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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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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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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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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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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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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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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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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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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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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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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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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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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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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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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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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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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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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무엇을 봅니까?
- 어느 책에서 본 한 교회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시절 남편을 여의고 유복자인 딸을 낳고 청상과부가 된 이 권사님은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온갖 장사를 하면서 딸을 키웠습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인지 딸은 유학까지 갔다 와서 어느 대학교의 교수로 임용이 되었고 유능한 교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딸은 고등학교 이후로 교회에 발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딸은 문득 많이 늙어버린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애잔한 마음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무엇이 제일 하고 싶으세요? 엄마가 원하는 것이라면 제가 뭐든지 해 드릴게요.” 그 질문에 어머니는 “나는 무엇보다 네가 잘 되는 것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나에게 뭔가를 해 주려고 한다면 주일에 교회에 갔다 오는 것을 좀 도와주면 좋겠구나.”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딸은 어머니의 의도를 알고 별로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그 주일에 교회를 따라 나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일 날, 딸은 어머니가 잠시 전도회 모임을 간 사이에 교회 휴게실에서 혼자 쉬고 있다가 여자 성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어보니 거의 모든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들도 별 수 없군.” 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고 2층 통로 쪽 의자에 앉아 있는데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이 성적이 안 되니 교수님 재량으로 기부 입학을 할 수 없겠느냐는 청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교회 장로라는 분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치가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2층 회의실에서 몇 명의 성도들이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교회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에 분노하면서 어머니 권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이야기를 하며 “엄마, 어찌 이런 교회를 다녀요? 아예 일요일에 소풍을 가는 것이 더 낫겠어요.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을래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권사님은 딸을 보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평생을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교회에 딱 하루 나와서 참 많은 안 좋은 것들을 보았구나.” 그 말에 딸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젊어서 배우지 못한 어머니가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분이었음을 직감하고는 그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저녁, 몇몇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이야기 주제는 지금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어내며 험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친구들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함께 앉은 미켈란젤로는 전혀 자신들의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흰 물감으로 화폭을 가득 칠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다 까만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향하여 묻습니다. “자네들은 지금 내 캔버스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러자 친구들은 그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쳐다보면서 모두가 한 입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까만 점밖에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자네들이 그것을 보리라고 짐작했었지.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다르다네. 내가 보는 것은 이 화폭의 하얗고 넓은 부분이라네.” 독자 여러분, 미켈란젤로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다 아시겠지요? 사람들에게는 검은 점 같은 오점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의 좋은 여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선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보다 그가 가진 장점을 먼저 보고 그것을 격려하고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그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고 나의 충고나 조언 또한 기쁨으로 받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무엇을 먼저 보십니까? 바르게 보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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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무엇을 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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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나를 아시 나이다
- 심리학자 Ungelsma는 그의 저서 “가면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Phoniness)에서 인간을 Being(존재)이 아닌 Becoming(되어진 자)라고 정의하였다. 인간은 결코 To be(스스로의 존재)는 될 수 없는 존재이다. 환경에 대해 인간은 Being으로 존재하느냐 Becoming으로 존재하느냐의 물음은 인간이 환경을 만드느냐 아니면 환경이 인간을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환경론자들은 Locke의 백지설에 근거하여 환경이 인간 됨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인간존재의 양상은 우리의 사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철학적 의미가 있다. 인간은 神처럼 전지전능하지도, 동물처럼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닌 중간적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환경 속에서 항상 문제 상황(Aporia)에 직면해 있다. Aporia에 대한 대응 방식은 동물은 본능에 구비된 방식으로 대응하나, 인간은 본능 외에 이성적 사고를 통해 대응하기에 환경에 잘 적응한다. 나를 미워한다고 나도 미워하고, 가난하다고 도둑이 되고 환경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산다면 우리는 Being이 되지 못하고 Becoming으로 전락하여 나라는 존재가 상실됨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란 환경 속에서의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 이에 Ungelsma는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사회학자인 Cooley는 “Looking glass of Self ”(거울 자아 이론)에서 거울 속에 비친 나, 즉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나, 타인에게 알려진 나를 인식할 때 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정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가? 사람마다 나에 대한 평가가 다른 것은 내가 나를 잘 모르고 남도 나를 잘 모른다는 의미다. 나를 정확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아시는 내가 나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 139:1절에 다윗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안다”는 말에는 희랍어로 οιδα와 γινωςκω가 있다. 오이다는 배워서 아는 것, 기노스코는 경험해서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는 지식은 인간처럼 배워서 경험해서가 아닌, 전지하시기에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너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네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하였다. 나다나엘은 놀라며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반문한다(요1:47). 바울은 육체에 찌르는 가시가 있어 세 번이나 빼달라고 기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바울이 자만할 것을 미리 아시고 가시를 준 것이라 하였다(고후12:7). 역대상 17:18절에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까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 라고 하였다. 다윗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 보다 자기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격스러운 고백이다. 나의 앉고 일어섬, 나의 생각, 나의 모든 길, 눕는 것, 모든 행위, 내 혀의 말, 나의 허물과 죄, 나의 연약함과 단점, 나의 머리털 수까지 다 아시고도 사랑하는 그 안에 내 현실과 존재감이 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 속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아는 지식만큼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Becoming의 존재가 아닌 Being의 존재로서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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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나를 아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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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내 생각이나 경험을 믿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신 자신을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렇게 여겨야 한다. 많은 사람이 내 생각이나 경험을 믿는다. 내 생각에 갇혀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스스로의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혼란스럽다.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받아들이므로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내 생각대로 예수를 믿은 사람이 있다. 그래선 안 된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을 영적 자폐증 증상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내 생각이 어떠하던지 10년, 20년, 30년 이상 가지고 있던 생각일지라도 성경에서 그렇지 않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고정관념이 있고, 이미 굳어진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그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성경대로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학자의 마음이다. 믿음으로 인정하고 환영하면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음을 성령께서 발견하게 할 것이다. 당신 마음에 새 영이 임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당신 자신을 기름부음이 넘침을 인정할 때 새 마음이 생겼음을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영접만 한다면 성령님은 이미 당신 안에 충만하게 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로 충만한 당신을 볼 수 있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임마누엘의 기름부음이 넘쳐 남을 믿고 능력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어떻게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나? 성경대로 믿으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말씀이 그런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안타깝게 말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라고 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했다. 성경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생각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믿는 눈이 열리는 것이 “지혜와 계시의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열어 달라고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도 그렇게 간구해야 한다. 말씀대로 믿으면 아주 쉽다. 하나님의 말씀한대로 믿겠다고 결정하고 나면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말씀대로 믿겠다고 결정하면 신바람이 난다. 더 감사하다. "아하! 몰랐는데 이게 이렇구나! 야, 몰랐더니만 이게 사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을 더 크게 여기면 영적인 전투에서 지는 것이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함이 두꺼운 성경 전부를 다 기억하며 묵상하라는 말씀일까? 그렇다. 성경 전부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 전부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메시지 한다. 인간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시드기야 왕 때 유다가 멸망한다. 시드기야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눈이 뽑히고 소고랑에 차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니 유다의 왕족과 유다는 완전히 망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다. 앞에 잡혀간 여호야긴 왕을 하나님은 길게 살려 두신다. 여호야긴은 3개월 남짓 유다의 왕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 예수님의 조상이 되도록 하셨다. 그가 여고냐(마1:11)이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약속을 지켜 나가시는 것이 성경 이야기이고, 역사 이야기다. 바벨론을 급하게 세우신 것도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한 작업이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정책이 달랐다. 앗수르는 정복한 국가를 말살시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정복한 나라를 말살시키기 위해 여러 민족과 혼혈되게 해 버린다. 그러면 누가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이렇게 이스라엘은 흩어져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다. 그렇게 강성했던 앗수르를 갑자기 멸망시켜 버렸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통해 앗수르 군대 185,000명의 젊은이들이 송장이 되어 버렸으니 앗수르가 견디기가 힘들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바벨론을 일으키시고 앗수르를 정복하셨다. 앗수르를 정복한 바벨론의 정책은 앗수르와 다름을 볼 수 있다. 포로를 등용하기도 한다. 왕이 먹는 진미를 똑같이 먹이면서 인재들을 범국가적으로 뽑아서 공부를 시켜 120방백으로 나누어 그들을 등용시킨다. 포로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을 준 것 같다. 유대인들이 회당도 가질 수가 있었다.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믿는 일까지 일어난다(단4장). 바벨론에 잡혀간 여호야긴(여고냐)를 바벨론에 항복하여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 포로 잡혀간 지 37년 후에 회복된다(왕하25:27). 이렇게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일을 이방나라의 정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어가심이 놀랍지 않는가?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다. 예수님을 보내셨고 해결하셨다는 이야기다. 예수를 믿으라는 이야기다. 말씀대로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당신 안에 영원토록 좌정하신 임마누엘을 믿어야 한다. 당신 안에 있는 기름부음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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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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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술 권하는 교회 친구
- “야간 자율학습. 학원. 교회. 집” 고등학생 때 내 동선의 전부다. 누가 봐도 바른학생의 모습이다. 물론 나를 돌보고 계신 이모님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곳이 늘 눈에 가시였겠지만. 그날도 루틴에 충실했다. 부족한 과목을 메우기 위해 학원을 가고 있었다. 학원 빌딩 바로 앞에는 작은 포장마차가 있다. 어묵과 떡볶이도 있지만 가볍게 소주 한잔 기울이는 사람들도 섞여 있는 곳이다. 별 생각 없이 바라 본 포차에 익숙한 사람이 보인다. 그도 나를 보았고 내게 손짓한다. 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는 친구. 여자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 늘 우러러 보며 동경했던, 교회친구다. “어디가? 한잔 하고 가.” 친구 주변에는 다른 교회 친구들도 있었고 청년부 형도 있었다. 정겹게 교제(?)를 나누는 모습에 더해진 술 한 잔이 내게는 너무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냥 어벌쩡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마치 내가 몰래 술 마시다 걸린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친구들 표정은 정말 평온한데. 교회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은 여전히 평안하다. 찬양인도를 하고, 헌금 위원을 하고, 대표기도를 한다. 내가 문제일까? 친구들이 누리는 극강의 평안이 이상해 보인다. 예배 후 사적인 교제들이 이어진다. 어떤 아이들은 피아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찬양을 부르고, 어떤 경건파 친구들은 지하로 내려가 기도를 한다. 집안의 눈치를 보며 교회 다니던 내게는 그런 2부 행사가 쉽지 않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는 내게 포장마차의 무리들이 나를 부른다. “00형 집에 갈 건데, 같이 갈래? 잠깐 놀다 가라.” 포장마차에서 모임을 주도하던 청년부 형의 자취집에 가자는 친구의 권유였다. 부담도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함께 한다. 부엌 하나에 작은 방 하나. 그곳에 남자 여럿이 모였다. 익숙하게 어떤 것을 꺼내 입에 문다. 단체 흡연이 시작된 것이다. 소주를 권했듯 친구는 나를 챙기며 따뜻한 미소로 한 대 권한다. 머리가 좀 복잡하다. 신앙이 아니라도 술과 담배는 학생이 할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는데, 지금 내게 던져진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겸연쩍 웃으며 부드럽게 거절하고 적당히 어울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 극강의 보호막을 치며 친구들의 문화를 거절했지만 나도 변하고 있었다. 헐렁한 양복바지, 하얀색 셔츠. 머리에는 과한 무스. 당시 오랜만에 만났던 내 초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멀리하기도 했다. 내가 좀 이상해 졌다는 말이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 돌았다는 이야기를 성인이 된 후 듣게 되었다. “너 그때 완전 날라리였어.” 어떤 친구의 직설에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렇게 교회 다니는 날라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흡연과 음주” 지금 생각해 보면 신앙의 핵심은 아니지 싶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두 가지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목사라서 안하냐는 질문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니다. 일단 맛도 없고 돈이 들고 건강에 유익도 없는 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다. 굳이 신앙적인 이유를 꼽아 보자면, 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다 따르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하지 말자는 신념이다. 믿음으로 포장해보지만 역시나 맛없는 것에는 유혹이 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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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술 권하는 교회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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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진영논리 내로남불 디스토피아 세상?
- 성경 누가복음 9장을 읽으면 예수님의 권능의 사역 정점을 보는듯하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귀신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 광채를 보이시기도 했다. 간간이 인자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과 얘기했으며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고치시고 제자들이 누가 크냐를 논쟁할 때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누구든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설파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라는 예수의 역설적 은혜의 유명한 말씀을 남겼다. 이때 제자 요한이 난데없는 고백을 한다. 누가복음 9장 49절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게 했나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훈련을 받는 중에 제자들 집단이 보인 요즘세상말로 진영논리다. 우리 제자들이 아니고 누가 귀신을 내어 쫓는다 말입니까. 말씀을 묵상하면서 역시 제자들도 사람들이고 세속 된 이기적 진영의 이해에 머물러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다. 다음 예수님은 유명한 말을 던진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요즘 세상의 집단 세계를 보면 너무나 진영논리 내로남불의 원리가 날로 굳어져 가고 있다. 정치판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쓰는 용어 중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진영논리 ‘내로남불’이라고 한다. 갈등과 대립이 없을 수 없는 사회 기능과 구조가 복잡해져가는 세상에 소통과 타협의 지혜를 찾을 수 없는 경직된 세상으로 치닫고 있다. 성숙한 사회로의 기대 속에 필연적인 과정의 공간으로 이해하려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국가 사회에 대한 정당정치 진영의 이해다툼이 국가 경제력을 따르지 못하면 사회 공동체는 균형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의 정치판에만 그렇다면 좀 나을 텐데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로 살고자 하는 교회를 둘러싼 교단과 노회의 정치판에도 진영논리 내로남불의 원리가 더 크게 퍼져있는 듯하다. 교회가 수시로 갈라지고 노회가 깨지고 교단 총회마저 갈기갈기 갈라져 있다. 우리가 함께 섬기는 기독교 교계, 은혜로 살고자 하는 주의 종들의 세계도 이러하니 언제 우리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될까. 하나님이 일손을 놓아버리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다. 누가복음 9장을 묵상해 보면 제자들은 이때 성화되고 훈련되어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입은 제자들은 각자 사명의 길을 떠나 복음을 위한 순교의 길을 찾아갔다. 오늘날의 주님의 종들도 다를 바가 있겠는가. 세상에서 판치는 세상의 승리와 성공을 위한 세속 된 게임의 룰에서 교회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교회와 세상이 공히 지향하는 다음의 세계는 유토피아(Utopia)다. 우리는 오직 천국의 소망에 마음을 다하는 제자들이다. 그래서 온 땅에 예수 복음만이 유토피아를 소망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토피아에 반론한 디스토피아(Dystopia)의 지배적 예언을 설파하는 많은 서적들이 나오고 있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환경이 파괴되고 동성애가 횡행하고 핵 전쟁의 위험이 커져가는 세상의 변화에 진영논리에 갇힌 군상들이 사회를 통제할 때 세상은 유토피아는커녕 암흑의 세상에 들어가고 만다는 예측의 메시지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소설로서 이러한 메시지를 던졌다. 최근에 같은 메시지의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다. 뭣보다 무서운 것은 진영논리의 세력들이 합리적 과학기술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선악(善惡)이 구분 안되는 캄캄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디스토피아다. 교회가 다시 회심하고 세상을 이끌어야 할 때이다. 선악의 분별을 배우는 교회마저 타락하여 디스토피아의 공간이 될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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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진영논리 내로남불 디스토피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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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 # 교회를 끊다. 앞집, 방 한 칸에 혼자 사는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를 ‘농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저씨가 농협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 시골 살이, 재미있는 게 별로 없었던 내게 자주 놀러오라는 아저씨 말에 민폐인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는 맛있는 빵도 있고 뭔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 집과 다르게 연탄 따위는 아끼지 않는 훈훈함이 있었고 이불 위에서 뒹구는 여유는 어린 내게도 충분히 쉼이 되었다. 분위기 최고다. “재철아, 교회 가보지 않을래?” 함께 교회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두렵기 보다는 뭔가 모를 설렘에 냉큼 엄마에게 물어본 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주일학교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는 농협 아저씨 방보다 더 좋았다. 친절했던 농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화장품 향 짙었던 선생님.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분위기 있는 양복 입은 부장 선생님. 앞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선생님까지.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악보를 보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던 노래도 재미났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집에 와서 재잘거리자 엄마는 100원을 주시며 예배에는 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남들 다 하는데 가만히 있지 말고 꼭 헌금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에 다녔더니 100원이 생겼다. 그것도 매주. 매 주 100원 들고 향하는 교회. 중간에 잠시 오락실 들러 50원은 오락 한 판하고, 남은 50원은 헌금하고. (엄마 죄송해요. 사실 하나님보다 엄마에게 더 미안하다.) 마룻바닥에서 나는 것인지, 방석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그 냄새도 참 좋았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힘차게 한 곡 부르고 나면 간식도 먹고 몇 명씩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부모님 따라 교회 나오는 친구들을 보면 설교든, 공부시간이든 늘 장난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것들... “아, 믿음이 이렇게 자라는 것인가?” 시간이 흘러...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당당했고 능숙하게 신발장에 신을 넣고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별 거 없다. “하나님, 저 왔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뭔가 대단한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보였던 헌금 위원 순번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경공부 시간에 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도 많아졌다. 그렇게 교회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교회 다니며 맞는 첫 성탄절, 우리 주일학교는 분주하게 연극을 준비했다.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함께 연극으로 꾸며야 했다. 각 자에게 배역이 주어지는 시간. 별 거 없는 아기 예수님 역할 (이 역은 진짜 그냥 누워만 있으면 된다.), 그냥 뒤에 탈을 쓰고 서 있으면 되는 동물들, 동방박사, 목자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누가 봐도 주인공은 요셉과 마리아다. 최근 교회 인싸로 등극한 나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요셉까지는 아니라도 박사 역할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동물 3”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그냥 탈을 쓰고 잘 서 있으면 된단다. 쓰린 속과 다르게 최대한 웃으며 첫 연습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정을 소화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깐. 그리고 성탄 행사가 잘 끝나고 나는 교회를 끊었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연락에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아, 믿음이 이렇게 별거 없구나.” epilogue 고향집 방문할 때면 조용히 그 교회를 찾습니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뀐 예배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하고, 주변을 괜히 살피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 있을까 싶은 마음일까요. 그러다가 고향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 초등학교 시절 1년 출석했던 주일학교 학생이라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다며 어색한 인사를 합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교회를 다닐 당시 첫 부임하신 아주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이름도 모르는 농협 아저씨를 아시는지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디 계신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아저씨가. 꼭 감사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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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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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 I. 서언(序言) 언젠가 모 교단의 노회장이 정기노회 개회예배 설교 시에‘명문노회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어떤 신문에서 이를 기사화 하면서‘명품노회 되기 위한 노력 다짐’이란 제목을 달았다.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 왜 다른 용어로 표기했을까? 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에‘명품을 통해 명인으로 인정받고, 명품은 장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에 답하는 그 대선후보는‘명품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함께하겠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의 ‘명품 대한민국’이란 말은 옳은 용어인가? 또한 어떤 도시에서는 발전하자는 표어를 내걸면서 ‘명품 00 도시를 만들자’고 했고, 또 어떤 도시는‘명품 도시’가 아닌, ‘명문 00 도시’라고 했다. 창원시의 경우도 ‘명품 창원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름 있는 목회자는 자신의 위임식 때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본 교회와 교인은 명품이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모습의 말로서 좋아 보이지만, 명품이란 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논하여 보고자 한다. II. 명품(名品)과 명문(名門)의 차이점 두 용어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명품’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으로는 이름 名(명)과 물건 혹은 품위 品(품)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나 작품’등을 말한다. 즉, 명품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사물 등의 뛰어난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 두 번째는‘명문’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을 보면, 이름 명(名), 집의 두 문을 의미하는 문 문(門)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 ‘이름 있는 문벌(門閥), 문벌이 있는 집안, 명가(名家)’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문은 사물이 아닌, 사람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나 가문, 모임, 단체 등의 뛰어남을 말할 때 사용되어지는 말인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평소 자주 사용하는 명문과 명품의 구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경우들을 보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경우가 다 그러하다. 심지어 대선후보 진영에서나 각 도시들에서도, 또 교계의 중진들까지도 이를 명확하게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의미의 용어들도 많이 있다. 명성이 있는 가문을 뜻하는 명가(名家), 명문에 속한 집안을 뜻하는 명문가(名文家), 정치를 잘하는 이름 있는 관원을 뜻하는 명관(名官), 문화를 높이고 정치를 잘하는 군주를 뜻하는 명군(名君), 이름난 선비를 말하는 명사(名士), 문벌이 좋은 집안을 뜻하는 명벌(名閥) 등 비슷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와 제언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명품과 명문의 경우처럼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 란 의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언어문화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문을 선호하고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는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당시 집현전 학자였든 ‘최만리’, ‘정창손’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문 선호 사상은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잔재는 계속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한자어를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일상용어를 바로 분석하고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용어처럼 애매모호한 말이나 뜻도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순수한 우리말이나 알기 쉬운 용어로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제언을 해본다. 예를 들면, 위의 두 용어 대신 ‘좋은 가문’, ‘좋은 노회’, ‘좋은 도시’, ‘좋은 대한민국’등이나 ‘이름 있는’, ‘아름다운’등의 표현을 쓰면 어떠할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에서는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쓰는 말이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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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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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피톤치드(Phytoncide)로 회복하라
- 우리 인생은 육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육신이 병들고 나약해지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지 치유 받고 건강하게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한다. 치유 방법 중에 “피톤치드(Phytoncide) 치유법”이 있다. 피톤치드는 합성어인데 식물을 뜻하는 ‘피톤(phyton), 과 살해, 죽이다를 뜻하는 ‘치드(cide)’를 합하여 만든 단어이다. 편백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자신을 위협하는 세균들과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천연물질 성분이 숲속의 향을 만들어 내는데 그 향이 피톤치드인 것이다. 사람들은 피톤치드 치료를 통해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우거진 숲을 찾아 휴양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을 위한 피톤치드 요법이 있듯이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도 있어야 한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μι)’이다. ‘아포카디스테미’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 된 것인데, ‘아포(ἀπό)’는 ‘~ 로부터’ 떨어지게 하다.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카디스테미(καθίστημι)는 임명하다, 되게 하다, 원래 상태로 돌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회복은 이전의 악한 상태를 떠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를 볼 때 위대한 지도자들도 연약한 모습을 지닌 회복의 대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 달변이 아닌 자신의 어눌함과 애굽과 바로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듭 부정했던(출 4:10-17) 사람이었고, 다윗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온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육체의 가시(고후 12:7)라는 질병을 포함한 신체적 연약함(갈 4:14), 그리고 능하지 못한 언변에 대한 타인의 지적(고후 10:10)을 스스로도 인정해야 했던(고후 11:6) 사도 바울,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불같았던 베드로 등등... 이런 약점이 있으면 당연히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대하게 이끈 능력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약하고 부족한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고전 고후 13:3) 하나님은 그 약함을 강함으로 선용(고후 12:9)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손상되고(broken) 손실된(lost) 부분까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회복의 주체는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숲에서 주님의 향기를 맛보며 살아가면 회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난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회복된 우리가 주위 사람들의 회복 과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예배 및 집회 금지 요청에 따라 한국 교회는 공적인 예배 중단의 위기까지 겪어야 했으며, 온라인 예배부터 인터넷 성찬식까지 다양한 신학적, 목회적 의견의 충돌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어두움을 저주하기보다는 한 줄기 빛을 비추라”라는 말처럼,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우려 섞인 비판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의 빛을 붙드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의 역사가 가정과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게 넘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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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피톤치드(Phytoncide)로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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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대접의 기쁨 (히13:1-2)
- 우리나라에서 최고급 호텔하면 롯데호텔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호텔은 수준이 있는 만큼 전 세계에서 유명한 분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그 롯데 호텔 총주방장으로 근무하시는 분 이병후 씨의 일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총주방장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많은 경력이 있는 분인 만큼 그 분이 만들어 내는 요리는 요리라기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그에게 질문하기를, 최고급호텔 총주방장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한번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요리사이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 같은 요리를 손님들이 맛보고 감탄할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최고급호텔인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만들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한 달에 한 번씩 양로원(養老院)을 방문해서 소박하게 만든 음식으로 어른들을 대접할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화려한 호텔 요리에 비해서 양로원 음식은 너무 초라하지만 그래도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서 노인들을 대접할 때 너무 기쁘다고 했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기쁜 것이 바로 대접(待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을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피차에 기쁨이 되고 서로 대접하는 마음이 풍성할 때 관계가 좋아지고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식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히13:1-2) 둘째는, 서로 인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잠15:23) 셋째는, 서로 기도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엡6:18-19) 사회적으로 메말라 가는 시대에 서로 아름다운 대접으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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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대접의 기쁨 (히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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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 믿음의 출발이 중요하다. 믿는 자에게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 기름부음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능력의 출발이 된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가르침이고, 동력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기름부음은 어떤 능력 그 이상이다. 기름부음은 믿는 자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활동하심이다. 영계는 보이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세계다. 영계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도 두려움이 떤다. 엘리사의 사환은 눈이 열리기 전에는 천군 천사들이 그렇게 많이 와 있는데도 모르고 떨었다. 큰일이라고 야단이었다. 골리앗이 앞에 있다고 두려움이 우리의 것인가? 영계가 안 보이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안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 똑같다. 영계가 열려 정확하게 보고, 정조준하면 한방이면 끝난다.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런 축복이다. 성경은 같은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반복해서 보여주시는 것인가? 보고 듣고 믿으라는 것이다. 한 사건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시고 끝내면 될 텐데 여러 사건으로 반복하시는 것은 믿지 못할까봐 거듭거듭 우리에게 배려해 주시는 사랑이다. 생명 걸고 이루어 놓은 업적을 인정해 주면 상대를 인격적으로 인정해 주는 일이 된다. 상대방이 생명 걸고 이룬 일을 몰라준다면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보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것을 인정해 드리고, 믿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대답이 아니다. 주님은 왜 우리의 죄를 없애셔야만 하셨나? 그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우리의 죄를 청산하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승천이 끝이 아니다. 다시 오셨다. “내가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고 하셨다. 그 분이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다시 오신 그 분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속량하셨다. 육신의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잊고 살면 안 된다. 늘 우리 마음속에 “영원토록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영원토록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하셨다.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해서 모셔 들이고,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고 늘 그분과 대화해야한다. 기름부음이 있다. 확신을 가져라.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고 했다. 자신을 확증해야 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했다(요일2:20,27). 기름부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의 결과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요일2:27)라고 말씀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있다고 말씀하셨다. 능력의 출발은 믿음에서 출발 된다. 기름부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물을 마셔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는 그 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고, 마시기만하면 영원토록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다.”고 하셨다. “마셔라”는 말과 “먹어라”는 말은 “믿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 말씀대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지금도 당신 뱃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한강보다 더 놀라운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요7:39).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의 역사가 당신에게 있다. 기름부음이 당신 안에 있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초다. 성령 충만이 신앙생활의 종점이 아니고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기름부음을 더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믿는 것이 기름부음에 장악되게 된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온전히 계실 뿐 아니라 성령의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넘침을 믿을 때 기름부음에 장악된다. 기름부음이 넘치고 있음을 말고 믿음의 확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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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