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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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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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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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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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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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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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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성수 총장] 끝없이 고르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autonomous being)로 규정하며, ‘자율성’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다. ‘자율’(autonomy)이라는 단어는 ‘auto’(자동/스스로)와 ‘nomus’(규범/법)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규범이 되고 법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행동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권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모든 반응은 단순히 선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권위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끝없이 고르는 존재”가 되도록 인도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권위의 문제가 핵심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위들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절대지고의 권위이며 세상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력을 갖고 있는 권위 있는 진리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던 성경에는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구약 레위기의 많은 교훈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하시되”라는 세 구절로 시작하며, 이 구절은 모든 사랑과 친근감의 어조를 띄지만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초월적 위대하심 앞에서 그분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하고 신뢰하며 그런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자아 충족적이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님을 기쁘게 인정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시각을 경직되고 낡은 고루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린다. 현대성은 교묘하지만 체계적인 수많은 방법으로 이런 시각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인 양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지고의 권위로 고백하며 가르쳐야 할 신학교의 교수들 중에도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 아직도 성령의 존재를 믿느냐? 성령이 있으면 한번 가져와서 보여 보아라!”고 순박한 신학생의 신앙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는 패역한 시대다. 신적 권위를 비롯하여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면 내일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이런 사회가 바로 인류 모두가 바라는 유토피아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수많은 선택 거리는 슈퍼마켓이나 쇼핑몰에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끝없는 선택과 쉴 새 없는 변화가 확대되고 증가해 가는 선택의 부추김은 이제 소비 시장의 담장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뷔페식단에서부터 인생의 자립을 돕는 기법과 철학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끝없는 선택이 놓여있다. 코로나 시대에는 교회에 가서 대면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지 않아도 집에서 안락한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소위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취향에 따라 골라가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소비자의 한 선택 품목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고 지혜가 되는 세상에서는 한 가지 선택을 고수하는 행위는 더 이상 지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고 소심하다는 증거다. 현대인의 자유는 선택의 옳고 그름이나 어리석고 우둔함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선택이다. 진리, 선함, 권위는 선택이라는 핵심적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주권적 선택자로서 당신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또 선택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위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하고 또 누군가는 저런 선택을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선택과는 다른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주권적 선택자는 격상시키고 선택 내용은 가치절하해서 선택을 선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이 아니다. 믿음의 걸음은 선택과 결단의 걸음이다. 그러나 결단의 행위로써 선택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부가 된다. 그럴 경우, 믿음의 선택도 수많은 현대적 선택의 숙명처럼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쉽게 바꾸어도 상관없는 상태로 쪼그라들 수 있다. 믿기로 선택한다는 이유로 믿음을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 상황이 될 때 그만큼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오늘날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은 구속력이 없어 편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믿음의 선택은 다르다.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므로 큰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언약적 선택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왔고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선택하는 백성(choosing people)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이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를 골라 선택해 주신 그분의 대속적 선택을 생각하면서 무게 없는 우리의 경박한 선택 행위를 다시금 성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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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교회를 향한 새해의 기대
    세월은 정말 화살처럼 빨라 2022년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비록 전도자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진리를 세월과 더불어 실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을 때 마다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출발한다. 새해를 맞을 때 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을 것이다.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감을 갖게 하지만 사회와 정부를 향한 기대와 소망도 있을 것이다. 2023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를 새롭게 가지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싶은 강한 소망과 기대를 가져 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 교회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성장과 저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정도로 청교도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과 문화, 심지어는 정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해 오던 미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구주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의 계절에도 ‘Merry-Christmas’ 는 사라지고 ‘Happy Holiday’라는 단어가 대신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외양만 보면 한국이 더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는 도심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마냥 놀라워한다.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불빛은 한국이 마치 기독교 국가라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다. 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급격한 양적 성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 초창기의 교회는 문맹 퇴치와 교육, 선진 과학 기술의 보급,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 봉사, 여성의 인권 고양 등 사회를 계몽하고 인도하는 사회 봉사적 기능을 잘 수행하였다. 어두운 사회 구석을 밝히며, 차원 높은 윤리 의식을 고양하는 등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교회가 더 이상 이러한 사회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교회 안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각종 모임으로 인한 교통 혼란과 소음, 교회 인근의 집 값 하락뿐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의식 있는 교회들은 노인대학 운영, 노숙자 보살피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와 같은 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교회로 자리 매김 하려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이런 의식 있는 교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문화 행사, 독서 교실, 주차장 개방, 결혼식장 제공 등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잘 운영되던 노인대학 프로그램을 없애 버리고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예배 공간을 만들어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해 던져줄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한다. 이런 신앙공동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세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환경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낙동강과 수영천을 살리는 일은 구청에서 관심을 갖기 전에 교회가 먼저 관심을 갖고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가꾸고 보존하는 운동과,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활용을 위한 쓰레기 분리 수거 운동은 교인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일이다. 교회 건물을 좀더 환경 친화적인 건물로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사례금에서 소득세를 자진 신고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정말 사회를 인도하는 지도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의 의미를 협의적 의미의 경건 생활 또는 교회 생활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정치와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다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고상한 두려움을 주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유리된 채 지역 사회 속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폐쇄적인 교회는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단체로 전락할 뿐이다. 2023년 새해 벽두에 한국교회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원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도록 인도하는 의식 있는 신앙 공도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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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최호숙 목사]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우리는 보통 연말연시(年末年始)가 되면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는 표현을 한다. 그 말이 정말로 실감이 나는 2022년 한해였다. 정치적 혼란과 교계적으로 교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위축되고 회복을 위한 몸부림으로 달려온 영적 위기의 한해였고 경제적 곤핍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 달려온 한해였다. 이제는 시온의 영광이 밝아오듯 이 땅에도 시온의 영광이 밝아온 것이다. 영어에서 정월을 ‘January’라고 하는데 이 말은 로마의 쌍면신(神) ‘야누스’에서 시작된 말이다. 로마 사람들은 정월이 되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신을 수문장으로 세운다. 뒤에 있는 얼굴은 지나간 해를 돌아보는 회고(回顧)의 얼굴이요, 앞에 있는 얼굴은 새해를 전망(前望)하는 계획의 얼굴이라고 한다.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와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한국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영국 속담에도“시작이 좋으면 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격언이 있고, 독일 격언에는 “입구에 들어서는 첫 발자국이 가장 힘들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는 2023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벌써 첫발을 내디뎠다. 로마인들처럼 야뉴스 신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을 때 초장에 홍해의 장애물이 놓였던 것처럼 우리 인생길에는 순탄대로만 있을 수 없다. 홍해가 있고, 광야길이 있고, 춥고 배고픔이 있고, 목마름이 있는 현실임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출발해야 한다. 아직도 마음과 삶에 시작이 없다면 2월이 오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작 없는 끝은 있을 수가 없다. 광야 길 출발이 있어야 가나안 도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을 향한 힘찬 출발이 있어야 도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 또한 우리는 한 해를 걸어가면서 성경(聖經)을 성경(聖鏡)되게 하여야 한다. 어감이 이상하지만 성경을 단순한 인생 교양을 위한 글(經)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영혼과 육신의 거울(鏡)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으면 내 삶 속에서 경건의 삶을 실천하며 영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면 기도의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했으면 사랑의 폭이 넓어져 가야하고, “화 분내지 말라” 했으면 자기 절제 통제가 필요하며, “교만하지 말라” 했으면 하나님 앞에 교만을 버려야 하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했으면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고 하였다. 삶의 원칙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새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는 2023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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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8
  • [박동철 장로] “죄와 벌”, 정말 양심이 움직이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고전 명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제목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명쾌하다. 죄에 따르는 벌과 이를 넘으려는 심리의 갈등을 그린 세계명작이다. 스토리를 논하기는 여백이 부족하여 제목이 던지는 직관적 메시지를 음미하면서 얘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사람이 지은 모든 명작을 넘은 성경에도 ‘죄와 벌’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 인간에게 던진 예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세상의 죄를 찢어버리는 거대한 함의가 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다.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하신 모든 일은 세상 구원을 위한 헌신이었다. 그리고 죗 값의 벌(罰), ‘죽음’이었다. 바로 사람의 죄로 인해 멸망해버린 세상의 죄를 ‘십자가 벌’로서 해결한 것이다. 예수는 그 긴 여정 33년의 마지막 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철저히 처벌받은 것이다. 마지막 남긴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거룩하고 거대한 음성이다. 창조주와 인간의 죄 사이에 있는 억만의 골을 인간이 벌로 해결할 수 없으니 당신이 스스로 벌을 받음으로써 ‘죄’가 해결되는 역사(役事)가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와 세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다. 죄와 벌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한 토막이 있다. 19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47년 사망한 미국 정치인이자 법조인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이야기다. 라과디아가 판사로서 법조인 시절 재판 과정에서 눈물겨운 아름다운 판결을 내린다. 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빵 한 조각을 주기 위해 가게서 빵을 훔친다. 그리고 법정까지 오게 된 할머니에게 라과디아 판사는 할머니에게 벌금 10달러를 판결한다. 그리고 벌금 10달러는 판사인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따라붙는 판결이 중요하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날 할머니 벌금 판결에 참석한 검사 변호사 방청객 모두에게 벌금 50달러를 선고한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 죄가 있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죄와 벌’에 대한 양심이 주체할 수 없이 작동한 아름다운 판결이다. 이 판결은 긴 역사 동안 회자되며 죄와 벌을 해결하는 양심의 판례가 되고 있다. 죄와 벌에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를 해결한 하나님의 판례를 보고 우리는 최소한 양심의 작동을 살려내야 한다. 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면서 말이다. 요즘 우리 사는 세상에서 죄와 벌을 위해 거대한 사회 작동이 움직이고 있다. 많은 법정이 성수기를 맞은 듯 오일장날처럼 복잡하다. 그중에서도 온 국민의 시선을 끌고 있는 한 국가지도자의 죄와 벌을 두고 국민을 피곤케 하는 다툼이 가관스럽다. 판사의 마지막 판결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다. 그러나 죄와 벌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도 작은 양심의 작동으로 나타나는 순리가 작은 아름다움이다. 검사와 판사가 공히 ‘죄 의혹’에 따른 법적인 절차를 진행하는데, “그건 조작이요”하고 진영 스크럼을 짜고 정치인 특유의 ‘국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대응은 너무 가관이다. 차라리 이건 분명 사실이 아니고 이건 잘못이 있으니 공직은 내려놓겠다는 정도의 양심 작동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거대하게 보이는 듯한 정치적 방패를 만들다 썩은 동아줄처럼 국민을 위한 정당정치마저 허물어질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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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3
  • [오성한 목사] 정체성(2)
    만약 말씀이 아닌 것 같고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부분이 있다면 아직 내가 계시가 열리지 않아서 그렇거나 내 생각이 틀려서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요한일서 3장 9절에는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구절에 세 번이나 믿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강조를 한다. 이런 말씀을 보고 나 자신을 볼 때 수용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안 맞고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다. 말씀의 조명이 덜 열려서 그렇다고 받아 들여야 한다. 또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데 나 자신을 볼 때 죽은 것 같지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일단 성경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자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을 믿는 자가 아니다. 나의 모습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믿는 자다.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길을 지나가면서 "엄마 저것 뭐예요?"하고 자꾸 질문한다. 그러면 "저건 자동차란다"하고 말하지, 저 차는 3,000CC이고, 가격이 얼마이고, 차 길이는 얼마이고, 등등을 가르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자동차의 구조를 다 몰라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간다. 그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하나가지고 따지고 들어가 "내 생각은 이런데 그러면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꼬?"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믿다가 무너지기 쉽다.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는 육적인 고집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6-9). 우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영의 생각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을 생각하는 것이다. 거듭난 자의 영은 흠도 점도 없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말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신부로 삼았다고 이해하면 된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에베소서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비밀이 크구나.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 한 말씀이다."는 결론을 맺는다. 부부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네 아내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하나님이 교회를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분들은 "아니 아내만 복종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그 말만이 아니다. 뒤에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말씀했다. 이것이 교회의 비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우리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표현을 해 놓았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이다. 주님이 우리를 거룩한 신부로 만드셨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점점 거룩한 신부로 나아가다가 딱 죽을 때 거룩한 신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미 우리는 거룩한 신부가 되었다. 입술의 표현이 부족하지만 단순한 반복된 고백이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다. 이전엔 나는 거룩한 신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이제는 믿음으로 거룩한 신부임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초임을 알았다. 너무 신이난다. 좋은 신부는 신랑과 같이 있는 자체가 행복이다. 신랑과 함께 하는 자체가 축복이다. 예수님과 부부가 된 자체가 복이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있는 자체를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나는 많이 행복하다. 행복하다고 신랑 되신 예수님께 고백한다. 나의 최고의 신랑이라고 고백한다. "주님 난 주님으로 인해 너무 행복해요."라고 자주 고백한다. 때로는 너무 행복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주님께 더 잘 표현 해 드리고 싶은데 입술의 표현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 좀 더 고상하고 더 훌륭한 표현을 하고 싶은데 어제 했던 말만 또 되풀이 한다. 부부가 살다 보면 아내를 "사랑해요"라는 표현도 특별한 표현 외에 특별한 표현을 못하듯 주님께도 그러하다. 표현이 부족해도 난 주님이 좋다. 이미 이루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다. 십자가는 나를 해방했다. 서로 "여보 사랑해"라는 간단한 표현을 자주 할 수 있다면 참 좋은 부부이듯 주님과 좋은 부부가 되고 싶다. 시랑과 친밀한 대화를 원하는가? 주님과 깊은 대화를 하고 싶은가? 깊은 대화를 잘 하려면 단순한 이야기 자주 하면 된다. "나의 신랑 되신 주님, 사랑해요."라고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말씀드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으로 너무 많이 이야기하다가 새벽기도시간인데 늦을 뻔 했다. "주님 잘 잤습니다. 오늘도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부족과 연약함도 다 짊어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생각 더 많이 하길 원합니다." 이러는데 나도 모르게 방언기도가 나오고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에 늦을 뻔 했다. 짧은 대화가 밝고 명랑하게 잘 되면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등의 대화가 자유로 와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학교에 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고 언제 학교에서 왔는지 모르게 집에 들어온다면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짧은 대화가 잘 안 되는 관계에서 긴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환영하고 영접해 주셨다. 우리와 친근하고 인격적인 삶을 살길 원하신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라고 하시지 않는가? 이것을 깨달은 바울처럼 우리도 깨달아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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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황권철 목사] 마태(Matthew's Behind Stories)-언약의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마가복음에 이어 마태복음을 쓴 사람이다.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레위였다(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태는 본래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이 레위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마태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그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이다. 당시 유대민족이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때라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지 도시락 하나가 귀한 시대였다(마 14:13-21). 그렇지만 세리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가 세관에서 앉아서 일하는 좋은 자리에서 사직서를 내고 방랑자와 같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따른 것은 그가 인간이 배를 불리는 빵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앉았어도 복음과 상관없는 시간과 물질과 권력은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엡 5:16)고 했다. 세속 풍속과 유행을 따라 고귀한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영혼을 구하고 생명을 건지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   복음서를 기록한 세리 마태    마태복음의 저자는 세리 마태이다. 그런 레위가 마가의 복음서를 손에 넣게 되었다. 아마도 같은 레위 지파 출신의 마가가 그에게 사본을 전했을 수도 있다. 레위는 그의 율법 지식과 세리 특유의 치밀함으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를 예수 그리스도에 연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는 자신의 이름 레위를 헬라식 이름 마태로 고쳐서 구약의 이스라엘 시대에서 신약의 이방 시대로 들어섰음을 선언했다. 특히 그의 복음서에는 마가복음에 없는 예수 탄생의 경위와 동방 박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세원을 추적하는 세리 특유의 솜씨로 마리아를 인터뷰하여 그 사실을 캐냈을 것이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같은 동족 유대인을 위해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이런 마태복음은 결코 구약의 참된 계시를 인본주의적이요, 패쇄적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곡해한 유대교적 오류에 물들지 않고 예수의 복음과 구약의 계시가 상호 연속성을 가진 진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구약의 인용이 많다. 또한 그는 당시 세리직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자로 헬라어도 잘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상당한 재산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눅 5:29), 화폐에 대한 빈번한 언급과 회계에 능한 그의 관심을 통계 수치에 밝은 직업적 기질을 그의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과 신약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게 했다.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채택된 때는 주후 397년경 칼타고 회에서 이루어졌다. 그 기준은 이러하다. 첫째는 사도들의 후원을 받은 책들이다(엡 3:1-5). 둘째, 그 내용이 진실한 책이다(고후 2:17). 셋째,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다(벧후 1;21). 그러나 이 성경을 편집할 때 연대순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다. 구속계시의 성취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신약의 여러 복음서들 중에 가장 우선적으로 편집한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교량 역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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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양대식 목사] 사랑의리더십에 대하여(17)
    사랑의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질투심이 많고, 높아지고자 했으며, 사랑이 부족한 자였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말씀 듣던 요한이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사랑의 은혜에 감동 받아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요한입니다. 요한 1서 4장에서 요한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여 사랑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노령의 나이에 항상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말로만 사랑을 외친 것이 아니고 자신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실까요? 사랑이 중요하고 실제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고 서로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자들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믿는 자들이 갈등이 생기고 틀어지면 서로 해결하지 못하고 속으로 꽁하면서 미워하며, 복수하려고 합니다. 좁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좁으면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넓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넓으면 사랑하게 되고 사람들을 품게 됩니다.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사도 요한을 보면 우리도 사랑의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은혜 받고 말씀 듣고 성령 받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최고의 변화와 기적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는 말 잘하는 자 보다 사랑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의 리더, 사랑하는 교사, 사랑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가 가장 매력이 있고 잘 사는 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소금과 빛이 되어 선한 영향을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유혹의 광장입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빠지면 죄짓게 되고, 유혹에 넘어가고, 시험에 듭니다. 세상은 사탄 마귀가 활동하는 무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쾌락과 돈,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시험과 유혹에 넘어져 죄짓게 되고 믿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근심하게 됩니다. 세상 유행 문화 풍조를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오락 취미에 빠져 하나님 섬기지 아니하고 예배드리지 않으면 믿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좋아, 세상에 취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면 세상이 우상이 됩니다. 세상은 화려해 보이고 우리에게 성공을 줄 것처럼 유혹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다 보면 망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평안과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세상의 것은 헛된 것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다가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믿음이 식어졌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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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4: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란 연호 사용에 대해서
    I. 서언(序言) 그동안 연말연시의 때를 맞이하여 일 년 12달의 태양력에 따른 월별 명칭과 한 주간의 요일에 대해서 지난 호까지 논하여 보았다. 요일의 명칭은 1회 더 다음에 논하기로 하고 오늘의 본 호에서는 2023년 새해를 맞이하여 60간지 연호인‘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란 말이 우리 기독교인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란 연호 사용의 유래 1. 60간지(六十干支) 연호의 유래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연호는 60간지 연호이다. 이는 유교의 경전 중의 하나인 주역(周易)에서 나온 것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주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60갑자 연호인 갑자, 을축, 병인, 올해의 신축년 등은 하늘의 줄기로 보는 천간(天干)의 10글자(十干)와 땅의 가지를 뜻하는 12개의 지지(地支)가 합쳐서 만든 연호이다. 또한 태어나서 60년이 되면 60연호가 다시 돌아오는 해가 되기 때문에 환갑(還甲)이 된다. 이때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생일의 마지막이라 해서 축하연을 전통적으로 해오기도 했다. 2. 60간지에서의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해의 유래 올해 2023년은 60 간지 중 마흔 번째 해인 ‘계묘년(癸卯年)으로 토끼해다. 10간(干)의 마지막인 계(癸)와 12지(支)중 네 번째 동물인 토끼의 묘(卯)가 만난 해라고 한다. 계는 색깔로는 검은색이기 때문에‘검은 토끼의 해’로도 불린다. 또한 토끼는 집에서도 사육하는 친숙한 동물이기 때문에 동양의 설화, 민담 등에서도 많이 나오며,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에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또한 십이지 신 중 묘신(卯神)으로서 음력 2월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기기도 하고, 초식 동물로서 이미지는 약하지만, 삼국사기의 구토지설(龜兎之說)과 판소리 수궁가에서는 지혜와 임기응변으로 능한 동물로도 여긴다. 도교에서는 옥토끼 설화를 통해 달(月)의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기 위해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설화는 나중에 불교설화에 영향을 주었고, 우리나라에선 윤극영 작사 작곡의 반달이란 동요에서‘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란 가사로 전달되고 있다. 또한 사주 명리학에선 계묘년의 계를 물의 기운으로서 어둠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보고 있고, 흑색은 인간의 지혜를 관장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계(癸)와 묘(卯)가 만나는 검은 토끼해는 지혜롭고 풍요로운 해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대로 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란 연호 사용은 다분히 도교와 불교와 전통무속 종교의 신앙이 스며있는 말로서 우리 기독교이 사용하기로는 거북한 용어이다. III. 바람직한 기독교적 연호는 무엇일까? 얼마 전의 기고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연호 사용은 세계 모든 나라 및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늘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함께 앞에서 논한 60갑자(六十甲子)인 60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치하에는 명치(明治)란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으로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란 말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상의 여러 연호들에서 가장 바람직한 기독교 연호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서기의 유래인 주전(主前; B.C)과 주후(主後; A.D)란 말로서 이미 기독교적 연호로 정착되어 있다. A.D 란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저스틴 1세’가 당시의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그는 깊은 명상 중에 예수님 탄생의 해를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Anno Domine의 약자인 A.D로 정했다. 또한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선포하여 오늘까지 거의 모든 세계의 나라들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60갑자(六十甲子)인 육갑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 통치하에서는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B.C와 A.D를 인정하는 겪이 됨으로서 자랑스럽게도 예수님 중심의 연호가 된 것이다. IV. 결 어 지금까지 논한 대로 주전, 주후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기독교적 연호는 그 유래나 뜻으로 볼 때 아주 당연한 것이고, 큰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그 의미와 뜻도 잘 모른 체 육십갑자 연호와 12지 동물 띠에 관한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 올해에도 공공연히‘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란 말을 하면서 60연호와 12지 등의 띠, 생년월일(四柱)로 결혼이나 인간 중대사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논하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민속적인 의미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버려야 할 미신적인 용어들이다. 마지막으로 주전과 주후 같은 신앙적인 연호가 세계 공용의 연호가 된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요 긍지를 가져야 할 연호이다. 이런 연호를 두고 비기독교적인 60연호와 12지를 선호하는 것은 우리 자체적인 모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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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박동철 장로] 감림산 기도원 ‘유엔 평화마을’ 꿈 이뤄지길
    양산 ‘감림산 기도원’ 하면 한국 기독교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저변에 잘 알려져 있다. 감림산 기도원은 경부고속도로 양산 구간 서쪽 영취산 자락에 자리한 국내서 범교단 큰 규모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오가는 길 눈에 잘 띄고 많은 집회가 연중 열리는 등 모범이 되는 기도원으로 유명하다. 감림산기도원이 더욱 이름난 것은 이옥란 원장의 헌신적 기도원운영으로 한국 개신교 교계에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가끔 휴가 겸 기도원 집회에 몇 번 참석한 기억이 있다. 최근 들어 감림산 기도원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도원을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이다. 이옥란 원장의 근황과 앞으로 기도원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감림산기도원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기도원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2만여 평의 부지를 출연하여 ‘유엔 평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나가는 소식으로 들을만했다. 감림산 기도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 것은 기도 후원을 요청하는 지인과 함께 기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다. 그리고 이 대형 사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겼다. 며칠 전 기도원 방문자리에서 이옥란 원장을 만날 수 있었고 지인들과 차담을 두어 시간 가졌다. 이 원장은 50년 넘게 사역하며 팔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인데도 불구 그 자리서 열정적으로 그동안의 기도원 사역을 설명해주었다. 자서전도 냈고 전국의 유명 부흥강사목사들이 칭찬하는 기도원원장이라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이 원장의 지나온 사역의 발자취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 계획하고 있는 ‘유엔평화마을’ 조성의 취지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 원장은 55년 전 1968년 10월 당시 수도사로서 평생 나환자를 섬기며 살기로 했다. 어느 날 양산 영취산을 바라보고 지나면서 생각 없이 산으로 들어가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도로 무작정 기도원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55년 기도원사역을 돌아보면서 한 날도 한 시간도 예수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고 나라 사랑의 마음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원장의 믿음이 마지막 사역 ‘유엔평화마을을 조성해보자’는 뜻이라고 밝혔다. 55년 기도원 사역기간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기도와 눈물의 광야였지만 80년부터 뜨겁게 몰려오는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어 복지원과 청소년사역 해외 선교지등의 사역의 열매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이 원장은 불타는 나라 사랑의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온 세상이 물질로만 풍요하고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영적양심의 마음으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토로했다. 이 원장은 지금껏 하나님이 주신 기도원 주변 넓은 땅을 출연하여 감사해야할 우선순위를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6.25 참전 나라의 참전 용사와 후손들에게 감사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솔직히 설파했다. 이곳에 ‘유엔평화마을’을 만들어 한국전쟁에 헌신해준 16개국에 감사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팔순을 넘은 할머니가 어마어마한 이러한 계획을 생각하다니 혼돈이 되었다. 이 원장은 설명 한마디 한마디에 물러섬이 없었다. 6.25 전쟁 70년 국민소득 4만 불을 바라 본 선진국이 된 이 나라가 전쟁 참전국과 당사들에게 감사한 것이 없는 것이 늘 맘 아프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듯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이원 장은 10년이 지나도 이 나라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민간차원에서 이들 참전국을 섬기고 후손들에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다가가자는 소망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재산 출연과 함께 정부에 법인 설립 요청을 했으나 별관심이 없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한 평생 기도원 사역을 통해 한국기독교 부흥의 밀알이 되었고 기도원사역이 점차 사라져가는 이때 일 년 내내 매일 기도집회를 지금껏 잇고 있는 이옥란 원장의 유엔평화마을 섬김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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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신년사] 경남기총 대표회장 강대열 목사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3년에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영과 육이 많이 움츠려지고 무너졌습니다. 이제 새해에는 움츠려지고 무너진 우리의 영과 육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물론 아직 우리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럴 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어나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움츠리고 무너진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도, 이룰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일어날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고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2023년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고 그 열매를 거두길 기대한다면 지금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실패와 절망, 그리고 영적 침체와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순종일 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누가 의인입니까?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들이 이제 실패와 절망, 그리고 영적 침체와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실패와 절망, 그리고 영적 침체와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빛을 발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은 비추어야 합니다.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일어나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이때 어두움과 캄캄한 곳에 갇힌 경남의 모든 영혼들이 살아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사60: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향해 어떤 빛을 비추어야 할까요? 그 첫 자리는 바로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전1: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2023년,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들이 일어나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비추어야 할 빛은 바로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입술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선한행실이 참 그리스도인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외쳐도 우리가 선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세상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마음과 귀를 닫아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남의 영혼들을 구원하려면 입술과 더불어 선한 삶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2023년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들이 지역과 이웃을 향해 복음에 합당한 선한 삶의 빛을 비추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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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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