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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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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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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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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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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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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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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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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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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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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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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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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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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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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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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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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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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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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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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길
- 여행하거나 산행을 해보면 걷는 길 위에서 어쩐지 행복함을 더 크게 느낄 때가 많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현재의 흥미로운 상황이 우릴 기쁨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중국 여행지의 마을을 돌아보며 체험했을 때 넘 재미있고 신기해서 그만 길을 잃어버려 혼이 난 적이 있다. 물론 골목길의 미로 때문에 힘이 든 것이 사실이지만 만일 변화가 심한 사막 가운데서 길을 잃으면 엄청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인생길은 평범한 길이라 할지라도 나그네를 인도할 안내자가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히말라야의 산행 길은 엄청 힘든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산 정상의 산장에 물건을 날라주고 수고비로 살아가는 두 모자의 삶에서 인생길은 정말 험난함을 보여 준다. 엄마의 쇠약으로 13살 어린 아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엄마와 같이 짐꾼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은 정말 짠하다. 엄마의 아픈 다리의 통증으로 짐을 지고 잘 걸어 올라가지 못하니까 아들은 어린 마음에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과 분노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불평하는 것을 보고 인생이 힘들고 고르지 못한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산행 길에서 모자는 어려운 상황으로 속상함과 분노로 관계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인생의 행복과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오직 살기 위해 안내자도 없이 괴로움을 참고 무조건 산 정상만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야만 하는 모자의 인생길이 정말 험난하고 측은하다. 요즘 우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피로에 쌓인 일과를 떠나 여행 길에 올라 생활 충전을 위해 노력하지만 기대한 만큼 위로를 받지 못한다. 낙안읍성같이 성곽 길을 걸으며 옛날과 현대를 느껴보기도 하고 섬진강의 물줄기를 따라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지점까지 옛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강을 따라 마음을 내려놓고 몸이 가는 대로 천천히 걷는다. 가로등 길을 지나 호젓한 박물관을 만나면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이나 풍류를 맛보기도 한다. 편백이 있는 나무 톱밥 길은 늘 걷는 딱딱한 인위적인 길보다 훨씬 느낌이 좋아 걷는 것 그 자체가 기분을 좋게 하여 즐거움에 빠진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길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해도 걸을 때는 좋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힘들고 괴로워지면서 전진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길이라고 하셨다. 원어를 보면 예수님 자신이 ‘I am the way.’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분명히 'The way'라고 하셨지 the road, the street라고 하지 않으셨다. wa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길’ 이외 ‘방법’이란 말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해주시고 평안한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아버지의 집에 가려면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어떤 좋은 길도 우리 인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그네의 힘든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능하신 우리의 안내자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그 길만이 인생을 만족시킬 우리가 안내받아야 할 최고의 길임을 기억하고 그분 의지하여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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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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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6)(창23:1)
-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함께 했습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가 65세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남편과 함께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자신에게는 가능성이 없어 남편에게 첩을 넣어주게 됩니다. 그런 세월이 흘러 90세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바라보는 약속 하나를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남편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 자신이 9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향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 여정에 씨를 보존하기 위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단을 했던 사건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창12: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똑같은 사건은 훗날 한 번 더 발생합니다. (창20: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씨가 소멸될 위기를 만났습니다. 남편에게 첩까지 넣어준 사라입니다. 과연 이 결정에는 누가 주도적이었을까요? 과연 아브라함이 목숨 부지를 위해 아내를 포기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남편의 사명을 위해 오히려 사라가 주저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강요했을까요? (창16: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이런 세월을 보내 사라가 9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제 사라에게 하나 남은 소원이 있다고 한다면 손자를 보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손자는커녕 며느리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미칠 노릇입니다. 결국 사라는 아들이 이삭이 장가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127세에 눈을 감습니다. 사라가 죽은 3년 후 이삭은 결혼을 합니다. 사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극명하게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믿음의 길, 신앙의 삶이란 사라의 일생임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는 성도들에게 사라의 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과 신앙의 길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될까요? 성경은 철저히 공로 사상을 배격합니다. 기복신앙이 무서운 것은 그 속에 공로 사상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죄가 됩니다. 공로 사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신의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잠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라 정도 되면 남편에게도, 아들에게도,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높여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얼핏 볼 때 백이십칠 세라는 표현이 사라에게 너무 아프고 안타까운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사라의 믿음과 신앙을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완성하시고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자신을 버리라고 말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넣어주는 것은 여자로서는 말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충성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충성하는 자가 훨씬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보다도 순종하는 사람이 훨씬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 역시 사라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이 사실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여인을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보호하시기 위하여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공로 사상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문턱에서 백이십칠 세에 불러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믿음의 영웅들이 열거되는 믿음장에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히11: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혹시 예수 믿어 억울하십니까? 죽도록 믿음의 길과 신앙의 삶을 살았는데 그 결과가 “이건 아니지”라고 여겨지십니까? 우리 성도가 가야 할 길은 백이십칠 세, 거기까지일지도 모릅니다. 백이십칠 세를 살도록 하시는 것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성도로 완벽하게 보호하시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사라의 백이십칠 세는 아들 이삭을 계승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세월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최고의 은혜요,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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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6)(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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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
-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은 유대교의 또 다른 고유한 요소인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윤리의 뿌리를 두게 만든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창조주가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이러한 자신의 성품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기대하신다. 대부분의 이교도 세계에서 윤리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의 일부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에게서 우리는 어떤 강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찾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주피터(그리스의 Zeus)는 정기적으로 인간 여성을 임신시켜서 그의 아내 주노(그리스의 Hera)로 하여금 아이들에게 질투하고 복수하도록 자극한다. 미네르바(그리스의 Athena)는 경쟁에서 여신을 능가한 후 인간 여성 아라크네(Arachne)를 거미로 만든다. 플루토(그리스의 Hades)는 프로세르피나(그리스의 Persephone)를 납치하고 그녀를 강제로 아내로 삼아 세상에 겨울을 가져온다. 이교의 신들은 이처럼 대부분 비윤리적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의를 중히 여기시므로 자신이 정하신 기준을 인간들이 이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온 땅의 하나님이시며,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사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열방의 주인이시지만 이스라엘과는 독특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법(뜻)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셨고,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자신과 독특하고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와 정부의 제만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율법의 대부분은 또한 허물과 죄를 가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식의 순결을 유지하고 이스라엘을 열방의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구별된 민족으로 삼기 위한 의식, 율례, 심지어는 식습관과 위생 관행에도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표시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지만 동시에 그에 따른 엄청난 책임도 수반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다른 어떤 민족보다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 매우 높은 기준을 갖고 계셨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국가 역사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하신 높은 거룩함의 기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이야기이며, 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로마 제국 당시에도 이방 나라에서 나그네처럼 살던 유대인들은 세상과 그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그들의 이교도 이웃들이 보던 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유대인의 생활 방식, 신념 및 종교적 관습은 두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로마 정부와 충돌을 야기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적대적인 이웃 국가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로마의 영토 확장을 지원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들 유대인들에게 황제 숭배와 같은 로마의 종교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다. 그래서 일신교적 신념을 위반하는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받았다. 둘째, 유대인들은 주변의 이방인들과 혼합되지 않는 방법을 수년 동안 배웠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방인들과의 혼합으로 인해 거짓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역사적 교훈을 배웠다. 유대인들은 또한 이방인들과 너무 밀접하게 교제함으로써 종교적 의식에 있어서도 “부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당시 로마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들의 정체성을 비교적 잘 지켰다. 그들은 당시 이방인들과 사업을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과 많이 사귀거나 통혼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지켜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율법의 수혜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변 이방 사람들보다는 우월하다고 믿었으며,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려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다른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만이 온 땅을 다스리는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심을 믿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현상 유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로마는 이들 유대인들의 관행을 허용하고, 적어도 종교적인 관습에 관한한 이들을 내버려 두었다. 이들은 사실상 로마 제국이 기꺼이 용인하는 또 다른 이상한 종교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영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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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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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뢰의 결과 (대하20:20-23)
- 한 TV방송 프로그램 중에 시골에서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부부를 방송국 스튜디오에 모시고 퀴즈 대회를 진행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카드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알아맞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차례가 되어서 카드에 적힌 단어를 열심히 할머니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날 할아버지가 설명하고 할머니가 알아맞혀야 할 단어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런 방송 프로에 익숙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할머니가 동문서답(東問西答)만 하시고 알아맞히지를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무 답답하셔서 “당신하고 나 사이를 뭐라고 혀?”라고 힌트를 드렸더니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민망해진 할아버지가 “그것 말고 네 글자로 말해봐!”라고 다시 힌트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평생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방청객들과 전국의 시청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안타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원수 같이 여기면서도 평생을 함께 살아오셨으니까 대단한 것이고, 부부이면서도 평생을 그렇게 원수같이 여기고 살았으니까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이 즐겁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부부사이보다 우리가 더욱더 신뢰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일까요? 첫째는, 신뢰하는 자를 견고케 하십니다.(대하20:20-23) 둘째는, 신뢰하는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렘39:15-19) 셋째는, 신뢰하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사30:15-17)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시므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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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뢰의 결과 (대하2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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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32: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4)
- I. 서언(序言) ‘이런 세계화 시대에 과연 높임말이 필요한가?’‘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처럼 높임말이 없어야 진정한 상호간의 소통이 된다.‘높임말을 하려거든 제대로 하지 그게 뭐냐?’는 등의 높임말에 대한 많은 찬반양론이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지면을 통하여 높임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는 앞에서 논한 대로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 오는 토요일에는 저희 선친의 생신이어서 고향에 가야하기 때문에 오는 주일날은 고향교회에 참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이 집사님의 말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선친이란 표현은 아주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선친(先親)이란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고 생존 시에는 가친(家親)이라고 해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집사님의 선친께서”라는 경우도 있는데 이도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선친이라는 말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존 시에는 자친(慈親), 돌아가신 때는 현비(顯妣)라고 지칭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말은 생소한 말이기도 하고 강요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솔직히 필자의 경우도 이런 용어는 사용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본인은 알아도 다른 사람이 모르면 소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굳이 선친, 가친 또는 자친, 현비 등의 어려운 말들을 하기 보다는 저희 아버지, 저희 어머니 등의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용어로 호칭과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호칭을 조금 더 논한다면, 어릴 때는 아버지의 애칭어인 ‘아빠’라고 불러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아빠라고 하거나 어머니에게도 어릴 때는 엄마라고 할 수 있지만 장성해서는 어머니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혼 후에는 어떨까? 미혼 일 때는 어머니라고 하다가 결혼 후에는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당황하는 경우들도 본다. 예를 들어 결혼한 새색시가 맏동서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동서야? 난데 내일 저녁 먹자, 어머님께서 올라오셨어.” “어머니께서요? 언제요?”라고 했다. 이에 맏동서가 “아니 막내 동서는 어머니가 뭐니? 어머님이라고 해야지”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 대화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시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면 오히려 더 친근감이 들 수도 있고, 요즈음 같이 높임말에 대한 체계가 없는 때는 별로 큰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결혼 초기여서 시댁과의 관계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언어 예절을 갖춘 시어머니는 어머님으로, 시아버지는 아버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면,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흔히들 이런 경우는 ‘아가’, ‘새아가’, ‘어미야, 어멈아’, ‘예야’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예야’로 부르는 것은 어조에 따라서는 며느리가 불쾌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해야 할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도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자신의 며느리에게는 ‘아가’, ‘새아가’, ‘철수 어미(어멈)’, ‘너’로 말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부모와 배우자에게 며느리를 지칭할 때는 ‘며늘애’, ‘새아가’와 아이의 이름을 넣은 ‘철수 어미(어멈)’, 아들의 이름을 넣은 ‘철수 댁’, ‘철수 처’ 등으로 말한다. 또한 ‘며느리’는 남의 며느리를 지칭하는 느낌도 있고, 어른 앞에서는 며느리를 낮추는 것이 예이기 때문에 ‘며느리’로 하지 않고 ‘며늘애’로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친척에게 며느리를 지칭할 때는 ‘며느리’, ‘며늘애’, ‘철수 어미’, ‘철수 댁’, ‘철수 처’ 등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친척 중 윗사람에게는 ‘며늘애’가 가능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며느리’로 부르는 것이 좋다. 또 하나는 며느리의 친부모인 사돈에게는 며느리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 아이가 없을 때는‘며늘애’로 하고, 아이가 있을 때는 ‘철수 어미’로 지칭하는 것인 옳은 표현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가정의 호칭어, 지칭어들도 바로 쓰지 못하는 경우들도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친정어머니 대하듯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원칙은 때로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간의 마음이다. 서로가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약간의 어법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오고가는 서로 존중하고 높이는 말들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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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32: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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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
- 얼마 전 목회자 모임이 있어 창원 명서동에 있는 어느 곰탕집을 찾게 되었다. 식당 벽에 큰 문구가 적혀있는데 나의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는 국물의 맛을 내기 위하여 일체 프리마나 기타 첨가물을 쓰지 않으며, 첨가물을 발견하시는 손님께는 1억을 배상하겠습니다.” 다수의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고 손님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는 증거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궤변에 이런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을 주었고, 소에게는 뿔을 주었고, 문어에게는 먹물을 주었고, 인간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교를 주었다”고 하였다. 궤변이지만 의미 있는 말이기에 생각해 보는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거짓에 위선으로 사는 진실 실종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거짓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한다면 세상은 혼돈의 세계로 빠져 갈 것이다.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으며,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 앞에 속일 수가 없다. 영어 단어의 진실을 설명하는 단어 “sin care”는 라틴어 시네 세라(sine cera)에서 왔다. 이 말은 “밀초를 칠하지 않은”이라는 뜻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sun tested”, 즉 "햇빛에 시험해 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생기게 된 것은 고대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긴 단어이다. 진실한 도공은 도자기에 금이 가면 깨어버린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도공은 금이 간 도자기에 밀을 칠하여 감춘다. 그것을 실험하기 위하여 햇빛에 비추면 흠집이 보이거나 밀촛물이 녹아 흘러내림으로 거짓은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라틴어 진실 “시네 세라(sine cera)”이다. “절반은 진실이다”라는 말은 전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거짓을 섞어 탄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거짓은 아무리 모여도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은 잠시 가려져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과 거짓을 놓고 선택을 요구하신다. 이 선택은 날마다 시간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옛날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신기루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겨를이 없이 단지 눈앞에 보이는 신기루만을 좇다가 점차 진짜 오아시스와는 거리가 멀어져 결국 물도 없는 사막에서 말라 죽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악마를 쓸어내는 빗자루이다.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심비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평생 마귀의 종으로 거짓과 함께 살기보다는 진리의 영이신 주님의 교훈대로 산다면 마음의 평안과 복된 삶을 이루게 될 것이다. 마귀에게서 난 자는 그의 아비의 욕망을 따라 행하므로, 그 역시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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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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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종교전쟁
- 아파트에서 근무해 보니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학교 다닐 때 수업을 통해서 세계 종교를 배웠고, 타 종교를 두고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에 주로 머물던 내가 다른 신앙을 가진 분들을 실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파트에서 수개월 근무 해보니 알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입주민의 종교의 영역까지 알게 되었다. 「개신교」 개신교 신자는 가장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반갑게 인사 나누는 것? 그런 것 없다. 오히려 감추려는 듯 침묵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결코 숨길 수 없는 증거가 있다. 현관문에 붙여진 교패. ‘순복음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다양하기도 하다. 이분들에게는 관리소장이 목사라는 사실이 어느 누구보다 불편할 수 있겠다 싶다. 같은 편이라 생각했고 조금은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감도 컸다. 「천주교」 목사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다. 솔직히 가끔은 ‘오죽 못났으면 목사가 이런 일을 하나?’라는 눈빛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온화하고 예의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 삶에서 신앙인의 티를 안 낸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개신교 입장에서는 불편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신앙을 드러내며 얼마나 많은 욕을 먹고 있는가! 차라리 신앙을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는 신사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에서 더 인정받고 있다. 「재림교 (안식교)」 미국과 한국을 번갈아 오가며 사시는 멋진 노부부가 있다. 늘 자비로운 미소로 남에게 피해 주기를 꺼리는 분이다. 절대 타인에게 나쁜 말을 하지도 않는다. 1년 중 2개월 정도 한국에 들어와 쉬었다 가시는데 들어오시면 꼭 나를 불러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 아이들 쿠키, 커피, 초콜릿 등등. 커피 한 잔을 나누며 그동안 안부와 아파트 근황을 물어오신다. 교회를 다닐 것 같은 느낌인데. 하지만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종교에 관련된 질문이 없다. 목사인 관리소장이 불편해서 감추는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따로 초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차를 마시며 집안을 슬며시 살펴본다. 달력이 보인다. 가장 아래에 글자가 많다. 익숙한 느낌. 어느 교회를 다니시는 걸까? 오래된 인터폰의 상태를 살피는 척 가까이 다가가 달력을 본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이 멋진 노부부는 안식교인이었다. 「남묘호렌게쿄」 익숙지 않은 종교지만 주변에 신도가 생각보다 많다. 일본에서 창시된 불교인 것 같은데,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군에서 만난 간부 한 분이 이 종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묘한 주문 같은 것을 자주 외우고 요가 같은 독특한 자세를 종종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파트에도 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사람 좋아 보이는 노부부지만 일 처리가 정확하다. 관용적인 말로 허술해 보이지만 만만치 않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철저하게 신앙 생활하는 느낌이 난다. 그냥 그렇다. 더는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다양한 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다. 아파트 현관문에 누가 봐도 주술과 연관이 있는 물건을 걸어두고 협박 문구를 써 둔 사람도 있다. ‘이 물건을 가지고 가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처음에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나를 늘 괴롭게 하는 그 아주머니는 호텔을 경영한다고 하더니 주변 입주민들에게 들어보니 이름을 지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나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일까 걱정했다. 「여호와 증인」 늘 다정해 보이는 젊은 부부. 그들은 여호와 증인이다. 정확히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낡은 승합차를 타고 어딘가 봉사하러 자주 다닌다. 왕국회관이 가까워서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다는 이야기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교회 옆으로 이사 온 신앙.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늘 사람을 챙기는 친절함까지 갖추었다. 아파트 물난리가 난 날. 들어온 물과 폐기물을 치워야 했기에 기술보다는 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재난 상황을 혼자 수습할 수 없어서 입주민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며 주섬주섬 일하고 있을 때. 장갑에 양동이를 들고 이 부부가 나타난다. “목사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이 사람들은 나를 목사라고 부른다. 지나다 아파트 청소하는 나를 발견하면 간식거리를 사다주고 가는 사람들이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여호와증인, 당신들이 이겼다! “늘 고생 많으시죠?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승강기를 함께 타게 되었다. 인사치레일지 모를 말이지만 큰 위로가 된다. 내가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격려가 되었다. 고마웠던 마음을 한껏 담아 건넨 말. 추호도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잠시 어색하게 되었다. “역시! 이렇게 고생하는 사람 곁에는 알아주는 증인이 있어야 한다니깐!” 아, 증인에게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실례가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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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종교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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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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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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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사도행전 QT 설교
- 존 맥스웰John Maxwell**목사는 보통 사람이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실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는 실수는 항상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공은 항상 똑똑하고 재능 있는 자에게만 온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를 실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수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수는 배움의 기회이다. 만약 당신이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런 방법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은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할 때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대가를 치르는 부담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화의 속도가 빠른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인생은 살아남기 어려운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므로 능동적으로 앞서서 변화의 물결을 타고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성공은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열정을 가진 소유자에게 온다는 사실이다. 본서는 본래 누가복음 상 하권 식으로 연결된 한권의 책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전후로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에 각각 사복음서의 하나와 예수 부활 이후 사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AD 2세기 이후에 분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 하나는 성경의 내적 증거이다. 누가가 먼저 쓴 누가복음과 본서인 사도행전의 문체나 어휘나 구조가 너무도 일치하는 점이 많다. 누가는 의사로서 본서에 헬라의 의학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 것을 보아 누가가 기록한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행의 동반자로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교부들과 역사가들의 외적증거이다.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이나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 오리겐, 역사가 유세비우스 등이 다 누가의 저작으로 인정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목적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케리그마적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서 증거 됨을 알리기 위함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친히 증거 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을 통해 교회를 세워 교회가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차적 목적은 복음 전하는데 있다. 교회가 복음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든가 하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둘째, 변증법적 목적이다. 기독교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임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변증이 필요하다. 하나는 유대인에게 기독교 복음은 반 율법적이 아니라 율법의 계승자임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씨로 온 것임을 알린다. 다른 하나는 이방종교에 대해 기독교만이 참 종교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셋째, 화해의 목적이다. 사도행전은 두 부분으로 나눈다. 전반부 1-12장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베드로의 복음전파이고, 후반부 13-28장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바울 사도의 복음전파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Ⅰ. 성령세례를 받으라(1-5절) 누가는 ‘먼저 쓴 글’을 간단히 요약함으로 누가복음과 본서의 관련성을 상기시킨다. 또한 부활하신 주께서 실제로 나타나신 모습과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 그리고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들을 통해 본서의 전체적인 진행을 예상케 한다. 특히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사역이 성령 받은 사도들의 증인 역할을 통해 계속될 것임을 명시한다. 이처럼 본문에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약속이 명시 되어 있는 바 이 약속은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으니,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문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뿔뿔이 흩어지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복된 소식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약속함으로 요한의 물세례와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를 씨는 외적인 의식인 반면, 예수의 성령 세례는 내적으로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런 사실은 다음 장에 나타날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증명되었다.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요 3:5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통해 완전히 변화되어 완악한 심령들을 회개시키는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먼저 데오빌로를 찾으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는 바울의 사랑 받는 제자이자 동역자이다. 사도행전의 수신자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였다. 그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로마의 고급관리로 보는 견해가 많다. 오늘날 누가와 같이 먼저 복음을 받은 우리는 이 땅에 숨겨진 데오빌로를 찾는 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많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 전도는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을 말한다. 거기서는 “데오빌로 각하에게”라고 하셨는데 지금 쓰고 있는 사도행전에서는 “데오빌로여”라고 했다. 앞에서는 공적인 직함을 사용했으나 뒤에서는 사적인 호칭을 사용하심을 보아 그 동안 많은 교류와 지속적인 관심과 사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의사로써 자신이 받은 달란트로 봉사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가진 것으로 섬기기를 원하신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용한 지팡이로, 다윗은 물맷돌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었던 한 여인은 옥합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다. 고난 받은 후에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그가 고난 받은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 6-9시까지 어두움이 임했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그리고 예루살렘 변방에 있는 성도들의 무덤이 열렸다. 옛 한글개역성경에는 “해 받으신 후”로 번역했으나 이는 고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를 선지자들의 입을 의탁하사 이루셨다. “고난 받으실 것”을 이미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서 약속하셨다. 해 받으신 이후에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친히 보여 주셨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이 부활신앙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분기점이 해 받으심을 전후한 사건이다. 해 받으시기 전은 복음서 적이며, 해 받으신 이후는 사도행전 적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데는 해 받으심이란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있다. 그래서 누가의 스승 바울은 해 받으심인 십자가가 복음 전파의 핵심임을 가르쳤다. 사도와 같이 모이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면 지금 사도가 있는가? 주님을 따라 다니던 12사도는 2천 년 전에 부름 받아 천국으로 갔다. 그러나 지금도 그 사도들과 같이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도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우리들 중에 있다. 그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이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해 온 믿음의 종들이 오늘날도 있다. 이렇게 세움을 받은 사명 있는 종들과 같이 모여야 한다. 우리는 이들과 뜻을 같이해야 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왜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 되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곳에서 성령을 받기까지 머물러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을 허리에 메고는 길쌈을 할 수가 없음 같이 성령 받지 않고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이 곧 기도이다.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 정도 되었다. 이 무리는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건 갈릴리에서 감람산까지 온 자들이다.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다. 그 후에 약속한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지 않고 감람산에서 마가 다락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무엇 때문에 약속한 성령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10일 가까이 기도했다. 그 동안 가정의 남편이나 자녀들 걱정 혹은 직장이나 생업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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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의 덕목에 대하여(1)
- 사랑 리더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사랑이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리더십이 제대로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관계 리더십을 가진 자이십니다. 사랑은 관계 리더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이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예수님의 긍휼, 자비,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사랑이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행동하는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으로 행하신 관계 리더십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좋아하고 사랑 받으면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 같은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큰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사랑하고 사랑이 많은 자가 좋은 리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을 실천하면 관계가 잘 되고 관계 리더십이 잘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싶으나 잘 못합니다.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고 남의 허물을 덮어 줍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게 됩니다. 리더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고 사랑을 실천할 때 관계 리더십이 세워지게 됩니다. 좋은 습관 습관이 중요합니다. 좋은 리더는 좋은 습관을 가진 자입니다. 오늘의 나의 모습은 과거의 습관의 결과입니다. 좋은 습관은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성공으로 인도합니다. 나쁜 습관을 가지면 리더가 될 수 없고 삶을 실패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다니엘도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남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게으름도 습관입니다. 게으른 자는 망하게 됩니다. 부지런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리더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한 자가 성공합니다 말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긍정의 말, 감사하는 말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습관이 리더와 사람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이 어떠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시간에 늦게 도착하고 약속을 어기는 것도 습관입니다. 나쁜 습관을 가진 자는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변명하는 것, 남 탓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리더의 지혜입니다. 독서하는 습관, 글 쓰는 습관, 성경 읽고 기도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입니다. 미리 강의준비, 설교 준비하는 습관을 가지면 여유가 있게 됩니다. 격려, 칭찬, 섬기고, 선물주고, 대접하는 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선물 주는 것도 습관입니다. 운동이 습관이 되면 힘들지 않고 건강에 유익합니다. 습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는 좋은 습관을 발전시키고 나쁜 습관은 정리해 나가는 자입니다. 새벽기도가 습관이 되면 짐이 되지 않고 즐겁습니다. 지혜자는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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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의 덕목에 대하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