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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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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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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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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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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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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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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박동철 장로] 추석명절을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지키자
    추석 명절이 다가왔다. 벌써 귀성길 차량이 늘면서 일찍 성묘하는 발길도 볼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즐기는 추석 밥상을 위한 시장보기에 사람이 넘치고 있다. 우리의 고유명절 ‘추석’의 유래는 어디에서 일까. 매년 명절을 즐기긴 해도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추석 명절은 삼국시대 신라 유리왕 때 가배(嘉俳)라는 길쌈 놀이에서 유래한다. 삼국 시대만 해도 우리의 옷 의류는 삼베가 유일했다. 삼베라는 천의 직조기술이 생겨난 때가 삼국시대라고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다. 얼마나 귀중한 생활품이었겠는가. 그래서 음력 팔월보름날 휘영청 보름달이 뜨는 때 동네별로 삼베길쌈 경연대회를 벌인다. 진 쪽에서 이긴 쪽에게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축일이 발전해서 오늘까지 한껏 즐기는 추석명절이 되어왔다. 이후 고려 때부터 무명 옷이 생겨나고 비단천이 창조 되긴 했다. 당시 삼베 천이 얼마나 귀중했냐하면 오랜 기간 화폐 수단으로 삼베가 통용되었다는 문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추석명절은 고려시대 중국과 교류하면서 중추절(仲秋節) 한가위로 변화 발전 되고 미풍의 양속으로 이어져 왔다. 음력 팔월 보름은 대개 9월에 들어 있다. 우리의 주농 벼농사 수확시기보다 이르지만 일 년 농사 감사의 마음을 즐길 수 있는 지절(之節)이다. 추석명절은 많은 문화를 양산했다. 보름달 놀이, 강강수월래, 줄다리기, 씨름 등 참 좋은 전통 문화 놀이를 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상들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며 이어오는 문화가 얼마나 우리의 정서를 지키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전통의 좋은 문화야말로 우리의 공동체적 건강한 정신과 마음을 지켜내고 있다. 추석 대명절을 보낼 때 마다 느끼는 소회이다. 그런데 우리교회가 절기로 지키는 큰 명절 중 ‘추수감사주일’의 유래를 보면 획기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주일은 보통 11월 셋 째 주일을 지킨다. 그 유래는 미국에서 온 국민이 지키는 추수감사주일과 같이 한다. 그래서 같은 시기이다. 미국 국민이 지키는 추수감사주일도 개신교 교회에서 시작 됐다. 청교도 프로테스탄트들이 미주지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감사의 절기로 발전하여 미국의 추수감사주일로 전통화 했다. 캐나다를 비롯 주로 북미에서 추수감사주일은 지켜지며 11월 넷째 목요일부터 3일 동안 휴일로 쉬며 칠면조 고기를 먹고 즐긴다. 최근에는 블랙 프라이데이까지 만들어져 온통 축제와 즐기는 미국의 전통 문화가 되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주일은 성경에서 온 절기가 아니고 미국의 개신교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캐나다 등 미주국민들이 지키는 절기를 따라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제언이다. 우리는 전통으로 즐기는 추석 명절을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온 국민의 추수감사절로 문화화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교회의 섬기는 문화에 추석명절에 더하여 이웃을 돌아보며 함께 전통 문화로 이었으면 아름다운 추석명절로 발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강한 국력으로 세계를 이끌고 있다. 많은 다문화권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들과 함께 예수복음의 문화를 가꾸며 공동체적 전통의 풍습을 맛보고 즐기는 한국 추석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잘사는 대한민국 그 중심의 추석 명절에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넉넉한 인심이 넘쳐나는 복음적인 추석명절이 되어 옛말처럼 ‘더도 덜도 아닐 만큼 한가위만 같아라’는 모두가 함께하는 추석 명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많은 문화이벤트가 함께 만들어져 이러한 명절문화가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회 그리고 품격 높은 나라를 이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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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5
  • [박봉석 목사]무엇이 소중한가?
    화려한 옷과 보석 명품들을 좋아하는 유럽의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온몸에 화려한 보석 장신구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귀부인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모래폭풍을 만나서 사막에서 낙오가 됐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목이 말라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갑자가 저 앞쪽에서 한 물병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그 물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물병일 줄 알았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몇 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탄식을 토했습니다. “아, 겨우 다이아몬드란 말인가?” 무엇입니까? 평소 같으면 눈이 뒤집혔을 그 진귀한 다이아몬드가 사막에서는 한 모금의 물보다 못했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파송 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속이 바뀌고 나서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소중하다면 도대체 구원 받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돈이 가장 소중하고 세상의 입신양명이 소중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지금은 달라야 합니다. 이제는 영혼이 소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소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소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전에 내가 소중히 여기던 그것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드리고 헌신할 줄 아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이미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억만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다른 세상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내가 가진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을 전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진짜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깜깜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반짝이던 별빛이 아침녘에 찬란한 해가 솟아오르면 그 반짝거림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좋은 것들도 예수님과 비교하면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세상의 귀한 것을 견주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상대적으로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을 다 잃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만은 잃을 수가 없고, 그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나의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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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과 삶
    2023-09-21
  • [오성한 목사] 말씀과 귀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귀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 말씀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말이다. 주의하는 것이나 귀를 기울이는 거나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가 있는 곳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이다. 성령님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중요한 마지막 부탁을 반복하심을 볼 수 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8번이나 표현을 달리 하시면서 반복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반복 말씀하신다. 반복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씀에 집중하는 일은 믿음 생활에 중심이다. 말씀을 묵상해서 깨달아지면 입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깨달음이 마음에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이 틀림없음을 묵상하다가 깨달아 지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으로 인해 손을 올리고 싶어지고 마음이 뜨거워 질 수밖에 없다. 당신의 귀를 무엇을 향해 기울이라고 했나?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하나님이 말에 열라. 자동차 엔진이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가 나서 집중하면 그 소리가 들린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는 설명할 수 없다. 말씀은 생명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오기 때문에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어떻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역사하는지, 방언을 하는지, 거듭나는지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이 신유를 일으키는지는 알고 있다. 믿음이 그렇게 한다. 믿음이 하나님의 병 고침을 일어나게 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말씀을 먹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믿음은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거듭날 때 온전한 믿음을 이미 주셨다(엡2:8). 말씀을 먹으면 믿음이 스트롭(stirrup)된다. 스트롭은 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을 휘 저어서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을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소죽을 끊일 때 설거지물을 받아 두었다가 휘 저어서 끊였다. 우리에게 이미 예수를 믿을 때 놀라운 믿음이 다 와있다. 이미 와 있는 믿음을 스트롭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넣고 “아멘”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멘하면 스트롭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의로움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의롭게 된 자들이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어야 한다.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 남을 믿어야한다.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잘 살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온전하게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됨을 믿어야 한다. 의롭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의로움이 상실 되었다. 주님이 이루어 주신 놀라운 사실로 풍성한 사람은 행함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고 믿음의 행함은 저절로 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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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오태열 목사]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사랑은 종족 번식을 위한 필수적인 감정이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뛴다. 친구를 만나면 이런 감정은 없다. 호르몬 분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정은 첫눈에 반해서도 운명적 만남도 아니다. 한 동네 학교 직장에서 우연히 만나 오래 두고 정겹게 사귀어 온 벗이다. 그러나 우정에는 강력한 감정이 있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학자 J, Tooby와 진화심리학자 L. Cosmides 부부의 공동연구인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Friendship and the Banker`s Paradox)에서 우정과 은행이 닮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은행이란 돈을 빌려주어야 이익을 남기는 곳이다. 은행은 모든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심사를 통해 재산이 많고 신용이 좋은 부자들에게 저금리로 빌려준다. 부자들은 생계 목적이 아닌 투자목적으로 돈을 빌린다.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빌리려 한다. 그러나 은행은 돈을 떼일 우려 때문에 신용과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대출금을 무자비하게 회수해 버리는 사람들이 은행가들이다. 돈이 필요 없을 때는 제발 돈 좀 빌려 쓰라 하던 그들은 막상 돈이 필요할 때는 입을 싹 닦고 매정하게 회수해 가버린다. 우정도 은행가들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 잘 나갈 때는 친구 사이에 우정도 호의도 넘쳐흐른다. 그런데 우정이 가장 절실하고 도움이 간절할 때 친구로부터 외면당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류가 사회를 만드는 순간, 구성원들 사이에 우정의 네트워크가 생기는 것은 사냥과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153부족 간의 전쟁 시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인간은 “이익 가치 중심적 사고”를 가졌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도와줄 친구를 찾는다. 사회구성원들 가운데는 힘이 세고 사냥을 잘하는 강한 사람, 힘이 없고 사냥을 못 하는 약한 사람이 있다. Net Work를 구성할 때 사람들은 누구와 친구를 하고 싶을까? Tooby는 사회적 강자 중심으로 우정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수렵을 잘못하는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데 오히려 친구가 되는 일에서 배제된다. 정작 생존을 위해 우정이 절실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들인데 힘센 사람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 우정의 역설이다. 우리 사회에 은행가의 역설을 잘 보여주는 것이 관피아, 특히 검찰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검사는 늘 재벌과 보수 세력들이 형성한 강자들의 우정 네트워크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검찰 개혁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가진 힘을 지키기 위해서다. 검찰 개혁은 강자들의 네트워크를 와해하고 그들이 독점한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 경제학의 창시자 J. F. Walliel은 행복의 6가지 조건을 돈, 건강, 자주적 삶의 선택권, 공동체성, 우정, 사회의 투명성이라 하였다. 이 중 우정을 행복의 조건 중 제일로 들었다. 웰리엘이 말하는 우정은 잘 나갈 때의 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이런 친구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바닷물에 빠진 친구에게 밧줄이나 구명튜브는 얼마든지 던져줄 수 있지만 허우적대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물에 뛰어드는 친구, 일시적 어려움에 처한 친구는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지만, 친구를 구하기 위해 내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그때부터 계산은 달라진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처럼 위기의 순간이 닥쳐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안다. 옛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주색잡기를 일삼고 친구 많다고 자랑하는 아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거적에 말고 아들과 함께 지게에 지고 아들 친구들 집마다 찾아가서 실수로 살인하여 시체를 암매장하려는데 도와 달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핑계를 대며 외면하더라는 그 이야기 말이다. 우리는 먼 길을 가야 하는 인생이다. 혼자 가면 외롭고 힘이 든다. 함께 동행해줄 친구가 필요하다. 고난에 처할 때 함께 해주는 친구, 이런 친구가 없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더욱 고독하다. 맹수사냥을 하러 함께 나갈 때 내 옆자리를 지켜주는,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할 때 자신을 던져가며 내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우정이 없어 고독하다. 망년회, 신년회, 동창회라는 각종 모임을 빙자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해외여행을 가도 본질적인 외로움은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강도, 폭행, 살인, 약탈 등,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친구의 역할을 이젠 경찰이 대신한다. 한해 농사를 망쳐 처자식을 굶기게 되면 곳간을 털어주던 우정 역시 복지제도가 대신하고 있다. 조상이 살던 환경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럴수록 더 불안에 떨고 고독해 한다. 진정한 우정이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잘 나가던 어제의 내가 아니라, 실패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오늘의 나를 기꺼이 지켜줄 친구가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또 누가 나에게 그런 친구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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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조희완 목사] 에녹의 신앙 (창5:21-24)
    53억 원을 내고 점심 한 끼를 먹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여러 사람이 서로 그 돈을 내려고 경쟁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인 eBay에서 <워랜 버핏>과의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붙이고 있는데, 금년에는 무려 460만 달러(약53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암호 화폐인 트론 CEO 중국계 미국인 <저스틴 선>씨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4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워랜 버핏>과 함께 한 끼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워랜 버핏>은 매년 자신과의 한 끼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부쳐서 그 수익금 전액을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는 것은 이 시대에 그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투자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리면서 일명 “투자의 귀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내고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분명 이 시대에 최고의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역시 그가 최고의 VIP인지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VIP로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고 우러러 보는 VIP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VIP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신앙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믿음의 인물로 여겨집니다. 첫째로, 그는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5:21-22) 둘째로,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히11:5-6)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입니다.(유1:14-15) 우리 모두 에녹의 신앙을 본 받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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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신재철 목사] 늦은 밤까지, 교회를 떠날 수 없더라
    개척의 세팅이 어느 정도 되었다. 테이블, 책장, 조명, 음향 등. 이제 성도만 있으면 된다. 말은 쉬운데, 가장 큰 어려움이 사람 채우는 것 아닐까? 교회 안에 성도가 채워지는 세워지는 것은 내 노력, 능력, 환경으로 장담할 수 없다.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야근한다고 해서 부흥이 된다면 나는 일주일의 칠일을 야근했을 것이다.” 개척교회에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교회 외형이 갖추어졌고 난 개척교회 목사가 되었다. 멋진 선배 목사님들의 간증처럼 밤새 기도하며 이곳을 지키면 된다. 그렇다. 나는 요즘 늦은 밤까지 교회를 지키고 있다. 행정적으로 정리할 것이 많아서? 열정적인 기도로? 전문서적을 뒤적이며, 눈을 비벼가며 만드는 좋은 설교 작성으로? 아니다. 만화에 푹 빠졌다. 이 글을 쓰면서도 조금 민망하고 부끄럽다. 예배당 세팅이 끝나고 공간을 둘러보니 온통 만화책이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던 만화 위주로 채우다 보니 이곳은 어느덧 천국이 되어 있었다. 내가 10대 때 좋아했던 그 책, 최근에 유행하는 웹툰까지. 만화가 가득하다. 게다가 어릴 적에는 비싸서 사지도 못했던 책이 전질로 줄을 지어 서 있다. 밤이 맞도록 만화 속 주인공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즐거움을 누린다.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정주행 할까?” 개척교회 목사인 내게 두려움은 없다. 적어도 지금은. 오늘은 소년 만화, 내일은 소녀 만화, 그리고 드라마 원작인 웹툰까지. 대학부터 치열하게 달려온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개척의 시점에 이렇게 잠시 쉼을 허락하셨다. ‘개척했는데 진짜 만화 보고 있어도 되나?’ 나를 무겁게 누르던 약간의 불편함을 외면하며 일단은 책장을 넘긴다. 늦은 밤까지,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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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박동철 장로] 교단정치하는 목사 장로님들 경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300여 교단이 있지만 70여개 교단 정치의 꽃이 피는 총회기간이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대부분 교단들이 9월과 10월 총회를 열고 총회장과 임원 등 총회 사역자들을 뽑는다. 그리고 1년 동안 집행할 중요 헌의안을 결정한다. 정말 하나님이 통치할 대한민국 6만 여 교회 정책을 위임받아 행하는 엄숙한 정치현장이 벌어진다. 교단마다 다르지만 3-4일 기간 동안 엄청난 의사결정과 일꾼들을 선임하는 복잡하고도 엄숙한 일정이 펼쳐진다. 필자는 몇 년 전 잠시 노회 총회총대를 맡아 참석한 경험이 있다. 세상의 정치판을 객관적 눈으로 살펴본 경험에서 곳곳을 관심 있게 취재를 해봤다. 교단 총회 기간이 한꺼번에 몰려있고 집중화해 있어 제대로의 정치 기능을 살리기 어렵다는 느낌이 많았다. 전문화하고 분산해 합리적 정치 기능을 살려야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평신도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소망은 성총회(聖總會)의 정치현장이 되길 기도한다. 우려 되는 것은 지역의 노회나 총회시즌에 대부분 개교회가 함께 기도 하지 않고 정치판이 열리는 점이다. 교회에서의 믿음과 교단 정치판 믿음이 따로 노는 듯 현장에 가면 듣지 말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성(聖)총회·성(聖)노회를 위한 성찬과 기도와 예배로 시작하지만 회무의 시간에 고성과 야유 세속의 정치 문화가 그대로 재현된다. 무엇보다 교단 정치판에서 나타나는 직분에 대한 과잉 경쟁이 큰 문제이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선거 문화 등 예수 복음의 정치판에 돈이 횡행하고 모함과 지역 감정 등 정말 세상보다 못한 교단 정치 선거 문화가 지도자들의 심령 속에 파고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단 정치사에서 여러 영성 깊은 한국 대표적 목회자들이 교단 정치를 섬기다가 실족하거나 영성을 잃고 낙심해 버린 지도자들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각 교단 총회 시즌이 오면 깨끗한 선거를 올해 이뤄보자는 오피니언의 글들이 실리고 있다. 사람 사는 곳에 몇 사람에 불과할지라도 정치 기능이 없으면 안 된다. 개 교회는 교회대로, 노회는 노회대로, 총회는 총회대로 정치판이 열리지만 세상 정치판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위임한 양떼를 돌보는 예수 복음에 생명 건 지도자들이 펼치는 정치 행태가 오늘날 교계에서 우선으로 혁신해야할 분야이다. 언젠가 목사·장로 몇 분과 연합회 모임자리에서 교단 총회 총회장의 임기 대부분 1년으로 해마다 나눠 먹기 하는데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총회장에 선출되면 교회 담임을 내려놓고 4년 정도는 임기에 최선을 다해서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러한 담론이 담론으로 끝나버리는 우리 기독교 정치혁신이 한 발짝도 못나가는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가장 많이 부르짖는 워딩(wording)이 교회 세속화에 대한 경계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크게 강조한 설교가 바리세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구원 받은 자들이 죄악과 싸우고 마귀를 대적하며 진보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 앞에 성화의 몸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앙의 지도자들이 모본(模本)이 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첫 현장이 교단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할 것은 불을 보듯 하다. 그런데 아직껏 교단 총회가 열릴 때마다 슬픈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간혹 세상의 언론매체에 부끄러운 장면이 보도 될 때도 있다. 올해는 대한민국 모든 교단 총회가 성총회가 되어 온 교회가 박수치는 정말 은혜의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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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3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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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최호숙 목사]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미국은 다종족 국가이다. 그렇다 보니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 간에 비교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여러 민족 중에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월등히 두각을 나타내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사해보니 I.Q(Inteligence Quotient-지능지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민족도 아이큐를 높였다.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들에 비하여 열등했다. 재조사 결과 아이큐 문제가 아니라 E.Q(Emotional Quotient-감성지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하게 E.Q도 높여 보았지만 여전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전문가들의 새로운 연구결과 유대인들은 타민족에 비하여 S.Q(Spiritual Quotient-영성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관을 가지고 영성을 키워 보았다. 그래도 유대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최종 결과 유대인들에게는 타민족에서 찾을 수 없는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경지수가 높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경지수란 무엇인가?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Paul G. Stoltz, 1960~ )가 만든 용어로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 퀴터(quitter-포기하는 자)로 산에 오르다가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그냥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역경지수가 낮은 퀴터라 부른다. 둘째, 캠퍼(camper-안주하는 자)로 장애나 어려움을 만나면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현상 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캠퍼라 부른다. 셋째는, 클라이머(climber-등반하는 자)로 역경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을 말한다. 예전에 웬반 티오 월남 대통령이 한국 청와대를 방문했다가 청와대에 활짝 핀 목련화를 보고 감탄하였다. 우리 정부는 부러워하는 티오 대통령에게 목련화를 선물하였다. 티오 대통령은 기쁨으로 목련화를 받아 자신의 사저(私邸)에 심었다. 1년이 지나도 꽃은 피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티오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선물 받은 목련화가 자라기는 잘 자랐는데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목련화는 반드시 추운 겨울을 통과해야 만 꽃이 핀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후유증 이후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국민이 침체 상태에 있다. 이 고난의 시대를 잘 극복해야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그냥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바울을 말하였다. 삶의 시련과 역경을 체험한 욥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다. 영어의 격언에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에는 “No sweat, No sweet” 땀이 없으면, 달콤한 삶도 없다. “No pain No gain” 고생 없는 수확의 결과는 없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원리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였듯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역경지수를 높여 귀한 열매들을 거두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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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조희완 목사] 언제나 항상 (벧전3:13-16)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큰 스님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 바로 성철스님이십니다. 그가 입적하시기 전에 남긴 법어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법어의 내용은 알 듯 모를 듯한 유명한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산을 산이라고 하고 물을 물이라고 하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인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유명한 말로 회자되는 것일까요? 불교의 가장 큰 스님인 그가 유치원생 수준의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변화무상한 세상을 꼬집어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산은 항상 산이어야지 물이 되면 안 됩니다. 물은 항상 물이어야지 산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산을 산으로만 보아야지 물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물을 물로만 보아야지 산이 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산이 산으로 있지 않고 물이 되거나 물이 물로 있지 않고 산이 되면 이 세상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급변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변하면 모든 것이 다 끝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우리가 항상 노력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항상”이란 단어가 따라 붙는 말씀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항상 대답할 소망의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벧전3:15) 둘째는, 항상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2:12) 셋째는, 항상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행24:16)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분명한 믿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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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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