법제위원회에 문항 해석을 요구할 것이고, 올해 총회 마치고 나면 유야무야 되겠지요. 2024년 3월 25일 한국기독신문에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 일...?”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또 “고려신학대학원 43회 동기회 입장”이라는 광고가 올라왔습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항에 “집단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사에는 “43기를 대표하여 정00 목사를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거법에 저촉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입장문에 따르면 43회 동기회는 “2022년 2월 7일에 결의”했다고 하지만, 결의를 재확인하는 행위도 당 해 년도에 결의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법에 충실해야 할 선거관리위원회가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한다면 선거관리위원회는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인 ‘양두구육(羊頭狗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기준을 잘 세우고 공명정대하게 적용하여 고신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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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2) - 양두구육(羊頭狗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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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년제 폐지 – 본립도생(本立道生)(2)
- 지난 3월 18(월)-19(화)일에 있었던 제6회 고신포럼에서 총신대 서창원 교수와 오태균 교수를 모셔 정년제에 관한 연구발표를 들었습니다. 서창원 교수는 성경에 근거하여 정년제 폐지를 주장했고, 오태균 교수는 사회학적 접근으로 정년제 유지를 주장했습니다. 일전에 제가 소속된 부산서부노회에서는 성경을 기준으로 현재 교회 구성원들의 상황을 고려해 교회 전 직원과 직분자의 정년 연장을 총회에 상정한 적이 있습니다. 농어촌교회가 장로를 세우지 못해 폐 당회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도시에 있는 교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기준을 세워도 그 기준에 맞는 직분자를 세우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아 175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창25: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창 25장 전반부가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는데, 아브라함의 뒤를 잇는 이삭의 기록은 급하게 야곱에게로 전개되어버립니다. 25장 후반부는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는 것을 끝으로 에서가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리는 사건으로 넘깁니다. 그리고는 창 26장은 1절에 “아브라함 때에”라고 언급하면서 이삭의 행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고난의 삶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삭의 행전은 짤막하게 막을 내립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만 보아도 아브라함은 창 12장에서 부름을 받아 창 25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삭은 창 25장 중후반부에 등장하여 27장까지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은 이삭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야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창 28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야곱에 대한 기록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창 35장에서 야곱이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올 때 성경은 이삭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창35: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봤습니다. 이삭이 40세에 결혼을 하고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16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15년 동안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보았습니다. 장자의 축복 사건을 시작으로 야곱이 집을 나간 후 이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훗날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굳이 야곱의 나이가 130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47:8-9)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창41: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총리가 되어 풍년의 세월 7년을 끝내고 흉년의 세월이 시작된 후 약 2~3년 후 야곱은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이 130세일 때, 요셉은 39세였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90세쯤 요셉을 보았다고 하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쳐 나온 때가 적어도 70세 중후반의 나이였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살다가 147세에 죽습니다. (창47: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삭이 야곱을 60세에 낳았으니 야곱이 120세 되던 해 180세에 이삭은 죽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삭은 손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던 즈음에 총리가 된 줄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멈추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의 위대한 족장들을 언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을 따라 그 기한을 정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지만,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살아 있었지만, 야곱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을 볼 때도, 신약의 사도들과 전도자들,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속사도 시대의 교회 일군들, 감독들 및 종교 개혁자들, 청교도들, 및 20세기에 들어와서 1980년대 중반(합동은 1988년에 처음 정년제 시행)에 오기까지 성직자 정년제가 없었습니다. 정년 연장이냐? 정년 유지냐? 정년 폐지냐? 정년 축소냐? 과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나이가 그 기준이 되어선 안 됩니다.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르는 사역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장로교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노회가 목사를 세우고,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목사의 정년은 노회의 소관이 되어야 합니다. 노회에 “목사(목회) 상담센터” 혹은 “목사 사역 검진 위원회” 같은 기관을 구성해서 그 기관이 노회 산하에서 목사 상담과 각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정하고 연구해서 문제들을 안정화하고 각 그 교회의 성도들과 당회의 의견을 모아 교회의 존립을 최우선으로 하되 목사도 살리고 성도들도 살리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기적인 상담을 통해서 목회자의 심리와 정신적인 건강도 검사하고, 소명에 대한 열정도 확인하고, 그 목회자 본인의 의향도 고려하여, 각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에 맞춰 정년을 노회가 정할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하면 기본권은 물론이요, 목사에 대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후배들에게 계승해야 합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을 지키면 길이 보입니다. 은퇴 목사의 투표권은 기본권이라고 합니다. 이 기본권은 어디서 온 기본권입니까? 목사의 기본권을 유지함은 나이에 상관없이 여전히 목사로서 판단력과 리더십을 인정하는 총회 헌법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에 맞게 목회자의 정년제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또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퇴 목사의 기본권을 지키는 정도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정년제 자체를 폐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길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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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년제 폐지 – 본립도생(本立道生)(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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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지팡이
- 스틱은 뾰족해서 산이나 땅에서나 쓸 수 있고 지팡이는 끝이 넓고 접착력이 우수하여 의지가 될 수 있어 노인이나 장애인이 주로 사용한다. 특히 부부가 늙으면 지력이나 체력이 떨어져 지팡이와 같은 존재로 서로 의지하며 산다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왕이 장수한 노인에게 ‘청려장’이란 지팡이를 하사해 몸을 의지하여 오래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고 지금은 그것이 노인의 날에 대통령의 명의로 100세 노인에게 주어진다.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정장 외에 그에 어울리는 모자와 지팡이가 없으면 다 차려입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소화되어 필수 목록에서 빠졌지만 셜룩 홈즈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 해당 시대를 묘사한 작품을 보면 호신을 위해 사용한 것으로 지팡이는 꼭 필요했다. 유럽에서는 귀족 여성이 즐겨 사용한 시기도 있었는데 지팡이 안에 향수와 악세서리 등을 넣어 몸을 치장하며 실용적인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흰색 지팡이 역시 시각 장애인에게 가장 적합한 도구라 한다면 진정 지팡이는 그의 인생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는 신앙인에게는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모세의 손에 잡혀있는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지팡이를 잡으라고 했을 때 그것으로 이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의 지팡이는 정말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었다. 지팡이를 뻗어 땅을 치거나 던져도, 어떤 것을 가리켜도 지팡이가 각종 동물이 되기도 하고 번갯불을 불러오기도 했다. 또한 바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는 샘물이 되기도 했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바로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푯대를 향하기만 하면 분명 능력의 지팡이를 손에 잡을 수 있다. 현대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고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쉽게 일을 포기하려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안타깝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주께로 나아간다면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가 향하는 확고한 목표 지점이 하나님이면 그분께서 우리의 원하는 바를 100% 다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삶의 모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서 그 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진정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비록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전능자께서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다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많은 시간을 무심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진정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영혼이 없이 산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실체를 내 마음에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면 안 된다. 나의 인생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그리하면 엄청난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모세같이 사용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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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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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랑의 내용 (갈6:11-15)
- “팔불출”(八不出)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본래 뜻은 제 달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여덟 달만에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팔삭동”(八朔童)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온전하게 다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팔불용”(八不用), 혹은 “팔불취”(八不取)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팔불출”(八不出)이라고 하면 “좀 모자라는 사람”, “좀 어리석은 사람”, 혹은 “좀 덜된 사람”, “좀 덜 떨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팔불출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 둘째, 자기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 셋째, 자기 자식 자랑하는 사람, 넷째, 자기 집안이나 가문을 자랑하는 사람, 다섯째, 자기 형제를 자랑하는 사람, 여섯째, 어느 학교 누구누구 후배라고 자랑하는 사람, 일곱 번째,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 어디라고 우쭐대면서 자랑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여덟 가지가 아니고 왜 일곱 가지 뿐이냐는 데 대해서는 한 가지를 모자라게 해놓음으로써 역시 팔불출이게 했습니다. 팔불출의 내용을 보자면 오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다 팔불출들입니다. 왜냐하면 구지 마누라 자랑이나 자식 자랑이 아니더라도 일곱 가지 중에 한두 가지는 자기도 모르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누구나 다 팔불출들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소위 “자기 PR시대”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팔불출에 해당되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팔불출에 해당하는 그런 내용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 앞에 꼭 자랑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정말 자부심을 가지고 힘써서 자랑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주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갈6:13-14) 둘째는, 받은바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롬15:15-17) 셋째는, 주님의 교회를 자랑해야 합니다.(살전1:7-8) 이런 자랑이 많을수록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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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랑의 내용 (갈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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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4 :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차이점은?
- I. 서언(序言) 40년이 넘는 목회 생활과 일정 기간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한 필자이지만, 실제적인 표현에서는 혼동이 되는 말들이 너무 많다.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예배인가? 예식인가? 또 예배 형식을 갖춘 집회와 기도회는 예배인가 집회와 기도회인가? 이런 명제 앞에서도 때로는 구분이 쉽지는 않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를 분석하고 논하고자 한다. II.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용어분석 1. 예배(禮拜)란? : 일반적인 사전적 뜻은 ‘초월적 존재 앞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의식’이다.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거의 대부분 예배학자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했다. 또한 예배는 그 대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찬양 예배 등이다. 2. 예식(禮式)이란: 사전적인 뜻은 ‘예법에 의해 행해지는 식’으로 결혼식, 장례식 등을 예를 들고 있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많은 길흉사에서 하나님께 예배형식을 갖추는 것’이라 했다. 이는 기존 예배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라 본다면, 예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에서 하나님께 예배 형식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양은 같은듯하나 대상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예식, 장례예식, 각종 임직식, 첫돌, 회갑, 입학, 졸업, 취업, 개업, 첫돌예배 등 인간 중심으로 발생하는 많은 예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3. 집회(集會)란? : 사전적인 뜻은 ‘특정한 공동목표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모임’이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교인들의 믿음의 증진을 위하여 모이는 일체의 모임’등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여러 유형의 부흥회, 수련회 등으로 사람이 중심이다. 4.기도회(祈禱會)란? : 먼저 祈禱의 일반적인 뜻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비는 행위’를 말한다. 祈禱會란 이런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다. 우리 개신교적 의미로도 일반적인 뜻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모임’을 말한다. 전통적인 경우는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이 있다. III.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에서 정리한 표준예식서에 의하면, 이 4가지 용어는 각각 그 대상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해야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일이 중심인 예식과는 형식은 비슷하지만,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도회와 집회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두 경우도 예배 형식은 있지만, 그 성격이 인간의 일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인 성격에 따라 기도회와 집회라고 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배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도 이 4가지 유형은 모두 성격과 목적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현대 교회의 예배들이 위의 이런 4가지 유형들이 혼합되어 저마다의 본질이 퇴색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정장복 교수와 같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이면서 국문학자인 故 나체운 교수는 4가지 유형의 행위들이 모두 성격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라는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어 구분하는 것은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모두 다 그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어떤 용어든지 구태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론과 제언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어나 원어로 말하면 간단한 것을 우리는 뜻글자인 한문과 변화무쌍한 소리 글자인 한글을 사용하다보니 통일된 용어 사용이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같은 교단의 교수들과 표준 예식서 마저도 견해가 일치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제안을 해본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지만, 1부는 예배, 2부는 그 성격과 목적에 맞춘 순서를 진행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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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4 :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차이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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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구원이 은혜인 이유
-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오랫동안 표류한 선박이 드넓은 브라질의 아마존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선원들은 오랜 선상생활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여객선 한 척이 지나갔습니다. 선원들은 여객선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좀 주시오. 우리는 갈증 때문에 죽어가고 있소.” 그러자 그 여객선의 승객들이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맑은 물이 흐르는 강 한복판에 와 있소. 그대들이 바라보는 푸른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아마존의 강물이오. 물통을 내려 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되오.” 곧 고난주간이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구원의 맑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은 믿음의 물통을 내려서 그 구원의 강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물통을 내리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구원의 강물인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전도자가 전도대상자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자 그는 “저는 살면서 공짜로 무엇을 얻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그 값을 지불했지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도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찬란한 태양 빛을 늘 받으면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매일 마시는 공기의 값을 지불했습니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물음에 그 사람은 “그것은 너무 비싼 것이라서 값을 지불할 수 없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전도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비싸서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것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햇빛과 공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내어 주신 그 사랑은 너무 비싸서 오직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박물관을 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름난 화가들의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유명한 작품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 앞에는 그 그림들의 판매 가격이 각각 붙어 있었습니다. 가령 르느와르의 “독서하는 소녀”는 칠백만 달러 정도를 호가하며, 렘브란트의 그림은 천 이백만달러 내외였고, 루벤스라는 화가의 그림은 천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그 앞으로 가보니 ‘priceles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작품들은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진짜 좋은 작품은 값이 없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지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공짜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가격을 지불하셨겠습니까? 독자 여러분의 자녀들을 얼마의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자녀들의 가격을 정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죠! 정말 소중한 것은 값이 없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그 모진 고통과 수치를 다 받으시며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즉 그 어떤 가치로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공짜라는 말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공짜가 아니고 그 은혜이니 우리는 우리 평생 그 은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음을 얻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아니 나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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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구원이 은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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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부으소서,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 포도원교회가 창립 44주년이 되었다. 부산 변두리 구포에서 100여평의 작은 교회에서 40년만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1만 가정, 3만 성도, 10만 선교, 100만 전파를 코로나 때 이루었고 덕천성전, 화명성전, 드림센터, 양산 선교센터 4개의 성전을 갖추었다. 교단과 부산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 찬양, 영광, 존귀를 주님께 돌려드린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고 주께서 하셨다. 시23편을 통하여 다윗의 노래, 다윗의 축복을 볼 수 있다. 부으소서 큰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고, 작은 복은 사람이 오두방정 떨어서 챙길 따름이다(약1:17). 말세에 고통의 때가 오지만 주께서 남종과 여종들에게 물 쏟듯이 성령을 부어주신다(욜2:28~29).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없다.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된다(행1:8). 한계를 뛰어 넘고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면 주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산과 골짜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신11:8~14).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 승승장구 했고 범죄시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울면서 회개했다. 채우소서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듯이(갈4:4) 성도는 서러울 때, 가난한 때, 고통의 때를 채워야 된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지나야 농사가 된다. 눈물 병을 채울 때에(시56:8) 응답이 이루어진다.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아랫물이 윗물이 된다.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다. 은혜의 잔을 채우소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의 물을 아귀까지 채울 때 기적이 일어났다(요2:7).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고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럽다. 회개하며 더러운 것을 토설하고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으로 채워야 된다. 넘쳐흐르게 하소서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마침내 가득 채운 후 넘쳐서 흘러간다. 무엇이든지 서두르면 사고 나고 조급하면 실수하고 성급하면 후회한다. 억지로 안 된다. 눈물이 고이고 기도가 쌓여서 마침내 내 잔이 넘쳐야 된다. 임계점을 넘어 서야 물이 끓는다. 샘물은 막힘없이 중단 없이 멈춤 없이 퐁퐁 솟아나서 넘쳐흐른다. 역사는 민심이라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출렁이는지를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주께 받은 은혜를 사해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같이 흘려보내라. 축복의 통로가 되라. 법(法)은 물 흐르듯이 가는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어 주시고 흔들어 넘치게 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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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부으소서,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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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세계관과 신앙교육
- 오늘날 우리 모두는 학교 교육은 물론, 심지어는 교회의 신앙교육에 있어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교실의 위기와 학교교육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이제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도 않을 정도다. 이러한 시점에서 언약의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더 개혁주의 관점에서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더 음미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여러 가지 말들로 개혁주의 교육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개혁주의 세계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도교회의 영역에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섭리해 나가시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롬11:36). 개혁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를 고백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 실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구속 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full-time)의 왕국 봉사를 하도록 요청하신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표현과 같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This is mine)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일 평방 인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혁주의 원리는 교회의 신앙 교육뿐 만 아니라, 가정 교육, 학교 교육, 그리고 사회 교육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권 하에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의 신앙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로 하여금 상업, 정치, 과학, 예술, 의학, 연극 영화, 음악, 저널리즘, 그리고 기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의 왕국 봉사자들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신앙적 기초를 제공해 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포괄적이며 보편적,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창조의 성경적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타락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 세계의 한 구석도 빠짐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앨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표현대로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강조하는 신앙 교육의 한 기본 원리는 한편으로는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우주의 구조 속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 신비로움, 곧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로 하여금 창조적 질서에 순응하고 사회와 문화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규범을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 속에서 문화 변혁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갈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되 단순히 분리된 조각들로 가르치거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해답들을 성경에서 찾도록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개혁주의 교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개혁주의의 위대한 원칙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창조 세계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주는 성경의 역할, 비유컨대 ‘광부의 전등’과 같은 성경의 역할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교육은 인간 타락의 영향이 철저하며 창조 세계의 전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교육한다. 그러나 동시에 죄는 창조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도 아니며, 창조와 일치하는 것도 아님을 가르친다. 요컨대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의 의미를 분명히 숙지하도록 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이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주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육의 한 중요한 특징이다. 개혁주의 교육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창조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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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세계관과 신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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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하 원장] ‘조력존엄사 법률안’ 폐기를 앞두고 안락사와 조력존엄사를 돌아보기
- I. 21대 국회와 ‘조력 존엄사’ 법률안 21대 국회 회기 중인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이 일명 '조력 존엄사 법안' 을 대표 발의했다. 국회의원 12명이 함께 서명한 이 법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차 례 토론이 되었지만 그 이후 진전이 없이 법사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다. 이 법안은 21 대 국회가 폐회하는 5월 말에 자동으로 폐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20세기 후반기에 지구촌에서는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불치의 병으로 시달리는 자들이 원할 경우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과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2000년에 마침내 네덜란드가 이것을 허용하는 소위 안락사 법을 제정했고 2002년 4월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북미의 캐나다와 미국의 여러 주들이 시차를 두고 법 제정과 시행에 동참했다. 이 법은 지난 20여 년 간 지구촌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지만 지금도 안락사는 여전히 국제적 뉴스로 등장하곤 한다. 한 달 전인 2월 11일에도 네덜란드의 전직 총리 판 아흐트(Dries von Agt)가 동갑내기 부인과 함께 동반 존엄사를 택해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한국에서도 제법 큰 뉴스거리가 되었는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는 존엄사에 관련된 이런 저런 사건, 존엄사 관련 시사 프로그램 방영, 존엄사 문제를 짚어보는 영화가 개봉되면서 다시금 사회적 조명을 받은 바 있다. 현재 고령사회이고 내년이면 초고령사회가 되는 대한민국은 앞으로 안락사에 관련된 논의와 법제화 요구는 더욱 증가할 것임은 능히 예측되는 상황이다. 통계청은 2023년 12월 2022년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79.9세, 여자가 85.6세라고 발표했다. 불의의 사고나 불치의 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한국인은 평균 83세 정도는 사는 셈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80에 가까우면 대개 쇠약하고 병들고 고생하기 일쑤고 그러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점에서는 이젠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30년 통계를 보면, 한국인들은 4명 가운데 3명이 병원에서 죽는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본인이 원한다면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강해질 것이 능히 예측된다. 그리 고 이런 여론을 힘입어 22대 국회에서도 적극적인 안락사나 조력존엄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교회는 안락사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를 확립하여 성도들에게도 가르치고 또 사회적 대응을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II. 안락사/존엄사 그리고 조력존엄사 A. 안락사/존엄사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는 좋은(eu) + 죽음(thanatos), 즉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사회가 허용한다는 것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의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법으로 보장한다는 것은 회복이 불가역적 상태에서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연장 하지 않고 편안히 일찍 죽음을 맞게 해 줄 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안락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환자 본인 의지 여부에 따라 자원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둘째는 의사의 의료 행위 내용과 정도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눈다. 현재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에서도 대부분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소수의 국가만 적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한다. 서구의 국가들이 먼저 이 법을 시행했고 아시아에서는 호주가 처음으로 이 법을 만들어 시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작년 2023년 1월에 호주는 ‘자원적 안락사’도 허용하는 법을 발효시켰다. 그 동안 남호주 주가 이 법을 거부하다가 뒤 늦게 허용 했는데, 남호주 주가 자원적 안락사 법을 발효시킨지 2개월 만에 30여 명의 주민이 이것을 신청했고 이것이 일제히 지구촌에 큰 화제로 보도되기도 했다. B. 조력존엄사/조력자살 우리 언론에서는 “자원적 안락사”라고 보도했지만 호주에서 사용한 정확한 명칭은 ‘voluntary assisted dying’이다. 직역하면 ‘자원적 조력 사망’이다. 도움을 받아 사망하는 것으로 유럽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는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의사 조력 자살”(phlysician-assisted suicide) 제도이다. 호주는 이것을 ‘자원적 조력 사망’이라는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만 내용은 서구의 ‘의사조력 자살법’과 동일하다. 그런데 2022년 한국에서도 국회의원 안규백 의원은 이와 유사한 내용을 지닌 법안을 발의했다. 발의된 법률안의 명칭은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인데, 안 의원은 이것을 줄여서 ‘조력 존엄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서구의 ‘의사 조력 자살’이나 호주의 ‘자원적 조력 사망’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C. 존엄사와 조력존엄사의 차이 그럼 안락사/존엄사와 의사조력자살 혹은 자원적 조력 사망 혹은 조력 존엄사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전자는 의사나 의료인이 환자의 생명을 끊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하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 여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의사나 의료인은 약물을 몸에 주입시키는 수단과 장치를 제공하지만 밸브를 내림으로 약물이 본인의 몸에 주입되게 하는 행동은 환자 본인이 하고 이어 곧 사망하는 것이다. III. 한국의 연명의료 결정법(2016) 그리고 일부 개정안(2022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안락사 법과 유사한 소위 ‘연명의료 결정법’이 제정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2022년에는 이 법이 허용하는 것을 조금 더 넘어 의사의 도움을 받지만 본인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게 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조력 존업사법이 연명의료결정법의 개정안의 형식으로 발의되었다. A.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연령의료결정법 연명의료 결정법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2009년에 의료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 된 할머니의 가족들이 세브란스 병원에게 할머니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 가족의 요청을 거부하자 가족들은 세브란스 병원을 대상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마침내 법원은 병원이 환자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소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으로 불려지는 이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는 정부가 주도하여 사회의 각계의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4-5년 동안 지속적으로 소 위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마침내 합의를 도출하여 안을 만들었고 그것이 2016년에 마침내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긴 이름의 법은 흔히 줄인 말 인 ‘연명의료결정법’이라 불리우는데 2018년부터 효력이 발생하여 현재까지 시행되어 오고 있다. 이 연명의료결정법 내용의 핵심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자기 뜻을 밝힌 경우, 혹은 대리인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여 밝힌 경우, 그에 따라 연명의료행위 즉 심폐소생술, 항암제 투약 등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적극적 의료행위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 '조력존엄사법' 그런데 언급한 바 있듯이 현재 이 법의 일부를 개정하려는 법안인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에 의해 일명 ‘조력존엄사법’으로 발의되어 있는데, 이 법 이 이전 법과 다른 점은 첫째 대상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서부터 ‘말기환자’에 게로 확대되어 소위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하고, 둘째 의사의 도움으로 환자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법안은 “말기 환자(末期患者)”를 이렇게 정의했다: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 그런데 이 법안의 특징과 핵심은 바로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의사가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기를 환자의 몸에 꽂아 두면 환자 본인이 밸브를 돌리거나 버튼을 눌러 약물이 자신의 몸에 주입되게 하여 자신이 죽는 것이다. 언급한대로 서구의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의 일부 국가들은 이를 허용 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스위스는 외국인들에게도 이것을 허용한다. 안규백 의원은 이 법안을 발의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사회적 여론이다. 그는 한국 성인의 약 80%가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을 찬성한다는 통계를 근거로 하여 국민의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국민의 기본권인 자기 결정권을 생명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까지도 확대하여 증진시켜야 한다고 것이다. 그는 참기 힘든 고통가운데 있는 말기환자가 고통을 피하고 일찍 죽기를 원하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히면 사회는 그 뜻을 존중하고 자기절정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 다는 것이다. IV. 신학적 검토 자신의 생명과 삶의 종결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증진시키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법률안에 대해 신학적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 성경은 하나님 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즉 사람의 생명의 주인은 본인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고 생명의 위임자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의 욥기 서에 나오는 욥은 졸지에 자녀들이 죽고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1:21)라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자녀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또 욥은 12장 10절에서는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14장 4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사람의 수명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고백했다. “(주께서) 그 (사람)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욥14:5).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날 수가 차면 즉 그의 수명이 다하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고 욥은 말한 것 이다. 전도서 3장 1-2절에서도 솔로몬 왕은 이와 유사한 진술을 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3:1-2). 솔로몬 왕이 이 말은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내용은 욥의 고백과 동일하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모두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정하신 바에 따르는 것이지 사람 개인이 자의적으로 결정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이 말한다. 이런 성경적 인식을 갖는다면 사람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기에 마땅히 생명 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에 따라 원하지 않는 고통스런 생명을 연 장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조력존업사 법안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국성인의 80% 이상이 이 법안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시각에 벗어나는 이 법안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고통 가운데 있는 말기과정에 있는 환자가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하여 빨리 죽게 해 주어야 한다는 이 조력존엄사 법이 통과되면 앞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약화되는 결과를 넣게 된다. 물론 이 법안은 비록 “육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환자들에 한해서”라는 적용한다는, 단서를 달아 놓았지만, 일단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가면서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 고통으로 범위가 확대되어 가게 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서는 2002년 이 법이 시행되고 난 뒤 2017년도 한 해 동안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로 6,585명이 사망 했는데, 그 중에서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83명이나 포함되었다. 본래 안락사 제도는 존엄한 죽음을 위해 만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 제도는 좀 더 쉽 게 죽게 만드는 법이 되어 도리어 인명경시의 풍조를 낳게 되는 악효과를 낳게 될 것 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V.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대응 A. 고통의 최소화와 아닌 돌봄의 최대화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말기 상태에 있는 부모나 가족의 보면, 자녀들과 가족들은 저렇게 고통 받으며 연명하는 것보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라 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은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 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아울러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있고 또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부모님을 보고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환자를 일찍 죽게 함으로 그 고통을 종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소관 영역에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오로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 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최대한으로 돌보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통의 최소화가 아니라 돌봄의 최대화’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인생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임을 아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인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또는 부모님이 병상에서 고통을 겪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더 의지하고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부모님이 그 기간을 주와 함께 보내게 되기를 더 간절히 기도하고 돌보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이 고통의 문제는 비록 나의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이가 병상에서 힘들더라도 주의 손을 붙잡고 고통 없는 영원한 곳을 소망하면서 그 기간을 끝까지 소망으로 인내하며 나가도록 보살피고 기도해야 한다. B. 호스피스를 통한 고통완화와 편안한 임종 맞기 그러면 이런 돌봄과 기도 외에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그것은 환자를 완화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호스피스 병원에 이전하여 그곳에서 전인적인 돌봄을 받으면서 남은 기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호스피스 병원은 통증완화를 위한 최적화된 의료 시설과 전문 지식을 의술을 갖춘 훈련된 의사와 간호사들이 말기 환자들에게 전문적인 의료와 아울러 전인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병원이다. 성도들은 우리 사회가 조력존엄사를 제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설립하는 것을 통해 고통을 줄여주고 말기를 보낼 수 있도록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도 지난 정부 때인 2019년에 호스피스 서비스를 확대하는 내용의 1차 호스피스·연명 의료 종합계획(2019~2023년)을 만들어 발표한 바 있다. 2019년에는 호스피스를 원하는 환자 10명 가운데 2명 정도만이 호스피스에 입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적잖은 병원과 의료기관들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호스피스 시설을 짓고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호스피스 병원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다가 사망하는 환자가 많다. 노인복지 차원에서도 나라는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세워 운영하도록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호스피스 팀이 환자의 집을 방문하는 가 정형 호스피스 제도가 202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이 제도도 점점 확대해 가도록 그리스도인 법조인들과 위정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VI. 나가면서: 이제 곧 폐기될 소위 조력존엄사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사 조력 자살’ 법으로 이 법이 폐기되는 것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22대 23대 국회에서 이런 법은 계속 발의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우리 사회가 반기독교적 가치와 반생명적 제도가 인권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준비하고 필요하면 함께 힘을 모아 효과적으로 대응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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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하 원장] ‘조력존엄사 법률안’ 폐기를 앞두고 안락사와 조력존엄사를 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