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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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밀알교회)

 헤롯당원의 과오

 

다음으로 13-17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님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를 책망하신 사건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 중에서 사람 몇을 보내어 예수를 시험하고자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주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은 참되시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분이시다고 아부를 하고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이것은 그들이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가하다고 하면 매국노로 몰아붙일 것이고, 불가하다고 하면 범법자로 고발할 생각이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고 누구의 화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지를 물으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중심을 먼저 헤아리고 계셨다.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외식하는 그들을 보시고 계셨다. 입술로 주님을 칭찬하나 그 속에는 무서운 독사의 독을 품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생은 누구인가? 첫째, 주님을 시험하는 인생이다. 주님은 시험받을 인생이 아니라 친히 시험할 창조자요 구원자이다. 아브라함과 롯을 시험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험받을 존재가 아니다. 둘째, 주님은 시험할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다. 사단이 주님을 시험할 때 주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했다. 셋째, 주님은 찬양의 대상이다. 시편 기자처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하는 심정으로 감사했다.

 

 

사두개인들의 과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주님에게 가서 완전히 참패를 당했다. 이런 소문을 듣고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찾아갔다. 이들은 부활과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는 현실주의자로서 요즘 같으면 철저히 자유주의적인 세속주의자들이다. 그들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로 단번에 주님을 ‘TKO’ 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어떤 분에게 일곱 형제가 있는데 그 장남이 결혼을 하여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래서 모세가 가르친 계대 결혼법대로 그 둘째가 형수를 취했는데 그 역시 자식을 얻지 못하고 죽었고, 그리하여 일곱 형제가 다 그 형수를 아내로 취한 바 되었다. 그 후에 그 아내도 죽었다. 당신들의 말처럼 천국이 있다고 하면 이 여인이 천국에 가서 칠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로 살 것인가 라고 물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우리가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사두개인들처럼 어리석게 행동 할 때가 많다. 그러면 왜 이런 과오를 범하는가? 첫째,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경우이다. 성경은 인간의 지각으로 풀려고 하면 안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게 된다. 둘째, 게을러서 읽고, 듣지를 못해서이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해야 한다. 욥처럼 육신의 건강을 위한 일용할 음식보다 영혼의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먹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연약성 때문이다. 우리가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게을러서 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연약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세상이 악하고 우리가 연약함으로 넘어진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시편 기자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서기관들의 과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까지 주님에게 와서 완패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율법에 능한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가서 결판할 생각을 하고 율법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다. 율법은 당시 상황에 따라 그 경중과 우선순위를 달리 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었기에 어느 계명을 지적하면 거기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으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계명에 우선되는 것은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은 행위로 나타나기 이전에 그 속에 숨은 정신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거나 그 앞에 절하거나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일을 하거나 그의 날을 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공경하게 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의 생명을 해할 수 없고, 그들의 육체를 더럽힐 수 없고, 이웃의 물건을 도적질 할 수 없고, 이웃에 대하여 거짓되게 중상 모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율법의 강령이요, 가장 우선되고, 큰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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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인생의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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