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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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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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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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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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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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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기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다시 성탄절 주후 2022년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 크리스마스라고 말하지만 정작 이 날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이 빛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심으로 임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그리스도의 본질을 순전하고 흠 없이 보전하기 위하여 아담의 허리로부터가 아닌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날이며 “때가 차매, 아버지가 정하신 결정적인 시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4:4) 하신 날입니다.” 모든 구약의 율법이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를 뵈옵게 하심으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를 다시 지으신 날(딛3;4~7)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요1;5) 이 어둠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빛이 비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즉 세상은 자기 생활방식을 사랑합니다. 인간이 어둠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어둠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고전1:21) 우리에게 저녁 서늘한 무렵 하나님께서 동산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즉 타락한 에덴동산에 빛이 비친 것입니다. 이 빛은 120년간 방주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호소한 노아의 빛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탄식했던 롯의 빛으로 아브라함과 족장들, 이스라엘 민족과 선지자들,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그 빛이 계속 비친 것입니다. 모든 빛은 그에게서 나오고 빛의 본질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 분이 빛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사백여년의 어떤 선지자도 메시지도 없는 암흑시대를 지나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9:6) 곧 진정한 빛, 주님이 우리에게 임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포문을 여는 첫 장 마태복음 1장의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일곱 대가 여섯 번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일곱 번째 일곱의 시작이 되십니다. 성경에서 7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농부들은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는 안식을 취했습니다. 레 25장의 일곱 번째 일곱 해 중에서 마지막 해인 49년째 되는 해는 희년으로 모든 노예가 해방되고 모든 빚이 탕감되는 해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낳고, 낳고, 낳고의 연속이지만 이 안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보여주며 문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강조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내려오심'(강림)의 의미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주목해볼 것은 이 족보에 상상할 수 없는 다섯 여인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여인들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근친상간을 거론하는 다말, 물론 수혼제로 해석이 됩니다. 매춘부인 라합, 이름을 밝히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명시함으로 다윗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게 되는 밧세바, 사회 계층상 밑바닥에 가까웠던 겨우 15살의 어린 소녀 마리아... 심지어 헤롯왕이 그리스도께 보인 반응조차도 실은 이 모두가 다 우리의 영적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주일 하루 예배자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교회 문을 나서기 바쁘게 세상과 영적 간음의 배교의 자식들이고 항상 내 생각이 아버지의 말씀 위에 두는 자들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이러한 우리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외면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시어 “우리가 누구였든지, 어떤 사람이었든지” 이전의 우리를 개의치 않으시고 주님의 자녀로 가족 삼아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 다섯 명의 여인들 딱 중간에 룻이 자리하면서 에브라임지파와 유다지파를 하나로 모읍니다. 요셉은 유다지파 사람이고 고향이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사렛에서 나셨을까 생각해 보게 합니다. 성경에서 유다에게는 하나님께서 왕의 축복을 해주셨고 에브라임에게는 장자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두 축복을 다 가지고 있어야함을 봅니다. 신약시대의 시작을 예수님의 계보로 시작함은 복음은 삶의 도움이 되는 정도의 상담이나 충고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그의 모든 행하심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가 그냥 영웅담이 아니듯이 예수님의 탄생, 그의 성육신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 방방곡곡의 크리스마스는 이제 연말 파티용으로 전락되어 우리끼리 먹고 마시는 금송아지 파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크리스마스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우리에게 또 어김없이 빛이 비칩니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눅 2:11)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고백함으로 십자가를 알기도 전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신 주님도 훗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갑니다. 전쟁과 기근과 역병이 돌고 돌아도 하늘의 문은 닫히지 않습니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땅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며 위의 것을 찾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하며 코로나를 함께 겪어 나가며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처방은 최신의 백신이나 해독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사9:6)된 이 은혜의 선물, 이 빛을, 나의 예수님을 우리 함께 온전히 받아 누리는 복된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글. 이정은 사모(부산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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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1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5)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악하면 악인이고 생각이 선하면 의인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좋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좋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악을 싫어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립니다. 악은 죄요 죄는 관계를 깨트립니다. 악을 생각하는 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의 리더는 선을 추구하고 선한 것을 생각합니다. 선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말하고 행동하게 되니 관계가 잘 됩니다. 악의 소속은 사단이고 선의 소속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진 자는 선한 것만 생각하기에 지혜 자입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악한 생각을 조절 합니다. 미워하는 악의 생각을 버리고 사랑하는 선한 생각을 합니다. 사랑의 사람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좋은 것을 생각할 때 좋은 열매 맺게 됩니다. 사 랑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십니다. 말씀이 진리이고 의로운 말씀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마음이 온유하면서 불의, 죄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대하여는 NO 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죄가 있고 불의합니다. 세상은 정의가 없고 불의함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싫어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는 예수님, 말씀, 진실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진실, 공의, 정의를 추구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멀리하며, 진리를 구하는 리더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이 없고 불의를 행하며, 진실, 진리를 버리는 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리더가 누구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불의, 거짓을 기뻐하는 리더는 타락한 리더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불의와 거짓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의와 진리, 진실은 오래가며 관계를 세우는 지혜입니다. 리더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 가운데서 진실해야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이 최고의 지혜요 리더십입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영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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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황권철 목사] 선교지에서 순교한 도마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는 바벨론으로 갔다. 아마 바벨론에 최초의 기독교회를 세운 이가 도마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마는 또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가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1 도마가 인도 남부의 케랄라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전했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인도 남부 지역의 7개 초대교회는 도마가 세운 것으로 기독교 사역의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인도에서 고난을 당하고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시신은 현재 마드라스 교회 지역의 마알라토르에 묻혔다고 한다.2 도마는 두려움이 없는 전도자였으며 위대한 교회 개척자로 알려졌다. 도마가 기도하던 지하의 작은 굴 안에는 작은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에는 두 개의 작은 홈이 파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마가 양팔을 대고 기도하다가 생긴 홈이라고 한다.  도마는 인도 오토 릭샤로 첸나이 시가지로 20분쯤 달리면 성 토마스 마운틴(St. Tomas Mountian) 입구에 도착한다. 사도 도마가 원래 순교한 곳은 첸나이 시내와 공항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이다.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모사의 순교지에 세웠다는 “도마순교기념교회”가 있다. 교회 내부는 아치형 천장으로 성당처럼 꾸며져 있는데 생각보다는 초라하다. 교회 양쪽 벽면에는 주님과 열두 제자들의 순교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 했는지 기록도 있다. 교회 내부 앞 쪽에는 도마가 암석에 직접 새겼다는 돌 십자가상이 있다. 성 도마교회 안에 모셔져 있는 도마의 유해, 돌 십자가 옆에는 도마의 뼈 조각이 액자 안에 있었다. 사도 도마는 창에 찔려 순교했다. 산 정상에서 교회를 바라보면 마리나 해변의 해안선이 보이고 첸나이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1.5Km 정도 거리에 첸나이 국제공항이 있다. 무덤 교회는 순교지로부터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도마의 순교지와 무덤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무덤교회는 마리나 해변 근처로 5분 정도 거리에마리나 해변이 있었다. 순교 기념교회에 비하면 웅장한 건물이다. 흰색 고딕으로 건축된 성당 양식이다. 성전 내부에는 오래 되어서 칠한 곳이 벗겨져 있었고 군데군데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다. 성전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 단층 조그마한 건물에 유물을 전시 한 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사도 도마와 함께 했던 자들의 생활도구들의 유물이 있다.  1949년 6월 10일 카이로의 프랑스 판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정부는 이 귀중한 문서를 찾고자 애쓰고 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지금까지 이집트 땅에서 보존되어 오다가 발견된 가장 귀한 것 중 하나며, 그 학문적 중요성은 투탄카멘 왕의 무덤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극적인 발견보다 더한 것이라고 한다. 위 기사가 언급한 귀중한 문서란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3를 가리킨다. 최근 신약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도마복음은 나그함마디 문서가 전한 작품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어원문을 콥트어(Coptic)로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완전한 콥트어 판본이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었다.4 비록 정경과 같이 믿을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삭줍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다(요 2:23). 그래서 그들은 표적 보여주기를 원했고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표적 중에 표적이 사실 십자가의 표적인데 주님이 그것을 보여 주었을 때 그들은 정작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십자가는 당대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스칸달론(헬, 올무, 추문)이었다. 그러나 도마는 정면승부를 걸고 주님 앞으로 다가가서 그 현장을 확인하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가 표적만을 구하는 신앙에 머문다면 그 표적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 신앙 또한 처참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신앙은 지성을 희생하고서 얻은 것이 아니라 지성이 없는 믿음, 회의가 용납되지 않는 믿음이 오히려 위기를 자초하는 법이다.5 도마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 십자가 현장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그는 표적에 머물지 않고 표적을 행하신 주님에게 나아가 완전한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의심을 통해 더욱 확실한 고백의 자리로 나아가는 정직한 고백자였다. 우리에게 도마 같은 정직한 고백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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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김성수 총장] 성탄의 계절에 ‘주는 사랑’을!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말들이 많이 있지만 ‘사랑’(Love)이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결코 “눈물의 씨앗”이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를 이해하거나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에 관해서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애국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나라 사랑을 맹세하며 노래한다. 낭만적인 시인들도 사랑이 가득 찬 용어들을 구사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은 결국 따지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랑으로 나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필요에 의한 사랑’(need-love)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사랑’(gift-love)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우리가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안전하게 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사랑한다.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는 낭만적인 사랑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져 있을 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간 느끼는 낭만적인 사랑은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이와는 거의 정반대의 사랑이다. ‘주는 사랑’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하게 해 주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가져다주기를 원할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충족되어도 결국 공허하며, 더 충족되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넘쳐나는 사랑이며, 비어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채워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받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계속해서 주기를 원하며,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강렬하게 갈망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를 꾸며주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능력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건전한 인간관계는 이 각각의 사랑을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다. 사실 두 종류의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또는 가족이나 이성을 그리워할 때, 이러한 그리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원하게 만드신 것은 무엇이나 선한 것이다. ‘주는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본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성탄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계절을 맞고 있다.성육신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선물로 주신 ‘주는 사랑’의 가장 완전하며 대표적인 사건이다. 속죄사역 역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 희생 제물로 아낌 없이 내어 주신 사랑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행하는 모든 ‘주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의 사랑은 단지 인간적인 복사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복사품과도 같은 우리의 ‘주는 사랑’도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십계명은 바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순종과 충성과 헌신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롭게 행하는 것과 주는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이상을 줄 수 있다.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돌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그들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공평하게 대하는 정도를 한 걸음 더 넘어서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6계명은 우리가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공의란 나의 이웃의 삶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받은 나그네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공의롭게 행동했다. 이들은 그 나그네를 헤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그네를 보살펴 주었다. 그는 나그네에게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하였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해 준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공의를 넘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한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않게 지켜준다.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넘어 나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인도해 준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연적으로 온다. 사람들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그냥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법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 ‘주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실천하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훈훈해 질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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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2-07
  • [최호숙 목사] 도전(挑戰)에 응전(應戰)이 있는 신앙
    라이벌(rival) 또는 강한 자를 이기기 위해 투쟁하다 보면 언젠가는 상대를 정복할 때가 있다. 이 원리를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1d J. Toynbee-1889-1975) 는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법칙”이라고 했다. 정상에 서 있고 아무리 많은 발전을 일궈냈다 할지라도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할 능력이 없을 때에는 무사안일에 빠져 어떤 국가이든지, 어떤 문명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를 불문하고 소멸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사를 보면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패한 기록이 있고,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0:6패, 아랍 연합공화국 전에서 0:10 패배한 전적이 있다. 경제적 열세, 체력적 열세, 기술적 열세 모두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포기하지 않고 도전에 도전을 한 결과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있는 축구 실력의 보유국이 되었다. 2002년 세계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고 4강 신화를 이루었고, 2018년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기엔 제로(Zero)%의 상황이었지만 2:0 승리하였다. 2022년 카타르 올림픽 포르투갈 전에서 세계 언론들은 승률 9%라고 했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도전하였고 2:1로 승리하였고 도전에 성공한 것이다.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던 도도새는 비둘기목의 새이다. 천적이 없이 평화로운 환경과 풍부한 먹이 덕분에 날아서 먹이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도도새는 둥지를 견고하게 만들 필요도 없었고 알을 필사적으로 지킬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섬에는 알을 노리는 뱀도 없었고 맹금류도 없었고 포유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연속이 나태를 가져왔고 결국 날아다니는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경쟁 능력을 상실한 도도새는 후에 인간들이 들여온 개 고양이 돼지들에게 먹이를 다 빼앗기고 느려터진 움직임 때문에 인간들에게 잡히고 결국 도도새는 멸종되었다. 도도새라는 명칭은 15세기에 모리셔스 섬을 발견한 포르투갈인들이 날지 못하는 새를 발견하고 바보라는 뜻의 “도도(Dodo)”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도도새의 비극처럼 틀 안에 갇혀 도전도 없고 변화를 거부하고 퇴화하여 결국에는 위기를 자초하게 되는 현상을 “갈라파고스 증후군(Galapagos Syndrome)”이라고도 한다. 갈라파고스 증후군은 여러 분야에 적용되어 설명되는데 특히 경제에 관련되어 쓰일 때는 국제 표준이나 세계 시장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자국민의 양식이나 기술에만 만족하고 고수하다가 세계 산업기술과 시장에서 고립되어 경쟁력을 잃어 도태되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고난과 연단 도전의 과정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라면 바보같은 도도(Dodo) 또는 갈라파고스(Galapagos)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도전에 믿음으로 응전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교훈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아담은 마귀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고 패하게 되어 이 땅에 고통이 오게 되었다. 우리는 싸워야 하며 이겨야 한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는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고,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다”고 했다. 우리는 사탄의 도전에 응하여 싸워야 하며, 예수 이름으로 이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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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오태열 목사] 환상을 보라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 취업난에 시달리고,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리는 청년은 “88만원 세대”, 이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3포 세대”,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5포 세대” 인간관계와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7포 세대” 최근의 청년들은 모든 것도 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란 뜻에서 스스로를 “N포 세대”(N은 부정의 수를 뜻하는 수학적 용어로써 계속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젊은이들은 한국을 헬 조선이라고 말한다. 세상 청년들이 희망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숨 쉬며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하였다. 예언, 환상, 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아들, 딸, 젊은이, 늙은이, 모두가 내일을 향한 부푼 미래에 대한 소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령 받은 젊은이들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말한다. 성령 받은 늙은이들 또한 다르다. 세상 늙은이들은 은퇴로 말미암아 빈곤, 질고, 고독, 죽음의 두려움 속에 시달릴 때, 이들은 새 출발, 영원한 삶에 대한 꿈을 노래한다. 그래서 성령 받은 젊은이와 늙은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 청년들이 고작 좋은 학벌, 안정된 직장, 출세, 시집가고, 장가 가는 일 등, 온통 땅의 것을 꿈꾸고 있을 때, 성령 받은 젊은이와 늙은이들은 하나님을 찾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 성령 받은 자들의 인생은 더이상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초라한 인생이 아니다. 이들은 벅찬 감격으로 주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비전을 고백한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성령 충만하여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젊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이여! 환상을 보라, 그리하여 미래를 노래하라, 그리고 기도에 힘쓰며 성령 충만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초인이 되라. 여러분들의 삶이 성령이 주시는 벅찬 꿈과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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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조희완 목사] 생각의 차원 (잠23:7)
    옛날에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에 어느 한 곳에서 점쟁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이 타고 가는 나귀가 만일 세 번 방귀를 뀌면 당신은 죽을 것이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행자는 “웬 별 미친놈의 소리를 한다.”하고 그 점쟁이의 말을 일축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까 나귀가 방귀를 뀌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점쟁이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계속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서 한 여관에서 묵고 가려고 여관 앞에 도착을 했는데 나귀가 또 방귀를 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더욱 점쟁이가 한 말이 생각나서 영 기분이 언짢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점쟁이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방귀를 뀌지 못하도록 돌멩이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가지고 나귀의 똥구멍을 단단하게 틀어막았습니다. 여행자는 그날 밤에 영 불안한 생각이 들면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귀가 무사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나귀의 꼬리를 들고 똥구멍을 들여다보는데 그때 마침 나귀가 참았던 방귀를 새게 뀌는 바람에 틀어막아 놓았던 돌멩이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머리를 맞아가지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에 그만큼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영양을 받게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러나 생각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좋은 생각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한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잠23:7) 둘째는, 항상 신앙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렘6:19) 셋째는, 항상 소망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전9:4) 합당하고 좋은 생각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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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오성한 목사] 바른 믿음(4)
    육의 사람은 육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육의 생각을 하고 세상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하게 된다. 거품을 물고 세상 이야기를 하며 산다. 세상의 삶이 습관이 되어 있어 세상이야기가 더 편한 것이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영으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영의 삶이 습관이 되어져 영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더 편해진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갔는데 그 곳에서 가진 마음이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생각이 그의 습관이었다. 영의 습관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더 쉬게 만들었다. “우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어.”하고 뜻을 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다니엘에게 더 쉬운 일이었다. 뜻을 정한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가 꿈꾸며 생각하고 상상했던 대로 믿음의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단1:15). 더 나아가 왕 앞에서 그들은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1:20)라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다니엘이 잘 살았기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복을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에 복을 받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바른 믿음인 임마누엘로 출발했던 것이다. 뜻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은 육의 생각이 아니다. 바른 믿음으로 출발해야 뜻을 정할 수 있다. 바른 믿음으로 출발해야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울 수 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했다. 반복해서 말씀을 묵상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면 담대해 진다. 계속 기도하면 담대해 진다. 예레미야는 스스로를 “나는 아이라”(렘1:6)라고 분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한 결과 담대해 졌다. 예레미야 26장에 보면 예레미야를 붙잡아 죽이겠다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담대하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담대히 말한다. 얼마나 담대한지 보라.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렘26:14-15). 그런데 예레미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우리야 선지자는 무서워 에굽으로 도망을 갔다. 여호야김 왕은 몇 명을 보내 우리야를 잡아오게 한다. 그리고 칼로 죽였다. 그리고 그를 평민의 묘지에 장사했다.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렘26:23). 담대했던 예레미야는 도움의 손길을 만나 살았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예레미야 26장 한 장 안에 예레미야와 우리야 선지자를 대조해 놓고 있다. 인간의 생각으로 도망하면 살 줄 알았다. 우리는 영적 습관을 가져야 한다. 자꾸 반복해서 임마누엘을 말해야 한다. 이미 주신 생수의 강을 말해야 한다. 임마누엘을 습관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점점 강해짐을 볼 것이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훈련을 자꾸 하면 강해진다. 앞에 이야기한 조 집사님을 위해 기도할 때 기도하고 구한 것을 그대로 그리는 담대함이 생겼다. 반복해서 주장하고 기도하니 그런 마음이 생겼다. 본인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할 때 담대한 확신이 왔다고 말한다. 믿음의 출발은 이미 주신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력으로 더 받아 내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배에서 샘이 터졌다.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 성령의 능력이 넘쳐난다고 믿고 출발해야한다. 이전의 나는 더 노력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오래 동안 생각하며 예수를 믿었다. 지금은 이미 예수 능력이 내 능력임을 믿고 출발한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이겨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임마누엘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어디를 가도 괜찮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다. 하는 말이 무엇인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고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출발했다. 골리앗의 이름이 골리앗 된 이유는 돌에 맞아 쓰러지면서 “아이구! 골이앗!”이라고 해서 이름이 ‘골리앗’되었다고 어머님께서 어릴 때 재미있게 이야기 해 주신 일이 잊혀 지지 않는다. 당신은 매사에 어떤 출발을 하고 있는가? 출발이 믿음이어야 한다. 출발을 또다시 점검하라. 이루어 주신 믿음에서 출발하며 살아라. 은혜에 설득되어 믿음으로 받아 바른 믿음으로 출발하자. “나는 성령의 사람이다.” “나에게 성령의 역사가 넘쳐난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 넘쳐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자꾸 바른 믿음으로 고백하고 읊조려라. “주님 오늘 잘 잤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 힘을 얻습니다.”라고 늘 고배하라.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루의 삶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산다. 하나님과 믿음의 대화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돼. 죄 안 지어야지. 이겨야지.”하고 긴장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수하게 된다면 빨리 회개하고 또 바른 믿음으로 임마누엘의 길을 가야한다. 계속된 훈련을 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진다. 말씀으로 돌아오고 기도로 돌아오는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라고 했음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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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2: 12달과 달별 명칭의 유래
    I. 서언(序言)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남겨둔 체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한 해를 기획해 보는 이즈음에 달력의 역사적인 유래와 B.C와 A.D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연호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를 지난 호에서 논하여 보았다. 오늘의 본 호에서는 매달의 이름과 한 주간의 요일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12달의 유래 1. 한 해의 첫 달에 대한 고대의 견해 :인류가 고대로부터 첫 달로 여겼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주로 따뜻한 봄이 왔을 때 쯤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본 것 같다. 이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도 봄을 한 해의 기점으로 보았다. 봄이 시작하는 첫 달부터 가을에 해당하는 열 번째 달까지만 이름이 있었고, 겨울의 두 달에는 원래는 이름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머지 두 달에도 이름을 붙이면서 그 두 달을 일 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달로 정했다. 1월을 뜻하는 January와 2월을 뜻하는 February가 바로 그것인데 이것이 나중에 일 년 중 가장 앞자리로 되면서 두 달씩 뒤로 됨으로 인해서 추운 겨울에 새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또한 12월은 영어로 December인데 그 어원인 Decem은 라틴어로 10이란 숫자이고 영어 ~ber는 ~번째 달이란 의미이다. 이는 원래 10월이었는데 1,2월이 앞서 들어오면서 두 달씩 뒤로 밀려 오늘날의 12월이 된 것이다. 11월을 뜻하는 November는 nine(9)이란 뜻이고, 10월을 뜻하는 October 역시 여덟 번째 달이란 뜻이며, 9월의 September도 본래 뜻은 일곱 번째란 뜻이 내포되어있다. 또한 당시 로마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달력의 이름으로 이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양력을 로마에 도입한 카이사르는 자기가 태어난 7월을 자신의 이름인 율리우스의 달의 명칭으로 했는데 바로 영어의 July이다. 또한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황제도 8월을 자신의 달로 부르게 해서 오늘날 영어로 8월이 Augustus가 되었다. III. 12달 명칭의 유래 로마 시대에는 1년을 지구가 태양을 도는 365일로 정하고 달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는 1년을 열 달로 했고, 폼필리우스 왕은 열 달 앞에다 두 달을 추가하여 열두 달로 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12달의 월별 명칭을 영어 표기로 보면 다음과 같다. 1월 January : 누마 폼필리우스가 추가한 달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야누스가 얼굴이 두 개인 것은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을 질서로 이끌어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뜻으로서 이 달을 첫 달로 지정했다고 한다. 2월 February : 누마가 추가한 두 번째 달은 '정화, 청결'을 뜻하는 라틴어 '페브루아(Februa)'에서 유래되었다. 3월 March: 로물루스가 만든 첫 달로 전쟁의 신인 Mars에게 바치는 달이란 라는 뜻이다.. 4월 April: 아프로디테(Aphrodite, Venus)에게 바치는 달이었다. '시작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아페레(Aperire)'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5월 May: 헤르메스의 어머니이자 유모라는 뜻을 지닌 마이아(Maia)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6월 June: 결혼의 신이자 주피터(제우스)의 아내인 '주노(Juno)'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7월 July: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줄리우스 시저)가 자신 의 이름을 붙여 만든 달이다. 8월 August: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율리우스력을 완성한 옥타비아누스가 위대하다는 뜻으로 붙인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9월 September, 10월 October, 11월 November, 12월 December: 라틴어에서 각각 7, 8, 9, 10을 뜻하는 셉템(septem), 옥토(octo), 노웸·노벰(novem), 그리고 10을 뜻하는 데켐(decem)에서 유래했으나 누마가 추가한 1,2월에 밀려 9, 10, 11, 12월이 되었다. IV. 결 어 이상에서 본대로 12달의 월별 이름은 주로 로마제국에서 제정된 태양력을 기준으로 된 것으로서 주로 신들과 왕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를 반 기독교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친 기독교적인 명칭으로도 볼 수는 없다. 이런 경우는 다음에 논한 요일의 명칭도 마찬가지다. 유래를 알고는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논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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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신재철 목사] 별 세 개와 막대기 세 개의 새벽기도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다.” 입대하기 전 위로로 많이 들었던 말. 맞는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적응이 되었다.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청소하고, 잠을 잔다. 학업과 사역을 병행할 때 비하면 오히려 안정적이고 몸도 건강해지고 있다. 여유가 생긴 걸까? 무섭게만 보였던 나이 어린 소대 선임들도 평범한 20대 청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의지가 되었던 선임 군종병은 한 달을 후 전역했다. 연대에 군종병 보직 인가는 1인이었기에 인수인계를 마치지 못하고 선임은 떠났다. 아니, 전역했다. 업무가 익숙하지 못해 어려움은 있었지만 선임이 없다는 것은 ‘개꿀’이다. 입대 전 두려움은 사라지고 생각보다 군생활은 평안했다. “신대원 졸업했으니깐 내가 못 나오면 직접 새벽기도 인도하면 돼.” 군종 목사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민간이나 군이나 교회에서 새벽기도 펑크는 사역자에게 늘 긴장되는 영역이다. 나보다 두 살 위 목사님도 그런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목사님이 힘들 때, 일어나지 못했을 때 새벽기도 인도하는 것이 큰 부담은 아니다. 성경책에 늘 짧은 설교 한편 넣어두면 그만이니깐. 하지만 그 명령은 단순한 예방 차원의 대비책이 아니었다. 그 후 6개월간 목사님은 새벽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인도하게 되었다. 주석은 커녕 신앙 서적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6개월의 새벽 설교는 만만치 않았다. 주간에 해야 할 업무에 다음 날 새벽 설교가 더해졌다. 군생활에 적응하던 내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했고, 반면에 군종 목사님의 얼굴은 평안으로 충만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또한 적응되었다. 군 가족들과 함께 하는 새벽기도는 내게 좋은 훈련이 되었고 민간목회를 준비하기 전 스트레칭과 같은 준비운동이 되었다. 중대 행정실 화이트보드에 적힌 ‘매일 군종병 4시 30분 기상’ 메시지는 충분히 고난 받는 군종병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누구도 연대 군종병은 편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침 점호 열외를 문제 삼지 않았다. 군행정도, 군교회 사역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문제가 생겼다. 군단급 훈련이 우리 연대에서 진행되었다. 부대의 모든 부서가 긴장하며 훈련을 준비했다. “군종은 어떤 준비를 하면 됩니까?” 군종 목사님에게 물어봐야 소득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인사장교님에게 질문했더니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하길. “모르겠다. 그냥 눈에 안 띄게 잘 숨어 있어라.” 일단 다른 병사들과 같이 위장크림을 바르고 소총을 휴대하며 전투준비 상태로 교회에서 근무하게 된다. 낮 밤이 없는 훈련이었다. 식사는 전투식량으로 대체 되기도 하고 위장크림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본부에는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장군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적당히 숨어서 큰 훈련도 넘어가는가 싶었다. “군종병! 얼른 깨워라!” 상황실에서 군종병을 급히 찾는다며 근무자가 급히 나를 깨운다. 훈련 중이라 불편한 잠을 자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상황실에 불려간다. “군종병아 큰일 났다. 군단장님이 새벽기도 가신단다. 군종 목사님은 연락이 안 되고 니가 어떻게 좀 해봐야겠다.” 그 똑똑한 장교들이 군단장님의 종교행사 참석 의지에 아무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군종 목사님이 연락이 닿지 않자 급한 대로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훈련 기간이라 그나마 새벽기도 없어서 좋았는데. 갑자기 믿음 좋은 장로님이라는 군단장님이 미웠다. 교회는 내 구역이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든 장군이 입장을 하든 긴장하지 않는다. 늘 하던 예배를 진행하면 그만이다. 다만 내 단잠을 깨운 이 상황이 불편할 뿐이다. 익숙하게 예배당 불을 켜고 찬양을 튼다. 장의자 앞자리에 앉아 기도하는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보다 발소리가 많다. 시간이 되어 강대상에 올라 전면을 바라본다. 별 세 개의 장군님. 그리고 옆에는 우리 연대장님과 참모 장교들이 앉아 있다. 불신자, 타 종교인이 교인이 되는 기적의 현장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상병 계급장이 붙여진 방탄모를 벗어 강단에 올려둔다. 어깨 메어 걸쳐진 소총은 강단 옆에 세워 둔다. 그리고 하던 대로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나의 마지막 기도로 새벽예배는 끝이 났다. 군종장교의 부재에 문제가 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조용히 일이 마무리되었는지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내 손에 휴가증 하나가 주어졌을 뿐. 군단장님이 설교하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연대장님에게 물었다는 후문이 있다. 나는 주의가 필요한 인물이었을까? 문제 있는 관심병사였을까? 연대장님은 나의 학력, 이력, 애가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보고 드렸고 군단장님은 휴가 한번 보내주라며 큰 웃음을 지었다 한다. 휴가 명령. 군인에게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상황을 준비하신 그분께 감사하며 외쳤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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