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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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I. 서언(序言)

 

최근 신실한 교인이며, 대권 주자로 부각되는 어떤 유명인사의 부친상에서 삼우제(三虞祭)란 용어가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적 장례 용어로 적합한가를 잠시 생각한 적이 있다. 문제 있는 용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는 성경에 나오는 장묘문화와 용어 정립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면서 이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서 몇 차례 밝힌 대로 여기에 대한 신학적 정립은 한계가 있다. 이에 지난 호부터 저명한 구약학 교수이며 장로회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을 축약해서 연재했고, 앞으로도 몇 차례 계속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시대에 따른 성경의 장묘문화 고찰(2)


김 교수는 인류의 시대적 구분에서 이스라엘의 장례의 역사를 이렇게 나누었다. 먼저 지난 호에서 언급한 1, 2항을 다시 논하고, 계속 3항 이하를 축약하거나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매장은 옆으로 웅크린 자세와 두개골만 하기도 했고,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경우는 가공된 장신구들도 함께였고, 모든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기도 했다.

3. 신석기 시대(주전 8,300-4,500 년경): 고인돌(dolmen) 무덤 양식이 출현한다. 또 여리고 지역에서는 가옥의 터 아래에 유골들을 매장했다.

4. 동석기 시대(주전 4,500-3,100 년경): 팔레스틴 해안지역에 새로운 장묘문화가 생겨났는데, 토기로 가옥을 본떠 만든 뼈 상자에 유골을 담아 사암(砂巖)벽을 판 동굴에 보관했다. 또 큰 옹기에 시신을 넣어 가옥의 터 밑에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5.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100-2,200 년경): 무덤이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졌는데, 주로 석회암 층에 수직갱도를 만들고 다시 옆으로 원형 또는 사각형의 묘실에 이르는 구조를 보여준다. 부장품으로 다양한 토기그릇들이 있고, 그릇에는 음식물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다.

6.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2200-1550 년경): 여러 형태의 무덤 양식들이 있다. 초기 청동기 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묘실을 만들고, 시신은 돗자리 같은 깔개나 나무 판자위에 반듯이 뉘었다. 비녀나 머리핀들이 발견되며, 다양한 일상적 도구들도 볼 수 있다. 또 바위를 직접 파서 묘실을 만들기도 했다. 보통 한 무덤에 40구까지 사용했으며, 매장할 자리가 없으면, 이전의 시신 유골은 한쪽으로 모아 쌓아 두기도 했다. 이 시대의 특이한 것은 봉분을 갖춘 무덤양식도 나타났다. 시신을 매장한 뒤 흙과 돌로써 높이와 지름이 각각 3-4m 되는 봉분을 쌓았고, 다수의 토기들과 무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7.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 1,200 년경): 수직 또는 경사진 계단식 갱도를 입구로 하여 묘실로 연결되는 무덤양식이 보편화되었다. 하나의 묘실은 계속해서 사용되었고, 많은 토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8. 철기시대(주전 1,200-600년경): 과거에 사용되던 자연 또는 인조 동혈이나 석실묘가 재사용되었다. 이 시대의 새로운 발전은 여러 개의 방을 갖춘 묘실로서, 지상에서 지하로 계단을 만들어 전실(前室)에 이르고 여기서 여러 묘실들로 연결된다. 묘실은 그 벽면의 둘레에 유해를 안치하는 대(臺)를 만들었고, 어떤 묘실에는 대 대신 벽을 파서 그곳에 유해를 안치했다. 이러한 석실묘 형태가 제2 성전시대 가장 일반적인 무덤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 평민들은 석실묘를 사용하지 못하고, 평토장을 했다고 본다.

9. 바벨론 포로기, 페르시아, 헬라, 로마 시대(주전 600-주후 70년경):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고, 부장품들을 통해서 그 시대를 알 수 있다. 주전 3세기 헬라시대 부터는 카타콤(the catacomb)방식의 무덤형태가 새로 나타나며, 여기에는 무덤비문과 벽화 장식도 등장한다. 로마시대 이후 예루살렘 주변 무덤들에서는 석회암으로 만든 수많은 직육면체 유골함들이 드러났으며, 이것은 유해의 살이 다 내린 다음 유골을 수습하여 보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피장자의 이름과 함께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 무늬가 새겨져 있다.

 

III. 중략하고 맺는 말


전 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김 교수는 그의 논고의 서론에서“성경 전체를 통해 장묘문화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었고,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본다.”고 솔직히 밝힌바 있다. 본 호에서의 그의 연구에서도 역시 그러한 면을 밝히고 있다. 이는 앞서 논한 바 있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동서양의 장묘문화와 비슷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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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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