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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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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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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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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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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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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신재철 목사] 종교전쟁
    아파트에서 근무해 보니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학교 다닐 때 수업을 통해서 세계 종교를 배웠고, 타 종교를 두고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에 주로 머물던 내가 다른 신앙을 가진 분들을 실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파트에서 수개월 근무 해보니 알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입주민의 종교의 영역까지 알게 되었다. 「개신교」 개신교 신자는 가장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반갑게 인사 나누는 것? 그런 것 없다. 오히려 감추려는 듯 침묵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결코 숨길 수 없는 증거가 있다. 현관문에 붙여진 교패. ‘순복음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다양하기도 하다. 이분들에게는 관리소장이 목사라는 사실이 어느 누구보다 불편할 수 있겠다 싶다. 같은 편이라 생각했고 조금은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감도 컸다. 「천주교」 목사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다. 솔직히 가끔은 ‘오죽 못났으면 목사가 이런 일을 하나?’라는 눈빛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온화하고 예의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 삶에서 신앙인의 티를 안 낸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개신교 입장에서는 불편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신앙을 드러내며 얼마나 많은 욕을 먹고 있는가! 차라리 신앙을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는 신사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에서 더 인정받고 있다. 「재림교 (안식교)」 미국과 한국을 번갈아 오가며 사시는 멋진 노부부가 있다. 늘 자비로운 미소로 남에게 피해 주기를 꺼리는 분이다. 절대 타인에게 나쁜 말을 하지도 않는다. 1년 중 2개월 정도 한국에 들어와 쉬었다 가시는데 들어오시면 꼭 나를 불러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 아이들 쿠키, 커피, 초콜릿 등등. 커피 한 잔을 나누며 그동안 안부와 아파트 근황을 물어오신다. 교회를 다닐 것 같은 느낌인데. 하지만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종교에 관련된 질문이 없다. 목사인 관리소장이 불편해서 감추는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따로 초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차를 마시며 집안을 슬며시 살펴본다. 달력이 보인다. 가장 아래에 글자가 많다. 익숙한 느낌. 어느 교회를 다니시는 걸까? 오래된 인터폰의 상태를 살피는 척 가까이 다가가 달력을 본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이 멋진 노부부는 안식교인이었다. 「남묘호렌게쿄」 익숙지 않은 종교지만 주변에 신도가 생각보다 많다. 일본에서 창시된 불교인 것 같은데,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군에서 만난 간부 한 분이 이 종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묘한 주문 같은 것을 자주 외우고 요가 같은 독특한 자세를 종종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파트에도 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사람 좋아 보이는 노부부지만 일 처리가 정확하다. 관용적인 말로 허술해 보이지만 만만치 않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철저하게 신앙 생활하는 느낌이 난다. 그냥 그렇다. 더는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다양한 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다. 아파트 현관문에 누가 봐도 주술과 연관이 있는 물건을 걸어두고 협박 문구를 써 둔 사람도 있다. ‘이 물건을 가지고 가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처음에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나를 늘 괴롭게 하는 그 아주머니는 호텔을 경영한다고 하더니 주변 입주민들에게 들어보니 이름을 지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나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일까 걱정했다. 「여호와 증인」 늘 다정해 보이는 젊은 부부. 그들은 여호와 증인이다. 정확히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낡은 승합차를 타고 어딘가 봉사하러 자주 다닌다. 왕국회관이 가까워서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다는 이야기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교회 옆으로 이사 온 신앙.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늘 사람을 챙기는 친절함까지 갖추었다. 아파트 물난리가 난 날. 들어온 물과 폐기물을 치워야 했기에 기술보다는 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재난 상황을 혼자 수습할 수 없어서 입주민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며 주섬주섬 일하고 있을 때. 장갑에 양동이를 들고 이 부부가 나타난다. “목사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이 사람들은 나를 목사라고 부른다. 지나다 아파트 청소하는 나를 발견하면 간식거리를 사다주고 가는 사람들이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여호와증인, 당신들이 이겼다! “늘 고생 많으시죠?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승강기를 함께 타게 되었다. 인사치레일지 모를 말이지만 큰 위로가 된다. 내가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격려가 되었다. 고마웠던 마음을 한껏 담아 건넨 말. 추호도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잠시 어색하게 되었다. “역시! 이렇게 고생하는 사람 곁에는 알아주는 증인이 있어야 한다니깐!” 아, 증인에게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실례가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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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6-08
  • [황권철 목사] 사도행전 QT 설교
    존 맥스웰John Maxwell**목사는 보통 사람이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실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는 실수는 항상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공은 항상 똑똑하고 재능 있는 자에게만 온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를 실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수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수는 배움의 기회이다. 만약 당신이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런 방법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은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할 때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대가를 치르는 부담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화의 속도가 빠른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인생은 살아남기 어려운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므로 능동적으로 앞서서 변화의 물결을 타고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성공은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열정을 가진 소유자에게 온다는 사실이다. 본서는 본래 누가복음 상 하권 식으로 연결된 한권의 책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전후로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에 각각 사복음서의 하나와 예수 부활 이후 사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AD 2세기 이후에 분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 하나는 성경의 내적 증거이다. 누가가 먼저 쓴 누가복음과 본서인 사도행전의 문체나 어휘나 구조가 너무도 일치하는 점이 많다. 누가는 의사로서 본서에 헬라의 의학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 것을 보아 누가가 기록한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행의 동반자로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교부들과 역사가들의 외적증거이다.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이나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 오리겐, 역사가 유세비우스 등이 다 누가의 저작으로 인정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목적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케리그마적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서 증거 됨을 알리기 위함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친히 증거 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세워 교회가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차적 목적은 복음 전하는데 있다. 교회가 복음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든가 하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둘째, 변증법적 목적이다. 기독교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임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변증이 필요하다. 하나는 유대인에게 기독교 복음은 반 율법적이 아니라 율법의 계승자임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씨로 온 것임을 알린다. 다른 하나는 이방종교에 대해 기독교만이 참 종교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셋째, 화해의 목적이다. 사도행전은 두 부분으로 나눈다. 전반부 1-12장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베드로의 복음전파이고, 후반부 13-28장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바울 사도의 복음전파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Ⅰ. 성령세례를 받으라(1-5절) 누가는 ‘먼저 쓴 글’을 간단히 요약함으로 누가복음과 본서의 관련성을 상기시킨다. 또한 부활하신 주께서 실제로 나타나신 모습과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 그리고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들을 통해 본서의 전체적인 진행을 예상케 한다. 특히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사역이 성령 받은 사도들의 증인 역할을 통해 계속될 것임을 명시한다. 이처럼 본문에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약속이 명시 되어 있는 바 이 약속은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으니,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문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뿔뿔이 흩어지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복된 소식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약속함으로 요한의 물세례와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를 씨는 외적인 의식인 반면, 예수의 성령 세례는 내적으로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런 사실은 다음 장에 나타날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증명되었다.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요 3:5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통해 완전히 변화되어 완악한 심령들을 회개시키는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먼저 데오빌로를 찾으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는 바울의 사랑 받는 제자이자 동역자이다. 사도행전의 수신자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였다. 그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로마의 고급관리로 보는 견해가 많다. 오늘날 누가와 같이 먼저 복음을 받은 우리는 이 땅에 숨겨진 데오빌로를 찾는 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많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 전도는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을 말한다. 거기서는 “데오빌로 각하에게”라고 하셨는데 지금 쓰고 있는 사도행전에서는 “데오빌로여”라고 했다. 앞에서는 공적인 직함을 사용했으나 뒤에서는 사적인 호칭을 사용하심을 보아 그 동안 많은 교류와 지속적인 관심과 사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의사로써 자신이 받은 달란트로 봉사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가진 것으로 섬기기를 원하신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용한 지팡이로, 다윗은 물맷돌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었던 한 여인은 옥합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다. 고난 받은 후에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그가 고난 받은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 6-9시까지 어두움이 임했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그리고 예루살렘 변방에 있는 성도들의 무덤이 열렸다. 옛 한글개역성경에는 “해 받으신 후”로 번역했으나 이는 고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를 선지자들의 입을 의탁하사 이루셨다. “고난 받으실 것”을 이미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서 약속하셨다. 해 받으신 이후에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친히 보여 주셨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이 부활신앙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분기점이 해 받으심을 전후한 사건이다. 해 받으시기 전은 복음서 적이며, 해 받으신 이후는 사도행전 적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데는 해 받으심이란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있다. 그래서 누가의 스승 바울은 해 받으심인 십자가가 복음 전파의 핵심임을 가르쳤다. 사도와 같이 모이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면 지금 사도가 있는가? 주님을 따라 다니던 12사도는 2천 년 전에 부름 받아 천국으로 갔다. 그러나 지금도 그 사도들과 같이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도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우리들 중에 있다. 그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이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해 온 믿음의 종들이 오늘날도 있다. 이렇게 세움을 받은 사명 있는 종들과 같이 모여야 한다. 우리는 이들과 뜻을 같이해야 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왜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 되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곳에서 성령을 받기까지 머물러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을 허리에 메고는 길쌈을 할 수가 없음 같이 성령 받지 않고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이 곧 기도이다.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 정도 되었다. 이 무리는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건 갈릴리에서 감람산까지 온 자들이다.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다. 그 후에 약속한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지 않고 감람산에서 마가 다락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무엇 때문에 약속한 성령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10일 가까이 기도했다. 그 동안 가정의 남편이나 자녀들 걱정 혹은 직장이나 생업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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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3-06-08
  • [양대식 목사] 리더의 덕목에 대하여(1)
    사랑 리더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사랑이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리더십이 제대로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관계 리더십을 가진 자이십니다. 사랑은 관계 리더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이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예수님의 긍휼, 자비,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사랑이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행동하는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으로 행하신 관계 리더십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좋아하고 사랑 받으면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 같은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큰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사랑하고 사랑이 많은 자가 좋은 리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을 실천하면 관계가 잘 되고 관계 리더십이 잘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싶으나 잘 못합니다.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고 남의 허물을 덮어 줍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게 됩니다. 리더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고 사랑을 실천할 때 관계 리더십이 세워지게 됩니다. 좋은 습관 습관이 중요합니다. 좋은 리더는 좋은 습관을 가진 자입니다. 오늘의 나의 모습은 과거의 습관의 결과입니다. 좋은 습관은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성공으로 인도합니다. 나쁜 습관을 가지면 리더가 될 수 없고 삶을 실패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다니엘도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남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게으름도 습관입니다. 게으른 자는 망하게 됩니다. 부지런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리더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한 자가 성공합니다 말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긍정의 말, 감사하는 말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습관이 리더와 사람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이 어떠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시간에 늦게 도착하고 약속을 어기는 것도 습관입니다. 나쁜 습관을 가진 자는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변명하는 것, 남 탓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리더의 지혜입니다. 독서하는 습관, 글 쓰는 습관, 성경 읽고 기도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입니다. 미리 강의준비, 설교 준비하는 습관을 가지면 여유가 있게 됩니다. 격려, 칭찬, 섬기고, 선물주고, 대접하는 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선물 주는 것도 습관입니다. 운동이 습관이 되면 힘들지 않고 건강에 유익합니다. 습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는 좋은 습관을 발전시키고 나쁜 습관은 정리해 나가는 자입니다. 새벽기도가 습관이 되면 짐이 되지 않고 즐겁습니다. 지혜자는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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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3-06-08
  • [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5)(창23:1)
    남편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온 지 10년 세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정도 기다렸으면 하나님께서 무슨 답이라도 주실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라에게 주어진 답은 첩이었습니다. (창16: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였더라 세상천지에 자신의 남편에게 첩을 요구하는 여자가 있을까요? 여자로서는 불가능의 마지노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사명 때문에 사라는 여자로서 불가능한 그 마지노선까지 넘게 됩니다. (창16: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여자의 후손”, 아들에 대한 사명은 사실 사라에게도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열어 아들을 보게 하여 메시아를 대망하도록 하는 것이 수순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디에도 사라의 원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거부하는 남편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근거로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믿음의 길,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사라 할머니의 가슴 시리고 너무도 아플 것 같은 마음에 머리가 어지럽고 먹먹해집니다. 10년을 기다린 사라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남편의 사명을 위하여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사라가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넣어주자마자 하갈은 임신을 합니다. 거기에다가 꼴값을 떤다고 하갈은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사라를 멸시합니다. (창16: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첩과 첩의 자식을 통해 멸시를 받고 살았던 믿음의 세월 14년,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세월이 14년입니다. (창16: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그냥 14년의 세월도 만만치 않은데, 성경에서 14라는 숫자는 완전(7)의 갑절(2)을 뜻합니다. 완전의 갑절을 뜻하는 세월 14가 삼 세 번 반복되어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됩니다. (마1: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이렇게 볼 때, 42(14*3)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의 영적 세월을 나타내며, 믿음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하2:23-24)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선지자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던 42명의 아이들이 암콤 두 마리로부터 찢겨 지는 장면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지나 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계승하여 완성된 메시아의 사역, 42라는 교회의 역사를 살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찢어 죽임을 당하는 아이가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성경은 사라가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표현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이삭을 가지기까지 세월을 1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은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남편과 함께 65세에 부름을 받아, 75세까지 남편과 함께 가나안 땅에 10년을 거하게 되고, 10년이 지나도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남편에게 첩을 넣어주는 결단을 하고, 그렇게 해서 14년의 세월이 지나 아들 이삭을 잉태하게 된 사라...... 이런 세월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 사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3:1)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왜 성경은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사라가 죽은 햇수를 기록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구원의 도리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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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6-08
  • [박동철 장로] 복음실천 강한명령 받는 집회였다
    어게인 1973년. 50년 전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지난 6월 3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다. 그동안 우리들의 귀에 많이 들어온 여의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1973년 5월30일부터 6월3일까지 5일간 320만 명이 전국에서 여의도 광장에 모여 한국 기독교 부흥의 대역사를 썼다. 필자는 당시 고교를 갓 졸업했고 교회를 한두번 가봤으나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때 뉴스를 접해도 실감을 못했다. 당시 고1 학생으로 참석했던 아내 덕에 당시의 뜨거웠던 부흥의 함성을 자주 듣곤 했다. 그동안 은혜로 크리스챤이 되고 교회 중직자가 되고 창원극동방송 운영위원으로 섬기면서 당시 통역으로 유명했던 김장환 목사님도 만나면서 당시 장면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50년, 한국기독교가 세계 속의 기독교 부흥 국가로 발전했다. 이 뿐이랴. 한국교회는 자부한다. 1973년의 여의도 기도 함성이 교회의 부흥과 함께 대한민국을 축복의 나라로 이끌었다. 50년 전 당시 여의도 광장은 먼지가 흩날리는 맨땅이었다. 아무 편의 시설 없이 매일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던 것은 기적이었다고 당시 참석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후 급속도로 대형 교회가 곳곳에 서게 되고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다음세대의 선교를 이끈 CCC(대학생선교회) 맴버들의 눈물겨운 봉사활동을 필자는 많이 들은바 있다. 그리고 이후 CBMC(한국기독교실업인회)역시 여의도 집회 봉사자들이 많이 주축이 되어 조직 발전, 지금도 선교봉사활동이 왕성하다. 50년이 지난 이날 경남에서도 수십 대의 대형버스가 줄지어 서울로 향했다. 필자는 우선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은혜를 받고자 부푼 마음으로 동행했다. 집회장은 축구 경기장이지만 은혜의 찬양이 행사 초입부터 가득 차 넘쳤다. 영상에 대비되는 당시 현장의 그림과 이 시간 펼쳐지고 있는 집회 현장은 많은 회한을 그려냈다.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그때 그 현장에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많이 몰렸을까. 그리고 우리는 50년간 어떻게 살았는가. 저마다 대비되는 그림만 보고도 숙연해지고 눈물이 났다.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울리는 특별찬양의 가사가 모든 사람들의 심령을 울렸다. 이날 이현장에 사람들은 기껏 7만여 명, 1만 명 찬양단이 경의롭지만 50년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초청강사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강사의 설파는 처음부터 복음이었다. 우리의 한 생명은 온 세상 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강사의 설교에서 머리를 때리고 잡힌 것이 있었다. 50년 전 아버지 빌리 그래함의 설교 또한 오직 복음이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당시 설교 녹음을 다시 들어 보면 같은 말, 같은 뜻이었다. 집회를 마쳐가는 중 가슴을 때리는 기도 제목이 있었다. 말미에 함께 올리는 통성기도회 시간 강조된 “한국교회 촛대를 주님 옮기지 마옵소서” 우리는 뜨겁게 기도했다. 1000만 한국 기독교는 지금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가. 가끔 이러한 생각이 든다. 축복의 산물 물질 풍요의 시대, 우리는 사명의 영성을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 임재의 바로미터 정결 성결의 영성이 흩날리고 있는지 눈물 흘리며 돌아보아야 한다. 이제 동성애 합법화, 마약천국, 이단미신의 미화 그리고 공산사회주의의 이념 혼돈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변함없는 복음을 말로만 하지 말고 간절함의 순종과 행함의 주님 도움의 손길을 만나야 할 때임을 느끼게 하는 귀한 집회였다. 복음을 행하라는 강한 울림을 강하게 내리꽂는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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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7
  • [박병지 목사] 그린청지기로 살라(창 1:26-31)
    지구는 지금 무서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폭염과 가뭄, 홍수와 태풍 등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을 한 순간에 죽음과 고통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지구촌 곳곳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구온난화에 대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온도가 섭씨 1.1도 상승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만약 섭씨 1.5도로 상승하면 생물종의 10%가 사라지고 섭씨 3도 이상 오르면 40-70%가 멸종된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지구 온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전 세계 195개국이 이산화탄소 감축노력이 시급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난 3월 19일에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열린 총회에서 기후 위기의 시급성을 강조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 종합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IPCC는 “온난화를 제한하려면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이 탄소제로가 되어야 한다. 2030년까지 전 세계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적어도 45%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제로 선언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데 따라 유럽국가들을 필두로 많은 나라들, 우리나라도 이미 2050년까지 탄소제로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화석연료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할 경우 예상되는 이산화탄소 잠재 배출량은 5년 내에 깨질 확률을 98%, '1.5도 마지노선'이 뚫릴 확률을 66%로 분석했습니다. 10년안에 그냥 이대로 노력하지 않으면 1,5도가 아니라 섭씨 5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원래 온실가스 누적배출량을 살펴보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 대부분이 선진국입니다. 그리고 최근 개발도상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크게 증가하면서 지구온난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된다면 상상하시는 것, 그 이상 더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지구온난화 피해 사례에 이야기하면, 1. 녹고 있는 빙하와 만년설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상승하게 됩니다. 현재 그린란드와 남극에 있는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며 급격한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린란드에 위치한 빙하가 다 녹아 사라지게 된다면 전 세계에 있는 해수면이 급속하게 상승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섬나라들은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국토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0년안에 인천공항과 김포공항, 부산 같은 낮은 곳이 다 바닷물에 잠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남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 "투발루"는 벌써 국토 전체가 물에 잠기고 있어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2. 질병의 증가 북극권 지역에 포함되는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등의 지역의 빙하의 땅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지표면의 균열로 산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땅밑에 있던 시신들이 올라오면 거기에 감추어 있던 바이러스, 병원균, 세균 들이 새롭게 퍼지게 된다는 합니다. 실제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난 30년 동안 30가지 이상의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코로나도 그 가운데 한 종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온갖 자연 재해가 증가 가뭄과 폭염, 폭우와 홍수, 폭풍과 해일, 산불입니다. 예를 들면 영상 50도로 넘어서는 뜨거운 폭염, 작년에 인도를 비롯한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또 미국의 테네시주의 멤피스는 영하 54도까지 급강하했습니다. 중국 역시 작년에 영하 50도로 내려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추위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기후변화로 인해 세계곳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해 파키스탄은 홍수로 나라의 3분의1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작년에 기록적 폭우로 인해 서울 뿐 만 아니라 전국 곳곳이 물에 잠겨 고통을 겪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역시 매년 홍수피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8월 여름에 패딩을 입을 정도로 춥고 10월에는 여름처럼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전체면적의 27%가 이미 사막화되었고 매년 서울시 면적의 3배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이 사막화되고 있습니다. 내몽고지역의 마을들은 10년 전만해도 푸른 산과 초원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지금은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사막지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우리나라도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황사로 인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로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 정도로 공기오염이 심각하게 빈도가 늘어나고 그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이 황사는 온갖 오염물질을 몰고 와 오늘 우리의 생활환경과 건강에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4. 오존층 파괴 지표면에서 상공 10-50km에 있는 성층권에는 오존(O₃)기체가 있습니다. 이 오존층은 태양빛 안에 있는 자외선을 흡수하여 지표면에 있는 생물들을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냉장고나 에어컨 등에 사용되는 냉매용 기체인 프레온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면 지표면에 도달하는 자외선이 늘어나고, 이 자외선이 각종 생물의 세포를 파괴합니다. 자외선을 쏘인 생물체는 세포가 파괴되어서 죽거나, 기형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피부에 검버섯이 생기고, 피부암, 백혈병, 백내장 등의 질병을 일으킵니다. 오존층이 1% 감소되면 자외선이 2% 증가하고 피부암은 5-6%가 증가하여 전 세계적으로는 환자가 약 20만명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식물에도 악영향을 주어서 오존층이 감소하면 수확량이 감소하고 수확물의 질도 떨어집니다. 이처럼 지구온난화는 뜨거운 재앙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그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놓고 말게 될 것입니다. 아니 사람뿐 아니라 그 어떤 생물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파괴하는 커다란 범죄인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에 계속 반복되는 말씀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신 세계를 보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빛도 아름다웠고 땅도 바다도 아침과 저녁도 아름다웠습니다. 지으신 모든 식물과 자연들이 보기에 심히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모든 피조된 세계를 맡기시고 돌보게 하셨습니다. 창1: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잘 다스려라 잘 보살피고 돌보아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관리하고 보전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맡은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즉 자신을 주인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맡은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게으름입니다. 세상과 자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선악과는 바로 그의 상징이었습니다. 다 먹어도 이것만은 절대 먹지 말아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먹고 주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청지기임을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는 현재 진행중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아마존의 그 울창했던 열대우림들이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지구는 급속하게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일찍이 보았던 세상의 재난이 오늘 우리 앞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렘 4:23-25) 무슨 말씀입니까? 땅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산성화가 가속되었습니다. 무분별한 개간으로 수많은 밀림들이 사라지고 또한 제초제와 농약으로 땅은 병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땅에서 생산되는 식물들도 믿고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꽤 오랜 옛날같습니다. 별들이 점점 사라지고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공해물질로 오존층은 파괴되었고 대기오염은 심각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산들은 잘려 나가고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철따라 찾아오던 새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들, 강과 바다, 어디가나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이미 오래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미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자연의 그린청지기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내가 주인되어 내 욕심을 따라 생각없이 살아왔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자기 사랑입니다. 딤후 3:1 이하에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 교만, 죄성이 우리가운데는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내가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맡겨주신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는 그린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린 청지기는 지구를 지켜야 합니다.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린청지기입니다. *당신은 그린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지구의 열을 내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충성된 그린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열이 올라 몸살하고 있는 지구를 식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그린 청지기로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생활 속에서 이산화탄소라고 하는 CO2다이어트입니다. CO2는 에너지를 사용할 때 나오는 찌꺼기를 말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편리하게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에는 CO2가 배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CO2는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주범입니다. 그러기에 지구를 식히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CO2의 양을 줄여야 합니다. 생활 속 CO2다이어트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쓰지 않는 가전기기는 꼭 플러그를 빼놓습니다. 냉난방을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쓸데없이 불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고 방을 쓰고 나갈 때는 꼭 불을 끄고 냉난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을 적게 쓰면 그만큼 CO2를 줄일 수 있습니다. 수돗물을 만들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전력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도록 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는 것입니다. 수입하는 수송연료를 줄일 수 있고 환경제품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환경마크가 부착된 물건을 사용하고 포장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나무를 많이 심고 돌보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는 하루 4키로그램, 연간 1톤의 CO2를 흡수한다고 합니다. 일회용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고 쓰레기를 버릴 때는 반드시 재활용할 수 있도록 분리수거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잘 돌보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린청지기들입니다. 충성된 그린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구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에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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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오성한 목사] 기름 부음(1)
    우리는 앞의 글에서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이 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가 한 번 체험하고 기분 좋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시적인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구속을 이루기 위함이다.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다. 구원을 누구를 통해 이루는가? 예수님을 통해 이룬다. 구원은 복합적이다. 겨우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천국 가서 앞으로 누릴 것만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천국 가는 것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믿는 자의 권세를 누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왔다 가심으로 구원은 이루어 졌다. 구원이 천국 가서 누리는 것일까, 지금 누리는 것일까? 지금 누리는 것이다. 성경의 약속은 앞으로 우리가 죽어서 천국가면 누리는 축복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죽는 것이 복일 것이다. 구원은 이 땅에서도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성령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속 사역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이미 완성시켜 놓은 구속의 회복을 드러내시는 사역을 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기름 부음이라는 말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능력을 우리 속에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예수 믿는 일이다. 예수 믿는 일이 우리 힘으로 안 된다.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는 일은 생명을 주셔야 살아 날 수 있다. 사람이 생명을 만들 수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머리를 잡아당긴다고 나와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물에 빠진 자를 주님은 건지러 오셨다. 성령님은 가르쳐 깨닫게 하시고 생각을 바꾸시러 오셨다(요14:26).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자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말씀했다. 내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과 성경을 볼 때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구나"하고 믿어지는 것은 내 힘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 안에는 이미 기름 부음이 있다. 간절히 성령의 도우심을 믿으며 말씀을 본다면 기름 부음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라고 하신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는데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자가 없다는 말이다. 성령께서만이 가르치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말씀이다. 기름 부음으로만이 진리를 가르쳐 내신다는 말씀이다. 영적인 세계는 아무도 가르칠 자가 없다. 예수님의 말이 영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집중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라고 하셨다. 또 성령님은 기름 부음으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라고 하셨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을 의지하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라. “성령님, 오늘도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성령님, 오늘도 생각나게 하셔서 사역하심을 감사드립니다.”라고 자는 자주 고백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생각을 주심을 믿고 산다. 성령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다. 믿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없다. 또 예수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들을 우리가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예수님께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예수가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기적이다.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이 믿어지냐는 말이다. 말씀으로 천지 창조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다. 홍해가 갈라져 물이 쌓였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의심이 없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서열의 기름 부음이 있다.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엡1:19).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믿어지겠는가? 그러니 예수 믿어지는 것은 놀라운 기적 중의 기적이다.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면 당신에겐 성령의 기름 부음이 말씀대로 거한다. 그 기름 부음이 오늘도 당신을 가르치심을 믿어라. 당신은 좋은 스승을 둔 제자다. 자부심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사역이다. 말씀과 기도로 많이 깨닫게 해 주심을 받아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일은 성령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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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5
  • [오태열 목사] 우리의 도피처
    도피처란 도망하여 몸을 피하는 곳으로 매우 부정적인 말이다. 실제 도피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연관 검색어로 “비열한, 소심한”이 뜬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도피는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앞만 보고 나가야 하는 사회 속에서 잠깐 멈추어서는 것조차 부담이 되어버린 현실이 씁쓸하다. 삶 속의 스트레스가 극심해질 때마다 우리에게도 도피처가 필요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피시방, 노래방, 술집, 산을 도피처로 삼지만, 도서관이나 서점을 도피처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점 자체의 고요함과 따뜻한 분위기가 감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경선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 집에서 “카페”라는 공간을 정의하기를 불필요한 마음의 짐을 들고, 머릿속을 비워내고,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로움의 힘을 얻어가는 곳이라 하였다. 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쉬어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일상 속 혼자 조용히 있을 곳이라면 도피처로 족하리라 생각된다. 도피는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태종 이방원이 싫어 깊은 산속에 들어간 생육신들과 같은 현실 도피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피처는 절대 소심하고 비겁한 자들이 찾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곳, 불안해진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라야 한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부지중에 실수하여 사람을 죽인 과실 치사범의 생명을 보존시켜 주시고자 도피성 제도를 두게 하였다. 도피성이란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라는 말로써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인데 살인한 사람을 받아들여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준 없이 살인자를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비고의적인 살인자 곧 과실 치사 자의 경우에만 해당 되었다. 이 도피성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3개가 있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누구든지 사고가 나면 도피성으로 빠르게 도망할 수 있도록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고 길도 넓게 잘 정비하여 두었다. 도피성에는 유대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속에 거류하는 거류민과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의 포괄성”을 의미한다. 구원은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연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었다. 내게도 도피처가 있다. 고향의 바다이다. 목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든 선택을 해야 할 때와 심한 고독이 나를 짓 누를 때에는 고향의 바다를 찾는다. 이곳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며 기도의 처소였다. 바닷가를 거닐며 상념에 잠길 때,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고향의 바다는 삶에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포근히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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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5
  • [박봉석 목사] 세상에 묻지 않는 기도
    한 증기선이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섬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는데 바다에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서 배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승객이 선장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이었습니다. “선장님, 저는 토요일 오후까지 퀘벡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 그 곳에 배가 도착할 수 있을까요?” 선장은 단호한 어투로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을 들은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말 불가능한가요?” 그 물음에 선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도리가 없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선장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난데없이 기도를 말하자 뮬러 목사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 지 안 보이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슨 기도를 한다 말입니까?” 그 선장에 말에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 그렇게 말을 하고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뜻에 합당하다면 이 안개를 5분 내에 걷어주십시오. 퀘백에서의 약속을 하나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그는 그 불가능하다 하는 상황에서도 담대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교회의 집회를 위해 퀘백으로 가는 중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그렇게 놀랍게 응답하시고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필자는 기도하면 무조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뮬러 목사님의 기도는 세상에 묻지 않는 기도였습니다. 즉 세상의 상황에 구애 받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상황을 초월하여서 오직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만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늘 기도하는 여러분, 기도하면서 세상에 묻지 마십시오. 내가 기도하는 제목이 꼭 기도해야 할 제목이라는 확신이 들면 세상의 모든 불가능성을 초월하여서 기도하십시오. 6·25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한 한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장로님 마을에 북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중학생이던 장로님은 잡히면 의용군에 끌려갈 것이니 급히 낟가리 속에 숨었습니다. 북한군은 집집마다 뒤지며 젊은이들을 끌어냈고, 장로님이 숨어있던 낟가리를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칼끝이 가슴 바로 앞까지 오기도 했습니다만 장로님을 찌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시지 않으면 죽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떠나지 않고 며칠 동안 그 집에 머무는 바람에 낟가리에서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중학생 나이인지라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러다 문득 하늘을 보니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장로님은 문득 교회에서 배운 성경에 나오는 한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까마귀가 음식을 물어다 준 것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장로님은 지금 세상에도 그런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머뭇거리지 않고 그 즉시 기도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아버지, 엘리야를 먹이신 것처럼 제게도 먹을 것을 좀 주세요.”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까마귀가 아니라 마당에 있던 암탉이 갑자기 낟가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낟가리 안에다가 알을 낳는 것입니다. 따끈따끈한 생달걀이었습니다. 장로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 너무 신기해서 그 달걀을 먹으며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암탉이 또 여기다가 알을 낳게 해주세요.”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북한군이 있는 동안 암탉은 매일 아침 낟가리로 들어와서는 신선한 달걀을 낳고 가는 것입니다. 북한군이 떠나자 장로님은 숨어있던 낟가리에서 나왔고, 그렇게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 평생의 간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는 세상에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세상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불가능성을 넘어서 얼마든지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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