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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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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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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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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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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현대사회는 과학과 과학 기술 등 여러 면에서 굉장한 승리를 쟁취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전례 없는 부정과 부패, 불공정, 불의, 고통 그리고 비극에 깊이 빠져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선택의 범위를 구가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은 거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바로 그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영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치테러와 고문이 그들의 항존적 환경이 되도록 지원하거나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부정의한 현실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심각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늘의 평강(샬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강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떨림과 환희가 있는 샬롬은 공의로운 상태 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많은 조건들과 상황들은 공의도 마찬가지로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간의 의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는 공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언제나 샬롬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방직 공장 안에 어린아이들을 가두고, 자연 자원들을 함부로 낭비함으로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착취하며, 자국 영토의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는 불의한 국가이며, 이와 같은 사회와 국가는 공의를 파괴하며 필연적으로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냉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재판 과정, 법적 절차, 감옥 등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질상 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의와 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 역시 공의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권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천부적 인권, 유엔 회원국의 권리, 권리 헌장 등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며 고양된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리의 의미를 공의와 관련하여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 그것을 실제로 향유함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누림에 있어서 직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에 대한 주장을 의미합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이 권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리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리는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림에 대한 주장입니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하면 그 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는 그 어떤 것을 누릴 때에 일반적이거나 심각한, 그러나 고쳐질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의 사회적보장을 주장합니다. 위협에 대해서 보장하라는 주장을 권리로 보는 것은 권리가 사회에서 약자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리를 우리는 자기 방어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발언과 참여의 권리, 그리고 안전과 생계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안전과 생계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과 생계권은 그것이 없다면 모든 다른 권리가 의미가 없어지며,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권리들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만큼 삶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많은 다른 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과 생계권보다는 임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과 가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협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살롬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기아에 있는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육체적으로 그 어려운 자를 공격하는 것만큼 그 주린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공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에 공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실제적 원칙은 공의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의가 요구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한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의 공정한 몫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하는 공의의 본질은 현대 서구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의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공의와 권리의 문제를 인간 존재의 아주 섬세한 조직과 같이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나 감언이설의 의식이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것임을 갈파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호소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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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박동철 장로] 이념의 전장(戰場), 교회가 분명해야할 때다
    제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정국은 새 정부 출범을 준비하는 분주함에 들어갔다. 어느 선거보다 국민 관심도가 높았고 그만큼 투표 현장의 열기도 뜨거웠었다. 밤샘 개표 현장은 쉽게 떠날 수 없는 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윤석열 당선인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축하를 보낸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왜 이렇게 네거티브의 극단이라 할 만큼 상대 허물만 찾는 선거였을까. 그리고 진영의 위치에서 한순간도 양보 없는 초극 대립된 선거였을까. 선거의 뒷담이 국가사회발전에 던져주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또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의 사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선거 결과를 두고 볼 때 지난 5년의 정권은 진보 이념의 세력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 촛불세력들이 5년간 국가관리에 너무도 부족함을 드러냈다. 대표적 실패가 부동산 정책.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도 컸다. 실험적 임금고용정책의 실패 등등이 있지만 평화를 내세운 대북정책이 북한에 굴종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친북좌파정권이라는 혹된 평가를 받고 정권을 내놓게 되었다. 사실 반일 친북의 기조 속에 국민을 갈라치기 함으로써 더더욱 국민의 정서에 상처를 냈고 혹된 비판을 받았다. 우리 교회가 민감했던 부문은 우리 사회에 소리 없이 들어온 유물론의 산물, 평등사회로의 전환준비를 위한 제반 법들을 만들어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교회 복음을 옥죄게 하는 제도가 생기는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이에 사실상 반정부입장으로 악법들 제정에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회갈등이 심화된 것은 지난 5년, 정권을 운영해온 주체들이 지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극단 친북 인사들의 정책주도에 따라 나타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많은 혼돈이 일어났다. 국가는 이념의 싸움판에서 몸살을 앓았다. 헌법 이념과 대한민국 건국을 두고도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북한을 향한 통일의 제안과 소통은 필요하지만 공산주의 집단을 미화시키는 일은 용납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뜻한 가슴으로 통일을 논하되 도발의 북한에 대해서는 냉철하고 단호해야 한다. 지난 정권에는 이러한 대처가 없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이념의 전장(戰場)이 된 원인이다. 보수의 진영에서는 최대의 위기라는 진단과 함께 정권교체의 큰 장이 형성된 것이다. 복음에 사는 교회는 어떠한가. 지난 5년 동안 악법 제정을 막기 위한 투쟁에 교회가 나섰으며 애국운동이란 화두에 성도들이 편승했다. 걱정되면서도 중요한 것은 교회 내 세대 중심의 시각차가 엄청나다는데 있다. 이념 투쟁이 되어버린 나라, 그 중심에서 교회가 복음을 맘껏 전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데 혼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보수적 이념 논쟁에서 이해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전후세대 한국 근대사를 몸으로 알지 못하는 세대 또한 이념의 공격이 얼마나 교회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데 낙관하는 점도 있다. 교회를 이끌고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와 장로들의 시각이 난처할 때가 많다. 장로의 기도가 다르고, 집사의 기도가 다른 교회 현장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혼미함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정권교체와 새 정부가 출범하지만 또다시 이념의 전장은 생겨날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에 이기고 졌지만 이념의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 같은 나라의 걱정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 교회가 분명해지지 못하고 혼미해가서는 안될 일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를 지켜내고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세워갈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가르치는 지금의 때가 아닌가 싶다. 복음을 공격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 평등법 기독사학 관련 등 많은 법들이 국회에 상정되어있다. 너무 현안이 많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분명히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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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2-03-15
  • [하수룡 장로] 진정한 목회자
    요즘 신학교 입학은 재수는 필수이고 보통 삼수를 하는 것이 상례라고 알려져 있는데 양질의 우수한 목사를 양육하여 배출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시작할 때와 다 마치고 목사가 된 후의 모습의 차이로 많은 성도들의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여 분쟁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때만 하더라도 목회자의 사례가 형편없었다. 가정을 가진 목회자는 자녀교육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환경이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하며 수많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충분히 되고 남았다. 그 당시의 목회자들은 오늘날처럼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은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잘 가르쳤고 경건생활을 제대로 하도록 잘 양육한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성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존경을 받는 분이지만 작금에는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목회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 설문 조사에서 청년들이 꼽는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였다. 청년 사역자들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여’ ‘교회의 비상식적인 모습’ 이었다. 최근에 어느 교회의 목사가 개척한 교회를 눈물로 부흥시켰지만 결국 자만하여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주역이 되어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분노케 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목회보다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회를 진행했기 때문에 교회는 빛을 잃고 성도는 실망과 혼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또한 진정한 목회자가 되지 못한 목사를 소수의 추종자들이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성도를 험담하고 욕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따라서 그런 목사가 진정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을 수 없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여 희망이 없다할지라도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는 진정한 목회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분열이 있을 수 없고 비로소 모든 것이 바로 선다고 확실히 믿는다. 의지할 곳이 없는 혼돈한 지금은 수백만 성도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전 국민의 귀감이 될 존경 받을 만한 진정한 목회자 한 사람이 절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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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03-08
  • [신재철 목사] 500원으로 시작된 삶
    오늘도 츄리닝 차림에 칫솔 들고 동생과 목욕을 다녀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오던 삶의 패턴이다. 늘 가벼운 걸음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고등학교 첫 수능모의고사 결과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까지 버티던 성적이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중학교 때는 전교 10등에서 20등을 오갔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 받아든 첫 성적표는 반에서 10등이라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늘 벼락치기로 성적을 유지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무 큰 폭으로 떨어져서 믿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며 큰 꿈을 품고 부모님을 떠나 대전으로 왔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경찰대학을 가서 간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나도 부모님의 소원대로 이제는 화이트칼라로 양복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동자이신 아버지의 삶을 보았기에 부모님도 나도 더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두 날개를 가지고 성공할 것이라 믿고 달려왔다. 첫째는 공부 잘해서 꼭 성공하겠다는 것. 둘째는 도덕성으로 꼭 성공하겠다는 것. 착실하게 공부해서 내 삶을 멋지게 만들어내고 싶었다. 양복입고 출근하며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의 배웅을 받는 것? 아, 집은 밝은 톤의 아파트이면 좋겠다. 하지만 내 나이 열일곱에 벌써 한쪽 날개가 꺾여버렸다. 추락하는 것 같다. “다 끝났어.” 시험 한 번에 이런 바닥을 경험 할 수 있구나. 고1, 4월의 어느 일요일은 그렇게 우울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 날이 내 인생을 뒤집는 또 다른 하루가 될 것 역시 예상 못했다. 평소보다 말없이 목욕탕에서 돌아오던 길, 동생은 이유도 모른 채 형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 거의 도착할 즈음 집 앞의 작은 교회에 눈이 머문다. 늘 걷던 길인데...... “이곳에 교회가 있었던가?” 갑자기 어린 시절 잠시 다녔던 교회가 떠올랐다. 교회 가자며 빵으로 나를 유혹했던 농협 아저씨. 종이 괘도에 그려진 악보를 따라 즐겁게 부르던 노래. 늘 좋은 향기를 내셨던 선생님. 내게 교회는 좋은 곳이었다. 성탄 연극 연습하며 마구간 동물 역할이 주어져 섭섭함에 교회를 끊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교회를 다니고 있었을까? 갑자기 눈에 들어온 교회로 생각이 많아졌다. “교회 다녀볼까?” 결정은 아니지만 끌림이 있었다. 동생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지금 생각해보면 왜 동생을 돌려보냈을까 싶다.) 나는 나무 냄새 짙은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30여명 모여 예배하는 중이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마치 나 어릴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으로 관객이 되었다. 그리고 헌금시간, 봉사를 맡은 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친구 사이를 오가며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이 가장 뒤에 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나에게까지 왔다. 바구니를 내 앞에 들이민다.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예배 동참했으니 헌금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전해온다. 나는 초코렛을 많이 좋아했다. 큰 사각형 초콜렛이 당시 500원이어서 늘 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하나 정도는 넣고 다녔다. 마침 내 추리닝 주머니에 500원이 있었다. 고민했다. 짧은 시간, 고민은 길었다. 그리고 아이의 착한 눈을 피하지 못하고 500원을 헌금바구니에 넣고야 만다. 그제야 평안한 얼굴로 아이는 강단으로 돌아갔다. “그래, 교회 다녀보자!” 그렇게 신앙을 가슴 한 귀퉁이에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신앙이 나를 이끌어주며 꺾이지 않는 날개가 되었음은 부인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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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오성한 목사] 중언부언
    신약에서의 기도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라고 하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길쌈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기르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이 꽃 보다 못했다”고 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희의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채운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도하란다. 주기도문을 말씀하실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8-9)라고 가르치심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이방인의 기도와 완전히 다른 것이 우리의 기도다. 기도를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알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알고 하는 기도다. 비인격적인 것을 간구하는 기도는 이루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인격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는 한두 번에 족하다. 그리고 믿고 기다리면 된다. 인격적인 기도는 반복해도 좋다. 단순한 표현이고 반복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지만 반복할 때 더 친밀해진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으로 가득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능력이 저에게 넘쳐 남을 감사합니다.” 등의 약속을 묵상하며 고백하는 것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하셨다. 받은 줄로 믿고 하는 기도는 구약에 기도의 가르침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속을 품고 있는 것이 기도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을 약속하셨다. 영원토록 함께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 저는 임마누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감사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고 하나님께 올려 드려라. 그리고 자신에게도 말해 줘라. “성한아, 너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아들이야. 너는 어디를 가든지 두려울 것 없어. 오늘도 승리의 날이야.”라고 말하고 기도하며 감격과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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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박봉석 목사] 방법보다 방향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마차를 만났습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태워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대답했습니다. “한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나그네는 잠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마부에게 묻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그 말에 나그네는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 그 말을 듣고 마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이 탈무드의 이야기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방향이 맞으면 설령 늦어도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속도를 높인다 하더라도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모자를 측은히 여겨서 아들을 고치기 위한 성금을 모았습니다. 마을의 의사도 이 소문을 듣고 감동을 받아 아들을 무료로 고쳐주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수술 날이 잡혔고 수술은 다행히 대성공이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의사에게 정성껏 감사하는 인사를 하고 그때부터 아이에게 걷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들은 마침내 다른 아이들처럼 걷기도 하고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마을을 떠나 도시의 병원으로 전근을 갔던 의사는 우연히 그 아이 엄마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의사는 자신이 고쳐준 그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부인 그 때 그 아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요?” 엄마는 머뭇머뭇하면서 얼른 대답을 못하다가 마지못해 말했습니다. “지금 내 아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로 형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놀라고 실망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의사를 향하여 이 엄마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저는 그 아들에게 걷는 법만 가르치려고 애를 썼지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는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걷는 방법을 익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곳은 걷는 방향입니다. 그것은 인생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길을 화려하고 세련되게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떵떵거리며 산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비록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바르다면 그 인생은 성공작입니다. 왜냐하면 심판 주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느냐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얼마나 그 목적을 따라 살아왔느냐를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바른 사람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거룩한 사람은 삶 또한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닌 방향입니다. 신발을 신을 때마다 일부러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어디고 가고 있는가?”를 늘 물으십시오. “아 나는 지금 믿음의 길 가고 있고 생명의 길을 가고 있고 천국의 길 가고 있지. 그러니 후회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네.” 늘 그 확신으로 살 수 있다면 최고의 인생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인생은 화려한 인생이 아닌 목적이 바른 거룩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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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김성수 총장]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
    미국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주 미시간(Michigan)에 소재하고 있는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의 이념적 기초를 놓은 학자로 존중받고 있는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 박사는 1970년대에 경향성 학습(Tendency Learning)을 강하게 주창한바 있습니다. ‘경향성’이란 나타나 있는 어떤 모습이라기 보다는 숨어 있는 속성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표면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타나는 특성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이 녹고, 유리에 압력이나 충격을 가하면 유리가 깨어지며, 자석에 쇠붙이를 가까이 하면 자석은 그 쇠붙이를 끌어 당깁니다. 이때 ‘녹는 성질’, ‘깨어지는 성질’, ‘끌어당기는 성질’ 등이 바로 경향성이라는 속성입니다. 경향성 학습이란 ‘학습이나 훈련 과정의 결과로 학습자편의 이와 같은 어떤 경향성을 증진시키거나 감소시키는 학습’을 의미합니다. 월터스톨프가 경향성 학습을 주창한 이유는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관점이나 사고를 형성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형성해 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적 표식을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 당시 부산지역 교계 지도자 초청만찬회에 강사로 초청된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분들 중에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여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바쁜 일정 속에 시장실에 찾아 온 교계 인사 가운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길게 기도할 때는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흘러듣기에는 무엇인가 뼈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스럽게 표시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 어떤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리스도인 됨의 숨은 속성을 어김없이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마리아인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행동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행동 경향성을 어떻게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월터스톨프에 의하면 여기에는 훈육, 모델링, 그리고 이유 제공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전략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인 행동에는 보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에는 불유쾌한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은 학습자의 경향성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방법 역시 경향성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교회 수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는데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고 깊은 바닷물을 짜게 하는 것은 0.3%의 소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나 행사가 없어도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는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신앙을 삶 속에서 어김없이 구현할 수 있는 행동 경향성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부패해가는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차세대를 향해서 이와 같은 행동 경향성을 형성시켜줄 수 있는 효율적인 학습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훈육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해 버렸으며,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했고, 또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거나 행동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언약의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모와 교사된 우리들이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현대교회는 특별히 세상을 향해서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지자적 용기와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현장 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모델링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절연되거나 세상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악마와도 같은 한 사람 독재자로 인해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금 받은 고귀한 생명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델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나게 떠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신앙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어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용사들로 양육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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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4
    I. 서언(序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에는 오늘 논하고자 하는 큰 대(大)자도 그 중의 하나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대(大)자를 쓰는 단어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산, 대가족, 대궐, 대감, 대청, 대교, 대 심방, 사대문 등등 대자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규모가 크지 않는 것도 크게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큰 大를 사용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 이유가 있다면,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 같은 대국에 비해 소국의 서러움을 안고 살아왔다. 현대에 와서도 중국 뿐 아니라 미국 같은 대국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뼈에 사무치도록 아주 큰 민족이다. 이러한 사대주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언어문화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그 많은 용어들 중에서 특히 큰 대자를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해 온 것도 그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II. 교회용어에서의 큰 대(大)자의 남용 1.대예배(大禮拜): 보통 주일 오전 예배를 두고 말할 때 대예배라고 칭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예배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고,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인식과 용어 사용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와 소 예배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학적인 면으로 볼 때 예배는 항상 무한한 크신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행위이기 때문에, 차별적 뜻을 가진 대소(大小)나 다소(多少)의 뜻을 가진 말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2.주일 낮 예배 : 필자의 어릴 때만 해도 주일에는 낮과 저녁으로 나누어 예배를 드렸다. 이로 인하여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 예배라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오후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많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관계로 인하여 대예배나 주일 낮 예배라는 말 보다는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 주일 저녁예배 등으로 명칭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또 어떤 신학자는 모두 함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공동예배”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어법상으로 맞는 명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3.대예배실과 소 예배실 : 예배실이 여럿 있는 교회당에서는 예배실을 구분하기 위해서 대, 중, 소로 나뉘어서 명칭을 붙인다. 이는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의 대, 중, 소는‘예배’란 말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場所)인 ‘실(室)’을 수식하기 때문에 장소의 대 소에 따라 대 예배실, 중예배실, 소 예배실로 나누는 것도 무방하다. 하지만, 예배실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는 대 예배실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잘못 된 경우이다. 4.대 심방: 흔히 전 교인 가정을 심방할 때“대 심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어법상으로 다소의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심방이란 명사 앞에 접두어 大자는, 대상의 다수적 범위와 사물의 수량적 전체규모를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이런 논리로 보면 작은 규모의 심방은“소 심방”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심방은 대소로 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볼 때 대심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전체심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고, 만약 이것이 매년 정기적으로 하는 심방이라면 “정기심방”이라는 말도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 볼 때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흔히 쓰는 교회의 각종 예배적인 용어인데도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되는 용어들이 아주 허다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은 일부 예배학자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소견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합한 바른 용어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도 다 같이 연구하는 자세로 올바른 교회 언어문화를 창출 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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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조희완 목사] 낙심은 금물 (눅18:1-8)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되면서부터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술 소비량에 전 세계에서 1위, 자동차 사고율이 전 세계에서 1위, 암 사망률이 전 세계에서 1위, 여성 흡연율 세계 1위, 임신 낙태율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살률이 전 세계에서 1위입니다. 인구 10만 명 당 약 25명이 자살을 하고, 하루 평균 46명씩 자살을 하는 것으로 집계가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살을 부추기거나 자살할 사람을 찾는 인터넷사이트가 단속에도 불구하고 172개나 버젓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보니까 “자살 신드롬”이라는 말이 등장을 하고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TV에서 웬만한 자살 뉴스가 나와도 무관심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방예의지국으로 생명을 존중하던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어버렸는지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막다른 길에 다달았다고 생각을 하면 낙심을 하고 비관을 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목숨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그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끊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살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은 동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낙심”(落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기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낙심하고 절망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이게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눅18:1) 둘째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면 안 됩니다.(갈6:9) 셋째는, 신앙생활로 인하여 환난 당할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엡3:15) 어려운 시대에 믿음을 잘 지키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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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목사와 성도의 관계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목사와 성도는 서로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좋은 관계 맺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방황하게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때 양은 안전합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올바른 믿음의 길로 성도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보호할 때 성도와 관계가 좋아집니다. 성도는 목사의 말씀에 순종하면 행복해지며, 목사와 관계가 좋아집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좋아지면 삶이 행복하고 교회 생활이 즐겁습니다. 관계가 좋으면 말씀을 잘 듣게 됨으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관계가 깨어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넘어지게 되며, 믿음이 식어지게 됩니다. 목사와의 관계가 깨지면 교회를 떠나게 되고 교회생활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들게 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좋으면 신앙생활, 가정 교회생활이 행복합니다. 사탄 마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목사와 성도 사이를 이간시켜 관계를 깨트립니다. 지혜자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관계가 깨어졌다면 기도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양인 성도는 양으로 족해야 하며 목자인 목사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행복한 관계가 됩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말씀을 잘 준비 하여 영의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성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기도해주고, 포용해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목사를 귀히 여기고, 섬기고, 순종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목사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고, 목사의 허물을 덮어주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선교사와 파송교회와의 관계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파송하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 할 때 기도하고 신중하게 파송해야 합니다. 선교의 소명이 분명하고 신뢰가 되는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파송했으면 재정적 후원을 잘 해 주고 기도도 많이 해 주어야 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해준 교회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최선을 다해 선교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도 해야 합니다. 선교사는 진실해야 합니다. 선교사는 파송해준 교회와 담임목사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가 깨지면 도움 받기 힘들고 심지어 선교사 중단, 후원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선교사는 파송교회, 담임목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파송해준 교회와 담임목사, 선교부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재정 관리를 투명하게 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파송교회가 선교사들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선교사역을 잘 하도록 기도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파송해 준 교회와 담임목사, 선교부 몰래 파송교회 성도들과 은밀히 개인 접촉을 하여 금품을 요구하거나 재정 관계에 엮이지 않아야 합니다. 파송 교회 성도에게 무엇인가 무리하게 요구하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중에 파송교회가 알게 되면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심을 믿고 믿음으로 지혜 있게 선교해야 합니다. 파송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성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선교사는 인간관계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와 파송 교회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언제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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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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