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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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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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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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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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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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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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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오태열 목사] 믿음은 전적 수용이다
    세상에 장점만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점이 있으면 약점도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최고의 장점이 있으면 최고의 약점도 있다. 미국의 남북 전쟁 시, 북군의 패색이 짙었다. 남군에는 탁월한 전략가 “리”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군에는 리 장군과 버금가는 “그란트” 장군이 있었는데 술주정뱅이라는 약점이 있어 군 지휘권을 맡길 수 없었다. 그러나 링컨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총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남군의 리 장군과 최후의 일전에서 그란트 장군이 승리한다. 이 역사적 승리로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었다. 애굽의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말을 잘하지 못하니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며 거절하였다. 그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말을 잘하게 하여 쓰시지 않았다.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주었고, 능력의 지팡이를 들려주어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때 약점을 고치시고 쓰시지 않고 약점 있는 그대로 사용하신다. 그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더 강하게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다. 우리는 종종 기도시 나의 뜻을 이루려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든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득당하려 하지 않고 내 뜻만 이루려 고집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떠난다. 세상일은 모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야구 경기에 투수와 포수의 역할을 아는가? 포수는 투수에게 사인을 하나 던지는 것은 투수의 마음이다.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놓치지 않고 잘 받으면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나님은 투수요 우리는 포수다.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모습이다. 강점이든 약점이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으면 된다. 우리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쓰실 자가 알아서 쓰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냥 가라 하셨다. 가라 하실 때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다는 뜻이다. 도구의 의미는 쓰는 자가 필요해서 쓰는 것이다. 도구는 내 모습 이대로 여야 한다. 우울증, 영적 침체에 자주 빠지는 자들은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자아가 굉장히 강하다는 점이다. 자기를 내려놓을 때 치유가 된다. 내 뜻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힘쓰고 애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면 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포도나무가 열매 맺는 것은 그냥 붙어 있으면 된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항공기 조종사들이 훈련받을 때 눈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교육받는다. 회전을 하면 바다가 하늘같이 보인단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계기판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라 한다면 종은 자기의 뜻이 없고 뜻을 내세울 수도 없다. 자기 뜻이 있다면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면 된다. 종에게는 왜냐가 없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 잔치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이 나타난다. 주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하라 하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된다. 전문가들이 쓰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전문가란 생각으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 전문성이 더욱 발휘된다. 고기잡는 전문가는 베드로이다. 목수인 예수의 말을 듣고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전문성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할 때 만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믿음은 전적 수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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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박동철 장로] 2700년 전 미스바기도회, 2022년 경남미스바 기도회, 창원시 장로 영성회복 기도회
    성경에 ‘미스바’의 지명은 여러 곳에 나온다. 미스바의 지리적 해석도 다양하다. 성경에 분명히 적시하고 있고 설교가들이 많이 강조하는 미스바는 사무엘상 7장에 능력의 기도회 장소로 상술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개척기를 지나면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짐으로써 영적 어둠의 때를 맞게 되었다고 사사기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시대라고 기록하고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에 이어 한나의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이땅에 보내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을 계획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범죄로 물들어 있었다. 시내산 언약의 상징 법궤는 블레셋에 빼앗겨 다곤 신전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 블레셋의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적 육적 핍박의 깊은 수렁에 있었다. 사무엘은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회개 기도 운동을 주장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미스바로 모여 금식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사무엘상 7장 6절에 “백성들이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백성의 회심 소리가 기록돼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을 볼 때 미스바 기도 운동이 장소보다 때가 중요함를 알려준다. 주전 590년, 지금부터 27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미스바 기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고 블레셋으로부터도 구원받은 역사를 쓰게 됐다는 시대가 더 큰 울림이 된다. 오늘날 지구촌은 어떠한가. 코로나로 갇힌 세상이 되어 온전한 예배 없는 2년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의 먹구름이 걷혀가는 즈음 경남과 창원지역에서 미스바의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경은 목사)가 회개 기도회로 코로나를 이겨내고 예배를 회복하자는 슬로건으로 2022년 미스바 기도 성회를 연초부터 매주 목요일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하면서 회개의 부르짖음을 쏟아내고 있다. 경남 지역 2600여 교회를 향하여 미스바로 모일 것을 외치는 사무엘 선지자의 음성을 듣는 듯 경남지역을 울리고 있다. 연중 진행될 경남의 2022년 미스바 기동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움직임도 있다. 경남에서 회개 기도 운동이 일어나면 대한민국이 산다는 집회시작의 공통된 기도 소망처럼 미스바 기도회의 열매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경남의 수부도시이자 대한민국을 이끄는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대표회장 최주철 장로)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취지로 장로들의 영성 회복 기도회를 지난 9일 창원 상남교회서 개최했다. 600여 장로 부부들이 모여 말씀과 찬양 그리고 어떤 때보다 뜨거운 부르짖음 속에 진행된 영성회복을 위한 장로들의 기도회였다. 대한민국 기독교역사속에 함께 모여서 회개 기도 했던 미스바 기도회가 오늘의 기독교부흥을 이끌었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서 개최된 부흥사경회서 각자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부르짖어 기도했던 집회가 평양교회의 대부흥를 이끌었다는 살아있는 역사기록을 남겼다. 1973년 5월 30일부터 5일간 진행된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 집회에서 350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부르짖음으로써 대한민국 미스바 기도의 큰 장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교회는 선교 130년을 넘기면서 물질 풍요의 세상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펜데믹에서 영성이 메말라가고 예배의 소홀함이 일상화하고 있다. 이 모든 주님의 시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영적 각성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다. 2022년 경남 창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성 회복 기도운동이 대한민국 교회 회복의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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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1
    I. 서언(序言) 코로나의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각종 모임과 회의들이 기지개를 켜는 동시에 각종 회의 통지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부쳐져 온다. 하지만, 이 모임과 회의들의 제목들을 보면 일관성이 없이 제각각인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노회 소집이나 각종 모임 통지서를 보면, 어떤 경우는 제O회(回)라고 했고, 또 어떤 모임은 제O차(次) 회의라고 했다. 또한 제O기(期) 모임이라는 통지서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 나름대로의 명분과 취지에 맞는 제목이 많았으나 어떤 경우들은 같은 성격의 모임이지만, 제목은 다른 경우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위 3가지 용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회(回)와 차(次)와 기(期)의 구분 1. 회(回) : 제O회(回)의 회의 사전적인 의미는 ‘횟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일정한 기준이나 주기에 따라 반복되는 각각의 단계나 차례’를 의미할 때 사용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제1회 정기총회라든지 제2회 정기노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 차(次) : 제O차(次)의 차의 사전적인 뜻은 일의 횟수를 헤아리는 단위인 ‘번’과 일이 발생하는 횟수를 세는 ‘차례’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일을 나누어서 행할 때 1차, 2차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2회 정기노회의 기간이 1년이라고 가정하면, 이 회기 안에 수차례 이상의 임원회가 모여질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제2회 정기노회 기간 중의 1차 임원회, 2차 임원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차’는 ‘회’가 아니기 때문에 제O차 정기 총회나 제O차 정기노회 등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는 것이다. 3. 기(期) : 제O기(期)의 사전적인 뜻은 시절, 시기, 기간 등을 뜻하는 용어이다. 즉 일정한 기간씩 되풀이 되는 일의 하나하나의 과정을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 중고대학교 같은 정기 학제가 아닌, 사회교육원이나 각종 세미나에서 주로 행해지는 일정기간 교육을 수료하는 성격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예제 : “OO학교 졸업 동문회”를 어떻게 표현할까? 필자가 받아본 어떤 동문회 소집 통지서에서 어떤 경우는 ‘제O기 졸업동문회’라 했고, 또 어떤 경우는‘제O회 졸업 동문회’란 제목이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표현이 올바른가? 이의 정답은 제O회로 하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앞에서 논한 대로 ‘기’는 회기 연도적 학제(學制)개념이 아닌 연(年)단위 속에서 단기적 기간의 수료행위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O기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에서 논한 대로 ‘회’, ‘차’, ‘기’란 용어는 서로 엇비슷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개념상으로 보면 이런 미세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런 용어를 잘 못 사용했다 해서 행정 질서에 문제가 생겨지거나 법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상의 작은 부분이라서 간과하거나 무시하다 보면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시시비비가 일어나는 경우들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시찰회나 노회 등 여러 회의들이 소집되고 있다. 이런 각종 회의들과 모임들 속에서 정확하고 바른 용어 사용으로 아름다운 모임과 회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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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조희완 목사] 만족한 인생 (전2:1-11)
    옛날 한 성에 성주(城主)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성을 다스리는 주인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자기 삶에 만족이 없었습니다. 만족함이 없는 삶을 살던 그 성주가 깊은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지혜로운 점쟁이가 그 성주에게 “병을 고치시려면 항상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내복(內服)을 가져다가 입으면 나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성주는 즉시 신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전 영토를 뒤져서라도 그런 사람을 찾아오라고 일렀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서 신하들이 돌아 왔는데 신하들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 항상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신하가 말하기를 “예, 우여곡절 끝에 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성주가 다급해서 묻기를 “그런데 어째서 빈손으로 돌아왔는가?” “예, 항상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내복을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으면서도 만족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살면서도 늘 감사하면서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적은 것을 가지고 살면서도 늘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가진 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만족 결핍증” “행복 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도무지 만족이 없어서 어떻게 하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모습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영적으로 즐거워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2:1-11) 둘째로, 부부간에 다정하게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9:9) 셋째로, 사람의 본분대로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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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최호숙 목사] 한(恨) 맺힌 삶의 치유(治癒)를 위하여
    우리 민족은 한(恨)이 많은 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사건 요소요소 마다 “한 많은”이란 단어를 붙이면 말이 된다. 일제 강점기의 모든 삶이 한이었고, 6.25를 겪은 피폐의 삶이 한 많은 삶이었고, 가난 속에 살아온 모든 삶이 한이었다. 손인호 씨의 노래 제목 “한 많은 대동강” 남인수 씨의 “한 많은 백마강” 요즘 대세인 가수 진성 씨의 “보릿고개”란 노래도 한 많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만든 곡이다. ♬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초근목피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5~6월이 되면 아버지를 통해 듣고 선배들을 통해 듣던 보릿고개란 말이 자꾸 생각이 난다. 추수한 쌀이 바닥이 나고 아직 보리는 익지 않은 5~6월, 주린 배 움켜쥐고 식량을 찾아 나섰던 춘궁기(春窮期), 이때는 사건 사고가 많았었는데 도둑들도 돈보다는 쌀을 훔쳐 갔다는 이야기는 굶주림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恨)이란 무엇인가? “차별적인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 속에 쌓이는 심리적인 복합상태”라고 정의 하였다. 한(恨)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분노, 아쉬움, 안타까움, 또는 이들 모두가 한데 뒤섞인 묵은 감정이다. 그렇다면 한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첫째, 부당한 차별을 받을 때다. 예를 들면, 국가나 기관으로부터 부당한 핍박을 당하거나 또는 못 가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게 피해당하거나 무시당할 때,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 한국인들은 한을 경험한다고 한다. 둘째, 타인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결핍(relative deprivation) 되었을 때 한이 생기게 되는 데 학자들은 전자의 경우를 객관적 한, 후자를 주관적 한 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여인 한나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괴감(自愧感)이 있었고, 그의 적수 브닌나가 심히 그를 격분하게 하였으므로 그의 심정이 괴로웠다. 때문에 그의 삶은 울음의 삶이었다(삼상1:6~7). 여기에 대하여 개역 성경에는 번민(煩悶)이라고 번역했다. 바로 한나가 경험하고 느끼는 이 번민이 객관적 한이며, 동시에 주관적 한(恨)인 것이다. 한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치료와 치유는 조금 다르다. 치료(治療)는 사람이 하는 행위를 말하며, 치유(治癒)는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사람이 치료하는 것도 유익이 있지만 완전 치유를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하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치료하기 위하여 ‘위로(慰勞)’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남편의 위로가 치유되지 못하였다. 한나의 괴로움은 여전하였다(삼상 1:10). 그는 완전 치유를 위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사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이 사무엘인 것이다.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내가 하나님께 구하였다”는 뜻인데 기도로 치유되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사무엘이라고 지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건 속에는 객관적인 한, 또한 주관적인 한이 복합적으로 병행 되어 나타난다. 완전 치유를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돕는 은혜로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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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2-06-14
  • [오성한 목사] 성화되는 지름길이 있다(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요1:1). 하나님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요1:14). 그는 창조자시다(요1:3). 그래서 이 땅은 자기 땅이다. 자기 땅에 오셨다(요1:11). 사람들은 몰랐다. 예수님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요1:13). 예수를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사람의 형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롬8:1). 이제 우리가 이루어 갈 구원이 있다. 우리가 이루어갈 구원은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믿음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많이 믿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능력의 삶을 산다. 어려움 앞에서도 인도를 믿고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인격적으로 주님을 알고 믿게 되면 주일을 저절로 잘 지키게 된다. 믿는 자의 삶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성도의 교제가 풍성해 지고 아름답다. 목사와의 관계도 풍성하다. 교회에서 개인의 덕을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자가 된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알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건강한 정체성 때문에 삶이 건강하다. 이것을 성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화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가 좀 노력해서 더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을 더할 수도 없다. 예수를 믿으면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완전한 구원이라는 말을 꼭 기억하라. 예수님의 구원이 부족하지 않다. 예수님의 구원은 완벽하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육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인간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빈틈없는 계획이다. 예수님의 완벽한 구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원받은 자의 영은 창조되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났다. 구원받은 자의 영은 더 깨끗해 질 필요가 없다. 점점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고 죄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우리는 영이다. 영이 혼과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인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요일3:9, 5:18).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고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 의로운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능력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완전한 구원을 알게 될 때 감격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다. 완전한 구원을 깨달아 가는 것이 성화다. 이 땅에서 당신은 힘 있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성화의 길을 마치는 날 영화의 영광을 볼 것이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그날 구원을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한 누림의 영화로 나갈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면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성만찬의 비밀을 통해 성화가 시작되었다. 성만찬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피와 잔을 나누어 마심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죄 덩어리가 되셨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앞으로 좀 더 노력하면 점점 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왔다가셨다.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의 노력이 조금도 필요 없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다. 성령의 능력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우리가 성화되고, 영화되는 것은 이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지 많이 성화된다고 더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심을 깨달아 가는 것을 신앙 성장이라고 하고, 성화라고 한다. 신앙 성장은 행위에 있지 않다. 성화가 행위에 있지 않다. 믿음에 있다. 신앙 성장은 오직 믿음에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만 있으면 행함은 따라온다. 성화는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당신이 더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의를 가졌음을 많이 알아가면 된다.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가는 것이 성화다. 성화 될수록 감격이 생길 것이다. 영화롭게 된 자신을 정확히 발견할수록 감격의 삶이 되고, 변화된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화는 믿음으로 된다. 정체성의 발견이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믿는 삶은 변화된 삶을 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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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신재철 목사] 피 흘리는 할아버지 그리고 며느리
    최근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느 고3, 열아홉의 고민이 가벼울 수 없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나 내게는 내 고민이 가장 무겁다. 기도할수록 무거워지는 마음, 복잡한 생각. 하나님의 이끄심과 부담이 있지만 결단과 정리가 쉽지 않다. 딱 불순종의 몸부림이다. ‘신학대학을 가? 아니면 성적에 맞춰 대학가서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 오늘도 야간자율학습 후 교회에 들러 홀로 찬양과 기도를 드린다. 신학대학에 가기 싫은 투쟁이라고 봐야 더 정확할 것이다. 나의 깊은 밤 기도가 교회 노(老)권사님 눈에 적발된 뒤 나는 교회에서 세상 훌륭한 목사 감이 되었다. 밤마다 홀로 기도하는 고3이라는 딱지가 경건하게 붙어버렸다. 기도를 할수록 한 숨이 깊어지는 것은 왜일까? 믿음이 부족해서? 불순종의 불편함? 그렇게 그날도 불순종의 기도를 깊게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선다. 밤 12시가 되었으니 집에 가야지. 봄이 오는 듯 했으나 아직은 너무 춥다. 교복 재킷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잠자리를 향해 간다. 골목길 작은 슈퍼마켓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이제 문을 닫으시려는지 밖에 늘어놓은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 골목이지만 차가 다니는 길이었기에 가에 붙어 걷고 있는데 중앙에 무언가 보인다. 조금 더 다가가 보니 사람이 주저앉아 있다. 술에 잔뜩 취한 듯 중얼거림이 들린다. ‘날이 춥다. 차가 지날 수 있다.’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다가가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할아버지, 댁이 어디세요?” 술에 취한 것은 냄새로 확인 되었다. 넘어졌는지 이마에는 상처와 피가 보였다. 빨리 모시지 않으면 무슨 사고라도 날 것 같아 집을 물었다. 잔뜩 취한 할아버지가 집을 잘 알려줄리 만무하다. 질문을 바꿔 전화번호를 물었다. 얼마나 혀가 꼬부라졌는지 한참을 실랑이 하며 번역을 해가며 번호를 알 수 있었다. 부담스러웠지만 그냥 길에 둘 수는 없어서 일단 등에 업었다. 아직 문이 열려있는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아저씨, 전화 한 통 할 수 있을까요?” 사장님도 바로 상황을 이해하시고 가게 전화기를 내어주셨다. 가족과 연락이 닿았고 집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화 받는 가족의 목소리가 차갑다. 모시러 온다는 말없이 위치를 설명한 후 전화가 끊어졌다. 마침 내가 다니던 학원 인근 골목이라 찾아갈 수 있어서 다시 할아버지를 업었다. 걸어서 1킬로미터 정도? 쉽게 생각했는데... 결코 가볍지도 않았고 가깝지도 않았다. 땀이 범벅이 되고 몇 번이나 쉬었다 가기를 반복해서 겨우 집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외침에 달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며 그렇게 도착했다. 문은 열렸지만 누구도 반기지 않았고 할아버지를 넘겨받지도 않았다. 머쓱해진 내 걸음이 며느리로 보이는 분이 안내하는 방을 향했다. 마지막 내려드리는 자세에서 다리가 후들거려 조금은 던져지듯 착지가 되었다. 교복 입은 학생이 길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업고 댁에 모셔드렸다. 그렇다면 물 한잔에 칭찬 정도의 보상은 있을 줄 알았는데... 가족이 할아버지를 향해 험한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왜 또 술은 그렇게 처먹고, 어디서 쓰러져서 이 모양으로 들어와! 차라리 나가 죽어!” 사연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죽으라니. 내 진로보다 더 짙은 생각이 무게를 더한다. ‘가족이 뭘까? 사랑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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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박동철 장로] 고위 공직자 청문회 사회기부 공헌도 검증하라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의 범주를 신학(神學)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넓게 성경을 깨닫고 실천하는 가치적 학문을 칭하는 데는 ‘사랑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 하나님은 창조자이자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대역사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큰 명령을 함께하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듯하다. 이 세상을 위임받은 사람들의 세상의 통치와 관리권에서도 이웃과 함께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덕목을 우선시하고 있다. 특히 모든 나라의 정치적 민주주의 근간과 경제적 자유시장경제권에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키워드는 사랑의 사회 헌신도이다. 기득권자 가진 자들이 약한 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은 기부 등을 통한 사회에 대한 헌신이다. 일찍이 산업화를 거치고 민주화를 통해 선진국이 된 유럽 여러 나라들의 사회상은 사회 기부의 헌신 문화가 굉장히 앞서있다. 그것은 기독교 성경의 사랑이 사회교육에 미치고 영향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수많은 곳에 이러한 하나님의 어록이 남겨있다. 구약에서도 레위기 19장 18절에 동포를 원망치 말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수없이 이웃사랑을 강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및 여러 미주 기독교 문화 속에 발전해온 나라들의 사회 기부나 헌신 문화는 가히 놀랄만하다. 최근 미국의 세계적 재벌들이 거의 재산 모두를 기부한다는 뉴스들이 들리고 있다. 미국의 워렌 버핏, 빌 게이츠의 재산 사회 기부 소식들이 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신흥 재벌들이 재산 절반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놀랄만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다. 문제는 돈 많은 재벌들의 사회 기부가 아니라 사회 모든 가진 자 지도층 기득권층의 솔선수범하는 작은 기부헌신의 생활화가 정착해야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섬기는 교회 중직자 지도자들은 대부분 수입의 10%를 십일조로 헌금하는데 아끼지 않는다. 교회서 교인들이 낸 헌금이 교회 운영에도 쓰이지만 사회복지 주변 이웃을 섬기는데 많은 예산을 들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신실한 교인들은 수입의 20%를 들여 이웃사랑의 사역에 열정을 내는 크리스천들도 있다. 교회가 이렇게 해야 복음 전파는 물론 사회 발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국가 발전을 리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사회 지도층이자 국가 권력층의 인사들의 사회 공헌도는 어느 정도인지가 가름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위공직자 장차관급 평균 재산이 20억을 넘었다는 소식은 옛날 뉴스다. 끝없이 부동산 값이 오르는 강남 거주인들이 고위공직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평균 재산은 나날이 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재산을 강남에서 늘렸다고 죄인으로 몰 수 없다. 우리의 생활상은 양극화로 접어들어 강남 비강남으로 부(富)와 빈(貧)의 이분적 계층이 심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데 사회적 대안과 치유를 위해서는 사회 공헌 문화가 정착해야 할 것이다. 지난 새 정부 장관급 고위공직자를 검증하는 청문회 과정에서 과거의 불법 사례 투기 전력 등을 파헤치면서 놓치고 있다는 게 있었다. 바로 그들이 삶 가운데서 사회를 위한 작은 공헌을 얼마나 했는지 살피는 과정이 없었다. 고위공직자 청문회에 사회 기부 공헌도 등을 철저히 검증해서 훌륭한 인물을 찾는 기준이 됐으면 한다. 상대적 국가의 부유함 속에도 절대 빈곤층 또는 경제적 하위계층을 국민 세금으로 국가가 전적인 책임을 다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회 기부와 헌신의 정도를 국가 지도자를 찾아내는 중요한 기준으로 세워야 할 때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이웃사랑의 행복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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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0: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의 차이
    I. 서언(序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또 다시 지방선거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휘감고 돌았다. 이번 호를 받아보시는 시간이면, 벌써 투표를 다 끝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즈음에 투표와 그에 관련된 단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 같은 듯 다른 이런 용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필자의 경우도 무수한 회의에 참여하거나 사회를 보는 경우에 때로는 이런 단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혼란이 올 때가 있었다. 또 어떤 회의들은 은혜롭게 잘 진행되는 회의들도 있었고, 위와 같은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진행의 미숙함으로 인하여 갑론을박 하며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들도 종종 보기도 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와 같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II. 투표(投票)와 표결(表決)과 표결(票決)의 차이 ‘표결’이란 무엇인가? 참고적으로 어떤 단체의 표결에 대한 회의 규칙을 보면, ‘표결은 투표, 기립, 거수, 발성 등의 방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가 참석한 어떤 회의에서는 잠시 혼란이 왔다. 그 이유는 여기의 ‘표결’과 ‘투표’에 대한 뜻을 의장이나 회원들이 잘 구분하지 못한데서 온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두 용어는 어렵지 않은 상식 수준에서 판단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 두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에 본 호에서는 표결과 투표에 대한 용어분석과 회의시의 용도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표결의 뜻: 표결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종류와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表決(표결)과 表決權(표결권)이 있고, 또 票決(표결)이 있다. 그 의미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表決(표결) : 여기서의 표는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겉 表’, ‘정할 決자’로 결 정을 겉으로 표시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 법률적인 의미로서 ‘토의 안건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표시하여 결정하는 일’로서 주로 다수결에 의하여 결정할 때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2) 表決權(표결권) : ‘회의에서 회원으로서 表決(표결)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3) 票決(표결) :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표시 할 때의‘표(票)자’로 결정을 표로 표시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투표로서 결정하는 일’이다. 이상으로 볼 때 위의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은 한글의 용어로는 동일하지만 한자어로 볼 때는 다른 용어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같은 말이 아닌 것이다. 2. 방법에 있어서의 표결 : 표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어느 단체의 회의 규칙에서 본바 대로, ‘표결은 투표, 기립, 거수, 발성 등의 방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회장이 회원들에게 ‘의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고 ’가부’를 묻는‘약식표결(略式表決)’방법이 있고,‘예와 아니오.’로 결정하는 구두 표결(口頭表決)도 있다. 또한 결정시에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침묵표결(沈黙表決), 회장이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서 찬반을 묻는‘점호표결’등이 있다. 3.투표(投票)에 대한 용어: 앞에서 언급한 표결과 그 의미에 있어서 자주 혼란을 주는 용어중에 투표(投票)가 있다. 이는 표결 방법 중의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投票(투표) : 먼저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던질 投’, ‘표 票자’로 ‘표를 던진다’는 말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 ‘선거 또는 어떤 의견 체결을 할 때 각 사람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표지(標紙)에 이름, 부호 또는 의견을 개입하여 일정한 장소에 제출하는 일’로 되어 있다. 2) 投票權(투표권) : 한자의 뜻 그대로 ‘투표권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즉, 투표는 표결의 한 방법이지 표결 자체가 아닌 것이며, 표결도 한자어의 표기에 따라 그 의미와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II . 결 어(結語) 마지막으로 표결의 결과에 대해서 잠시 논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결정을 했든 가결(可決), 미결(未決), 부결(否決) 등의 결과가 나온다. 여기에서 선거의 경우는 당선과 낙선이란 말을 사용하고 의제인 경우는 가결과 부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부연한다면, 表決(표결)과 票決(표결), 投票(투표)는 혼돈하기 쉬운 서로 다른 용어들이다. 각종 회의 시에 이를 구분하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면서 이에 관한 용어들을 논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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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1
  • [조희완 목사] 동행의 조건 (창5:21-24)
    얼마 전 TV뉴스 중에 전국에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할 꿀벌들이 죽거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벌통이 텅 빈 채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국은 전체 벌의 약 40%가 사라졌고, 유럽은 약 70%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자연재해 때문인지 아니면 바이러스 때문인지 명확한 원인 규명을 밝혀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는 날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는 것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고 종말의 징조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아인슈타인>의 예언대로 인류의 종말이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분명 종말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환경적으로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이 임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이 시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의 때에 합당한 삶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늘로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로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산창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믿음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5:21-24) 둘째로, 결단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민10:29-32) 셋째로, 순종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22:6-14) 금년에 우리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시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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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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