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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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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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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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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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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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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신기성 장로] 다시스로 가는 배의 유혹을 물리칩시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배려하며 한 말이다. 먼저 선택권을 가지게 된 롯은 그의 눈에 기름지게 보였던 요단을 택하고 아브라함은 남은 땅 가나안을 택하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롯은 우상과 음란의 죄악으로 범벅이 된 소돔으로 빠져들어 패가망신하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 반면 아브라함은 롯이 외면한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게 되고 인간의 눈에는 척박한 것처럼 보였지만 믿음과 인내로 그 길을 개척해 기어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바꾸어 내게 된다. 요나는 앗수르를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라는 사명을 외면하고 황금과 환락이 판치는 다시스로 평안하게 살려고 도망쳤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롯과 요나는 힘든 곳,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길을 버리고 평안하고 세상적인 축복이 넘치는 길을 택했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쓰라린 좌절을 맛보게 된, 결과적으로 닮은 점이 있는 인물들이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엎질러진 꿀단지의 꿀을 발견한 파리떼들이 실컷 꿀을 빨아먹고는 정작 날아가려고 하는데 날개와 몸이 꿀에 달라붙어 죽어가면서 이런 바보같이 달콤함에 빠져서 목숨을 내어주게 되었음을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 멀리 보지 않더라도 코로나 이후에 달라진 교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공동식사 준비, 봉사, 섬김 등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힘든 것, 귀찮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지? 아프리카 오지에서 점심 사역, 에이즈 치유 사역 등을 위해 애를 쓰는 선교사님이 보내오는 편지를 보노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치스럽다는 미안함이 든다. 그 옛날 환락과 육신의 풍요를 구가하는 이들을 싣고 떠나던 다시스행 유람선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성경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 돌아서라고 말씀하신다. 죄악의 길인 다시스로 가는 배로 달려갈 것 아니라 좁은 길 곧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니느웨행의 길로 가는 우리 모두이길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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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5)
    사랑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성령님은 따스한 하나님이십니다. 부드러운 성령님,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은 큰 관심을 가지신 성령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성령님이시기에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사랑의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따뜻한 사랑의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변호사가 되어 변호해 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슬플 때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의 영, 격려의 영, 성령님은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사랑의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게 하시고 잘못된 길을 갈 때는 깨닫게도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사랑의 성령님은 거듭나게 해주시고 새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영감과 지혜주시고 성령의 좋은 열매 맺게 하십니다.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사랑의 성령님과 동행하며 좋은 관계 맺고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의 성령님 사랑해요’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의 성령님과 동행할 때 사랑의 사람, 사랑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성령님으로 부터 성령받으면 따뜻한 자로 사랑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성령 충만하면 열매가 맺힙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 열매입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열매입니다. 사랑은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하다가 포기하고 미워하면 실패합니다. 계속 사랑,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고 끝까지 관계가 좋아집니다. 가까운 사이의 관계에서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계속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열 번 잘해주다가 한 번 잘못하면 돌아서고 배반하게 됩니다. 인간의 죄성이기에 믿을 수 없습니다. 아홉 번 사랑해 주고 잘해준 것을 잊어버리고 한 가지 섭섭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합니다. 받은 사랑 하나라도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나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참 사랑이고 인간관계가 깨지지 않게 됩니다. 사랑이 중요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알면서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쉽습니다. 성령 받고 성령 충만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 힘이 생깁니다. 사랑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이 즐겁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는 성령충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힘듭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받으면 원수를 사랑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향해 보복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면 원수를 이기는 것이고 원수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누구와도 원수를 만들지 않고 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스데반과 다윗의 원수 사랑의 비결은 성령충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 충만,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랑으로 편지를 썼으며 성도를 향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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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2-07-14
  • [황권철 목사] 안드레(Andrew's Behind Stories)-실천의 사도
    순교자로서의 안드레    안드레(Andreva, Andrew)란 이름은 ‘남자다운, 용감한’이란 뜻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으로 남자답게 살다가 순교했다. 안드레는 헬라와 소아시아에서 선교했다. 카프카스 산맥에서 카스피 해 지역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고,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에 해당하는 비잔티움에서 그리스 지경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드라게, 마케도니아까지 여행하여 남쪽으로 고린도에서 파트로스까지 이르렀다.  그는 AD 69년 11월 30일에 파스트로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3일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가 받은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으나 안드레는 쉬지 않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기 시작했고 결국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관리들에게 요청했다. 사람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던 관리는 안드레의 몸을 감고 있던 밧줄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마지막 밧줄은 너무 강하게 매여 있었고 결국 안드레의 몸은 거의 죽게 된 상태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안드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오 그리스도 예수여, 나를 받으소서! 나는 당신을 보았고,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 안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영원한 왕국으로 내 영혼을 편안히 인도하소서!”.  그는 그리스의 항만 도시 파트라(Patra) 지방에서 총독의 부인을 안수하여 병을 고쳐 주었다. 이를 계기로 총독 부인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 외에도 많은 이적들을 행함으로 파트라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를 시기한 총독이 안드레를 X자 형 십자가에 달아 처형하므로 순교했다. 당시 네로 황제 치하였던 AD 60년경이었다. 그곳에는 지금의 제일 큰 동방교회 성 안드레 성당이 세워져 있다. 성당 안에는 안드레 사도의 순교화가 그려져 있고 X자 형 십자가는 안드레 십자가로 불린다. 스코틀랜드 국기는 X자 형 십자가이다. 주후 832년경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전쟁할 때 X형 십자가에 달린 사도 안드레가 나타나 스코틀랜드를 도와 승리했다고 한다. 안드레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교회 전승에 나타난 안드레    그는 교회 성장에 관한 전승에서 다시 등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흑해 북부 지역인 스키티아(Scythia)는 안드레가 그의 활동지역으로 할당받은 곳으로 되어 있다. 안드레에 관해 전승되어 오는 다음과 문헌들이 있다.  안드레와 맛디아 행전(Acts of Andrew and Matthias), 사도행전의 외경(Apocryphal Acts)과 신약의 외경(Apocrypha of the New Testament)의하면 식인종들이 잡은 지 30일 째 되는 날 먹으려고 눈을 멀게 하고 매어 놓은 맛디아를 안드레가 극적으로 구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27일 째 되는 날 예수는 안드레에게 나타나서 그의 동료를 구출할 것을 지시한다. 이에 안드레는 주님이 조종하는 배를 타고 간다. 배가 육지에 닿자 안드레는 맛디아를 구출하고 사악한 땅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고 나중에는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구출을 받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석상에서 생겨난 물로 도시가 잠기고, 이후 구출되어 거주민들을 회개시켜 도시를 재건하고 민중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 이야기는 그레고리우스의 역본 뿐 아니라 헬라어와 시리아어 그리고 라틴어 역본 일부에도남아 있다.  안드레와 바울 행전(Acts of Andrew and Paul)에 등장하는 모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곱트어로만 된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신약의 외경(Apocrypha of the New Testment)이라 불리는 동방행전(Oriental Acts)에 나오는 작품들이다. 바울은 바다에 뛰어 들어가 지하세계를 방문하는데 그는 돌아와서 유다를 보았다고 안드레에게 이야기 한다. 유다의 예수 배반, 그의 회개, 사단의 유혹, 예수의 직접 방문 그리고 유다의 긍극적 운명 등 많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지하세계에서 가져온 나뭇조각으로 쳤을 때 그들 앞에 잠겨져 있던 도시의 문이 사라지게 된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논쟁을 한 뒤 사기죄로 범한 약 2만 7천명을 회개시킨다.  안드레의 단편 이야기(Fragmentary Story of Andrew), 신약의 외경(Apocrypha of the New Testment) 중 하나인 사도들의 동방행전들(Oriental Acts)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현재 곱트어로 된 것만 현존할 뿐이다. 한 여자가 사막에서 그녀의 사생아를 죽여 토막내어 잘라 그것을 개의 먹이로 주었다. 안드레가 동료 빌립과 함께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그는 개에게 그 여자가 저지른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발산에서 예수의 이적을 암시하는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살해된 어린애의 조작들이 토해져 나와 결합되고 다시 원래의 웃고 우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안드레 행전(Acts of Andrew)은 주로 사도행전 외경(Apocryphal Acts)의 형태로 취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류시우스(Leucius)가 기록한 마니교인들(Manicheans)이 정경 사도행전 대신으로 사용하는 행전 중 맨 끝의 것이다. 현재는 투르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os of Tours, AD 538-594)가 편집한 축소된 라틴어판 몇몇 단편들이 남아 있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생략되고 편집된 이 필사본은 안드레가 아가야 지방에서 행했던 기적뿐 만 아니라 본도 비두니아 트라키아 마게도냐 등지에서 행했던 기적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원전에 대해 최초의 증인으로 보이는 유세비우스는 그것을 위서(僞書)축에도 못 끼는 순전히 사악하고 불경스러운 이단들의 위조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2-07-14
  • [김성수 총장] 가치 중립적인 교육은 없다!
    교육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교육이 본질상 가치중립적인(value-free)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신앙이나 가치관과는 관계없이 중립적인(neutral) 과학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가르치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는 객관적인 진리를 교육하는 기관이고, 교회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어떤 것을 심어주는 기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한다는 것은 아동 및 청소년들을 어떤 목적을 향해 인도해 가고, 그들의 태도와 성향을 형성해 주고, 그들의 사상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활동은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우리의 관점, 교육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특정한 관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신앙에 기초한 어떤 비전과 관점, 그리고 이러한 비전과 관점을 추구하고자 애쓰는 우리의 헌신과 노력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항상 종교적인 활동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흥미롭고 인기 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학생 중심의 교육관과 내용중심의 교육관이 심각하게 충돌하고 있는 한 고등학교 학생들의 갈등을 폭로하였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는 각자 달랐겠지만 영화를 어떻게 평가했든 간에 이 영화가 교육의 중요한 어떤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는 그들 모두 한결 같이 동의하였습니다. 즉, 교육은 교육목적이나 과정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가진 신념, 세계관 혹은 종교적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는 그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교육이 하나님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체하는 그 어떤 것을 경배하도록 한다는 성경적인 관점을 잘 증명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까지도 그토록 신뢰하는 공립학교는 겉으로는 종교적 중립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을 중심에 두어 인간이 진리와 실체의 궁극적인 결정자라고 강조하는 교육구조나 교육과정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공교육의 종교적 우상을 드러내면서 아테네에서의 바울처럼 교육활동의 참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립학교 교육자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공립학교교육에서 숭배하는 대상, 그리고 그들의 학생들에게 숭배하도록 할 대상을 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배의 대상을 선택할 권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택의 권리를 빼앗고 개종을 강요하는 것은 각자 자신 나름대로의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교회교육과 학교교육은 물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모든 교육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과 관점에 의해서 인도되면 정말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을 이끌어 가는 비전과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중심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 창조세계를 향한 그 분의 언약이 말씀 그대로 실현되도록 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성취하는 일에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와 사업과 교육을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유일하게 참된 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교육의 영역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가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이 왕국 비전(Kingdom vision)의 구현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분의 죽으심과 생명의 부활로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은, 우리의 결점과 죄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이미 여기에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육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심어져 있지만 앞으로 온전히 성취되어질 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우리의 자녀들에게 도전을 주고 이들을 준비시키는 활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학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표지(signpost)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학교는 세속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그 자체로,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는 모든 교육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증진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며, 그리스도께서 구속자이자 주님이심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선포하는 모든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보다 더 크신 능력을 가지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07-14
  • [최호숙 목사] 장마와 인생의 의미
    장맛비 너는 누구냐? 내가 너의 이름을 주야장천(晝夜長川)이라 불러주마.... 교회를 건축하고 보니 반지하로 되어 있는 부속실들에 누수가 있고 습기가 차고 관리하기가 참 힘이 든다. 그래서 장마라는 단어가 괴로움의 단어로 다가온다. 장마가 한자어인 줄 알았는데 순수 우리말 이란다. 길다는 의미의 ‘댱’은 이해가 되는데 ;‘마’는 무엇일까? ‘마’ 는 ‘마ㅎ’로 물을 가리키는 옛말이란다. 그래서 장마는 길다는 의미의 ‘댱’과 물을 의미하는 ‘마ㅎ’가 합쳐져 만들어진 ‘댱마ㅎ’에서 왔다고 한다. 1500년대 중반 이후부터 “길게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댱마ㅎ’로 표현되다가 1700년대 후반, ‘쟝마’ 로 표기 일제 강점기 이후에 ‘장마’로 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 일본 모두 장마를 매우(梅雨)라고 부르는데, 중국은 ‘메이우’, 일본은 ‘바이우’라고 한다. 모두 “매실이 익어갈 때 길게 내리는 비”란 의미이며, 영미권에서는 장마를 “비 오는 계절”이란 표현으로 ‘Rainy Season’이라고 부른다. 이 장마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한다. 첫 번째 의미 장마는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장마는 매년 오는 것인데, 올해도 예외 없이 우리 곁에 찾아왔다. 인생의 고난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찾아간다. 그 고난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미국의 심장 전문 의사 로버트 엘리엇(Robert S. Eliot)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If not be a possibility of avoiding and enjoy!”는 말을 했다. 그러나 고온 다습에 곰팡이에 퀴퀴한 냄새에 옥상 배수로 막혀 물 넘침 등등. 현실은 즐기기에 너무 가혹하다. 그리할지라도 비오는 소리를 악기 연주 소리로 생각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는 달달한 차 한 잔으로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곰팡이 습기 제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며 제습기 물을 비우고 집 안을 청소하는 것도 건강을 위한 좋은 운동일 것이다. 외출하지 않고 조용히 집에서 밀린 인생 과제를 수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골에서 비가 오는 날에는 빈대떡 부침개를 부쳐 먹는 날이기도 했다. 독자들은 이런 삶이 즐겁지 아니한가? 두 번째 의미 장마는 반드시 지나간다. 누구에게나 장마와 같은 힘든 시기는 온다. 그러나 그것은 때가 되면 지나간다. 우리 인생의 고난의 때도 반드시 지나가게 되어 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고 하였다. 고난 고통의 때는 반드시 지나가며 우리에겐 영광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율법 주석서인 미드라쉬(Midrash)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다윗 왕이 반지 세공업자를 불러 “네가 나를 위하여 반지를 만들되, 큰 전쟁에서 절망에 빠져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작은 글귀를 이 반지 속에다 새겨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고민하던 세공업자가 지혜로운 솔로몬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더니 솔로몬이 알려준 글귀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였다. 유대인들은 나치 학살에도 이 문구를 생각하며 이겨 냈다고 한다. 또한 탈무드에 승자가 즐겨 쓰는 말은 “한번 해 보자”이고, 패자가 즐겨 쓰는 말은 “해봐야 별수 없다” 이다. 삶에는 항상 고난이 있다. 고난 후에 영광을 바라보고 승리의 삶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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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3
    I. 서언(序言) ‘목사님, 목회자의 급여에 대한 예산을 세울 때 공식적인 명칭은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되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직까지는 여기에 대한 범 교단적인 공식적인 명칭이 없기 때문에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목회자의 세금납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면서 목회의 일이 성역(聖役)이냐 일반 근로자의 개념이냐를 두고 급여의 명칭에 대한 논의도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성역이냐 근로자의 개념이냐? 여기에 따라서 그 급여의 명칭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지면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 용어를 논하고자 한다. II. 목회자의 급여(給與) 용어의 종류 급여에 대한 용어는 교회 뿐 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봉급(俸給)을 비롯해서 급여(給與), 급료(給料), 보수(報酬), 월급(月給), 임금(賃金) 등 많은 용어들이 있다. 교회서도 생활비(生活費), 사례비(謝禮費), 목회비(牧會費), 성역비(聖役費) 등으로 역시 통일되지 않는 다양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또 요즈음은 지불하다.’란 뜻인 영어의 ‘pay’ 또는 ‘payment’(임금. 보수)란 말도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용어들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모두 비슷해서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말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구별해야 될 용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월급은 한 달 단위로 받는 급료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고, 보수는 고마운 일을 해 준 노력의 대가(代價)를 의미한다. 사례비도 여기에 해당된다. 또한 이 모든 용어들을 포괄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말은 급여(給與)이다. 사전적인 뜻으로 보면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의 직원이 받는 봉급, 수당, 연금 기타 근무에 대한 대가 및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치르는 임금 따위의 총칭’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급여’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생활비’, ‘사례비’라는 말이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목회비’, ‘성역비’란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교계 나름대로의 공식적인 용어가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이 말들의 사전적 의미와 교회에서 사용하게 된 배경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례비’란 용어를 보자. 사례비의 사전적인 뜻은 ‘언행이나 금품으로 상대방에게 고마운 뜻을 나타내는 인사’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정하게 정해진 봉급의 개념이 아닌 특정한 일에 대한 감사의 표현과 인사의 뜻이 담겨진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 원 뜻과는 달리 일반사회 직장인의 봉급의 개념으로 목회자의 급여를 ‘사례비’로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용어의 사용은 의미상으로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는 이 말을 지금까지 사용하게 되었을까? 분명하진 않지만 그 유래를 추론해 본다면 과거 초창기의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은 오늘날과 같이 일정한 급여를 받지 못하고 성도들이 드리는 성미(誠米)나 어떤 일들에서 마음으로 드려진 ‘사례금’으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지금의 ‘사례비’란 명칭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사례금’이란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상황이나 사전적인 용어로는 맞지 않는 용어이다. 그다음 ‘보수’라는 말이다. 사전적 뜻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좋은 의미의 말이다. 또한 성경(민18:31)에도 제사장에게 ‘보수’를 지급하라는 말씀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에는 그 좋은 뜻과는 달리 ‘노동의 대가로 주고받는 것’이란 다소 격하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 말은 사례비처럼 일정하게 주어지는 급여가 아니어서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에 어떤 교회 언어 전문가는 이런 용어 대신 목회비나 성역비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이미 많은 교회들이 ‘목회비’란 항목을 따로 포괄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다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은 ‘생활비’이다. 사전적인 뜻은 ‘먹고 입고 쓰는 등의 살림살이에 사용하는 비용’이란 뜻이다. 그러나 어떤 전문가는 이 말은 목회자의 직무적인 개념이 들어가지 않아서 적절하지 않다고도 했다. 일리가 있기도 하다. 이에 이런 제안을 해본다. ‘생활비’ 앞에 ‘목회자’란 단서를 붙여서 ‘목회자 생활비’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III . 결 어(結語) 결론적으로 우리의 기독교 용어는 전문 용어 조차도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이 있다. 그 뿐 아니라 타 종교의 용어들도 분별없이 마구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면에서 하루 빨리 우리의 용어들이 정리되고 정착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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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조희완 목사] 면역력 강화 (고전15:9-11)
    지난 2년이 넘도록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면역력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면역력이 높은 사람은 전염병에 감염될 확률이 낮고 상대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무래도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높은 게 사실입니다. 기저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을 피하도록 권면하는 이유도 면역력이 낮아서 감염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면역(免疫)을 영어로 ‘immune’ 혹은 ‘immunity’라고 하는데 ‘면제’ 혹은 ‘면제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해로운 것으로부터 면제를 받으면 좋은 일입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 감염되지 않고 면제를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현대인들이 다 각종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을 다 두려워하는데 고통스럽게 하는 악성 바이러스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는 면역력을 길러야 합니다. 신체적으로만 면역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신앙적으로도 면역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중에 ‘시험에 들었다’ ‘상처를 받았다’ ‘기분이 나쁘다’ ‘무엇 때문에 섭섭하다’는 말을 유난히 자주 표출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은 영적으로 연약하고 신앙적인 면역력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섭섭한 말을 듣거나 상처가 되는 말을 듣더라도 마음에 담아두거나 시험에 들지 않고 믿음으로 잘 소회를 시킵니다.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평생 시험에 들지 않고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영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면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면 될까요? 첫째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고전15:10) 둘째로,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계12:11,12) 셋째로, 기도를 강화해야 합니다.(벧전4:7) 모두 면역력을 강화하셔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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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신재철 목사] 관리소장이 된 목사
    “그 어려운 개척교회 목사로 어떻게 살려고요.” 부목사 생활을 정리한다. 7년을 함께 했던 성도들, 밤낮 살피던 교회 건물과 시설, 어려운 일을 함께 치르던 동료들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교회 가족들이 손을 잡고 위로와 격려를 건낸다. 자격 없는 내게 전해지는 감사 인사에는 민망한 마음마저 든다. 이제 모든 익숙한 것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또 걸음이 옮겨지는구나. 이제, 가장 속도 내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겼다. ‘개척지 선정? 개척 멤버? 비전 선포?’ 아니다. 오실 사역자를 위해 얼른 사택을 비워 드려야 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이 살 집을 찾아야 했다. 조급한 마음을 살피시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을까? 재정은 어려웠지만 넓은 집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개척 출발선에서 내 생에 가장 너른 집에서 살게 될 줄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우리 이런 아파트에서 살아도 돼요?” 개척교회 목사가 너무 큰 집에 사는 것 아니냐며 아내는 좋아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눈치다. 그렇지. 주변 시선이 염려도 되겠지. 나 역시 그런 부담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개척 선물이라며 우리 부부는 금방 재잘거렸다. 40세대, 한 동짜리 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 가정에 차고 넘치는 집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2단 콤보로 놀랍게 준비하신 선물을 그때까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삿짐이 부지런히 올라간다. 승강기로 이사를 하면 사다리차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사다리차로 이사를 해야 일하시는 분들이 덜 힘들다며 나를 설득했다. 그리고 최대한 일하는 사람들 덜 힘든 방식으로 이사를 진행하자는 제안에 나도 공감했다. 사다리차 덕에 빠르게 짐은 올라갔고 숨을 좀 돌리며 우리는 승강기에 함께 몸을 실었다. “관리소장 구함” 손 글씨로 써진 광고지가 붙어 있다. 업무는 주차장 청소와 분리수거장 관리 그리고 관리비 정산과 얼마간의 행정. 급여 80만 원. “해볼까?” 호기심 가득 안고 아내에게 구한 동의. “그러시던가.” 시원하게 응답한 아내. 나는 그렇게 입주민 대표와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여든 가까운 연세의 어르신이 관리를 해왔다는 상황을 전하며 생각보다 젊은 사람의 지원에 흥분하고 반기는 기색이 선명했다. 촉이 왔다. ‘이건 합격이다. 거래를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다.’ “아파트 측에서 원하시는 업무는 다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비처럼 상주 근무는 어렵습니다.” 당찬 제안이었다. 안되어도 그만이다. 일에 파묻혀서 목회를 못 할 정도로 살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목회를 접을 수 있겠는가. 새로 선임된 대표라는 분이 흔쾌히 손을 잡는다. 합격. 나는 그렇게 작은 공동주택의 관리소장이 되었다. 하나님 참, 나를 묘하게도 끌고 다니신다. 살길은 열어주시는데 편안한 길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계획에 없던 일하는 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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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오성한 목사] 임마누엘로 출발하라.
    임마누엘로 삶을 출발하라. 임마누엘로 모든 일을 한다면 당신 안에 잡자는 성령의 능력은 깨어날 것이다. 임마누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믿는 자는 임마누엘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은 모든 것을 회복시켜 놓으셨음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장갑이 손의 형상으로 끼려고 만들어 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끼시려고 만드신 것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려고 만드셨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이루어져 우리 안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임마누엘로 모든 것을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기도할 때마다 “함께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도록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간절함이 있어야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돈만이 최고인 줄 알고 사는 세상 속에 주신 엄청난 약속이 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으신다. 이 사실을 믿으면 된다. 간절함이 있어야 함께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다. 기도를 3시간하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이 좋으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에서 출발하라. 임마누엘을 믿는 다니엘은 뜻을 정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니엘 역시 사자 굴에 던짐을 받는 것도 감당할 수 있었다. 감옥의 속의 요셉은 임마누엘의 묵상으로 바로 왕 앞에 서는 기회가 주어 졌을 때 자신을 변병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임마누엘의 능력이 있는 자는 무엇을 하든 할 수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는 말씀은 사실이다. 예수를 잘 믿는 다는 것은 임마누엘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임마누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의 행함이 되기 때문에 능력의 행함이 된다. 느브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약 30미터나 되는 금 신상을 세웠음에도 기죽지 않게 되다. 믿는 자의 권세는 임마누엘의 믿음에서 나온다. 임마누엘로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고, 예수님의 능력이 내 능력임을 믿는 삶이 예수 믿는 믿음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 임마누엘이라는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셨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신 이유가 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려고 하는 이유를 알지 정확히 못하고 깨끗함만 원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임을 꼭 기억하자. 그것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함이다.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함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함이다.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함이다. 임마누엘을 위해 우리는 정결을 필요로 한다. 우리를 의롭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는 말씀은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성전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하셨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라는 말이 아니다. 인격적인 앎을 말한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 우리는 임마누엘이다. 우리 몸이 거룩한 집이 되었다. 우리 몸은 거룩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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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박동철 장로] 고성 공룡테마파크, 성경속의 공룡은? 그리고 복음
    며칠 전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 임원들이 수련회차 고성공룡테마파크를 찾았다. 당항포 1만여 평의 넓은 곳에 공룡의 다양한 캐릭터의 모형과 돔의 식물원, 한반도 공룡발자국 전시관 등 빼곡히 들어찬 각종 형상의 공룡들과 잠시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었다. 필자의 고향이자 친구인 이상근 군수의 배려로 친절한 관광해설사로부터 세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방문객들은 교회를 섬기는 장로들로서 멀고 먼 역사 속 공룡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데서 투어가 진행됐다. 이곳은 으레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의 방문지로서만 가볍게 여겨왔던 곳이다. 곳곳을 돌면서 우리는 머나먼 연대를 소환해서 우리 하나님의 창조세계 그리고 크고도 크게 심판했던 아득한 그때를 묵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공룡 하면 그날 해설사가 설명했듯이 진화론적 지질학자들이 주장하는 2만 5천 년 전 쥐라기공원을 펼쳐낼 수 밖에 없다. 초식에서부터 육식 그리고 바다 깊은 곳에서 넘치도록 생존했던 공룡의 세계. 그 거대한 공룡의 세계를 예나 지금이나 상상력으로 어린 세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육현장이다. 공룡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땅의 고대 역사만 궁금해지고 호기심만 불러일으킨다. 공룡이 한때 이 땅을 어떻게 지배했던 생명체이었을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을 믿는 성도들도 6천여 년의 창조 역사 속에서 수억 년 전의 공룡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복잡한 생각 속에서 해설사와 함께 고성공룡테마파크를 돌면서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눠갔다. 해설사 선생은 잡다한 지식을 갖춘 자로서 비기독교인이면서도 성경의 이야기를 자주 원용해 쓰기도 했다. 우선 공룡이 어떻게 멸종되었을까. 노아의 홍수 때 일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간간이 예화 속의 틀리게 설명하는 성경 내용을 함께 수정해가면서 얘기는 더욱 진지해갔다. 여러 장로들과 함께한 부인 권사들의 질문과 답변을 취재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2억 5천 년 전의 쥐라기 연대를 동의 할 수 없다는 점. 세상의 고고학자들이 지질시대를 임의로 정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러면 공룡이 세상을 지배했던 것은 사실이라면 언제 멸종했을까. 당연히 노아의 대홍수 때 이 땅에서 멸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성경에 노아 홍수전 공룡의 유사한 생명체의 흔적이 없을까.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노아 때 대홍수 이전의 기사는 창세기 6장에 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 땅위의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드디어 모든 생물 공중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고 하고 하나님은 대홍수의 심판을 내리신다. 분명한 것은 대홍수이전 사람도 네피림이란 거인이요, 모든 수목과 공룡 등 몸집이 거대한 생명체가 대홍수와 함께 지각 대변동으로 변해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택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와 함께 공룡의 선택도 함께 했을까. 알 길이 없다. 성경학자들은 욥기 40장과 41장에 나오는 거대한 동물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공룡으로 해석하면서 노아 이후 공룡의 생존을 추정하지만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이후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거대한 생명체들이다. 창조과학 진화과학 모두 설명하는 것은 대홍수 후 하늘의 수막이 터짐으로써 자외선으로 인한 이 땅의 생명 환경체는 오늘날의 작은 생명 사이즈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쯤 해서 대홍수와 공룡의 멸종을 두고 어떻게 복음으로 이해해야 할까.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공룡의 완전한 멸종을 이해하고 우리는 다가올 다음의 대심판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우리는 이미 다음 그때 미리 살아난 은혜 입은 우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그 지극한 은혜로. 그리고 그때 심판받을 이웃을 위해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린 다음 세대들에게 진화론자들이 황당하게 펼치는 공룡을 성경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널리 알리고 가르쳐야하겠다는 느낌을 가진 하루였다. 이것이 구원의 새 언약을 받은 우리들이 지금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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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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