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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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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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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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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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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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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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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봉석 목사] 가로등을 끄는 이유
    미국에는 팜 스프링스라는 사막 지역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많은 노인들이 사는 실버타운으로서 유명한 휴양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보면 이 도시만의 특별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특별한 구간을 제외하고는 밤에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얼마든지 가로등을 환하게 켤 수 있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인데 왜 캄캄한 밤에 가로등을 끄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막 지대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은 밤하늘입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이곳 주민들은 모두의 합의 하에 그렇게 가로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곳 주민들의 그런 결단을 듣고는 모두가 놀란다고 합니다. 높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잘 보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가로등을 끄는 불편을 감수하는 주민들의 결단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할 수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떻습니까?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낮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 바로 이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이동’을 한 사람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나의 이익과 명예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압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물질도 시간도 포기하고 내 위신과 자존심도 버릴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낮은 가치를 포기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줄 아는 사람, 땅의 것을 포기해서 하늘의 것을 얻기를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기꺼이 마구간 말구유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입니다. 봄이 되면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있는데 벚꽃과 목련꽃입니다. 그 중에 벚꽃은 활짝 만개했다가도 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나무 가지에서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목련꽃은 시들어서 색깔이 변해서 거무칙칙한 색을 띠기까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꽃이 질 때쯤에 목련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색이 바래기 까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생애가 다가도록 놓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그 공간마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빈 공간은 더욱 커지며 허무와 고독으로 몸서리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인생들은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더 중요하고 존귀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은 다 받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금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하는 데 꼭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살펴보십시오. 그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진짜 내게 필요했던 신령한 복이 내게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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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과 삶
    2022-09-23
  • [신재철 목사] 잘못된 만남
    잘못된 만남 복학 후 교내 크고 작은 예배 모임과 지역교회 집회에 초대받아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인근에 있는 대학에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예배특강 요청을 받기도 했다.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찬양 콘티 작성법과 예배 인도법에 관한 2시간짜리 특강이다. 마침 신혼여행 일정과 맞물려 고민이 되었는데 선하신 아내님의 허락으로 여행을 1주일 미루고 참여할 수 있었다. 교회 사역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찬양 인도를 다섯 번 이상은 고정으로 하는 것 같다.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것인지 찬양을 섬기러 다니는 것인지 모를 정도의 일정에 고단함도 있지만 좋다. 철가방, 방범대원, 대리운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회 청년부예배 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찬양과 말씀을 함께 섬겨달라는 요청이다. 초청해주신 교회의 청년들과 찬양을 연습하며 집회를 준비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부장 집사님 집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집회를 시작하자는 제안이 왔다. 강사로 사역을 섬길 때 식사 초대는 여러모로 부담이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함이 가장 큰 이유다. 찬양팀과 맞춰야 할 시간도 부족하고, 배가 부르면 사역에 불편함이 생겨 대부분 식사는 정중히 거절한다. 하지만 난감해하는 청년부 사역자를 보며 식사 자리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부장 집사님은 이미 안면이 있는 분이다. 칼국수 집에서 일하며 철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대부분 배달처는 대학병원이나 사무실이었다. 가정집 배달이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늘 불평이 많고 배달원을 함부로 대했던 손님. 그 집 배달 요청이 오면 늘 불편했고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피하지 못해 배달을 가 현관문을 열면 ‘예수만 섬기는 집’임을 드러내는 상징이 많았다. ‘벽의 그림, 말씀 액자. 테이블에 올려둔 십자가.’ 은혜로운 셋팅과 다르게 집주인은 고약했다. 늘 음식 타박에 배달원을 무시하는 말투. “예수 믿고도 저 모양이니 예수님이 욕을 먹지.” 빈 배달통을 들고나오며 늘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배달 일을 그만둔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나는 그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 내가 다시 이 집에 오게 될 줄이야!’ 둘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고약한 집주인과 배달부. 아니 이제는 청년부 부장집사와 집회 강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더 무슨 말을 할까? 형식적인 말들로 식사 자리를 채운다. 애매하고 묘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즘도 칼국수 좋아하세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우리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한 상 잘 차린 식사도, 오가는 은혜로운 말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민낯을 보았기에 잔뜩 꾸며진 겉치레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회 시작을 앞두고 잡힌 식사였기에 긴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예배는 시작되었고 찬양은 참 은혜로웠다.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나 역시 행복했다. 찬양, 말씀, 기도. 모든 것이 은혜였고, 행복했고, 감사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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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 칼럼
    2022-09-23
  • [조희완 목사] 봉사의 자세 (벧전4:7-11)
    옛날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1825년-1855년)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 그 나라에 한 충성된 군인 장교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막사(幕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종이에 적어보다가 액수가 너무 많아서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음을 알고 크게 낙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의 액수를 적은 끝에다가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歎息)하는 글귀를 적어 놓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니콜라이> 황제가 종종 군대를 시찰하고 다녔는데, 마침 황제가 그 부대를 시찰하다가 사병들의 막사를 둘러보던 중에 그 장교가 책상 위에 적어 놓은 탄식하는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는 글귀를 읽고 감동이 되어서 그 밑에다가 “니콜라이 황제”라고 적어 놓고 나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장교가 일어나서 종이 위에 적혀있는 황제의 이름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니콜라이> 황제가 다시 그 부대를 찾아와서 그 장교가 걱정하고 탄식하던 빚을 다 갚을 만 한 돈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 장교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황제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 충성을 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보다 더 충성된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엄청난 관심과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마음과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되 어떻게 봉사해야 할까요? 첫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벧전4:10-11) 둘째는, 받은바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롬12:4-8) 셋째는,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눅10:40-42) 우리 모두 봉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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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0
    사랑과 미움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주 바뀝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면 관계가 좋아지고 미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미워하면 불행해집니다. 사랑과 미움은 대조적이며 결과는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는 자신이 먼저 기쁘고 감사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얻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부드럽고 말이 부드럽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면 마음에 기쁨이 없게 됩니다. 미워하게 되면 마음이 거칠고 언어가 거칠게 됩니다 미움은 살인의 시작입니다. 미움으로 가득찬 리더가 있다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자는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마무리 됩니다. 미움과 시기로 가득 차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 사울의 마지막은 비참하게 끝이 났습니다. 사랑의 가족, 공동체 교회 공동체가 축복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사랑이 교회 성장의 비결입니다. 서로 미워하면 갈등이 일어나고, 분열되고, 다투고, 싸우게 되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이냐, 사단이 주는 미움의 마음이냐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넓은 마음입니다. 미움은 죄성이고 시기 질투입니다. 천국은 사랑만 있고 영원히 사랑하면서 사는 나라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미운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편애하지 말고 골고루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가운데서 용납하라 사랑은 용납하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는 것이 넉넉한 사랑입니다.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주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들까지 품으시고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를 초청하시고 예수님께로 오면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믿음 약한 자, 의심하는 자, 죄짓고 방황하는 자를 용납하고 받아주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편견을 갖지 말고, 편애하지 말고, 인종차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자임을 알고 귀히 여기고 받아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받아줍니다. 용납합 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인간은 무시당하고 배척당할 때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단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나 사람들은 받아주고 용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올 때 받아주고 용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 문턱을 낮추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환영해 주고, 받아주고, 용납해 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은 넓은 마음, 인간의 영혼을 귀히 여기고 용납하고 받아주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인간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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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2-09-23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없는 종교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고,많은 가정의 거실 벽에 결려 있기도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어질 위험에 있는 성경 귀절들이 많이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그 중 하나이다.이와 같은 귀절들의 의미는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의 아름다움에 가려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아모스 선지자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열심히 찾고 있었던 같아 보인다.벧엘에 세워졌던 성소가 그렇게 분주한 적도 없었다.아모스시대 만큼 그렇게 많은 동물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진 적이 없었다.사람들은 여호와를 찾기 위해 벧엘에만 간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길갈에까지 갔었다.길갈은 거기에서 할례가 행해졌기 때문에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아주 거룩한 장소로 여김을 받는 곳이었다.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수많은 순례자의 무리들이 정기적으로 브엘세바로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로부터 온 순례자들에게는드고아를 지나야 브엘세바로 갈 수 있는 여정이었다.브엘세바는 유다의 최남단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여정은 이스라엘 국경 밖으로 나가는 긴 여정이었다.그러나 순례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브엘세바는 성지가 아닌가!여호와께서 거기서 오래 전에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던가!어떤 가치있는 전통이 브엘세바와 관련되어 있지 않는가!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조망해 볼 때 이스라엘이여호와를 찾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종교적 열정,희생 제물,그리고 순례는 오히려 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 없는 종교”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하나님은 벧엘,길갈,그리고 브엘세바와 관계된 그 어떤 것도 원치 않으셨다.거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었다.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들의 설계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집에 거하셨다.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만든 종교들을 인정하기를 거절하시는 분이다.그것들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일 뿐이다. 아모스는 가능한 한 가혹하게 심판을 알리기 위해 예리한 대조를 하고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아모스5:5). 이스라엘의 겉치레뿐인 경건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구하는 경건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우리의 종교를 우리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서 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은 없을 것이다. 벧엘,길갈, 그리고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제사는 여호와를 찾는 참된 경건의 행위가 아니라 단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이교적 행위였을 뿐이다.의식 중심의 모든 종교는 신들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린다는 이교적 원리에 의존해 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던 생각도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여호와께 많은 헌물을 드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소원의 수레에 여호와를 얽매이게 하는 것이었다.이런 생각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경건의 모습에 접근해 가고자 함이 아니고 단지 그분의 은사를 나누어 갖고자 함이었다.이것이 그들이 훌륭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 종교의 모습이었다.이런 종교는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이라고그들은 믿었다.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많은 희생 제물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종교를 개발했던 것이다. 종교적 열심과 종교는 전적으로 범주가 다른 두 가지 행위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다.예배에 단순히 참석하고 헌물을 드리며, 위계적 직분을 감당하는 행위가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는 경건의 행위와 같을 수가 없다.전자는 후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우리 시대에 넘쳐 나는 교회당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서도 교회와 교단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가 있다.교회와 교단, 심지어는 선교지에서도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모습만 가질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하나님 없는 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수도 있다.분주하게 희생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열렬한 종교적 활동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여호와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09-23
  • [황권철 목사] 빌립(Philip's Behind Stories)-전도의 사도
    정직한 고백자 빌립 그는 현실적으로 이해타산이 빠른 자이다. 주님이 벳새다 들녘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막 6:37; 눅 9:13)고 했다.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동일한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은 빌립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빌립을 시험고자 하심이라”(요 6:6)고 했다. 그러나 전후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빌립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고로 매도할 수 없는 사건이다. 빌립은 다른 제자들 앞서 이 무리들에게 먹일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다른 제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빌립은 무리를 먹일 것에 대해 구체적인 걱정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수해 보니 적어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함을 알았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직면할 때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계산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현명한 지각이다. 우리는 빌립의 냉철한 판단력을 배워 더 구체적인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게 생각한 전략가였다.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빌립을 찾아와서 예수를 만나보려고 하는데 주선을 좀 해 달라고 했다. 그때 그는 주님에게 바로가지 않고 안드레에게 말하여 안드레와 함께 예수께 나아갔다(요 12:20-22). 단순하게 읽어 넘기면 빌립이 굉장히 소심한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고 제자들의 역학관계를 알고 나면 빌립이 대단히 지혜로운 전략가임을 알 수 있다. 첫째, 헬라인들이 빌립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빌립은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은 레벨, 상위 그룹에 속한 자임을 알 수 있다. 헬라어를 구사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주님에게는 친한 그룹이 존재했다. 일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는 핵심그룹이다. 다르게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선두 그룹이다. 이들은 다 같은 동네이며 혈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려면 이 두 그룹을 거쳐야 주님에게로 접근이 가능하다. 이들을 통하지 않고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는지도 모른다. 셋째, 그 중에 안드레를 선택한 전략이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선택하면 주도권을 잃을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안드레는 조금 다르다. 인지적 지각이나 리더십 면에서 빌립이 자기 위치를 확보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음을 알았기에 안드레를 대동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빌립이 탁월한 전략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거룩한 의문을 가진 영성의 소유자이다. 주님은 대속제물이 될 구원사역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갈 때가 다가왔다. 그때 빌립이 물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했다. 주님의 마지막 고별인사와도 같다. 이 때 입을 연 자가 세 제자였다. 도마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고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라고 물었으며, 다대오가 “왜 이 일을 세상에는 알리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들 세 제자만 몰랐을까? 주님이 십자가 지는 사건 앞에 이 비밀을 안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주님 부활하신 이후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이후였다. 이들의 물음은 거룩한 영성을 소유한 정직한 고백이었다. 이삭줍기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빌립은 아시아에서 크게 각광 받는 자였다. 그는 두 미혼의 딸과 함께 부르기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 승천 후 빌립은 제자들 중 최초로 갈릴리에서 설교하고 이적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또한 지금의 터키, 갈라디아 지방에서 주로 사역하다가 87세의 나이로 브루기아의 히에라볼리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히에라볼리에서 뱀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빌립은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했고, 이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이에 놀란 이교도들은 빌립과 나다나엘(바돌로매)을 십자가에서 내렸다. 이때 나다나엘은 살았으나 빌립은 이미 죽은 뒤였다. 나다나엘은 수많은 이교도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빌립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녔던 빌립의 누이 마라안나는 히에라볼리에 빌립의 시신을 묻고 나다나엘과 함께 아르메니아로 가서 전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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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9-23
  • [하수룡 장로] 후손
    내가 섬기는 교회에 믿음이 좋은 장립집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 손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남달리 급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분들은 손자이든 손녀이든 무엇이든 주시는 대로 감사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분은 꼭 손자를 주셔야하고 주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헌금을 했다. 어떤 의미로 손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금보다 귀한 손자를 좀 더 고상한 말로는 후윤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아도 후손은 정말 귀중하다. 어느 기업체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 가정의 노후 된 집들을 개보수해 주는 것을 보고 참으로 뜻 깊은 훌륭한 사업이라 생각했다. 친일을 한 사람의 후손은 호의호식하며 잘 배워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독립투사의 후손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지킨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진 것이 없어 배움의 기회가 상실된 상처뿐인 삶으로 100년을 살아온 것이다. 이들 후손들은 아버지에게서 가훈의 교육은커녕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오늘에야 조상이 가치 있는 독립운동의 주체적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는 존경받는 인물로 존재하는 것은 참 잘된 일이다. 가인은 악을 선택하여 사탄의 종이 되어 아벨을 살해하고 땅의 저주를 받는 최악의 후손으로 전략하였다. 오늘날도 가인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으면서 선하신 하나님과 교제는 단절하고 자기의 영역이 침범 당할까봐 늘 염려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담은 의로운 후손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셋을 허락하심으로 큰 기쁨을 얻는다. 아벨 대신 다른 의로운 씨로 아들을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악을 다스리라는 깊은 뜻이 있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가문으로 후손을 잘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요즘 믿음의 친구들이 모이면 간절히 바라는 공통분모가 자녀 손들이 믿음으로 잘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이다.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선망의 직업을 가지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지나 만족한 직업을 가진 후에는 제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믿음의 조상격인 부모가 자기 후손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상적인 신앙인의 믿음이고 올바른 생각이라 믿는다. 이스라엘은 후손교육 실패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었다. 손자가 탄생된 기쁨보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믿음을 갖고 지혜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많은 내 나라, 나의 자녀손들이 사는 이 땅에 올바른 후손교육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잘 가르치고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치면 성공한 후손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늘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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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09-23
  • [박동철 장로] 고르바초프의 죽음과 러시아의 복음화
    소련 연방 제국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났다. 애칭 고르비의 죽음이 세상에 던지는 여러 얘기에 많은 관심이 끌린다.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 냉전체제가 화해로 돌아서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공산 사회주의의 맹주 소련이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독이 통일되자 소련의 당시 서기장 고르비는 권력의 통제에도 힘을 잃어갔다. 이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고르비와 대화 시스템을 갖추고 미소 냉전을 끝내고 대화의 파트너로 전환하게 된다. 드디어 1988년 5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UN에서 연설을 통해 대결에서 협력의 시대를 선언하게 된다. 사실상 공산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선언이었다. 동유럽 소련 연방 제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은 러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필자는 이 무렵 일선 기자생활 할 때라 생생한 기억들이 있다. 당시 우리는 80년대 신군부의 군사정권이었지만 노태우가 6.29선언으로 다시 정권을 잡아 6공화국 시대를 구가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연장에서 북방 정책을 표방하고 소련과의 외교에 힘을 쏟았다. 노 대통령은 90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리고 고르비의 답방형식으로 91년 5월 제주도에서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을 갖는다. 우리나라가 동토의 땅 소련의 문을 열게 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지금도 러시아는 우리의 중요한 통상 파트너가 되고 있다. 당시 가끔 특별한 기자회견 취재 중 노 대통령은 소련과의 외교 정상화의 북방 외교를 늘 치적으로 앞세우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사실 이후 러시아로 정치체제가 바뀌면서도 우리와의 외교는 발전해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후 기독교 복음화가 급격히 확장 됐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의 큰 덕택이자 하나님의 큰 역사로 봐야 할 것이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동방 종교의 대표격인 정교(正敎)가 종교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는 공산당 권력 아래에서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 이단의 기능에서 머물러 있었다. 러시아 정교는 로마의 분열과 함께 동방 정교로 발전하여 러시아에서 교세를 떨쳤지만 러시아 혁명과 함께 교리 상 예수 십자가 복음에 이르지 못하고 공산당 최고 권력에 묻혀있는 유사 기독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20년간 선교사로 사역하신 한 목회자는 소련 개방과 함께 우리 기독교가 선교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공산당 문화가 가시지는 안 했지만 러시아 정교의 불간섭하는 정서 속에 지금은 한국 교회서도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사역에 사명을 다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러시아의 정교는 국교화하여 85% 이상의 인구를 가졌지만 개신교는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 선교사는 현재 400여 가정이 러시아 곳곳에서 복음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 故 조용기 목사님이 이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역사적 대 집회를 갖고 복음의 바람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이제 또 러시아는 푸틴의 독재 권력하에서 제국의 탐욕에 불타고 있다. 고르비의 죽음도 국장으로 치르지 않고 장례식에 불참하는 등 고르비의 소련 제국화 포기에 불만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일으키고 온 세계에 호전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북방의 괴물 푸틴의 러시아를 순화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복음임을 깨닫게 한다.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는 예언했다. 적그리스도 북쪽이라는 표현 아래 곡과 마곡이 이스라엘을 깊이 괴롭힐 때 하나님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겠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설파했다. 에스겔 38장과 39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사명과 소망을 던져주고 있다. 공산 사회주의의 본거지 러시아를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역사의 깊은 곳에 복음의 행함이 함께 깊이 자리를 잡아 나가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간절한 소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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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2-09-1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6: 추석(秋夕)에 대한 분석과 기독교적 입장
    I. 서언(序言) 어렸을 때, 동심에 젖은 설레임으로 설날과 함께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있었다면 바로 추석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불신자였든 필자로서는 이 추석은 세시풍속(歲時風俗)의 하나인 차례(茶禮)를 지내는 일로인해 많은 부담감을 가진 날이기도 했다. 바로 오는 10일이 우리나라 고유 명절의 하나인 추석이다. 이에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기독교인으로서 이 추석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추석(秋夕)이란 말의 의미와 유래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중추절(仲秋節) 혹은 중추가절(仲秋佳節), 가위, 한가위로 불리어 진다. 원래는 한가위라고 했는데 ‘한’이란 말은‘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란 말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 때 배를 짜는 여인들이 ‘길쌈’을 하며 놀이를 하는 ‘가배(嘉俳)’에서 유래된 말로서 나중에‘가위’라는 말로 변형되었다. 또한 ‘가배’란 말은 한자어로서 가운데 중(中) 또는 반(半)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한가위를 가을(秋)의 반, 즉 중추(中秋)의 의미를 담아 중추절 혹은 중추가절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음력으로 8월 15일 중추의 저녁에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이 뜬다는 의미에서 달과 연관된 저녁 석(夕)자를 포함하여 추석(秋夕)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이때는 온 들판에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는 시절이다. 그래서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과 첫 곡식을 거둔 기쁜 마음에서 만월인 8월 15일에 길쌈놀이의 유래와 함께 기쁘고 즐거운 날의 명절로 지켜지게 된 것이다. III. 추석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인 차례(茶禮) 추석의 의미와 그 유래로 볼 때에는 우리 기독교인으로 볼 때에도 전혀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아주 아름다운 날로 장려할 만한 명절이다. 하지만 이 추석 절기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런 면에서 추석에 행하는 세시풍속과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추석의 세시풍속으로는 성묘(省墓)와 차례 등이 있다. 그러나 성묘에 대해서는 본고의 장례 용어에서 논한 바가 있어서 생략하고 차례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하겠다. 차례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제사제도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와 정사는 아니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등을 보면,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하는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가 있음을 믿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고구려의 음력 10월에 지낸 동맹(同盟), 부여의 12월의 영고(迎鼓), 동예의 10월에 술과 춤을 추며 지낸 무천(舞天) 등이 그러하다. 바로 이런 제천(祭天)행사가 지금의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일의 유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제사 행위는 고려시대까지 말 그대로 천신에 대한 제천행사였다. 즉, 오늘날과 같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조상숭배와 제사는 조선시대의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정착된 것으로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차례라는 말도 그 어원을 살펴보면 한자어 표현 그대로 다례(茶禮)라는 말이다. 지금은 제사상에 술을 올려놓지만 원래는 차를 올렸기 때문에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에는 조상의 죽은 날을 기억하며 윗대로 4대까지 지내는 기제사(忌祭祀)가 있다. 반면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모든 조상을 향한 제사이고, 또 시제(時祭)라는 제사도 있는데 이는 4대 이상의 조상의 묘를 직접 찾아가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IV. 기독교적 입장과 맺는 말 앞에서 논한 대로 추석의 근본적인 유래와 의미는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추수감사절의 의미와 다를 바가 없다. 간혹 어떤 교회들에서는 추석을 전후해서 추수감사절기로 지키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는 바로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근본적인 배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추석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감사절이요 아름다운 명절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상숭배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차례를 행하는 세시풍속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130여년의 역사 속에서 추석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현재의 짝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더 이상 명절이 괴롭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 가족과 일가친척들과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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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최호숙 목사] 진정한 유토피아를 찾아서
    육신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이상향(理想鄕)을 꿈꾼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움 속에서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곳에서 원망과 시비 갈등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쟁의 위협과 질병의 위협과 경제적 빈곤의 위협, 인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번민과 고뇌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일어나는 공통된 양상일 것이다. 이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 이상향(理想鄕)을 중국 대표 시인 도연명( 陶淵明, 365~427년)은 도원경(桃源境)을 그리며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곳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했다. 무릉도원의 유래를 보면 한 가난한 어부가 배를 타고 무릉 마을의 계곡 강줄기를 따라 올라 가다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진경을 보게 되었고 동굴 하나가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처음 보는 별천지 세계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왜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전쟁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와서 사는데 바깥세상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산다는 것이다. 그곳은 꽃들과 새소리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곳, 인정이 넘치는 곳, 그들로부터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곳을 나오려고 할 때 그들의 요구가 “바깥세상에 나가면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어부는 나오면서 다시 찾아오기 위하여 중간에 표시해놓고 와서는 고을 태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함께 다시 이 마을을 찾으려 했지만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를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무릉도원을 유토피아(Utopia)란 용어로 사용하는데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만들어낸 것으로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 이 단어의 유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헬라어의 ~을 부정하고 없음을 뜻하는 (ού)와, 장소를 뜻하는 (τόπος)를 합하여 “없는 장소 곧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현실 세계에 인간의 자력으로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무단히 노력을 해왔다. 대표적 인물이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막스-(Karl Marx)’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통해 유토피아적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이 건설할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성경은 분명히 있다고 설명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자력으로 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4) 이루지 못할 세상 유토피아를 세우려 한다거나, 이루어 놓은 알량한 물질의 만족 때문에 행복에 겨워 진정한 천국을 사모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성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사모하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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