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칼럼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
[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
[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김문훈 목사] 복 있는 사람의 사가지
복 있는 사람,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이 다르다. 특징이 있고 조건이 남다르고 DNA가 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 네 가지(사가지)가 있다. 1. 복있는 사람은 신언서판의 끝인 지혜가 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중에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니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빌어먹지 않는다. 사울 왕의 길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라서 지혜로워서 선택과 집중을 잘한다. 실력이 없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용서가 안된다. 몸 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고 필력이 뛰어나 표현력이 좋고 판단력이 남 다르다. 2. 복있는 사람은 위치 선정을 잘 하므로 자기 환경을 아름답게 꾸며서 좋은 생태계를 조성한다. 사람은 환경의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 좋은땅, 옥토운동을 하여 좋은 사람들,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마태효과를 이룬다. 3.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아름다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거리유지, 유유상종, 통친합락, 친구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닮아가고 연합한다. 부정적인 면으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니 말기찬섬을 통하여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뿌리를 박으니 공급처가 마르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해서 기가 빨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4. 복 있는 사람은 결국, 결과가 좋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는다. 농사는 사시사철 모두가 중요하다. 봄철에 요즘처럼 이상기온으로 꽃이 피지 못하면 가을농사는 틀렸다. 여름철 땡볕을 견디고 추수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가 익어야 된다. 농사의 결과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산성이 있고 가성비가 있고 배가 되고 번식하여 증거와 열매가 있어야 된다. 복 있는 사람은 이파리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늘 푸른 상록의 복의 받는다.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진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된다. 나중 축복, 말년의 축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결국 인복, 다복, 행복, 흥복을 누리게 된다. 복 있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도 행복해지고 교회도 부흥 되고 사회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실시간 칼럼 기사
-
-
[오성한 목사] 처방약을 잘 챙겨 먹기
-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하셨다. 같은 말을 4번 반복하는 것 같다. “주의해라” “귀를 기울이라”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마음속에 지키라”고 4번이나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서 반복하신다.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떼지 말고,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환자가 약을 먹을 때 의사가 처방한 대로 약을 먹어야한다. 약을 함부로 마음대로 먹어선 안 된다. 의사가 지시한 대로 먹어야 한다. “이 약은 식전에 먹어야지 식후에 먹으면 효과가 없습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먹는가? 밥 먹기 전에 꼭 챙겨 먹는다. 혈압 약은 아침에 먹어야 한다고 하면 아침에 꼭 챙겨 먹는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먹는다. 성경말씀도 그렇다. 시키는 대로 해야 효과가 있다. “내 말은 온 육체에 약(처방약, 치료약)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육체의 처방약이다. 우리가 병들어 아프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는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처방약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프기 전에 미리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데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건강과 치유를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건강의 길이다. 말씀의 앱(application)을 깔아야 한다. 동시에 그전 앱(app)은 삭제해야 한다. 좋은 말씀을 받을 때마다 마귀와 우리에게 깔려 있던 예전의 앱은 그 시대에만 가능한 말씀이라고 속삭인다. “나의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라…”는 말씀은 그 시대에만 속한 말씀이 절대 아니다. 감사하게도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속한 것이다. 나는 요즘 푹 빠져 암송하며 묵상하며 되새기는 말씀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는 말씀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말씀이 입에서 흘러나오곤 한다. 어떻게 약을 먹을 것인가? 의사가 처방한 방법대로 약을 먹는다. 식전, 식후 등을 지켜야 최고 효과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처방약을 복용하는데 지침을 주신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방하신다. “내 말은 그것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며, 내 말은 모든 육체의 건강이 됨이라”(잠4:20-22)라고 말씀하신다. 의사에게 간다고 해도 서랍 속에 넣어 놓고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 의사에게 가서 바른 처방을 받았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고 더 악화 될 수 있다. 약이 약병 속에 있다고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당신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약을 당신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둔다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당신 안에 집어넣어야만 역사한다!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은 그의 말씀이다. 말씀의 약을 먹는 방법이 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여야 한다. 이때 묵상은 마음에서부터 믿음으로 터져 나오는 읊조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반복하여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반복의 기름 부음이 넘쳐난다. 나는 잠시 검도 운동을 한 적이 있다. 검도는 3가지를 주로 연습한다. 머리, 손목, 허리를 반복해서 치는 연습이다. 10급부터 1급까지 올라가면 1단이 된다. 내가 2급이 되었을 때 일이다. 2단이었던 검도 선배와 대련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검도는 머리와 손목과 허리 세 군데만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치면 반칙이다. 반드시 머리를 공격할 때는 “머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떼려야 한다. 검도의 죽도는 둔탁하게 생겼다. 크기도 크기 때문에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덤도 2단인 검도 선배가 “머리!”하며 공격을 하기에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칼이 머리 위에 와 있는 것이었다. 허리 공격은 동작이 크기 때문에 막기가 쉽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도 오산이었다. “허리!”라는 소리와 함께 벌써 칼은 허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반복의 힘이었다. 반복으로 연습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모른다.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주장하는 기름 부음은 엄청나다. 나는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기로 했다. 첫째, “내 말에 주의해야”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 처방약을 잘 챙겨 먹기
-
-
[박봉석 목사] 포기하지 않을 이유
- 옛날 우물을 아주 잘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파다가 그만둔 곳에서도 그는 곧잘 우물을 파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신기하게 여겼고,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우물을 잘 팝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우물을 잘 파는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이 나올만한 곳을 골라서 파다가 안 나오면 포기하지만, 나는 아무 곳이라도 물이 나올 때까지 파기 때문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금광 개발시대에 전 재산을 팔아서 광산을 산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부들을 동원해서 수개월 동안 그 광산을 파보았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진 돈만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낙심하여 황금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 광산을 다른 사람에게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광산을 산 새 주인이 다른 인부들과 함께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단지 15cm만 더 팠을 뿐이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전의 광부들이 15cm만 더 팠더라면 황금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앞에서 그만 포기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빨리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욕심을 포기해야 하고 또 복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기에 빨리 포기하지 아니하면 그 욕심과 복수는 엄청난 파국의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금하신 것은 가능하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내 신앙을 지키고 내 삶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 또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명하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은 포기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신 선한 일은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고 꾸준히 그 선한 일을 행하면 때가 되면 그것의 열매를 얻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혹시 지금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명하신 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날 때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시작을 하나님이 하게 하셨으니 기도의 마침도 하나님이 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의 주권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를 하게 하시는 분도, 가장 좋은 응답을 가장 좋은 때에 헤아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중단 없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큰일을 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중단 없이,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날 때까지는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더 강하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바로 그 기도의 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기도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이 보호를 받고, 이 나라와 한국 교회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또한 포기하지 않는 신앙으로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
[박봉석 목사] 포기하지 않을 이유
-
-
[오태열 목사] 참 좋은 친구
- 몇 년 전 부산을 배경으로 한 “친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친구에는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가 있다. 청소년 비행 이론 중에 ‘학습이론’이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같이 나쁜 친구를 통해 비행이 학습되어 진다는 이론이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삶의 행운이요 축복이다. 얼마 전 세계적 부호인 W. Buffert(1930-)의 일화가 매체에 보도되었다. 경제 전문지 포춘이 주최한 “여성과 일”의 주제 강연에서 한 여대생이 워런 버핏에게 성공의 정의를 물었다. 버핏은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란 원하는 것을 많이 얻는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당신이 사랑해 줬으면 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 주면 당신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부를 다 얻을 수 있고 당신 이름의 빌딩들을 소유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Buffert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를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 폴란드계 유대인 벨라 아이젠버그란 여성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워렌 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매우 더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질문하기를 저 사람은 나를 숨겨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나이가 70이나 80이 되었을 때 주위에 당신을 숨겨줄 사람이 많다면 성공한 거예요. 반대로 당신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돈이 얼마나 많든 당신은 성공한 것이 아니에요 하더란다. 친구는 동문이나 나이가 비슷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같으면 가능하다. 워런 버핀은 B. Gates가 자기보다 25살이 적어도 그를 친구라 하였다. 성화 가운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도하는 손”이 있다. 이 작품은 1508년에 그린 A. Durer의 대표작으로 현재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뒤르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진 작품으로 그림 공부에 뜻을 두었지만, 너무 가난했던 뒤러는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친구 한스와 함께 도시로 상경한다. 둘 다 돈이 없어 꿈을 이룰 수가 없게 되자 둘은 약속하기를 먼저 한스가 노동을 해서 뒤르를 뒷바라지하고 후에 뒤르가 한스를 뒷바라지하기로 하였다. 뒤르가 성공하자,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스가 일하는 식당을 찾아갔다. 그때 친구 한스는 기도 중이었는데 “하나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굳어져 더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습니다. 내 친구 뒤러를 화가로 성공하게 해주옵소서”라는 기도의 소리를 듣게 된다. 뒤르는 자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뭉클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끄집어내어 친구 한스의 기도하는 손을 종이 위에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린 그림이 “기도하는 손”이다. 이 그림으로 뒤르는 유명세를 타게 된다. 후에 뒤르는 이 상황을 회상하며 말하기를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며, 기도하는 자가 가장 큰 자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친구는 어떤 의미인가? 친구란 국어사전에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 이해타산으로 사귀는 친구가 아닌 순수한 사귐”이라 정의하고 있다. 유인진 씨가 쓴 “지란지교를 꿈꾸며”(지란지교란 지초와 난초의 사귐이란 뜻으로 높고 맑은 사귐을 이르는 말)라는 수필에서 친구를 잘 나타낸 글이 있다. 사람이 자기 아내나 자기 남편, 형제나 자녀와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할 수 있으랴. 영원히 없어도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남성이어도 좋다. 나이가 나보다 많아도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고 깊고 신선하며 친구와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렇다, 소중한 친구는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태열 목사] 참 좋은 친구
-
-
[신재철 목사] 월세가 아까운데
- “목사가 나타났다!” 어느 동네, 개척교회 목사님이 길을 걸었다. 거리에 있던 상가 주인들이 속닥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광경이 좀 익숙한데. 맞다! 밤에 자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불을 켰더니 급하게 숨어버리는 바퀴벌레? 미안한 표현이지만 딱 그 모습이다. 목사님이 나타나자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목사님은 그런 능력의 종이었다. 홍해 앞에 있던 그 백성처럼 내게 이 경험은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하면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개척을 준비하며 가장 큰 고민이다. 어느 동네에서 목격했던 한 목사님의 모습이 내게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지역 주민과 접촉이 있어야 한다. 동네에 교회가 유익해야 한다.’ 내 깊은 고민을 듣던 스승님이 한 마디 던지셨다. “만화 어떠니?” 철학박사요, 여러 권의 책을 내신 분이 내게 ‘만화’를 권하셨다. 역시 스승님은 내 수준을 정확히 보셨다. 지역마다 좋은 인문학 서적으로 채워진 작은 도서관이 많다. 하지만 생각만큼 사람들 방문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중들에게 인문학의 벽은 여전히 높았던 것이다. ‘그래, 어차피 나가는 월세. 만화방 만들어서 동네 사랑방이 되어보자.’ 예배당을 순수하게 종교 목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얼마나 될까? 특히 개척교회는 더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얼마를 사용하든 월세는 나간다. 몇 명이 앉아 있든 월세는 나간다. 그렇다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 게 아닌가?’ 개척의 유행을 살펴보니 ‘카페교회’ ‘도서관교회’와 같이 예배당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가정교회’ ‘사무실, 학원교회’와 같이 모임 장소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공동체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시작할까? 오래지 않아 고민은 끝났다. 그날부터 교회 개척을 준비하는 목사가 성경보다 만화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개척교회에 무슨 만화? 거 참 이상하네.” 비난, 의구심, 호기심, 기대. 다양한 반응이 앞뒤로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언제나 그랬듯 내 인생을 타인이 책임져 주는 일은 없다. 내가 결정했고 내가 달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늘 등을 밀어주셨고 필요에 따라 수습도 해 주셨다. 또 뭔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할 줄도 모르는 엑셀 프로그램을 열어서 보고 싶었던 만화책을 기록하고 정렬한다. 인터넷을 통해 요즘 잘나가는 만화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무슨 마음일까? 가슴이 뛰고 기대가 된다. 부흥을 향한 기대? 아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추억의 만화를 쌓아놓고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내 심장은 달리고 있었다. 열 개 교회가 개척되면 열세 개 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시절에 만화방 교회 개척을 준비하며 철없는 목사는 그렇게 흥분하고 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쿵후 보이 친미’ 생각만 해도 설렌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신재철 목사] 월세가 아까운데
-
-
[박동철 장로] 광복78주년에 생각해본 이승만의 ‘기독교상등문명국가론’
- 다시 떠오른 ‘이승만’의 기독교 구국론 광복 78주년을 맞았다. 올해 따라 지난 역사의 재조명이 시선을 끌고 있다. 바로 이승만의 빛나는 발자취이다. 뒤늦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설립이 구체화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논란과 담론 속에서 대한민국 국가의 정체성이 정치적 견해에 따라 혼란이 있었다. 공과가 분명히 있지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없이 역사가 흘러왔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이에 많은 출연 독지가들도 나타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잠시 대한민국 속 ‘이승만’의 많은 이야기를 짧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분명 공(功)과 과(過)가 많은 초대 대통령이다. 건국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이는 일단 논외로 한다. 오늘의 자유대한민국과 자유시장경제의 초석을 낳은 초대 대통령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였다. 머리가 천재로서 조지 워싱턴 프린스턴 하버드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많은 유명 정치인들을 마음대로 움직인 외교가였다. 이뿐이겠는가. 공적만 나열하기도 여백이 절대 부족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요 3.15 부정 선거의 당사자로 말로가 비참했다. 사실 국민들께 쫓겨나 하와이에서 쓸쓸히 90세로 생을 달리했다. 정치적인 사망선고까지 받았다. 완전히 잊혀져가는 나라를 세운 비운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한양으로 온다. 유학의 가정에서 한학을 공부했지만 배제학당에서 영어공부에 매료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이승만의 사상과 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899년 20대 때 만민회 활동을 하면서 고종 왕을 비판한 죄로 한성감옥에 들어간다. 이때 하나님 주신 절박함이 작동했다. 배제 학당에서 귀찮게만 들었던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이때 성경을 읽을 때 마다 마음이 편하여졌다고 전기에서 적고 있다.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도서관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예수 구원의 말씀 전도를 했다고 한다. 5년 7개월 동안 옥중에서 책도 집필하면서 믿음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생명나무 같이 생긴 사상은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론’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강제 병합과 일정 시대로 들어가면서 이승만은 해외로 이곳 저곳에서 책을 집필하고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주옥 같은 저서 ‘한국교회핍박’이란 책을 쓰게 된다. 기독교 국가 건설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이승만의 애국 애족 하나님 사랑의 이념이요 사상 그리고 신앙이었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특별히 감리교 선교사들로부터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았다. 특히 일본 데라우치총독 암살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붙잡혔으나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이로 인해 나라 잃은 백성의 한숨에 많은 선각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에 기독교인들이 뛰어들었다. 이승만은 특별히 하와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숯 굴을 만들어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실행하는 등 실제 기독교 국가 건설론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기독교 구국론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짧지만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역사학자 이덕주 교수가 밝힌 한국기독교사에 따르면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 건설론의 키워드를 읽을 수 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를 통한 독립운동의 저간에 교회가 민족운동의 인사들을 대거 포용하고 교회에서 이들과 많은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 둘째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을 우리는 신앙의 자율성으로 더욱 복음 전파에 매료한다. 그리고 교회서 많은 민족운동을 논함으로써 기독교 민족운동이 새로운 장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상등문명국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얼마나 담대하고 기묘한 생각인가. 이것이 해방과 함께 복음의 바탕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린 지금 대한민국에 이승만 기독교상등문명국가를 만드는데 교회가 몸과 마음을 던져야한다는 강한 생각이 떠오른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어조로 들려지고 있다. 교회가 물질과 물량에 파묻혀 가고 있다. 죄악 위에 죄악이 덮여가고 있다. 공산사회주의 이념의 교회공격, 동성애 합법화, 마약 이단 도박 출산 결혼기피 등 등 인본주의 문화가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풍요 속에 진정한 복음은 빈곤으로 빠져들었다. 지금 이승만의 부르짖는 소리부터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2023년 광복절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광복78주년에 생각해본 이승만의 ‘기독교상등문명국가론’
-
-
[조희완 목사] 아벨의 신앙 (창4:1-8)
- 국가 정상들이 다른 나라에 국빈 방문을 할 때 공식 행사로 만찬을 가지게 되는데, 국빈 방문 중에 첫 만찬행사는 대부분 대통령의 공관이나 그와 관련이 있는 장소에서 가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과거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 시절에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이나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찬을 가지지 않고, <시애틀>에 있는 <빌 게이츠>의 집에서 첫 만찬을 가졌습니다. <빌게이츠>는 국가 정상이거나 정치 지도자가 아니지만 세계적인 기업의 CEO이기 때문에 국가 외교의 매우 중요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시애틀>에 있는 <빌 게이츠>의 집은 시가로 약 1억 5천만 달러(약2천 억)가 나간다고 합니다. 1년 관리비가 백 만 불 이상 들어가고, 집을 돌보는 일꾼들이 약 300명에 이르고, 집안 모든 바닥에는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서 방문객의 위치를 15cm 이내로 추적할 수가 있고, 목욕탕의 물은 <빌 게이츠>가 들어오는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서 적정한 온도로 가득 채워지고, 지하실에는 20석 규모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의 규모를 보거나, 그가 경영하는 세계적인 기업의 규모를 볼 때 그는 세계적인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현재 세계에서 생존해 있는 인물 중에 최고의 부자입니다. 그는 한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는 아니지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마이크로 소프트>사라는 IT제국을 건설하고 그 제국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 제일의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세계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VIP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VIP들을 되어야 하는데 그가 바로 <아벨>입니다. 첫째로, 그는 모범적인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창4:4) 둘째로, 그는 가장먼저 순교한 사람이었습니다.(창4:8) 셋째로, 그는 의인으로 기억된 사람이었습니다.(히11:4)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아벨의 신앙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조희완 목사] 아벨의 신앙 (창4:1-8)
-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남편이 아내에게(2)/아내, 여편네, 마누라
- I. 서언(序言) 어떤 목회자가 설교 시간에“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여편네’라고 부르는 것은 남편의 옆에 있기 때문에 ‘옆편네’라고 한 것이 변하여 ‘여편네’가 된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용어해설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어원 분석에서 논하기로 하고, 전체적인 면으로 본다면 우리말의 호칭과 지칭어는 너무 다양하여 제대로 알고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앞에서 논한 대로 가장 가까운 부부간의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기고들에서 두 번이나 논한 적이 있었다. 다시 간략하게 논하면, 신혼부부의 경우에 배우자를 서로 부르는 말, 40,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 부부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각각 다른 경우들이 많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를 소개 할 때 부르는 말 등도 사람과 환경에 따라서 다른 경우들이 많다. 본 호에서는 이런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바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그 용어의 어원들을 살펴보고 그 뜻의 정확성을 논하고자 한다. II. 남편이 아내를 향한 호칭(呼稱)어와 지칭(指稱)어(2) 1. 아내 : 7~8년 전 예장 통합교단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향한 지칭어를‘아내’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이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는 남편은 주로 밖에서 활동하는 일이 많은 반면 아내는 집안에서 활동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내’, ‘여편네’, ‘안 사람’, ‘집사람’, ‘내자’등의 많은 지칭어들이 생겨졌다고 보고 있다. 이는 아내를 높여 부르는 ‘부인’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부(婦)자를 분석하면, 아내 ‘부(婦)’자로서‘여자가 빗자루를 들고 집안 청소를 하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아내’라는 말은 활동 범위가 집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이를 좀 더 어원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내는 원래 ‘안해’라는 말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또한 안은 안‘내(內)’자 이고 ‘해’는 의존 명사로서 소유를 뜻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 유래를 보면 신라시대의 ‘처용가’에서 “둘은 내 해엇이고, 둘은 뉘 해언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의 ‘해’는 ‘내 것’이란 의미였다. 16세기 이전에도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에 ‘네 것이다.’란 말을 ‘니 해라’고 하는 말로 아직 남아 있고, 북한에서는 지금도 아내를 ‘안해’로 표기하고 있다. 종합해서 볼 때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집 안에서 일하는 나의 사람’, ‘가정주부’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 같은 부부가 같이 일하거나 양성평등의 시대에서는 맞지 않는 용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에 있어서는 그래도 가장 무난한 보편적인 지칭어는 ‘아내’라고 할 수 있다. 2. 여편네 : 아내를 낮추어 지칭할 때 ‘여편네’하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로서 ‘여편(女便)’에다 ‘집단’을 뜻하는 접미사 ‘-네’를 붙인 것이다.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앞서 논한대로 “남편 옆에 있기 때문에 여편네”가 된 것은 아니다. 비속어이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는 것은 정서적으로도 좋지 않은 표현이다. 3. 마누라 : 앞의 여편네와 마찬가지로 마누라도 주로 아내를 낮추어 지칭할 때 하는 비속어이다. 하지만 그 유래를 본다면 비속어는 아니다. 원래 이 말은 고려후기 몽고의 ‘마노라’라는 말에서 조선시대에는 ‘대비 마노라’, ‘대전 마노라’등으로 ‘마마’와 같이 사용하던 극존칭이었다. 따라서 이는 낮춤말이 아닌 ‘노비가 상전을 부르는 칭호’로나 ‘신하가 임금이나 왕후에게 가장 높여 부르는 극존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에게만 사용되는 비속어로 취급받고 있다. 그런데 왜 이 말이 낮춤말과 비속어로 떨어지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III. 결 어 이상에서 본대로 가장 가까운 부부간의 호칭어와 지칭어 하나도 너무 다양하고 복잡한 용어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아내란 정상적인 지칭은 좋으나 잘 모르거나 생각 없이 여편네, 마누라 등의 비속어를 사용함으로서 부부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들도 흔히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만 보더라도 부부간에 적절한 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는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본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남편이 아내에게(2)/아내, 여편네, 마누라
-
-
[최호숙 목사] 메가처치(Mega Church)를 꿈꾸는가?
- 많은 목회자들이 담임목사가 되면 자신이 목회하는 동안 ‘메가처치(Mega Church)’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갖게 되는 동일한 마음이다. 미국의 교회 성장학자 칼 조지(Carl. F. George)는 ‘메타처치’(Meta Church)를 제안했다. 그러면 메가처치(Mega Church)’와 ‘메타처치'(Meta Church)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메가처치는 출석 성도가 많은 대형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메가처치들이 본질을 잃으면 사람만 모이는 공연장이 될 수도 있다. 본질을 잃은 메가 처치의 단점을 보면 핵심 멤버를 빼고는 자신은 그냥 수많은 멤버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같은 5천명 출석 성도를 가지고 평가할 때 메가 처치는 그냥 5천명 모이는 교회이고 나는 그 5천명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메타 처치는 10명이 모이는 소그룹이 500개가 있는 교회를 말한다. 메타처치의 성도는 9명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고, 그룹에 속해 있다. 자신은 10명 중에 1명이고, 500개 그룹 중에 한 그룹이다. 메타처치의 한 교구는 한 교회와 같으며 소그룹은 작은 교회와 같은 샘이다. 메가처치나 메타처치 전체 숫자는 동일하지만 소속감과 자존감 생동감의 차이는 다르다. 핵심은 각 성도가 자신을 의미 있는 교회 일원으로 느끼며 소속감에 헌신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메타처치(Meta Church)의 의미가 무엇인가? 헬라어의 “μετα(메타)는 함께, 뒤에(後)라는 의미지만 접두어로 쓰일 때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를 든다면 마 12:9절–거기를 떠나...(μεταβαs:메타바스-환경의 변화)이다. 히 12:27 ~ 변동될...(μεταδεσιν:메타데신-변화, 옮김 바꿈)을 의미한다. 마 3:2 회개하라..(μετανοειτε:메타노에이테- 메타 + 노에오(생각하다, 마음을 두다), 즉 회개는 잘못된 생각과 삶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메타처치란 전환기의 교회, 돌아서는 교회, 혹은 되어가는 교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양적인 성장을 넘어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진정한 교회 성장은 외형적 성장이 아니라, 내면적 성장과 함께 이루어지는 온전한 성장이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의 규모, 건물의 크기, 성도가 몇 명 모이느냐에 대한 것만 중요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 교회인가를 중요시해야 한다. 메가처치가 외형적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메타처치는 변화를 추구하며, 작은 셀(구역) 그룹을 선호하며, 질적인 성숙을 이루는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어떤 교회 스타일을 꿈꾸는가? 목회 스타일이 퍼퍼먼스(performance)적이어서 복음의 본질인 예수를 보여주지 못하고 인간의 예술 행위만 보여주어 사람을 모으는 목회였다면 메타처치로 전환해야 한다. 목회 스타일이 성도들의 영성을 터치하지 못하고 감성만 터치하려는 이벤트성(event)목회를 하기 위해 이런 행사 저런 행사를 수도 없이 했었다면 목회의 본질로 돌아와야 한다. 필자가 정년을 바라보며 지난 목회의 삶을 생각해 볼 때 인간적인 면에 치우쳐 퍼퍼먼스 목회, 이벤트성 목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고백하였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
[최호숙 목사] 메가처치(Mega Church)를 꿈꾸는가?
-
-
[신재철 목사] 도어록의 슬품
- ‘이걸 받아 말아?’ ‘벤츠 두 대’ 아주머니 전화다. 아주머니 전화를 받고 나면 통화가 길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매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사람 화를 돋운다. 그래서 받을지 말지 고민이다. 고민은 잠시, 결국 받아나 보자는 마음으로 폰을 터치한다. “우리 도어록이 이상해요. 도와줄 수 있을까요?” 평소와 다른 톤의 목소리.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자 도어록 건전지 교체 알림이 울린 것 같다. 뚜껑을 열어서 건전지만 교체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말씀을 전한다. 아주 간단한 문제다. 내가 해야 할 의무도 없다. 그리고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해결될 문제이고,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아도 될 문제여서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아주머니 : 건전지 교체를 할 줄 몰라요. 나 : 간단합니다. 뚜껑 모양으로 생겼어요.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시겠어요? 아주머니 : 폰으로 사진 찍어서 보낼 줄 몰라요. 나 : 집에 아드님 있지 않나요? 저녁에 교체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주머니 : 남편도 집에 없고, 아들도 요즘 밖에서 지내서 할 수가 없네요. 몇 번의 대화가 오가며 판단이 섰다. 결국 가봐야 한다. 집에서 쉬고 있다가 다시 일터로 향한다. 그래도 본인이 난감하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다. 그분 집에 건전지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실에 있는 여분 건전지를 챙겨 출동. 빼꼼히 문을 여는 아주머니는 표정도 부드러웠다. 아주 간단히 배터리를 교체하고 다음에도 같은 증상이 나오면 조치해야 할 방법도 반복해서 일러드렸다. 평소 원수로 지내고 있지만 간단한 건전지 교체조차 못해 나를 부른 것을 보니 아들과 관계도 짐작된다. 그냥 조금 짠하다. 「며칠 후」 평소에 종종 연락 주시는 할머니의 전화가 온다. 이분께도 붙잡히면 일이 많다. 텔레비전이 안 나와서, 전기 차단기가 떨어져서, 통신사 고객센터와 연결이 안 되어서 등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면 나를 찾으신다. 혼자 계신 어르신이니 가능하면 내 어머니라 생각하고 돕는다. 방문해보니 이번에도 도어록 배터리 문제다. 간단하게 조치를 하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우신다. “몇 년 전에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이런 일 다 해줬는데. 이거 하나 못해서 소장님 부르고 미안합니다.” 당황스럽다. 갑자기 돌아가신 남편의 자리가 크게 느껴지셨는지, 이런 상황이 서러운지 젊은 소장 앞에서 눈물을 쏟으신다. 급하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며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 가정에서 나도 소중하겠지? 어깨를 한 번 펴 본다. “여보, 원래는 내가 먼저 죽어야 좋을 것 같았는데. 안 되겠다. 내가 조금 더 살게.” 두 어르신의 도어록 이야기와 함께 내가 더 오래 살아보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연상의 아내가 피식 웃는다. 웃음의 의미가 뭘까? 하긴, 아내는 이미 내가 없어도 수납장과 변기도 고치는 여자다. 아내 핑계로 더 오래 살겠다는 나의 이야기가 좀 우습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신재철 목사] 도어록의 슬품
-
-
[오성한 목사] 이렇게 부르짖어라
- 누가 2판4판으로 기도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이판사판으로 기도하셨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누가 이판사판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로 암송하면 쉽다. 예수님께서 이판사판으로 기도하시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땀이 떨어지는데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 힘써야 한다. 애써야한다.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기도에도 그러해야 한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애쓰면 애가 쓰인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는 말을 안다. 진짜 믿음은 힘쓰고 애씀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막구이구 기도 나는 마가복음 9장 29절을 막구이구 기도라고 부른다. “누가 아핀사판으로 기도하느냐? 막구이구가 기도한다.”고 외웠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막9:29)라고 그랬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가 없다. 기도 외에는 기름 부음이 나타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누가 기도의 사람이냐? 하나님의 종들을 보라. 기름 부음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주의 종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면이 기도다. 그들은 기도의 사람이다. 나는 기름 부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그러기 위해 마음의 무능 활짝 연다. 문을 열어야 안에 있는 것이 보이는데 문을 닫아놓고 안 보인다고 하면 안 된다. 기도의 태도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믿음으로 간절히 하는 것이다. “땀이 땅에 떨어지매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다. 꼭 기억하고 따라해야 한다. “예수님도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말씀이 읊조려져야 한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평탄하게 되는 길 형통하게 되는 길이 있다. 무엇인가?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주야로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해야 한다. 다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도의 문을 열려면 기도로 열어야 한다. 물질의 문도 열려면 물질로 열어야 한다. 성경은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것만 봐도 아무리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그런 것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 보여도 안 믿는다는 말이다. 진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예수 믿는 것은 다니엘의 친구들처럼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헌금을 계획하고 광고하면 반응들을 해야 한다. 넉넉하다고 헌금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헌금이야기를 갑자기 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마인드가 열려야 기도도 열리고 열정이 생긴다. “나는 헌금 못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나는 돈이 없어 헌금 못해”라는 생각을 버려라. 그 때 가난의 영이 떠나간다. 그러면 물이 흐르듯 흐르는 길이 열린다. 물이 흘러 올 때 물 길 따라 흐른다. 막힌 곳을 열어야 흘러 내려갈 수 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음을 믿고 항상 감사하며 구하여야 한다. 이미 약속하셨지만 주시도록 구하여야 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라고 하셨다. 예레미야를 통해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까지 집중해서 약속하신 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라고 하신다. 이미 듣고 다 알 것 같지만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시겠다고 하신다. 이판사판의 기도와 막구이구의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라고 하심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 이렇게 부르짖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