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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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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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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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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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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복 있는 사람의 사가지
복 있는 사람,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이 다르다. 특징이 있고 조건이 남다르고 DNA가 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 네 가지(사가지)가 있다. 1. 복있는 사람은 신언서판의 끝인 지혜가 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중에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니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빌어먹지 않는다. 사울 왕의 길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라서 지혜로워서 선택과 집중을 잘한다. 실력이 없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용서가 안된다. 몸 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고 필력이 뛰어나 표현력이 좋고 판단력이 남 다르다. 2. 복있는 사람은 위치 선정을 잘 하므로 자기 환경을 아름답게 꾸며서 좋은 생태계를 조성한다. 사람은 환경의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 좋은땅, 옥토운동을 하여 좋은 사람들,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마태효과를 이룬다. 3.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아름다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거리유지, 유유상종, 통친합락, 친구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닮아가고 연합한다. 부정적인 면으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니 말기찬섬을 통하여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뿌리를 박으니 공급처가 마르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해서 기가 빨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4. 복 있는 사람은 결국, 결과가 좋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는다. 농사는 사시사철 모두가 중요하다. 봄철에 요즘처럼 이상기온으로 꽃이 피지 못하면 가을농사는 틀렸다. 여름철 땡볕을 견디고 추수 때까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가 익어야 된다. 농사의 결과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산성이 있고 가성비가 있고 배가 되고 번식하여 증거와 열매가 있어야 된다. 복 있는 사람은 이파리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늘 푸른 상록의 복의 받는다.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진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된다. 나중 축복, 말년의 축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결국 인복, 다복, 행복, 흥복을 누리게 된다. 복 있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도 행복해지고 교회도 부흥 되고 사회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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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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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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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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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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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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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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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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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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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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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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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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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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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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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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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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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교회를 개척하며 생긴 고민 중 하나가 예배와 모임이다. 한국교회는 모임으로 평가하자면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질적인 부분의 평가는 패스. 다만 양적인 부분은 세계 어느 나라의 개신교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주일오전예배, 주일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소그룹모임, 성경공부, 제자훈련, 다음 세대 부서예배 등」 이제 나도 젖어 있어서 익숙한 모임들이다. 이런 모임과 열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경스럽고 위대하기까지 하다. 그럼 그 좋은 것, 나도 해야지 않을까? 그런데 그러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다.’ 힘들어서 나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하다 죽으면 순교?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다. 낮에 일하며 혼자 그 많은 모임을 준비하고 인도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말에 손가락질하겠지만 나는 일을 하면서라도 목회해야 한다. 어떻게 받은 소명인데. “여러분, 저는 새벽기도 할 자신이 없습니다. 새벽기도 없는 교회가 싫으시다면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성도들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목사의 새벽기도 포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 있고 실망이 될 수도 있기에 큰 두려움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성도는 나의 고단함에 수긍해 주었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히려 새벽기도 안 하는 불경건한 목사를 통해 누군가는 안도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웃픈’ 상황이다. 전임 사역을 시작하며 쉬어본 적 없던 새벽기도를 개척하면서 쉬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새벽기도도 안 하는 목사, 이래서 되겠는가?’ 한편의 불안함은 있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달려보자. “당분간 수요일 저녁에는 교리공부로 12주 모이겠습니다.” 개척 6개월이 지나 수요모임을 광고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기간이 정해져 있다. 가을에 12주만 모이겠다는 말이다. 새벽기도보다 더 큰 부담이 수요예배였다. 교회 모든 모임이 그렇듯,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목회자만 참석하더라도 있는 모임을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임을 폐하는 아주 악한 자가 될 것이다. 수요예배를 시작하는 것, 성도들이 얼마나 함께할지, 우리 공동체에 어떤 유익이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한시적, 학기제 수요모임을 준비하게 되었다. 봄, 가을. 다른 주제를 정해서 수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틀을 짰다. 「강단 위에 작은 원형 테이블을 두고 앉았다. 기타를 잡고 찬양을 2곡 부른다. 그리고 만들어 둔 교재를 열어 함께 주제별 성경을 공부한다. 기도로 마친다.」 이것이 전부다. 하지만 생각보다 참여율이 높았다. 우리 공동체가 신앙이 좋아서? 목사가 탁월한 강사라서? 안타깝게도 아니다. 기한이 정해져 있었기에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두려움이 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도들도 견딜 힘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첫 가을학기를 마무리하며 책을 덮을 때, 우리에게는 두 마음이 들었다. ‘끝났다.’ ‘다음 학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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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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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신앙인의 삶과 징크스(Jinx)
- 원래 징크스(Jinx)란 사전적 의미는“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惡運)으로 여겨지는 것” 또는 “불길한 대상이 되는 사물 또는 현상”을 말한다. 심리학적으로 징크스는 자신이 우연히 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때 그걸 단순한 우연이나 미신이라고 여기지 않고 어떤 강한 인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징크스(Jinx)의 어원은 일반적으로 딱따구리의 일종인 “개미잡이” 라는 새에서 찾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새를 점을 치는데 사용했는데 머리의 생김도 그렇고 움직이는 것도 뱀과 같다고 불길한 새로 취급했다. 바로 이 새의 그리스어 이름이 junx 이다. 라틴어로는 jynx 이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순조롭게 일들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잘 풀리지 않고 꼬일 때가 있다. 그러면 사람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습관적으로 징크스에 빠지게 된다. 위의 예처럼 “ ~ 하기만 하면 이렇게 좋지 않다”는 식이다. 징크스는 미신이라는 뉘앙스가 담긴 단어이므로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파진다”처럼 객관적으로 인과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징크스라고 볼 수 없다. 예컨대 “밥을 안 먹고 경기를 관람하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더라”라는 식의 주관적인 느낌이 징크스의 예시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징크스 중 하나로 “미역국을 먹으면 떨어진다”는 징크스가 있으며, 어떤 운동선수는 목욕하고 시합을 하면 반드시 패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합 전에는 절대 목욕을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에 맹인을 만나면 일이 꼬이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어떤 택시 운전기사는 첫 손님으로 안경을 낀 사람을 태우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고, 어떤 학생은 시험 전날에 손톱을 깎으면 시험을 망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축구 감독은 반드시 흰색 유니폼을 입지 않으면 패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어 흰색 유니폼을 고집한다. 아침 첫 손님이 여자가 오면 매상이 오르지 않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어 여성 손님이 오면 그 손님을 기피하는 현상도 있다. 연예인들 중 아이유는 노래 제목애 대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데 노래 제목은 반드시 세 글자로 지어야 히트(hit) 친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히트 친 노래 제목들이 “잔소리, 좋은 날, 너랑 나, 밤 편지, 라일락...” 모두 세 글자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4자(字)가 죽음을 연상시킨다 하여 병실 번호 등에서 제외하고 있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거나 검은 고양이가 앞을 지나가면 불길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도 징크스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징크스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징크스에 눌려 있다면 그것은 불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고 교훈 하였다. 우리는 징크스에 빠질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함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버리고 주님 안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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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신앙인의 삶과 징크스(Ji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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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0 : 설날과 세시풍속 용어들 I
- I. 서언(序言) ‘내 마음 속에는 닫힌 문짝을 열고자 하는 손과 열린 문짝을 닫고자 하는 손이 함께 살았다.’ 안수환의 ‘문’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어줍은 지식이지만 올바른 용어 사용을 가로막는 닫힌 문짝을 열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닫아보고자 하는 열망, 그래서 시작된 기고를 10년이 넘도록 해오면서 많은 용어들을 논해왔다. 그중에서 약 1여년 전에는 29회까지 우리가 흔히 쓰는 교회 용어들에서 바로 사용하거나 주의해야 될 말들을 논해왔다. 하지만 심각하게 오남용되는 경어에 대한 바른 표현의 필요성 때문에 약 1여년 동안 논해왔다. 이제 지난호의 예고 대로 다시 올바른 교회용어에 대해서 논하고자 했으나 곧 설날이 다가오는 관계로 언젠가 기고한 바 있는 설날과 세시풍속의 용어들에 대해서 2~3회 정도 논해보고자 한다. II. 설날의 어원과 유래 설날을 전후한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는 일들과 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1. 설날의 어원: 설날의 사전적인 뜻은 ‘새해의 첫날’이다. 또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기 때문에 원단(元旦), 세수(歲首), 정초(正初)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하다’는 뜻도 있다. 또 이 말은 ‘섧다. 슬프다’란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러한 뜻은 다소 의외로 보이지만, 이는 설이란 그저 기쁜 날로 들뜨기보다는 한 해의 첫날부터 모든 일에 조심하며 신중하게 첫발을 내딛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날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의미에서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이런 뜻으로 볼 때 설날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용어이다. 2, 설날의 유래: 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직은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달의 주기를 가지고 만든 태음력(太陰曆)과 이집트인들이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주기로 만든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면서부터 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해의 시작 일을 중요시 여기며 기념하는 것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을 지키는 직접적인 영향은 중국의 춘절(春節)일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춘절은 우리의 설날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경 중국의 역사서에 ‘신라에서 지켜진 설날에 대한 기록’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고,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A.D 238년) 정월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현대의 설날로 볼 수는 없으나 새해를 맞이하여 지냈던 제사라고 볼 때 비슷한 경우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설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 온 민족의 명절인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처음에는 양력의 1월 1일과 구분하여 민속의 날이라고 했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인 설날로 다시 불리어 졌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설날에 행해지는 각종 세시풍속들과 용어들: 차례(茶禮), 복조리 달기,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청참(聽讖), 설빔, 세찬(歲饌), 세주(歲酒), 세화(歲畵), 음복(飮福), 덕담, 새해 성묘 등 많은 세시풍속들과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충분히 계승하고 장려할 일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설날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 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세시풍속은 차례의식이다. 차례는 원래 하늘에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가 있음을 믿고 제사를 지낸 천신제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의 영향으로 천신제에서 죽은 조상(자신으로부터 4대위 조상까지) 제사로 바뀌었다. 이것은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또한 차례라는 말의 어원은 원래 다례(茶禮)였다. 이는 원래 제사상에 술이 아닌 차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하는 것이다. III. 기독교인 입장에서의 설에 대한 입장과 결론 설은 새 출발을 뜻하는 날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또한 부모와 어른들을 섬기는 세배나 서로 덕담을 나누는 풍습은 교회 속에서도 더 계승 발전시켜 야 할 좋은 덕목이다. 하지만 이것이 조상숭배와 미신적인 행위로 바뀌어 진 불신자의 세시풍 속은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선교 140년의 역사 속 에서 설날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명절이 제사 문제로 짝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는 날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 가족과 일 가친척들 간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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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0 : 설날과 세시풍속 용어들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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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위로의 유익 (고후1:3-7)
-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열다섯 살 된 <브라이언>이란 소년이 “브레인 튜머”(Brain Tumor)라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병은 뇌종양과 비슷한 병인데,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그 후유증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게 됩니다. <브라이언>도 방사선 치료의 후유증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대머리가 되었습니다. <브라이언>이 기운을 회복해서 학교에 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가 학교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급 친구들이,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대머리가 된 친구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의논을 했습니다. 의논을 한 결과 <브라이언>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학급 친구들 모두가 다 <브라이언>처럼 머리를 밀기로 했습니다. <브라이언>이 학교에 나오는 그 날 아침 담임 선생님과 모든 학생들이 빡빡 머리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브라이언>이 큰 위로와 감동을 받고 울었다고 합니다. 위로(慰勞)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헬라어로 위로를 “파라카레오”(παρακαλεω)라고 하는데 “내 곁에 계신다.” 혹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낙심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슬픔 당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백 마디 말보다도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더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진정한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경제가 침체되고 사회가 어려울수록 위로받을 사람이 더 많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면 어려움 당하는 형제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위로는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고후1:6) 둘째로, 위로는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왕상19:4-8) 셋째는, 위로는 믿음을 견고케 합니다.(살전3:2-3)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하여 지친 영혼들이 많습니다. 서로 돌아보고 위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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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위로의 유익 (고후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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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나를 죽이셨다
- 이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말을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잘 표현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했다. 이 고백을 하기 전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계속 설명을 한 후에 한 말임을 기억하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고 했기 때문이다.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의미가 율법에 대해 죽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율법에 대해 죽은 자신이 이제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고 말한 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고백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19-20)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은 19절에서 말씀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표현을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죽여야 한다는 표현이 아니다. 로마서 6장의 십자가에 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도저히 아닌 것 같다. 나는 살아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성한아, 그래도 나는 너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단다. 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이었다. 그것을 믿는 일이 이론은 되는데 실재는 아닌 것 같았다. 믿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선 죽었다. 율법과는 관계없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려고 사는 자들이 아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나는 이전에 나를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 알았다. 이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산다. 새로워진 나를 보며, 적용하며 산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로 이 땅에서 적용하며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피조물로 주님 안에 들어와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실제로는 초자연적 삶을 살고 있다. 창조주가 우리 몸에 들어와 그분이 사시니 초자연적인 삶이다. 믿음으로 확증을 하고, 믿음의 의식이 바뀔 때 엄청난 영적 성장이 있다. 곧 날 올 책인 “복음으로 춤추는 삶을 살라”에서 우리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믿으면 그대로 된다. 믿음대로 된다. 옛 사람이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여도 믿음으로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음을 인정하라. 믿음은 산을 들어 옮긴다. 맞다. 성경은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슈퍼맨이다. 슈퍼맨은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은 슈퍼맨이 되는 것보다 더 초자연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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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나를 죽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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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그동안의 올바른 경어 사용 기고의 마침과 또 다른 생활용어 시작에 즈음하여
-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보기에 따라서는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 용어 탐색 중에서 교회 내의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기고를 해왔다. 그런 중 교회 내의 용어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올바른 경어 사용에 대한 내용을 16회를 연재해 왔다. 이제는 2024년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본 기고의 기본 주제인 기독교인의 여러 가지 생활용어 중에서 교회 내의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런 즈음에 있어서 다시 한번 그동안에 이런 연재를 하게 된 동기와 지금까지의 소회와 앞으로의 기고에 대한 내용을 먼저 피력하고자 한다. II. 그동안 기고를 하게 된 동기 지금까지의 기고를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맨 처음 이 주제의 글을 시작할 때 밝힌 바가 있지만, 다시 한번 논한다면, 언젠가 어떤 교계 신문에서 “예수님 존함으로 기도합니다.”란 제목의 글을 흥미롭게 읽어본 적이 있었다.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신학교에서 국어학과 예배학, 비교종교학을 등의 언어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필자로서는 아주 호기심이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논리는 이러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존칭어로 호칭한다면, 그 뒷말도 ‘예수님 이름으로’가 아닌 ‘예수님 존함으로’라고 해야 경어 원리상 옳다는 논리였다. 그때 필자는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름대로 느낀 점이 많았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신앙적인 바른 용어들을 의외로 잘 모를 뿐 아니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타 종교나 교리적인 언어들, 신앙적이지 않는 용어들을 아무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들이 아주 허다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떤 언어든지 그 생성의 근원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현상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우리는 고조선 이래로 단일 민족의 역사속에서 다 문화가 아닌 단일 문화권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사용 언어의 고착화는 옛날부터 되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언어문화는 우리나라의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의 종교적인 전통 속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필자는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고 분석해서 작은 소리나마 경종을 울려 보자는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필자의 작은 바램을 기독신문에서 정리하여 발표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여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III. 그동안 소회와 앞으로의 기고의 내용과 결론 ‘해아래 새것이 없다.’(전1:9)는 말씀 그대로 그동안의 졸고(拙稿)가 앞서 연구한 많은 선행연구들과 내용이 비슷하거나 반복되는 내용들도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졸고를 계속 연재했던 것은, 용어란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성하고 발전하는 생물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언어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그 부침(浮沈)을 계속하며 변화하기 마련이다. 특히 그동안의 기고에서 논하고자 했던 것은 주로 기독교 용어를 중심으로 하고, 기타 타 종교권 용어들을 비교 분석하려는 일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과 사용해도 무방한 용어들을 구별하고자 했다. 그 결과 각 종교의 역사성과 전문성에 따른 용어들의 새로운 발견과 차이점을 계속 발견하게 되는 성과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완전한 전문성이 없는 필자로서는 한계와 함께 내용의 오류도 있었을 것이라는 솔직한 소회가 들기도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 불태(百戰不殆)’란 말 그대로 타 종교권의 용어를 알고 구분함으로서 우리의 바른 믿음의 수호와 바른 용어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이에 필자는 이런 면으로 앞으로도 계속 나름대로의 사명감으로 연구하면서 기고를 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새 단장을 하는 자세로 그동안 중단했던 교회 내의 용어 분석과 올바른 사용에 대한 내용을 계속 기고하고자 한다. 아울러 변함없이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란 코너를 마련해 준 기독신문사와 계속 애독해 주신 모든 독자 제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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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그동안의 올바른 경어 사용 기고의 마침과 또 다른 생활용어 시작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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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신 목사, 신 과장
-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나는 커피를 몰랐다. 심지어 어릴 적 부모님은 시골에서 작은 다방을 운영하고 계셨다. ‘커피, 프림, 설탕’ 익숙했지만 전혀 마실 줄 몰랐다.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진다.” 부모님께서 어릴 적부터 암시를 걸어서 그랬을까? 커피라는 음료에 전혀 흥미를 갖지 못했다. 주변 목회자들이 고급스럽게 주전자를 들고 드립을 하든, 믹스커피 한 봉을 찢어 달달함을 즐기든. 내게는 어떤 욕구나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맛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은 물론 오히려 믹스커피의 텁텁함과 냄새가 싫어 멀리할 정도다. 하지만 내 나이 스물여덟, 군에서 경험한 믹스커피는 시편 23편의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이었다. 동전 몇 개만 넣어주면 쉼과 평안을 선물했다. 전임 사역은 군대만큼 고단했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제법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못난 성격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자꾸만 일이 내 눈앞에 나타났고 나는 끝장을 봐야만 했다. 군대에서 버릇이 또 나온다. 짧은 밤이 아쉬울 정도로 늘 할 일은 충만했고 야근은 일상이 되어간다. 어느 늦은 저녁, 퇴근하려 일어나 보니 책상에 쌓인 종이컵이 보인다. 믹스 커피의 흔적이다. 매일 4~5개 이상 쌓여야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난다. 어디서 이 장면 본 듯하다. 익숙하다. 오래전 부목사로 살아가던 선배들의 책상이 이랬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일에 찌든 중간 관리자들이 이런 모습이다. 과장의 책상은 늘 믹스커피 마시던 종이컵이 쌓여있다. 얼굴 한번 펴지 못하는 중소기업 간부도 그랬던 것 같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난 직급이 어느 정도일까? ‘부장?’ 제법 괜찮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어보다가 도리질을 한다. ‘과장.’ 그게 맞다. 부장은 너무 과하다. 하지만 ‘대리’까지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 개척하고도 여전히 내 책상 한구석에는 종이컵이 잔뜩 쌓여있다. 교회를 개척해서 담임이 되었으니 지금의 나는 사장일까? 과장과 부장을 오가던 그때 생각에 그냥 혼자 웃어본다. 그래, 어쩌면 생계를 두고 염려하며 고군분투하는 구멍가게 사장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창업하는 내 또래 사장님들보다 열정도, 기획력도 떨어지는 못난이일지도.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고는 급히 가방을 둘러메고 목양실을 빠져나온다. 여전히 내 손에는 따뜻한 믹스 한 잔이 나를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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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신 목사, 신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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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스톱(STOP)
- 남성들은 청소년 시절에 그런 경험을 대부분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담배를 한 번 해보라고 권유를 받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담배가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함께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담배를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어떤 친구들은 소신껏 담배를 거부합니다. 얼마든지 친구들을 따라서 담배를 피울 수 있지만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다니는 친구들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그것을 거부합니다. 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것과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것은 능력 부족이지만,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은 용기이며 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란 죄 된 것을 하지 못해서 안 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에 스톱할 줄 아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TV에서 동물농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입니다. 그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동물이 소개되는 데 특별히 개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어떤 개는 먹을 것을 코앞에 들이밀어도 주인이 ‘먹어’라고 말을 하기 전에는 절대 먹지 않습니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 먹을 것을 코앞에 두고도 먹지 않는 것은 보통의 훈련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개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그런 훈련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훈련해도 되지 않는 개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좋은 품종의 개냐 아니냐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동물은 그렇게 훈련을 통해서 스톱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스톱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넘어져서 죄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일컬어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윗에게는 무엇 무엇을 잘한 신앙적이고 정치적인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런 업적과 비견되는 업적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스톱의 업적이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여겼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는 성전을 건축하려는 간절한 열망도 있었고 또 그것을 건축할 능력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아들 솔로몬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두말하지 않고 스톱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자신은 아들이 그 일을 잘 하도록 준비해 주기만 했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귀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막으시는 것이야?”라고 항의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스톱했습니다. 아무리 내 뜻이 좋고 열망이 충천하고 능력이 있다 해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스톱할 줄 아는 다윗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과 신앙심이 별로 없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차이는 고우(Go)할 때보다 오히려 스톱(Stop)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얼마나 스톱을 잘 할 수 있느냐에 그 신앙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 힘든 것은 열심히 일을 하는 것보다 주일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눈앞에 돈이 보이기 때문에 중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내 노력이 결실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일주일 중 하루를 성경의 계명을 따라서 기꺼이 안식하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스톱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스톱하라고 할 때 스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신앙으로서 나의 노력과 능력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펄펄 뛰기만 하지 말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그만 스톱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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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스톱(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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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개식용 금지법과 인본주의속 애견문화
- 문헌이 많은 중국 역사 속에 개에 대한 고사(古史)가 많다. 한자에 개를 나타내는 두 글자가 있다. 狗(개 구)와 犬(개 견)이다. 狗와 犬의 개 표기에는 차이를 두고 쓰여졌다고 여러 문헌에 기록 돼 있다. 犬으로 표현되는 개는 사람과 친숙하고 사람에 충성하는 개로 표기 되고 있다. 충견(忠犬)이 있고 견마지로(犬馬之勞)라는 숙어가 있다. 狗로 표현되는 데는 주로 고기로 표현되는 양두구육(羊頭狗肉) 토사구팽(兎死狗烹)등의 숙어가 있다. 이를 두고 볼 때 狗의 개는 식용으로, 犬의 개는 평생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개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 또한 이 같은 설명을 하는 예 또한 있다. 어쨌든. 국민적 많은 논란가운데 있던 개 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 법제화됐다. 2027년부터 아마 우리나라에도 개고기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개고기에 대한 많은 논란과 담론이 있다. 찬반과 논쟁을 떠나 개와 개고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考察)을 해보면 개라는 동물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 식용금지에 대해 동물 애호가들은 대찬성이고 개고기를 즐기는 자들은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어느 때 이든지 문화적 차원에서도 대세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서양처럼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은 미개인이라는 딱지가 붙을만 하다. 그러나 개고기가 깊은 병환 후 또는 몸이 허약할 때 먹어본 사람은 그 약효가 대단하다고 하는 실례가 많다는 점도 있다. 필자가 칼럼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가 있다. 그동안 경제 발전과 함께 생활 문화 속에 애견(愛犬)문화가 너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한 집 건너 개를 키우는 애견 인구가 크게 늘었다. 개를 키워보면 사람과의 흐르는 정리가 너무 따뜻하고 아무 이해 없이 주인만 사랑하는 그 맛을 본 사람은 개가 그냥 좋다는 것이다. 실제 우울증 환자 또 홀로 사는 분들은 애견과 가족이 되는 것이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 또한 설명한다. 문제는 애견 문화 사회가 너무 지나쳐가고 있지 않나하는 우려 또한 있다. 우선 앞으로 개의 동물적 개체수가 과잉되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할 전망이 분명하다. 필자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교회를 섬기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공동체가 너무 애견문화에 편승 하는 것은 스스로 인본주의 문화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얼마 전 목회를 잘하시는 유명한 목사님과 대화에서 은혜 되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다. 그 목사님 가정에 애견을 키우는데 아침마다 목사님에게 사랑을 주는 눈길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눈을 맞추지 않고 교회로 출근하는데 아주 힘들다는 우스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는 교회공동체 교인들보다 눈앞에 개가 아른거려서 억지로 개를 무시하는 노력을 한다는 고백(?)을 했다. 교회공동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애견문화의 지나침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이웃 사람을 바라봐야하는 교회를 공격하는 인본주의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벌써 애견가정과 교인들을 위해 교회 내에 애견 센터를 시설하여 예배시간 애견들을 모시고와서 보호해주는 교인 마케팅 하는 교회 또한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애견 문화가 우상시되는 지나침이라고 본다. 교회는 경우가 합당한 정신과 믿음으로 세상 문화 트랜드를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펴고 싶다. 사람을 무한대 편하고 즐겁게 하기위해 홍수처럼 쏟아지는 다양한 문화들은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무작정 흘러들어오는 인본주의 문화들을 거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교회공동체, 잘 살펴봄이 필요한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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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개식용 금지법과 인본주의속 애견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