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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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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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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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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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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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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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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아침묵상[김진홍 목사] 사랑의 기술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쓴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란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쉽고 짧은 책입니다. 쉽고 짧다 하여 깊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 사랑을 주제로 쓴 책들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저자가 사랑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인격과 사람 됨됨이와 성품을 길러져야 사랑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랑은 훈련받아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거듭 주장합니다. 운전을 하려면 운전 연습을 하여 운전면허증을 받아야 하고, 집 짓는 목수가 되려면 목수가 되는 훈련을 거쳐 목수 기술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것도 사랑할 수 있는 훈련을 거쳐야 사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사랑 훈련을 제대로 받지를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훈련을 받지 못하는 데는 사랑에 대한 오해가 있는 탓입니다. 사랑에 대한 오해의 첫 번째는 바람직한 사랑은 주는 것인데,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기에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부 간 사랑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할 때는 서로 사랑하기에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받는 것으로만 오해하기에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해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사랑을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 역시 아내에게 당신은 왜 남편인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데, 서로 받으려고만 하다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김진홍 목사(두레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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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기도(祈禱)
    손과 입이 하나일 때그것이 기도이다 꿈과 일이 같이 갈 때 그것이 기도이다 사람이라도고개가 끄떡여 질 때그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이 가시던 걸음 멈추시고눈 여겨 보실 때 그것이 비로소 기도이다 作 신광열 목사(대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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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박봉석 목사] 사건과 시각
    한 목사님이 어느 날 이상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3년 안에 당신을 넘어뜨리고 말겠다는 내용의 협박 메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메일은 부연하기를 자신들이 지목하고 넘어뜨리겠다고 공언한 목회자들 중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메일을 받고 처음에는 섬뜩했습니다. 이단이 이제 나를 노리는 가보다 생각이 들며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에 금방 긴장이 풀렸습니다. 그 생각은 두 가지였는데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뭐라고 이단이 나를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로 생각해서 넘어뜨리려고 하는가,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다소 유머러스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정말 이단에서 나를 넘어뜨리기로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내가 더욱 경성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더 영적으로 조심하며 살아간다면,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더 유익된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필자는 어느 책에서 이 목사님의 이런 생각을 읽어보면서 참 귀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목사에게 정말 안 좋은 일이 닥쳤는데 그것을 오히려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긍정적인 마인드, 필자도 꼭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성경 로마서 8장 28절 말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며 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독자 여러분,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다윗도 그의 생애에서 믿음에서 크게 넘어졌던 적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넘어졌습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큰 대적이었던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괴롭혔던 사울 왕 때문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는, 그리고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그 시절에는 다윗이 얼마나 경건하고 믿음이 굳건했는지 모릅니다. 골리앗을 향해서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고백하며 나아가서 그를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끊임없이 죽이려고 하는 원수 같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찌 하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해할 수 있느냐고 말을 하면서 사울 왕을 해하지 않았고 그를 비방하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때에는 오히려 다윗의 믿음은 더 숭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 같은 대적도 없고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사울 왕도 죽고 나서 다윗이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오르고 나라가 안정되었을 그 때에 오히려 믿음에서 넘어졌습니다.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혹하여서 그를 불러들여서 간음을 행하고, 그리고 그것을 감추고자 그의 남편을 맹렬한 전쟁터로 일부러 보내어서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책망을 받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만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골리앗이나 사울 같은 존재나 사건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볼 때에, 결코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유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더 성숙한 신앙인, 더 훌륭한 사명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힘든 사람이나 사건을 만나면 으레 그것을 고통으로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자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만들어가고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연단이며 과정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라는 사람은 “인간은 일어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일어난 사건보다 시각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건에서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낙망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독자 여러분의 믿음이기를 소망합니다. 박봉석(마산중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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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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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의 사랑받는 성도가 되자 (마 23:1-39)
    바리새인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 본문 13-34절까지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씀이 일곱 차례나 반복해서 나온다. 주님은 왜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을까? 첫째, 천국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자신의 잘못된 신앙 때문에 남까지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둘째, 지옥의 자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제자훈련을 했다. 셋째, 소경된 인도자이기 때문이다. 신령한 것에는 눈이 어둡고 세속적인 것으로 성전의 금에만 눈이 밝았지 성전에 대하여는 너무도 무관심한 자들이다. 넷째, 의인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외적인 행위는 온전한 것 같으나 내적인 심령은 이미 병들어 죽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의로움과 사랑과 믿음은 저버리고 마치 국가에 납세나 공공요금을 내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다섯째,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은 용기이다. 심령이 깨끗지 못하면 아무 곳에도 쓰임 받을 수 없다. 여섯째,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무덤은 죽은 송장이 들어 있는 곳으로 아주 무섭고 썩은 냄새가 나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무서워진다. 아름다운 사람도 썩으면 지독한 냄새가 난다. 평범한 백성들보다 존경을 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썩으니 더 악취가 나는 법이다. 일곱째, 조상들의 허물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무지한 백성들로 인해 선지자들이 피를 흘렸다고 말씀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선조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들이 그때 있었으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자기들만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님은 이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행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 한다. 마5장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입을 열 때마다 “복 되도다”혹은 “복 있는 사람은”하고 복을 베풀고 계신다. 그런데 본문에서 입을 열 때마다 "화"를 말씀하시면서 저주를 토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출세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되기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창기나 세리 같은 존재가 되어도 주님 앞에 사랑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지 모른다. 본문 마지막 단원 35-39절을 살펴보자.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책망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흘린 순교의 피는 결단코 헛되지 않는다고 했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살아서 역사 한다. 첫째, 의인 아벨의 피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에 흘린 피이다. 아벨의 피가 증거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벨 자신이 흘린 피는 순교적인 의로운 피이지만 구원계시 속에서 주어지는 의미는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첫 메시지이다. 아담의 범죄로 나타난 사망권세가 제일 처음으로 아벨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망권세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둘째, 성전에서 흘린 사가랴의 피이다. 그는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책망하다가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아벨 이후로 주님 오시기까지 수많은 종들이 피를 흘렸다. 구약의 성소에서 흘린 제물의 피와 선지자들의 피는 오실 메시야의 예표이다. 셋째, 주님이 흘린 피이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님은 탄식하면서 외치기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정작 참 선지자로 오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은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선민이 된 민족이다. 그들은 선민이 된 은혜로 절대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시기도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지 않았다. 출애굽 광야 40년이 그러했고, 가나안 정복시대, 사사시대, 그리고 왕정시대가 그러했다. 심지어 불순종의 대가로 남북이 분열되어 이방의 포로가 되어 다시 회복시켜 주셨는데도 그러했다. 이들은 마침내 하늘로서 오신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저도 거부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이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탄식하신 것이다.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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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하나님
    인생의 삶은 환난, 고난의 연속입니다. 환난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환난을 통해 연단 받고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환난 당할 때 담대해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6: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사무엘하 4:9절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다윗의 삶은 평탄한 삶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수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다윗은 수 많은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생명의 위기 여러 번 죽을 뻔했는데 하나님께서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사울 임금에 의해 죽을뻔 했을 때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습니다. 생명의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환난 당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건져 주십니다. 인생의 삶에 여러 가지 예기치 않는 위기가 찾아 옵니다. 경제의 위기, 인간 관계의 위기, 건강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환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환난의 때에 건져주십니다. 욥기 5:18-19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인간은 인간이 당하는 환난, 위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해결하실 수 있으신 전능자이십니다. 평생 건강해서 장수하는 것이 아니고 건강의 위기 때마다 건져주시고 병을 치유 하여 장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환난과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환난과 위기의 때에 생명을 건지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환난 날에 부르짖으라 내가 건져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50:5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하나님, 건지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로마서 12: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야고보서 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0-02-19
  • [조희완 목사] 선택의 기준 (창13:1-13)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주일날 두 젊은이가 도박장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박장으로 가는 길목에 한 작은 예배당이 있었고 그 예배당 입구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설교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설교 제목을 보자 한 청년은 죄의식이 생겨서 도박장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참석했고 그 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은 교회로 들어간 친구를 비웃으면서 도박장으로 가서 밤새도록 도박을 즐겼습니다. 도박장으로 갔던 친구는 그날 이후로 늘 도박장을 전전하다가 큰 죄를 짓고 사형수가 되어서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장기 복역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신문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기사를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이 바로 30년 전 자기와 함께 도박장으로 가던 그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함께 도박장으로 가다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던 그 친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국의 제22대 대통령과 제24대 대통령을 지낸 <클리브랜드>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이 그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한 사람은 잘못된 선택으로 사형수가 되었고, 한 사람은 올바른 선택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잘못된 선택을 크게 후회했지만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TV광고 문구가 있듯이, 한 순간의 선택이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선택하는 것이 참 중요하지만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모든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기준을 따라서 선택하면 될까요? 첫째로, 영적인 유익을 좇아서 선택해야 합니다.(창13:9-13) 둘째로, 장래의 유익을 좇아서 선택해야 합니다.(창25:29-34) 셋째로, 믿음의 결단을 좇아서 선택해야 합니다.(수24:14-18) 바른 선택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조희완 목사(산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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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정연철 목사의 행복 콘서트>목회자의 리더십(3)
    담임 목사의 중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1:1).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어 그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고 하셨습니다. 비밀이 나오고, 일곱 별이 나오고, 일곱 촛대가 나옵니다. 별은 주의 사자를 가리키고, 촛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촛대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곱은 비밀스러운 숫자인데, 그 일곱이란 숫자로 헤아린 것은 교회와 주의 사자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의미하며 성도들이 주의 전이므로 성령이 그 속에 거하시고 진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좋은 성도가 있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좋은 교회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관심은 좋은 교회에 출석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멀리 이사를 가게 되면 좋은 교회를 추천해 달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건강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았다는 일음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교회는 다니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기 원한다면 먼저 지도자의 중요성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교회의 사자를 오른손에 붙잡고 다니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사자를 오른손에 붙잡고 다니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의 사자들을 오른손에 잡고 다니는 것은 주의 사자가 너무 귀장하기 때문일 것입ㄴ다. 시장을 갈 때 어머니는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에는 아이를 붙잡고 갑니다. 아이를 왼손으로 붙잡고 갈까요, 아니면 오른손으로 붙잡고 갈까요? 귀중한 것은 보통 오른손으로 붙잡습니다. 돈 주머니도 오른손으로 붙잡고 갑니다. 왼손으로는 귀중한 것을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사자들을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했다는 말은 에베소 교회를 시무하는 목회자에게 편지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사도 요한의 편지를 통해 교회에 선포하시기 위해 시무하는 목사에게 편지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를 보면 교회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를 칭찬하면 교회를 칭찬하는 것이 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병들면 가정 전체가 병이 들 듯이 담임 목사가 살아 있으면 교회가 살아 있고 담임 목사가 병들면 교회가 병듭니다. 가장이 병들면 그 가정 전체가 분위기가 우울해집니다. 아빠가 건강해야 가정에 웃음도 있고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그런데 아빠가 병들어 눕게 되면 아내는 물론 자녀들까지도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자주 우리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쓰러져서 더 이상 목회를 하기 어렵게 되면, 언제든지 여러분들이 원하는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하세요. 앞문도 열렸고 뒷문도 열렸으니까 다른 곳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래도 우리 교회가 생각나면 그때 오세요. 제가 몸을 바쳐서라도 여러분들을 받아들일 테니까요. 절대 나를 가지고 험담하면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안 됩니다.” 그랬더니 젊은 집사님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담임 목사가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삽니다. 담임 목사가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합니다. 저는 선장도 해봤고, 월남도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배에서든 전쟁터에서든 지도자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즉 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영적 생명과 행복하 인생의 보람은 전적으로 교회 지도자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회자들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쓰러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기도가 나옵니다.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때 성도들이 기도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이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들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들의 영적 생명과 영적 행복이 지도자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이 영적으로 목자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성도 자신의 신앙에 마이너스가 되고 어렵고 힘이 들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연철 목사(삼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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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 인과응보, 자업자득, 자승자박
    1. 서언(序言) “이게 다 자업자득이지 자업자득이야”라고 하며 자기 신세 한탄하는 어떤 집사님의 말을 옆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이 용어들은 누구든지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타 종교로부터 온 용어들을 구분하는 면에서 보면 이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상용어로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2.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승자박(自繩自縛) 먼저 “인과응보”란 말과 그다음 앞에서 언급한 “자업자득”이란 말이다. 이 두 용어도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통용어 중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이 두 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아주 색체 강한 순전한 불교적인 용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는 당연히 삼가해야 할 말 중의 하나이다. 1) 인과응보(因果應報) : 사전적인 뜻은 “사람이 짓는 선(善)과 악(惡)은 거기에 따른 분명한 결과가 있다.”는 말로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결과가 따라온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바라보는 우주 전체를 이루는 원리요, 법칙이며, 불교사상 전반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인과(因果)사상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인과 사상을 논한다면, ‘인(因)’은 “어떤 현상보다 먼저 일어나 그것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작용)”을 의미한다. 과(果)는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결과(반응)을 의미한다. 또한 응보(應報)라는 말의 뜻은 선악의 행위에는 반드시 화(禍)와 복(福)의 결과가 온다는 말이다. 이상으로 본다면 우리 기독교 신앙적 용어로 사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성경에도 이런 면에서의 인과응보적인 말씀들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말은 단순한 원인과 결과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의 이 용어는 그들의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인 윤회설(輪回說)과 결부되어 있으며, 중생을 교화(敎化)시키는 불교의 첫째 교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 말들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어떤 형태로든지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고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인과응보의 원칙은 전생에 행했든 일들과, 현재의 선한 일, 악한 일들과 살아 있을 때에나 다음 생애에도 그대로 존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는 윤회전생, 연기론(緣起論)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2) 자업자득(自業自得) : 앞에서 논한 “인과응보”로 인하여 자연연적으로 나온 말이 바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다. 업(業)이란 말은 인도의 고어 (Kaman)의 번역이며 ‘행위’라는 뜻이다. 이로 보면 인과응보에서 말한 대로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반드시 스스로 피할 수 없는 것을 ‘득’하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업은 삼세(三世), 즉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의 삼세에 걸쳐 실재한다고 보고 있다. 결과적로 보면, 자업자득이란 말은 현재의 업이 나중의 원인이 되어서 결국 미래의 결과가 되고, 과거의 업의 결과가 반드시 또 현재에 나타난다고 보는 불교사상의 핵심 교리적인 용어이다. 3) 자승자박(自繩自縛) : 인과응보, 자업자득과 비슷한 말로서 사전적인 뜻은 “자신이 만든 밧줄에 자기 스스로가 묶여지게 된다.”는 말로서 자신이 주장한 의견에 자기 스스로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子縛(자박)으로 말하고 있는데, 뜻은 번뇌가 몸을 속박하여 자유롭지 못함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위의 두 자업자득, 인과응보란 말과 함께 자승자박도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에서 나온 거의 비슷한 말들로 통용되고 있다. 3. 결어(結語) 이상으로 볼 때 위의 용어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될 말들이다. 물론 부분적인 의미는 성경적인 의미와 동일하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6장 7절의“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위의 3단어들로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용어들은 앞에서 논한 대로 불교의 윤회설과 전생의 사상이 담겨진 교리적인 말들이기 때문에 교회 용어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말들이다.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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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특별 칼럼] 일본과 한국을 잇는 기독교
    일본은 다신교의 나라로 두 가지 이상의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종교별 신도수의 비율을 보면 불교가 48.2%, 신도(神道)가 51.2%를 차지하는 가운데 기독교 복음화율은 0.2%도 못 미치고 있지만,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결코 짧다고 볼 수 없습니다. 1.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선교사 일본에서 기독교를 처음으로 알린 선교사는 예수회 소속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도의 선교사였으나 야지로라는 일본인을 만나며 일본선교를 결심하고, 1549년 8월 15일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후, 2년 3개월 정도 일본에 머물다가 중국으로 떠났지만 그가 머물렀던 가고시마, 나가사키, 야마구찌 지방에는 많은 키리스탄 신자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갈수록 신자가 늘어나고, 불교도들의 항의가 잇다르고, 서양의 세력에도 두려움을 느끼면서 일본은 1597년에 기독교에 대한 금교령을 내리고 박해를 시작합니다. 이 박해는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이 되고, 1614년에 또 다시 금교령이 내리면서 수 많은 성도들이 체포되고, 이들은 개종을 강요받으며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로 목숨을 읽고, 이 때에 30만명의 성도들이 묵숨을 잃고 300년 가까이 금교령이 지속되면서 기독교의 모습은 일본에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2. 개신교 선교사 기독교 금교령은 1873년에 들어와서야 철폐가 되는 데 이는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개신교 선교사들의 기도와 헌신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53년부터 시작된 문호개방 요구에 일본은 오랫동안의 쇄국정책을 끊고, 1854년에 미일화친조약이 채결하게 되면서 1859년부터 여러 개신교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에는 선교활동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먼저 일본에 교육기관과 진료소를 세워 교육과 진료활동을 통해 일본인들과 만나기 시작합니다. 헵번선교사(J.C.Hepbun)는 진료소를 개설하는 한편 일본어 성경 번역도 시작하여, 1872년에는 마가, 요한복음 발간을 시작으로 성서 번역위원회까지 조직하여, 1888년에는 일본어 신구약성경을 완간하는 업적을 남기는 한편, 교육을 위해 헵번숙이라는 학교를 세웁니다. 또 바라선교사(J.H.Ballagh)에 의해 세워진 바라숙이라는 학교에서는 9명이 세례를 받는데, 이들 학생을 중심으로 요코하마 밴드라는 기독교 그룹이 생겨나고, 기독교가 법으로 금지되고 있던 1872년에 일본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요코하마가이칸교회(横浜海岸教会)가 설립됩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게 된 메이지일왕은 1873년에 300년 가까이 지속된 금교령을 철페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곳곳에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이 세워지게 됩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을 통해 학문을 배우면서 많은 청년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에는 3개의 기독교 밴드(요코하마, 쿠마모토, 삿포로)가 형성되어 부흥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복음을 통해 일본인들의 의식은 다양하게 변화되었고, 이는 일본을 넘어 이웃 나라인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3. 일본과 한국을 잇는 기독교 일본의 근대화 소식을 듣게 된 조선은 1880년에 신사유람단을 조직하여 일본으로 보내는 데, 이중 안종수는 일본의 근대 농업을 시찰하면서 일본의 농학자인 츠다센(津田仙)을 만납니다. 신앙이 뜨거웠던 츠다센은 안종수에게 농업지식을 전해주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한문성경을 선물하지만, 당시 조선에는 기독교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국법을 어기면 처형될 것을 염려한 그는 이를 거절합니다. 이후, 조선에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데, 위기에 처한 민비를 민영익의 친구로 지냈던 이수정이 도와 살려주게 되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일본의 선진 농업 기술을 배우기 위한 명목으로 제2차 신사유람단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후 안종수의 소개로 츠다센을 만나고, 그는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을 전해주며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소개합니다, 나라의 가난을 해결하러 간 이수정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그에게 깊은 감동이 되었고, 츠다가 소개한 교회에 출석하면서 이수정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이듬 해인 1883년 4월 29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녹스(G.W. Knox)와 야스가와 목사의 집례로 일본에서 조선인 최초의 세례교인이 됩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이수정은 조선의 땅에 복음을 전하는 꿈을 꾸기 시작하고 루미스(H. Loomis)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884년에는 한문성서에 한국식 토를 단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1885년에는 마가복음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출간합니다. 그리고, 1883년과 1884년, 2번에 걸쳐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데, 이 편지로 뉴저지 뉴브런즈윅 신학대학에서 한 명이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데, 그가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입니다. 이후 조선에 선교하기 위해 모인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는 요코하마에서 이수정과 만나서 그가 번역한 한글로 된 마가복음을 가지고 184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입항을 하게 되고 이후로 복음이 한국에 전해집니다. 4. 한국의 땅끝은 일본 메이지 초기에 부흥을 이루었던 일본의 기독교는 1887년부터 국수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일왕제를 신격화시키며 기독교를 다시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지식층에 주로 분포했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제국주의에 편승되고, 1941년에는 교회마저도 정부에 의해 통합이 되면서 복음의 능력은 사라지고, 사회 속에서도 소외받고 있는 가운데 복음이 필요한 땅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수정을 일본으로 불러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이런면에서 한국은 일본에 대해 복음에 빚졌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일본의 신민지라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믿음을 굳건히 하여 이제는 전세계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로 거듭납니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한국인에게 있어 일본은 여전히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가깝고도 먼나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이웃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일본과 한국을 이어주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전1;8). 한국의 땅끝은 바로 일본입니다. 김주영 선교사(후쿠오카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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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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