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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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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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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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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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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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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 (1)
    초기 한국교회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렀다. 당시 평양지역 외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믿음이 좋은 한 여성도가 남편 직장을 따라 평양에서 서해안 황해도 지역 진남포로 이사 갔다. 여인은 예배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이 되면 평양으로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에 집으로 내려왔다. 하루는 달구지에 짐을 싣고 두 아들을 태워 교회로 가는데 두 아들이 장난을 치다가 막대기로 지나가는 말을 쳐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타고 가던 갓을 쓴 부잣집 양반이 땅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두 아들이 경찰에 붙들려 검찰청으로 가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검사가 누구의 소행인지를 물으니 두 형제가 서로 자기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불러 물으니 동생의 소행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여인은 재가를 했는데 큰 아들은 전처의 소생이고 동생은 여인이 낳은 아들이었다. 깜짝 놀란 검사가 여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어찌하다가 이렇게 되었소’ ‘교회 가다가 그랬습니다’ 여인에게 감동을 받은 검사가 여인이 사는 동네에 교회를 세워 주었는데 그 교회가 진남포교회였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 사변적인 신학이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여인처럼 살아가는 삶을 요구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같은 초기교회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 46) 오늘날 한국교회가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음으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마음에 태신자를 품어 그들을 주일에 교회로 인도하여 참된 예배자로 세워 충성된 사명자로 세워가길 바란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태동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1-13절은 구속사의 대사건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말하고 있으며, 14-36절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설교가 나오는데 이는 세계 선교 개시의 선언문과도 같다. 37-41절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가슴을 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하면서 회개하므로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대역사가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42-47절은 갓 태어난 초대교회가 뜨거운 신앙의 기쁨을 서로 나누는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Ⅰ. 오순절 통과(1-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1-4)   오순절에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주님을 잃은 그 순간에 오순절까지 기다림이란 놀라운 결단이다. 그들은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마가 다락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으니 식음을 전폐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가정과 직장에도 엄청난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기도는 생사를 건 결사적인 기도였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삼상7:5-6) 하나님의 역사는 모일 때 일어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성령의 역사는 홀연한 순간에 일어난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하나님의 역사는 홀연한 순간에 일어남으로 우리의 지각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9:3). 그가 빌립보 옥중에 갇혔을 때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고 했다. 오순절 사건도 홀연한 순간에 일어났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을 귀로 들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각국 방언을 입으로 말하는 입체적인 사건이었다. 오순절에 열두 사도와 120문도가 만국 방언을 말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교회의 복음전파가 세상 끝 날까지 세계 도처에 끊임없이 진행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비록 단회적인 사건이기는 하나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성령 운동은 동일한 한 성령임을 말씀하고 있다.(고전12:13) 당시 일어난 오순절 방언은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방언과는 다른 구별된 단회적 사건이다. 비록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단회적이지만 그 같은 성령운동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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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3-08-09
  • [최호숙 목사] 메가처치(Mega Church)를 꿈꾸는가?
    많은 목회자들이 담임목사가 되면 자신이 목회하는 동안 ‘메가처치(Mega Church)’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갖게 되는 동일한 마음이다. 미국의 교회 성장학자 칼 조지(Carl. F. George)는 ‘메타처치’(Meta Church)를 제안했다. 그러면 메가처치(Mega Church)’와 ‘메타처치'(Meta Church)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메가처치는 출석 성도가 많은 대형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메가처치들이 본질을 잃으면 사람만 모이는 공연장이 될 수도 있다. 본질을 잃은 메가 처치의 단점을 보면 핵심 멤버를 빼고는 자신은 그냥 수많은 멤버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같은 5천명 출석 성도를 가지고 평가할 때 메가 처치는 그냥 5천명 모이는 교회이고 나는 그 5천명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메타 처치는 10명이 모이는 소그룹이 500개가 있는 교회를 말한다. 메타처치의 성도는 9명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고, 그룹에 속해 있다. 자신은 10명 중에 1명이고, 500개 그룹 중에 한 그룹이다. 메타처치의 한 교구는 한 교회와 같으며 소그룹은 작은 교회와 같은 샘이다. 메가처치나 메타처치 전체 숫자는 동일하지만 소속감과 자존감 생동감의 차이는 다르다. 핵심은 각 성도가 자신을 의미 있는 교회 일원으로 느끼며 소속감에 헌신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메타처치(Meta Church)의 의미가 무엇인가? 헬라어의 “μετα(메타)는 함께, 뒤에(後)라는 의미지만 접두어로 쓰일 때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를 든다면 마 12:9절–거기를 떠나...(μεταβαs:메타바스-환경의 변화)이다. 히 12:27 ~ 변동될...(μεταδεσιν:메타데신-변화, 옮김 바꿈)을 의미한다. 마 3:2 회개하라..(μετανοειτε:메타노에이테- 메타 + 노에오(생각하다, 마음을 두다), 즉 회개는 잘못된 생각과 삶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메타처치란 전환기의 교회, 돌아서는 교회, 혹은 되어가는 교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양적인 성장을 넘어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진정한 교회 성장은 외형적 성장이 아니라, 내면적 성장과 함께 이루어지는 온전한 성장이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의 규모, 건물의 크기, 성도가 몇 명 모이느냐에 대한 것만 중요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 교회인가를 중요시해야 한다. 메가처치가 외형적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메타처치는 변화를 추구하며, 작은 셀(구역) 그룹을 선호하며, 질적인 성숙을 이루는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어떤 교회 스타일을 꿈꾸는가? 목회 스타일이 퍼퍼먼스(performance)적이어서 복음의 본질인 예수를 보여주지 못하고 인간의 예술 행위만 보여주어 사람을 모으는 목회였다면 메타처치로 전환해야 한다. 목회 스타일이 성도들의 영성을 터치하지 못하고 감성만 터치하려는 이벤트성(event)목회를 하기 위해 이런 행사 저런 행사를 수도 없이 했었다면 목회의 본질로 돌아와야 한다. 필자가 정년을 바라보며 지난 목회의 삶을 생각해 볼 때 인간적인 면에 치우쳐 퍼퍼먼스 목회, 이벤트성 목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고백하였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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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3-08-09
  • [신재철 목사] 도어록의 슬품
    ‘이걸 받아 말아?’ ‘벤츠 두 대’ 아주머니 전화다. 아주머니 전화를 받고 나면 통화가 길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매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사람 화를 돋운다. 그래서 받을지 말지 고민이다. 고민은 잠시, 결국 받아나 보자는 마음으로 폰을 터치한다. “우리 도어록이 이상해요. 도와줄 수 있을까요?” 평소와 다른 톤의 목소리.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자 도어록 건전지 교체 알림이 울린 것 같다. 뚜껑을 열어서 건전지만 교체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말씀을 전한다. 아주 간단한 문제다. 내가 해야 할 의무도 없다. 그리고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해결될 문제이고,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아도 될 문제여서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아주머니 : 건전지 교체를 할 줄 몰라요. 나 : 간단합니다. 뚜껑 모양으로 생겼어요.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시겠어요? 아주머니 : 폰으로 사진 찍어서 보낼 줄 몰라요. 나 : 집에 아드님 있지 않나요? 저녁에 교체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주머니 : 남편도 집에 없고, 아들도 요즘 밖에서 지내서 할 수가 없네요. 몇 번의 대화가 오가며 판단이 섰다. 결국 가봐야 한다. 집에서 쉬고 있다가 다시 일터로 향한다. 그래도 본인이 난감하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다. 그분 집에 건전지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실에 있는 여분 건전지를 챙겨 출동. 빼꼼히 문을 여는 아주머니는 표정도 부드러웠다. 아주 간단히 배터리를 교체하고 다음에도 같은 증상이 나오면 조치해야 할 방법도 반복해서 일러드렸다. 평소 원수로 지내고 있지만 간단한 건전지 교체조차 못해 나를 부른 것을 보니 아들과 관계도 짐작된다. 그냥 조금 짠하다. 「며칠 후」 평소에 종종 연락 주시는 할머니의 전화가 온다. 이분께도 붙잡히면 일이 많다. 텔레비전이 안 나와서, 전기 차단기가 떨어져서, 통신사 고객센터와 연결이 안 되어서 등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면 나를 찾으신다. 혼자 계신 어르신이니 가능하면 내 어머니라 생각하고 돕는다. 방문해보니 이번에도 도어록 배터리 문제다. 간단하게 조치를 하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우신다. “몇 년 전에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이런 일 다 해줬는데. 이거 하나 못해서 소장님 부르고 미안합니다.” 당황스럽다. 갑자기 돌아가신 남편의 자리가 크게 느껴지셨는지, 이런 상황이 서러운지 젊은 소장 앞에서 눈물을 쏟으신다. 급하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며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 가정에서 나도 소중하겠지? 어깨를 한 번 펴 본다. “여보, 원래는 내가 먼저 죽어야 좋을 것 같았는데. 안 되겠다. 내가 조금 더 살게.” 두 어르신의 도어록 이야기와 함께 내가 더 오래 살아보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연상의 아내가 피식 웃는다. 웃음의 의미가 뭘까? 하긴, 아내는 이미 내가 없어도 수납장과 변기도 고치는 여자다. 아내 핑계로 더 오래 살겠다는 나의 이야기가 좀 우습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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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오성한 목사] 이렇게 부르짖어라
    누가 2판4판으로 기도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이판사판으로 기도하셨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누가 이판사판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로 암송하면 쉽다. 예수님께서 이판사판으로 기도하시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땀이 떨어지는데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 힘써야 한다. 애써야한다.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기도에도 그러해야 한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애쓰면 애가 쓰인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는 말을 안다. 진짜 믿음은 힘쓰고 애씀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막구이구 기도 나는 마가복음 9장 29절을 막구이구 기도라고 부른다. “누가 아핀사판으로 기도하느냐? 막구이구가 기도한다.”고 외웠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막9:29)라고 그랬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가 없다. 기도 외에는 기름 부음이 나타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누가 기도의 사람이냐? 하나님의 종들을 보라. 기름 부음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주의 종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면이 기도다. 그들은 기도의 사람이다. 나는 기름 부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그러기 위해 마음의 무능 활짝 연다. 문을 열어야 안에 있는 것이 보이는데 문을 닫아놓고 안 보인다고 하면 안 된다. 기도의 태도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믿음으로 간절히 하는 것이다. “땀이 땅에 떨어지매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다. 꼭 기억하고 따라해야 한다. “예수님도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말씀이 읊조려져야 한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평탄하게 되는 길 형통하게 되는 길이 있다. 무엇인가?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주야로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해야 한다. 다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도의 문을 열려면 기도로 열어야 한다. 물질의 문도 열려면 물질로 열어야 한다. 성경은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것만 봐도 아무리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그런 것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 보여도 안 믿는다는 말이다. 진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예수 믿는 것은 다니엘의 친구들처럼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헌금을 계획하고 광고하면 반응들을 해야 한다. 넉넉하다고 헌금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헌금이야기를 갑자기 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마인드가 열려야 기도도 열리고 열정이 생긴다. “나는 헌금 못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나는 돈이 없어 헌금 못해”라는 생각을 버려라. 그 때 가난의 영이 떠나간다. 그러면 물이 흐르듯 흐르는 길이 열린다. 물이 흘러 올 때 물 길 따라 흐른다. 막힌 곳을 열어야 흘러 내려갈 수 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음을 믿고 항상 감사하며 구하여야 한다. 이미 약속하셨지만 주시도록 구하여야 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라고 하셨다. 예레미야를 통해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까지 집중해서 약속하신 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라고 하신다. 이미 듣고 다 알 것 같지만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시겠다고 하신다. 이판사판의 기도와 막구이구의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라고 하심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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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박동철 장로] 한 초등학교 교사의 애틋한 죽음과 경남학생인권조례반대운동 비망록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애틋한 죽음 소식이 쉬 가시질 않는다. 초임교사로 부임하여 제자에게 폭행당해 3주 진단의 중상을 입고 그만 스스로 교사는 목숨을 끊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곳곳 교육현장은 물론 온 국민이 통탄하고 분노해 하고 있다. 그동안 학생의 인성지도에 교사의 교육권이 갈수록 약해지고 학생들은 학생인권이라는 제도적 보호 속에서 많은 갈등이 있어왔다.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육정책의 현장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번 같은 불행한 사건은 충격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원인을 두고 분석과 주장 또한 뜨겁게 일고 있다. 한눈에 띄면서 이슈가 되는 것은 학생인권조례이다. 이 제도적 문제가 각지자체 차원에서 운영됨에 따라 이러한 문제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무게 있는 진단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지난 2010년부터 전국에서 제정이 추진되어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 10개 지자체서 조례가 제정되었다. 교육현장에선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무너뜨리고 한 교사의 자살을 부른 직접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학생인권조례가 교육 차원의 교권을 무너뜨리고 학생들의 과잉 인권행사가 강조됨으로써 되려 아이들의 훈육적 인성지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잘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공동체가 지향하는 이념교육을 위해 바르게 교육할 수 없는 많은 지장물이 조례안에 품고 있다. 우리 경남지역은 어떨까. 다행히 경남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강력히 추진되다 무산되었다. 딱 5년 전 경남의 온 교회들이 반대 운동을 펼쳐 제정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오늘 펼쳐보고자 한다.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은 지난 2007년부터 일부 정치권을 중심으로 시작되어왔다.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은 후 경남도교육청과 교육의원들 속에서 뜨겁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제정안에 학생인권중심의 내용도 있지만 교회 복음을 가로막는 독소조항들을 품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기독교 복음이 그동안 공교육 현장에도 협력하여 아이들 인성교육을 얼마나 도왔는가.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나아가 복음과 함께 사회에 비전을 던지는 사명이자 희망의 빛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구원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아야 함이 진리다. 십자가위에서 목숨을 던진 예수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경남지역 교회는 2018년 초부터 본격적인 조례 반대 운동에 돌입했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성도들이 연합회에 참여하고 앞서 행동하는 바른 가치 수호의 기독시민단체가 깃발을 들었다. 매일 도의회 앞에서 시위와 구호제창으로 학생인권조례의 반사회적 기능을 설명했다. 교회를 돌면서 전문 강사들의 세미나 집회도 열렸다. 급기야 도교육청은 발의안의 구체적 작업에 들어갔다. 도의회 일부 강경추진 의원들이 제정안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2018년은 봄 여름가을 겨울이 없었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를 구심점으로 여러 갈래 시민단체들이 힘을 합하여 도의회 앞에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에 들어가 무한 저항행동에 돌입했다.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이 어떤 정책에 반대하는 데모꾼이 되는 일이 한편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의 일반인들 또한 고깝지 않은 눈으로 지켜봤다. 경남도교육청과 도의회 의원들은 상정안을 정리해갔다. 1년여 기간 교회 부르짖음에도 끄떡도 없었다. 드디어 분수령이 생겼다. 2018년 11월 25일 주일. 창원 용지공원의 넓은 광장에 경남 전지역 교회 성도들이 오전예배를 드리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 반대를 위한 대 집회의 시간의 날이었다. 필자는 일찍이 반대운동 한켠에서 돕고 있는 처지라 일찍이 현장에서 시간 흐름을 체크했다. 오후 2시부터 진행될 행사 시작 2시간 전 낮 12시부터 안개가 자욱했던 날씨가 걷히면서 쾌청한 날씨가 되고 물밀듯 인파가 몰리면서 대집회가 시작되었다. 모여든 성도들의 숫자가 얼추 3만 명이 되는 듯 했다. 집회 후 경찰 또한 2만 명으로 정보 보고되는듯했다. 시위 데모엔 숫자가 움직인다. 여러 채널로 알아보니 도교육청 경남도 수뇌부에서도 심각한 민의로 받아들이는듯했다. 이날 경남학생인권조례를 막기 위해 경남도 내 2천5백여 개 교회성도들의 집회는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웠다. 대성공의 집회로 마감했다. 문제는 이후 경남학생인권조례추진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2019년 들어 조례안이 상정되었다. 투쟁도 계속되었다. 그해 겨울은 유달리 차가웠다. 도청 앞에 텐트를 치고 밤낮없이 릴레이 농성으로 저항했다. 조례안은 상정되어 심의하기 시작했다. 그 한겨울은 길거리에서 저항했던 투사들의 눈물겨운 겨울이었다. 일부 교회 장로들이 기획팀을 만들고 크리스천 도의원들과 막후 협상도 시도했다. 그러나 2019년 5월 25일 도의회 교육위원회에 상정되어 의결 절차에 들어갔다. 오후 늦게 9명의 상임 위원 중 6명이 찬성 진보 진영이고 3명 만이 보수반대의 진영이었다. 수적으로 통과의결 불을 보듯했다. 오후 늦게 장시간 토론 끝에 표결에 들어갔다. 도의회 안과 밖에서 찬반의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결과는 6 대 3으로 부결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웬일인가. 날 위하여 십자가에 서신 예수님을 만난 듯 모두가 울었다. 진보진영 두 분이 고맙게도 반대표를 주었다. 이래서 경남학생인권조례는 무산되었다. 교육감은 늦게 경남학생인권조례는 재추진 않는다는 공식 발표를 했다.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었다. 이것이 경남학생인권조례를 무산시킨 비망록(備忘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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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31
  • [오성한 목사]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2)
    환자를 위해 기도함도 같은 맥락이다. 치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한 자가 부르짖을 때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이것을 보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고 하셨다. 치료의 하나님임을 주야로 묵상할 때 마음속에서 치료가 확신 된다. 그래서 저절로 치료를 부르짖고 터져 나올 수 있도록 말씀을 먹고 기도로 부르짖어야 한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철저히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늘 붙어 있는 삶을 살 때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과 흥분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을 보고 성령님께서 흥분시키신다고 하는 것이다. 매일 정말로 감격으로 말씀을 붙잡고 사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바울도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으로 늘 살아갔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한다. 그는 그의 기도에 대해 늘 이야기했다. 방언기도를 언급할 때는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방언으로 더 많이 말함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고전14:18). 그는 방언으로 많이 늘 기도했던 것이 틀림없다. 결국 기도는 말씀의 약속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짜 기도이다. “내가 이렇게 해 주겠다. 그래도 너희가 내게 구해야 한다.”는 말씀은 기도를 잘 설명해준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겔36:37). 그러니까 기도는 들어 주실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 당신도 기도응답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믿을 수 있다. 기도는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삽니다."라고 늘 읊조리며 실재화 하며 사는 것이다. 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께서 70년 후에 해방될 약속을 설명을 하시고는 기도할 것을 말씀했다. 예레미야 25장과 29장에서 말씀했다. 특히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까지는 회복의 약속이 가득하다. 회복의 약속을 죽 하신 후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 33장 3절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는데 네가 나의 설명을 들어서 알 것 같다 싶지만 네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을 보이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 후에도 무엇을 부르짖어야 할지를 33장 전체를 통해 설명하시고 계신다. 그러니 “부르짖어라”는 말씀이 그냥 “네가 생각나는 대로 너의 생각을 부르짖어라”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고는 부르짖을 수 없다. 부르짖는 사람은 저절로 부르짖게 된 사람이다. 약속이 분명하기에 흥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하는 것이고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부르짖음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한다. 단순한 나의 생각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 그 때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다. 그때는 부르짖으면 된다만 단순히 자신의 욕망적인 생각을 부르짖으면 응답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일과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부르짖을 수 있다면 당신은 놀라운 사람이다. 기름 부음이 언제든지 나타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로 성취된다. 이것이 기름 부음이 드러나는 길이다. 하나님의 약속 뒤에는 언제든지 기도하라는 것이 나온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중에 제일 마지막 성경인데 모든 예언이 이루어지는 길목에 기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일 곱 인을 떼기 전에, 일 곱 나팔을 불기 전에, 일 곱 대접을 붓기 전에 전부 기도가 나온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일 곱 인을 떼기 전에 장로가 금향로를 들고 나온다. 금향로에 담긴 향이 있는데 그것이 성도들의 기도라고 했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하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다. 그 기도 내용이 바로 기록되어 있다. 인을 떼는 것, 나팔을 부는 것, 대접이 부어지는 것,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기도와 굉장히 밀접한 것을 볼 수 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24장로가 하는 노래다. 성도들의 노래다. 피조물들의 노래다. 노래의 내용은 동일하다. 어린양을 노래한다. 요한계시록 8장은 ‘팔’을 생각하며 8장 9장을 나팔재앙으로 외우면 좋다. 나팔재앙에도 보면 8장3절에 금향로가 또 나온다. 성도들의 기도가 또 나온다. 대접재앙은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에 걸쳐 나온다. 여기도 기도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다. 향을 올려 드린다. 이렇게 기도가 나온다. 기도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래도 구하여야한다고 하신 것이 기도이다. 아무리 기름 부음이 넘쳐나도 기도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다. 뜨거운 기도가 없는 사람은 기름 부음이 있지만 나타나지는 않는 사람이다. 성경이 분명히 기도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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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남편이 아내에게
    I. 서언(序言)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불러야 될까?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어떻게 소개 할까? 이런 작은 고민은 결혼한 지 40수년이 지난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혼 초부터 이런 호칭과 지칭에 익숙하지 못하다 보니 그 어색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주례를 할 때면, 신랑신부에게 서로 ‘여보’로 불러보라고 시키고 있는 것이다. II. 남편이 아내를 향한 호칭(呼稱)어와 지칭(指稱)어 1. 호칭(呼稱)어: 지난 호에서도 밝힌 대로 현대에 있어서 부부간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호칭어는 ‘여보’이다. 그 뜻은 ‘여기보세요’, ‘여보시오’의 준말로서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나,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공용어이다. 물론 이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약 30여년 정도로서 그리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날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부부간의 용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다음 또 하나의 부부 공용의 호칭어는 ‘자기’이다. ‘애인이나 젊은 부부간에 상대방을 부르는 속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표준어로 수용해도 좋다는 견해도 많다. 또 하나의 부부공용의 호칭어는‘당신’이란 말이다. 한자로는 마땅할 당(當), 몸 신(身)자로 사용되는 인칭에 따라 그 의미가 각각 다르지만, 부부간에 사용될 때는‘나와 같은 부부일심동체’를 뜻하는 말로‘자기’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 말의 사전적인 뜻은 ‘부부간에 서로 애정과 존경을 나타내는 말’로 되어 있다. 그다음 부부 공용어가 아닌 남편이 아내를 직접 부르는 호칭어에는 어떤 용어들이 있는가? 예를 들면, 자녀가 없는 신혼부부인 경우는 아내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녀가 출생한 후에는 자녀의 이름을 붙여서‘OO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고, 어떤 남편들은 아내를 부를 때 ‘OO아’ 라고 자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호칭은 아니다. 또한 40,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 부부들의 경우는‘여보’, ‘임자’, ‘마누라’등의 말로 부르기도 한다. 2. 지칭어(指稱): 이 경우는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제 아내’, ‘제 마누라’, ‘제 여편내’, ‘안 사람’, ‘집사람’, ‘내자’, ‘제 처’ 등 많은 지칭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를 좀 더 분석해 보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때는 ‘아내’ 혹은 ‘내자’라고 하고, 아내를 겸손하게 이를 때는 ‘집사람’, ‘우리 마누라’라고 할 때도 있다. 또 높여준다고 ‘우리 부인’이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보고 듣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너무 높이는 지칭어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고, 앞의 경우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이기 때문에 올바른 지칭어가 아니다. 또 때로는‘제 와이프’라는 외래어를 쓰기도 하는데 이도 바른 표현은 아니다. 이러다 보니 어떤 말이 바른 지칭어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중에서 비교적 무난한 보편적인 지칭어는 ‘아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의 아내에 대한 지칭어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기에 대해서 예장 통합교단에서는‘아내’라는 말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을 했든 적이 있다. 그리고 아내가 직분이 있는 경우는 ‘우리 김 집사’, ‘저희 김 권사’ 등으로 일반화 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직분 이름을 붙여서 지칭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아내를 스스로 높이는 존칭이 되기 때문에 주의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목회자의 경우에 자신의 아내를 ‘사모’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나 이 말은 오래전에 논한 바도 있지만 경어법으로 본다면 아주 어색한 말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오늘날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남편이 아내를 두고 하는 호칭어와 지칭어 하나도 그곳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현실이며, 이를 바로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국제화 시대에 발맞춘다는 의도 아래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외국어와 외래어, 인터넷 언어 등으로 인하여 호칭어와 지칭어 등도 너무 어려워졌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적절한 바른 용어를 사용한다면 간접적인 전도와 함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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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오태열 목사]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 강하기에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까를 근심하며 약점이 드러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드러나게 되면 화를 낸다. 심청전에 물에 빠진 심 봉사를 지나가던 한 스님이 구해준다. 살아난 심 봉사는 공양미 3백석을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덥석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심 봉사의 형편을 잘 아는 스님은 그게 가능하겠느냐며 만류하자 심 봉사는 남의 집 사정을 어찌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고 화를 낸다. 이같이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우리 주변에 유난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있다. 이들의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화를 내며 조직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다. 더 나아가 자신을 외톨이로 무지하게 만든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남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가난이 드러나도 숨기려 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모든 원인과 결과를 나로부터 찾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남에게서 찾는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내 탓으로 돌리고 원망할 일도 감사로 돌리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감사할 일도 불평 원망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막상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이 자신을 존중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힘들어하고 괜한 독선과 오기가 나타나 자신을 괴롭힌다. 타인이 나를 높게 보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정작 본인은 자신을 높게 보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자존심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잣대가 남이 된다. 남이 나를 인정해 주고 높게 봐주며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는 사람은 항상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만, 자신을 고치려 하지 않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반대로 자존감은 모든 것의 잣대가 자신이 되기에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사랑한다.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기에 남들이 칭찬해 주어도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더 노력해야 한다며 노력하기에 더 발전하게 된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일과 하려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그러나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려고 성찰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존심과 자존감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러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높혀야 한다.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스스로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둘째,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고 타인의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사회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셋째,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자존감이 높아지려면 주변 사람이 아닌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 자신을 믿고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넷째,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자존심을 내세우면 남과 다투게 된다. 싫은 소리는 흘러버리고 좋은 소리만 듣는 습관을 들이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다섯째, 도전해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함으로써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섯째, 쉽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화가 날 때 한번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긴 호흡을 한번 하면 화가 가라앉는다. 일곱째, 메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부정적인 사고로는 지금 처한 환경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정열적으로 뛰어야 한다. 그리하면 나의 자존감을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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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조희완 목사] 신언의 능력 (민14:1-10)
    인간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언어(言語)입니다. 언어를 가졌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사상이 만들어지고, 언어가 있기 때문에 문화가 만들어 지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역사가 발전을 합니다. 그리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든 문학 작품도 언어를 문자화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의 힘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인해서 낙심했던 사람이 소망을 얻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삶의 목적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언어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는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만듭니다.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사람이 자주 쓰는 언어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쓰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기쁨이 넘치는 사람은 “기쁘다”는 표현을 자주 쓰고, 슬픔이 가득한 사람은 “슬프다”는 표현을 자주 쓰기 때문에 슬퍼지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반드시 내 삶의 형편과 처지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에 몸이 갇혀버리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하고, 절망적인 말보다 소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안 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말을 해야 합니다. 기쁨의 언어를 사용해야 기뻐지고, 행복의 언어를 상용해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신년 벽두에 우리는 언어의 중요성을 알고 의도적으로라도 믿음의 언어를 많이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이 자져다 주는 유익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 신언은 환경을 극복하게 합니다.(7,8) 둘째, 신언은 소망을 성치하게 합니다.(24) 셋째, 신언은 고난을 단축하게 합니다.(34) 코로나 펜데믹으로 세상이 매우 혼란하고 어지러운 이때에 믿음의 말을 많이 하므로 복된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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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신재철 목사] 배신감
    분리수거장 관리를 시작하면서 모으기보다는 버리기 시작했다. 폐지는 가능한 매일매일 수거할 만한 동네 어르신에게 맡겨 정리했다. 고철과 공병은 수집하는 어르신에게 드리거나 구청에서 수거하는 일자에 맞추어 내어 두었다. 몇만 원 수입을 내가 가지는 것보다 아파트의 청결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파트는 정말 깨끗해졌다. 전(前) 관리인, 한 사람의 작은 욕심이 그동안 아파트를 그리 불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른바 돈 되는 재활용품을 수거하시는 어른들과 관계이다. 나도 없이 살아보았기에 하루하루 폐지를 주워 용돈 벌이, 생계유지하는 분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이 된다. 그래서 더 잘해드렸다. 음료라도 하나 챙기고, 명절에 들어오는 선물이 있으면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다양하다. 갑자기 소식이 끊어져서 알아보면 병환으로 일을 못 하시기도 하고, 불미스러운 어떤 일로 함께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오래 함께하면 좋겠는데 쉽지 않았다. 지금은 폐기물 수거하는 어른이 없다. 수소문해 보니 병환으로 입원하셨다는데 아무래도 현장 복귀는 어렵지 싶다. 한동안 직접 폐기물을 정리하며 치우다가 인근 고물상의 소개로 새로운 어르신과 만나게 되었다. 비교적 건강해 보이고 말이 통해서 오래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정식으로 인사도 드리고 안내도 할 겸 분리수거장에서 만났다. “폐지, 공병, 고철 돈이 될만한 것은 편히 가지고 가시면 되고 쓰레기는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그대로 두고 가시면 제가 치울게요.” 그리고 헌 옷 수거함은 다른 분 소유물이니 손대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도 전한다. 새로운 거래처를 터서 만족스러우셨을까? 아무 대가 없이 가지고 가시라 해서 기분이 좋으셨을까? 반복되는 감사 인사에 내가 다 민망했다. “소장, 여기 헌 옷이랑 내가 다 가지고 가면 안 됩니꺼?” 며칠 후 만난 어르신은 처음과 다른 당당함으로 분명 안 된다고 말씀드린 헌 옷을 요구하신다. 감정이 조금 상했지만 타이르듯 다시 주의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린다. 헌 옷 수거함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파트 입주민이 설치한 것이라 나도 무척 예민하다. 그렇게 수거하시는 어르신을 돌려보냈지만, 마음이 불안하다. “소장님, CCTV 좀 돌려서 한번 찾아 보이소.” 헌 옷 수거함을 설치한 입주민의 전화가 왔다. 누군가 옷을 꺼내 갔다는 것이다. 수거함에서 옷 꺼내 가는 장면을 찾아내려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알고 요청하는 것일까?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헌옷 값을 내가 주고 끝내고 싶었다.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드리고는 관리실 CCTV를 돌려보기 시작한다. 무작정 찾으려면 너무 힘든 일이지만 약간의 힌트가 있다면 수고가 줄어든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부터 검색한다. 하루 전 영상에서 고물 수집하는 어르신 모습이 나온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옷 수거함에 손을 넣고 옷을 꺼내어 챙기고 있다. 분명 내가 그렇게 주의 주었는데, 결국에는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르신들과 이런 관계, 처음이 아니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일인가. 「배신감」 어려운 분, 힘드신 분, 조금이라도 돕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던 어른들이다. 그런데 매번 결과가 이렇다. 나도 가난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착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나도 나이 먹어 가지만 숫자의 쌓임이 어른스러움을 보장하지 못한다. 실망감에서 정신 차린 후 가능한 정중하게 문자를 보냈다. 정해진 물품만 가지고 가셔야 함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분명 불쾌하다고 느끼겠지? 오히려 속으로 화를 내고 있을지도. 어쩌면 수거하실 다른 어르신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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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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