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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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고신교회)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2)(창23:1)

 

하나님께서는 아내에 대한 역할을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창2: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 사실도 단순히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성경은 어쩌면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짝사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모르고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마냥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틈만 나면 자신이 편할 것 같은 세상의 음부를 향해 도망을 쳤습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출20: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34:14)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다윗이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왕국이 파멸에 이르는데 다윗의 책임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편애하시는 듯합니다.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심판을 즐겨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목을 매는 것처럼 보일까요?

 

창조 이후로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으셨던 말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시18: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아마도 사랑에 굶주리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사랑 고백에 완전히 무너지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고 하십니다. 아담에게 과연 돕는 배필이 필요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아담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요? 이런 말씀 역시 윤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남녀차별이라는 이상한 주장도 하게 됩니다.

 

(창2:24-25)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완전한 남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떠나 그의 아내인 교회와 합하여 한 몸 이루어 구원이 완성될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러니 “돕는 배필”이란 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여인 사라는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잘 순종하여 남편 아브라함에게 훌륭한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창17:10-11)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속했다는 징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증과도 같았습니다.

 

남편을 비롯해서 집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드러누워 고통스러운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해괴망측한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피범벅이 되어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며 며칠이고 꼼짝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난 지 8일 된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니 그 갓난아이의 고통과 울음과 신음 소리는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뒤치다꺼리는 누구의 몫이겠습니까?

 

성경은 참 재미있게도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후 사라의 이름을 바꾸어주십니다.

 

(창17: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할례 언약의 당사자는 남편 아브라함이지만 그 언약을 집행함에 있어 실제로 수고와 헌신과 순종은 누구의 몫입니까? 할례 하나만 보아도 돕는 배필의 사명은 절대적입니다. 할례는 구원의 증표입니다. 남편과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 구원을 향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향하여 한결같이 순종했던 사라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았던 사라에게 손자의 손자는커녕 손자 정도는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자가 아니라면 며느리라도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만 하지 않아도 안타까움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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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2) (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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