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6(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조희완 목사] 조심할 것들(신6:10-15절)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자동차 운전을 해오는 중에 몇 차례의 큰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 새벽 빗길에 사고가 났고, 한 번은 얼음 빙판길에 사고가 났고, 한 번은 미국에서 정말 큰 사고를 당했는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지켜주신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때 사고 당시를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아찔하기만 합니다. 빗길과 빙판길에서 사고가 났지만 그러나 가만히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제가 좀 더 조심을 했더라면 충분히 사고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고였습니다. 교통사고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의 원인을 살펴보면 부주의한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는 몇 퍼센트가 되지 않습니다. 자동차 보험을 가입할 때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에게 보험료를 비싸게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 청소년들은 활력이 있고 패기가 넘치는데 비해서 조심성이 떨어져서 그 만큼 사고 발생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학과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이 시대를 살면서 온갖 편리한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서 생각을 해보면,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요소들을 많이 안고 산다는 것이고,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분명히 편리합니다. 그러나 위험하기 때문에 그만 큼 더 조심을 해야 합니다. 전기(電氣)라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편리합니다. 그러나 위험하기 때문에 그만 큼 더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들이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 가운데 꼭 조심을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첫째로, 신앙의 퇴보를 조심해야 합니다.(신6:12-13) 둘째로, 말씨와 언어를 조심해야 합니다.(시39:1,141:3) 셋째로, 방탕한 생활을 조심해야 합니다.(눅21:34) 조심할 것을 조심하므로 반듯하고 규모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0-05-27
  • <정연철 목사의 행복 콘서트>안목 있는 지도자(6)
    사무엘과 엘리사의 안목 사무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이새의 아들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대신할 이스라엘 민족의 두 번째 왕으로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사물에게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중심을 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일하다 보면 실수가 있는 법입니다. 일을 잘하기 위해 애쓰다가 실수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할 때 마음의 중심이 어떠한 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도단에서 엘리사와 게하시가 같이 그 성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람 군대가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게하시는 급히 뛰어 들어와서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아람 군대가 우리를 포위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이여, 그의 눈을 열어서 하늘의 군대가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왕하6:17) 게하시가 눈이 열려서 돌아보니 하늘의 군대가 자기들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안목을 가진 사람은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다릅니다. 물건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안목이 없는 사람은 당장 필요한 것만 보게 됩니다. 이 물건이 튼튼한지, 또 시대에 맞게끔 미래에도 쓸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당장 필요한 것만 구매하게 됩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도 자기 집을 짓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차량을 사용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놓고 함부로 아무 데나 못질을 해 버리면 아름다운 건물이 망가집니다. 못질을 해야 할 곳이 있고 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할 곳이 있습니다. 거울을 걸어야 될 곳이 있고 걸지 말아야 될 곳이 있습니다. 근시안적으로 안목 없이 자기 좋은 대로만 일을 처리하면 결국 훗날 교회 재정을 낭비하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결혼 대상을 결정할 때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 됩니다. 얼마 전 결혼한 한 신혼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어머님이 혼자 계시니 어머님을 꼭 일 년만 모시고 섬기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가정에는 어른이 있어야 아이들이 배웁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으레 결혼하면 분가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각 가정의 사정이 다 다르겠지만, 부모님의 사정을 살피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안목을 얻는 비결 세 가지 지금까지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안목이 생길까요? 첫째로 이런 안목은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과 18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힌다”고 하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적인 눈을 밝혀주어야만 성도로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이 풍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에게는 안목이 생기고 미래를 보는 지각이 열립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하라고 늘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안목이 생깁니다. 기도하면 시대를 볼 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적인 결과만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결과보다는 마음의 중심을 헤아리고 동기를 살필 수 있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저의 청년기의 실패 또한 곧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준비 기간이었음을 확신합니다. 셋째로 안목을 얻는 또 하나의 비결은 바로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진리는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받을수록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됩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0-05-27
  • 기독교인 생활용어 바로잡기[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 찰나(刹那)
    I. 서언(序言) 일상 생활용어로 사용하는 용어 중에 타 종교로부터 온 말들은 어느 정도 일까? 나름대로의 연구와 발표를 해 오지만 필자 스스로도 놀라는 것은 이런 용어들이 생각했든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용어들에 익숙해져 있고, 무분별하게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 중에는 우리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진리와는 전혀 다른 타종교의 교리적인 내용까지 포함된 용어들도 다수 발견하게 된다. 또한 분명한 타종교권의 말과 일인대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일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번호에서도 불교 용어들 중에서 우리가 분별없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중의 하나는 “찰나(刹那)”라는 말이다. II. “찰나(刹那)” 시제의 용어로 흔히 사용하는 “찰나(刹那)”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 이 말의 어원은 불교용어의 고어인 산스크리트어의 “크샤나(ksana)”를 찰나 또는 차나(叉拏)라고 음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사전적 뜻은 “생각이 스치는 한 순간처럼 지극히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또한 ‘인생은 한 순간처럼 아주 짧다’는 뜻으로 염(念), 일념(一念)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시간 단위로 환산하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사이에 65찰나가 흐른다거나, 1/75초에 상당한다.”는 말들을 한다. 또한 1초를 반으로 나누면 1/2초이고, 1/2초를 반으로 나누면 1/4초이며, 이렇게 계산하여 1/64초 까지 나눈다. 이러한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이 바로‘찰나’인 것이다. 이런 시간적인 계산속에서 불교는 자신들의 시간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찰나로 변해간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변하고 우리의 몸도 변하며, 뜻과 식별도 변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체의 모든 것이 다 찰나로 변하게 된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모르고 지내다가 세월이 흐른 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무상(無常)을 깨달으며, 그 때가서 슬퍼하며 통곡하게 된다.”고 했다. 짧은 시간에 대한 뜻을 가진 이런 용어들은 어느 종교와 사회이든 거의 대부분 다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성경에도 이런 짧은 시간에 대한 표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는 이런 용어를 쓴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수용하기에는 힘든 불교의 교리화 되어 있는 용어는 그 문제의 차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용어에 대한 불교의 교리는 살펴보면 이렇다. “실체가 있는 보이는 이 세상의 존재물들은 실제로는 한 찰나마다 생과 멸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래의 실체가 아니며, 이것이 찰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를 찰나생멸(刹那生滅), 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도 하며, 전(煎)찰나, 현(現)찰나, 후(後)찰나를 나누어서 보기도 한다. 또한 이 셋을 합하여 삼세(三世)로 보고 있기도 하다. 또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생의 참은, 찰나적인 행위에만 있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현재의 순간에 있어서의 최대의 쾌락을 구하려는 순간주의 사고방식을 가져도 된다.”라고 하는 찰나주의 사상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이러한 일반적인 용어가 아닌 불교의 교리로서 설명되는 ‘찰라’라는 용어나 철학적인 ‘찰나주의’는 우리 기독교에는 적합하지 않는 용어인 것이다. III. 결어(結語) 이상으로 볼 때 분명한 타종교권의 말과 일인대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용하거나 참여하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이는 찰나 뿐 만이 아니라 일부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정부의 예산 지원 때문에 많은 논란을 빚고 있는 사찰 문화 프로그램인“템플스테이(Temple stay)”가 그렇다. 참가자 중에 19%가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라는 통계가 그 사실을 말해준다. 어떤 측면으로 볼 때는 참여함으로서 넓은 마음으로 타 종교까지 포용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유일신을 믿는 우리로서는 타 종교의 문화 프로그램에 까지 참여하거나 용어까지 여과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포용성이 아니라 뉴에이지(New Age) 운동의 하나인 범신론(汎神論)적이거나 다신론(多神論)적인 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0-05-27
  • 생각 한토막[김문훈 목사] 세컨드 리더십
    열왕기하 5장에는 여러 종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 아람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름없는 어린 계집종, 나아만 장군의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등장한다. 그야말로 종들의 이야기이다. 학생이 성장해서 교사가 된다. 어린 운동 선수가 자라서 감독이 된다. 의과대학생이 성장한 후 의사가 되고 명의가 된다. 군대에서 졸병이 오랜 훈련기간을 거치고 고참이 된다. 사관학교를 마친 사관생도가 지휘관이 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종들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인간 군상 속에서 내 모습을 얼핏 볼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은 큰 용사요, 존귀한 자요, 구국공신이었지만 치명적인 병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가 있고 명암이 있지, 100%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다. 나아만 장군에게 천만다행한 것은 전쟁때 포로로 잡아온 어린 소녀 종이 있었다. 어린 계집종은 친정 곳에서 들었던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 주인 마님이 내 친정에 가면 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이 무서운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전했다. 어린 시절 엄마 품에서 들은 이야기가 기억이 났던 것이다. 나아만은 하찮은 어린 계집종의 이야기를 새겨 들었다. 나중에 엘리사의 단순한 처방을 듣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할 때에 아래 종들이 고해드린 충언을 자존심 내려놓고 들었다. 큰 장군이었던 나아만의 겸손한 모습이 그를 살리게 되었다. 엘리사는 한때에 엘리야의 사환이었다. 엘리야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보라고 할 때에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했다. 그 기도 덕분에 엘리사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엘리야보다 더 많은 기적을 향하는 선지자가 되었다. 마치 모세의 몸종이었던 여호수아가 모세의 안수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임하시고 그에게 머물러서 탁월한 리더로 쓰임 받았듯이 엘리사도 그렇게 되었다. 엘리사는 나라가 온통 어려운 때에 그 곳에 한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진정한 리더십은 돋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본분을 저버리고 욕심을 부리다가 저주를 받게 된다. 우리는 모두 부름받고, 사랑받고, 쓰임받는 하나님의 종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생각한토막
    2020-05-27
  • 제6회 법통 포럼 ‘초대교회와 고려파 교회 비교 연구’
    제1차 포럼주제 “고려파 영성과 법통 정신의 이해”제2차 포럼주제 “기독교 역사관으로 본 고려파 운동”제3차 포럼주제 “청교도 운동과 고려파 정신 연구” 제4차 포럼주제 “종교개혁과 고려파 정신 연구”제5차 포럼주제 “교부신학과 고려파신학의 비교 연구”제6차 포럼주제 “초대교회와 고려파교회의 비교 연구”제7차 포럼주제 “바울 신학과 고려파교회의 비교 연구”(예정) “개혁주의 신앙전통 다음 세대에 바르게 전수 절실하다” 고려파교회연구소(소장 황권철 목사, 밀알교회 담임)는 2020년 5월 4일 자로 제6회 법통 포럼 발표자료를 담은 논문집 제6호 ‘고려파교회연구’를 발간했다. 이 포럼의 주제는 ‘초대교회와 고려파 교회의 비교 연구’다. 이 포럼은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COVID-19, 우한 폐렴) 사태로 열리지 못했다. 이 논문집에는 초빙 강사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의 ‘서양 교회와 한국교회의 기도’, 발제 논문 황권철 목사의 ‘초대교회와 고려파 교회의 비교 연구-주남선과 거창지역 교회지략 중심으로’, 성희찬 연구위원(작은빛교회 담임목사)의 ‘초창기 한국장로교회(1884~1945년)와 헌법 개정’, 강종환 연구위원(가음정교회 장로)의 ‘국가의 인권보호제도 및 각종 인권정책에 대한 소고’의 내용이 실렸다. 이 가운데 황 목사의 논문을 발췌해서 정리했다. “주남선 목사는 신학자도 아니고 순수하게 교회를 섬긴 목회자이다. 그러나 그의 교회관과 목회 철학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정신과 너무도 일치한다.” 황권철 목사는 “이 논문을 쓰게 된 목적은 고려파 태동기에 가진 그루터기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다.”라며 “주남선의 애국 운동과 본토 거창교회를 섬긴 목회 정신은 유대 예루살렘에서 지상교회를 태동시킨 사도 정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2장을 중심으로 지상교회가 태동하는 신약시대 초기 역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파 교회는 아직 성경 신학적으로 정의한 체계화된 이론이 없다. 이에 동 연구소에서는 한상동과 함께 고려파 교회를 섬긴 설립자들 중심으로 기술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주남선 목사의 ‘거창지역 교회지략’에 나타난 교회관으로 제한했다. 황 목사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주님 탄생에서 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476년까지 잡는다. 또 초대교회는 내면적인 교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서 태동한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사도들의 사역이 종료된 시점까지이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 원형이다. 로마 제국의 박해는 1~4세기 동안 일어났다. 2세기경 초대교회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있었다. 외적으로는 제국의 박해를 견뎌야 했고, 내적으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오염시키는 각종 이단과 싸워야 했다. 이 시기에 교회를 어렵게 만든 이단은 가현설,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교리를 체계화하며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주 목사는 1909년에 설립된 거창교회 초기 신자가 되어 한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집사, 장로, 전도사로, 또 두 번에 걸친 담임목사로 시무한 한국 기독교계 거목이다. 나라 잃은 시절 형제가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나라를 사랑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켜온 애국자이다. 그는 또 1946년 9월에 한상동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초대 이사장이며, 고려고등성경학교와 거창성경학원을 설립해 교육에 지대하게 공헌했다. 그의 삶의 여정은 거창교회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주남선(朱南善)의 본명은 주남고이다. 주 목사는 옥중에서 이름을 남고에서 남선으로 바꾸었다. ‘거창지역 교회지략(敎會誌略)’은 주남선 목사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거창지역을 비롯한 함양, 합천 등 경상남도 서북부 지방의 교회지(敎會誌)로서 이 지방 교회의 연원에 대한 역사적 자료이다. 주남선 목사는 후일에 잊고 훼손되기 쉬운 이 지방 기독교 연원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초기에 설립된 이 지방 28개 교회의 1940년대까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황 목사는 “한국 교회사적으로 보면 한일합병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교회 말살을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제도권의 모든 교회가 배교하여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로 전락했으나 주남선과 한상동을 중심으로 한 고려파 신앙을 가진 교회들이 항거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왔다.”라고 밝히면서 고려파 교회 주역을 맡은 주남선 목사의 교회관을 초대교회 사도들의 사역과 비교해 새롭게 조명했다. 황 목사에 따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시련과 박해로 성장했다. AD 64년 로마 대화재 사건은 기독교 박해의 불씨가 됐다.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만들어 기독교를 박해하므로 로마에 있었던 수많은 기독교인이 순교했다. 한국교회 역시 태동과 아울러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를 받았다.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으나 한국교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를 받았다. 한국교회 역시 일제의 박해로 인해 부흥하고 성장했다. 황 목사는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배교의 늪에 빠졌으나 거룩한 씨, 소수의 그루터기였던 고려파 교회가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복원한 고려신학교를 설립함에 따라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지킴으로 초대교회 정통성인 공교회의 사명을 다하게 됐다.”라고 강조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뿐 아니라 모든 제자가 대부분 순교의 제물이 됐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제자로 훈련받은 12사도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고려파 교회 역시 초대교회 순교적 전통신앙을 이어받아 태동했다. 고려파 교회는 일제 강점기 때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출옥 성도들로 인해 태동했다. 주남선 목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진리 파수의 순교 정신을 지닌 한국교회의 사도적 인물이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 말 6년여의 옥중 고난을 겪고 광복 후 신앙과 신학의 순결을 위해 고려파 운동을 전개하고 고려신학교를 세워 진리를 파수하고 전수하는 데 생애를 바친 인내와 극기의 목회 지도자이다. 초대교회는 지상교회의 시작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회중들의 모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시켜 나아가는 게 그 목적이다. 이 교회에는 사도성,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등 4가지 속성이 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배, 선교, 교육, 섬김, 사귐 등 5가지 역할이 있다. 황 목사에 따르면 거창지역에 고려파 교회를 세운 주남선 목사는 1931년 2월 22일에 거창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죽는 날까지 거창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삶의 여정은 숭고한 신앙절개와 자기희생 정신의 구현이다. 일본 신사참배 반대로 1940년 투옥당해 1945년 8월 17일 평양 형무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가시밭길, 형극의 길이었다. 6.25 한국 전쟁 때에도 거창교회를 사수했다. 공산군에게 심한 구타를 당한 후유증으로 1951년 3월 23일 63살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주남선 목사의 이 같은 목양사역은 초대교회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것이다. 황 목사는 “초대교회 사도들은 순교적 사명을 감당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웠다. 이 같은 신앙과 신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지켜온 고려파 설립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인들에게서 받았다. 특히 주남선 목사의 목양적 교회론과 온유한 삶으로 살아온 겸손함과 세속에 때 묻지 않는 십자가 도만을 전하는 복음의 능력은 고려파의 개혁주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 준 아름다운 신학 전통이다. 주남선 목사는 말씀을 중심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라며 “이 같은 고려파 설립자들의 정신과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으로 목양하고 성경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오늘날 고신 교회가 바르게 사수해가야 한다.”라고 도전했다. <자료제공=고려파교회연구소>
    • 뉴스
    2020-05-27
  • [박정곤 목사]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13:22)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영육간에 강건함과 행복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21대 국회의원으로써 나라와 민족, 우리 경남을 위해서 일하게 되신 국회의원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따뜻한 가슴과 지혜와 명철함을 주셔서 뛰어난 의정활동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바쁜 중에서도 참석해 주신 김경수 도지사님과 김지수 도의회 의장님과 각의회의원님들, 박종훈 도교육감님과 허성무 창원시장님, 멀리 거제에서 오신 우리 변광용 시장님과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큰 은혜와 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은 법과 제도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움직입니다. 좋은 법은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하고, 국민들의 행복지수와 삶의 질을 높입니다. 그러나 악한 법, 좋지 않은 법은 삶을 퇴보시키고 나라를 나락으로 떨이지게 합니다. 1586년 3월 13일 조선 선조 19년에 전남 나주에서 이상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다물사리’라는 80세 노파가 자신이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시대 노비는 사람으로서의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고, 주인의 재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노비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그런데 이 80세 할머니는 자기가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고 주장하고, 그의 주인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라고 고소했습니다.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것은 조선시대의 잘못된 악법, 종모법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아시는 대로 조선은 양반 중심의 계급사회입니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해야 하는데 조선의 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양반중심이었습니다. 여인이라고 차별받았고(七去之惡, 칠거지악), 천인이라고 특별법을 제정하여 평생토록 노동력을 착취 지옥같은 삶을 살게 하고, 그 자녀까지 자동적으로 노비가 되게 했습니다. 노비는 소나 짐승처럼 그저 주인의 재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양천법(일천즉천) 즉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자동으로 노비가 됩니다. 종모법, 노비의 자녀는 그 어머니의 신분과 소속을 따라갑니다. 양반과 노비에게 각각 다른 법을 적용했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는 종법(宗法) 의식에 의거해서 부계(父系) 혈통을 지향하는 사회였다. 그런데 유독 천인(賤人), 노비(奴婢)들에게는 종모법(從母法)을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종모법(從母法)은 말 그대로 자녀들이 어머니의 신분과 소속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노비(奴婢)이면, 자녀들도 노비(奴婢)가 되고 그 소유주도 같다. 노비(奴婢)끼리 혼인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계집종 상전(上典)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사내종이 다른 집안의 계집종과 결혼하는 것은 주인 입장에서는 매우 큰 손실이었다. 그래서 양반(兩班)들은 다른 집 계집종과 혼인한 자기 집 노비(奴婢)의 전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결국 사내종은 양반(兩班)들의 재테크를 위해 양인(良人) 여성과 혼인하도록 반강제적으로 강요받았다. ‘다물사리’는 이지도의 노비 윤필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지도(李止道)의 주장대로 다물사리(多勿沙里)가 양인(良人)이라면 그 6명의 자식들은 노비(奴婢)인 아비를 따라 모두 이지도(李止道)의 사노비(私奴婢)가 되어 이지도의 재산이 증식됩니다. 반대로 다물사리가 양인이 아니고 노비이면 6명의 자녀들은 이지도의 노비가 아니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관노비 소속으로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물사리’는 자신의 어미가 성균관(成均館) 노비(奴婢)인 길덕이며, 그러므로 자신과 6명의 자녀들 역시 성균관(成均館) 소속 노비(奴婢)라고 주장했다. 참 기가 막힌 현실이었으나 그것이 조선이었습니다. 성종실록(1478년 4월 8일)의 기록을 보면 백성 중 십중팔구는 노비이고, 양인은 불과 한 둘에 불과하니, 갈수록 노비만 늘어난다고 탄식했습니다. 왜입니까? 노비는 양반들의 재산 증식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명종실록(1551년 9월 28일)에도 노비가 양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니, 노비만 많아지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17세기 우리 경상도 전체 인구의 42%-64%가 노비였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제5왕자 광평대군, 제8왕자 영응대군은 노비가 각각 1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재판의 30%가 노비관련 재판이었다고 합니다. 이 천하의 악법, 종모법은 19세기 영조 때에 와서 폐지됩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는데 양반과 노비의 법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의 법이 달랐습니다. 그러니 백성의 한이 하늘에 쌓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의 대표적인 정서가 한이었지 않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이 한을 가슴깊이 못 느낄 것입니다만 저는 이 한의 개념을 똑똑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한 많은 이세상은” 그 구슬픈 가락은... 지금 우리나라는 노비제도도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꿈을 키우며 사회의 전분야 진출합니다. 김지수 의장님도 여성으로서 도의회 의장이시잖습니까? 박근혜 대통령님도 여성으로서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평등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지난 2009년 1월 21(20)일 흑인 버락 오바마가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이 되었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흑인들이 누구였습니까? 저들은 거의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학교도, 프로운동선수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노비들보다 더 비참했던 사람들이 흑인 노예였습니다. 그랬던 흑인들이 어떻게 해서 오늘 이처럼 마음껏 꿈을 꾸며 모든 면에 진출하게 되었습니까?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 1759.8.24.-1833.7.29.75세), 그는 21살에 의원이 되어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위대한 꿈을 꾸며 그 일에 일생을 바칩니다. 1807년 2월 23일, 정치 입문 20년 만에 11번의 실패 끝에 영국의회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합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1833년 7월 26일 드디어 노예제도가 금지되고, 영국에서 모든 노예는 해방됩니다. 그 놀라운 소식,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이루고 3일 뒤에 윌리엄 윌버포스는 75세의 생을 마감하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생애 한 사람의 정치인이 꿈을 갖고 노력한 결과, 이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노예무역이 금지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비참했습니다. 1863년 또 한 사람의 꿈에 의해서 노예가 해방됩니다. 바로 미국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꾸었던 꿈이 아브라함 링컨에게 이어졌습니다. 링컨은 행정가로써, 통치자로서의 결단으로써 흑인 노예를 해방하였던 것입니다. 노예무역이 금지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과 제한으로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한 그로부터 꼭 100년 뒤인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링컨 대통령 기념관 근처에서 25만(1/5 백인)의 시민들이 모여서 자유를 위한 대행진을 했습니다. 그 때 35살의 마틴 루터 킹(1929.1.15 – 1968.4.4.)목사님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명 연설을 남깁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 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나라,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꿈같은 현실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꿈, 그 꿈을 이어받은 아브라함 링컨의 꿈, 그 꿈을 가슴에 품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희생한 사람들에 의해 마침내 불가능의 벽이 무너지고, 그 꿈이 이루어져 세상은 평등과 자유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흑인 버락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은 양치기 소년에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약 3천년 전 이스라엘의 제2대왕으로 등극하여 40년을 통치하면서 태평성대를 이루고 이스라엘을 반석 위에 세워 놓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위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興亡盛衰(흥망성쇠)와 인간의 생사화복이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인생을 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정치를 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다윗을 통해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는 꿈꾸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저에게도 우리나라를 향한 꿈과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정직한 나라, 진실한 국민, 정직과 진실이 승리, 성공하는 나라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인간의 선한 양심이 살아있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나라, 통일한국의 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확고한 기반위에 평화적인 남북통일, 복음 통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 뉴스
    • 교단 및 연합회
    2020-05-27
  • [하수룡 장로] 아버지
    아버지는 자기가 낳은 자식의 남성 부모를 말하지만 어릴 때에는 통상 아빠라 부른다. 우리 집도 어린 자식들이 다 성장하여 새 가정을 이루어 자식의 자녀들이 태어났지만 호칭은 여전히 큰아들은 아버지, 작은아들은 아부지, 딸은 아빠라고 부른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호칭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은근히 기분이 좋아 옛날을 생각하며 자녀 손들을 축복하게 된다.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것은 진정한 참 아버지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에콰도르의 침보라소라는 산이 있는 데 이 산을 신성한 아버지의 산이라 부른다. 이 산은 적도 인근의 산 중에서 고도가 가장 높아 세계의 전망대라 불린다. 이제는 휴화산이지만 신비와 위용으로 무장된 이 산은 변함없이 산 주위의 주민들에게 깨끗한 빙하얼음과 많은 것을 제공해 주어 항상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기며 순종하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아버지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단어로 히브리어 ‘아브’는 1191회나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라는 명칭이 많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버지를 중심한 가정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나 문화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인 부권은 땅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로서 절대적인 권한이 허락된 것이다. 말씀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사랑하되 편애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지함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아빠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아람어이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이 호칭을 늘 사용하셨다고 한다.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친밀성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체를 불경스럽게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는 큰 불만의 요소였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부족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복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언제 어디서나 늘 ‘아버지!’하고 부른다. 육신의 아버지는 계시지 않지만 정감이 넘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확실히 받아들이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신 희생적인 아버지에게 오직 순종만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120년여 전 척박한 조선 땅에 파란 눈의 전킨(Junkin, William McCleery)선교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군산지역에 젊음과 열정을 다 바쳤다. 자녀를 셋이나 잃고 자신도 43세의 나이에 그의 자녀들과 이 땅에 묻혔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 분의 말씀 따라 헌신하여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우리는 늘 그 분에게서 받고 누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조선말기보다 더 못한 지역으로 받은 사랑을 실제로 잘 전하는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수룡 장로(마산회원교회)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0-05-25
  • [이상규 교수] 초기 기독교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우리가 대역병(大疫病) 혹은 전염병을 말하면 중세기 특히 14세기의 흑사병을 생각한다. 그것이 대역병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유의 질병은 그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염병은 초대교회 시대에도 창궐하여 교회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발병하여 인류 사회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1918년의 스페인독감 이후만 보더라도 1957년의 아시아독감, 1968년의 홍콩독감, 2002~2003년 사스, 2003~2009년의 조류독감, 2009년의 신종 플루, 2015년의 메르스 등이고 최근(2019-2020)에는 중국 후베이성 무한(武汉)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이런 질병이 창궐할 때 그 시대 교회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런 호기심을 가지고 이번에는 초대교회 시대의 역병과 교회의 대응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역병(165-180) 첫 3세기 동안의 초기교회 시대에는 크게 두 차례의 국제적인 전염병이 발병했다. 첫 번째 경우가 2세기 중엽, 곧 165년 겨울에 발생한 역병이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황제 치하에서 근동 실루기아에서 베르스의 군부대에서 발병한 이 역병은 180년까지 15년간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역병이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인데, 이 병의 확산을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역병은 골(Gaul)로 그리고 라인강을 따라 확산되었고, 원정에서 돌아온 군인들에 의해 동부의 로마 제국으로도 전파되었다. 고대 사회는 통계에 무관심하여 정확한 사망자를 알 수 없으나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로마제국 인구의 4분지 1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매우 높은 치사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세균학자이자 의사학자인 한스 진저(Hans Zinsser, 1878-1940)는 “사망자가 많아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을이 공동화되고 황폐화 되었다”고 썼다. 이 역병은 일, 이년 정도로 유행하다가 종식된 것이 아니라 무려 15년간 지속되었고 166년 이전에 중국에까지 전파되었기 때문에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황제 아울렐리우스 자신도 이 역병으로 180년 3월 17일 사망했다. 흔히 지병의 악화가 사인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 역병으로 고생하던 중 비엔나에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변의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한스 진저는 이것이 서구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천연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엄청난 인구가 유실되자 인력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두 번째 역병(249-262) 두 번째 발병은 249년 시작되어 251년 창궐하기 시작했다. 262년까지 계속된 이때의 전염병은 도시와 농촌으로까지 파급되었는데 이번의 역병은 홍역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천연두나 홍역을 경험해 보지 못한 지역에서는 면역력의 부재로 피해가 컸고 치사율도 높았다. 이때 로마시에서만 하루에 5천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다고 맥닐은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인구의 3분지 2가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보우크(A. Boak)는 추정했다. 이때의 역병에 대해서는 기독교 관련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이 전염병과 흑사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몇 년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설교에서 “청천벽력처럼 그 어떤 재앙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인 이 질병이 임했다”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기독교회의 대처 문제는 이런 역병이 창궐했을 때 기독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리고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종교의 가치는 위난한 상황에서 유효한 역할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 당시 대역병의 현실에서 종교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첫 째는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났는가 하는 재앙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앙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제시해야 한다. 자연과학과 의학이 발전한 오늘에는 그것을 종교가 답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초대교회 당시는 사람들은 종교가 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방종교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도피였다. 그래서 이교의 사제들은 피신했고 고위층 관리들이나 부유한 이들은 도시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이교도들은 환자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보아 격리만이 최상의 도피였다. 물론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으나 도피가 최상의 대책이라고 여겼다. 부모는 자녀를 버렸고, 자녀도 부모를 버렸다. 돌보지 못한 자녀들과 연로한 부모들이 회생의 가능성이 고려되지 못한 채 보호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했을까? 이때의 역병에 대처 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 교회는 모든 질병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보았고, 도피가 최상의 길이 아니라 보살핌과 배려라는 사랑으로 질병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점이 이방종교와 그 신봉자들과의 현격한 차이였다. 이때는 데시우스(Decius, 재위 249-51)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가 조직적인 박해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 c. 200- c. 265)는, “이교도들은 처음 질병이 발생하자 아픈 자를 내쫓았고, 가장 가까이 이는 자들이 먼저 도망쳤고, 병든 자가 죽기도 전에 거리에 버려지고 매장하지 않는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을 막고자 했으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망치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달랐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역병의 현장에서도 사랑의 시혜자이고자 했다. 자기만 살겠다고 도피하는 현실에서도 도피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감염된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폈고 소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었다. 도움을 베풀되,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했다.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키프리안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역병이 절정에 달하던 260년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설교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 형제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 주었으며 한시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보살폈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었고 주님 안에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감염되자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 자신이 감염될 수 있고 또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형제 사랑을 실천했는데 이는 이교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단어가 ‘파라볼라노이’ 곧 ‘위험을 무릎쓰는 자들’이라는 단어였다. 3세기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파라볼라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위난자들에게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했다는 중요한 증거였다. 디오니시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사랑을 실천한 대가로 죽음을 맞았고, 또 이런 사랑을 실천했던 장로나 집사 혹은 평신도들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들이야 말로 순교자와 다를 바 없다고 설교했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일 ‘사랑은 영혼의 손’(Love is the hand of the soul)이라고 말한 것이다.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키프리아누스나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역사가인 유세비우스 등은 이런 역병이 기독교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병든 자를 간호하고 위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푼 결과로 죽음을 맞기도 했으나, 모든 치료가 중단된 상태에서 기본적인 간호만으로도 사망률을 현저히 낮출 수가 있었다고 의사학자 맥닐은 주장한다.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쇠약해진 이들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방 종교 신봉자들에 비해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베푼 형제애적 사랑은, 이교 숭배자들의 마음을 열어 기존 종교를 폐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수용하는 변화, 곧 기독교로의 개종이라는 종교적 이행(移行)이 이루어져 기독교의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런 질병이 로마제국 쇠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에드워드 로밀리 보크(Author. E. R. Boak, 1888-1962)와 역사가들은 계속되는 일련의 역병의 발발로 인구가 감소하였고,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도 감소하였다. 또 도시와 농촌 등 행정 지원 부족으로 야만인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역량이 약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자연재해나 역병이 역사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런 대 변역의 와중에서 기독교는 절망한 민중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현세적이든 내세적이든 상관없이.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2020-04-08
  • [안동철 목사] 두려움을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선택하라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는 노예해방을 이끌고,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링컨이지만 그는 평생 위기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선거만 하더라도 20번의 낙선을 경험하였다. 정적들로부터 무시와 오해를 많이 받았고, 거짓뉴스와 흑색선전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1865년 4월 14일 저녁,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한 인간으로 분명 그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형편에서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는 두려움과 절망을 선택하기보다 하나님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그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미국 워싱턴에 가면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이 있는데, 이곳에 그의 성경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사선을 넘나드는 인생의 고비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였다. 그가 가장 많이 읽은 흔적이 있는 성경구절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편 34편 4절의 말씀이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편 34:4). 코로나 19는 국가적, 교회적 위기임이 분명하다. 아직 백신이 없는 전염병 자체도 두렵지만 이 전염병이 사람들에게 주는 공포심이 더 큰 문제이다. 그러나 이때 성도는 두려움을 선택하기보다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말자. 전염병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피해가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도 전염병에 대비해야 하고, 개인위생을 철저히 해야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해야 한다. 방역당국의 요청에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의 실천’이다. 주후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로마제국 전 인구의 1/3이 천연두로 죽어갈 때, 그리고 주후 251년 알렉산드리아 인구 2/3이 전염병으로 죽어갈 때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부자와 권력자들은 안전지대로 도망쳤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도망갈 힘도, 돈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을 옮기는 쥐들이 들끓는 그 썩어 널려진 시체들 속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아무도 돌보지 않던 연약한 자들을 돌봐주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기독교는 불과 250여 년 만에 ‘핍박받는 종교’에서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늘 세상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때 말이 아닌 실천을 보여줘야 한다. 도그마화 되어버린 죽은 교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도 포기하는 헌신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생명의 도’(행 7:38, 개역성경)라 불리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화석화되어 버리느냐, 아니면 생명의 빛을 세상 가운데 발하느냐는 기로 말이다. 안동철 목사(창원교회)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2020-03-25
  • <정연철 목사의 행복 콘서트>목회자의 리더십(6)
    함께 준비하는 예배 주님은 교회를 목회자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활은 담임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가 평안한 것과 부흥이 되고 안 되고는 담임 목사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담임 목사가 건강해야 목회가 팔팔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장로님이나 부교역자는 담임 목회자를 함께 돕는 입장에 있습니다. 장로님들은 기도로 돕고,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며 혹시 누가 될까봐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에게 제가 주일설교를 준비할 때는 그것이 끝날 때까지 아무리 급해도 전화하지 말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는 집중하여 영적인 양식을 열심히 지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준비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면 그것 때문에 밥을 못 짓게 됩니다. 전화한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신경을 건드리면 주일 예배를 완전히 흐트러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일에도 마지막 설교가 끝날 때까지 사모님은 교인들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목사님께 말하지 말아야 하고, 부목사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 덮어두었다가 예배가 끝나고 나서 “목사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목회자의 마음속에 행여 근심이나 염려가 생겨서 예배에 전념하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위원들은 목사님이 강단에 섰을 때 목사님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눈치를 잘 살펴서 그곳에 문제가 있으면 발리 조치해야 합니다. 예배를 돕기 위해서는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마이크는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지, 주보는 제대로 올라가 있는지, 물은 준비되었는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는 목사님이 주일에 어떻게 설교하느냐에 따라 성도들의 일주일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한 주간 살면서 절망과 어려움이 올 때 주일이 선포된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한 안수집사님은 공무원 생활을 20년 이상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이분이 워낙 똑똑하고 일 처리를 잘하기 때문에 인근 부산광역시에서도 스카우트해가려 하고, 경남도청에서도 여러 번 데려가려고 했지만 이분이 떠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 교회와 저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직을 서면서 저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지금쯤이면 목사님은 뭘 하고 계실까요.”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남자 집사님뿐만 아니라 여 집사님한테서도 이런 위로의 편지를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가장 힘을 얻을 때는 이렇게 편지를 받을 때입니다. 양복을 해주는 것보다도 점심 한 끼 사주는 것보다도 이런 편지를 받을 때, 그분들의 진솔함을 느낄 수 있고 그 속에서 잔잔히 흐르는 마음의 감격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과 함께 있는데 목회자가 아까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현장, 가정,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바로 목사님을 돕는 것이고 주님을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목회자는 어려운 일이 올 때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장로님 가정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아, 내가 목사로서 우리 장로님 가정을 위해서 돌보지 못한 것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부모의 마음과 목자의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건강할 때 교회가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할 때 성도들이 건강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병들면 교회가 영적으로 병들어가기에 기도로 목회자를 돕고, 직분을 맡은 분들은 어려운 일은 내가 감당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하고 좋은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건축을 하면서 참 좋은 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금식한다고 하면 막아섰습니다. “목사님, 금식하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제가 목사님 위해서 금식할게요. 목사님은 주무세요. 이제 좀 들어가서 주무세요. 제가 이 밤에 불침번 서겠습니다.” 이것이 가정이라면 이런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정연철 목사(삼양교회)
    • 오피니언
    • 논문/책
    2020-03-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