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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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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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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정의(JUSTICE)가 없어지는 대한민국 사회인가?
세계 지성인들을 넘어 일반인들에까지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센델의 ‘정의는 무엇인가’(JUSTICE)의 책을 읽으면 다소 어렵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급변하는 세계 정치 경제 사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의문들을 진지하게 풀어낸 가히 세계 베스트 셀러의 가치가 있다. 27세에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마이클 교수가 강의 현장에서 수많은 학생들과의 강의와 질문 그리고 토론 심지어 강의장에서 논제를 놓고 투표를 하면서 정의를 찾으려는 몸부림이 살아있는 저서에서 읽히고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사속의 사회 정치 경제 석학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토론하고 결론을 내려고 애쓴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별다른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온 세계 인류 보편적 행복을 위한 정의의 뜻을 독자 나름대로 찾을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정의(JUSTICE)는 어떻게 재단되고 사회 현장에 적용해야 하는가. 보편적 사회 기능에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권리를 찾는다. 그리고 재화의 분배를 통해 포상과 장려의 삶의 문화를 위해 법치가 기능을 한다. 이에 따른 사회 공공선을 이뤄감이 이상일 것이다. 그것이 사회 정의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 정의가 이때만큼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생겨나고 있다. 갈등과 분열의 사회현상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사회정의의 담론이 우리 앞에서 서있다. 22대 국회의원총선을 겪으면서 정의와 불의가 혼돈되고 있다. 보편적 정의란 무엇인가의 담론에서 찾아낼 수 없는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이 무섭다. 사회 지도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법과 도덕의 적응도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한다. 그것이 안 되면 국가관리의 지도자 되기를 포기하고 양보해야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선량(選良)이라고 칭하지 않는가. 전과 기록은 이제 불필요하다. 너무나 무섭고 부끄러운 사회 범죄를 행하고도 정치 권력에 탐욕을 내는 군상들이 사회 정의를 짓뭉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성경 창세기에서 보듯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기에 공동체의 선을 함께 이뤄 가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구원의 목적을 위해 심판 현장에서도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하나님은 공동체 선을 위해 작업하신다. 선악과를 만드시고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한다. 그러나 먹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덮어 가고 있다. 기독교 사회 운동가 스콧 D 알렌은 ‘사회 정의는 성경적 정의인가?’라는 저서에서 설파했다. 사회 정의가 성경적 정의와 일치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오늘날 이미 죽었다고 하는 인본주의 막시즘이 문화 막시즘으로 다시 살아나 인류를 혼돈하게 한다고 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은 이미 실패로 끝났지만 새로운 인본주의 이념으로 정의의 가치를 흔들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보는 것에만 나온 진단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주변 정세에서 흘러들어오는 정의의 가치를 깨고 있는 전체주의 이념의 위험한 수용이 우리사회를 흔들고 있다. 정의사회의 위험한 시대 우리는 어떻게 할 것 인가. 오직 복음 전파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의 정의가 세계 복음화와 함께 인류 번영을 이끌 수 있는 새로운 무브(move)가 필요하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기독교 기본 핵심이 온 세계 복음으로 전파될 때 이 땅은 그래도 공동선의 문화가 세계를 리드하지 않겠는가. 정의(JUSTICE)가 살아있는 진정 행복의 땅이 되지 않겠는가. 정의가 메말라버리는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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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4 :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40년이 넘는 목회 생활과 일정 기간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한 필자이지만, 실제적인 표현에서는 혼동이 되는 말들이 너무 많다.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예배인가? 예식인가? 또 예배 형식을 갖춘 집회와 기도회는 예배인가 집회와 기도회인가? 이런 명제 앞에서도 때로는 구분이 쉽지는 않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를 분석하고 논하고자 한다. II.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용어분석 1. 예배(禮拜)란? : 일반적인 사전적 뜻은 ‘초월적 존재 앞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의식’이다.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거의 대부분 예배학자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했다. 또한 예배는 그 대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찬양 예배 등이다. 2. 예식(禮式)이란: 사전적인 뜻은 ‘예법에 의해 행해지는 식’으로 결혼식, 장례식 등을 예를 들고 있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많은 길흉사에서 하나님께 예배형식을 갖추는 것’이라 했다. 이는 기존 예배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라 본다면, 예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에서 하나님께 예배 형식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양은 같은듯하나 대상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예식, 장례예식, 각종 임직식, 첫돌, 회갑, 입학, 졸업, 취업, 개업, 첫돌예배 등 인간 중심으로 발생하는 많은 예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3. 집회(集會)란? : 사전적인 뜻은 ‘특정한 공동목표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모임’이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교인들의 믿음의 증진을 위하여 모이는 일체의 모임’등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여러 유형의 부흥회, 수련회 등으로 사람이 중심이다. 4.기도회(祈禱會)란? : 먼저 祈禱의 일반적인 뜻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비는 행위’를 말한다. 祈禱會란 이런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다. 우리 개신교적 의미로도 일반적인 뜻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모임’을 말한다. 전통적인 경우는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이 있다. III.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에서 정리한 표준예식서에 의하면, 이 4가지 용어는 각각 그 대상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해야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일이 중심인 예식과는 형식은 비슷하지만,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도회와 집회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두 경우도 예배 형식은 있지만, 그 성격이 인간의 일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인 성격에 따라 기도회와 집회라고 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배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도 이 4가지 유형은 모두 성격과 목적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현대 교회의 예배들이 위의 이런 4가지 유형들이 혼합되어 저마다의 본질이 퇴색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정장복 교수와 같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이면서 국문학자인 故 나체운 교수는 4가지 유형의 행위들이 모두 성격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라는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어 구분하는 것은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모두 다 그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어떤 용어든지 구태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론과 제언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어나 원어로 말하면 간단한 것을 우리는 뜻글자인 한문과 변화무쌍한 소리 글자인 한글을 사용하다보니 통일된 용어 사용이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같은 교단의 교수들과 표준 예식서 마저도 견해가 일치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제안을 해본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지만, 1부는 예배, 2부는 그 성격과 목적에 맞춘 순서를 진행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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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구원이 은혜인 이유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오랫동안 표류한 선박이 드넓은 브라질의 아마존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선원들은 오랜 선상생활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여객선 한 척이 지나갔습니다. 선원들은 여객선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좀 주시오. 우리는 갈증 때문에 죽어가고 있소.” 그러자 그 여객선의 승객들이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맑은 물이 흐르는 강 한복판에 와 있소. 그대들이 바라보는 푸른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아마존의 강물이오. 물통을 내려 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되오.” 곧 고난주간이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구원의 맑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은 믿음의 물통을 내려서 그 구원의 강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물통을 내리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구원의 강물인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전도자가 전도대상자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자 그는 “저는 살면서 공짜로 무엇을 얻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그 값을 지불했지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도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찬란한 태양 빛을 늘 받으면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매일 마시는 공기의 값을 지불했습니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물음에 그 사람은 “그것은 너무 비싼 것이라서 값을 지불할 수 없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전도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비싸서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것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햇빛과 공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내어 주신 그 사랑은 너무 비싸서 오직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박물관을 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름난 화가들의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유명한 작품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 앞에는 그 그림들의 판매 가격이 각각 붙어 있었습니다. 가령 르느와르의 “독서하는 소녀”는 칠백만 달러 정도를 호가하며, 렘브란트의 그림은 천 이백만달러 내외였고, 루벤스라는 화가의 그림은 천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그 앞으로 가보니 ‘priceles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작품들은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진짜 좋은 작품은 값이 없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지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공짜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가격을 지불하셨겠습니까? 독자 여러분의 자녀들을 얼마의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자녀들의 가격을 정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죠! 정말 소중한 것은 값이 없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그 모진 고통과 수치를 다 받으시며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즉 그 어떤 가치로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공짜라는 말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공짜가 아니고 그 은혜이니 우리는 우리 평생 그 은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음을 얻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아니 나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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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부으소서,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포도원교회가 창립 44주년이 되었다. 부산 변두리 구포에서 100여평의 작은 교회에서 40년만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1만 가정, 3만 성도, 10만 선교, 100만 전파를 코로나 때 이루었고 덕천성전, 화명성전, 드림센터, 양산 선교센터 4개의 성전을 갖추었다. 교단과 부산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 찬양, 영광, 존귀를 주님께 돌려드린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고 주께서 하셨다. 시23편을 통하여 다윗의 노래, 다윗의 축복을 볼 수 있다. 부으소서 큰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고, 작은 복은 사람이 오두방정 떨어서 챙길 따름이다(약1:17). 말세에 고통의 때가 오지만 주께서 남종과 여종들에게 물 쏟듯이 성령을 부어주신다(욜2:28~29).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없다.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된다(행1:8). 한계를 뛰어 넘고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면 주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산과 골짜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신11:8~14).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 승승장구 했고 범죄시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울면서 회개했다. 채우소서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듯이(갈4:4) 성도는 서러울 때, 가난한 때, 고통의 때를 채워야 된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지나야 농사가 된다. 눈물 병을 채울 때에(시56:8) 응답이 이루어진다.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아랫물이 윗물이 된다.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다. 은혜의 잔을 채우소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의 물을 아귀까지 채울 때 기적이 일어났다(요2:7).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고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럽다. 회개하며 더러운 것을 토설하고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으로 채워야 된다. 넘쳐흐르게 하소서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마침내 가득 채운 후 넘쳐서 흘러간다. 무엇이든지 서두르면 사고 나고 조급하면 실수하고 성급하면 후회한다. 억지로 안 된다. 눈물이 고이고 기도가 쌓여서 마침내 내 잔이 넘쳐야 된다. 임계점을 넘어 서야 물이 끓는다. 샘물은 막힘없이 중단 없이 멈춤 없이 퐁퐁 솟아나서 넘쳐흐른다. 역사는 민심이라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출렁이는지를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주께 받은 은혜를 사해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같이 흘려보내라. 축복의 통로가 되라. 법(法)은 물 흐르듯이 가는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어 주시고 흔들어 넘치게 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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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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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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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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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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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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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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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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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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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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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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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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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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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흔한 이름 : 싸이월드의 추억
- 경상북도 시골 작은 교회에서 진행된 수련회. 며칠간 이곳에서 예배 찬양을 섬기게 되었다. 신학대학 동료들이 집회를 함께 섬기며 봉사하고 있었기에 큰 불편이나 이질감은 없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기에 고향에 온 것 같은 정서적 평안함도 연속된 사역에 지친 내게 오히려 힐링이 되고 있다. 사실 여름 사역이 너무 많았고 대전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만만치 않아서 집회 요청이 왔을 때 거절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었다. 평소 거절의 기술에 능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기타를 매고 이곳에 도착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이번 일정이 내 삶을 뒤집어 놓을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을 꿈에도 몰랐다. 단지 여러 일정 중 하나였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예배는 은혜 가득했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읍내 작은 슈퍼마켓으로 음료와 아이스크림도 사러 나가고 오가는 길에 즐기는 시골 풍경은 피로를 덜어주기에 충분했다. 찬양 인도가 나의 메인 포지션이었지만 동문과 섬기는 작은 집회에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장 막내였기에 잡일에 잔심부름까지 맡으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좋은 시간이었지만 여름방학 내 계속된 집회 일정에 육체적 고단함이 한계까지 차올랐다. 진행 요원들은 분주하지만 한쪽 구석의 철제 의자에 잠시 몸을 맡긴다. “아, 그러세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한사람이 눈에 보인다. 아주 작고 귀엽게 생긴 자매님이 여기저기 누비며 사람들을 돕고 있다. 너무 바쁜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고도의 훈련을 받았거나 천성이다. 다른 곳을 보다가도 자꾸만 그 자매님의 동선을 좇아 눈길이 간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무엇을 들고 가는지, 어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지를 보게 된다. 큰일이다. 찬양인도자가 이렇게 한눈팔면 안 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련회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자매가 누구인지 은밀하게 알아가기에 바빴다. 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기쁨을 획득하며 수련회도 끝이 났다. 전국에서 모였던 스텝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흩어지게 되었다. “너네 학교 선배인데 몰랐어?” 나보다 두 살이 많은 학교 선배라는 사실과 이름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도 걸어보지 못했고 연락처는 당연히 받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시간이 없다. 마음이 조급하다. 터미널에서 연락처라도 받아보려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남자 선배들의 방해가 있었다.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포기 못한다!” 집에서 쉬다가 벌떡 일어나 컴퓨터 전원 버튼을 급히 눌렀다. 알고 있는 정보로 찾아보자. 싸이월드는 가능했다. ‘검색’ 아... ‘78년생 이지현’은 정말 많았다. 엄청난 숫자의 전국의 ‘이지현’씨 홈페이지를 하나씩 방문했다. 페이지를 넘겨 가며, 넘겨 가며. 지쳐갔지만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클릭을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오늘에서야 이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안녕하세요. 수련회에서 찬양을 섬겼던 신재철 전도사입니다.” 홈페이지 프로필에서 알게 된 전화번호. 통화를 시도한다. 가슴이 떨리고 긴장이 된다. 전화를 받은 자매님은 여전히 친절했다. ‘선배’라는 애매한 호칭, ‘전도사님’이라는 불편한 호칭을 하며 매일 같이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한다. 연애일까? 잘 모르겠지만 내 가슴은 즐겁게 뛰고 있었다. 에필로그 어렵게 찾은 자매님은 지금도 나와 같이 예배를 드린다. PPT를 다루고 성도들을 돌보며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다. 당시 친절했던 미소는 사춘기 아들 둘이 누리는 복지가 되었다. 분노할 상황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에게 나의 아이들은 고백한다. ‘우리 엄마가 최고야.’ 잠시 고생해서 찾은 이름 세 글자가 지금까지 내 삶을 평온케 할 줄, 생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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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흔한 이름 : 싸이월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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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부요할 내용 (창26:12-22)
-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들을 때 기분이 좋은 인사말이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한국 “부자특성연구회”(富者特性硏究會) 회장을 맡고 있는 <문성렬>박사의 저서 <부자일지> <한국부자 세븐파워의 비밀>에 참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부자들은 전문가를 100% 신뢰하지 않는다(자기주관). 2.부자들은 아침 형 인간이 많다(부지런). 3.부자는 얼굴에 부자 라인이 있다(웃음). 4.부자는 가구나 가전제품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절약). 5.부자는 옷차림이 수수하다(검소). 6.부자는 붉은 색을 좋아한다(열정). 7.부자는 주말보다 평일 쇼핑을 좋아한다(대우). 8.부자는 남향(南向)집을 선호한다(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의 경우 남향집은 모두 부자들 소유). 9.부자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12-1월, 이와 같은 통계는 세계 적인 경제 전문 잡지인 <포천>에서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0.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다.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다 부자(富者)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하고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일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큰 부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면으로 큰 부자가 되어야 할까요? 성경에 보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요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부요해야 합니다.(약2:5) 둘째는, 재물이 부요해야 합니다.(창26:12,13) 셋째는 선행이 부요해야 합니다.(딤전6:18,19) 우리 모두 아름다운 부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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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부요할 내용 (창2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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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령충만(3/3)과 출발
-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죄를 짓지 않는데, 내가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그것 때문에 실패하고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뭐냐? 임마누엘하심, 그 분의 십자가의 결론, 임마누엘하시고 나와 성령으로 함께하시고 성령 충만한 나임을 초점 맞추어야 한다. 성령충만하려고 신앙생활하지 말고, 성령충만함을 믿음으로 믿고 출발해야 한다. 죄를 짓지 않는데 초점을 맞추려 하지 말라. 예수 믿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에 초점을 맞춰라. 성령님과 하나 되어 당신 안에 성령이 가득함을 믿음으로 출발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에 내 생각이 연합되는 것이다. 늘 고백해야 한다. “저는 주님과 함께 삽니다.” 혹 실수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이런 부분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진짜 회개하고, 주님이 해 놓으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성령충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해졌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다니엘이 70년 후에 해방 시켜 주신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미 약속을 주셨다. 그것을 깨달은 다니엘은 즉시 그 민족을 위해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회개한 후 해방 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해 보이지 않더라도 당신의 부족을 묵상하지 말고 당신 안에 충만하게 계신 성령님을 묵상하라. 성령충만의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하라. 항상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님께 고백하며 인정하며 그렇게 여기고 믿음의 행동을 하라. 다시 율법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성령충만함을 믿고 모든 것을 출발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당신의 애씀이 성령충만의 결과를 가져 온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셨고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신 것이다.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당신은 성령의 사람이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4:9)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오늘 외출하시면서 세수 하셨나요?” “세수했습니까?”는 질문은 어른에게는 맞지 않다. 어른에게 “너 오늘 세수했냐?”고 농담으로 할 수는 있어도 진담으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엄마가 묻고 점검해야 한다. “너 오늘 세수했니? 양치질 했니?"라는 질문을 한다. 성경에 바울 사도가 그랬다. “내가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에게 젖으로 한다. 너희가 어른이 되어야하는데 어린아이다. 어른으로 못 대하고 어린아이같이 대한다.”고하면서 바울은 성경을 기록한다. 초등학문은 “미워하지 마라. 사랑해라. 서로 도와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래라. 이웃을 사랑해아.”는 식은 다 초등학문이다. 성장하고 나면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성장하면 안다. “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시구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감사하다. 효도를 해야겠구나.” “나의 삶을 통해 세상에 기여를 해야겠구나.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세계적인 일을 할 수 있구나. 나도 열심히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되겠구나.” 등의 생각을 하는 것은 성장한 사람이 하는 생각이다. 성장한 사람에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묻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세수했냐? 밥을 먹을 땐 입을 다물고 씹어라.” 등을 한다면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중요한 말이다. 물론 초등학생에게는 좋은 생활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성경도 많은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배우게 되면 마땅히 할 일을 깨달아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이 성령충만한 자의 삶이다. 왼손을 쓰는 아이가 오른손으로 바꾸어 훈련을 하려면 불편하고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복음으로 바꾼다는 것이 불편하다. 말도 불편하다. 생각도 불편하다. 남과 이야기하다가 “아차” 싶지만 입을 닫기도 힘이 든다. 나는 처음 복음을 깨닫고 난 후 기도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을 했다. 기도할 때마다 복음적인 기도가 안 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 익은 습관 된 기도가 자꾸 나왔다. 예를 들면,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감사하고 싶은데 입은 저절로 “오늘도 함께 하여 주시옵고, ...”라고 자동으로 이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옛 습관대로 살던 것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기분이 상당히 상하고 안에서 울화통이 터져 나오고 힘이 드는데 “주님이 다 이루셨다. 나는 풍성하고 평안하다.”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 말이다. 오히려 성내고 사는 것이 더 편할 수 있다. 욕하고, 고함지르고, 윽박지르면 더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참으려니 더 울화통이 터진다. 그 때 누가 옆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야지.”라고 하면 “지금 하나님 사랑 찾을 때냐?”면서 오히려 더 뒤집어진다. 혹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절대로 되돌아가는 자가 아니다. 생각과 말과 습관을 바꾸기 힘들지만 당신은 성령충만하다고 고백하며 출발해야 한다. 따라해 보라. 고백하며 고함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금만 아니라 항상 성령으로 충만함을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나는 성령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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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령충만(3/3)과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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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 창작 오페라」를 보고
-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일대기 창작 오페라」를‘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이하 창기장총) 주최로 하게하심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관계자 모두에게 격려와 힘찬 박수를 보낸다. 본 오페라 공연을 보고 느낀 소감을 다음 몇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먼저, 기독교 문화콘텐츠(contents)로 복음을 세상과 함께 할 수 있음이 대단히 고무적(鼓舞的)인 현상이다. 코로나 팬데믹(pandemic)으로 인해 기독교가 마치 팬데믹의 주범인 것처럼 오해를 받아온 점이 너무도 가슴 아팠으나 코로나의 늪에서 벗어나는 시점에서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과 함께 할 수 있음이 너무도 감동적이다. 또한 이 같은 일에 사회일각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회와 복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다가온 점이다. 정기국회 기간 중인데도 지역을 사랑하는 국회위원과, 도지사, 시장, 그리고 각 시도위원장과 경남기독교총연합회장과 각계 각층의 많은 대표들과 창원은 물론 진주, 통영, 거제 경남의 중심도시의 교회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1-2회 공연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메운 교회와 시민들의 열기에 감동했다. 이제 앞으로 얼마든지 기독교가 성경의 복음을 문화와 예술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주기철은 경남이 낳은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교회사적 인물로서 경남과 창원 시민의 자랑이다. 앞으로 우리 고장의 손양원과 장기려, 전영창과 조수옥 같은인물을 많이 발굴하여 기독교 문화 예술의 폭을 다양한 계층으로 넓혀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 창기장총의 헌신적인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주기철의 오페라 공연은 지난 창기장총 창립총회의 기념사업으로 시작하였다가 기대 이상의 반응과 호응으로 창원시의 전폭적인 지원과 창원을 비롯한 경남일대 여러 교회들의 아낌없는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경남의 여러 시와 도가 많은 연합회와 기구가 있으나 그간 모든 기관들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연합사업 정도에서 그쳤지만 이번 창기장총의 오페라 공연은 기독교 문화 콘텐츠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교회가 가감하게 울타리를 허물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는 이를 주체한 창기장총 회원들이 사회 곳곳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빛과 소금으로써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기에 보다 쉽게 사회 속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특별히 창작오페라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신 조직위원회 모든 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프로 배우의 연기력을 갖춘 주요 배우들은 장문의 대본을 아무런 주저 없이 숙지하여 연출하는 연기력은 창원시민과 경남도민의 저력이요 자부심과 긍지였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기는 하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조금 아쉬운 점 두 가지 정도로 첨언(添言)해 드리고자 한다. 우리에게 사실(fact)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는 관점(觀點, point of view)일 수 있다. 그래서 필자의 지적을 또 다른 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그루터기인물사’로 『주기철의 일사각오순교신앙』을 저술한 입장에서 보는 아쉬움이었다. 하나는 오산학교의 등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 웅천이기에웅천이 조명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주기철의 애국운동의 동기부여는 오산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주기철의 민족적 애국심이 오산학교의 유영모 선생과 고당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평양 산정현교회가 폐쇄되는 장면이 언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1막과 2막에서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는 비교적 소상하게 언급이 되어 우리 지역을 대변해 주는 자부심과 긍지는 가졌으나 그에 비하여 평양 산정현교회가 많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시로서는 평양과 서북지역이 한국기독교를 대변하고 평양의 산정현교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한 교회로서 길선주(吉善宙)에 이어 주기철을 담임목사로 청빙한 점을 일제가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는 지나친 신학적인 면의 부각이나 아니면 목회자의 품격과 교회 순결성을 고려하여 선교적인 측면에서 간과(看過)한 것으로 생각되나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신앙의 핵심이기에 기독교인과 교회사적으로는 꼭 숙지하고 있어야 다음세대에 역사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경남노회 신사참배 반대결의안”에 대하여는 아직도 학계에서 이를 검정하고 있는 중이며, 문헌상으로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필자 역시도 그때를 전후해서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당회록이나 경남(법통)노회 노회록에서 그 기록과 그와 유사한 흔적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과 1939년 12월 19일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 있을 때 평양노회가 그의 목사직을 파면한 것, 1940년 4월 20일에 산정현교회가 폐쇄 당한 것은 일사각오로 나아가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앞에 다 무너갈 때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와당회와 제직회, 그리고 온 교회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6년 간 폐쇄를 당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지하교회를 연연하면서 경건생활을 유지해 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기철은 한국교회의 거룩한 씨, 그루터기였다. 한국교회를 대표한 장로교회 총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였고, 평양노회에서 목사직을 파면하기까지도 예언자의 권위를 지켰고, 산정현교회 당회는 끝까지 교회의 거룩성을 지켰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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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 창작 오페라」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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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7
- I. 서언(序言)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란 말을 어떤 칼럼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아무리 이해하면서 보려고 했지만 정말 이건 잘못된 말이었다. 흔히들 어떤 중심지를 말하고자 할 때 메카란 말을 많이 쓴다. 근래에 본 각 언론사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을 나열해 보면, ‘경제 문화의 메카OOO’, ‘게임의 메카’, ‘유기농 산업의 메카’, ‘패션의 메카 밀라노’등이었다. 이런 말은 이미 사회적 통용 언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이는 ‘나락’, ‘야누스’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독교 단체와 성도들이 사용 할 말은 아니다. 이에대하여 이 용어들의 어원을 논하고자 한다. II. ‘메카’,‘나락’,‘야누스’의 의미와 유래 1. 메카(Mecca)의 유래 :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이름이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의 고향인 동시에 이슬람교의 발생지이며 중심지이다. 또한 ‘무함마드’ 이전에도 메카는 다신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런 이유로 흔히들 중심지를 말할 때는 무슬림(Muslim)들 뿐만이아니라 일반인들도 ‘메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논한 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다.’라고 해야 될 것을 좀 더 유식하게 말한다고 ‘복음의 메카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 잘못된 말이다. 2. 나락(那落, 奈落, naraka)의 유래 : 얼마 전에 어떤 책임 있는 기독교계 방송국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라는 보도를 했다. 여기의 나락이란 말도 흔히 사용하는 국어사전에 등제되어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말을 방송용어로 사용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락(那落, 奈落)이란 말의 유래를 안다면, 기독교계 용어로서는 옳지 않는 말이다. 나락이란 말은 원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의 ‘나라카’(naraka)를 음역한 말로, 본래 ‘밑이 없는 구멍’을 뜻하며, 지옥(地獄) 또는 괴로움을 받는 곳을 말하는 전형적인 불교 용어이다. 또 이 말은 일반적인 지옥의 의미보다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적인 상황을 비유해서 설명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로 볼 때 이런 완전한 불교의 교리적 용어를 교회적인 사항을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다. 3. 야누스(Janus)의 유래 : 오래전 ‘욕망의 두 얼굴’이란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내용은 바로이 두 얼굴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야누스’ 이야기이다. 그 어원을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야누스’는 로마의 출입문과 아치형의 다리를 지키는 신의 이름이다. 또한 이 신은 양면(兩面)의 얼굴과 머리 혹은 4개의 얼굴을 가진 형상도 있다. 하지만, 이중에서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불운을 주기도 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 말에서 한해의 끝과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Janualy'란 1월 달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이 말도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신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이 즐겨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으로 몇 가지 용어들을 논하면서 느끼는 것은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할까?’라는 의문을 가져 볼 때가 많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하나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언어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중국의 한문을 선호해 온 것이나 현대에선 영어권이나 외래어를 선호하는 것과 아예 우리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가 이런 애매모호한 용어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타종교적인 용어들의 역사가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고, 거기에 비례해서 그 용어들이 우리말에 너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그 유래와 뜻도 모르면서 계속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하거나,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란 신앙적인 용어가 아닌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는 말이 아니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신앙적으로 알맞은 용어들을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언어의 품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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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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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령충만(2/3)과 죄의 법
-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죄의 법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데 못 지켰다고 속이며 부담을 안겨 온다. 그것으로 나를 죽인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강조한다. 신앙생활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행위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에서 빨리 빠져 나와서 자유 하라.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선 안 된다(렘2:13). 예레미야서의 주제다.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하다.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내가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나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발견하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발견하라. 당신은 이미 성령의 임재 안에 있으며 성령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참 자유를 만끽하며 능력의 삶을 산다. 자신을 보며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느냐,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실수할 대마다 “나의 모습이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오늘도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구나! 감사하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보혈 앞에서는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보면 “이래가지고 되겠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 죄의식 속에 사로잡히길 원하시지 않으신다.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잘 안 된다.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법으로 항상 나를 사로잡아 온다. 죄의 법은 절망이다. 사망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사망의 법에서 건짐을 받는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죄의 법이 주는 생각을 묵상하지 않고 임마누엘을 묵상하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길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길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라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을 보라. 죄의 법에서 해결 받았음을 선포하며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라고 하는 환희를 보는가? 펄쩍펄쩍 뛰는 바울의 모습을 보는가? 이것이 나의 모습니다. 해방이다. 죄의 법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삶이다.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로마서 전체엔 놀라운 복음이 숨어져 있다. 로마서 전체가 그렇다. 로마서 5장에서도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이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고백한다(롬5:15). 이제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한다(롬5:21). 성경 전부가 이 이야기다. 율법적인 눈을 걷어 버리고 은혜의 복음, 예수의 복음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일이 예레미야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정말 안타깝다. 통탄할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로마서 6장).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혔다(엡2:6).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공간의 어떤 다른 우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의 세계가 아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 같지만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김 집사 몸에도, 박 집사 몸에도, 오 목사 몸에도 계신다. 나누어져 계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모든 몸에 온전하게 계신다. 이것은 공간 계념이 아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사는 다른 우주적인 공간으로 승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 몸에 성령께서 계신다. 우리 몸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우리 몸이 성전이다. 이사야가 본 보좌가 우리 몸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몸이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 일까?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위쪽만 하늘이 아니다. 옆쪽도 하늘이고 밑쪽도 하늘이다. 하늘이라는 개념이 3차원적인 공간 계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하나님 계신 곳이 하늘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으로 우리 몸으로 승천하셨다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 몸으로 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며 읽어 주길 바란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라는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명해 본 것이다. 믿음은 이것을 묵상하고 믿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고치려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바른 복음을 알고 살 때 저절로 따라오는 열매임을 보아야만 한다. 회개는 나를 고치려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해 두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이제는 빛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받아들이고 행하면 된다. 우리가 실수했을 때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런 또 실수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실수로 인해 죄책감에 쌓이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 힘을 얻습니다. 주님이 승리했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저의 승리이다. 제가 오늘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면서 자꾸 십자가로 돌아가면 된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 에 앉혔음을 믿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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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령충만(2/3)과 죄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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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진짜에는 눈물이 있다
- 세상에는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있기 마련이다. 실체와 그림자, 알곡과 가라지가 쌍생하듯, 진짜와 가짜는 항상 쌍생한다. 진짜가 가짜처럼, 가짜가 진짜처럼 보일 때가 참으로 많다. 가짜는 진짜처럼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곧 탄로 나고 만다. 그러나 진짜는 끝까지 간다. 가짜는 언제까지 속일 수가 없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면 가짜인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의 열매는 각각 다르다. 신앙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 성도인지 가짜 성도인지의 구별은 눈물의 기도에 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있지만, 가짜 성도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없다. 눈물의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는 할 수 없다. 가짜라 해도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가 있다면 진짜가 된다. 지속적인 눈물은 절대로 가짜로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어느 순간부터 눈물의 기도가 사라졌다면 가짜 성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는 지속적인 기도가 있는 사람은 진실 된 신앙인이다. 다니엘은 평탄할 때도,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 앞에서도 정한 시간 습관에 따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 이 일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무사함으로 그의 신앙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애국, 애족한다는 가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애국, 애족의 선지자임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애가 3:48-49절에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라고 하였다. 교회를 사랑하며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비난한다. 현재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를 위하고 사랑한다면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불신자의 가족, 친척, 친구들의 영혼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 그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다. 진짜 신앙인의 눈에는 영혼의 가련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야지 군중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때 두루뭉실 기도하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며 구구절절이 간절히 기도한다. 전도의 대상자를 놓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전도할 때 앵무새처럼 달달 외워서 전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서 전해야 한다. 전도에는 예수 믿고 체험한 구원의 즐거움과 변화된 나의 삶, 받은 축복 등, 자기만의 간증이 있어야 한다. 진짜와 가짜가 확연히 나타나는 열매 맺는 계절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7:18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시고 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였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신앙과 애국 애족, 교회 사랑과 영혼 사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맺고 있는 열매가 진위를 증명하여 준다. 진짜가 되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꼭 있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내 신앙과 교회와 영혼 사랑, 애국 애족도 모두 가짜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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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진짜에는 눈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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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가로등을 끄는 이유
- 미국에는 팜 스프링스라는 사막 지역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많은 노인들이 사는 실버타운으로서 유명한 휴양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보면 이 도시만의 특별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특별한 구간을 제외하고는 밤에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얼마든지 가로등을 환하게 켤 수 있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인데 왜 캄캄한 밤에 가로등을 끄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막 지대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은 밤하늘입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이곳 주민들은 모두의 합의 하에 그렇게 가로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곳 주민들의 그런 결단을 듣고는 모두가 놀란다고 합니다. 높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잘 보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가로등을 끄는 불편을 감수하는 주민들의 결단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할 수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떻습니까?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낮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 바로 이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이동’을 한 사람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나의 이익과 명예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압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물질도 시간도 포기하고 내 위신과 자존심도 버릴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낮은 가치를 포기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줄 아는 사람, 땅의 것을 포기해서 하늘의 것을 얻기를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기꺼이 마구간 말구유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입니다. 봄이 되면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있는데 벚꽃과 목련꽃입니다. 그 중에 벚꽃은 활짝 만개했다가도 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나무 가지에서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목련꽃은 시들어서 색깔이 변해서 거무칙칙한 색을 띠기까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꽃이 질 때쯤에 목련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색이 바래기 까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생애가 다가도록 놓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그 공간마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빈 공간은 더욱 커지며 허무와 고독으로 몸서리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인생들은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더 중요하고 존귀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은 다 받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금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하는 데 꼭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살펴보십시오. 그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진짜 내게 필요했던 신령한 복이 내게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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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가로등을 끄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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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잘못된 만남
- 잘못된 만남 복학 후 교내 크고 작은 예배 모임과 지역교회 집회에 초대받아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인근에 있는 대학에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예배특강 요청을 받기도 했다.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찬양 콘티 작성법과 예배 인도법에 관한 2시간짜리 특강이다. 마침 신혼여행 일정과 맞물려 고민이 되었는데 선하신 아내님의 허락으로 여행을 1주일 미루고 참여할 수 있었다. 교회 사역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찬양 인도를 다섯 번 이상은 고정으로 하는 것 같다.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것인지 찬양을 섬기러 다니는 것인지 모를 정도의 일정에 고단함도 있지만 좋다. 철가방, 방범대원, 대리운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회 청년부예배 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찬양과 말씀을 함께 섬겨달라는 요청이다. 초청해주신 교회의 청년들과 찬양을 연습하며 집회를 준비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부장 집사님 집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집회를 시작하자는 제안이 왔다. 강사로 사역을 섬길 때 식사 초대는 여러모로 부담이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함이 가장 큰 이유다. 찬양팀과 맞춰야 할 시간도 부족하고, 배가 부르면 사역에 불편함이 생겨 대부분 식사는 정중히 거절한다. 하지만 난감해하는 청년부 사역자를 보며 식사 자리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부장 집사님은 이미 안면이 있는 분이다. 칼국수 집에서 일하며 철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대부분 배달처는 대학병원이나 사무실이었다. 가정집 배달이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늘 불평이 많고 배달원을 함부로 대했던 손님. 그 집 배달 요청이 오면 늘 불편했고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피하지 못해 배달을 가 현관문을 열면 ‘예수만 섬기는 집’임을 드러내는 상징이 많았다. ‘벽의 그림, 말씀 액자. 테이블에 올려둔 십자가.’ 은혜로운 셋팅과 다르게 집주인은 고약했다. 늘 음식 타박에 배달원을 무시하는 말투. “예수 믿고도 저 모양이니 예수님이 욕을 먹지.” 빈 배달통을 들고나오며 늘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배달 일을 그만둔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나는 그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 내가 다시 이 집에 오게 될 줄이야!’ 둘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고약한 집주인과 배달부. 아니 이제는 청년부 부장집사와 집회 강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더 무슨 말을 할까? 형식적인 말들로 식사 자리를 채운다. 애매하고 묘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즘도 칼국수 좋아하세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우리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한 상 잘 차린 식사도, 오가는 은혜로운 말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민낯을 보았기에 잔뜩 꾸며진 겉치레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회 시작을 앞두고 잡힌 식사였기에 긴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예배는 시작되었고 찬양은 참 은혜로웠다.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나 역시 행복했다. 찬양, 말씀, 기도. 모든 것이 은혜였고, 행복했고, 감사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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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잘못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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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봉사의 자세 (벧전4:7-11)
- 옛날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1825년-1855년)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 그 나라에 한 충성된 군인 장교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막사(幕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종이에 적어보다가 액수가 너무 많아서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음을 알고 크게 낙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의 액수를 적은 끝에다가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歎息)하는 글귀를 적어 놓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니콜라이> 황제가 종종 군대를 시찰하고 다녔는데, 마침 황제가 그 부대를 시찰하다가 사병들의 막사를 둘러보던 중에 그 장교가 책상 위에 적어 놓은 탄식하는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는 글귀를 읽고 감동이 되어서 그 밑에다가 “니콜라이 황제”라고 적어 놓고 나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장교가 일어나서 종이 위에 적혀있는 황제의 이름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니콜라이> 황제가 다시 그 부대를 찾아와서 그 장교가 걱정하고 탄식하던 빚을 다 갚을 만 한 돈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 장교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황제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 충성을 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보다 더 충성된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엄청난 관심과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마음과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되 어떻게 봉사해야 할까요? 첫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벧전4:10-11) 둘째는, 받은바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롬12:4-8) 셋째는,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눅10:40-42) 우리 모두 봉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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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봉사의 자세 (벧전4: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