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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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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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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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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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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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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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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신간출간] 천국시민헌장 : 마태복음의 진수
    『천국시민헌장: 마태복음의 진수』출간(도서출판 향기)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책을 선물로 받고 목차(Contents)을 살핀 후 단숨에 보았습니다. 변성규 목사는 고신총회 은급재단 이사로, 동창회와 동기회(신대원 41회) 상임총무역으로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섬김으로시간적으로 많은 희생을 하는 바나바 같은 인물입니다. 이같은 바쁜 사역에도 목회자의 소임을 다하고 양무리를 기름지게 한 강단사역의 설교를 문서화 해서 우리 세대뿐 아니라 다음세대에까지 전수할 수 있는 목양 탈무드 격인설교집으로 출간해 주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선 몇 가지 점에서 먼저 추천하고 간단한 서평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품격(Quality)이 있는책을 출간함에 먼저 축하하고 추천합니다. 상인이 상품을 팔 때 상품의 질인 내용도 중요하지만 겉 포장 역시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천국시민헌장: 마태복음의 진수』 란 작품의 표지의 디자인 면에서도 세련미가 넘쳐 우선 독자들에게 호감을 가질 줄로 생각이 되어 추천합니다. 둘째, 목차(Contents)가 일목요연하게 잘되어 있어 추천합니다. 논문을 심사할 때 규격심사와 내용심사를 하는데 사실은 내용보다는 규격심사가 더욱 까다롭습니다. 대부분 Contents에서 판가름이 납니다.변 목사의 설교를 보면 한눈에 Impact가 다가옵니다. 복음의 한 구절도 빠짐없이 강론했고, 어떤 경우에는 중복해서 다룬 점들에서 복음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전하고자 한 목회자의 애절함 심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Contents 만 보고도 독자들이 주석이나 강해집으로 활용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줄로 알아 추천합니다. 셋째, 설교 구조(Structure)가 잘 되어 있어 추천합니다. 설교 제목 아래 보편적으로 대지가 3-4개 정도로 정하고, 대지 아래 소지가 2-3개로 적절히 구분되어 있어 아주 읽기가 편하게 구성되어 있고, 평이한 내용을 자신이 전공한 헬라어를 잘 풀어주셨고, 독자가 읽기 편하게 음역(영어)까지 달아 주심에 많음 심혈을 기울인 흔적을 보게 됩니다.인쇄의 문체와 활자 크기도 아주 바람직하여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줄 알고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서평을 드리고자 합니다. 변 목사는 여러 차례 책을 출간한 경험이 있기에 비교적 문학적 기법이 탁월합니다.특별히 본 설교집은 목회사역 마지막으로 경남법통노회 100주년 기념교회인 「은혜와평강교회」를 담임하여 3년에 걸쳐 선포한 말씀을 문서화 시킨 것이어서 양무리들과 다음세대들에게는 목양 탈무드로 읽혀질 보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책의 제목으로 잡은 『천국시민헌장: 마태복음의 진수』 (PP. 98-101) 설교 구성은 이러합니다. 우선 서론에 “무리를 보시고”(1vs) 란 ‘무리’가 이끌러 온 배경을 앞 구절에서 소개해 줌으로 본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본론에서 대지를 구분함에 있어 “1 자비로운 보증, 2 성실한 경고, 3 완전한 재보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양면성을 조화롭게 잘 이루고 있습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보증, 경고, 재보증”이란 것입니다. 목회자가 양무리를 목양하고 훈육할 때 권면과 경고와 위로 격려로 세우는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목자의 심정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 가서는 오늘 은혜와 평강의 목장에 있는 우리가 바로 하늘나라 주인공인 천국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마태복음을 시리즈로 출간하기로 결단하였기에 개인적으로 드린 멘트 한 두가지 정도를 잘 참고하여 제2권이 속히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려파교회연구소장 황권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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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0
  • [이상규 교수] 호주 장로교회의 형성과 경남지역 선교
    1. 시작하면서 오늘 이렇게 뜻 깊은 2021년 경남선교의 날 감사예배에 초청해 주신 점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부산경남 지방에 기독교 복음을 전해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활동을 소개하되, 특히 부산경남지방 선교를 꿈꾸며 이 곳에 왔던 첫 호주 선교사들의 경남지역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이 분야 최초의 연구자로서 호주의 여러 도서관, 고문서관을 다니며 각종 문헌을 섭렵하였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였으므로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고 주로 부산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연원을 소개하고, 어떻게 부산경남 지방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굫회의 공동선교구역이 되었는가를 말씀리고자 합니다. 그 후에 호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 지방에서의 활동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부산, 경남지방으로 전래되는 기독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성경반포사업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는 최초의 노력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시도한 성경반포사업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1882년 심양(瀋陽)의 문광셔원에서 로스역(Ross Version) 『예수 셩교 누가복음 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나 복음젼셔』를 각각 3,000권씩 출판했는데 이중 3분의 1을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인 톰슨(J. Austin Thomson)에게 보내어 조선에 반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주재 동 성서공회는 1883년 일본인 나가사까(長坂)를 부산에 파견하여 성경반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일은 이 지방에서의 최초의 복음운동이었습니다. 이때의 반포사업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때의 결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월푸의 조선선교 시도 부산과 경남지방에서의 두 번째 기독교 복음과의 접촉은 영국성공회의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월푸는 중국에서 사역한지 22년이 지난 1884년, 청불(淸佛)전쟁으로 야기된 불안한 정세 하에서 건강이 좋지 못해 의사로부터 일정기간 휴양을 권고 받고 일본 나가사끼(長埼)를 방문한 후, 1884년 10월 24일경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부산에는 약 2천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지 내에 은행과 병원,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푸초로 돌아간 후 ‘남지나 선교회’(The South China Mission) 연례 지방대회에서 조선방문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소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85년 11월 말경 두 사람의 중국인 전도자와 함께 다시 부산에 왔습니다.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선교를 위한 두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아무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는 아직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어 있었고 활동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선교활동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부산 방문은 후일 두가지 결실을 가져오는데, 첫째는 한국에서의 성공회 선교운동의 한 동기를 부여하였고, 둘 째는 호주 장로교의 한국 선교의 길을 열였습니다. 즉 월푸는 조선 방문 후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서신을 보냈는데, 이 편지는 멜버른의 코필드(Caulfield)에 위치한 성 메리교회(St. Mary Church)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방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고, 이 호소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게일과 하디의 부산에서의 선교 우리 지방에 왔던 세 번째 개신교 전도자는 캐나다인 게일(James Scarta Gale, 奇一, 1863-1937)이었습니다. 그는 토로토대학 YMCA의 파송으로 내한하여 1889년 7월부터 1891년 봄까지 부산에서 사역하였는데, 그는 한국의 역사와 언어, 풍습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던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했던 기간 중의 선교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부산 체류기간이 짧았고 특히 부산에서 체류 기간 중에는 한국어 공부에 전념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부산에 주제한 첫 개신교 선교사로써 부산과 경남 지역 선교를 위한 탐색과 연구의 기간을 보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뒤 역시 캐나다 출신 의사인 하디 의사(Dr. Robert A. Hardie) 부부가 부산지방에서의 의료 활동을 했습니다.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인 그는 내한하여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기까지 약 2년 동안 부산에 체류하며 게일과 함께 선교사역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들이 부산지방의 초기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데이비스의 내한, 부산도착, 죽음 그러다가 1889년 10월 2일 호주 장로교 출신인 해리 데이비스(Rev. J. H. Davies, 1856-1890)가 부산으로 오게 되는데, 이것이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의 시작이 됩니다. 이 때는 알렌이 입국한지 5년이 지난 때였는데, 데이비스는 누나인 메리와 함께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는데, 10월 2일 부산을 거쳐, 10월 4일 인천에 도착했고, 그 다음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5개월 간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인천, 과천, 수원, 공주를 경유하여 경상도 땅을 지나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20여일 간에 걸쳐 약 500km에 달하는 긴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폐렴에 감염되었고 천연두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는데, 그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부산에서 사망합니다. 한국에 온지 6개월 된 때였습니다. 부산지방 선교의 꿈을 안고 부산으로 내려왔으나 그 꿈은 그 자신의 생애 속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 곧 부산, 경남지역 선교의 동기가 됩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부산지역 선교 그렇다면 미국북장로교는 어떻게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본래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초기 선교사들은 서울에 정착하였습니다. 알렌이나 언더우드, 헤론 등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선교사 수가 많아지자 서울 외의 다른 지역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두 지역을 개척하기로 했는데, 그 지역이 평양과 부산이었습니다. 평양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사무엘 마펫(Rev. Samuel Moffett)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부산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파송된 사람이 윌리엄 베어드(Rev. William Baird)였습니다. 그래서 마펫은 1891년 평양으로 가서 사역한 결과 1893년 평안도 지방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에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야서문밖교회, 평양남문밖교회, 창동교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산정현교회가 1906년 개척된 것입니다. 부산으로 파송된 윌리엄 베어드는 19891년 9월 부산으로 와 부산 영선현에서 두 필지 땅을 사서 선교관을 건축하고 선교하기 시작하여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도 부산에서 사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은 미국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공동선교구역이 된 것입니다. 물론 양 선교부 간의 협의와 합의를 거쳐 선교지역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만, 호주 선교부는 부산진, 고관을 거쳐 경남동부지역, 곧 해운대 기장 언양 양산 울산 등지를, 미국북장로교회는 부산의 서부지역인 부산 중앙동 영도 남포동 김해 밀양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만 그 후에 선교지역 더 확대됩니다. 참고로 북장로교 부산경남지방 선교에 대해 더 말씀드리면, 베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부임한 북장로교선교사는 휴 브라운(Dr. Hugh M. Brown) 의사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1891년 12월에 부산에 와서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dispensary)를 설치하고 의료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브라운 의사의 예기치 못한 결핵의 감염으로 부산에 온지 2년 후인 1894년 1월 8일 귀국했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2년이 못 되어 1896년 1월 6일 뉴욕에서 병사했습니다. 1893년 11월에는 어빈의사(Dr. Charles. H. Irvin, 漁乙彬)가 내한했는데, 이듬해 3월 부산으로 와 브라운의 뒤를 이어 의료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빈은 이때로부터 1911년까지 약 17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그해 4월 1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광동 5가 영선고개에 어을빈의원을 개원하고 계속 부산에 체류하였습니다. 1895년 5월 29일에는 아담스(Rev. James E. Adams, 安義窩) 부부가 부산에 파견되었는데, 그가 1897년 대구로 옮겨가 대구지부를 개척하였고, 1923년까지 한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에 부산에는 미국북장로교의 로스목사 부부(Rev. Cyril Ross, 盧世永, 1897-1902), 시더보탐 목사(Rev. Richard H. Sidebotham, 史保淡, 1900-1909) 부부, 스미스 목사(Rev. Walter E. Smith, 沈翊舜, 1902-1912) 부부, 윈목사(Rev. George H. Winn, 魏喆治, 1909-1914) 목사 등이 활동했는데, 북장로교는 1913년 말까지 일하고 부산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합니다. 호주 선교사 수가 많아지니 북장로교는 구태어 부산경남지방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미국 북장로교가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한 선교사 수는 21명이었는데, 1914년 이후에는 부산과 경남 전 지역이 호주 선교부 관할이 되었고 호주 선교의 영향 하에 있게 됩니다. 저는 어떻게 경남지방이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공동 지역이 되었는가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2.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PCV)의 형성 영국인의 이민으로 시작된 호주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영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 모교회(母敎會)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교회의 역사와 유산을 답습, 계승하고 있습니다. 빅토리아주의 경우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첫 목사는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였는데, 그는 1837년 10월 24일 빅토리아주에서의 첫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다음해인 1838년 1월 28일 시드니로부터 멜버른으로 이주해온 제임스 폽스(James Forbes, 1823-1851) 목사는 멜버른에 정착하여 공식적으로 목회를 시작한 첫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공식적인 첫 예배 인도는 1839년 2월 3일이었다. 이때로부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여러 교파의 목사와 신자들이 이주해 와서 각기 다른 교회조직을 유지해 오다가 1850년대에는 이들 교회 조직들 간의 교단 통합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에는 대표적인 세 개의 장로교회(敎團)이 있었는데, 첫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The Established Church of Scotland)를 계승한 교회로서 1840년부터 1854년까지는 ‘호주대회’(Synod of Australia)로 불리다가 1854년 4월 ‘빅토리아대회’(Synod of Victoria)란 이름으로 독립한 교회, 둘째는 스코틀랜드에서 184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분립하여 ‘스코틀랜드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가 형성되자 이로부터 3년 후인 1846년 호주 빅토리아주에서도 ‘호주대회’부터 분립하여 조직된 ‘빅토리아 자유 장로교회’(Fre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셋째로는 1847년 이래로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의 목사들이 빅토리아로 이주해 옴으로 1850년 1월 22일 조직된 ‘빅토리아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가 그것입니다. 이 세 장로교단은 약 10년간의 교회연합을 위한 토의와 회합 거쳐 1859년 4월 7일 드디어 ‘빅토리아 장로교회’라는 이름하에 통합하게 됩니다. 물론 세 교단의 완전한 통합은 아니었지만 매우 획기적인 연합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직된 교회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간단하게 PCV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는 호주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장로교단이 되었고 후일 경남선교를 주도한 교단이 된 것이다. 비록 PCV는 1859년에 구성되지만, 그 연원은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가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첫 예배를 인도했던 1837년이기 때문에 과거 호주장로교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1937년 호주 장로교 100주년 해사를 했고, 당시 경남지방의 대표적인 목회자였던 이약신 목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곡 50년이 지난 1987년 제가 멜버른 교외의 하이델베르그라는 곳의 장로교회에 갔을 때 70세가 넘으신긴 장로님이 저 더러 “약신 리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 분은 청년 때 이약신 목사의 설교와 강연을 들었다고 이야기 하여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PCV가 조직된 1859년을 기점으로 2009년 호주장로교회가 150주년 행사를 했는데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어 짧은 인사를 하고, 또 저의 영어 책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바 있습니다. 3.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선교운동과 한국선교의 동기 저명한 교회사학자인 케네스 라토렛(K. S. Latourette, 1884-1968)은 19세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시기의 선교운동은 특히 독일 경건주의 운동, 모라비안들의 선교 열정, 앵글로 색슨 세계의 영적 각성이 아우러져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비기독교 세계로 혹산되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이후 선교운동이 큰 영향을 기쳤고 여러나라에 영향을 주었는데, 호주교회는 이런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선교사상 혹은 선교운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장로교회(PCV)가 총회 내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를 조직했을 때는 교단이 조직된 이듬해인 1860년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고 ‘해외선교’(Foreign Mission)란 말보다는 ‘이교도 선교’(Heathen Mission)란 말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크게 두개 지역, 곧 지금은 바누아투(Vanuatu)라고 불리는 뉴 헤브리디즈(New Hebrides)와 호주 원주민 선교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대 소위 골드 러쉬로 인한 중국인의 대거 유입 이후에는 빅토리아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선교가 제3의 선교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조직된 지 약 30 여년 후인 1889년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이때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에 영향을 몇 사람의 영웅적인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존 게디(John Geddie), 하겐아우어(F. A. Hagenaur), 존 페이톤(John Paton, 1824-1907) 같은 선교사였습니다. 이들이 빅토리아 선교운동의 선구자들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페이톤은 선교지의 사회개량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선교사역과 활동은 빅토리아 교회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1865년 선교기금 확보를 위한 일환으로 영 연방에 속한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던 중 멜버른을 방문했는데, 이때의 강연과 집회를 통해 호주 교회에 선교에 대한 각성과 선교적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고, 유능한 선교사들을 발굴하는 개기가 됩니다. 후일 부산에 와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일한 매켄지(J. N. Mackenzie), 마산 창신학교 교장을 지낸 리알(D. M. Lyall), 마산에서 의신여학교 월영유치원에서 가르치며 문창교회 주일학교 와 반주자로 일한 엘리스(C. Ellis) 등은 페이톤의 영향으로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이들입니다. 1925년 이전까지 경남도청 소재지였던 진주에 세워진 ‘배돈병원’은 페이톤의 아내였던 마가렛 화이트크로스를 기념한 병원(Mrs.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이었습니다. 페이튼이라는 여어이름을 한국말로 적당히 취음하여 배돈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선구적인 선교사들의 활동과 선교보고, 선교운동은 1890년대 호주장로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한국선교를 가능케 했던 정신적 동력이 된 것입니다. 호주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해리 데이비스(J. H. Davies)의 자원과 한국에서의 짧은 사역, 그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는 한국선교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오직 바누아투, 빅토리아 주에 거주한 중국인, 그리고 호주 원주민들이 선굣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가 난데없이 한국선교를 자원하였을 때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선교 구상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호주 기독교 세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조선은 여전히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은둔국(Hermit nation)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스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니 그를 선교사로 인준은 했으나, 선교비를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재정적으로 후원해 준 이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휘하 조직인 몇몇 청년연합회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데이비스의 자원과 내한(1889년 10월 2일), 그의 갑작스런 죽음(1890년 4월 5일)은 호주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과 죽음이 교회의 선교 방향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데이비스는 어떻게 조선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데이비스가 한국선교를 자원한 배경에는 중국 복주(福州, Foochow)에서 선교하던 월푸(John R. Wolfe) 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영국교회 선교단체인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였던 월푸는 1885년과 1887년 한국 부산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는 한국방문 결과를 보고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씨 엠 에스 선교관계자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그의 편지는 호주로 보내졌는데 당시 멜버른의 코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발행하는 『국내·국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데이비스는 카오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성공회)에 출석하면서 메칼트니 목사와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습니다. 월푸의 이 편지가 데이비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갖게 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단기간(1876-1878)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 데이비스는 본래 인도로 돌아가려했으나 월푸의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데이비스가 읽고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했던 그 편지를 제까 연전에 「기독공보」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데이비스가 한국에 오고 사망 한 이후 불과 10여년이 지난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한국보다 50년 앞서 시작된 뉴 헤브리디즈나 중국인 혹은 원주민 선교를 제치고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가장 성공적인, 가장 중요한, 가장 역점을 두는 선교지역(mission field)이 되었고, 1920년대에는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비의 70% 상당이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될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산배분은 한국선교의 성과와 관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아니 부산경남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이 선교운동이 유지, 계승, 확장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장로교회 ‘해외선교부’와 함께 선교사 파송단체였던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와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의 기여와 역할이 지대하였습니다. 4.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 이제 내한한 첫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데이비스와 그의 큰 누나 메리(Mary T. Davies)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알렌 의사가 입국한지 5년 후인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으로 입국합니다. 이때로부터 호주장로교회는 1945년 해방이전까지 78명이, 해방 이후 1947년에 다시 한국선교를 계시하였고, 1977년 이후에는 호주 연합교회가 한국선교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가는 영국에서 온 이민자인데, 1856년 뉴질랜드 왕가라이(Wangarai)에서 출생하였습니다.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빅토리아주로 이주했습니다.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호주 CMS(영국교회 선교회) 파송으로 인도 선교사로 인도에서 21개월간 일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1878년 5월 21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그 후 멜버른대학에서 수학하고 1881년 4월에는 코필드문법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을 설립하여 1888년까지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앞서 언급한 월푸의 편지를 읽고 조선이 더 시급한 선교지라고 확신하고 조선선교를 자원하게 된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공회를 떠나서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는데, 이때 투락이란 지역의 투락장로교회의 젊은 목사였던 이윙(John F. Ewing)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데이비스를 장로교회로 인도하였고, 1888년 11월 22일 장로교 총회에 전(前)일본 선교사였던 딕슨(W. G. Dixon)과 맥크라렌(S. G. McLaren)을 포함하여 17명의 지도급 총대원들의 서명을 받아 데이비스를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인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결과 데이비스가 목사안수에 필요한 기본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하기로 가결하게 됩니다. 데이비스는 ‘멜버른남노회’의 목사후보생으로 허입되었고, 안수에 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갔고 에딘버러의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6개월간의 신학공부를 합니다. 필요한 과정을 마치고 1889년 5월 13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멜보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고시에 합격합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한 특별기간 중인 1889년 8월 2일 청년연합회의 지원을 약속받고 8월 5일에는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청년연합회의 재정지원 하에 한국선교사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누나인 메리(Mary T. Davies)도 동행하였다. 많은 이들이 메리가 데이비스의 동생이라고 말하는데 동생이 아니라 누나입니다. 메리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멜보른교외기독교연합회’(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 하에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데이비스 남매는 1888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버른 시내 YMCA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시드니로 갔고,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다시 8월 28일 증기선 ‘치난(S. S. Tsinan)호로 시드니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이로부터 40여일 간에 걸친 항해를 끝내고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한 것입니다. 항해 도중 데이비스 남매는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당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벙커(D. A. Buncker)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벙커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4일 오전 11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말을 타고 인천을 떠나 그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거하면서 서울에서 5개월을 지내게 되는데, 이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지역을 순회하고 어더우드와 같이 전도여행을 다닌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그 때 공부한 노트 일부를 제가 복사하여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말 공부에 바빠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약 5개월 후 일상의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는 누나는 서울에 남겨두고 부산으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는 바울의 선교 원리를 따라 일단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한때는 군산지방으로 가서 선교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일 군산으로 갔었다면 호주교회의 한국 선교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나 수원, 과천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 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 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4월 4일(금)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이 겹쳐 부산 도착 다음 날인 4월 5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조선 땅을 밟은 지 6개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83일만이었습니다. 그 부산에 체제하던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보이는 부산 동광동 뒷산인 복병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서울에 남아 있는 메리에게 알리는 게일의 긴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나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감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교회의 한국선교를 시작하는 동기가 됩니다. 선교사는 살아서도 일하지만 죽어서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5. 선교사파송기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데이비스의 개인적인 자원과 결단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의 한국선교는 빅토리아장로교회 ‘청년 연합회’(YMFU)와 ‘여전도히연합회’(PWMU)의 후원과 지원으로 계승됩니다. 빅토리아장로교 총회 해외선교부는 이들 두 기관보다 후기에 한국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고, 두 선교기관을 관장하게 됩니다. 청년연합회의 창립과 첫 선교사의 파송 먼저 청년연합회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청년연합회는 맥길리버리(McGillivray) 씨의 발의로 1888년 조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d라고 불렸는데 1876년 뉴 사우스웰즈(NSW)주에서 처음 조직되었고, 그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빅토리아주에서는 1888년 7월 27일 준비모임이 소집되어 회칙 초안 등 총회 조직준비에 착수하였고, 동년 8월 17일에는 11개 개체교회 청년들을 창립위원으로 하여 역사적인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때 로버트 길레스피(Robert Gillespie)는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빅토리아주 장로교 신학교의 초대교수였던 렌틀(J. Laurence Rentoul), 투락교회의 이윙 목사(J. F. Ewing), 호손(Hawthorn)장로교회 장로 던칸 러브(Duncan Love), 그리고 첫 제안자였던 맥길리버리(M. McGillivary)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후일 뉴 사우스 웰즈주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된 스틸(James Steels)씨는 총무가 됩니다. 조직 당시는 남․여 혼성으로 구성되었으나 후일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된 이후 점차 남 청년들의 연합체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원래 주일 아침 함께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 등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친목과 교제를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 지원하는 일을 계기로 선교운동단체로 발전하였고, 주일 아닌 평일에 회합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이 연합체의 이름도 후일 Young Men's Fellowship Union으로 변경되었고, 후에는 The Presbyterian Fellowship of Victoria로 변경됩니다. 이 모임이 처음 조직될 당시에는 11개 교회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나, 일년 안에 598명의 회원을 가진 26개 교회연합체로 성장하였고, 1889년 8월 2일 장로교 창립 50주년 기념대회 기간 중에 모인 특별회의에서는 한국선교사로 자원한 데이비스 목사를 지원하기로 정식 결의하게 된 것입니다. 청년연합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 1891년에는 멕카이(James Mackay) 목사 부부를, 1894년에는 아담슨(Andrew Adamson) 목사 부부를, 1903년에는 커를(Dr. H. Currell) 의사 부부를, 1910년에는 왕대선(R. D. Watson) 목사 부부를, 1916년에는 도별익(F. J. Thomas) 목사 부부를, 1929년에는 부오란(F. T. Borland) 목사 부부를 각각 파송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1921년 도별익 목사가 사임한 후 마산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호열 씨를 초청하여 멜버른대학에서 유학토록 지원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수년 후 사망하여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김호열은 호주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과 한국선교 지원 데이비스의 죽음은 ‘여전도회연합회’(PWMU) 창립에도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호주교회의 선교사 파송기관 중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한국선교를 지원했던 영향력 있는 단체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딘우디(C. Dinwoodie) 양이 익명으로 헌금한 50파운드, 한국선교사를 지원하는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50파운드를 기증한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 한국선교가 재개되기를 바란다며 역시 50파운드를 기증한 쿠리부인(Mrs Currie)의 숨은 공로와 함께 여전도회의 조직을 위한 여러 갈래의 시도가 어우러져서 1891년 여전도회연합회를 공식적으로 창립하게 됩니다. 멜버른시에서는 1890년 7월 29일 투락교회에 출석하던 하퍼 부인의 집에서 이방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장로교 여전도연합회 창립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모임이 회집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여성연합회 조직을 위한 일련의 노력은 빅토리아주의 3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교회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즉 멜버른에서의 준비 모임과 더불어 발라랏에서는 케언스(Mrs. Cairns) 부인이, 질롱에서는 데이비스(Mrs J. Davies) 부인이 각기 별도의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 일련의 움직임이 어우러져서 1890년 8월 25일 멜버른 시내의 장로교 총회회관(Assembly Hall)에서 정식으로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내한 선교사가 데이비스의 두 여동생과 제수씨가 이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발라랏의 케언주 부인은 데이비스의 여동생이었고, 질롱의 데이비스 부인은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이었으니 첫 서뇨사 데이비스의 재수씨였습니다. 이 점은 데이비스의 한국에서의 죽음이 가져온 분명한 영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도회연합회가 조직된 다음 해인 1891년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퍼셋(Miss Fawcett) 등 3 미혼여선교사를 부산으로 파송하였고, 이때부터 해방 전까지 3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는 동일기간 내한한 호주선교사 총수의 60%에 달합니다. 이들 중에는 데이비스의 두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Miss Margaret Davies, 대마가례, 사역기간, 1910-1940년)와 진 데이비스의사(Dr Jean Davies, 대지안, 1918-1941년)도 약 30년간 한국선교사로 일했다. 두 조카라 바로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딸입니다. 총회 해외선교부 헌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또 하나의 기관이 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사의 인준과 관리 등 총회 해외 선교부가 총괄하였으나 초기에는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 연합회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재정적 지원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이후부터 총회 선교부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청년연합회의 경우 자체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일은 점차 총회선교부 사역 속에 흡수되었습니다. 6. 선교지부의 설치, 선교사들의 활동, 선교정책 첫 선교사의 내한과 죽음, 1891년의 제 2진 선교사 5명의 내한, 그리고 초기 소규모의 인적 구성과 내분, 선교사의 사임 혹은 사망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1900년대를 거쳐 가면서 주한 호주선교부의 활동이 정착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 동안 부산,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선교부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공동선교지역이었습니다. 예양협정(禮讓協定)에 따라 양 선교부가 함께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사역한 것입니다. 물론 호주선교부는 부산 초량과 부산진 좌청동을 비롯하여 경남 동부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는 지금의 중앙동, 영도를 비롯하여 김해 등 서부지역을 맡습니다만 1901년 이래로 양 선교부 간의 계속적인 대화와 경남지역에서의 선교지역 분담과 재조정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 말에는 미국 북장로교선교부가 부산, 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서 1914년 이후에는 경남지역 전역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관활 하에 있게 됩니다. 당시 부산과 경상남도의 인구는 약 150만으로 추산되는데,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10년 ‘전진운동’(Forward Movement)을 전개하여 1910년에서 1914년 어간에 8명의 남자(목사, 의사) 선교사와 9명의 미혼여선교사를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동안 호주장로교선교부는 부산진과 초량 등 부산지부(1891) 중심으로 사역했으나 곧 이어 진주(1905), 마산(1911), 통영(1913)과 거창(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열었고 이 5개 지부를 중심으로 경남지역 전역에서 사역하였는데, 이들 선교지부의 관활 지역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부산(진)지부: 초량일원, 동래, 기장, 언양, 울산 양산, 김해, 울릉도, 밀양, 영산, 창녕, 진주지부: 진주일원, 사천, 곤양, 하동, 남해, 삼가, 산천, 의령 마산지부: 마산일원, 함안, 창원, 웅천, 칠원 거창지부: 거창일원, 안의, 함양, 합천, 초계 통영지부: 통영일원, 거제, 고성, 진해, 용남 호주선교부는 이들 5개 지역에서 만이 아니라 평양과 서울에서도 활동했는데, 왕길지(Gelson Engel)선교사는 1906년부터 평양신학교 강사로, 1919년부터 은퇴할 때인 1935년까지는 신학교의 교수로 봉사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주한 4 선교부의 연합교육기관이었으므로 호주선교부는 왕길지 선교사를 교수로 파송하였던 것입니다. 또 의료선교사인 마라연(Dr Charles McLaren)는 당시 한국에서의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는데,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세브란스병원과 의전(醫專)에서 진료와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도 사도시대 이후 선교사역의 가장 주요한 전도, 교육, 의료 등 3대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한가지 더하여 자선과 구제 사역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네비우스 정책을 존중했고, 순회 게척전도를 중시하였습니다. 전도사역은 목사 선교사들과 미혼 여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고, 이 사역은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관할지역을 정해 순회전도와 양육, 교회 돌봄, 동사(同事) 혹은 당회장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6개월을 단위로 해 관할지역을 순회하고 양육과 교육, 성례를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중요한 정책이 교육활동인데, 특히 부녀자와 아동 교육을 강조하였고, 여성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점은 호주 선교부에서 미혼 여성선교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부녀자와 아동 등 여성교육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 전 호주 선교사 총 78명 중 남성은 24명, 선교사 부인 19명을 포함하여 여성은 54명이었습니다. 이중 미혼 여선교사는 35명이었는데 전체 선교사의 60%에 달했습니다. 이런 여선교사 비율은 다른 선교부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경남지방은 경기 이북지방에 비해 보수적이었음으로 여성교육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교육은 시급했고 이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호주선교부는 각 선교지부에 남, 여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남자학교는 정상 궤도에 오르면 해 지역 교회에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을 고려했으나 여자학교는 선교부가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호주선교부는 부산의 일신여학교(1895), 진주 시원여학교(1906), 마산 의신여학교(1913), 통영에 진명여학교(1914)를 설립하고 여성교육에 힘썼는데, 일신(日新)여학교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 학교로서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동래 여자중고등학교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통영과 동래에 실업학교(Industrial, Vocational 혹은 Farm school)를 설립하여 가난한자, 장애인, 혹은 불우한 여인들의 생계를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호주선교사들은 근대적 의미의 교육활동, 곧 교육은 특수한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육이 대상이며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 또 그 교육의 목표는 과거급제나 공직에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실한 사회인,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양하고 유치원 교육, 여성교육을 중요시하고 또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통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한 것은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활동은 타 선교부에 비해 미진하였습니다. 78명의 내한 호주선교사 중에서 목사 선교사는 20명에 달했으나, 의료선교사는 11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의사는 4명이었고 간호사는 7명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호주 장로교회는 다방면의 의료활동을 전개할 만큼 재정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주를 의료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그곳에 배돈(培敦)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병원은 경남지방의 유일한 병원으로 이 지방민들에게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대신 부산과 통영에는 아동 건강관리소(Baby Welfare Center)를 운영하였다. 특히 통영지부에서는 작은 선박을 이용하여 위급한 섬사람들을 진주로 후송하여 치료받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혹은 자선사업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부산의 나환자 보호병원(Leprosy Asylum)을 운영한 일었습니이다. 이 일은 1910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수용시설의 책임자는 매견시(J. N. MacKenzie) 목사였습니다. 그는 단기간 의학교육을 받았던 목사였고, 후일에는 독학으로 의학 공부를 이수하고 의사자격을 얻기도 했는데, 인간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사랑으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여 때문에 일본 천황과 조선총독으로부터 몇 차례 훈, 표창을 받기도 했고, 귀국 후 1939년에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총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부산의 일신병원을 설립한 매혜란, 매혜영은 바로 매견시 선교사의 장녀와 차녀입니다. 7. 선교사들의 철수 1939년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데이비스에 의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 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해는 선교사들의 내키지 않는 철수가 시작되었던 해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심화되었고, 일제는 대동아권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이 강산에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한국인들과 서구인들의 접촉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호주선교사 유영완(Rev Esmond New)는 영국 간첩이라는 소문과 함께 그는 특별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내한하기 전 해군장교로 근무한 바 있었기 때입니이다. 호주선교부에 의해 설립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진주교회는 일제의 끈질긴 요구와 협박 때문에 “진주교회가 보내는 선언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주선교부를 배척하고 관계를 단절한다는 선언과 함께, 소위 일본적 기독교를 추구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문서를 발표한 일도 있었습니다. 등사판으로 만든 이 문서는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 또한 심화되었습니다. 설교는 제한을 받았고, 찬송가 중에서도 일부는 부를 수 없도록 금지되었습니다. 집회도 제한적으로 허용되었고, 배교행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40년 9월에 이르러서는 선교는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미국 영사관은 모든 미국인의 철수를 명하였고, 11월 16일에는 미국 정부가 특별히 준비한 마리포사(S. S. Mariposa)호로 미국인 선교사와 자녀들 219명이 한국을 떠났습니다. 호주선교사들에게도 철수가 권장되었고, 어떤 이는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습니다. 1940년 말에는 이미 90%의 외국 선교사들이 다 한국을 떠났습니다. 예견했던 대로 1940년 12월 선교사역의 종말이 왔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서 태평양 전쟁(대동아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호주선교사들도 다 돌아가고 마지막 5명이 남았는데, 그들이 마라연(Dr McLaren), 예원배 부부(Rev & Mrs Wright), 나례인 부부(Rev & Mrs Lane)였습니다. 이들은 가택연금 되었다가 1942년 6월 2일 일본으로 추방되었고, 일본에서 2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포로교환 형식으로 포르투갈 영 동부 아프리카를 거쳐 호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1941년으로 원치 않게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이 개괄적인 안내가 부산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기원을 헤아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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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8
  • [김성수 총장] 현대 공교육의 기초:인간의 전적 자율권
    현대 공교육의 기초:인간의 전적 자율권 오늘은 내 친한 친구이자 동역자인 호주의 리챠드에들린(Richard Edlin) 박사가 저서 “The Cause of Christian Education”에서 소개한 TV 인터뷰 한 기사를 소개하면서 현대공교육의 문제점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발간되는 선정적인 잡지 <포럼>(Forum)의 편집장과 십대 학생들간의 인터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인터뷰에 참여한 십대들 대부분은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로 기독교 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습니다. 포럼(Forum)의 편집장은 논의의 전제가 되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잠시 생각한 후 이 전제에 대해 모두 수긍했으며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내 인간의 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편집장은 자신이 수 년 동안 여자친구와 “계약결혼” 중에 있으며 공식적인 결혼계약 없이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여자친구가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현재의 동거 관계가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도 없기 때문에 만약 관계를 청산해야한다고 느끼면 어떠한 법적 제재 없이 간단하게 헤어질 수 있다고 하며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즉각적으로 몇몇 학생들이 결혼과 관련된 성경구절과 교훈을 이야기하며 편집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편집장은 인터뷰 시작 시 학생들이 동의했던 부분,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이 전제에 동의한 이상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성경말씀과 모순은 되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상당시간 이 모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기독 학생들은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이 “계약결혼”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제시하려 했지만 이미 인정해버린 인간의 자율권과 대치됨으로 인해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기독 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된 실제 삶의 모습을 기독교적으로 분석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문제는 기독 학생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재를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인간의 전적 자율권을 인정한 것에서부터 혼돈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혼돈을 자주 겪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들과 기독교 신앙은 별개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하는 유혹으로 인해 이러한 혼돈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편집장이 제시한 비 성경적인 견해를 기독 학생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에서부터 중요한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학생들이 비 성경적인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에들린 박사에 의하면 그들이 다니고 있는 공립학교의 교육을 가장 큰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학교는 단순히 ‘사실’(facts)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는 이러한 ‘사실’이 이해되어지는 삶에 대한 접근과 태도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이는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에 명확하게 언급될 수도 있고 언급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학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공립학교 교육현실이 어떠합니까? 사회학, 과학, 언어학 등 몇몇 학과목 바탕에 깔린 기본 전제를 살펴보면 인간이 결정하는 것에는 어떤 한계를 그을 수 없고, 또 이를 제한하는 권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중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공립학교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세계관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인간 개개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인간 밖의 어떤 존재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철학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며 살 합법적인 자율권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에서부터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교육의 모든 과정에서 비록 말로 명확히 표현되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러한 원리는 인간이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인간 본성이 어떠한지를 명확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존재가 마음의 병, 빈곤, 무지들의 문제를 지혜롭고 이타적인 선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모든 사람 나아가 온 세상을 보다 좋게 발전시킬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는 타락한 인간 본성, 하나님으로부터 근거한 인간행동에 대한 법률, 규범, 가치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선포적이며 직접적으로 온 세계를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세계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대 공교육의 비 성경적인 관점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귀한 언약의 자녀들이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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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4
  • [신기성 장로] 하늘빛 닮아 가야 할 우리
    얼마 전 국내 유명 어느 배구선수가 경기 중 게임이 뜻대로 안 풀리자 순간적으로 욕을 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를 지켜본 기자가 입 모양을 보고 이 선수의 무안함을 두둔해주려고 ‘식빵’이라 했다고 둘러대어 그 일 이후 그 선수는 ‘식빵 언니’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가끔씩 지인들과 운동을 가는 경우가 있는데 동반자마다 본인의 게임이 뜻대로 잘 안되면 순간적으로 욕을 내뱉는 경우를 종종 듣게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 있었는데 운동하면서 욕을 다 배웠다고 웃으면서 말하곤 했었다. 욕, 그 자체는 비신사적이고 반사회적 언어로 분명 비난 받을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도 욕을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내뱉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화될수록 욕이라는 언어를 많이 쓰는 모양이다. 최근 어느 카드회사에서는 욕에 가까운 발음의 시발(始發)카드를 출시해서 젊은이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고 구매 욕구를 높이려는 얄팍한 상술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욕을 상술이나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억지 변명을 한다 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생활은 어떨까? 오래전 부흥회에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 강사 목사님을 모셨는데 식사를 가면서 자기 교회 부목사와 통화를 짜증스럽게 끊으면서 “XX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 하면서 흥분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일로 부흥회 내내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전혀 은혜가 되지 못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엠 4:29)” 어디 그뿐인가?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나가라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무릇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들이다. 또한 하늘을 닮은 사람들이다. 세상 속에서도 진실한 말,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 곧 우리들이다. 하물며 교회 안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상대방을 인정하고 덕을 세우며 존중히 여길 때 곧 그곳이 진정한 교회며 그곳에 주님이 계실 것이다. 이 가을에 아직은 세상은 힘들 수는 있겠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언어도 하늘빛 닮아 가는 모두가 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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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4
  • [오성한 목사] 보좌 앞에 있는 나를 봄
    주님을 만났던 자들은 감격과 감동 그 자체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사야는 보좌를 본 후 감격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라고 했다. 보좌를 본 후 너무 황송해서 감화와 감동으로 한 말이다. 사도 요한도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요한계시록 1:17)라고 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 앞에 서게 된 사울도 “땅에 엎드러져 들었다”라고 한다(행9:4). 주님의 보좌를 본 사람들은 감격의 고백과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도 보좌 앞에만 선다면 감격과 감사의 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기도취적인 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 믿음으로 선 감격을 말한다. 보좌가 어디에 있는가? 멀리 있지 않다. 사실 우리는 항상 보좌 앞에 있다. 우리 몸이 ᄒᆞ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보좌 앞에 있음을 인식하고 사는 분이 많지 않다. 사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보좌 앞에 있는 자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라고 하신 말씀은 듣기 좋아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우리 몸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보좌를 품은 성전이다. 성령님이 안에 우리 몸 안에 계신다. 그 성전에는 보좌가 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 우편에 앉았다고 알려준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6)라고 한다. 성경은 거짓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 항상 보좌 앞에 있다는 말이다. “주님의 보좌 앞에 있다”라는 말보다 “주님의 품에 안겨있다”라는 말을 부담 없이 더 많이 사용한다. 나는 이 두 말이 같은 뜻이라고 본다.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익숙하지가 않아 “주님의 보좌 앞에 있다”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전재하자. “주님, 저는 주님의 품에 안겨있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많이 고백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종일 고백하며 “주님, 저는 주님의 품에 안겨있습니다”라는 진심 어린 고백을 하며 산다면, 그 사람은 항상 충만함 속에 살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품에 안겨있는 나의 모습을 계속 상상한다면, 행복한 모습을 세상을 드러내어 복음이 전파됨을 볼 것이다. 주님의 품에 안겨있는 당신의 행복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며 살아가기만 한다면 복음증거의 삶은 풍성해질 것이다. 상상하고, 그림을 그린다고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상상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지만, 실재다. 마찬가지로 내 몸 안에 좌정하신 보좌 앞에 선 우리를 그림으로 그려보고, 천사들이 영광과 찬양을 쉼 없이 올려 드림을 그림으로 그리며, 이십 사 장로들과 함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면류관을 벗어 던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잘 하는 일이다. 성경대로 생생하게 그림 그리는 실력을 깨워보라. 나는 내가 주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있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한다. 나를 앉고 행복해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좋아한다.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실제라고 믿고 감격한다. 믿음으로 상상한다. 포근한 품에 평안을 느낀다. 행복하다. 주님의 채취가 향기롭다. 그림으로 그려보는 주님의 품이지만 기도하며, 그리는 신랑의 품은 따뜻하기만 하다. 감격이 된다. 자주 눈물이 흐른다. 행복의 눈물이다. 감격의 눈물이다.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고 더 깊어만 간다. 나는 그 세계가 좋다. 보좌도 자주 그려보자. 복음으로 충격을 받기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주셨다는 소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면 언제든지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육의 눈으로 보좌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어 좋다. 직접 그린 그림이지만, 이사야를 통해, 에스겔이 말한 말씀을 통해, 요한 사도가 본 천국을 통해 보좌를 얼마든지 그릴 수 있어 좋다. 그림을 그려보라. 그린 그림이 사실임을 알 때 신바람이 날 것이다. 주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네 생물을 보라. 에스겔이 말한 네 생물, 요한 사도가 말한 네 생물을 상상하며, 그려보라. 보좌 앞에 있는 당신을 그려보라. 이십사 장로들과 천사들의 찬양 속에 화답해 보라. 보좌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라. 영원한 찬양의 힘을 가진 당신을 그려보라. 성경에 있는 대로 그려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잘하는 일이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실제 세계이가 아닌가! 실제 세계를 성경은 기록해 두었다. 정확하게 말씀해 두었다. 자주자주 보좌 앞에 나가 서 있어 보라. 그야말로 감격이다. 이십사 장로들과 천군 천사들과 함께 주님을 노래해 보라.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로 찬양해 보라. 나의 사랑, 나의 신랑께 천상의 노래를 드릴 수 있다. 노래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의 기도시간이 되게 해 보라. 인격적인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감격을 끌어내는 시간이다. 심취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기도의 시간이다. 어느새 한두 시간이 훨쩍 가버릴 것이다. 행복한 보좌에서의 만남의 시간이다. 감격의 시간이다. 감사의 시간이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라고 했다(요한계시록 4:6). 자주 유리 바다에 서 있어보라. 보좌 앞에서 당신을 보게 되면 더 부러울 게 없을 것이다. 그곳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다. 그야말로 평안이다. 평강의 바다다. 모든 풍랑이 잠재워진 바다 위다. 이십사 장로들과 함께 노래하는 보좌 앞의 당신을 발견하라. 날마다 감격하며 살 수밖에 없는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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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3
  • [이정희 목사] 삼우제(三虞祭), 성묘(省墓)와 졸곡(卒哭)에 대한 고찰
    I. 서언 (序言) 삼우제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으로서 성묘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졸곡이란 말은 흔히 듣는 말은 아니지만, 탈상(脫喪)이란 말과 함께 이 말들과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서도 교인의 장례식 이후 3일이 지난 다음 유가족들과 함께 삼우제 형식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가? 에 대한 마음의 고민을 가진 일들도 많았다. 요즈음은 장묘문화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과거 많 큼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 자체의 정체성의 흔들림은 물론이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게 타 종교의 의식을 행하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삼우제와 성묘와 졸곡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삼우제(三虞祭), 성묘(省墓)와 졸곡(卒哭) 1. 우제 : 먼저 우제(虞祭)란 말은 염려할 우(虞), 제사 제(祭)로서 지하에 매장된 고인의 영혼이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그 망자의 혼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한 제사이다. 이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의 고서이면서 유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5경 중 예기(禮記)에 기록된 제사 의식에 관한 가르침에서 전래된 유교식 제례의식의 용어이다. 장례를 치른 후 3일 동안 세 번 행하는 제사로서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고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장례 당일에 지내는 초우제, 그 다음날은 재우 제, 그다음 마지막 날은 삼우제가 있다. 재우와 삼우는 지방과 문중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삼우제는 거의 모두 재 우제를 지낸 다음의 첫 강일(剛日)에 날이 밝을 무렵에 집에서 지낸다. 삼우제를 마치고 나면 상주는 묘지에 가서 간단한 묘제를 행한다. 현재는 장례의 절차가 간소해지면서 삼우제를 마치고 봉분 옆에 흙을 파고 혼백을 묻는 매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우제의 유래와 그 의미는 우리 기독교적인 예식이 전혀 아니다. 2. 성묘 : 삼우제와는 달리 성묘는 기독교 예식에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배격할 필요는 없으며 그 의미는 좋기 때문에 수용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먼저 “성묘(省墓)”란 말은 살필 성(省), 무덤 묘(墓)라는 뜻으로 무덤의 상태가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장례를 치른 후 3일 만에 무덤에 가서 살펴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의 유무를 떠나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먼 외지에서 장례일 까지 오지 못한 가족이나 친족들이 사후에 무덤에라도 가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며, 또 분묘가 잘 조성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요즈음은 매장보다 화장을 해서 유골함으로 처리하는 경향이지만, 유족들이 고인의 별세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인생의 삶에 대한 신앙적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는 것도 장례 후 첫 성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논한 우제란 말 보다는 횟수에 관계없이 위로 예배란 말과 3일째의 삼우제는 매장이든 아니든, 첫 성묘란 말로 우리 교회 용어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굳이 3일 만에 성묘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성경적인 의미를 찾아본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무덤을 살피기 위해 제 3일 부활절 아침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모습을 예를 들 수 있다. 3. 졸곡 : 모든 장례 행위를 다 마치고, 삼우제를 지낸 뒤 무시애곡(無時哀哭)을 끝내기 위하여 행하는 제사의식으로 강일(剛日:天干이 甲·丙·戊·庚·壬에 당하는 날)에만 지내도록 되어 있고, 그 시기는 장례일로부터 3개월이 지난 뒤에 행하였다. 과거에는 반드시 3개월이 지난 후에 행했으나, 지금은 장례일로부터 10일 내에 행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의식은 졸곡 하루 전에 상(床)과 기구를 준비하고 밥과 음식과 냉수를 진설한다. 날이 밝으면 나물과 과일과 술과 안주을 진설하고 정화수를 채워서 놓고, 그다음 여러 가지 정해진 의식을 진행한다. 모든 의식을 행한 다음에는 상주와 참제관들이 들어가서 마지막 졸곡을 한 뒤 사신배례(辭神拜禮)를 한 다음, 혼백(魂帛)을 깨끗한 땅에 묻는다. III. 맺는 말 지금까지 논한 용어들은 평소 익숙하게 듣는 용어들이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상례문화 속의 단어들이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의 용어는 아니다. 성묘를 제외하고는 삼우제나 졸곡 등은 우리가 사용하거나 행할 수 없는 우상숭배이다. 이런 관점에서 항상 제언하는 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바른 생활용어는 오늘 날의 수많은 문화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의하고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도 기독교인의 바른 언어문화와 용어사용정착에 기도와 협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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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3
  • [김성수 총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셨고, 성령으로 인치신 주님께 속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회 어떤 조직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공동체는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별과 신분, 빈부와 지식,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라는 수단에 의해서 이곳 저곳에서 불러냄을 받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과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사역 위에 설립되지 않은 “교회”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 곳 저 곳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원래 ‘불러내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에클레시아, 즉 모임 또는 회집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모임이 없는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동서남북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친교하고 교육받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더 돈독하게 키워 나가야 합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일을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집단을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모이는 일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물론 교회는 감염예방준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지 않도록 예방수칙을 준수하는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 교회의 예배가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잘못된 이유를 근거로 예배 모임 자체를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가 ‘정치 방역’으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정부의 요구에 너무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이는 교회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모임이 자기 만족과 자기 봉사에만 스스로를 진력해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이는 교회는 다시금 이웃과 지역사회를 봉사하고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흩어져서 이웃을 봉사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사회적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는 진리의 빛을 비추고, 절망 속에 있는 인간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주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수 시대에는 노인대학을 통해서 지역사회를 봉사하는 사역이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신앙을 변증하고 전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서의 짧은 사역이후 자신을 비방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해 어떤 깊이 있는 신학적 변증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의 삶 자체가 어떠했는가를 회상시켜주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자신을 변호하였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이론적 논증과 장황한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행동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설교를 듣고자 하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우리의 율법과 고백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가 개인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디아스포라는 사회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모이는 교인과 흩어지는 제자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의 형태와 제자의 형태, 이 둘의 기능과 책무는 어느 하나가 우선될 수 없고 동일한 비중의 중요성과 관심을 가지고 수행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웃과 지역사회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수 십년동안 지역사회를 효과적으로 봉사해 오던 프로그램을 교회의 당회가 주도적으로 폐쇄해 버리고도 전도 프로젝트를 운운하는 교회가 있다면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한국교회는 그 동안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은 잘 감당해 왔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의 책무는 잘 감당하지 못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눈이 비판적인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가 흩어지는 비전을 가지지 못하면 자기 도취적인 만족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자기들만의 개교회주의와 같은 형태로 교회의 담을 높이 쌓고 이기적인 신앙으로 폐쇄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아닙니다.교회는 모이는 교회로만 존재할 수도 없고 흩어지는 교회만으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마치 우리의 심장과도 같아서 새로운 피는 생산하여 계속적으로 유기체로 내보내고 더러운 피는 정화하는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열심히 모여서 모이는 교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서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며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지역사회 속에서 제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기치장과 자기 만족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처럼 세속화의 거센 바람을 집어삼키고 정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많으나 제자가 없고, 모이는 교회는 있으나 흩어지는 교회가 없는 이때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신앙 고백적인 결단과 희생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 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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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30
  • [안동철 목사]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지난 주 한 편의 시를 읽는데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인데, 이 시의 시작부터가 아주 도발적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연탄이 우리의 겨울을 따뜻하게 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연탄가스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가 방송과 신문지상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연탄이 꺼져 한겨울의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어야만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되는 연탄재조차도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합니다. 그 연탄처럼 누군가를 위해 한 번이라도 뜨겁게 자신을 불사른 사람이 있느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더구나 연탄은 마지막 순간까지 겨울 빙판길에 뿌려져서 길을 걷는 사람을 보호하는 사명을 다하였으니 이런 연탄을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한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은 어떻습니까? 이곳저곳에서 내 생각을 따라 함부로 마치 연탄재를 차듯이 사람들을 차댑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절대 틀린 법이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런 저런 깊은 멍이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시인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든 사람들이 있는 살벌한 현장입니다. 모두가 그 여인을 벌레처럼 보고 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종교적 위선의 탈을 쓴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간 후 주님은 범죄한 여성을 향해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분노로 가득찬 이 세상의 수많은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연약한 자를 향해,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연탄재를 차듯이 차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차대는 사람이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찾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고 99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떠나는 사랑에 눈먼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마 18:12). 사람들이 대책 없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하늘 아버지의 사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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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30
  • [조희완 목사] 평안하게 삽시다.(시122:1-9)
    여러분이 만약 죽었다가 잠깐 다시 살아난다고 가정을 할 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입니까? 사람에 따라서 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살아생전에 가슴에 한이 맺혔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녀들에게 “제발 예수를 믿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제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두 번이나 연거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20:19,21) 다른 하실 말씀이 참으로 많으셨을 법한데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곧,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것이 바로 평안과 평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평안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샬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살후3:16)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날 사람들이 이 소중한 평안을 다 빼앗겨 버리고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안이 가득해야 할 곳에 평안은 사라지고 대신 반목과 다툼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셨던 것처럼, 그 분을 믿는 우리도 평안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 중에서 어떤 곳이 평안하기를 힘써야 할까요? 첫째로,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시122:6-7) 둘째로,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잠17:1, 21:9) 셋째로, 나라가 평안해야 합니다.(딤전2:1-4) 우리 모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고 평안을 도모하는 자들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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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오성한 목사] 생수의 근원
    예레미야서 1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2장부터 25장까지를 12번의 설교로 분류할 수 있다. 26장은 12번의 설교를 마치니 “죽여라”라고 소리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27장에서 “설교로 부족하구나. 시청각으로 보여 줄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를 메고 나갔더니 부러뜨려 버렸다. 그러니 부러뜨릴 수 없는 메고 나가라고 하신다. 28장이다. “쇠 멍에를 메고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29장은 “편지를 써서 읽게 하라”고 하신다. 30장부터 33장까지는 약속하시며, 34장부터 52장은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부터 유다가 멸망한 후까지 사역한 선지자이다. 5번째 설교인 13장에서 유다 멸망의 원인을 “교만”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베 띠를 바위틈에 감추었다가 다시 가보라고 하신다. 다시 가보니 베 띠가 놀랍게도 완전히 썩어 있었다. 유다의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때 “교만”이라는 단어를 짧은 구절 속에 4번 사용하신다(렘13장). 유다는 교만으로 인해 망했다. 무엇이 교만인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예레미야서를 좀 더 설명해 보겠다. 12번의 설교가 2장부터 25장 사이에 있는데 첫 번째 설교가 12번의 설교의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첫 설교를 하신 다음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분량이 있는 것 같지만 단순한 임마누엘의 비밀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인데, 구원이란 임마누엘이라고 나시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 설교는 예레미야 2장에 기록한다. 2장 13절을 12번의 설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의 핵심이라고 보면 좋다. 두 가지 악을 지적한다. 두 가지 악을 지적하지만, 결국 한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생수의 근원을 버리면 인간은 자연히 엉뚱한 웅덩이를 파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하셨다. 생수의 근원을 버려선 안 된다.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이 “교만”이라고 계속 지적하신다. 생수의 근원 되신 예수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성취해 주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약속해 주시고 이미 이루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렘11장). 이 약속을 깨뜨리게 되면, 바알을 섬기게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찾아오셨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오셨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다른 것을 더 할 필요가 없다. 믿으면 된다. 약속을 잡으면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무엇을 더 하려고 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다. 무조건 십자가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깨뜨리지 않는 방법은 믿음이다. 내가 믿어 드리면 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나는 말을 바꾸었다. “하나님 저는 생수의 강이 내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수의 강이 오늘도 흘러넘칩니다. 저는 생수를 마십니다. 정말 시원합니다.”라고 날마다 고백하며 산다. 또 나에게도 말한다. “성한아, 너는 샘물을 가진 놈이란다. 너는 오늘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단다. 너는 성령의 사람이란다. 성한아,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다”라고 수십 번도 더 말해 주고 선포해 주며 행복해한다. 감격이 일어난다. 춤이 춰진다. 나 같은 자를 사랑해 주신 신랑이 좋다. 나의 사랑 신랑을 생각하면 자주 눈물이 난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신랑에게 감격을 눈물을 보이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나에게 늘 감격의 눈물이 있다. 지금도 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 고백을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눈물과 함께 콧물도 흐른다. 호주머니에도, 성경책에도 휴지를 늘 넣고 다닌다. 휴지가 없는 날은 곤란할 때가 많다. 옷마다 휴지가 많이 들어 있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감격으로 산다.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나는 많이 울었다. 지금도 운다.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떨어진다. 흐느껴 감격하며, 감사하며, 자주 우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내 사랑, 나의 신랑에게 감사하다. 내 안에는 사랑의 시가 있다. 당신의 언어로 충만함을 깨워라.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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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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