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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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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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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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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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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복 있는 사람의 사가지
복 있는 사람,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이 다르다. 특징이 있고 조건이 남다르고 DNA가 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 네 가지(사가지)가 있다. 1. 복있는 사람은 신언서판의 끝인 지혜가 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중에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니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빌어먹지 않는다. 사울 왕의 길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라서 지혜로워서 선택과 집중을 잘한다. 실력이 없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용서가 안된다. 몸 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고 필력이 뛰어나 표현력이 좋고 판단력이 남 다르다. 2. 복있는 사람은 위치 선정을 잘 하므로 자기 환경을 아름답게 꾸며서 좋은 생태계를 조성한다. 사람은 환경의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 좋은땅, 옥토운동을 하여 좋은 사람들,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마태효과를 이룬다. 3.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아름다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거리유지, 유유상종, 통친합락, 친구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닮아가고 연합한다. 부정적인 면으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니 말기찬섬을 통하여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뿌리를 박으니 공급처가 마르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해서 기가 빨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4. 복 있는 사람은 결국, 결과가 좋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는다. 농사는 사시사철 모두가 중요하다. 봄철에 요즘처럼 이상기온으로 꽃이 피지 못하면 가을농사는 틀렸다. 여름철 땡볕을 견디고 추수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가 익어야 된다. 농사의 결과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산성이 있고 가성비가 있고 배가 되고 번식하여 증거와 열매가 있어야 된다. 복 있는 사람은 이파리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늘 푸른 상록의 복의 받는다.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진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된다. 나중 축복, 말년의 축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결국 인복, 다복, 행복, 흥복을 누리게 된다. 복 있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도 행복해지고 교회도 부흥 되고 사회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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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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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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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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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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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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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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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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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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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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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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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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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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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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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건강한 교회
- 아름다운 신앙생활에는 다섯 가지 구호가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인격을 향기롭게 그중에서 교회는 건강해야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혜와 키가 자란다. 식물은 심어놓으면 반드시 자란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한다. 여기서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말한다.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걸어서 로마까지 가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변화가 되었다. 그가 가정을 이루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동역자요 동업자였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방에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교회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사람은 각자 개성이 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가 대단하다고 칭찬받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 지방에서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해서 세운 베뢰아 교인들은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상고하였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변화가 되어서 그가 프로그램, 시스템을 만든다. 가정을 이룬다. 교회를 세운다. 가정은 교회처럼, 교회는 가정처럼 되어야 한다. 모든 가정은 행복해야 된다.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 자녀는 없다. 가화만사성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 가정생활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우리는 천대까지 복을 받는 명가를 이루어야 된다. 교회는 영성이 있다.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된다. 성령의 영감이 넘쳐야 된다. 예배의 감격이 있는 곳이 건강한 교회이다. 교회는 복음이 흘러가야 된다. 나라는 국격이 있다. 성경에서 5대 제국은 무너져도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성도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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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건강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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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치유와 기적의 삶
- 나는 믿는 자에게 주신 기적의 능력을 믿고 이미 주신 권세를 인정하고 환영하는 기도를 많이 한다. 신바람이 나기도 한다. 뜨겁게 말씀을 인정하는 기도를 할 때, 나에게 주신 능력이 믿어지고 생생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고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보시고 그 일을 따라 하셨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보았다. 우리도 먼저 보아야 한다. 본 사람은 쉽게 따라 할 수 있고 따라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들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보셨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시고, 아들도 그것을 행하셨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곧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보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열심히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펴놓고 읽으면서 기도를 자주 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마가복음을 행동 복음이라고 별명을 붙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성격이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되어진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보다 “즉시”, “곧” 등의 단어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마가복음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한 성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록했다고 본다. 제일 먼저 원천적인 강렬함이 보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마가복음을 보면서 기도하면 더 강렬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성경들도 나의 기도목록들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 4명을 부르셨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였다.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였다. 이 두 형제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름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는데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일어남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안에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다섯 가지나 일어남을 볼 수 있다. 나는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이 기사와 표적이 함께 했음을 분명히 보았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심의 권세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뿐만 아니었다. 능력 있는 가르침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르칠 때 더러운 귀신들인 사람이 있어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경련을 일으키며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막1:26).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장모가 집에서 열병이 들어 누워있었는데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을 즉석에서 들었다(막1:31). 저물게 되었을 때 소문을 듣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고 기록한다(막1:34). 밤이 되어 주무신 다음 새벽 일찍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아내셨다(막1:39). 연이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간청을 할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기록한다((막1:41-42). 이렇게 짧은 기록 속에 다섯 번이나 생동감 있는 표적과 기사와 함께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 것”이다(요5:19).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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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치유와 기적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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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마무리를 잘 합시다.
- 영국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2019년이 끝나갑니다. 나는 오늘(28일) 올해의 마무리를 위하여 오늘 함양, 산청, 고령을 다녀왔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어 아침 8시에 집에서 출발하였다가 밤 11시에 돌아왔습니다. 피곤하지만 미루고 미루어 두었던 일의 마무리로 다녀오니 마음이 개운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2019년이기에 나머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하는 데에 하루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인생살이 마지막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됩니다. 젊은 날들은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이 범하였습니다. 그럴수록 나이 들어가면서 마무리를 잘 하게 되면 지난날의 모든 허물도 시행착오도 오히려 보석같이 빛나게 됩니다. 야구 경기에 9회 말 홈런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 인생살이를 그와 같이 9회 말 홈런으로 멋진 마무리로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너그러움’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너그러움이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너그러움에 인색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서로 상처 받으며 스트레스를 쌓아 갑니다. 한 해를 너그러움으로 마무리하도록 힘써 봅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너그러워집시다. 자신이 지난날 멍청하게 살아왔던 일들에도 너그러워집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줍시다. 그러면 인생 마무리를 훨씬 더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지난날들에는 그렇게 멍청한 일들을 하였으니, 이제 나이 들어 마무리를 잘하자. 내 인생 9회 말 홈런으로 마무리하자. 이런 식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한 해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멋있게 마무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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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마무리를 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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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진짜 최선을 다했습니까?
- 어느 집의 아이 하나가 큰 돌 하나를 마당 건너편으로 옮기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넌 왜 네가 가진 힘을 다 쓰지 않고 있니?” 아이는 낑낑대며 고생하는 자신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밉고 속이 상해서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 제가 온 힘을 다 쓰고 있잖아요. 제가 낑낑대고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을 하세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너는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잖니. 그것이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야!”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전혀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자기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도 해보지도 않고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의 주역이었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도 외에 달리 의지할 것이 없다는 확신으로 인해 여러 번 무릎을 꿇곤 했다. 나 자신의 확신과 주변 사람들의 확신만 가지고는 하루를 살아가기에 부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무릎을 꿇으며 산다는 것, 그것이 내가 내 삶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갑자기 퇴출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해 보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책상에 해고 통보서가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직장과 자신의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는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방황한 후에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죽고 싶소. 나는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데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고 사람들은 다 나를 배신하는 것 같소.”그 말을 듣던 그의 아내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만 한 가지 시도를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이 처한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하나님과 대화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 사람은 이상하게도 아내의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해 본 적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고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며칠 기도하는 동안 마음속에 있던 직장과 상사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먼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 속의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사라지자 머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얻어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잘 되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5년 만에 작지만 자신의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에 재미를 붙여서 늘 기도하던 그는 어느 날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축을 하면서 여기 저기 여행을 하다 보니 좋은 호텔이 없습니다. 멋진 호텔은 있지만 너무 비싸고, 작은 호텔은 너무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로운 호텔을 지었으면 합니다. 아주 깨끗한 호텔, 그러면서도 적절한 가격에 쉼을 제공할 수 있는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 둘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체인이 된 홀리데이 인 호텔(Holiday In Hotel) 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홀리데이 인 호텔의 창업자인 케몬스 윌슨이라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기도해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 그리피스 조이너는 자신의 승리의 비결을 말하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하고 나서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는 진짜 최선을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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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진짜 최선을 다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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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목사] 교우들에게 드리는 송년 인사
- 주안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최선의 길(the best way)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하나님은 매우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도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한계의 벽 앞에서 인내하는 믿음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어찌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019년도는 정치, 경제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갈등이 우리 사회에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산다는 것이 스트레스 가운데 사는 것으로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은 성도님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헌금하여 주시므로 교회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눈물겨운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새해에 여러분의 믿음 생활과 건강, 자녀들의 미래와 경제생활에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축복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키고 헌신해 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이방인교회와 유대인교회가 하나라는 말씀처럼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켜오신 올드 타이머(Old Timer)가 계시기에 오늘의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새로이 뉴 커머(New Comer)가 오셨기에 내일의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셨듯이 서로를 더욱 존중하면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 연말과 연시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송구영신예배에 온 가족이함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한 해를 보내며,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신년 및 특별새벽부흥회 등에 온 가족이 꼭 참석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자녀들의 손을 잡고 모두가 힘써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와 자녀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 어두운 시대를 별처럼 밝혔던 에스더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손들이 삶에서 당하는 어두운 환경을 극복하는 승리가 이번 신년 예배부터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가까운 성도 중에 차편이 없는 분들을 돌아보고 카풀로 섬기는 등 성도가 서로를 돌보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우리나라와 열방(列邦)을 위해 쓰임받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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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목사] 교우들에게 드리는 송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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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시는 하나님
- 하루하루의 날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날이기에 하루하루가 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일을 모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신 안식일, 주일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신 날이기에 귀한 날이고, 복된 날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한 날입니다. 주일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주일을 복 되게 한 날로 정하신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영육을 쉬게 하십니다. 주일을 통해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일 쉬면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육이 강건해 집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면 지치게 되고, 병이 들기도 합니다. 주일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재충전하여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정한 날, 주일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주일을 복 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 때에 믿음이 떨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죄 짓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지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일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일, 주의 날에 성령이 임하고 은혜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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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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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관리의 책임
- 우리나라의 TV 방송 프로 가운데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그 프로에서 오래 전 <벼락부자, 그 후 - 부자라서 행복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했습니다. 한기수씨(가명)는 로또 복권 1등 170억 원에 당첨이 되어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부부간에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금(巨金)을 관리하는 문제를 가지고 부부가 서로 다투다가 9개월 만에 합의 이혼을 하고 가정에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충청도 한 시골 마을에서 3대째 농사를 짓고 살던 양만철씨(가명)의 경우 토지 보상금으로 120억 원의 거금을 받고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토지 보상을 받는 과정에 동네 이웃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그 일 때문에 우울해 하다가 어느 날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돈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잃고 좋은 이웃을 잃은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지금보다 이전에 삶이 훨씬 더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자(富者)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고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큰돈이 생겨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큰 돈을 어떻게 잘 다스리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좋은 것이지만 그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도리어 화(禍)가 되고 재앙(災殃)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 뿐만 아니라 너무나 귀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것들을 제대로 잘 관리하지 못하면 더 이상 귀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잘 관리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받은 은혜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갈1:6-7절) 둘째로, 주신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엡5:16-18) 셋째로, 주신 물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요6:11-12)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을 잘 관리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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