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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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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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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지팡이
스틱은 뾰족해서 산이나 땅에서나 쓸 수 있고 지팡이는 끝이 넓고 접착력이 우수하여 의지가 될 수 있어 노인이나 장애인이 주로 사용한다. 특히 부부가 늙으면 지력이나 체력이 떨어져 지팡이와 같은 존재로 서로 의지하며 산다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왕이 장수한 노인에게 ‘청려장’이란 지팡이를 하사해 몸을 의지하여 오래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고 지금은 그것이 노인의 날에 대통령의 명의로 100세 노인에게 주어진다.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정장 외에 그에 어울리는 모자와 지팡이가 없으면 다 차려입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소화되어 필수 목록에서 빠졌지만 셜룩 홈즈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 해당 시대를 묘사한 작품을 보면 호신을 위해 사용한 것으로 지팡이는 꼭 필요했다. 유럽에서는 귀족 여성이 즐겨 사용한 시기도 있었는데 지팡이 안에 향수와 악세서리 등을 넣어 몸을 치장하며 실용적인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흰색 지팡이 역시 시각 장애인에게 가장 적합한 도구라 한다면 진정 지팡이는 그의 인생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는 신앙인에게는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모세의 손에 잡혀있는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지팡이를 잡으라고 했을 때 그것으로 이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의 지팡이는 정말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었다. 지팡이를 뻗어 땅을 치거나 던져도, 어떤 것을 가리켜도 지팡이가 각종 동물이 되기도 하고 번갯불을 불러오기도 했다. 또한 바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는 샘물이 되기도 했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바로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푯대를 향하기만 하면 분명 능력의 지팡이를 손에 잡을 수 있다. 현대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고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쉽게 일을 포기하려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안타깝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주께로 나아간다면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가 향하는 확고한 목표 지점이 하나님이면 그분께서 우리의 원하는 바를 100% 다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삶의 모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서 그 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진정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비록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전능자께서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다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많은 시간을 무심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진정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영혼이 없이 산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실체를 내 마음에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면 안 된다. 나의 인생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그리하면 엄청난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모세같이 사용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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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비 나 리
비나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노래나 옛날부터 비나리패가 놀이의 마지막 과정에서 덕담으로 기원할 때 사용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행복을 빈다는 뜻으로 좋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을 빌고 미래를 소망한다. 아름다운 인생을 염원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특히 기독교인들에겐 참 좋은 말이라 생각된다. 몇 년 전 아내의 칠순 때 우리 부부가 중국 태항산을 여행한 적이 있다. 산은 험했지만 규모나 아름다운 대협곡은 과히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절경이었다. 우리가 만선산과 왕망령을 오가는 터널 길을 지날 때 놀라운 사실을 알고 감탄했다. 오랜 옛날 오지 중에 오지인 이곳을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13명의 청년들이 무려 21년 동안을 삽과 괭이로만 절벽을 뚫어 만든 길이 1250m 동굴 도로이다. 소위 ‘괘백공로’인데 그 당시에 작업에 참여한 분은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연로한 한 분만 생존하여 그때 상황을 증언하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존경스러운 것은 자기 자녀들이 바깥 큰 세상으로 나아가 새로운 것을 배워 제대로 된 사람이 되길 바랐기 때문에 긴 시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험난한 길을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선배는 부족하나 후손이 훌륭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이었기에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만든 길이 바로 비나리길인데 큰 의미뿐만 아니라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도 마을 사람들이 지게 짐을 지고 다니던 옛길을 군민과 도시민의 건강을 위해 증평군과 청원군 미원면을 잇는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길이 바로 소망을 올리는 증평 비나리 길이다. 도로가 생기기 전엔 솟점말, 밤티, 삼기 등 세 마을 모두 율리 마을이라고 했는데 옛날 여기 사람들 모두 고개 너머에 방앗간에 방아 찧으러 넘어 다닌 길이다. 소달구지가 오르기는 어림도 없어서 지게 짐을 지고 다녀야 하는 고단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림공원과 세 곳의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1008개의 계단을 만들어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면서 소원을 비는 아름다운 비나리길이 된 것이다. 신선한 숲의 공기를 마시며 근심을 내려놓고 길의 끝에서 소망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풍광이 된 것은 절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인생의 힘든 언덕을 오르며 기도하며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과 평안을 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항상 인생의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서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길 소원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중국의 태항산 대협곡과 가까운 이웃인 증평에 자녀의 앞날을 위해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만들었고 소달구지도 못 다니는 길을 내가 사는 이웃들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 아름다운 희망의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오죽하면 소원을 비는 마음으로 길의 이름도 비나리길로 명명하였으랴.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을 빌고 오늘도 숨을 헐떡거리며 고달픔을 꾹 참고 비나리길을 오르는 것은 미래에 자녀들과 이웃의 작은 행복을 위해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2024.02.19.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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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울이
오랜 시간 인도에서 선교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에게 카스트 제도와 사회적 편견에 매여 말씀으로 변화를 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의 생수에 목말랐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성령 하나님은 장소나 사람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거침없이 그들에게 임하여 큰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언어적 한계와 피부색깔이나 문화적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예수를 영접한 이가 늘어난 후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인해 고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왕복거리가 꽤 먼데도 선교사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구해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는 정성을 보였다. 선교사가 전하는 짧은 메시지에 감동받아 인도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진심으로 울어주는 눈물의 감격이 선교사도 엉엉 울게 만든 것이다. 울어주는 이의 마음과 우는 이의 마음이 이어지고 언어보다 시선을 통해 의미가 전해지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최고의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비가 엄청 쏟아지는 어느 날 마포대교 위의 난간에서 우산을 쓰고 혼자서 고개를 숙인 여고생이 있었다. 잠시 뒤 저 멀리서 한 여순경이 허겁지겁 뛰어와 여고생 앞으로 달려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처음엔 경찰을 보고 놀랐지만 진심어린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고 따돌림과 떨어진 성적으로 죽기로 결심했던 여고생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 여고생의 유일한 친구가 이런 고민을 알고 혹시나 큰일이 날까 봐 울면서 다급하게 신고한 것이다. “너를 위해 울어 줄 친구 한 명이 있다면 넌 정말 괜찮게 살아온 행복한 사람이야. 일단 언니랑 좀 걸으면서 얘기하자.“ 이처럼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이가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위의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고 진정 울어줄 사람이 되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참된 위로자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다. 장례식장에서 임종 예배 등을 드릴 때 목회자가 장례 예문에 따라 틀에 박힌 말씀보다는 마음을 다해 정말 그 가정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울어 줄 수 있을 정도의 은혜의 말씀이 전해진다면 가장이나 자녀들의 미미한 믿음도 새롭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인도사람들의 울어주는 눈물이 선교사와의 행복한 관계를 만들었고 한강에서 자살의 순간까지 갔던 그 여고생을 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모두 울어 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울어줄 이가 있다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큰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나치 정권의 폭력이 닥쳤을 때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마지막엔 교회로 끝을 내는 것을 보아도 자기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 줄 이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인생의 끝과 엄청난 환난이 엄습했을 때 진정 나를 위해 과연 울어줄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우리 주님은 날 위로해 주시고 울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남을 위해 주님처럼 내가 먼저 울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하면 최고의 관계가 회복되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분명히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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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행 복
핀란드는 수년 동안 여러 문화권에 걸쳐 행복과 관련한 조사에서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 이야기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비교가 심하지 않고 정신적 자유도가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우리의 삶은 하루에 몇 번이고 우울해지고 고민에 빠지기도 하여 괴로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살고 있어 실제 잘 사는 것보다 남들에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허황된 마음이 문제가 된다. 그러면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인데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쉽게 단정지울 수 없다.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수많은 조건 가운데 물론 돈도 포함된다고 보지만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개인의 행복은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유력한 한 방송에서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결과가 나온 것은 유의미하다. 7개국에 1인당 1만 달러를 준 무리와 주지 않은 무리에게 3개월 동안 사용하도록 한 결과 실험군이 대조군보다 행복도가 높은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 것을 보아도 돈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신명기에 ‘네 행복을 위해’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린 언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원 성취했을 때일까? 아니면 부가 쌓일 때일까? 보통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실현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의 좋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려고 하는 까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말씀은 세상을 보시고 행복해하셨다고 바꿔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신음을 멈추게 하고 그 자리에 행복이 자리 잡게 하려 하셨다. 이스라엘이 행복에 이르게 된 것은 자연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세상이 상호 작용한 결과물임이 틀림없다. 이스라엘 민족이 최고의 나라로 행복하게 된 것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오로지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잘 실천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임을 알고 온전히 지킬 때 그 결과가 행복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고 삶의 한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배우로서 세상의 행복을 다 누렸던 김수미라는 분은 세상적인 영화는 덧없음을 깨닫고 75세의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행복에 초대를 받았다. 믿는 우리 앞에는 이미 행복의 초대장이 도착해 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그 말씀을 따라가는 성도가 될 때 행복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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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초 미학
-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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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초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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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일견
-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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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일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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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자 유
-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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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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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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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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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소 원
-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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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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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신발
-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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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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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눈물
- 인생으로 사는 날 동안 괴로운 일이나 너무 기쁜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만 이런 눈물이 감정에 의해 나지 않는 것은 괴롭고 불행한 일이다. 그 보다도 더욱 괴로운 것은 흘리고 싶어도 도저히 흐르지 않는 눈물 때문에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보통 남자가 온갖 말을 다하여도 여자가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는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성별을 떠나 눈물은 진심이 담겨있어서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상황을 넘겨준다 할지라도 금방 실망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보편적으로 눈물이 있는 사람은 인정이 많은 특성을 갖고 있고 마른 눈을 가진 사람은 내면이 건조하고 부드럽지 못한 딱딱한 마음을 가진 무정한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다. 사람에 있어서 눈물만큼 사람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대 서양 전설에서 나일 강에 사는 악어는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악어의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다분히 사람의 눈물과는 비교해서는 안 되는 거짓의 위선적인 눈물이다. 사람의 눈물 중에서 치명적인 병이 든 히스기야의 통곡의 눈물은 최고의 눈물 중의 눈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네 눈물의 기도도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생명까지도 연장시켜 주셨다. 이와 같이 눈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보물 같은 것으로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는 충실한 일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절하게 흘리는 눈물은 영적 기능을 제대로 하도록 이끌어 주는 안내자임이 분명하다. 스위스의 어느 시골에 양치는 목동이 양들을 이끌고 작은 개울을 건너가려고 하였다. 개울에는 징검다리와 같은 불편한 다리로는 물을 싫어하는 양들이 건너가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목동이 아무리 양들을 다그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목동은 하는 수 없이 어미양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젖먹이 새끼 어린 양을 안고 물을 건너 버렸다. ‘안돼!’하는 순간 어미양은 어린 자식을 잃었다는 위기감으로 세상을 다 뺏겼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오직 새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사력을 다해 개울을 뛰어 건넜던 것이다. 미물인 양도 절박한 위기가 닥쳤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눈물을 뿌리며 온 힘을 다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한낱 짐승도 그런 위기 땐 목숨을 걸고 새끼를 구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어찌 인간이 극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평안히 안일한 길만 갈 수 있으랴. 지금 이 땅은 기쁨이나 웃음보다 어린새끼를 빼앗긴 어미처럼 통곡의 눈물이 절대 필요한 절박한 위기의 때다. 히스기야처럼 먼저 죄를 범한 나 자신을 위해 울고 자녀의 앞날을 위해 울자.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해 울고 북한 땅에서 인간 이하의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형제를 위해 통곡하자. 그리하면 위기의 때에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살려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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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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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용 돈
- 보통 말하는 용돈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말한다. 자기가 벌지 않아도 생기는 돈, 즉 불로소득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용돈은 주로 아직 어린 미성년자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적은 금액의 돈을 용돈이라 한다. 옛날 어렵던 시절에는 어릴 때 용돈을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쓸 수 있는 용돈이나 학용품 살 돈을 준다. 어릴 때부터 용돈을 관리할 능력을 키우거나 독립심을 키우도록 교육적으로 용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옷이나 장신구를 위해 사용하도록 용돈을 주거나 대학생 정도의 청년이면 교통비는 물론 교제비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용돈을 주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대학생 된 아이들이 방학 때가 되면 자기 힘으로 아르바이트 해서 자기 용돈과 학비까지도 벌어 쓸 뿐만 아니라 저축까지 하는 것은 정말 칭찬할만한 일이다. 옛날 형편이 어려울 때에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진정 사랑을 베푸는 큰 은혜라 할 것이다. 부모님이 어렵게 벌어서 사용하라고 주신 용돈을 향토장학금이라 하여 신나게 썼던 기억이 난다면 정말 철없이 소비했다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진정 자녀가 성장하여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면 가난한 시절에 부모님이 사랑의 진액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신 용돈은 은총임을 기억하고 이제는 치사랑으로 약해진 어른들께 감사함을 담아 용돈이 역으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필자가 잘 알고 있는 친구 중에 자녀가 다 잘 성장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자녀결혼, 직장 문제나 손자를 걱정함이 없이 잘 살아가는 분이 있다. 항상 얼굴에는 기쁨으로 가득 차 감사함으로 늘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우리를 늘 편안하게 해 주는 분이다. 그런데 어느 날 파안대소하여 점심식사를 쏜다고 해서 나갔더니 큰아들이 아파트를 팔고 중도금 일부를 아버지에게 용돈이라 하면서 일금 일천만 원을 통장에 입금을 시켰다고 했다. 요즘 이런 자식을 찾아볼 수 없는데 보기 힘든 효도를 실천한 참 귀한 아들이라 생각되었고 정말 부러웠다. 친구의 아들은 새집으로 이사해야 하고 자기 자녀를 키우려면 얼마나 쓸 곳이 많을 텐데 부모에게 용돈을 그렇게 많이 주다니... . 난 그 순간 감동을 받아 한참동안 그 친구가 부러워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친구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고도 남음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용돈은 주로 아이들에게 주는 돈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렇게 자녀가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부모에게 쓸 돈을 챙겨서 드리는 것은 마땅하고 귀한 일이다. 일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도 돈이지만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믿어진다. 사실 옛날에는 부모가 자녀를 키운다고 제대로 먹거나 입지도 못 하고 자녀를 키우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노후대책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늙어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부모님에게 큰돈은 아니더라도 용돈을 챙겨드리는 자녀들이 많아지면 존경과 사랑, 그리고 축복이 공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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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용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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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연리지
- 일본을 여행할 때 큐슈에 있는 산사 앞에 수백 년 된 연리지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묘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큰 나무의 가지가 서로 얼싸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그 매력으로 마음을 뺏긴 것은 사실이다. 주로 연리지라 함은 같은 종류의 나뭇가지가 서로 붙어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한 상태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부간의 금실, 선비의 우정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연리지의 출현은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기고 귀한 나무로 대우받고 있는 것이다. 큰 나무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라 하고 나뭇가지가 이어지면 연리지라고 한다. 가지가 맞닿으면 바람에 의해 서로 비벼지는 상태가 되어 산불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땅속의 붙어있는 뿌리 덕분에 나무가 죽지 않고 오랫동안 같이 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맞닿은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각각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 지름이 점점 굵어지면서 서로가 심하게 눌리므로 제일 먼저 껍질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찢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무의 세포들이 직접 맨살로 맞부딪치게 되어 운명적인 만남이 완성된다. 이것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경우와 흡사하지만 나는 우리 주님의 원가지에 상처 난 우리 인생의 작은 가지가 접붙임을 당한 연리지와 유사하여 정말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의 연리현상은 아무 가지나 서로 맞닿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동질의 나무라야 가능하다. 소나무나 참나무는 수십 년 붙어있어도 연리지와 같이 결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근본이 서로 달라 돕는 것보다 맞닿을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만 준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상처받지 않고 항상 위로해 주시고 감싸 주시는 우리 주님의 큰 나무에 연리지로 붙어있어야만 잘 생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에 태안 꽃박람회에서 크기가 같은 원 가지가 붙어있는 벤자민을 부부나무라 칭하여 20년 동안 잘 키워 큰 나무로 성장시켰다. 두 나무처럼 각각 성장하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가지가 붙어버린 연리지가 되어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고 기뻐하였다. 부부일체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처럼 연리지가 되어버렸으나 분명한 것은 부부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주님과의 연리지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 작가 루이는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성장하고, 스톨게에 의해 양육되고, 아가페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 것처럼 인간이 가진 사랑은 역시 미완성일 뿐이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 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외치고 연리지처럼 서로 변하지 않기를 염원한다. 심지어 가요까지도 연리지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모두 사랑의 홍수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지만 진정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참 나무이신 포도나무로 보내 주셨다. 원가지이신 주님에게 상처 난 연한 포도나무의 순이 되어 접붙임이 되어야만 참 연리지 같은 삶이 전개된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연약한 가지가 주님의 큰 가지에 붙어살면 치유와 함께 연리지의 사랑을 맛보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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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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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처음과 나중
- 처음 30여 년 전 1991년 5월 18일은 필자가 장로로 장립을 받은 날로 내 생애 최고의 역사적인 날이다. 이 때 이웃에 살던 예수님을 잘 모르는 형님 부부가 장로로 세움 받는 것이 귀하고 좋은 일인 줄 알고 중동에서 근무할 때 사온 비디오카메라로 나의 기념될만한 모습들을 촬영하셨다. 이 분은 고박사라 불릴 만큼 최고의 기술자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잘 사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선한 이웃이다. 부인은 열심 있는 불도였지만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두 가정의 아이들도 학교 선후배로 잘 지냈고 주요 과목을 과외지도를 하듯이 잘 가르쳐 주곤 했다. 자녀들을 데리고 좋은 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먼 곳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부부끼리도 여러 밤을 같이 보내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고 친근하게 잘 지내면서 관계를 돈독히 했다. 작은 아들의 진로도 색맹으로 원하던 사범계열을 가지 못하게 되자 차선책으로 법학을 전공하도록 권유하여 현재는 검찰 쪽 공무원으로 잘 근무하고 있다. 자녀의 결혼 때에도 먼 거리를 혼주인 형님 내외와 어른들을 내 차로 모시고 행복한 결혼식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을 기억한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은 찾아가 위로해드리고 해결 방법도 제시하여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생각한다. 시간이 잠간 흐른 뒤 부인은 과감하게 절을 버리고 주님을 잘 섬기는 집사가 되어 기쁨으로 헌신하는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다. 반면 고 박사님은 좀처럼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상황에 못 된 담배 때문에 폐에 문제가 생기게 되어 온 가족이 걱정꺼리가 된 것이다. 자녀도 결혼하여 이제 손자도 보았고 부인도 건강하여 큰 걱정이 없는데 칠순이 넘어 생각지도 못한 말기 암이라는 인생의 폭풍이 이 가정에 휘몰아친 것이다. 그러나 큰 불행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나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주신 것이다. 담임 목사가 간절히 안수기도하면 아멘으로 화답했고 본인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결국 나중에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간다고 시인하였고 지금은 아버지의 집에서 안식하고 계신다. 처음 꼭 30년 전 이 가정은 나의 장로 장립식 때에는 예수를 잘 몰랐으나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 살아가던 중 예수를 영접하여 많은 변화를 겪고 인생의 굴곡을 맛보게 된다. 이런 가운데 신기한 기적 같은 일이 우리들 앞에서 일어나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론 이해하지 못한 일을 경험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30년 동안 장로로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셨고 그 사이에 이웃 불신 형님 부부가 예수를 믿고 같이 모신 친정어머니도 천국백성이 된 것이다. 나중 30년 후에는 부인되는 집사님이 처음 장로 장립식 때와 똑같이 2021년 4월 25일 나의 은퇴와 원로장로 추대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놀라운 기적 같은 현실을 목도했다. 남편은 물론 친정어머니도 예수 믿고 천국 가심을 감사하며 집사로 살아가는 부인은 비록 혼자가 되었으나 자기 가정을 전도한 분의 마지막 직을 처음 장립 때를 회상하며 묘한 감정으로 지켜보면서 형제애로 축하한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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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처음과 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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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고 백
- 어떤 연애인이 자기의 과거 행적을 깨끗하게 털어놓지 않아 상대방의 불신이 커져 사랑했던 두 사람의 믿음이 깨어져 이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고백 중 가장 자주 목격되는 것은 사랑에 관계되는 고백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을 다 공개를 해도 문제가 되지만 꼭꼭 숨겨놓고 말하지 않는 것 때문에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여 결별의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친구 되신 주님께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고백하면 품어주시고 긍휼과 자비의 옷으로 입혀 주시기 때문에 변질되어지는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된다. 고백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로 특히 자기의 죄를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할 때 자주 사용하는데 참회라고도 한다.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면 그 죄를 사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제가 속죄해 주는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들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고백을 성사적 예식으로 여기며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육신한 사건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근원적 성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은총이며 그 은총을 은혜로 의식하는 일에 바쳐지는 모든 일이 성사라 믿는다. 개신교애서는 만인제사장론에 따라 죄의 고백을 하나님께만 하는 것으로 사죄를 특권층에만 부여하는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장로교에서는 예배 중에 죄의 고백을 순서에 넣어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그 중에 대표기도의 주요기도 제목으로 죄의 용서를 비는 시간을 갖는 것은 참 복된 일이다. 최근 어떤 신문에서 결혼을 꿈꾸는 남녀가 가장 싫어하는 고백은 무엇일까를 묻는 설문에서 다른 사람을 통한 대리고백이 최고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도 타이밍에 맞춰 직접적으로 확신에 찬 고백을 해야만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다. 원치 않는 간접적인 고백을 받았을 때에는 상대방의 마음은 고맙지만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릴 사랑하시는 주님은 어떤 내용이라도 적시에 우리가 직접 나아가 솔직하게 남김없이 고백해야만 기뻐하시고 문제를 잘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가 쾌락의 길로 걸었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유일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다.’라고 고백했지만 늘 남아있는 자신의 죄악의 찌꺼기 때문에 회개를 통한 고백보다 더 진한 인간의 행위를 포루티운쿨라 교회의 장미정원에서 알몸으로 뒹굴며 용서를 구하였다. 그의 진정한 회개를 통해 용서를 베푸셨고 축복의 증표로 장미의 가시까지도 없애주었다는 실화가 있다. 이곳의 가시 없는 장미를 타지로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한다고 하니 진실한 고백이 있는 곳만이 생명이 있음을 증명한다.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고백은 경우에 따라 약도 되고 독이 된다. 그러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씻지 못할 죄악이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기뻐하시고 조건 없이 용서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모조리 하나님께 고백하자. 그리하면 우리 주님은 불변의 사랑으로 놀라운 은총을 우리의 가슴에 채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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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고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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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자 유
-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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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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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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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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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고아
- 경기도의 한 지역에 나무들이 버려지는 것을 모아 조성한 수목원이 시민들에게는 더없는 휴식처가 된 아름다운 나무고아원이 있다. 이 곳에 식재된 나무들은 도심에서 병들어 버림받은 나무, 토목공사나 건물신축 등으로 베어버리려는 나무들을 기증받아 심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치료해주고 잘 키워 준 고아원과 같은 곳이다. 조성을 시작하여 20년이 지난 지금은 안정을 찾아 좋은 숲이 조성되어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된 것은 참으로 잘 된 일이다. 나무고아원에 버려진 나무들이 아픔을 이기고 우람하게 서있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대견함을 느낄 수 있다. 1만3천여 그루의 나무가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한강 산책로의 가로수로 사용되기도 하고 여러 관공서나 기관에 공급되어 좋은 나무로 자리 잡기도 한다. 버려진 고아처럼 제2의 고향인 나무고아원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잘 살아가는 나무를 보면서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버려졌던 자식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우릴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나무고아원에서 나무를 기르시는 주인같이 생각되어 정말 고마운 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입대를 앞둔 한 청년이 따뜻한 가정이 없음을 절망하고 한탄을 하는 것을 보고 애절함을 가진 적이 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셔서 작은 아버지 집에 입양되어 늘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 스무 살이 다되어 잘 살아 보려고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냉대 받는 사회 속에서 자립하여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다. 버려진 나무처럼 고아로 살다가 막상 늦은 나이로 군 입대를 하려니까 자신의 신세가 서글프고 절망적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과연 고아라서 희망이 없고 부모님의 도움이 없어서 절망적일까? 물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나만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처한 환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문제이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고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승리자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욕심을 비우고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최우선해야 한다. 진정 우린 모두가 버려진 고아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고아원에 입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는 부모가 계셔도 고아 아닌 고아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근대화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부요한 나라가 되었지만 실제 영 육간 자식은 물론 부모까지도 버리는 비정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6.25전쟁고아가 다 잘 성장하여 사회에 빛 된 일들을 감당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고아는 과부와 나그네와 같이 사회에서 냉대받기가 쉽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압제하지 말고 도우라고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고아를 학대하지 말고 환난 중에서도 그들을 돌보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지금은 육적인 고아보다 영적 고아들이 너무 많다. 우리 주위에 같이 살아가고 있는 영적고아들을 찾아 천국고아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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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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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소 원
-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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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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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아버지
- 아버지는 자기가 낳은 자식의 남성 부모를 말하지만 어릴 때에는 통상 아빠라 부른다. 우리 집도 어린 자식들이 다 성장하여 새 가정을 이루어 자식의 자녀들이 태어났지만 호칭은 여전히 큰아들은 아버지, 작은아들은 아부지, 딸은 아빠라고 부른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호칭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은근히 기분이 좋아 옛날을 생각하며 자녀 손들을 축복하게 된다.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것은 진정한 참 아버지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에콰도르의 침보라소라는 산이 있는 데 이 산을 신성한 아버지의 산이라 부른다. 이 산은 적도 인근의 산 중에서 고도가 가장 높아 세계의 전망대라 불린다. 이제는 휴화산이지만 신비와 위용으로 무장된 이 산은 변함없이 산 주위의 주민들에게 깨끗한 빙하얼음과 많은 것을 제공해 주어 항상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기며 순종하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아버지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단어로 히브리어 ‘아브’는 1191회나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라는 명칭이 많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버지를 중심한 가정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나 문화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인 부권은 땅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로서 절대적인 권한이 허락된 것이다. 말씀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사랑하되 편애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지함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아빠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아람어이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이 호칭을 늘 사용하셨다고 한다.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친밀성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체를 불경스럽게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는 큰 불만의 요소였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부족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복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언제 어디서나 늘 ‘아버지!’하고 부른다. 육신의 아버지는 계시지 않지만 정감이 넘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확실히 받아들이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신 희생적인 아버지에게 오직 순종만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120년여 전 척박한 조선 땅에 파란 눈의 전킨(Junkin, William McCleery)선교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군산지역에 젊음과 열정을 다 바쳤다. 자녀를 셋이나 잃고 자신도 43세의 나이에 그의 자녀들과 이 땅에 묻혔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 분의 말씀 따라 헌신하여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우리는 늘 그 분에게서 받고 누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조선말기보다 더 못한 지역으로 받은 사랑을 실제로 잘 전하는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수룡 장로(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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