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6(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 오피니언
    • 성경
    2021-03-24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1-03-24
  • [김성수 총장] 오늘도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세계관’(worldview)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관건은 어떤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올바로 구분하고 올바로 대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교할 다른 창조주가 없는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느9:6).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에서’(ex. nihilo)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관의 특징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창조 설화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도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창조의 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신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신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신은 무질서(chaos, 혼돈)로 해체되는 성형을 지닌 물질을 원형인 이데아에 맞춰서 질서(cosmos)를 지닌 존재자로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도 이미 존재했던 어떤 영원한 질료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이단들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교적인 신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선언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혼돈’이라는 의미 즉, ‘어떤 사물이나 생각들이 뒤엉켜 있는 무질서의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로부터 질서 있는 우주(cosmos)를 만들어 내는 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정돈하여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며 잘못된 적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된 하늘과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공허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와 무의미를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1-2절의 말씀은 지상의 질서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혼돈하다’는 것은 아직 ‘모양이 없다’(formless) 또는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데 그것은 앞으로 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채워 넣고 색상을 칠해야 할 화가의 스케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골조 공사만 끝나고 마무리 공사와 내장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신축 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어졌다”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진흙 덩어리로 토기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모양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땅으로 장인의 걸작을 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처음부터 혼돈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보존하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계와 언제나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 계시면 피조물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그냥 자동으로 굴러가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신론자들(deists)들은 시계를 만든 후에 그 시계가 감아 놓은 태엽에 따라 돌아가도록 버려두고 잠자고 있는 시계공 할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신론의 신관은 창조 세계가 존속하는데 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 없게끔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자연법’을 내장해 놓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세상에는 그분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과 계시가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며,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그러한 활동을 하심은 만백성이 그분을 구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고 그분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세상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적 세계관의 한 기초석입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워낙 깊이 창조 세계와 관계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감화하시고 그 속에 영향을 미치시므로 그분을 조금이라도 묵상하지 않고는 창조 세계를 제대로 묵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주에 임재하신다면 세상은 그분의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그분의 지혜와 솜씨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03-24
  • [오성한 목사] 당신은 전도자다
    당신은 전도자임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전도자인 것을 믿지 못하는데 전도자로 살 수 없다.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전도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도자라는 의식 속에 잠겨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런 삶이 나오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자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유일하다. 전도하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전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해야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라고 하셨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한 대로 나는 보고 믿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다. 임마누엘을 인정하며 복음의 감격으로 열심히 숨 쉬고 살기만 하면 전도하는 것임을 알자. 요셉을 보라. 요셉은 이집트로 혼자 팔려갔다. 우울증에 걸릴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임마누엘의 기쁨이 있었다. 모여서 예배를 하거나 함께 찬양을 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임마누엘을 만끽하며, 열심히 살았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다. 성령 충만의 임마누엘의 사람은 요셉에게 하나님과 함께함을 보았던 사람들처럼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는 내가 전도자임을 알 때 삶이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라. 내가 노력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 그래서 당신은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기도로 부르짖고 주장하며 전도자라고 말하며 이 땅을 사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골교회 담임으로 갔다. 당시 나는 성경 읽기와 기도로 불이 붙어 있었다. 예배당 바로 옆집에 인사도 드리고, 전도하러 갔다. 옆집 아저씨는 교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다는 둥, 여름에 문을 못 연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나를 공격하는데 전도하러 갔던 나는 언어장애인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전도해야 할지 몰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전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전도 못 하는 장애인 같아 보였다. “주님, 저는 전도 못 하는 영적 장애인입니다.”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전도 훈련이라도 시켜달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한 일이 있다. 전도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도 현장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교회 한 번 와 보세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상대방의 공격적인 말에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상대방의 강한 어조에 멍해진 것이다. 넋 놓고 돌아와서는 주님 앞에 울기 시작했다. “주님 저는 전도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전도할 줄 모르는 영적 불구입니다.” “주님, 저를 전도 훈련 좀 시켜주세요.”라고 통곡을 했던 일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전도자라고 생각하고 살지 못했다. 당시 성령의 만지심이 있고 난 뒤 3년을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다고 정신이 없었던 기간이었으니 마음만 뜨거웠던 것 같다. 전도 훈련받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C.C.C에서 교역자를 대상으로 NLTC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처음 받아보는 전도 훈련이었다. 사영리를 철자 한자 안 틀리게 암송하며, 훈련을 받고 현장을 나갔다. 훈련을 받는 내내 마음에 올라오는 감격이 있어 마음으로 울면서 전도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주님, 신학교에 전도 훈련이 없습니다. 이런 전도 훈련이 신학교에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은 다른 사람이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겐 감동의 시간이었다. 그 이후 많은 전도 훈련을 받았다. 수천 명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 천명 이상에게 예수님을 영접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줄 수 있었는데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전도자임을 알고 산다. 기회만 있으면 전도자임을 믿기에 전도하며 산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이 나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감사한 간증 거리가 된다. 당신이 전도 훈련을 받지 못했어도 당신은 전도자다. 주님께서 전도자로 만드셨다. 전도자임을 믿어라. 철저하게 전도자임을 인정하라. 전도자임을 믿는 것이 전도의 출발이다. 손을 뻗어 전도자임을 취하라. 천국은 손을 뻗어 취하는 자의 것이다. 또 전도 훈련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회를 내어 전도 훈련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라.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전도 훈련은 직접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엔 왕도가 없다.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성령께서 전도를 도와주시고, 천사들도 도와준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임을 알고 전도하다 보면 나만의 전도 방법이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알고, 믿고, 깨닫고, 살면 억지로 전도하지 않는다 해도 전도의 기회가 온다. 준비된 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게 좌우명같이 여기는 말이 있다.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이다. 당신도 전도자임을 알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준비하라. 전도자임을 알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면, 전도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 또 전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이다. 전도자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 당신을 통해 전도할 때 역사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라. 전도하는 것에 겁을 내지 말라. 전도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난 사람에게 예수 믿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기도해 보라. 나는 일대일 전도의 기회를 제일 좋아한다. 제일 열매가 좋기 때문이다. 전도는 이러한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믿음,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질 때 저절로 전도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03-24
  • [조희완 목사] 확신하며 삽시다.(요5:19-29)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던 토비 도슨 선수가 한국에 있는 친 아버지를 찾아서 만났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살 때 길을 잃어버렸는데 부산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을 하다가 미국 콜로라도에서 스키 강사로 일하는 사람의 집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선수로 참가했다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친 부모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보도가 나가자 우리나라 전국에서 약 25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친 아버지라고 주장을 했지만 막상 DNA(유전자)검사를 실시하자고 했을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재수 씨 만큼은 달랐습니다. DNA검사를 하나마나 토비 도슨은 분명히 자기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가 확신한 바대로 토비 도슨은 그의 아들임이 입증이 되었고,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재수 씨가 토비 도슨을 보고 “저 아이는 틀림없는 내 아들이다”라고 확신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실 때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확신하실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네가 과연 내 아들인지 아닌지 아주 많이 헷갈린다.”라고 하신다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사랑하는 자녀들로 확신하시려면, 먼저 우리에게 몇 가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확신이 있으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5:19-29) 둘째는, 천국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14:1-3) 셋째는, 응답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일5:14-15)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1-03-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삶에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자, 원수, 대적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사단 마귀가 우리의 대적자입니다. 다윗의 삶에도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대상 17: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의 영적전쟁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사는데도 원수, 대적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대적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다투거나 싸우면 서로 망합니다. 대적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대적을 멸하여 다윗이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남을 해하려고 하고 대적하는 자의 삶은 악인의 삶이고 악인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살리고 남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윗의 대적을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대적, 사울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적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우리의 삶에 원수가, 대적들이 있어 우리를 해하고 죽이려고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들을 처리해주시고 해결하여 주십니다. 의인은 일곱 번째 넘어져도 여덟 번째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려고 했던 요셉도 그의 삶에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대적들을 해결해 주시고 요셉을 높이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대적들, 하나님께서 멸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대적을 멸하여 주시고 존귀한 자로 세워주십니다. 이기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18:13)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1-03-24
  • [최호숙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할렐루야! 경남기독신문 창간 15주년을 맞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급변하는 각종 미디어 환경 속에서 문서선교 언론사로서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어온 것은 결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기독교 TV방송을 비롯해 유튜브 방송을 통한 다양한 채널과 각 기독교단 신문과 지역 신문들이 있기 때문에 소규모 지역 언론사로써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존폐 위기를 넘어 건재함을 나타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동안 이사장님 그리고 국장님 이하 모든 분의 일심단결한 동역의 모습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경남 기독신문이 건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필자가 경남 기독신문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는 창립 시 세웠던 목표와 방향성을 잃지 않고 기독교 정신 본질 그대로를 일깨워 주고 겸손히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언론 매체 이름을 내 달았지만 이단 사상도 많고, 건전치 못하거나 덕을 세우지 못하는 언론 매체들도 많고, 본질을 왜곡시키는 일들도 많고, 편파적인 보도 개인과 교회 단체에 명예를 실추케 하는 일들이 빈번하여 언론의 순기능적 요소보다는 역기능적 요소가 많은 점도 있었는데 우리 경남 기독신문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현안과 이슈(issue)에 대하여 사실과 진실만을 말하는 정론 언론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기독신문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편지요 나팔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유익함만 나타내는 복된 신문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COVID-19로 경제적 위기와 교회들의 신앙침체 심리적 불안 기독교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악조건 속에 신문사 경영이 어려울 수 있겠으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언론사로서 정도를 걸어가면 분명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임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이 경남기독신문을 통해 지역사회 복음화에 이바지하고, 지역 교회들에게는 힘이 되고 목회자들에게는 소통의 장이 되는 신문사가 되기를 기대하며 축사를 마칩니다.
    • 오피니언
    • 기타
    2021-03-11
  • [조관행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할렐루야!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맞이하여 그간 수고한 이사님들과 사장님과 모든 직원에게 먼저 축하하고 노고를 치하하고 싶습니다. 15주년이 되었다니 나의 기억도 15년 전부터 생각하여 보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경남기독신문이 시작은 참 미약했지요 그래서 창대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지혜를 모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15주년이 되었다니 그간 어려움을 기도로 극복하며 노력하여 오늘에 이룬 줄 알기에 축하를 합니다. 요사이는 목사님들이 모이면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예배조차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이요 교회가 세상을 구원할 동역을 잃어 세상이 교회를 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걱정 끝에 그래도 교회는 묵묵히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는 본질과 사명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시대가 지속한다고 해도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하여 목회자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남기독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신문이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는 데 노력도 해야겠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서 기독신문도 정체성을 잊지 말고 교회와 가까워야 합니다. 원하는 것은 경남기독신문이 하나님과 경남기독신문을 사랑하는 독자들 앞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리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20주년도 30주년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축사를 마치려고 합니다.
    • 오피니언
    • 기타
    2021-03-11
  • [이상렬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본인이 창원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가 34년 전인 1987년이었습니다, 그 때는 창원의 복음화 율이 4% 안되었습니다. 창원과 경남지역은 불교가 우세한 지역으로 지역이름마저 불교색체가 짙은 이름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불모(佛母)산, 용지(龍池)동, 용호(龍虎)동 등등이 있으며 경남지역에는 소위 삼대사찰중 합천해인사, 양산통도사가 있으며 경남불교인구가 전국평균 26%보다 높은 45%입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어떻게 하면 경남의 복음화 율을 높일 수 있나 기도하면서 뜻있는 분들의 협력 속에 창원극동방송국이 설립되었고 CBS 경남방송국과 CTS 경남TV방송국이 설립되고 2006년 3월 8일 순수복음신문인 경남기독신문사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 크리스천 경남신문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인하여 경남의 복음화 율이 10%를 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경남에 소재한 개 교회들의 선교열정이 더 큰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문서선교 방송선교도 힘을 보탠 것입니다 그리고 경남기독신문을 발간하기 위해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모여서 고민하던 시간도 어제 같은데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러 명실공이 오늘의 복음신문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처음 발간 될 때에 저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여타기독교계 신문들처럼 교회의 여러 가지 어두운 면을 들추어 교회에 대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는 신문, 누워서 침 뱉기를 하지 않는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잘 하는 좋은 면들을 취재하여 싣는 다면 불신자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일은 지금까지 경남기독신문은 이를 잘 지켜 와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존경하는 이사장 황권철 목사님을 중심으로 임직원들의 헌신으로 인하여 오늘 좋은 신문이 된 줄 믿고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협력해주신 경남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님들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바라기는 앞으로 주님오실 때까지 경남기독신문은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신문이 되길 바랍니다. 취재 기자와 편집진 모두가 믿음으로 신뢰받고 사랑받는 신문 구독자의 수가 증가하는 이름다운 신문.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는 신문,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신문이 되길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머지않아 떳떳한 사옥도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여 영광을 돌리고 우리 경남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놀라운 기쁨이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코로나19역병 가운데서도 모든 성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 오피니언
    • 기타
    2021-03-11
  • 그루터기 칼럼[김영리 목사]이단 대책 : 한 교회가 한 가정의 회심을 돕자!
    이단은 역사 속에 함께 해온 교회의 아픔니다. 그런데 교회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본래 우리와 동일하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밖에 있지만 이들도 다시 주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할 양들이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 한 마리 양을 위해 찾고 찾으러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필자는 이들을 위해 교회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 나아가려는 목적으로 이단상담소를 겸한 카페형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정통교회는 멸망할 것이고, 이단상담소는 영이 죽는 곳이라고 세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정통교회나 교회 분위기를 풍기는 이단상담소에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편하게 찾아와 접촉하며 교제하고 하나님에 대해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카페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카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며, 그곳에서의 대화, 상담, 만남 등을 통해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신천지가 카페를 복음방으로 사용해왔었는데, 이제 그 방식을 역이용하는 것이어서 그들에게는 부담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장소만 준비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역을 펼쳐갈 수 있도록 후속적인 재정적 지원도 필요합니다. 특별히 필자의 교회 개척을 지원해준 모(母)교회는 이를 위해 성도 한 가정(또는 여러 가정)이 이단에 미혹된 한 가정의 회심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이단상담 사역의 현장에서 느끼는 한 가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상담이 아니고서는 회심이 거의 불가능한데 경제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는 상담을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단상담은 일정한 교육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회심이 이뤄질 때까지 기약 없이 진행됩니다. 더군다나 상담 기간 중 자해하거나 이탈을 할 수도 있어 온 가족이 24시간 함께 기거하며 교대로 상황을 살피면서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족 중 한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일정 기간 동안 생업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재정적인 이유로 상담의 첫 단계부터 아예 포기하거나 주저하려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단상담과 관련된 사람들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습니다.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영혼, 한 가정이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며 올바른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특별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단에 미혹되었다가 회심하는 한 영혼은 단순히 한 명이 아닙니다. 그 한 명에게는 여러 가족이 엮여 있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각 교회마다 많은 재정을 들여서 보여주기 식의 전도행사를 진행하기보다는 이단에 미혹된 영혼이 속해있는 한 가정의 재정적인 부분을 회심이 이뤄지기까지 일정기간 책임져주는 것은 귀한 헌신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그 가정과 교회에 불어오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03-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