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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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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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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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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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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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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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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
    누구에게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10:17)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시21:2)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면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소원은 꿈과 비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십니다. 요셉의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20: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겸손한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의 열쇠가 됩니다. 소원을 가지고 겸손 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 들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리 큰 소원이라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입을 넓게 열고 하나님께 소원을 가지고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81:10) 예수님은 맹인 바디메오의 눈 뜨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 귀신들린 병에서 고침 받고 싶어 하는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하는 사랑의 주님 이십니다. 믿음이 커지고 싶은 소원, 가정 복음화의 소원, 건강하고 싶은 소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소원,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가지고 사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동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꿈과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자녀를 얻고 싶은 한나의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부자 되고 싶고 환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던 야베스의 소원을 하나님은 이루어 주셨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고 싶은 바울의 소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의 소원, 꿈을 하나님은 이루어주셨습니다. 아무리 큰 소원을 가진다 해도 하나님은 부담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이루어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꿈, 소원대로 됩니다. 말한 대로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신 모습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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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0-08-06
  • [조희완 목사] 부요하게 삽시다.(창26:12-22)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시사 월간지인 “월간 조선”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 “부자특성연구회”(富者特性硏究會) 대표인 <문성렬>박사가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부자들은 전문가를 100% 신뢰하지 않는다(자기주관). 2.부자들은 아침 형 인간이 많다(부지런). 3.부자는 얼굴에 부자 라인이 있다(웃음). 4.부자는 가구나 가전제품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절약). 5.부자는 옷차림이 수수하다(검소). 6.부자는 붉은 색을 좋아한다(열정). 7.부자는 주말보다 평일 쇼핑을 좋아한다(대우). 8.부자는 남향집을 선호한다(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의 경우 남향집은 모두 부자들 소유). 9.부자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12-1월, 이와 같은 통계는 세계 적인 경제 전문 잡지인 <포천>에서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0.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다.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하고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일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큰 부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면으로 큰 부자가 되어야 할까요? 성경에 보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요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재물이 부요해야 합니다.(창26:12-13) 둘째로, 믿음이 부요해야 합니다.(약2:5) 셋째로, 선행이 부요해야 합니다.(딤전6:18-19) 우리 모두 재물과 믿음과 선한 행실이 부요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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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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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아침묵상[김진홍 목사]
    영국의 19세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이 나라를 이끌 인재를 뽑으려 주위에 추천을 의뢰하였습니다. 3명의 후보가 추천되었습니다. 여왕은 3명의 후보들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일주일 뒤 한 장으로 요약해 오십시오. 요약을 가장 잘하는 분을 뽑겠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 대전 중에 모든 보고서를 한 페이지로 요약해서 보고하기를 지시하였습니다. 운명을 판가름하는 전쟁도 한 장으로 보고서를 제출하기를 지시하였습니다. 보고서가 1페이지가 넘으면 다시 작업하여 1페이지로 요약하여 보고하라 지시하였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핵심을 추려 간단하고 명료하게 압축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면, 큰 일을 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나 조선조에 실시하였던 과거 시험에는 약술하는 능력으로 인물을 판단하였습니다. 제너럴 모터스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도 입사 시험을 치를 때 요약하는 능력을 꼭 과목으로 넣었습니다.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한다면 어떤 말이 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간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학력도 경력도 아무런 스펙을 갖추지 못한 평범한 뱃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예수에 대한 신앙을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제자 중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바탕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장 16절)”.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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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허참
    제자보다 못한 선생 환자보다 못한 의사 사병보다 못한 장교 아이보다 못한 어른 교인보다 못한 목사 안타깝게도 개보다 못한 사람도 더러 있다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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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신앙과 삶[박봉석 목사] 죽는 은혜
    죽음이란 사건은 인생 가운데서 가장 슬픈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별히 교통사고 같은 대형사고로 가족이나 지인이 죽음을 맞았을 때에 그 슬픔은 훨씬 더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고 가운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크리스천의 간증을 듣게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간증을 할 때에 잘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오용할 수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만이 기적적으로 살았다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은혜를 주신 것처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함께 하던 많은 사람들이 죽는 가운데서 홀로 살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감사할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천국보다 이 세상이 좋다고 말을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왜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 사고로 죽은 사람 중에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날 바로 천국에 입성하는 은혜를 누렸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즉 살아난 사람이 오히려 그 날 천국의 영광에서 제외된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살아도 은혜이고 죽어도 은혜입니다. 사고 중에 기적적으로 살았다면 아직도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이 살려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일 더 하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반대로 사고 중에 죽음을 맞았다면 험한 세상의 삶을 그만 끝내게 하고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인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지키심을 잘못 말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단지 이 세상 삶으로만 국한하여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고로 인해서 죽음을 맞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은 것처럼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이 세상만이 아니라 죽음 후의 저 세상까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만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보호자로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며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121편 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말씀이 바로 그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이 세상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지키심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까지 그 지키심은 영원하기에 죽고 나서도 우리의 영혼을 지키셔서 천국에서 안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어떤 불의의 사고에서 죽음을 맞지 않은 것만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지키신 것이고 반대로 죽음을 맞았다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은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조차 은혜입니다. 이 세상의 삶과 사명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만 할 궁극적인 은혜입니다. 교통사고로 죽든, 병으로 죽든, 전쟁터에서 죽든, 죽음의 형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의 형태가 문제가 된다면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이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불행한 죽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죽음을 맞는 것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보이는 것으로서, 오히려 죽음 후의 저 천국의 완전함을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의 형태는 관계없이 죽음조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믿음이 확고할 때에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는 의연한 삶, 진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순교자들은 바로 그 신앙으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조차 불행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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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하수룡 장로] 고아
    경기도의 한 지역에 나무들이 버려지는 것을 모아 조성한 수목원이 시민들에게는 더없는 휴식처가 된 아름다운 나무고아원이 있다. 이 곳에 식재된 나무들은 도심에서 병들어 버림받은 나무, 토목공사나 건물신축 등으로 베어버리려는 나무들을 기증받아 심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치료해주고 잘 키워 준 고아원과 같은 곳이다. 조성을 시작하여 20년이 지난 지금은 안정을 찾아 좋은 숲이 조성되어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된 것은 참으로 잘 된 일이다. 나무고아원에 버려진 나무들이 아픔을 이기고 우람하게 서있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대견함을 느낄 수 있다. 1만3천여 그루의 나무가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한강 산책로의 가로수로 사용되기도 하고 여러 관공서나 기관에 공급되어 좋은 나무로 자리 잡기도 한다. 버려진 고아처럼 제2의 고향인 나무고아원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잘 살아가는 나무를 보면서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버려졌던 자식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우릴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나무고아원에서 나무를 기르시는 주인같이 생각되어 정말 고마운 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입대를 앞둔 한 청년이 따뜻한 가정이 없음을 절망하고 한탄을 하는 것을 보고 애절함을 가진 적이 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셔서 작은 아버지 집에 입양되어 늘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 스무 살이 다되어 잘 살아 보려고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냉대 받는 사회 속에서 자립하여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다. 버려진 나무처럼 고아로 살다가 막상 늦은 나이로 군 입대를 하려니까 자신의 신세가 서글프고 절망적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과연 고아라서 희망이 없고 부모님의 도움이 없어서 절망적일까? 물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나만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처한 환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문제이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고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승리자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욕심을 비우고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최우선해야 한다. 진정 우린 모두가 버려진 고아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고아원에 입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는 부모가 계셔도 고아 아닌 고아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근대화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부요한 나라가 되었지만 실제 영 육간 자식은 물론 부모까지도 버리는 비정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6.25전쟁고아가 다 잘 성장하여 사회에 빛 된 일들을 감당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고아는 과부와 나그네와 같이 사회에서 냉대받기가 쉽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압제하지 말고 도우라고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고아를 학대하지 말고 환난 중에서도 그들을 돌보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지금은 육적인 고아보다 영적 고아들이 너무 많다. 우리 주위에 같이 살아가고 있는 영적고아들을 찾아 천국고아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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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0-08-06
  • [신기성 장로] ‘초심’이라는 거울을 늘 보자
    나이 들고 나름 바쁘게 살다보니 거울을 볼 일이 줄어든 것 같다. 여성들은 아침 출근길을 위해 화장대 앞에서 신경쓰며 가꾸며 거울 속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 볼 시간이 많겠지만 대개의 남자들은 출근길에 나서기 전 흘끔 거울을 쳐다보는 경우가 다반사하고 때론 거울 볼 일 없이 종종걸음으로 출근길에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도 그 중의 예외가 아닌데 어느날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실망하며 놀랬다. 거울속의 나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마와 눈가에 비 온 뒤에 솟아난 버섯처럼 늘어난 주름이며 탄력이 처진 피부며 어느새 영역을 넓혀가는 흰머리를 보노라니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새삼 실감한다. 요즘의 정치계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한 번 ‘거울’이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모든 이들이 처음 출발 할 때는 초심을 잃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보면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자신있다는 자만심이 ‘초심’이라는 거울을 멀리하게 되는 모양이다. 몇 년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로 고위 공직을 떠나게 된 단체장들의 사례도 그 ‘초심’이라는 거울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거나 건성으로 지나친 경우가 아닌가 씁쓸하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과거의 업적이 아무리 화려했어도 그 끝이 어이없는 이런 모습이라면 과거의 화려함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무늬는 교인인데 그 삶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신앙인, 겉모습은 화려한데 전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향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믿는 우리의 거울은 단연 성경이다. 제대로 성경을 상고한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 분명히 나와 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오늘도 우리 모두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녹이 낀 구리거울 같은 마음을 부지런히 닦아 그 속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이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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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 칼럼
    2020-08-06
  • 잠재된 성령의 능력 깨우기[오성한 목사] 사모함의 결과
    16. 사모함의 결과 온전한 나를 발견하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능력을 아는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는 종처럼 열심히 장사하여 풍성히 남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마태복음 25:16-17)긴다. 사모함의 결과다. 이미 주신 달란트의 능력을 아는 사람의 모습이다. 주님은 이들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라고 하셨다.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고 하셨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알고 사모함으로 장사를 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은 예수를 통해 받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사용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십자가로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은혜를 나타내며 살려고 열정을 가지게 된다. 장사하여 남기려는 갈망을 갖게 되고 사모하게 된다. 가진 달란트를 사용하며 남기는 방법은 영의 생각을 하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영의 생각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로마서 8:7 참고). 하나님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미치게 한 하나님의 의인데 차별 없이 주셨다(롬 3:22).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 어떤 훌륭한 주의 종과도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하나님의 의의 결과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것인가?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주님이 하신 일이다. 당신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임마누엘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주장하며 선포해보라. 오늘도 주님이 함께하셔서 사람을 만날 때, 일할 때, 환자를 위해 기도해 줄 때, 내 안에 주님이 가득하여 역사할 것을 알고 임마누엘의 나타남을 갈망해 보라. 나는 간절히 이렇게 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남을 목격한다. 임마누엘의 풍성함만 잘 주장한다면 모든 신앙생활은 행복하고, 능력 있는 삶, 행함이 있는 삶을 산다고 확신한다. 임마누엘은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달란트라 할 수 있다. 마음껏 장사해야 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러지 않았다. 한 달란트라고 해서 결코 적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마태복음 25:18 참고). 가진 것에 대해 기대와 사모함이 없었다. 종교 생활을 한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 결정하고 살았다. 극히 이론적이었다. 이론은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그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태복음 25:24-25)라고 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갈망이 없다. 사모함이 없었다. 가진 것을 귀중히 여기지 않았다.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을 잘 몰랐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겠지 내가 뭘 해.”라는 생각이었다. 가진 능력을 나타낼 사모함이 없었다. 주님은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태복음 25:26)라고 하셨다. 엄청난 것을 가지고도 사용하고픈 갈망이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능력을 발견한 사람은 깨닫게 된다. 가진 능력이 엄청남을 알게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나도록 갈망이 생긴다. 깨달은 사람은 회개하게 된다. 회개한 사람은 주님을 선택한 사람이다. 회개하면 깨닫게 된다. 내가 선택한 줄 알았는데, 주님이 날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하심을 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 줄 알았는데, 주님이 먼저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랑을 알고 나니 미치도록 좋고, 흥분한다. 주님과 하나 된 것을 깊이 생각하고, 기도한다. 넘치는 감격과 감사와 갈망이 생긴다. 목숨 버려 사랑해 주신 분께 모든 삶이 꽂히게 된다. 사모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성전 삼아 몸 안에 좌정하신 주님을 알고, 주님을 향한 갈망이 점점 커간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멀리만 알았었는데 하늘이 몸 안에 임했음에 놀라게 된다. ㄴ지면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수의 이름이면 충분하다. 예수 이름에 다른 것을 더하지 않아도 된다. 믿는 자에게 주신 권세는 손만 올리면 되지, 손에 다른 것을 더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다. 예수 이름 외에 무엇을 더해야 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손만 올리면 되는 데 무엇인가 더 해야 하는 줄 아는 사람도 많다. 주님이면 한 분이면 된다. 임마누엘이면 다 된 것이다. 주님 주신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주님과 함께 있음을 알기만 하면 된다. 주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알기만 하면 된다(요한복음 14:20 참고). 주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오늘도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겠다. 주님과 같이 있는데도 주님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주님을 늘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 영원토록 함께 계신데도 더 함께하고 싶다. 날 사랑해서 목숨 버리신 신랑이 자꾸 보고 싶다. 나의 신랑은 엄청난 분이다. 모래 수보다 많은 별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주시다. 나의 신랑은 엄청난 분이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못 살겠다 하심이 웬 말인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사실이다. 그래서 난 항상 그분 앞에 서고 싶다. 임을 사모하고 사모한다. 임의 마음을 알고 살아드리고 싶다. 임이 나를 사랑한 것만큼 나도 그 이상으로 임을 사랑하고 싶다. 주님과 함께함이 능력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함이 능력이다. 그분을 사모함이 능력의 통로다. 오늘도 임마누엘의 주님이 모든 일에 나타날 것을 사모하고, 갈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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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이정희 목사] 애도(哀悼)와 애증(愛憎), 왜 아무도 자살을 비판하지 않는가?
    I. 서언(序言) “너 도대체 어제 밤에 어디 갔다 몇 시에 들어왔니?” 2009년 5월 마지막 주간의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하고 갓 직장에 다니는 아들에게 질책하며 던진 필자의 질문이다. 그 때 아들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어젯밤에 직장 상사와 함께 회식한 후 3시간을 걸어서 봉하에 가서 조문 하고 왔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어이가 없는지 “뭣 하러 거기까지 가서 그러냐?”면서 화를 내었다. 이 대화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극단적 서거에서 비롯된 “조문정국”이란 특수한 사회 환경 속에서 필자 가족들의 당시의 시대를 읽고 보는 시각 차이에서 온 논쟁이었다. 그때부터 11년이 흐른 오늘의 현실도 역시 또 다른 조문 정국의 현실에 와 있다. 6.25의 영웅 백선엽 장군의 죽음과 박원순 서울 시장의 극단적 자살과 이를 둘러싼 온갖 추문과 논란으로 우리 사회는 오늘도 바람 잘 날 없는 조문정국에 와 있다. II. 본말(本言) 1. 애도(哀悼)의 마음 : 현실의 조문 정국에 어떤 시각이든 관계없이 고대로부터 망자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모든 이의 인지상정이다. 백선엽 장군의 친일 행적이나 6.25의 공적에 관계없이, 또한 박원순 시장의 공과(功過)와 극단적 죽음을 논하기 전에 가장 먼저는, 그들의 공(功)들을 치하하며 이 세상을 떠남에 대한 아쉬움과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 특히 박 시장의 한평생의 일생을 돌아본다. 그는 한마디로 성공한 사람이다. 창녕 장마면에서 태어나 영산 중학교를 다닌 후,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갔고, 사법고시 합격하고 검사도 되었고 변호사도 되었다. 인권 변호사와 시민운동으로 좋은 일도 많이 했다. 성공적인 사업과 서울 시장의 일도 9년 동안 비교적 잘 했다고 평가한다. 200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같은 연령, 같은 시대를 산 필자로서는 그의 치열한 삶과 노력으로 이룬 입지전적인 성공 스토리는 부러움과 감동이 있었다. 이에 그의 치명적 실수인 성추행과 그 일로 선택한 극단적인 죽음은 너무 잘못된 것이지만, 그래도 애도를 표한다. 2. 애증(愛憎)의 마음 : “애도의 마음을 넘고 보니 애증이더라.”는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난다. 이런 애증은 박 시장 뿐 만 아니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모든 이에게 대한 마음이기도 하다. 특히 유명 연예인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극단적 선택이 더 그러하다. “오죽했으면”이란 말로 애써 자위 할 수도 있지만, 필자의 마음에선“그래도”란 말이 훨씬 더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먼저 박 시장의 경우이다. 첫째로, 그는 입지전적 성공자인 동시에 ‘흑역사’의 장본인이다. 그는 인권운동의 대부였고, 사회운동가였다. 그러나 지나친 페미니즘(feminism)과 젠더(gender)의식으로 동성애자들을 옹호하고 확산시킨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게는 이 운동을 정당한 치적으로 삼을 것이고, 동성애자들과 지지하는 일부 인들은 환영하고 박수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매우 좋지 않은 일이며, 정상적인 신앙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의 치명적 실수인 여비서 성추행(추정)은 그의 이중성을 드러냄으로서 흑 역사의 장본인이 되었다. 둘째로, 그의 극단적인 자살은 만시지탄이다. 그 이유는 앞서 논한 대로 지도층의 자살은 본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과 모방자살(베르테르 효과)의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며, 이는 현 사회에 만연된 고질병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근래에 나온 자살에 대한 통계청의 수치(1983년~2018년)를 보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자살을 많이 한 해는 2009년이다. 2008년보다 무려 2,555명이나 많아졌고, 2010년, 2011년 계속 최고의 수치였다가 2012년부터 하락했지만, 2018년부터 다시 올라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매년 국가별 자살률 발표에 의하면, OECD 국가 중, 13번이나 자살률 1위의 현실에 처해있다. “자살 공화국”이란 오명을 계속 듣는 현실에서 2009년부터 3년 동안의 자살이 왜 급상승했을까? 이에 대한 통계청의 견해는 2008년 9월부터의 세계 금융위기 때문이라 추정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2008년 10월에 탤런트 최진실과 2009년 5월의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로 보기도 한다. 또 2년 전 다시 자살률의 급상승은 세간에선 노회찬의 자살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하고 있다. 금번 박원순의 자살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 전례의 경우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드릴 뿐이다. 셋째로, 왜 아무도 자살을 탓하지 않는가? 앞서의 자료만 보더라도 자살은 현재 우리 사회의 매우 가슴 아픈 고질적인 문제이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산하에 자살예방센터를 설치하여 이를 예방하고 있다. 그러나 모방자살의 가장 근본 원인 중의 하나인 사회 지도층과 유명인들의 자살에 따른 비판은 정치가와 언론, 사회 지도층도 거의 없다. 오히려 길거리에 추모하는 현수막이 2년 전의 노회찬 의원 때와 현재도 그러하다. 이는 과(過)는 덮여지고, 애도 속에 공(功)은 살아나기 때문에 오히려 모방자살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고 만다. 유족과 지지층, 사회적 애도의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겠지만, 이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모방자살의 원인 제거는 요원할 것이다. III. 결어(結語) 자신의 잘못을 자살로 마감한 조문 정국에서 다윗을 생각해 본다. 그의 공(功)은 뒤로 하고 과(過)를 보면 정말 그의 죄과는 너무 크다. 그러나 다윗은 철저한 자기반성과 회개로 하나님께 용서받고 인정받아 더 큰 위대한 왕이 되었다. 반면 가룟 유다는 잘못은 깨닫지만, 죄과에 눌려 자살하고 만다. 혹자는 말하기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죄보다 자살의 죄가 더 크다고 평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과 함께 애증을 담아 그의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서 많 큼은 모방자살을 방지하는 의미에서 만시지탄의 마음으로 비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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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0
  • 생각한토막[김문훈 목사] 빼앗긴 들에도 꽃이 피는가?
    일 년의 절반이 훌쩍 지나갔다. 맥추감사절은 일 년 농사의 절반을 헤아려 감사하는 절기이다. 금년도에는 코로나 사태로 황망한 가운데에 세월이 흘러간다. 겨울철에 시작된 염병이 봄을 지나고 한여름이 되도록 도무지 종식이 안되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거리 유지한답시고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하늘길이 닫히며 해외여행길이 끊어졌으며 생계에 타격을 받고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졌다. 교회에도 꼼짝없이 예배가 중단되고 겨우 회복이 되는가 하다가도 확진자들이 나오며 방역 당국도 우왕좌왕하고 백성들이 혼란과 고통에 빠져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있다. 지금은 봄을 지나서 여름이 한창인데도 코로나의 위세는 꺾이질 않는다. 죄악이 관영하고 패역한 세대에 악법이 세워지고 악인들이 형통한 시대다. 의인은 왕따를 당하고 고통당하는 시대다. 꺾어진 나무에도 꽃이 피는가?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가?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의인의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고 하였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 운 나무와 같이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의 축복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개인의 일상과 가정의 생계와 교회의 예배를 이거에 중단 시켰다. 세계 경제의 수레바퀴를 멈추어 세웠다. 이때에 우리는 과연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하박국 선지자는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의 군살을 빼고 핵심만 붙들게 한다.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내려놓고 주만 바라보게 한다. 온 세상에 염병이 창궐해서 감염자가 천만 명이 넘은 시대에 주께서 생명 주셨음을 감사하자. 오늘도 새날을 주셨음을 감사하자. 사랑하는 가족을 주셨으니 감사하자. 일용할 양식을 주셨으니 감사하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서 주 예수를 찬미하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성도는 절대 긍정의 삶을 살아야 되는 이유가 주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했지만 믿음으로 감사하는 자들은 주께서 붙드셨다. 염병은 전염되고 감사는 전달되고 사랑은 감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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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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